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의 희망 청년운동가 정상용.이상문(월간경향, 1988. 4)
본문
새사람
光州의 희망 청년운동가 정상용
李 相 文 경향신문월간경향차장
광주 운동권 민주후보 추천
광주의 在野人士들은 대통령선거 이후 침체되었던 분위기를 벗어나 제13대 총선을 계기로 새로운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대통령선거 결과는 재야인사들에게 허탈감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부정선거를 이슈로 투쟁의 기치를 들었던 재야인사들은 야권 대통령후보 단일화실패라는 덫에 물려 주춤거리는 사이에 여권의 재빠른 유화조치들이 일반의 관심을 어느정도 모아가자,한동안 관망의 자세를 갖고 선거과정에서 분열된 조직을 재정비하고 있었다. 광주권 재야의 분위기도 대체로 서울을 비롯한 타지방의 재야와 크게 다를 바 없었으나 80%이상 특정후보에게 몰표를 던졌던 광주권의 분위기는 약간 달랐다. 80년 5월사태를 통해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남녀를 불문하고 거의 모두가 反정부적인 성향을 지닌 광주의 재야운동권은 대통령 선거직후 부정선거문제를 제기하였으나 새해들어 운동의 초점을 13대총선에 모아가고 있다. 광주지역 재야인사들은 지난 1월 10일 ‘광주민주후보추천위원회’(위원장 조아라)를 구성하고 십여차례의 회의를 통해 지난 3월5일 제13대 총선에 나설 광주지역 국회의원 후보로 4명을 추천, 발표하였다.
추천위원회는 발표문에서,
“인권이 보장되고 신뢰받는 사회, 즉 민주사회를 구현하고자 우리는 민주쟁취를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으나 현정권의 독재적 간계와 사회 전반에 걸쳐있는 독점적 기득권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좌절과 실망 속에 신음하고 있다. 그렇다고 허탈감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거니와 작금의 정치행태를 도저희 좌시할 수 없어, 제13대 총선에서는 주민자치의 기본원리를 적용시켜 광주시민의 민주적 기상을 펼치기 위해 광주민주후보추천위원회를 구성하여 활동해왔다”고 밝히고, 기존 정치인들의 이해관계에 급급한 태도를 비난하면서 후보추천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광주에서 선출할 국회의원은 명실공히 광주의 명예와 민주시민을 대표하여 의회활동을 투쟁적으로 전개할 인사를 선출해야 하고, 우리나라 정당제도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의 하향식 공천과정을 지양하고 지역민에 의한 추천과정과 선출형식을 확립함으로써 주민 자치의 기본적 순리를 회복시켜 한국헌정사에 획기적 분기점을 이루고자 하는 취지에서 광주민주후보추천위원회가 출범하였다”16명으로 구성된 상임추천위원들은 불교계 지선스님, 개신교 강신석목사, 천주교 남재희신부, 교육계 명노근교수, 법조계 김용채변호사, 어론계 박화강 해직기자, 5월유족회 전계량회장, 5월부상자회 이지현회장, 노동부문 이양현, 농민부문 나상기, 여성계 조아라ㆍ이소라, 청년권 김상윤, 사회운동단체 서명원 엠네스티광주총무, 문화계 문병란시인, 전남지역대학생협의회 김승남의장등이다. 비록 개인자격으로 참여하고 있으나 이들은 광주권 재야세력을 대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인터뷰는 어떻게 해야…”
추천위원회는 후보자의 기준으로 ①광주지역 민주ㆍ민중운동권 출신으로서 이 지역 민주화운동에 지속적으로 활동하였으며 청년운동권의 정치세력화에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5ㆍ18광주민중항쟁정신에 따라 대표성을 가질 만한 인사 ② 총선후에도 광주지역 민주ㆍ민중세력과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광주문제를 올바로 해결하기 위해 운동세력과 광주를 대변할 수 있는 인사를 합의ㆍ추천하되 개별적으로 특정정당과 관계를 가지고 공천작업을 진행하는 사람과 정당활동을 진행해온 사림은 제외시키기로 하고 2개월간의 長考 끝에 4사람을 선정,‘광주지역 대중정서에 맞는’평화민주당에 추천 통보 하였다. 추천위원회는 공천과 동시에 추천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黨과는 별도로 합동선거대책본부(가칭)를 설치하기로 했다. 일정지역의 인사들이 모여 공동으로 국회의원후보자를 선정한 것은 추천위원회의 지적처럼 우리 헌정사에서 초유의 일로 앞으로의 추이가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추천받은 4인중의 한사람이 鄭祥容이다.
그는 나머지 세사람(이기홍변호사ㆍ박석무전교사ㆍ정동년)에 비해 가장 연배가 낮지만 광주학생운동권을 발아시키고, 광주사태 당시 학생운동권 출신들을 중심으로 적극항쟁파를 조직, 도청을 사수하다 피체, 2년7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고, 이런 전력으로 해서 5ㆍ18이후 청년운동가로서 이 지역을 대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은 활동에 비해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오랫동안 그를 지켜보았다는 친구 曺一根씨(前『中央日報』기자)는“고난을 짊어지면서도 자신을 알리지 않고 자기를 내던진 희생적 운동자”라고 평하면서“그렇기 때문에 지역운동권에서 더 존경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광주사태 당시 줄곧함께 활동했던 또다른 친구 이양현씨(노동운동가)는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지않아 그와 함께 일하면 마음이 늘 편하다”면서“개인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지만 늘 밝고 낙천적인 성격이어서 그의 주위에는 늘 선ㆍ후배들이 모여든다”고 했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기자와 만난 정상용씨의 첫마디는“인터뷰는 어떻게 해야하느냐”였다. 수줍음을 띠며 멋적게 첫마디를 던져놓고는 어색했던지 곧“한번도 언론과 인터뷰를 해본 적이 없어서…”하며 말머리를 돌려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고등학교때부터, 본격적으로는 대학에 들어간 후부터 사회문제에 대해 여러 생각들을 하면서 혁명을 노래해왔고 그런 삶을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80년5월이라는 상황이 내 앞에 다가왔을 때 제가 생각하기에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오히려 더 소극적으러 대처, 많은 동지를 잃고 이렇게 살아 남았구나 하고 생각하니 부끄럽기 한이 없어요. 죄인같은 심정이지요. 그래서 그동안 수기를 써달라, 인터뷰를 하자는 데에 응할 수 없었지요.”
“자랑스럽게 생각할 날 올 것”
그렇던 그가 인터뷰 를 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려는 듯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간다.“수감중 한때 죽으려는 생각도 했었는데 그때 같이 옥생활을 하던 윤영규선생님에게서 깊은 김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던 상무대 영창생활을 의젓하고 당당하게 버티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분은 젊은 우리들에게‘앞으로 10년이 지나면 80년5월 광주에서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럽게 생각할 날이 올 것이다’하시면서 용기를 주셨지요. 그때는 그저 용기를 주기 위한 말이려니 하면서도 그 말에 일말의 희망의 빛이 느껴지더군요.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의 尹선생님이 하신 말씀에 예언자적인 의미가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죽은자들을 위해 살아있는 자들이 해야할 몫이 있다는 뜻도 들어있었으니까요.”―80년 5월 사태를 어떤 상황에서 만났습니까?“80년 봄에 민주화의 열기가 뜨거워지면서 이 시기에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주위의 동료들과 의논한 적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규하여 거리에 뛰쳐나왔을 때 일반시민들이 동참하은 상황이 오면 시위에 주도적으로 활동할 것이냐, 아니면 일개 시민으로서 참여할 것이냐가 논의의 중심이었지요.
그런데 이런 논의를 거쳤으면서도 80년 5월의 상황에서 처음부터 주도적ㆍ조직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광주항쟁을 생각하면서 지금까지도 이점을 가장 뼈아프게 반성하고 있습니다. 이후 그 원인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읍니다만 제 나름대로의 결론은 오랫동안 피해의식에 사로 잡혀 있었기 때문이란 것이었습니다. 유신독재를 거치면서 상황이 벌어지면 현장에서 빨리 피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몸에 배어 있었던 것이지요. 80년 5월 초반기에 대부분의 운동권 인사들도 마찬가지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5월18일 광주사태가 발생하면서 시내에는 온갖 믿을 수 없는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었다. 그 다음날 더욱 흉흉한 유언비어들이 돌고 있었다. 정상용은 당시 학생운동권 출신들의 집합처인 녹두서점에서 동료들과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다. 3일째에 접어들자 마침내 일반시민들의 손에도 총기가 들려지는 상황으로 전개되어 서점 앞에서까지 계엄군과 시민들의 격전이 벌어졌다.
이렇게 되자 녹두서점도 위험지역에 들게 되어 운동권출신들이 경영하던 보성기업으로 장소를 옮겨 계속 형세판단에 대한 논의를 계속했다. 상황은 계엄군과 시민들 사이에 격렬한 전면전으로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이들도 어떤 결론을 내러야만 했다. 시민들이 총기를 든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인원도 부족하고, 화력이 모자라니 계엄군에 이길 수는 없다는 점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비겁하지만 살아남아야 한다는 데 뜻을 모으고 각자 몸조심을 하자면서 헤어지기로 했다.
우선 개죽음은 피하자
동료들과 헤어진 정상용은 6㎞정도 떨어진 집으로 돌아왔다. 귀가길에서 격전의 상황을 보며 무언가 그의 마음은 불편했으나 집에 돌아와 보니 당시 이 지역에 노동운동의 씨를 뿌리던 친구 몇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노동운동 친구들은 정상용의 집 동네가 군인가족들이 모여 사는 상무대 지역이어서 안전지대로 판단, 피신차 와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의견도 지금 우리의 힘은 약하니 장기적인 전망을 갖고 대응해야 한다면서 상황을 관망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고 재촉했다. 낮에 군인가족들이 학생들을 비난하여 사소한 시비가 있었다면서 이곳도 안전지대는 아니라는 말이었다. 이들은 광주를 떠나기로 하였다. 이날밤 광주시를 벗어나 광산군의 과수원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여기에서 논의를 벌였으나 죽더라도 다시 돌아가자, 잠시 더 관망하고 앞으로의 행동을 결정하자, 자칫 잘못하면 개죽음을 당하니 일단 이 상황은 피하자는 3가지 의견으로 분분했다. 다음날(22일) 아침 일찍 친구 이양현의 집이 있는 成平으로 피신했다.
사건 5일째를 맞은 이날 광주시민들은 두 얼굴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계엄군이 시위군중의 공격에 못이겨 시외곽으로 퇴각한 데 대한 일종의‘승리감’으로 한편, 수많은 희생자를 낸데 대한‘분노’로 불타고 있었다. 이때 시민들은 시내를 완전히 장악하였으며 계엄군은 시외곽 7개지점에서 통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시민들과 계엄군은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대치,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시내를 장악한 시민들은 도청앞 광장과 중심지인 금남로에 모여들어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도청을 접수한 시위대는 1층 서무과에 작전상황실을 마련, 시민자치의 첫날을 열었다. 이날 12시 반경, 목사ㆍ신부ㆍ학생ㆍ관료ㆍ교사 등 시내유지급 인사 15명이 도청 서무과에 모여 수습을 위주로 한「시민대표수습대책위원회」(위원장 최한영)를 결성했다. 이들은 ‘사태수습 전에 군투입 말라, 연행자 석방, 군의 과잉진압 인정, 사후보복금지, 책임면제, 사망자 보상, 이상의 요구가 관철되면 무장해제’등 7개항의 요구사항을 채택하여 계엄군과의 협상을 시작함으로써 광주사태는 대결에서 협상의 단계로 넘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宮의 지원을 받는 시민대표수습대책위원회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계엄군이 시내에서 철수하면서 생긴 공백상황에서 위의 대책위원회와는 다른 2개의 단체가 구성되어 있었다. 홍남순ㆍ이기홍변호사, 송기숙ㆍ명노근교수, 김성용ㆍ조철현신부, 조아라ㆍ이애신여사 등 유신시대에 형성된 이 지역 재야인사들이 남동성당에 모여 사태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수습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이른바 남동성당파 수습대책위), 학생들은 전남대 김창길을 위원장, 조선대 김종배를 부위원장으로 학생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조직적인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었다. 22일 오후 2시경 시민대표수습대책위원회가 자신들이 주최한 시민대회에서 시민들에 의해 불신당하면서 남동성당파 수습대책위원회와 학생수습대책위원회는 본격적인 활동으로 표면에 떠오른다.
이양현의 함평집에 피신해 있던 정상용 등은 내부의 자세한 활동상황은 몰랐으나 라디오를 통해 계엄군 철수 사실을 알게 되었다. 피신한 동료들과 계속 논의를 했지만 여전히 의견은 분분했다. 정상용과 이양현은 더 이상 논의의 수준에만 머물 수 없다고 결심했다. 정상용ㆍ이양현ㆍ김성애 등 세사람은 광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차로 1시간 거리인 40㎞를 걷기로 하고 광주를 향해 아침일찍 나섰다. 군인을 피해 산을 넘으며 허겁지겁 피신하여 광주를 빠져나가는 시민들을 거슬러 광주시내에 그들이 들어선 시각은 오후 2시가 넘어서였다.
수습파 제거가 첫 과제
시내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녹두서점에 전화를 걸었다. 녹두서점에 일단의 운동권 출신들이 모여 있으니 빨리 오라는 화급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그들은 녹두서점으로 가 그동안의 상황을 듣고 향후대책을 논의했다. 그들은 우선 조직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판단, 각자의 업무를 분담, 활동을 함으로써 학생운동권출신들이 중심이 된 녹두서점 그룹이 광주시위의 중심에 파고 들기 시작했다. 이는 광주사태가 새로운 전환점에 들었섰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녹두서점그룹위 첫 과제는 도청내 시민수습대책위원회의 수습파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들 수습파는 일부 항쟁파의 의견을 배제하고 무기를 반납하지고 주장했는데 이들이 숫적으로 우세했다. 이때의 강경ㆍ수습파간의 쟁점은‘무기’처리문제였다. 당시 약5∼6천정의 무기가 시민들의 손에 들어와 있었다. 수습파는 더 이상 피를 흘려서는 안된다면서 무기를 회수, 계엄군에게 반납, 사태를 마무리짓자는 주장인데 비해 강경파는 계엄군은 믿을 수 없으니 무기를 들고 상황에 대처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도 그때 무기회수에 반대했습니다. 무기를 회수한다고 시민들이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을뿐더러 이미 세상을 떠난 넋들을 달래기 위해서도 그동안 우리가 염원해온 군사정권 종식, 민주정부 수립을 목표로 싸움에서 이길 때까지 끝까지 가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물론 당시 광주 시민들의 힘만으로 政局을 민주화의 방향으로 끌고 가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강경으로 나아간 것은 계엄군과의 대치상황이 지속되면 서울을 비롯한 타지방과 외국의 지원이 있으리란 기대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생각에서 녹두서점그룹은 도청내강경파를 지원하는 한편으로 학생운동권출신들을 규합해나갔다. 녹두서점그룹은 들불야학팀은 김영철을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출신들이 광천동 공장지대의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야학을 개설,그들의 의식화운동을 주도하다 5월사태를 맞아「투사회보」라는 신문을 발간, 시민들의 투쟁의지를 부추기는 활동을 하고 있던터였다. 이즈음 도청내 수습위원회와 계엄군사이에 연행자 석방을 전제로 계엄군에 무기를 반납하기로 합의하여 1백정 정도의 무기가 이미 계엄군의 손에 넘어갔다는 정보를 듣고 김영철ㆍ윤상원과 함께 그는 도청에 들어가 무기반납에 강력히 항의했다.
그러나 숫적으로 우세한 수습파는 오히려 이들을 항해‘저 사람들 이상하다. 빨갱이가 아니냐’며 몰아쳐 강경ㆍ수습파 사이의 대립이 무력충돌 직전 상황까지에 이르렀다. 시민들끼리의 충돌은 피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도청을 물러나온 그들은 투쟁적인 지도부가 도청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수습파와의 직접대결보다는 그들을 고립시키는 우회적인 전술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사태 7일째를 맞아 녹두서점그룹은 도청과 가까운 YWCA에 본부를 설치하고 시민궐기대회를 준비했다. 대회개최에 앞서 재야인사들이 주축인 남동성당내수습위원회와 학생수습위에 연락, 공동전선을 펴기로 하고, 이날 오후 3시「5ㆍ16등 화형식」을 도청앞에서 성공리에 마치고 이어 시가행진을 했다. 시민들은 미온적인 도청내 수습위보다는 녹두서점그룹등의 재야운동권에 더 많은 지지를 보여주었다. 시민들의 지지를 받은 이 행사를 기점으로 녹두서점그룹이 광주사태를 전면에서 주도하게 된다.
光州시민들 하나가 되어
“이때가 전 항쟁기간중 가장 감격적이었습니다. 기력없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물론 황금동 거리의 술집여자들도 누구보다 열심히 싸웠습니다. 이때 광주시민들은 모두가 私心을 버리고 모금을 하면 주머니를 털어냈습니다. 네것 내것이 없이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나가 되어 같이 먹고, 서로 돕고 의지하며 용기를 주었습니다. 이때 저는 이것이 바로 우리가 건설해야 할 공동체라고 믿었습니다. 이 공동체는 오직 하나, 불의를 보고 참을 수 없다는 한마음으로 한몸이 된 이상사회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민족적 저력이 있었기에 선각자들이 민족의 자주와 자존을 외쳐온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인간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으니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현대인들의 삶이 이기적이라 하지만 그것은 사회구조가 그런 인간성을 강요할 뿐 실제의 참모습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이후 나는 잠재되어 있는 공동체의식을 민족적 에너지로 활용하여 민족발전을 위해 어떻게 재생시키느냐라는 과제를 갖게 되었습니다.”시민들의 지지를 받고 한껏 고무되어 YWCA에 돌아온 녹두서점그룹은 이날의 행사에서의 미비점을 논의하고 보다 더 조직적이고 대규모적인 시민궐기대회를 추진하기 위해 시민궐기대회 추진위원회집행부를 구성하기로 하였다. 이들 중 핵심 멤버들은 보성기업 사무실로 자리를 옮겨 다음과 같은 행동방침을 결의했다.
1. 무조건 무기를 반납하는 것은 투항이며 사북사태에서와 같이 처벌을 받게 되므로 정부당국으로부터 처벌을 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받고 나서 무기반납을 하자.
2. 정부ㆍ군인ㆍ국민ㆍ광주시민ㆍ경상도민들에게 광주사태를 알리는 글을 작성하여 궐기대회시 발표한다.
3.적십자사를 통하여 전국적인 헌혈운동을 전개하고 생활필수품을 지원받도록 한다.
4. 재야인사와 학생들을 영입하여 집회와 시위를 주도하도록 한다.
25일 새벽 1시경 이들은 학생수습위원회의 기구를 개편하기로 결의,민주학생투쟁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동안 도청안에 머물고 있던 학생수습위 가운데 항전파들을 흡수ㆍ통합하여 김종배를 위원장으로 하는 새로운 조직을 구성, 도청내수습파들을 밀어냈다. 이때 정상용은 새조직의 외무부위원장을 맡아 재야인사와 운동권 출신들의 대화통로 역할을 맡았다. 민주학생투쟁위원회의 결성으로 광주사태는 ① 시위의 중심이 재수생ㆍ일부학생ㆍ단순근로자 등으로부터 학생운동권 그룹으로 옮겨갔으며 ② 그 성격도 투항주의에서 상황지속주의 내지는 항전주의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난 광주운동권을 처음으로 단일화시킨 이 위원회의 활동은 26일 하루뿐이었고, 27일 자정을 기해 진압작전에 나선 계엄군에 의해 이들 도청사수파가 전원 사살되거나 구속됨으로써 광주의 비극은 막을 내리게 된다.
‘아! 이제 죽는구나’
―마지막 날의 상황은 어떠했고,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그날 밤이 고비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계엄군과의 협상을 거부하자 최후통보가 왔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학생과 시민들은 모두 돌아가라고 했지요. 그래도 남은 사람이 5백명은 되더군요. 이 숫자로는 싸움이 안될테니,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동지들과 함께 여기서 죽자고 결의했지요. 희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날 밤만 무사히 넘긴다면 그동안 회수했던 무기로 재무장하여 새로운 전기를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자정을 기해 계엄군이 움직이고 있다는 정보가 곳곳에서 도청으로 들어와 그 희망도 잠시였습니다. 계엄군이 우리가 있던 도청을 완전히 포위하자 아, 이렇게 죽는데 그동안 잘 살아왔는가. 저들에게 지는 것이 恨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싸우다가 가니 큰 후회는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 상황에 막상 서니 초조하지 않고 의외로 담담해지더군요.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투항한 포로가 되어 그때 죽지 못하고 살아있는 것이 부끄럽습니다.”이후 그는 상무대로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으며 조사를 받았다. 이때 자신은‘인간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80년 9월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에 있다 82년 11월 이감된 목포교도소에서 이해 12월24일 크리스마스 특사로 출소했다.“2년 7개월간의 수감기간은 개인적으로는 아주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할 일이 없으니 자연히 책을 가까이 하게 되고 덕택에 체계적으로 사회현상을 정리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내 나름대로 얻은 결론은 사회체제는 경제적 현상이 근간이 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사회체제로 나아가기 위해서 그 뿌리인 경제적 현상의 변화가 필연적으로 따른다는 것이었지요.
그러다 보니 사회체제가 변화된 나라들의 과정을 눈여겨 보게 되고 그러한 변혁의 주체는 역시 사람이라는데 귀결되더군요. 그런 혁명기를 살았던 사람들의 체험기를 읽으면서 나는 얼마나 허술하게 살고 있는가, 왜 철저하고 치열하게 살지 않았는가 하는 반성을 많이 하게 되었읍니다.”―우리 사회현실에 대해서는 어떤생각을 갖고 있습니까?“우리의 현실상황도 분명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변혁의 방향에 대해 철저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것에 저는 회의적입니다만 단지 외세의 영향을 탈피, 민족주의적 자존심을 회복하는 방향으로의 변혁은 와야 합니다. 그 방법에 있어서도 우리 민족현실에 맞도록 해야 한다고 봅니다. 러시아ㆍ중국ㆍ이란 혁명의 과정을 보면 똑같은 방식의 혁명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처한 상황을 해결해 나가는 독특한 방법이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러면서 그는 다시 외세의 극복이 우리 사회의 현단계 과제라면서 강대국과 약소국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한다.“강대국과 약소국과의 관계는 엄청난 이해관계에 의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강대국은 자신의 이익을 최대한도로 얻는데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미국과의 유착 관계를 좀 냉정하게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특히 다국적 기업에 대해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습니다. 국내에 진출한 그들 기업이 자신의 나라로 송금한 액수를 보면 재주는 곰이 피고 돈은 누가 거둔다는 속말을 연상케합니다. 독재권력은 어떻든 무너뜨릴 수 있으나 다국적기업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 기업의 횡포를 해결해내는 것도 올바른 민주화의 과제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레지오高 똥물사건’으로 제적
정상용의 사회운동은 고등학교때부터 시작되었다. 고향 함평에서 私設우체국장을 지낸 아버지 밑에서 3남5녀중 장남으로 비교적 유복한 과정에서 성장한 그는 천주교재단인 광주사레지오고등학교에 진학하던 해 재단분규로 발생한 사건에 적극 가담하게 된다.‘사레지오고 똥물사건’으로 널리 알려진 이 사건의 발단은 학교설립자인 이태리인 신부가 한국인 교사와 학생들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한데서 비롯되었다.‘외국신부 배척’을 이슈로 5개월간 수업을 전폐하며 데모하다가 외국신부들에게 똥물을 퍼붓는 데까지로 발전되었다. 이 사건으로 1학년대표로 활동하던 그는 끝내 제적을 당하고 비록 학교에서 쫓겨났지만 민족의식에 눈뜨게 되었다.
고향인 成平으로 돌아간 그는 再修를 결심, 이듬해 光州一高에 진학함으로써 그의 민족주의적 성향이 한층더 개화될 자양분을 얻었다. 광주학생사건으로 식민지적 상황에 저항해온 一高生들의 민족의식은 해방 이후에도 학교의 상징적유산으로 남아 있었고, 이 정신은 ‘光郎’이란 모임을 통해 조직적으로 계승되고 있었다. 光郎이란 독서회는 농촌문제를 통해서 한국현실을 공부하는 서클이었다. 정상용도 이 서클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이 서클을 통해 사례지오경험을 이론적으로 이해할 서적들을 접하게 된다. 이 서클에서 지정한 사회과학서적을 이해하기에는 정신적 연령이 아직 이른감이 없지 않았으나 이 시기의 독서는 사례지오경험으로 체득된 민족주의적 의식의 불길을 계속 지펴주었다. 뿐만 아니라 이독서회활동을 통해 그의 모든 가치관이 바뀌어져 버렸다. 광주일고에 진학하면서 법관이나 의사가 되겠다던 꿈을 포기하고 이 사회에 살면서 자신이 해야할 다른 몫이 있다고 판단, 진로를 바꾸기로 했다. 인간의 삶은 지위나 명예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얼마나 기여했느냐가 중요하다고 깨닫게 된 것이다.
전남대 최초의 운동서클 조직
그가 전남대법대에 진학한 것은 71년이었다. 학내에 사회과학서클이 없어 그는 김희택(民靑聯의장)ㆍ이양현 등과 함께 민족사회연구회(民社硏)를 조직했다. 민족사회연구회는 전남대 최초의 사회과학연구모임이자 학생운동권의 중심이 되어 이후 80년 5월에 적극항쟁파의 근간이 되기도 한다. 이 시기에 朴정권은 서서히 장기집권의 구상을 예비하고 있었으며,도전세력 가운데 가장 겁없이 굴어 눈에 가시와 같은 장애집단이었던 대학에 족쇄를 채우고 있었다. 大學敎鍊도 그 족쇄의 하나라고 생각했던 그는 民社硏이 중심이 된 교련반대시위에 자연스레 참여하였고, 1학년임에도 불구하고 상급생들과 함께 주도세력의 한사람으로 부각되었다. 그러나 그 댓가로 돌아온 것은 무기정학처분이었고, 그는 댜시 학교를 떠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72년 유신시대의 초반기를 그는 군대생활로 보냈다. 3년 후 얼룩무늬의 예비군복을 입고 다시 캠퍼스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가 서고자 했던 운동권은 전쟁터로 말하자면 이미 초토화되어 있었다. 유신을 지탱한 긴급조치에 의해‘民靑學聯’사건이 발생, 거의 모든 운동권 학생들이 체포ㆍ구속되었거나 군에 강제 징집되는 수난을 겪은 후였다. 민청학련사건으로 전남대는 서울대 다음으로 가장 많은 학생들이 피해를 입었었다. 그는 대학이 마치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겨울공화국처럼 느껴졌다. 민사연을 재건, 운동권을 규합하려 하였으나 교실을 빌리기조차 어려울만큼 학내운동은 깊은 수렁 속에 빠져 있었다. 그는‘내가 여기에서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궁리하다가‘과연 이런 상황에서 대학생활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를 자문하여 보았으나 뚜렷한 해답이 얻어지지 않자 학내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학내운동의 차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결심, 몇 명의 동료들과 함께 그는‘革命’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채 영원히 대학을 뒤로 하고 교문을 나와 버렸다. 6,70년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시인 김수영은 革命을 주제로 시 「그 방을 생각하며」를 썼다.
革命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헛소리차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나는 모든 노래를 그방에 함께 남기고 왔을 게다 그렇듯 이제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메말랐다 그방의 벽은 나의 가슴이고 나의 四肢일까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이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그 노래도 그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外勢극복 민족자존의 시대로
4·19직후에 씌어진 김수영의 이 시처럼 당대 지식인들이 떠올렸던 주제의 하나인‘革命’은 현실에서 구체성을 얻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던 이데아였다. 그로부터 10여년이 흐르면서 그 이데아는 서서히 민중의 바다를 향해 흘러갔다. 정상용이 운동적 푯대로 삼은 혁명의 흐름은 바로 이즈음에 와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진다면 이 시기에 그가 떠올린 ‘혁명’은 다분히 감성적인 면에 치우친 낭만적인 가치였을 뿐이었다. 그는 혁명이 민중과의 결합에서 얻어진다고 생각했지만 학교에서 뛰쳐나와 만나본 민중들은 그저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하루살이같은 존재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에게 무언자 할 일이 있을텐데 그 일이 잡히지 않아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할 일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불만이 팽배한 상황에서 그는 80년 5월 광주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80년 5월의 비극적 사건을 겪고 광주의 재야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됐다. 84년 들어 정국이 유화국면에 접어들자 광주에서도 5월광주의 정신을 계승하는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일기 시작했다. 80년 5월속에서 자신의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 그는 아직은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어려움이 있었지만 홍남순변호사 등과 함께 80년 5월이후 최초의 공개조직인 ‘광주의거구속자협의회’를 조직했다. 이와는 별도로 그해 늦가을 청년들이 중심이 된 전남민주청년운동협의회를 결성하고, 초대의장직을 맡은 그는 다음날 국민·종교·5월단체 등 각 부문별 청년운동권을 규합, 전남사회운동협의회(현 전남민주주의
청년연합)를 구성하는 등 조직운동의 확산에 전력하였다. 이들 조직은 광주사태의 진상을 조사·규명하고 사진전시회, 비디오 테이프 제작, 책자판매를 통해 5월광주의 정신을 기록하고 홍보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이런 중에서 그는 광주사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황석영편) 출판과 관련, 한때 구류당하기도 했고, 5·3인천사태와 관련, 투옥되는 고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지금도 그는 ‘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회장과 전국학생운동출신들의 모임인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사회운동’의 공동의장을 맡고 있다.
“80년 5월에 죽은 저는 그 사건을 통해 이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죽은 사람들의 혼과 함께 이땅위에 살며서 5월광주의 정신을 깎아내리기 위해 광주라는 지역적 특성을 거론하여 호남푸대접 운운하지만 그것은 지역적인 문제일 뿐입니다. 釜馬사건과 6월평화대행진에서 나타난 것처럼 광주항쟁의 참정신은 이 나라 모든 국민들이 염원하고 있는 진정한 민주화를 위한 大義에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민족의 自主와 自尊을 지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를 위해 연구하고 실천해가는 삶이 바로 5월광주의 정신을 기리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
光州의 희망 청년운동가 정상용
李 相 文 경향신문월간경향차장
광주 운동권 민주후보 추천
광주의 在野人士들은 대통령선거 이후 침체되었던 분위기를 벗어나 제13대 총선을 계기로 새로운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대통령선거 결과는 재야인사들에게 허탈감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부정선거를 이슈로 투쟁의 기치를 들었던 재야인사들은 야권 대통령후보 단일화실패라는 덫에 물려 주춤거리는 사이에 여권의 재빠른 유화조치들이 일반의 관심을 어느정도 모아가자,한동안 관망의 자세를 갖고 선거과정에서 분열된 조직을 재정비하고 있었다. 광주권 재야의 분위기도 대체로 서울을 비롯한 타지방의 재야와 크게 다를 바 없었으나 80%이상 특정후보에게 몰표를 던졌던 광주권의 분위기는 약간 달랐다. 80년 5월사태를 통해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남녀를 불문하고 거의 모두가 反정부적인 성향을 지닌 광주의 재야운동권은 대통령 선거직후 부정선거문제를 제기하였으나 새해들어 운동의 초점을 13대총선에 모아가고 있다. 광주지역 재야인사들은 지난 1월 10일 ‘광주민주후보추천위원회’(위원장 조아라)를 구성하고 십여차례의 회의를 통해 지난 3월5일 제13대 총선에 나설 광주지역 국회의원 후보로 4명을 추천, 발표하였다.
추천위원회는 발표문에서,
“인권이 보장되고 신뢰받는 사회, 즉 민주사회를 구현하고자 우리는 민주쟁취를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으나 현정권의 독재적 간계와 사회 전반에 걸쳐있는 독점적 기득권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좌절과 실망 속에 신음하고 있다. 그렇다고 허탈감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거니와 작금의 정치행태를 도저희 좌시할 수 없어, 제13대 총선에서는 주민자치의 기본원리를 적용시켜 광주시민의 민주적 기상을 펼치기 위해 광주민주후보추천위원회를 구성하여 활동해왔다”고 밝히고, 기존 정치인들의 이해관계에 급급한 태도를 비난하면서 후보추천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광주에서 선출할 국회의원은 명실공히 광주의 명예와 민주시민을 대표하여 의회활동을 투쟁적으로 전개할 인사를 선출해야 하고, 우리나라 정당제도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의 하향식 공천과정을 지양하고 지역민에 의한 추천과정과 선출형식을 확립함으로써 주민 자치의 기본적 순리를 회복시켜 한국헌정사에 획기적 분기점을 이루고자 하는 취지에서 광주민주후보추천위원회가 출범하였다”16명으로 구성된 상임추천위원들은 불교계 지선스님, 개신교 강신석목사, 천주교 남재희신부, 교육계 명노근교수, 법조계 김용채변호사, 어론계 박화강 해직기자, 5월유족회 전계량회장, 5월부상자회 이지현회장, 노동부문 이양현, 농민부문 나상기, 여성계 조아라ㆍ이소라, 청년권 김상윤, 사회운동단체 서명원 엠네스티광주총무, 문화계 문병란시인, 전남지역대학생협의회 김승남의장등이다. 비록 개인자격으로 참여하고 있으나 이들은 광주권 재야세력을 대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인터뷰는 어떻게 해야…”
추천위원회는 후보자의 기준으로 ①광주지역 민주ㆍ민중운동권 출신으로서 이 지역 민주화운동에 지속적으로 활동하였으며 청년운동권의 정치세력화에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5ㆍ18광주민중항쟁정신에 따라 대표성을 가질 만한 인사 ② 총선후에도 광주지역 민주ㆍ민중세력과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광주문제를 올바로 해결하기 위해 운동세력과 광주를 대변할 수 있는 인사를 합의ㆍ추천하되 개별적으로 특정정당과 관계를 가지고 공천작업을 진행하는 사람과 정당활동을 진행해온 사림은 제외시키기로 하고 2개월간의 長考 끝에 4사람을 선정,‘광주지역 대중정서에 맞는’평화민주당에 추천 통보 하였다. 추천위원회는 공천과 동시에 추천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黨과는 별도로 합동선거대책본부(가칭)를 설치하기로 했다. 일정지역의 인사들이 모여 공동으로 국회의원후보자를 선정한 것은 추천위원회의 지적처럼 우리 헌정사에서 초유의 일로 앞으로의 추이가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추천받은 4인중의 한사람이 鄭祥容이다.
그는 나머지 세사람(이기홍변호사ㆍ박석무전교사ㆍ정동년)에 비해 가장 연배가 낮지만 광주학생운동권을 발아시키고, 광주사태 당시 학생운동권 출신들을 중심으로 적극항쟁파를 조직, 도청을 사수하다 피체, 2년7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고, 이런 전력으로 해서 5ㆍ18이후 청년운동가로서 이 지역을 대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은 활동에 비해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오랫동안 그를 지켜보았다는 친구 曺一根씨(前『中央日報』기자)는“고난을 짊어지면서도 자신을 알리지 않고 자기를 내던진 희생적 운동자”라고 평하면서“그렇기 때문에 지역운동권에서 더 존경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광주사태 당시 줄곧함께 활동했던 또다른 친구 이양현씨(노동운동가)는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지않아 그와 함께 일하면 마음이 늘 편하다”면서“개인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지만 늘 밝고 낙천적인 성격이어서 그의 주위에는 늘 선ㆍ후배들이 모여든다”고 했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기자와 만난 정상용씨의 첫마디는“인터뷰는 어떻게 해야하느냐”였다. 수줍음을 띠며 멋적게 첫마디를 던져놓고는 어색했던지 곧“한번도 언론과 인터뷰를 해본 적이 없어서…”하며 말머리를 돌려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고등학교때부터, 본격적으로는 대학에 들어간 후부터 사회문제에 대해 여러 생각들을 하면서 혁명을 노래해왔고 그런 삶을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80년5월이라는 상황이 내 앞에 다가왔을 때 제가 생각하기에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오히려 더 소극적으러 대처, 많은 동지를 잃고 이렇게 살아 남았구나 하고 생각하니 부끄럽기 한이 없어요. 죄인같은 심정이지요. 그래서 그동안 수기를 써달라, 인터뷰를 하자는 데에 응할 수 없었지요.”
“자랑스럽게 생각할 날 올 것”
그렇던 그가 인터뷰 를 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려는 듯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간다.“수감중 한때 죽으려는 생각도 했었는데 그때 같이 옥생활을 하던 윤영규선생님에게서 깊은 김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던 상무대 영창생활을 의젓하고 당당하게 버티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분은 젊은 우리들에게‘앞으로 10년이 지나면 80년5월 광주에서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럽게 생각할 날이 올 것이다’하시면서 용기를 주셨지요. 그때는 그저 용기를 주기 위한 말이려니 하면서도 그 말에 일말의 희망의 빛이 느껴지더군요.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의 尹선생님이 하신 말씀에 예언자적인 의미가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죽은자들을 위해 살아있는 자들이 해야할 몫이 있다는 뜻도 들어있었으니까요.”―80년 5월 사태를 어떤 상황에서 만났습니까?“80년 봄에 민주화의 열기가 뜨거워지면서 이 시기에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주위의 동료들과 의논한 적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규하여 거리에 뛰쳐나왔을 때 일반시민들이 동참하은 상황이 오면 시위에 주도적으로 활동할 것이냐, 아니면 일개 시민으로서 참여할 것이냐가 논의의 중심이었지요.
그런데 이런 논의를 거쳤으면서도 80년 5월의 상황에서 처음부터 주도적ㆍ조직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광주항쟁을 생각하면서 지금까지도 이점을 가장 뼈아프게 반성하고 있습니다. 이후 그 원인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읍니다만 제 나름대로의 결론은 오랫동안 피해의식에 사로 잡혀 있었기 때문이란 것이었습니다. 유신독재를 거치면서 상황이 벌어지면 현장에서 빨리 피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몸에 배어 있었던 것이지요. 80년 5월 초반기에 대부분의 운동권 인사들도 마찬가지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5월18일 광주사태가 발생하면서 시내에는 온갖 믿을 수 없는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었다. 그 다음날 더욱 흉흉한 유언비어들이 돌고 있었다. 정상용은 당시 학생운동권 출신들의 집합처인 녹두서점에서 동료들과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다. 3일째에 접어들자 마침내 일반시민들의 손에도 총기가 들려지는 상황으로 전개되어 서점 앞에서까지 계엄군과 시민들의 격전이 벌어졌다.
이렇게 되자 녹두서점도 위험지역에 들게 되어 운동권출신들이 경영하던 보성기업으로 장소를 옮겨 계속 형세판단에 대한 논의를 계속했다. 상황은 계엄군과 시민들 사이에 격렬한 전면전으로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이들도 어떤 결론을 내러야만 했다. 시민들이 총기를 든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인원도 부족하고, 화력이 모자라니 계엄군에 이길 수는 없다는 점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비겁하지만 살아남아야 한다는 데 뜻을 모으고 각자 몸조심을 하자면서 헤어지기로 했다.
우선 개죽음은 피하자
동료들과 헤어진 정상용은 6㎞정도 떨어진 집으로 돌아왔다. 귀가길에서 격전의 상황을 보며 무언가 그의 마음은 불편했으나 집에 돌아와 보니 당시 이 지역에 노동운동의 씨를 뿌리던 친구 몇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노동운동 친구들은 정상용의 집 동네가 군인가족들이 모여 사는 상무대 지역이어서 안전지대로 판단, 피신차 와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의견도 지금 우리의 힘은 약하니 장기적인 전망을 갖고 대응해야 한다면서 상황을 관망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고 재촉했다. 낮에 군인가족들이 학생들을 비난하여 사소한 시비가 있었다면서 이곳도 안전지대는 아니라는 말이었다. 이들은 광주를 떠나기로 하였다. 이날밤 광주시를 벗어나 광산군의 과수원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여기에서 논의를 벌였으나 죽더라도 다시 돌아가자, 잠시 더 관망하고 앞으로의 행동을 결정하자, 자칫 잘못하면 개죽음을 당하니 일단 이 상황은 피하자는 3가지 의견으로 분분했다. 다음날(22일) 아침 일찍 친구 이양현의 집이 있는 成平으로 피신했다.
사건 5일째를 맞은 이날 광주시민들은 두 얼굴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계엄군이 시위군중의 공격에 못이겨 시외곽으로 퇴각한 데 대한 일종의‘승리감’으로 한편, 수많은 희생자를 낸데 대한‘분노’로 불타고 있었다. 이때 시민들은 시내를 완전히 장악하였으며 계엄군은 시외곽 7개지점에서 통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시민들과 계엄군은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대치,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시내를 장악한 시민들은 도청앞 광장과 중심지인 금남로에 모여들어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도청을 접수한 시위대는 1층 서무과에 작전상황실을 마련, 시민자치의 첫날을 열었다. 이날 12시 반경, 목사ㆍ신부ㆍ학생ㆍ관료ㆍ교사 등 시내유지급 인사 15명이 도청 서무과에 모여 수습을 위주로 한「시민대표수습대책위원회」(위원장 최한영)를 결성했다. 이들은 ‘사태수습 전에 군투입 말라, 연행자 석방, 군의 과잉진압 인정, 사후보복금지, 책임면제, 사망자 보상, 이상의 요구가 관철되면 무장해제’등 7개항의 요구사항을 채택하여 계엄군과의 협상을 시작함으로써 광주사태는 대결에서 협상의 단계로 넘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宮의 지원을 받는 시민대표수습대책위원회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계엄군이 시내에서 철수하면서 생긴 공백상황에서 위의 대책위원회와는 다른 2개의 단체가 구성되어 있었다. 홍남순ㆍ이기홍변호사, 송기숙ㆍ명노근교수, 김성용ㆍ조철현신부, 조아라ㆍ이애신여사 등 유신시대에 형성된 이 지역 재야인사들이 남동성당에 모여 사태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수습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이른바 남동성당파 수습대책위), 학생들은 전남대 김창길을 위원장, 조선대 김종배를 부위원장으로 학생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조직적인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었다. 22일 오후 2시경 시민대표수습대책위원회가 자신들이 주최한 시민대회에서 시민들에 의해 불신당하면서 남동성당파 수습대책위원회와 학생수습대책위원회는 본격적인 활동으로 표면에 떠오른다.
이양현의 함평집에 피신해 있던 정상용 등은 내부의 자세한 활동상황은 몰랐으나 라디오를 통해 계엄군 철수 사실을 알게 되었다. 피신한 동료들과 계속 논의를 했지만 여전히 의견은 분분했다. 정상용과 이양현은 더 이상 논의의 수준에만 머물 수 없다고 결심했다. 정상용ㆍ이양현ㆍ김성애 등 세사람은 광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차로 1시간 거리인 40㎞를 걷기로 하고 광주를 향해 아침일찍 나섰다. 군인을 피해 산을 넘으며 허겁지겁 피신하여 광주를 빠져나가는 시민들을 거슬러 광주시내에 그들이 들어선 시각은 오후 2시가 넘어서였다.
수습파 제거가 첫 과제
시내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녹두서점에 전화를 걸었다. 녹두서점에 일단의 운동권 출신들이 모여 있으니 빨리 오라는 화급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그들은 녹두서점으로 가 그동안의 상황을 듣고 향후대책을 논의했다. 그들은 우선 조직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판단, 각자의 업무를 분담, 활동을 함으로써 학생운동권출신들이 중심이 된 녹두서점 그룹이 광주시위의 중심에 파고 들기 시작했다. 이는 광주사태가 새로운 전환점에 들었섰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녹두서점그룹위 첫 과제는 도청내 시민수습대책위원회의 수습파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들 수습파는 일부 항쟁파의 의견을 배제하고 무기를 반납하지고 주장했는데 이들이 숫적으로 우세했다. 이때의 강경ㆍ수습파간의 쟁점은‘무기’처리문제였다. 당시 약5∼6천정의 무기가 시민들의 손에 들어와 있었다. 수습파는 더 이상 피를 흘려서는 안된다면서 무기를 회수, 계엄군에게 반납, 사태를 마무리짓자는 주장인데 비해 강경파는 계엄군은 믿을 수 없으니 무기를 들고 상황에 대처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도 그때 무기회수에 반대했습니다. 무기를 회수한다고 시민들이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을뿐더러 이미 세상을 떠난 넋들을 달래기 위해서도 그동안 우리가 염원해온 군사정권 종식, 민주정부 수립을 목표로 싸움에서 이길 때까지 끝까지 가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물론 당시 광주 시민들의 힘만으로 政局을 민주화의 방향으로 끌고 가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강경으로 나아간 것은 계엄군과의 대치상황이 지속되면 서울을 비롯한 타지방과 외국의 지원이 있으리란 기대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생각에서 녹두서점그룹은 도청내강경파를 지원하는 한편으로 학생운동권출신들을 규합해나갔다. 녹두서점그룹은 들불야학팀은 김영철을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출신들이 광천동 공장지대의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야학을 개설,그들의 의식화운동을 주도하다 5월사태를 맞아「투사회보」라는 신문을 발간, 시민들의 투쟁의지를 부추기는 활동을 하고 있던터였다. 이즈음 도청내 수습위원회와 계엄군사이에 연행자 석방을 전제로 계엄군에 무기를 반납하기로 합의하여 1백정 정도의 무기가 이미 계엄군의 손에 넘어갔다는 정보를 듣고 김영철ㆍ윤상원과 함께 그는 도청에 들어가 무기반납에 강력히 항의했다.
그러나 숫적으로 우세한 수습파는 오히려 이들을 항해‘저 사람들 이상하다. 빨갱이가 아니냐’며 몰아쳐 강경ㆍ수습파 사이의 대립이 무력충돌 직전 상황까지에 이르렀다. 시민들끼리의 충돌은 피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도청을 물러나온 그들은 투쟁적인 지도부가 도청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수습파와의 직접대결보다는 그들을 고립시키는 우회적인 전술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사태 7일째를 맞아 녹두서점그룹은 도청과 가까운 YWCA에 본부를 설치하고 시민궐기대회를 준비했다. 대회개최에 앞서 재야인사들이 주축인 남동성당내수습위원회와 학생수습위에 연락, 공동전선을 펴기로 하고, 이날 오후 3시「5ㆍ16등 화형식」을 도청앞에서 성공리에 마치고 이어 시가행진을 했다. 시민들은 미온적인 도청내 수습위보다는 녹두서점그룹등의 재야운동권에 더 많은 지지를 보여주었다. 시민들의 지지를 받은 이 행사를 기점으로 녹두서점그룹이 광주사태를 전면에서 주도하게 된다.
光州시민들 하나가 되어
“이때가 전 항쟁기간중 가장 감격적이었습니다. 기력없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물론 황금동 거리의 술집여자들도 누구보다 열심히 싸웠습니다. 이때 광주시민들은 모두가 私心을 버리고 모금을 하면 주머니를 털어냈습니다. 네것 내것이 없이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나가 되어 같이 먹고, 서로 돕고 의지하며 용기를 주었습니다. 이때 저는 이것이 바로 우리가 건설해야 할 공동체라고 믿었습니다. 이 공동체는 오직 하나, 불의를 보고 참을 수 없다는 한마음으로 한몸이 된 이상사회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민족적 저력이 있었기에 선각자들이 민족의 자주와 자존을 외쳐온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인간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으니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현대인들의 삶이 이기적이라 하지만 그것은 사회구조가 그런 인간성을 강요할 뿐 실제의 참모습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이후 나는 잠재되어 있는 공동체의식을 민족적 에너지로 활용하여 민족발전을 위해 어떻게 재생시키느냐라는 과제를 갖게 되었습니다.”시민들의 지지를 받고 한껏 고무되어 YWCA에 돌아온 녹두서점그룹은 이날의 행사에서의 미비점을 논의하고 보다 더 조직적이고 대규모적인 시민궐기대회를 추진하기 위해 시민궐기대회 추진위원회집행부를 구성하기로 하였다. 이들 중 핵심 멤버들은 보성기업 사무실로 자리를 옮겨 다음과 같은 행동방침을 결의했다.
1. 무조건 무기를 반납하는 것은 투항이며 사북사태에서와 같이 처벌을 받게 되므로 정부당국으로부터 처벌을 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받고 나서 무기반납을 하자.
2. 정부ㆍ군인ㆍ국민ㆍ광주시민ㆍ경상도민들에게 광주사태를 알리는 글을 작성하여 궐기대회시 발표한다.
3.적십자사를 통하여 전국적인 헌혈운동을 전개하고 생활필수품을 지원받도록 한다.
4. 재야인사와 학생들을 영입하여 집회와 시위를 주도하도록 한다.
25일 새벽 1시경 이들은 학생수습위원회의 기구를 개편하기로 결의,민주학생투쟁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동안 도청안에 머물고 있던 학생수습위 가운데 항전파들을 흡수ㆍ통합하여 김종배를 위원장으로 하는 새로운 조직을 구성, 도청내수습파들을 밀어냈다. 이때 정상용은 새조직의 외무부위원장을 맡아 재야인사와 운동권 출신들의 대화통로 역할을 맡았다. 민주학생투쟁위원회의 결성으로 광주사태는 ① 시위의 중심이 재수생ㆍ일부학생ㆍ단순근로자 등으로부터 학생운동권 그룹으로 옮겨갔으며 ② 그 성격도 투항주의에서 상황지속주의 내지는 항전주의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난 광주운동권을 처음으로 단일화시킨 이 위원회의 활동은 26일 하루뿐이었고, 27일 자정을 기해 진압작전에 나선 계엄군에 의해 이들 도청사수파가 전원 사살되거나 구속됨으로써 광주의 비극은 막을 내리게 된다.
‘아! 이제 죽는구나’
―마지막 날의 상황은 어떠했고,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그날 밤이 고비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계엄군과의 협상을 거부하자 최후통보가 왔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학생과 시민들은 모두 돌아가라고 했지요. 그래도 남은 사람이 5백명은 되더군요. 이 숫자로는 싸움이 안될테니,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동지들과 함께 여기서 죽자고 결의했지요. 희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날 밤만 무사히 넘긴다면 그동안 회수했던 무기로 재무장하여 새로운 전기를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자정을 기해 계엄군이 움직이고 있다는 정보가 곳곳에서 도청으로 들어와 그 희망도 잠시였습니다. 계엄군이 우리가 있던 도청을 완전히 포위하자 아, 이렇게 죽는데 그동안 잘 살아왔는가. 저들에게 지는 것이 恨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싸우다가 가니 큰 후회는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 상황에 막상 서니 초조하지 않고 의외로 담담해지더군요.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투항한 포로가 되어 그때 죽지 못하고 살아있는 것이 부끄럽습니다.”이후 그는 상무대로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으며 조사를 받았다. 이때 자신은‘인간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80년 9월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에 있다 82년 11월 이감된 목포교도소에서 이해 12월24일 크리스마스 특사로 출소했다.“2년 7개월간의 수감기간은 개인적으로는 아주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할 일이 없으니 자연히 책을 가까이 하게 되고 덕택에 체계적으로 사회현상을 정리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내 나름대로 얻은 결론은 사회체제는 경제적 현상이 근간이 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사회체제로 나아가기 위해서 그 뿌리인 경제적 현상의 변화가 필연적으로 따른다는 것이었지요.
그러다 보니 사회체제가 변화된 나라들의 과정을 눈여겨 보게 되고 그러한 변혁의 주체는 역시 사람이라는데 귀결되더군요. 그런 혁명기를 살았던 사람들의 체험기를 읽으면서 나는 얼마나 허술하게 살고 있는가, 왜 철저하고 치열하게 살지 않았는가 하는 반성을 많이 하게 되었읍니다.”―우리 사회현실에 대해서는 어떤생각을 갖고 있습니까?“우리의 현실상황도 분명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변혁의 방향에 대해 철저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것에 저는 회의적입니다만 단지 외세의 영향을 탈피, 민족주의적 자존심을 회복하는 방향으로의 변혁은 와야 합니다. 그 방법에 있어서도 우리 민족현실에 맞도록 해야 한다고 봅니다. 러시아ㆍ중국ㆍ이란 혁명의 과정을 보면 똑같은 방식의 혁명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처한 상황을 해결해 나가는 독특한 방법이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러면서 그는 다시 외세의 극복이 우리 사회의 현단계 과제라면서 강대국과 약소국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한다.“강대국과 약소국과의 관계는 엄청난 이해관계에 의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강대국은 자신의 이익을 최대한도로 얻는데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미국과의 유착 관계를 좀 냉정하게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특히 다국적 기업에 대해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습니다. 국내에 진출한 그들 기업이 자신의 나라로 송금한 액수를 보면 재주는 곰이 피고 돈은 누가 거둔다는 속말을 연상케합니다. 독재권력은 어떻든 무너뜨릴 수 있으나 다국적기업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 기업의 횡포를 해결해내는 것도 올바른 민주화의 과제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레지오高 똥물사건’으로 제적
정상용의 사회운동은 고등학교때부터 시작되었다. 고향 함평에서 私設우체국장을 지낸 아버지 밑에서 3남5녀중 장남으로 비교적 유복한 과정에서 성장한 그는 천주교재단인 광주사레지오고등학교에 진학하던 해 재단분규로 발생한 사건에 적극 가담하게 된다.‘사레지오고 똥물사건’으로 널리 알려진 이 사건의 발단은 학교설립자인 이태리인 신부가 한국인 교사와 학생들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한데서 비롯되었다.‘외국신부 배척’을 이슈로 5개월간 수업을 전폐하며 데모하다가 외국신부들에게 똥물을 퍼붓는 데까지로 발전되었다. 이 사건으로 1학년대표로 활동하던 그는 끝내 제적을 당하고 비록 학교에서 쫓겨났지만 민족의식에 눈뜨게 되었다.
고향인 成平으로 돌아간 그는 再修를 결심, 이듬해 光州一高에 진학함으로써 그의 민족주의적 성향이 한층더 개화될 자양분을 얻었다. 광주학생사건으로 식민지적 상황에 저항해온 一高生들의 민족의식은 해방 이후에도 학교의 상징적유산으로 남아 있었고, 이 정신은 ‘光郎’이란 모임을 통해 조직적으로 계승되고 있었다. 光郎이란 독서회는 농촌문제를 통해서 한국현실을 공부하는 서클이었다. 정상용도 이 서클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이 서클을 통해 사례지오경험을 이론적으로 이해할 서적들을 접하게 된다. 이 서클에서 지정한 사회과학서적을 이해하기에는 정신적 연령이 아직 이른감이 없지 않았으나 이 시기의 독서는 사례지오경험으로 체득된 민족주의적 의식의 불길을 계속 지펴주었다. 뿐만 아니라 이독서회활동을 통해 그의 모든 가치관이 바뀌어져 버렸다. 광주일고에 진학하면서 법관이나 의사가 되겠다던 꿈을 포기하고 이 사회에 살면서 자신이 해야할 다른 몫이 있다고 판단, 진로를 바꾸기로 했다. 인간의 삶은 지위나 명예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얼마나 기여했느냐가 중요하다고 깨닫게 된 것이다.
전남대 최초의 운동서클 조직
그가 전남대법대에 진학한 것은 71년이었다. 학내에 사회과학서클이 없어 그는 김희택(民靑聯의장)ㆍ이양현 등과 함께 민족사회연구회(民社硏)를 조직했다. 민족사회연구회는 전남대 최초의 사회과학연구모임이자 학생운동권의 중심이 되어 이후 80년 5월에 적극항쟁파의 근간이 되기도 한다. 이 시기에 朴정권은 서서히 장기집권의 구상을 예비하고 있었으며,도전세력 가운데 가장 겁없이 굴어 눈에 가시와 같은 장애집단이었던 대학에 족쇄를 채우고 있었다. 大學敎鍊도 그 족쇄의 하나라고 생각했던 그는 民社硏이 중심이 된 교련반대시위에 자연스레 참여하였고, 1학년임에도 불구하고 상급생들과 함께 주도세력의 한사람으로 부각되었다. 그러나 그 댓가로 돌아온 것은 무기정학처분이었고, 그는 댜시 학교를 떠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72년 유신시대의 초반기를 그는 군대생활로 보냈다. 3년 후 얼룩무늬의 예비군복을 입고 다시 캠퍼스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가 서고자 했던 운동권은 전쟁터로 말하자면 이미 초토화되어 있었다. 유신을 지탱한 긴급조치에 의해‘民靑學聯’사건이 발생, 거의 모든 운동권 학생들이 체포ㆍ구속되었거나 군에 강제 징집되는 수난을 겪은 후였다. 민청학련사건으로 전남대는 서울대 다음으로 가장 많은 학생들이 피해를 입었었다. 그는 대학이 마치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겨울공화국처럼 느껴졌다. 민사연을 재건, 운동권을 규합하려 하였으나 교실을 빌리기조차 어려울만큼 학내운동은 깊은 수렁 속에 빠져 있었다. 그는‘내가 여기에서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궁리하다가‘과연 이런 상황에서 대학생활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를 자문하여 보았으나 뚜렷한 해답이 얻어지지 않자 학내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학내운동의 차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결심, 몇 명의 동료들과 함께 그는‘革命’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채 영원히 대학을 뒤로 하고 교문을 나와 버렸다. 6,70년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시인 김수영은 革命을 주제로 시 「그 방을 생각하며」를 썼다.
革命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헛소리차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나는 모든 노래를 그방에 함께 남기고 왔을 게다 그렇듯 이제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메말랐다 그방의 벽은 나의 가슴이고 나의 四肢일까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이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그 노래도 그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外勢극복 민족자존의 시대로
4·19직후에 씌어진 김수영의 이 시처럼 당대 지식인들이 떠올렸던 주제의 하나인‘革命’은 현실에서 구체성을 얻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던 이데아였다. 그로부터 10여년이 흐르면서 그 이데아는 서서히 민중의 바다를 향해 흘러갔다. 정상용이 운동적 푯대로 삼은 혁명의 흐름은 바로 이즈음에 와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진다면 이 시기에 그가 떠올린 ‘혁명’은 다분히 감성적인 면에 치우친 낭만적인 가치였을 뿐이었다. 그는 혁명이 민중과의 결합에서 얻어진다고 생각했지만 학교에서 뛰쳐나와 만나본 민중들은 그저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하루살이같은 존재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에게 무언자 할 일이 있을텐데 그 일이 잡히지 않아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할 일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불만이 팽배한 상황에서 그는 80년 5월 광주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80년 5월의 비극적 사건을 겪고 광주의 재야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됐다. 84년 들어 정국이 유화국면에 접어들자 광주에서도 5월광주의 정신을 계승하는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일기 시작했다. 80년 5월속에서 자신의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 그는 아직은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어려움이 있었지만 홍남순변호사 등과 함께 80년 5월이후 최초의 공개조직인 ‘광주의거구속자협의회’를 조직했다. 이와는 별도로 그해 늦가을 청년들이 중심이 된 전남민주청년운동협의회를 결성하고, 초대의장직을 맡은 그는 다음날 국민·종교·5월단체 등 각 부문별 청년운동권을 규합, 전남사회운동협의회(현 전남민주주의
청년연합)를 구성하는 등 조직운동의 확산에 전력하였다. 이들 조직은 광주사태의 진상을 조사·규명하고 사진전시회, 비디오 테이프 제작, 책자판매를 통해 5월광주의 정신을 기록하고 홍보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이런 중에서 그는 광주사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황석영편) 출판과 관련, 한때 구류당하기도 했고, 5·3인천사태와 관련, 투옥되는 고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지금도 그는 ‘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회장과 전국학생운동출신들의 모임인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사회운동’의 공동의장을 맡고 있다.
“80년 5월에 죽은 저는 그 사건을 통해 이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죽은 사람들의 혼과 함께 이땅위에 살며서 5월광주의 정신을 깎아내리기 위해 광주라는 지역적 특성을 거론하여 호남푸대접 운운하지만 그것은 지역적인 문제일 뿐입니다. 釜馬사건과 6월평화대행진에서 나타난 것처럼 광주항쟁의 참정신은 이 나라 모든 국민들이 염원하고 있는 진정한 민주화를 위한 大義에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민족의 自主와 自尊을 지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를 위해 연구하고 실천해가는 삶이 바로 5월광주의 정신을 기리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