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민주화 운동의 시의 현황과 과제. 이은봉(진실의 시학, 태학사, 1998. 8)
본문
광주민주화운동 시의 현황과 과제
이은봉
1. 머리말-절망과 부끄러움, 분노의 세계
1980년 5월의 광주민주화운동을 생각하면 그날의 현장과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던 필자에게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울컥하고 밀려 올라오는 뜨거운 아픔이, 추억이 없지 않다. 그해 봄의 일들이 라니! 물론 그때 필자 주변의 일들을 이 자리에서 자세히 다 얘기할 수는 없다. 어쨌거나 필자는 가까운 벗들과 함께 광주민주화운동 직후 고향 대전에서, 그리고 인근의 청주에서, 광주로부터 갓 올라온 그날의 소식을 담은, 김현장이 만들었다고 하는, 수사적으로 표현하여 피의 냄새가 줄줄 흐르는 전단을 통곡하는 심정으로 복사해 뿌렸던, 그렇게 동분서주했던 경험을 갖고 있다. 또한 그 일로 하여 필자를 대신해 청주의 시인 김창규 목사가 대전의 안기부로, 그곳의 지하실로 끌려가 엄청난 고생을 했다는 얘기를 아주 오래 뒤에 들은 적이 있다.
아무튼 광주민주화운동이 발발한 지도 벌써 17주년이 되어, 그것을 기념하는 행사의 하나로 오늘의 이 심포지움에 참여하게 된 필자로서는 여간 감개무량한 것이 아니다. 학살의 원흉인 전두환, 노태우가 사법처리되었고, 이어 5·18이 국가기념일로 결정되는 것을 보면, 사실 이번에 새롭게 단장된 망월동 묘역이 국립묘지로 승격되는 것도 시간 문제일 따름인 듯싶다.
필자가 광주민주화운동의 소식을 처음 접한 것은 변산반도 근처의 바닷가, 좀더 자세히 말하면 줄포에서 멀잖은 채석강 근처의 바닷가에서이다. 1980년 5월 18일 당시 대학의 조교로 있던 필자는 학생들과 함께 그 지역 일대에서 학술답사를 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말이 학술답사이지, 그 어수선한 시대에 학술답사가 제대로 이루어질 리 없었다.
왼종일 술에 쩔어 비틀거리는 교수들과 학생들의 뒤치닥거리를 마치고, 밤이 깊어 바닷가 언덕에 나와 막 담배 한 대를 피워 물며 휴대용 라디오를 켜고 사이클을 맞추던 중이었다. 갑자기 거칠고 씩씩한 북한 사투리의 사내가 라디오에서 튀어나와 흥분한 목소리로 광주의 소식을 마구 토해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 일로 하여 학술답사는 곧바로 끝이 났지만, 필자로서는 참으로 막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능 좋은 라디오를 구해 귀 기울여 북한 사투리를 듣는 것 이상은 달리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는 가운데 온갖 상상과 고뇌에 빠져 있었던 것이 당시의 필자이기는 했다. 스페인 혁명처럼 발전하지는 않을까, 피카소의 그림으로 유명해진 게르니카에서처럼 처참하게 학살당하지는 않을까,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문제 등으로 심하게 괴로워해야 했던 것이다. 만약 광주민주화운동이 스페인 혁명처럼 확산되어 갔다면 유럽의 지식인들, 특히 시인 크리스토퍼 코드웰이나 오든의 경우처럼 당시 이 땅의 많은 문인들도 총을 들고 참여하지 않을 순 없었을 것이다. 참으로 두렵고 가슴 떨리는 일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광주 공동체'는 열흘 남짓, 오래지 않아 그러한 유형의 두려움보다는 절망과 부끄러움, 한편으로는 분노에 휩싸여 지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당시의 필자이다. 광주는 필자에게 기껏 이러한 정도에서의 서정적, 시적 정서의 원천이었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당시 필자만이 아니라 광주 바깥의 대부분 시인들이 느끼는 보편적인 정서의 한 형태였을 것이다. 그때의 심정을 한참 뒤에 시의 형식으로 언어화한 것이 있어 일단 먼저 여기에 제시해보고자 한다.
그해 오월, 채석강 바닷가
늦게 핀 유채꽃잎들이
무데기로 으스러지고 있었지요
그 샛노란 절망의 꽃잎들이
우우우, 문드러지고 있었지요
답사 나온 학생들, 술 취한 대학교수들
도망치듯 팽개치고 떠나온 대학이
저 혼자 바다 위로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고 있었지요
자정이 넘고 밤 깊어 학생들
까닭없이 다투다 잠들고
교수들도 그렇게 잠들고
우연히 튼 라디오에서는
낯선 조선어,
북방의 재빠른 말씨들이
아아, 남쪽 도시의 한 피울움을
그런데 콩볶듯이 토해내고 있었지요
나는 손가락 사이에
겨우겨우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만 힘껏 집어던졌지요 바닷물은
미동도 하지 않는데, 혼자서 아뜩하게
6·25 남북전쟁에 대해서
그리고 스페인 내란에 대해서
조용히 조용히 중얼거리고 있었지요
그해 오월, 채석강 바닷가
영영 잊지 못할 눈물이지요.
- 「못 잊는 일」 전문
그해 오월을 광주 바깥에서 보낸 많은 사람들이 함께 나눌 수밖에 없었던 절망 혹은 부끄러움의 정서들을 필자는 이밖에도 [오월] [봄바다][일기-1980. 10. 17] 등의 시를 통해 형상화한 적이 있다. 심약하기 짝이 없는 필자로서는 기껏 이러한 정도의 암시적 정서를 통해 부족하나마 당대의 시대정신에 참여하고자 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1980년 5월 이후에는 광주의 안이든 바깥이든 저들의 학살과 억압에 따른 공포의 정서, 그리고 그에 기인한 자탄의 정서와 함께 하면서도 폭력적 군사독재에 맞서고자 했던 시들이 적잖이 씌어지게 된다. 박몽구의 [저물 무렵], 송기원의 [寒波], 박남준의 [寓話] 등의 작품에서 그 예를 볼 수 있거니와, 물론 이들 시에는 회한의 정서, 나아가 내면의 정직성에 입각한 엄정한 자의식이 짙게 깔려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이들의 시에 드러나 있는 정서들로부터 일찍이 채광석도 지적하고 있듯이 과도한 감상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감상성이 3·1운동 직후의 백조파 낭만주의자들이 보여주었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좀더 직접적으로 역사의 구체적인 한 현실로서 전두환 군사독재의 탄생에 대한 저주의 정서를 강하게 깔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의 예는 당시의 그러한 시적 현존을 담고 있는 이영진의 시 [단 한 줄의 시도 쓸 수 없다]의 일부이다.
노란 장미여
나는 이제 단 한 줄의 시도 쓸 수 없다.
도려낸 유방의 그 낭자한 핏구멍을 빨아대며 울부짖는
사내들 앞에서
피에 젖은 쓰레기통, 불에 그을린 시체더미 속에서
얼굴마저 없어진 어린것들의 흩어진 뼛조각을 찾아 헤매는
애처로운 어미들 앞에서
도대체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써야 될 무슨 진실이 남아 있단 말인가
아 하늘이여
머뭇거리는 나의 면상 앞으로
기운차게 날아드는 주먹과 돌멩이여
그래도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고 외쳐야 하는가
폭탄처럼 망설임 없이 터져버리는 분노한 생명들 앞에서
문밖으로 차 내던져지는 축구공보다 더 쉽게
죽음으로 던져지는 순한 친구들의 머리통 앞에서
분노와 설움, 절망과 자의식, 슬픔과 부끄러움 등 수많은 감정이 뒤섞여 있는 이 시로부터 광주민주화운동이 보편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매우 복잡다단한 정서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처럼 광주민주화운동은 처음부터 시인들에게 형용할 수 없는 정서적 다의성, 나아가 충만하고 격정적인, 그리하여 일면 감상적이기까지 한 정서의 변용들을 보여주고 있다. "도대체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써야 될 무슨 진실이 남아 있단 말인가"하고, 회한에 차서 자기 자신의 가슴을 향해 피의 화살을 쏘아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의 깨어 있는 시인들이 갖는 진실의 일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광주민주화운동을 직접적으로 체험했든 체험하지 못했든 당시 시인들이 언제까지나 그처럼 즉자적인 감정의 범람 속에 멈춰 있을 수만은 없었다. 감정의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말하자면 감정의 주체가 되어 좀더 바르고 정확하게 당면한 민족 현실을 형상화하게 되고, 그를 통해 시인으로서의 자기 규정을 새롭게 해야 할 처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인들에게는 전두환 군부독재에 의해 완벽하게 은폐되어 있고 축소되어 있던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을 고발하고 폭로하고 증언하는 일이 무엇보다 급했다. 모든 언론이 그 당시 입을 닫아걸고 침묵을 계속했었다는 것은 저 격조 높은 '광주공동체'에서 유일하게 오직 MBC건물만이 불에 탔다는 사실만으로도 잘 알 수 있다. 국내에서는 어느 신문 어느 방송에서도 광주의 진상을 올바로 보도하지 못했고, 그리하여 이제는 시가, 문학이 언론의 역할까지 대신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시가 갖고 있는 근원적 속성으로 보면 이는 확실히 불행한 일이지만 역사 속에서 시는 언제라도 기꺼이 그러한 역할을 떠맡아왔던 것도 어김없는 사실이다.
2. 고발과 폭로, 증언의 세계
일찍이 임헌영은 그날의 '광주 공동체'를 1871년의 빠리코뮨에 비교하여 논의한 적이 있다. 물론 빠리꼬뮨이 그러했던 것처럼 '광주 공동체'도 결국은 처참한 살육으로 끝이 나고 만다. 그러나 좀더 치욕스러운 일은 광주에서의 열흘이 보여주었던 그 아름답던 공동체와는 관계없이 전두환 군사정권이 이곳 사람들의 자유에의 의지와 민주화에의 열기를 폭도들의 파괴행위, 범법행위로 몰아 부쳤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 전모가 백일하에 드러났지만 그러한 연유로 하여 당시에는 계엄군들의 그 흉칙한 만행들이 정당화되고, 심지어는 미화되기까지 한 바 있다. 시가, 나아가 문학 일반이 급기야 이들의 만행을 고발하고 폭로하는 일까지 떠맡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돌이켜 보면 정확한 사실과 진상을 알리는 일에 시가 이처럼 동원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아픈 현실은 외면한 채 미처 그것이 시적 경지에 이르지 못했음만을 탓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는 아무래도 깨어 있는 역사 속에서의 시의 사명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기인할 것이다. 당시의 시에게 부여되었던 이러한 역할은 광주민주화운동 직후에 씌어진 김준태의 저 유명한 [아아 광주여! 우리 나라의 십자가여!]에서도 우선 그 일면을 찾아볼 수 있다.
(여보 당신을 기다리다가
문밖에 나아가 당신을 기다리다가
나는 죽었어요……
왜 나의 목숨을 빼앗아 갔을까요
셋방살이 신세였지만
얼마나 우린 행복했어요
난 당신에게 잘 해 주고 싶었어요
아아 여보!
그런데 나는 당신의 아이를 밴 몸으로
이렇게 죽은 거예요. 여보!
미안해요, 여보!
나에게서 나의 목숨을 빼앗아가고
나는 또 당신의 전부를
당신의 젊음 당신의 사랑
당신의 아들 당신의
아아 여보! 내가 결국
당신을 죽인 것인가요)
위의 시의 인용 부분은 계엄군에 의해 무참하게 살육된 한 임신부의 입을 통해 발언되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끔찍한 일이 사실로 증명되기까지는 참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1989년의 청문회 이후에야, 나아가 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증언이 구체적으로 채록된 이후에야 이 일이 사실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그 많은 시간들을 한순간에 압축, 단축시켜주었던 것이 김준태의 이 시라고 할 수 있다. 한때는 저들에 의해 단지 유언비어일 따름이라고 끊임없이 매도되었던 이 일은 임신부의 목소리가 아니라 태아의 목소리를 빌어 형상화하고 있는 고규태의 시 「나는 첫 아이였어요」를 통해서도 또한 발견할 수 있다. 당시 시인들은 이처럼 일단 먼저 고발과 폭로, 혹은 증언의 차원을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에 접근해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기독교의 이미지를 패로디하고 있다고 하여 일면 여타의 종교로부터 배타적 비판을 받기도 하는 것이 김준태의 위의 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독교의 순교 혹은 희생양 정신과 연결시키고 있는 이 시, 다시 말해 광주의 고난과 불행을 끝내 예수 부활의 이미지로 전화하고 있는 이 시의 근본적인 지향은 항쟁 직후에 자포자기의 절망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한 지난한 의지의 한 표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그가 이 시의 말미에서 "지금 우리는 더욱 살아나는구나/지금 우리는 더욱 튼튼하구나(‥‥‥) 광주여 무등산이여" 하고 외치고 있는 것에도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돌이켜 보면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이 전국적인 문제로 일반대중에게 부상되었던 것은 1985년 2월 12일에 있었던 총선에 이르러서 였다. 김대중, 김영삼 두 분에 의해 주도되었던 신민당이 선거전략의 하나로 광주항쟁의 진상을 전국적으로 홍보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일반 대중이 구체적으로 그 전모를 접했던 것은 『신동아』에 발표되었던 윤재걸의 르뽀와 황석영이 기록한 『어둠을 넘어 죽음의 사슬을 넘어』(풀빛) 등이 등장하면서부터라고 하는 것이 옮다. 따라서 그 이전의 단계에는 시인들에게 있어서 광주항쟁의 열흘간은 고발과 폭로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증언 및 사실의 재구성 차원에서도 깊이 있는 형상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박몽구의 시집 『십자가의 꿈』은 아직도 시사하는 바가 적잖다. 당시로서는 뛰어난 예술적 성취보다는 어떻게든 항쟁의 구체적인 사실과 진상을 극명하게 그려내는 것이 그날의 광주를 체험한 시인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임무였기 때문이다. 사실 그렇다. 박몽구의 이 시집에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전 기간이 나름대로의 추체험을 통해 매우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다음은 그의 시 「십자가의 꿈」 연작 중의 일부이다.
새로 투입된 진압군은 시시각각 깔아뭉개고 들어오겠다며
깊은 밤에도 장갑차와 헬리콥터를 띄워 우리들은 하얗게 잠깨곤 하였다
화정동 부근의 시민군들은 아카시아와 허술한 벽돌로
핵 시대의 군대와 대치하고 있다가
캐터필러가 떠밀면서 무차별로 갈기는 통에
시민군 몇 사람이 개죽음이 되었다
외곽에서는 식량이며 생필품이 들어오는 길도
죄다 막히고 말았건만
그럴수록 우리는 한가족이 되어 있었다.
모두들 한마음으로 궁정을 나누며 살고 있었다
술청마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방범초소가 부서진 지 오래지만 도둑의 그림자는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았다
-「십자가의 꿈·62] 부분
박몽구의 이 작품은 시로서의 형식은 갖추고 있지만 시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광주를 직접 체험한 사람의 고백적 증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오늘의 입장에서 보면 미처 '시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당시에는 이처럼 있는 그대로의 체험으로 형상화하는 것만도 아주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던 것이 사실이다. 어찌 보면 당시의 문학에게, 특히 시에게 언론이 해야 할 역할까지 부여되었던 것은 행복했던 일인 지도 모르겠다. 시인의 대사회적 역할과 기능이 바늘구멍만큼이나 작아진 오늘의 현실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어쨌거나 이러한 기능을 담당했던 광주항쟁과 관련된 시는 그 양에 있어서 자못 상당하다. 김남주의 [학살·2], 이영진의 「그로테스크한 시」, 김정환의 [편지], 채광석의 [애국가], 박정열의 [5월 25일 도청 안에서], 김형수의 [오리발과 빨간 나비넥타이] 등의 시가 그 예로, 이는 그것이 이룬 예술적 성취와 관계없이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시의 중요한 일부를 이루고 있다. 현대사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이 갖는 독특한 위치 때문이겠지만 우리의 시는 이러한 방식으로라도 당시의 언론이 직무유기했던 부분을 메워갔던 것이다. 물론 시는 앞으로도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민족사적 대사건에 대응해 나가게 될 것이다.
평면적이고 선형적인 관계로 이루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와 더불어 우리의 시는 점차 광주민주화운동이 갖는 역사적 의의를 드러내게 된다. 그 또한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시의 중요한 영역이라고 아니하지 못할 것이다.
3. 민족운동사적 의의 또는 찬(讚)과 추모의 의미망
지리적 한계를 인정하고 보면 1980년 5월의 광주항쟁은 1894년의 동학혁명 및 일제강점하의 광주학생운동과 그 역사적 맥을 함께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의 유신 쿠데타 이후 광주에서의 민주화운동이 특별히 선진적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따라서 그날의 광주민주화운동은 짐짓 예고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상대적으로 훨씬 뜨거운 애국심과 민주주의적 열정을 일종의 전통으로, 사회·문화적 집단무의식으로 간직해온 곳이 광주이기 때문이다. 이미 1976년 시인 조태일이 자신의 시 [겨울 소식]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는 더욱 그렇다고 할 것이다.
찬 바람 속에서 광주는
큰 애를 뱄다더라.
찬 눈에 덮여서도 무등산은
그렇게도 우람한 만삭이라더라.
하지만 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의가 이러한 정도의 지역적 한계 안에 갇혀 있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바이다. 전 민족시적인 입장에서 그밖에도 일제하의 3·1운동, 이승만 독재하의 4·19혁명, 그리고 전두환 독재하의 6월항쟁으로 이어지는 맥락 위에 광주민주화운동이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 사실 그렇다. 광주항쟁이 갖는 이러한 전 민족사적 의의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광주항쟁에 관한 시적, 문학적 대응은 상대적으로 매우 성숙해 있고, 앞서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정한모는 일찍이 [한국 현대시 약사]에서 일제강점기의 3·1운동과 관련해 제대로 된 민족시 한편이 남아 있지 않은 것에 대해 크게 통탄한 적이 있다. 무려 1만 명 이상의 동포들이 학살되고, 5만 명 이상의 동포들이 투옥, 구금되었던 것이 일제강점하의 3·1운동이었다는 점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고 보면 문학시적 입장에서 살펴볼 때 광주민주화운동은 상당히 행복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당시부터 즉석에서 시가 씌어져 낭송되기도 했지만, 그 이후 지금까지 이미 수천 편의 문학작품이 생산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특히 기억할만한 일은 시 선집으로 이미 {누가 그대 큰 이름 지우랴}(인동, 1987)와 {하늘이여 땅이여 아아, 광주여} (황토, 1990)가 간행된 바 있다는 사실이다.
어쨌거나 광주항쟁이 갖는 역사적 의의가 동학혁명에서 출발하여 3·1운동, 6·10운동, 그리고 4·19혁명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흐름 위에 자리한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또한 그것이 이른바 6월 항쟁의 뿌리로, 토대로 작용했다는 것도 이제는 역사의 정설이 되어 있다. 이러한 인식은 물론 사회과학적으로 연구되어 확정되기 이전에 당연히 시적 직관에 의해 먼저 파악되었다. 다음은 바로 그러한 시각으로 광주항쟁을 바라보고 있는 김진경의 시 [5월21일 도청 앞 광장에서]의 일부이다.
우리 역사는
우금치 고갯마루를 맴돌고 있었더니라
20만 동학군의 죽창이
눈사태처럼 무너진 이래
쓰러져 누운 흰옷을 논밭 삼아
착취의 칼날을 꽂는
식민의 세월
3·1절의 함성도
6·10만세의 함성도
광주항쟁의 울부짖음도
우금치 고갯마루를 맴돌다
끝내 무너졌더니라.
그리고 해방이라고 했던가
넘을 수 없는 우금치 고갯마루에
겹겹이 철조망이 쳐지고 지뢰가 묻히고
그는 그걸 38선이라 했더니라.
휴전선이라 했더니라.
4·19도 우금치 고갯마루를 넘다
철조망 위에 무너져 내렸더니라.
1980년 5월 21일
광주 도청 앞 광장에도
그 운명의 고갯마루는 있었다.
분노한 시민들의 물결이
학살자들이 쫓겨 들어간 도청을 향해 압박해 가고
총성이 울렸지.
이 시에서 시인 김진경이 궁극적으로 의도하는 것은 광주민주화운동의 의의를 근현대사의 민권운동 및 민족자주운동, 나아가 민족·민중운동의 연맥 위에 위치 지으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직하게 말하면 이러한 작업 또한 시 이전의 것으로, 신군부에 의해 폭도들의 난동으로 규정되어진 광주항쟁을 정통성 있는 민족·민중운동으로 복권해내 기 위한 운동사적 의미가 크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그것 자체가 일종의 문화적 투쟁의 하나였다는 셈이다. 필자가 졸작 「3월 하늘」에서 "구름이 흐르는 것을 본다/3월에서 4월로/4월에서 5월로/뭉게뭉게 솟아오르는 구름을 본다/굽이치는 구름덩이를 본다/민주주의의 폭풍우를 본다"라고 노래했던 것도 실은 그와 다르지 않은 발상이었다. 하종오가 자신의 시집 제목을 {4월에서 5월로}로 잡았던 것도 물론 마찬가지의 인식 때문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은 이미 깨어 있는 민중들의 의식 속에서는 빛나는 조국의 역사로 당당하게 편입이 된 것이다.
광주항쟁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마침내 일종의 찬가를 낳게 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이는 사실 광주민주화운동의 분명한 역사적 의의를 생각하면 그다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다.
일단 찬가는 광주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애국 열사들에 대한 추모시의 형태로 형상화된 바 있다. 서정시의 본래적 속성 중에 찬가적인 면이 없지 않다는 점을 생각하면 광주민주화운동시가 서정시 본연의 모습을 담아내기 시작했다고도 할 것이다. 광주항쟁 시의 이러한 모습이 물론 선형적이고도 평면적인 발전 위에 놓여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때의 시가 신이나 영웅에 대한 전통적 찬가의 모습을 그대로 취하고 있을 리는 만무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광주민주화운동은 역사적 비극으로서 그 내부에 한없는 슬픔과 눈물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의 시는 이러한 의미에서 살펴볼 수 있는 고규태의 [화정동 노을]의 일부이다.
분노가 깊으면 저렇게 붉은가
증오가 깊으면 저토록 찬란한가
쓸쓸한 바람 몰려가는
돌고개 저 너머 화정동 마을
친구의 얼굴을 보겠네 그날 쓰러진
꽃청춘, 아깝게 아깝게 식어간
친구들의 노한 눈빛을 보겠네
못 잊어 못 잊어 못 잊어
금남로 사랑 충장로 넉넉한 사랑
도청 분수대에서 나누던 융융한 사랑
못 잊어 타는 그대의 햇붉은 가슴을
화정동 노을 속에서 나는야 보겠네
고규태의 이 시에서와 같은 정서는 그밖에 박승옥의 [오월의 겨울], 이도윤의 [오월의 꽃·4], 배창환의 「봄날」, 양성우의 「해방연가」 등의 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들 시에 드러나 있는 찬과 추모의 정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가슴 뭉클함은 충분히 예술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광주항쟁에 대한 이처럼 폭넓은 찬과 추모의 정은 이내 좀더 구체적인 대상으로 좁혀져 드러나게 된다. 말하자면 좀더 구체적인 인물들이 시적 대상으로 떠오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 그것은 김해화의 '오빠', 박선욱의 '누이', 김용락의 '누님', 임동확의 '너', 박남준의 '그대'등처럼 다소 막연한 호칭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최두석의 '서호빈' '기종도', 양성우의 '박관현', 하종오의 '김종태', 김희수의 '홍기일' 등처럼 명확한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데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실제적인 모습이 드러나면서 그들의 죽음에 대한 서사적인 기록이 요구되기도 했겠지만 구체적인 작품의 발상에서 좀더 현실성을, 다시 말해 리얼리티를 획득하기 위한 시인들의 노력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음은 그러한 입장에서 씌어진 것이 확실한 최두석의 시 「서호빈」의 일부이다.
건물 왼편 뜰에 누운 사람들 모두 살펴도 그녀의 애인 서호빈은 없었다.
안도감으로 무너지는 몸을 계단에 앉히니 일등병이 다가와 옆에 앉았다. 그러고는 데모하는 대학생 놈은 모조리 죽여야 한다고 지껄였다. 뒤뜰에 있는 여덟 놈은 모두 자기가 쏘았다고 지껄였다. 그녀는 소스라쳐 일어나 뒤뜰로 갔다. 첫째 시신을 보니 아니었다. 둘째 시신도 아니었다. 셋째 시신을 덮은 광목을 들치니 이마에 안경이 걸쳐진 그이였다.
광주민주화운동 중에 죽은 서호빈의 시신을 찾아내는 과정을 애인의 시각을 빌려 그려내고 있는 것이 이 시라고 할 수 있다. 최두석 특유의 '이야기시론'에 근거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시 역시 기본적으로는 사실의 복원 차원에 자리해 있다. 물론 이 시의 모든 면이 전적으로 다 그러한 것은 아닌데, 사실의 복원 자체가 이미 찬과 추모의 정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민족사의 매우 중요한 단계에 참여하여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삶을 제대로 복원하고, 노래하는 것만큼 중요한 시의 역할과 기능도 없다고 할 것이다.
돌이켜 보면 광주민주화운동의 시 가운데에는 과도할 정도로 찬과 추모의 정을 담은 작품이 많은 감도 없지 않은데, 물론 이들 모두가 제대로 된 시적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다. 적잖은 경우 시적 여과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은 가운데 상투적으로 씌어지고 발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생각하면 광주항쟁 시에도 당연히 일정한 형상화의 과정, 심미화의 과정이 요구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망월동과 무덤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몇몇 광주항쟁 시에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한 작품들의 경우 상대적으로 좀더 시적 경지, 심미적 경지에 이르러 있다는 것이다.
4. 맺음말-망월동 혹은 무덤의 이미지
시의 언어가 본래 직접적인 설명의 방식보다는 우회적인 비유 혹은 상징의 방식을 택한다는 것은 익히 주지하는 바이다. 그 과정에 상상의 기쁨과 즐거움이 싹트고, 그렇게 상상하는 과정에 획득되는 진실이 우리의 삶에 커다란 깨침을 주기에 시의 언어는 그러한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아닌가. 광주민주화운동을 노래한 시 역시 미적 여과과정을 밟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다름 아닌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새삼스러운 지적이지만 일정한 정도는 미적 경지에 이를 때 광주민주화운동의 시도 독자들의 정서를 바르게 감염시킬 수 있고, 마침내 서정시 일반과의 경쟁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러한 점에서 생각하면 무엇보다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이 망월동의 이미지이다. 주지하다시피 망월동 자체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 순절한 애국 시민들의 공동묘지가 있는 지역의 명칭일 따름이다. 그러나 광주민주화운동 시에서 망월동이 단순히 그러한 정도의 의미 망만을 내포하는 것은 아니다. '망월동'은 그리고 그 묘지는 광주항쟁 정신 일반을 은유하기도 하고, 그로부터 비롯된 80년대의 민족·민중운동 전반을 상징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망월동'은 좀더 구체적으로 당시의 군사독재 통치세력에 대한 저항과 도전을, 그리고 나아가 일종의 민족·민중운동의 성지로서 순례의 터전을 비유하기도 한다. 송수권의 「망월동 가는 길」, 김하늬의 「망월동으로 가는 길」, 김용락의 「망월동」, 정삼수의 「망월동 옛 생각」, 하종오의 「望月」, 이승철의 「망월동에서」 깅해화의 「5월묘 가는 길」, 이성부의 「共同山」, 이영진의 「성묘」 등에서 그러한 면을 볼 수 있거니와, 다음은 남달리 서정적 흥취를 듬뿍 풍기고 있는 강형철의 시 「순례」의 전문이다.
가을 탱자나무 가시를 들추며
몇은 손을 금했고
몇몇은 그날의 함성과 피에 대해 말하면서
망월동을 찾아가고 있었다
다락논에는 벼포기가 낫에 베인 자국을 움켜쥐고
하늘에 닿아
잔잔한 물기에 몸을 적시고 있었다
이 땅에 젊어 태어난 것이
저주라고 축복이라고 익숙한 말들이
억새풀 사이에 숨었다.
여보 당신은 천사였소
천국에서 만납시다
묘비 뒤에 목울대를 넘기는 핏기
젊은 신랑의 소리가
우리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고
우린 모여 절을 올렸다
무덤들이 눈을 들어 행길로 달려갔고
소주를 부었다 한 아름
담양 쪽으로 나간다는 산길을 따라
몇몇은 절뚝거리며 갔고
몇몇은 잡풀 끝을 손에 쥐며
손이 베이는 것도 몰랐다
오랫동안 눈빛이 차올랐다
사람의 얼굴
오지게 그리운 사람의 얼굴
그 위로
미류나무는
은사시나무로 빛을 보듬어 우리 곁에 쏟아부었다
망월동 묘지에의 참배 체험 혹은 순례 체험을 담고 있는 것이 이 시에 담겨져 있는 주요 내용이다. 이 시에서의 시적 자아는 비교적 차분한 어조로 자신의 순례 체험을 형상화하고 있는데, 아마도 그것은 그가 특별히 불필요한 욕망을 잘 절제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에서 기인했겠지만 이 시에는 "잔잔한 물기에 몸을 적시고 있는" 순례자들의 모습과, 순례자들이 느끼는 서정이 잘 드러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적 자아가 망월동 묘지를 참배하면서 느끼는 벅찬 마음, 즉 잡풀들에 의해 "손이 베이는 것도" 모르고 "오랫동안 눈빛이 차"오르는 순정한 마음이 느끼는 정서를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 성지로서의 망월동에 이르러 함부로 그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가운데 발견해내는 시적 자아의 무구한 진실을 이 시에서는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는 시인 강형철이 망월동의 이미지라고 하는 명확한 시적 여과체를 통해 순례자로서의 지순한 정신을 차분히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강형철의 이 시가 보여주는 서정적 흥취는 망월동의 구체적인 묘지로부터 발상을 하고 있는 이영진의 「무덤은 큰 입이다」에서도 마찬가지로 찾아볼 수 있다. 그 역시 충분한 시적 장치를 통해 광주항쟁이 갖는 중요한 의미를 격조 있는 호흡으로 형상화화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그의 시 「무덤은 큰 입이다」의 일부인데, 이미 그 자체로 뛰어난 이이지가 선택되어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무엇으로 말을 하는가
살랑이는 봄바람 혹은 봄꽃들을 어떻게
함부로 노래하는가
갈수록 말이 줄어드는 나를 보고
이젠 철이 들어간다지만
소주에 쩔은 이빨들아
족발을 물어뜯는
입술들아, 무엇으로 입을 여는가
큰 희망으로 타오르던 그해 여름
횐 천을 두른 친구들은
산으로 쫓겨가며 말이 없었다.
분수대 곁에서 타오르던 칸나꽃은
뚝뚝 핏방울을 흘렸고, 친구들은
미쳐서 미쳐서 그 아름다운 꽃길로
사라져 갔다
아아, 숨어서 쥐구멍을 파던 가슴으로
쥐구멍을 파다파다 피가 마른 가슴으로
어떻게 지껄여야 하는가
말이란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온몸으로 오는데
앞의 시와는 달리 이 시는 독자들의 가슴으로 격정적 호흡이, 그리고 숭고하고 웅혼한 기세가 휘몰아쳐 들어오는 작품이다. 따라서 폭풍처럼 다가오는 이 시의 운기에서 거칠 것 없는 호연지기를, 또한 한편으로 끝없이 일그러지는 고뇌에 찬 시인의 내면세계를 읽은 것은 짐짓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러한 점에서도 여타 광주민주화운동 시의 한계를 충분히 돌파하고 있는 것이 이 시라고 할 것인데, 물론 이는 시인 이영진의 남다른 심미적 운산(運算)에서 기인할 것이다.
돌이켜 보면 벌판을 내달리는 말발굽 소리를 함축하고 있는 이 시와 같은 호흡은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 「관동별곡」의 전통을 받고 있는 남도 특유의 리듬이라고 할 수 있다. 조태일과 김지하의 초기시, 그밖에 김준태와 김남주 등의 시에서도 보여지는 이러한 호흡과 가락만으로도 이 시는 사실 돋보이는 바 없지 않다.
이 시는 역사를 향한 아무런 실천적 노력도 없이 입만 살아 지껄여대는 당대의 현실에 대한 암유적 풍자를 담고 있기도 하다. 물론 그의 이러한 인식은 자신의 내면을 향한 끊임없는 자기 점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생각된다. 모택동의 용어를 빌면 굳거나 멎지 않고자 하는 깨어있는 자아의 끊임없는 '조반유리(造反有理)'에서 이 시의 웅혼한 긴장감은 탄생되었을 것이다. 역사의 가시적인 현상에 집착하지 않고 그 배후에 가려져 있는 진실을 바르게 추적하고자 하는 시인의 뜨거운 열정을 읽을 수 있다고 해도 좋으리라.
이러한 점에서 생각하면 사실 현금에 이르러 씌어지고 있는 광주민주화운동 시의 경우 지나치게 상투화되어 있지 않은가, 공식화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느낌도 없지 않다. 이제는 광주민주화운동 시도 의례적으로 거쳐 지나가는 추모시의 차원으로, 기념시의 차원으로 전락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관습화되고 인습화된 반항 정신, 그리하여 왜곡되고 뒤틀린 저항 정신에 갇혀 우리 시대의 문제점을 오히려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면 그 동안 광주·전남에서 생산되는 시의 경우 지나칠 정도로 1980년의 5월에 얽혀 있었던 점도, 매몰되어 있었던 점토 아주 없지는 않다. 세상은 이미 저만큼 달려가고 있는데, 아직도 1980년 5월이 내리누르는 중압감을 벗어나지 못해 낡고 진부하기 짝이 없는 동어반복을 계속하고 있는 시인도 더러는 눈에 띈다는 것이다. 벌써 90년대도 후반기에 다다른 오늘의 광주 전남의 시인들에게 좀더 열려져 있는 마음가짐, 좀더 깨어 있는 영혼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지난 80년대 이래의 관성에 사로잡혀 이제는 형해화된 채로 진행되고 있는 민족·민주운동에 편승하여 자신의 문학을 낡고 진부하게 만드는 시인은 없는가. 변화하는 세상의 변화하는 삶을 적확하게 읽어내지 못할 때 시인이 더 이상 자기 역할을 해낼 수 없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변화하는 오늘의 삶, 다시 말해 엄밀한 의미에서의 근대성에 기반한 새롭고도 참신한 광주민주화운동 시가 더없이 요구되고 있다고 해도 좋다.
우리의 이러한 생각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즉 광주항쟁에 대하는 우리의 오늘의 현실을 잘 반성하고 있는 신경림의 시 「南道路室」 전문을 여기에 인용하며, 말을 맺는다. (1997)
인사치레로 망월동에 가서 참배를 하고
울적하니까 셀프호프집에 가서 생맥주 천씨씨짜리 두어개 걸쳤다
만만한 게 사회주의라 디립다 씹고 밟고 찢고
그래도 화가 안 풀리면 이번에는 노래방이다
[무정 부르스]를 목청껏 뽑고 [애모]를 악을 쓰고 부르다가
다 밝아 넝마가 되어 여관방에 와 누웠는데
이게 웬일이냐
금세 돌이 날으고 총알이 쏟아질 것 같은 금남로가
전봉준과 나란히 벽에 와 걸렸으니
정신이 번쩍 들어 불을 켜니
난데없이 벌거벗은 아가씨들이 떼로 몰려나와
자빠지고 엎어지고 온갖 요사를 다 떠는구나
저도 돌이 날으는 금남로를 보겠다는 건지
창문으로 기웃이 고개를 디민 저
허연 아카시아 꽃떨기에 어린 것이 눈물일까 달빛일까
이은봉
1. 머리말-절망과 부끄러움, 분노의 세계
1980년 5월의 광주민주화운동을 생각하면 그날의 현장과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던 필자에게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울컥하고 밀려 올라오는 뜨거운 아픔이, 추억이 없지 않다. 그해 봄의 일들이 라니! 물론 그때 필자 주변의 일들을 이 자리에서 자세히 다 얘기할 수는 없다. 어쨌거나 필자는 가까운 벗들과 함께 광주민주화운동 직후 고향 대전에서, 그리고 인근의 청주에서, 광주로부터 갓 올라온 그날의 소식을 담은, 김현장이 만들었다고 하는, 수사적으로 표현하여 피의 냄새가 줄줄 흐르는 전단을 통곡하는 심정으로 복사해 뿌렸던, 그렇게 동분서주했던 경험을 갖고 있다. 또한 그 일로 하여 필자를 대신해 청주의 시인 김창규 목사가 대전의 안기부로, 그곳의 지하실로 끌려가 엄청난 고생을 했다는 얘기를 아주 오래 뒤에 들은 적이 있다.
아무튼 광주민주화운동이 발발한 지도 벌써 17주년이 되어, 그것을 기념하는 행사의 하나로 오늘의 이 심포지움에 참여하게 된 필자로서는 여간 감개무량한 것이 아니다. 학살의 원흉인 전두환, 노태우가 사법처리되었고, 이어 5·18이 국가기념일로 결정되는 것을 보면, 사실 이번에 새롭게 단장된 망월동 묘역이 국립묘지로 승격되는 것도 시간 문제일 따름인 듯싶다.
필자가 광주민주화운동의 소식을 처음 접한 것은 변산반도 근처의 바닷가, 좀더 자세히 말하면 줄포에서 멀잖은 채석강 근처의 바닷가에서이다. 1980년 5월 18일 당시 대학의 조교로 있던 필자는 학생들과 함께 그 지역 일대에서 학술답사를 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말이 학술답사이지, 그 어수선한 시대에 학술답사가 제대로 이루어질 리 없었다.
왼종일 술에 쩔어 비틀거리는 교수들과 학생들의 뒤치닥거리를 마치고, 밤이 깊어 바닷가 언덕에 나와 막 담배 한 대를 피워 물며 휴대용 라디오를 켜고 사이클을 맞추던 중이었다. 갑자기 거칠고 씩씩한 북한 사투리의 사내가 라디오에서 튀어나와 흥분한 목소리로 광주의 소식을 마구 토해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 일로 하여 학술답사는 곧바로 끝이 났지만, 필자로서는 참으로 막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능 좋은 라디오를 구해 귀 기울여 북한 사투리를 듣는 것 이상은 달리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는 가운데 온갖 상상과 고뇌에 빠져 있었던 것이 당시의 필자이기는 했다. 스페인 혁명처럼 발전하지는 않을까, 피카소의 그림으로 유명해진 게르니카에서처럼 처참하게 학살당하지는 않을까,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문제 등으로 심하게 괴로워해야 했던 것이다. 만약 광주민주화운동이 스페인 혁명처럼 확산되어 갔다면 유럽의 지식인들, 특히 시인 크리스토퍼 코드웰이나 오든의 경우처럼 당시 이 땅의 많은 문인들도 총을 들고 참여하지 않을 순 없었을 것이다. 참으로 두렵고 가슴 떨리는 일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광주 공동체'는 열흘 남짓, 오래지 않아 그러한 유형의 두려움보다는 절망과 부끄러움, 한편으로는 분노에 휩싸여 지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당시의 필자이다. 광주는 필자에게 기껏 이러한 정도에서의 서정적, 시적 정서의 원천이었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당시 필자만이 아니라 광주 바깥의 대부분 시인들이 느끼는 보편적인 정서의 한 형태였을 것이다. 그때의 심정을 한참 뒤에 시의 형식으로 언어화한 것이 있어 일단 먼저 여기에 제시해보고자 한다.
그해 오월, 채석강 바닷가
늦게 핀 유채꽃잎들이
무데기로 으스러지고 있었지요
그 샛노란 절망의 꽃잎들이
우우우, 문드러지고 있었지요
답사 나온 학생들, 술 취한 대학교수들
도망치듯 팽개치고 떠나온 대학이
저 혼자 바다 위로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고 있었지요
자정이 넘고 밤 깊어 학생들
까닭없이 다투다 잠들고
교수들도 그렇게 잠들고
우연히 튼 라디오에서는
낯선 조선어,
북방의 재빠른 말씨들이
아아, 남쪽 도시의 한 피울움을
그런데 콩볶듯이 토해내고 있었지요
나는 손가락 사이에
겨우겨우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만 힘껏 집어던졌지요 바닷물은
미동도 하지 않는데, 혼자서 아뜩하게
6·25 남북전쟁에 대해서
그리고 스페인 내란에 대해서
조용히 조용히 중얼거리고 있었지요
그해 오월, 채석강 바닷가
영영 잊지 못할 눈물이지요.
- 「못 잊는 일」 전문
그해 오월을 광주 바깥에서 보낸 많은 사람들이 함께 나눌 수밖에 없었던 절망 혹은 부끄러움의 정서들을 필자는 이밖에도 [오월] [봄바다][일기-1980. 10. 17] 등의 시를 통해 형상화한 적이 있다. 심약하기 짝이 없는 필자로서는 기껏 이러한 정도의 암시적 정서를 통해 부족하나마 당대의 시대정신에 참여하고자 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1980년 5월 이후에는 광주의 안이든 바깥이든 저들의 학살과 억압에 따른 공포의 정서, 그리고 그에 기인한 자탄의 정서와 함께 하면서도 폭력적 군사독재에 맞서고자 했던 시들이 적잖이 씌어지게 된다. 박몽구의 [저물 무렵], 송기원의 [寒波], 박남준의 [寓話] 등의 작품에서 그 예를 볼 수 있거니와, 물론 이들 시에는 회한의 정서, 나아가 내면의 정직성에 입각한 엄정한 자의식이 짙게 깔려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이들의 시에 드러나 있는 정서들로부터 일찍이 채광석도 지적하고 있듯이 과도한 감상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감상성이 3·1운동 직후의 백조파 낭만주의자들이 보여주었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좀더 직접적으로 역사의 구체적인 한 현실로서 전두환 군사독재의 탄생에 대한 저주의 정서를 강하게 깔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의 예는 당시의 그러한 시적 현존을 담고 있는 이영진의 시 [단 한 줄의 시도 쓸 수 없다]의 일부이다.
노란 장미여
나는 이제 단 한 줄의 시도 쓸 수 없다.
도려낸 유방의 그 낭자한 핏구멍을 빨아대며 울부짖는
사내들 앞에서
피에 젖은 쓰레기통, 불에 그을린 시체더미 속에서
얼굴마저 없어진 어린것들의 흩어진 뼛조각을 찾아 헤매는
애처로운 어미들 앞에서
도대체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써야 될 무슨 진실이 남아 있단 말인가
아 하늘이여
머뭇거리는 나의 면상 앞으로
기운차게 날아드는 주먹과 돌멩이여
그래도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고 외쳐야 하는가
폭탄처럼 망설임 없이 터져버리는 분노한 생명들 앞에서
문밖으로 차 내던져지는 축구공보다 더 쉽게
죽음으로 던져지는 순한 친구들의 머리통 앞에서
분노와 설움, 절망과 자의식, 슬픔과 부끄러움 등 수많은 감정이 뒤섞여 있는 이 시로부터 광주민주화운동이 보편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매우 복잡다단한 정서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처럼 광주민주화운동은 처음부터 시인들에게 형용할 수 없는 정서적 다의성, 나아가 충만하고 격정적인, 그리하여 일면 감상적이기까지 한 정서의 변용들을 보여주고 있다. "도대체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써야 될 무슨 진실이 남아 있단 말인가"하고, 회한에 차서 자기 자신의 가슴을 향해 피의 화살을 쏘아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의 깨어 있는 시인들이 갖는 진실의 일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광주민주화운동을 직접적으로 체험했든 체험하지 못했든 당시 시인들이 언제까지나 그처럼 즉자적인 감정의 범람 속에 멈춰 있을 수만은 없었다. 감정의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말하자면 감정의 주체가 되어 좀더 바르고 정확하게 당면한 민족 현실을 형상화하게 되고, 그를 통해 시인으로서의 자기 규정을 새롭게 해야 할 처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인들에게는 전두환 군부독재에 의해 완벽하게 은폐되어 있고 축소되어 있던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을 고발하고 폭로하고 증언하는 일이 무엇보다 급했다. 모든 언론이 그 당시 입을 닫아걸고 침묵을 계속했었다는 것은 저 격조 높은 '광주공동체'에서 유일하게 오직 MBC건물만이 불에 탔다는 사실만으로도 잘 알 수 있다. 국내에서는 어느 신문 어느 방송에서도 광주의 진상을 올바로 보도하지 못했고, 그리하여 이제는 시가, 문학이 언론의 역할까지 대신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시가 갖고 있는 근원적 속성으로 보면 이는 확실히 불행한 일이지만 역사 속에서 시는 언제라도 기꺼이 그러한 역할을 떠맡아왔던 것도 어김없는 사실이다.
2. 고발과 폭로, 증언의 세계
일찍이 임헌영은 그날의 '광주 공동체'를 1871년의 빠리코뮨에 비교하여 논의한 적이 있다. 물론 빠리꼬뮨이 그러했던 것처럼 '광주 공동체'도 결국은 처참한 살육으로 끝이 나고 만다. 그러나 좀더 치욕스러운 일은 광주에서의 열흘이 보여주었던 그 아름답던 공동체와는 관계없이 전두환 군사정권이 이곳 사람들의 자유에의 의지와 민주화에의 열기를 폭도들의 파괴행위, 범법행위로 몰아 부쳤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 전모가 백일하에 드러났지만 그러한 연유로 하여 당시에는 계엄군들의 그 흉칙한 만행들이 정당화되고, 심지어는 미화되기까지 한 바 있다. 시가, 나아가 문학 일반이 급기야 이들의 만행을 고발하고 폭로하는 일까지 떠맡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돌이켜 보면 정확한 사실과 진상을 알리는 일에 시가 이처럼 동원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아픈 현실은 외면한 채 미처 그것이 시적 경지에 이르지 못했음만을 탓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는 아무래도 깨어 있는 역사 속에서의 시의 사명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기인할 것이다. 당시의 시에게 부여되었던 이러한 역할은 광주민주화운동 직후에 씌어진 김준태의 저 유명한 [아아 광주여! 우리 나라의 십자가여!]에서도 우선 그 일면을 찾아볼 수 있다.
(여보 당신을 기다리다가
문밖에 나아가 당신을 기다리다가
나는 죽었어요……
왜 나의 목숨을 빼앗아 갔을까요
셋방살이 신세였지만
얼마나 우린 행복했어요
난 당신에게 잘 해 주고 싶었어요
아아 여보!
그런데 나는 당신의 아이를 밴 몸으로
이렇게 죽은 거예요. 여보!
미안해요, 여보!
나에게서 나의 목숨을 빼앗아가고
나는 또 당신의 전부를
당신의 젊음 당신의 사랑
당신의 아들 당신의
아아 여보! 내가 결국
당신을 죽인 것인가요)
위의 시의 인용 부분은 계엄군에 의해 무참하게 살육된 한 임신부의 입을 통해 발언되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끔찍한 일이 사실로 증명되기까지는 참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1989년의 청문회 이후에야, 나아가 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증언이 구체적으로 채록된 이후에야 이 일이 사실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그 많은 시간들을 한순간에 압축, 단축시켜주었던 것이 김준태의 이 시라고 할 수 있다. 한때는 저들에 의해 단지 유언비어일 따름이라고 끊임없이 매도되었던 이 일은 임신부의 목소리가 아니라 태아의 목소리를 빌어 형상화하고 있는 고규태의 시 「나는 첫 아이였어요」를 통해서도 또한 발견할 수 있다. 당시 시인들은 이처럼 일단 먼저 고발과 폭로, 혹은 증언의 차원을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에 접근해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기독교의 이미지를 패로디하고 있다고 하여 일면 여타의 종교로부터 배타적 비판을 받기도 하는 것이 김준태의 위의 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독교의 순교 혹은 희생양 정신과 연결시키고 있는 이 시, 다시 말해 광주의 고난과 불행을 끝내 예수 부활의 이미지로 전화하고 있는 이 시의 근본적인 지향은 항쟁 직후에 자포자기의 절망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한 지난한 의지의 한 표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그가 이 시의 말미에서 "지금 우리는 더욱 살아나는구나/지금 우리는 더욱 튼튼하구나(‥‥‥) 광주여 무등산이여" 하고 외치고 있는 것에도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돌이켜 보면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이 전국적인 문제로 일반대중에게 부상되었던 것은 1985년 2월 12일에 있었던 총선에 이르러서 였다. 김대중, 김영삼 두 분에 의해 주도되었던 신민당이 선거전략의 하나로 광주항쟁의 진상을 전국적으로 홍보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일반 대중이 구체적으로 그 전모를 접했던 것은 『신동아』에 발표되었던 윤재걸의 르뽀와 황석영이 기록한 『어둠을 넘어 죽음의 사슬을 넘어』(풀빛) 등이 등장하면서부터라고 하는 것이 옮다. 따라서 그 이전의 단계에는 시인들에게 있어서 광주항쟁의 열흘간은 고발과 폭로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증언 및 사실의 재구성 차원에서도 깊이 있는 형상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박몽구의 시집 『십자가의 꿈』은 아직도 시사하는 바가 적잖다. 당시로서는 뛰어난 예술적 성취보다는 어떻게든 항쟁의 구체적인 사실과 진상을 극명하게 그려내는 것이 그날의 광주를 체험한 시인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임무였기 때문이다. 사실 그렇다. 박몽구의 이 시집에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전 기간이 나름대로의 추체험을 통해 매우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다음은 그의 시 「십자가의 꿈」 연작 중의 일부이다.
새로 투입된 진압군은 시시각각 깔아뭉개고 들어오겠다며
깊은 밤에도 장갑차와 헬리콥터를 띄워 우리들은 하얗게 잠깨곤 하였다
화정동 부근의 시민군들은 아카시아와 허술한 벽돌로
핵 시대의 군대와 대치하고 있다가
캐터필러가 떠밀면서 무차별로 갈기는 통에
시민군 몇 사람이 개죽음이 되었다
외곽에서는 식량이며 생필품이 들어오는 길도
죄다 막히고 말았건만
그럴수록 우리는 한가족이 되어 있었다.
모두들 한마음으로 궁정을 나누며 살고 있었다
술청마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방범초소가 부서진 지 오래지만 도둑의 그림자는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았다
-「십자가의 꿈·62] 부분
박몽구의 이 작품은 시로서의 형식은 갖추고 있지만 시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광주를 직접 체험한 사람의 고백적 증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오늘의 입장에서 보면 미처 '시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당시에는 이처럼 있는 그대로의 체험으로 형상화하는 것만도 아주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던 것이 사실이다. 어찌 보면 당시의 문학에게, 특히 시에게 언론이 해야 할 역할까지 부여되었던 것은 행복했던 일인 지도 모르겠다. 시인의 대사회적 역할과 기능이 바늘구멍만큼이나 작아진 오늘의 현실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어쨌거나 이러한 기능을 담당했던 광주항쟁과 관련된 시는 그 양에 있어서 자못 상당하다. 김남주의 [학살·2], 이영진의 「그로테스크한 시」, 김정환의 [편지], 채광석의 [애국가], 박정열의 [5월 25일 도청 안에서], 김형수의 [오리발과 빨간 나비넥타이] 등의 시가 그 예로, 이는 그것이 이룬 예술적 성취와 관계없이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시의 중요한 일부를 이루고 있다. 현대사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이 갖는 독특한 위치 때문이겠지만 우리의 시는 이러한 방식으로라도 당시의 언론이 직무유기했던 부분을 메워갔던 것이다. 물론 시는 앞으로도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민족사적 대사건에 대응해 나가게 될 것이다.
평면적이고 선형적인 관계로 이루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와 더불어 우리의 시는 점차 광주민주화운동이 갖는 역사적 의의를 드러내게 된다. 그 또한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시의 중요한 영역이라고 아니하지 못할 것이다.
3. 민족운동사적 의의 또는 찬(讚)과 추모의 의미망
지리적 한계를 인정하고 보면 1980년 5월의 광주항쟁은 1894년의 동학혁명 및 일제강점하의 광주학생운동과 그 역사적 맥을 함께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의 유신 쿠데타 이후 광주에서의 민주화운동이 특별히 선진적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따라서 그날의 광주민주화운동은 짐짓 예고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상대적으로 훨씬 뜨거운 애국심과 민주주의적 열정을 일종의 전통으로, 사회·문화적 집단무의식으로 간직해온 곳이 광주이기 때문이다. 이미 1976년 시인 조태일이 자신의 시 [겨울 소식]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는 더욱 그렇다고 할 것이다.
찬 바람 속에서 광주는
큰 애를 뱄다더라.
찬 눈에 덮여서도 무등산은
그렇게도 우람한 만삭이라더라.
하지만 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의가 이러한 정도의 지역적 한계 안에 갇혀 있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바이다. 전 민족시적인 입장에서 그밖에도 일제하의 3·1운동, 이승만 독재하의 4·19혁명, 그리고 전두환 독재하의 6월항쟁으로 이어지는 맥락 위에 광주민주화운동이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 사실 그렇다. 광주항쟁이 갖는 이러한 전 민족사적 의의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광주항쟁에 관한 시적, 문학적 대응은 상대적으로 매우 성숙해 있고, 앞서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정한모는 일찍이 [한국 현대시 약사]에서 일제강점기의 3·1운동과 관련해 제대로 된 민족시 한편이 남아 있지 않은 것에 대해 크게 통탄한 적이 있다. 무려 1만 명 이상의 동포들이 학살되고, 5만 명 이상의 동포들이 투옥, 구금되었던 것이 일제강점하의 3·1운동이었다는 점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고 보면 문학시적 입장에서 살펴볼 때 광주민주화운동은 상당히 행복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당시부터 즉석에서 시가 씌어져 낭송되기도 했지만, 그 이후 지금까지 이미 수천 편의 문학작품이 생산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특히 기억할만한 일은 시 선집으로 이미 {누가 그대 큰 이름 지우랴}(인동, 1987)와 {하늘이여 땅이여 아아, 광주여} (황토, 1990)가 간행된 바 있다는 사실이다.
어쨌거나 광주항쟁이 갖는 역사적 의의가 동학혁명에서 출발하여 3·1운동, 6·10운동, 그리고 4·19혁명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흐름 위에 자리한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또한 그것이 이른바 6월 항쟁의 뿌리로, 토대로 작용했다는 것도 이제는 역사의 정설이 되어 있다. 이러한 인식은 물론 사회과학적으로 연구되어 확정되기 이전에 당연히 시적 직관에 의해 먼저 파악되었다. 다음은 바로 그러한 시각으로 광주항쟁을 바라보고 있는 김진경의 시 [5월21일 도청 앞 광장에서]의 일부이다.
우리 역사는
우금치 고갯마루를 맴돌고 있었더니라
20만 동학군의 죽창이
눈사태처럼 무너진 이래
쓰러져 누운 흰옷을 논밭 삼아
착취의 칼날을 꽂는
식민의 세월
3·1절의 함성도
6·10만세의 함성도
광주항쟁의 울부짖음도
우금치 고갯마루를 맴돌다
끝내 무너졌더니라.
그리고 해방이라고 했던가
넘을 수 없는 우금치 고갯마루에
겹겹이 철조망이 쳐지고 지뢰가 묻히고
그는 그걸 38선이라 했더니라.
휴전선이라 했더니라.
4·19도 우금치 고갯마루를 넘다
철조망 위에 무너져 내렸더니라.
1980년 5월 21일
광주 도청 앞 광장에도
그 운명의 고갯마루는 있었다.
분노한 시민들의 물결이
학살자들이 쫓겨 들어간 도청을 향해 압박해 가고
총성이 울렸지.
이 시에서 시인 김진경이 궁극적으로 의도하는 것은 광주민주화운동의 의의를 근현대사의 민권운동 및 민족자주운동, 나아가 민족·민중운동의 연맥 위에 위치 지으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직하게 말하면 이러한 작업 또한 시 이전의 것으로, 신군부에 의해 폭도들의 난동으로 규정되어진 광주항쟁을 정통성 있는 민족·민중운동으로 복권해내 기 위한 운동사적 의미가 크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그것 자체가 일종의 문화적 투쟁의 하나였다는 셈이다. 필자가 졸작 「3월 하늘」에서 "구름이 흐르는 것을 본다/3월에서 4월로/4월에서 5월로/뭉게뭉게 솟아오르는 구름을 본다/굽이치는 구름덩이를 본다/민주주의의 폭풍우를 본다"라고 노래했던 것도 실은 그와 다르지 않은 발상이었다. 하종오가 자신의 시집 제목을 {4월에서 5월로}로 잡았던 것도 물론 마찬가지의 인식 때문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은 이미 깨어 있는 민중들의 의식 속에서는 빛나는 조국의 역사로 당당하게 편입이 된 것이다.
광주항쟁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마침내 일종의 찬가를 낳게 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이는 사실 광주민주화운동의 분명한 역사적 의의를 생각하면 그다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다.
일단 찬가는 광주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애국 열사들에 대한 추모시의 형태로 형상화된 바 있다. 서정시의 본래적 속성 중에 찬가적인 면이 없지 않다는 점을 생각하면 광주민주화운동시가 서정시 본연의 모습을 담아내기 시작했다고도 할 것이다. 광주항쟁 시의 이러한 모습이 물론 선형적이고도 평면적인 발전 위에 놓여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때의 시가 신이나 영웅에 대한 전통적 찬가의 모습을 그대로 취하고 있을 리는 만무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광주민주화운동은 역사적 비극으로서 그 내부에 한없는 슬픔과 눈물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의 시는 이러한 의미에서 살펴볼 수 있는 고규태의 [화정동 노을]의 일부이다.
분노가 깊으면 저렇게 붉은가
증오가 깊으면 저토록 찬란한가
쓸쓸한 바람 몰려가는
돌고개 저 너머 화정동 마을
친구의 얼굴을 보겠네 그날 쓰러진
꽃청춘, 아깝게 아깝게 식어간
친구들의 노한 눈빛을 보겠네
못 잊어 못 잊어 못 잊어
금남로 사랑 충장로 넉넉한 사랑
도청 분수대에서 나누던 융융한 사랑
못 잊어 타는 그대의 햇붉은 가슴을
화정동 노을 속에서 나는야 보겠네
고규태의 이 시에서와 같은 정서는 그밖에 박승옥의 [오월의 겨울], 이도윤의 [오월의 꽃·4], 배창환의 「봄날」, 양성우의 「해방연가」 등의 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들 시에 드러나 있는 찬과 추모의 정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가슴 뭉클함은 충분히 예술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광주항쟁에 대한 이처럼 폭넓은 찬과 추모의 정은 이내 좀더 구체적인 대상으로 좁혀져 드러나게 된다. 말하자면 좀더 구체적인 인물들이 시적 대상으로 떠오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 그것은 김해화의 '오빠', 박선욱의 '누이', 김용락의 '누님', 임동확의 '너', 박남준의 '그대'등처럼 다소 막연한 호칭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최두석의 '서호빈' '기종도', 양성우의 '박관현', 하종오의 '김종태', 김희수의 '홍기일' 등처럼 명확한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데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실제적인 모습이 드러나면서 그들의 죽음에 대한 서사적인 기록이 요구되기도 했겠지만 구체적인 작품의 발상에서 좀더 현실성을, 다시 말해 리얼리티를 획득하기 위한 시인들의 노력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음은 그러한 입장에서 씌어진 것이 확실한 최두석의 시 「서호빈」의 일부이다.
건물 왼편 뜰에 누운 사람들 모두 살펴도 그녀의 애인 서호빈은 없었다.
안도감으로 무너지는 몸을 계단에 앉히니 일등병이 다가와 옆에 앉았다. 그러고는 데모하는 대학생 놈은 모조리 죽여야 한다고 지껄였다. 뒤뜰에 있는 여덟 놈은 모두 자기가 쏘았다고 지껄였다. 그녀는 소스라쳐 일어나 뒤뜰로 갔다. 첫째 시신을 보니 아니었다. 둘째 시신도 아니었다. 셋째 시신을 덮은 광목을 들치니 이마에 안경이 걸쳐진 그이였다.
광주민주화운동 중에 죽은 서호빈의 시신을 찾아내는 과정을 애인의 시각을 빌려 그려내고 있는 것이 이 시라고 할 수 있다. 최두석 특유의 '이야기시론'에 근거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시 역시 기본적으로는 사실의 복원 차원에 자리해 있다. 물론 이 시의 모든 면이 전적으로 다 그러한 것은 아닌데, 사실의 복원 자체가 이미 찬과 추모의 정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민족사의 매우 중요한 단계에 참여하여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삶을 제대로 복원하고, 노래하는 것만큼 중요한 시의 역할과 기능도 없다고 할 것이다.
돌이켜 보면 광주민주화운동의 시 가운데에는 과도할 정도로 찬과 추모의 정을 담은 작품이 많은 감도 없지 않은데, 물론 이들 모두가 제대로 된 시적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다. 적잖은 경우 시적 여과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은 가운데 상투적으로 씌어지고 발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생각하면 광주항쟁 시에도 당연히 일정한 형상화의 과정, 심미화의 과정이 요구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망월동과 무덤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몇몇 광주항쟁 시에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한 작품들의 경우 상대적으로 좀더 시적 경지, 심미적 경지에 이르러 있다는 것이다.
4. 맺음말-망월동 혹은 무덤의 이미지
시의 언어가 본래 직접적인 설명의 방식보다는 우회적인 비유 혹은 상징의 방식을 택한다는 것은 익히 주지하는 바이다. 그 과정에 상상의 기쁨과 즐거움이 싹트고, 그렇게 상상하는 과정에 획득되는 진실이 우리의 삶에 커다란 깨침을 주기에 시의 언어는 그러한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아닌가. 광주민주화운동을 노래한 시 역시 미적 여과과정을 밟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다름 아닌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새삼스러운 지적이지만 일정한 정도는 미적 경지에 이를 때 광주민주화운동의 시도 독자들의 정서를 바르게 감염시킬 수 있고, 마침내 서정시 일반과의 경쟁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러한 점에서 생각하면 무엇보다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이 망월동의 이미지이다. 주지하다시피 망월동 자체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 순절한 애국 시민들의 공동묘지가 있는 지역의 명칭일 따름이다. 그러나 광주민주화운동 시에서 망월동이 단순히 그러한 정도의 의미 망만을 내포하는 것은 아니다. '망월동'은 그리고 그 묘지는 광주항쟁 정신 일반을 은유하기도 하고, 그로부터 비롯된 80년대의 민족·민중운동 전반을 상징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망월동'은 좀더 구체적으로 당시의 군사독재 통치세력에 대한 저항과 도전을, 그리고 나아가 일종의 민족·민중운동의 성지로서 순례의 터전을 비유하기도 한다. 송수권의 「망월동 가는 길」, 김하늬의 「망월동으로 가는 길」, 김용락의 「망월동」, 정삼수의 「망월동 옛 생각」, 하종오의 「望月」, 이승철의 「망월동에서」 깅해화의 「5월묘 가는 길」, 이성부의 「共同山」, 이영진의 「성묘」 등에서 그러한 면을 볼 수 있거니와, 다음은 남달리 서정적 흥취를 듬뿍 풍기고 있는 강형철의 시 「순례」의 전문이다.
가을 탱자나무 가시를 들추며
몇은 손을 금했고
몇몇은 그날의 함성과 피에 대해 말하면서
망월동을 찾아가고 있었다
다락논에는 벼포기가 낫에 베인 자국을 움켜쥐고
하늘에 닿아
잔잔한 물기에 몸을 적시고 있었다
이 땅에 젊어 태어난 것이
저주라고 축복이라고 익숙한 말들이
억새풀 사이에 숨었다.
여보 당신은 천사였소
천국에서 만납시다
묘비 뒤에 목울대를 넘기는 핏기
젊은 신랑의 소리가
우리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고
우린 모여 절을 올렸다
무덤들이 눈을 들어 행길로 달려갔고
소주를 부었다 한 아름
담양 쪽으로 나간다는 산길을 따라
몇몇은 절뚝거리며 갔고
몇몇은 잡풀 끝을 손에 쥐며
손이 베이는 것도 몰랐다
오랫동안 눈빛이 차올랐다
사람의 얼굴
오지게 그리운 사람의 얼굴
그 위로
미류나무는
은사시나무로 빛을 보듬어 우리 곁에 쏟아부었다
망월동 묘지에의 참배 체험 혹은 순례 체험을 담고 있는 것이 이 시에 담겨져 있는 주요 내용이다. 이 시에서의 시적 자아는 비교적 차분한 어조로 자신의 순례 체험을 형상화하고 있는데, 아마도 그것은 그가 특별히 불필요한 욕망을 잘 절제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에서 기인했겠지만 이 시에는 "잔잔한 물기에 몸을 적시고 있는" 순례자들의 모습과, 순례자들이 느끼는 서정이 잘 드러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적 자아가 망월동 묘지를 참배하면서 느끼는 벅찬 마음, 즉 잡풀들에 의해 "손이 베이는 것도" 모르고 "오랫동안 눈빛이 차"오르는 순정한 마음이 느끼는 정서를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 성지로서의 망월동에 이르러 함부로 그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가운데 발견해내는 시적 자아의 무구한 진실을 이 시에서는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는 시인 강형철이 망월동의 이미지라고 하는 명확한 시적 여과체를 통해 순례자로서의 지순한 정신을 차분히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강형철의 이 시가 보여주는 서정적 흥취는 망월동의 구체적인 묘지로부터 발상을 하고 있는 이영진의 「무덤은 큰 입이다」에서도 마찬가지로 찾아볼 수 있다. 그 역시 충분한 시적 장치를 통해 광주항쟁이 갖는 중요한 의미를 격조 있는 호흡으로 형상화화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그의 시 「무덤은 큰 입이다」의 일부인데, 이미 그 자체로 뛰어난 이이지가 선택되어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무엇으로 말을 하는가
살랑이는 봄바람 혹은 봄꽃들을 어떻게
함부로 노래하는가
갈수록 말이 줄어드는 나를 보고
이젠 철이 들어간다지만
소주에 쩔은 이빨들아
족발을 물어뜯는
입술들아, 무엇으로 입을 여는가
큰 희망으로 타오르던 그해 여름
횐 천을 두른 친구들은
산으로 쫓겨가며 말이 없었다.
분수대 곁에서 타오르던 칸나꽃은
뚝뚝 핏방울을 흘렸고, 친구들은
미쳐서 미쳐서 그 아름다운 꽃길로
사라져 갔다
아아, 숨어서 쥐구멍을 파던 가슴으로
쥐구멍을 파다파다 피가 마른 가슴으로
어떻게 지껄여야 하는가
말이란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온몸으로 오는데
앞의 시와는 달리 이 시는 독자들의 가슴으로 격정적 호흡이, 그리고 숭고하고 웅혼한 기세가 휘몰아쳐 들어오는 작품이다. 따라서 폭풍처럼 다가오는 이 시의 운기에서 거칠 것 없는 호연지기를, 또한 한편으로 끝없이 일그러지는 고뇌에 찬 시인의 내면세계를 읽은 것은 짐짓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러한 점에서도 여타 광주민주화운동 시의 한계를 충분히 돌파하고 있는 것이 이 시라고 할 것인데, 물론 이는 시인 이영진의 남다른 심미적 운산(運算)에서 기인할 것이다.
돌이켜 보면 벌판을 내달리는 말발굽 소리를 함축하고 있는 이 시와 같은 호흡은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 「관동별곡」의 전통을 받고 있는 남도 특유의 리듬이라고 할 수 있다. 조태일과 김지하의 초기시, 그밖에 김준태와 김남주 등의 시에서도 보여지는 이러한 호흡과 가락만으로도 이 시는 사실 돋보이는 바 없지 않다.
이 시는 역사를 향한 아무런 실천적 노력도 없이 입만 살아 지껄여대는 당대의 현실에 대한 암유적 풍자를 담고 있기도 하다. 물론 그의 이러한 인식은 자신의 내면을 향한 끊임없는 자기 점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생각된다. 모택동의 용어를 빌면 굳거나 멎지 않고자 하는 깨어있는 자아의 끊임없는 '조반유리(造反有理)'에서 이 시의 웅혼한 긴장감은 탄생되었을 것이다. 역사의 가시적인 현상에 집착하지 않고 그 배후에 가려져 있는 진실을 바르게 추적하고자 하는 시인의 뜨거운 열정을 읽을 수 있다고 해도 좋으리라.
이러한 점에서 생각하면 사실 현금에 이르러 씌어지고 있는 광주민주화운동 시의 경우 지나치게 상투화되어 있지 않은가, 공식화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느낌도 없지 않다. 이제는 광주민주화운동 시도 의례적으로 거쳐 지나가는 추모시의 차원으로, 기념시의 차원으로 전락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관습화되고 인습화된 반항 정신, 그리하여 왜곡되고 뒤틀린 저항 정신에 갇혀 우리 시대의 문제점을 오히려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면 그 동안 광주·전남에서 생산되는 시의 경우 지나칠 정도로 1980년의 5월에 얽혀 있었던 점도, 매몰되어 있었던 점토 아주 없지는 않다. 세상은 이미 저만큼 달려가고 있는데, 아직도 1980년 5월이 내리누르는 중압감을 벗어나지 못해 낡고 진부하기 짝이 없는 동어반복을 계속하고 있는 시인도 더러는 눈에 띈다는 것이다. 벌써 90년대도 후반기에 다다른 오늘의 광주 전남의 시인들에게 좀더 열려져 있는 마음가짐, 좀더 깨어 있는 영혼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지난 80년대 이래의 관성에 사로잡혀 이제는 형해화된 채로 진행되고 있는 민족·민주운동에 편승하여 자신의 문학을 낡고 진부하게 만드는 시인은 없는가. 변화하는 세상의 변화하는 삶을 적확하게 읽어내지 못할 때 시인이 더 이상 자기 역할을 해낼 수 없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변화하는 오늘의 삶, 다시 말해 엄밀한 의미에서의 근대성에 기반한 새롭고도 참신한 광주민주화운동 시가 더없이 요구되고 있다고 해도 좋다.
우리의 이러한 생각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즉 광주항쟁에 대하는 우리의 오늘의 현실을 잘 반성하고 있는 신경림의 시 「南道路室」 전문을 여기에 인용하며, 말을 맺는다. (1997)
인사치레로 망월동에 가서 참배를 하고
울적하니까 셀프호프집에 가서 생맥주 천씨씨짜리 두어개 걸쳤다
만만한 게 사회주의라 디립다 씹고 밟고 찢고
그래도 화가 안 풀리면 이번에는 노래방이다
[무정 부르스]를 목청껏 뽑고 [애모]를 악을 쓰고 부르다가
다 밝아 넝마가 되어 여관방에 와 누웠는데
이게 웬일이냐
금세 돌이 날으고 총알이 쏟아질 것 같은 금남로가
전봉준과 나란히 벽에 와 걸렸으니
정신이 번쩍 들어 불을 켜니
난데없이 벌거벗은 아가씨들이 떼로 몰려나와
자빠지고 엎어지고 온갖 요사를 다 떠는구나
저도 돌이 날으는 금남로를 보겠다는 건지
창문으로 기웃이 고개를 디민 저
허연 아카시아 꽃떨기에 어린 것이 눈물일까 달빛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