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 시단의 현재와 새로운 모색. 신덕룡(문학과 진실의 아름다움, 새미, 1998. 7)
본문
광주 시단의 현재와 새로운 모색
신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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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시와 사람} 창간 기념식에서 행한 강연의 내용입니다. 편집자의 요청에 따라 여기에 약간의 손질을 가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제목을 지역문예지 출발의 의의로 정했습니다만, 저는 오늘날의 삶의 양태와 관련지어 광주정신을 살펴보고, 앞으로 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지역문예지 창간의 의의 순서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최근 광남일보 「산내들」이란 칼럼에서 영웅신드롬이란 글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내용은 영상세대의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가 책읽기를 싫어하는 것인데, 이상하게도 {그리이스 로마신화}가 인기를 누리고, 이와 관련된 서적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이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이를 분석하는 방식이 재미있었습니다. 즉 첨단 문명과 거 대화되는 자본주의의 영향력 앞에 20세기말의 대중들은 왜소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비젼도 뚜렷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심리상태의 대중들에게 현실과 상상의 공간을 휘젓고 다니는 신화 속의 영웅들의 행동이 매력적으로 비쳐지기 때문에 이런 류의 책들이 잘 팔린다는 진단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월드컵의 펠레, 마라톤의 황영조, 탐험가 허영호 등 이런 인물들이 우리 시대의 우상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인간의 창조적 능력을 확대시키고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이런 영웅 신드롬이 영웅 자체를 이데올로기화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칼럼에서는 맹목적이고 영웅주의적 폭력이 집단화하는 것으로 그 폐해를 지적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본질적인 것은 패소해진 자신을 우리 스스로가 부정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동일시나 대리충족을 통해서 고통스런 현실을 잊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업주의 문학과 결부시켜 말한다면, 대리만족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자기 기만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자기 배설적인 형태를 띠기도 합니다. 즉 자신의 삶을 냉철하게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는 점이지요. 오늘의 현실을 생각해 보면, 그 폐해는 더욱 심각합니다. 생존의 문제를 놓고 벌이는 남북한의 정치행태나 환경·공해문제 등은 차치하고라도, 첨단 문명의 위력 앞에 왜소해진 우리의 삶을 생각해 봅시다.
우선 컴퓨터와 관련된 우리의 삶을 살펴봅시다. 현재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컴퓨터를 즐기고 있습니다. 컴퓨터를 즐기면서 우리는 컴퓨터의 암기력과 일을 처리하는 속도에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또 그 편리함에 길들여져서 불편함을 참지 못하지요. 한 예로, 요즈음의 원고 전달방식을 생각해 봅시다. 10여 년 전만해도 원고를 들고 잡지사를 찾거나, 정중한 안부편지와 함께 원고를 보냅니다. 요즘은 많은 작가들이 전자통신으로 원고를 출판사에 보냅니다. 따라서 작가들 사이에, 작가와 편집자 사이에 인간적인 교류가 별로 없습니다.
한가지 예를 더 들자면 요즘 유행하는 인터넷 강의를 들 수 있습니다. 교수가 인터넷을 통해 자신의 방을 만들고, 거기에 강의 내용을 제시하면 학생은 집에서 이를 보고 공부를 합니다. 교수는 교수대로 편리하고, 학생은 언제든지 여러 교수의 강의를 들을 수 있어서 좋다고들 합니다. 이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기계가 끼어 들면서 생겨난 자연스런 삶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런 편리함 속에서 우리들 삶의 중요한 것들이 희생된다는 것을 잊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기계에 대하서 두려움과 열등감을 갖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애써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기계보다 열등하다는 사실이 기분 나쁘기 때문이지요. 소외감보다 무서운 것이 옅등감입니다. 열등감은 우리 내부에서 모든 사물이나 사실을 왜곡시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애써 부정하려고 합니다만, 우리 내부에서는 이미 이런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인정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어떤 구체적인 방향을 찾아야 할 시기입니다. 문명과 더불어 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계에 중독된 삶 역시 위험합니다. 인간관계를 무시하고 편리를 도모한다는 생각 그러고 오로지 컴퓨터에 의지해 있는 삶이란 결국 비틀린 삶에 불과합니다.
둘째로 인간관계의 단절입니다. 학교에서의 공부는 선생과 학생사이의 인간관계가 중요합니다. 대학에서는 인간관계가 덜 중요하다고 합니다만, 학문하는 자세나 태도, 학문하는 목적 이러한 것들은 결국 인간적 교류를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편리함과 능률 때문에 이를 무시한다면 대학은 도덕적 품성을 갖추지 못한 기술자를 양성하는 기관에 불과 합니다. 또 능률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풍토가 점점 더 확산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에 의해 운용되는 지식이나 기술은 언제든 흉기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것 역시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요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가 생략된 삶이나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을 기회의 축소는 급기야 고립감을 불러오고, 이는 철저히 도덕적 불감증에 걸린 개인주의적인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현실이고 앞으로 이런 경향은 더 심화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젠 우리가 직면한 후기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을 생각해 봅시다.
충장로 거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몇 년 전하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해진 상점들, 패션 모델처럼 걸치고 다니는 사람들, 네온사인과 어울어진 들뜬 분위기, 마치 수많은 물질적 욕망이 들끓는 전시장을 걷고 있는 듯 합니다. 당연한 현실입니다. 후기 자본주의적 생활 양태는 소비생활로 특징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의 이면에는 물질적 욕망에 따른 삶의 순간성, 쾌락성 추구라는 인간 본성이 깔려 있습니다.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장 보드리야르가 {소비의 사회}에서 지적하고 있듯, 욕망은 또 다른 욕망을 재생산하기 때문에 욕망의 확산은 재화생산 속도를 넘어서게 됩니다. 인간은 이것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게 되고요. 브레이크가 없지요. 한마디로 근면, 성실이란 구호는 이미 지나간 시대의 것으로 여겨짐은 물론입니다. 여기엔 정신적인 가치나 윤리의식, 삶의 균형감각이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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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적 욕망에 추종하는 또 여기에 길들여지는 삶이 곧 인간적 품성의 상실로 이어진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요즘 급격하게 비디오를 통해 보편화되는 에로티시즘의 확산이나 인간조차 상품으로 전락하는 현상을 곳곳에서 보게 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이러한 현상들은 영상세대로 일컬어지는 새로운 세대의 생활양식이고 이미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문제는 이런 삶이 자연스럽게 우리의 생활이 되었고 우리는 여기에 길들여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연스럽게 다가온 변화를 무심히 따라가는 깃이 과연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인이라면 최소한 비판적 거리를 갖고 삶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경림의 시를 통해서 제 이야기를 발전시켜 볼까 합니다.
인사치레로 망월동에 가서 참배를 하고
울적하니까 셀프집에서 생맥주 천씨씨짜리 두어개 걸쳤다
만만한 게 사회주의라 디립다 씹고 밟고 찢고
그래도 화가 안 풀리면 이번에는 노래방이다
[무정부르스]를 목청껏 뽑고 [애모]를 악을 쓰고 부르다가
다 밝아 넝마가 되어 여관방에 와 누웠는데
이게 웬일이냐
금세 돌이 나르고 총알이 쏟아질 것 같은 금남로가
전봉준과 나란히 벽에 와 걸렸으니
정신이 번쩍 들어 불을 켜니
난데없이 벌거벗은 아가씨들이 떼로 몰려나와
자빠지고 엎어지고 온갖 요사를 다 떠는구나
저도 돌이 나는 금남로를 보겠다는 건지
창문으로 고개를 디민 저
하얀 아카시아 꽃떨기에 어린 것이 눈물일까 달빛일까
- [南道路室] 전문
이 시는 저희 창간호 {시와 사람}에 실린 문학평론가 문흥술 님의 글에서도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만, 오늘의 광주와 광주 시단을 조명하는데 매우 절절한 언술을 담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인사치레"의 망월동 참배와 "벌거벗은 아가씨들"의 행진이 보여주는 기묘한 관계입니다. 관계라기보다는 유사성이지요. 광주의 비극은 이미 기억 속에 사라지고, 그것이 주는 삶의 의미가 단지 형해화되어 인사치레용 행사로 남았다는 비판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 당연한 지적입니다. 아울러 전국의 다른 도시와 같이 욕망이 들끓는 공간으로 변한 것이 오늘의 광주임을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민주의 성지라고 말하는 광주가 양담배 소비율 전국 1위, 외제차 보유율 전국 2위라는 현실이 그것을 말해 주기도 합니다. 우리는 과거 광주항쟁 당시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구별없이 독재와 맞서 싸웠던 사실을 기억합니다. 이 싸움은 공동의 생존투쟁이었으며 민주화를 향한 열정의 표현이었습니다. '우리'라는 공동운명체 의식이 이 나라의 역사를 바꾸게 하는 결정적인 힘이었고, 다른 곳에서 볼 수 없었던 역사에 대한 신념으로 표출되었습니다. 그러나 반독재, 반제국주의에 맞서 싸웠던 열정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두 갈래의 양상을 띠고 전개되었습니다. 그 하나는 광주정신으로 무장한 순결주의고, 다른 하나는 후기 산업사회에의 재빠른 편승입니다. 전자의 경우, 지난 십 수년간 80년 오월의 상처와 기억, 이의 치유를 위한 어떤 노력도 발견할 수 없었기에 그 상처는 더욱 깊어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문제는 우리 시인들에게 있습니다. 90년대에 들어 저항이데올로기는 변화된 상황에 상응하여 내면화되고 보다 깊은 정서의 원천으로 자리해야 함에도 이를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왔던 것입니다. 마치 피할 수 없는 업보로 남아 이를 벗어나면 큰 죄를 짓는 양 두려워했습니다.
앞서 인용한 시에서 보듯 "인사치레"로 변한 행사와 "벌거벗은 아가씨들"이 온갖 요사를 떠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시단은 이런 현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움직임도 절실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을 인정하는 것이 광주의 정신을 훼손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빠져 있었던 것이나 아닌지? 이것은 분명 훼손이 아닙니다. 변화된 삶을 인식하고, 이에 따른 대응방식과 이런 상황에서 광주정신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느냐는 논의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과문한 탓인지 이런 노력들이 구체화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합의된(?) 침묵만이 있었다고 할까요? 이런 점에서 과거는 현재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규제하는 족쇄로 작용하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광주정신을 생각하고 이를 시화하기 위한 노력은 자기 비판의 정신으로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끊임없이 변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과연 이러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시와 사람} 창간호에 실린 정윤천과 김호균, 두 젊은 시인의 시를 보겠습니다.
누야는 막내를 업고 나는 새참 보퉁이 마을은 벌써 등 너
머끝이나 산입드는 탱자나무 길 고적한 울타리가엔 누군가 흘려
놓고 간 상여꽃 …… 하얀 …… 상여꽃 ……
어디선가 들쑥 향내는 바람에 일고
미영꽃 하얀 미영밭 속에 할매는 영락없는 한 송이 미영
꽃 엄니는 흙묻은 젖무덤 열어 엉거주춤 뒷태 돌아앉으면
우리 식구 그 산밭머리
어디선가 들쑥 향내는 바람에 일고
한 삼 년 미영농사 벌어 이불 세 벌 짓고 나면 누야는 삼
십리 길 시집가는 길 꽃처럼 그 길 위에 흘려놓고 간 손수건
…… 하얀 …… 손수건 ……
어디선가 들쑥 향내는 바람에 일고
-「들쑥 향내는 바람에 일고」 전문
장선우가 「꽃잎」 찍던 날
금남로는 온통 흑백 사진첩 속으로 들어가 버렸네
쏘아대는 총알 맞고 푹 쓰러지는 시민
이 실감나는 연기는 알고보면 계속되는 살이었네
딸 아이 안고 모형장갑차에 이르렀을 때도
소품으로 팔린 궂은 돌멩이 밟으니
마음 속의 과격이 돌을 던지더라니까
나의 소갈머리는 아직
그곳으로 열려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네
이 한 마디를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가로등이 고개 수그리고
도로에다 소리만 남겨두고 가는 자동차 또한
삶의 꼬리인 듯
시작과 끝이 없는 바퀴를 굴리며
눈물 골짜기 속으로 지나가 버리더군
엉킨, 엉킨 꽃잎 만장들 오늘도 지나가고 있더군.
-「꽃잎 만장」 전문
물론, 두 편의 시에서 받는 인상은 각기 다릅니다. 앞의 시는 농촌의 풍경을 배경으로한 회고적 서정, 뒤의 시에서는 광주항쟁의 정신을 바탕으로 현재의 삶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두 편의 시가 타 지역 시인들의 작품이라면 그 평가에 인색할 이유가 없습니다. 두 편의 작품 모두 독특한 개성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시인들이 광주에 살면서 우리 지역의 정서를 시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었음을 말씀드립니다. 즉 자기성찰의 대상으로 든 예라는 점입니다. 여기서의 문제는 광주항쟁의 정신이 보다 심화되거나 확대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비판정신이 철저한 현실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앞의 시에서 말하는 바, 회고적 서정의 바탕엔 오늘날의 농촌이 파괴되는 원인과 이유에 대한 고민이 드러나야 합니다. 단순한 회고적 서정이라면 이미 60년대 이후 계속 쓰여졌던 전통 서정시에서 한 발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오늘날의 농촌은 회고적 서정으로 바라보기에는 너무 참혹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두 번 째 시에서도 마찬가집니다. 화자는 "실감나는 연기"에서 오늘의 삶을 발견합니다. 오늘날에도 진실이 은폐되고, 그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는 지역적인 정서가 보입니다만, 이것도 사실은 제스쳐에 불과합니다. 보다 진실된 정서는 '마음속의 과격'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과격'이 나의 삶에 어떻게 투영되고 구체화되었느냐는 자문에서 우러나옵니다. 구체적인 현실과 연결되면서 자신이 삶을 냉철하게 돌아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 시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앞의 신경림의 시에서 말했습니다만, 우리가 80년 오월의 광주에 매달려 있다는 것은 내면화되지 못한 상태에서 오늘의 삶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진정으로 광주정신을 생각하고 이를 시화하기 위한 노력은 자기 비판의 정신으로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끊임없이 자기 변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광주정신의 순결성(비타협적인 태도) 때문에 변화하는 현실을 부정하고 회고적 서정에의 퇴행을 보이다거나 감성의 차원에서 아픔을 노래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길이기도 합니다. 몇 년 전부터 생태주의에 대한 관심이 드러나고 있습니다만, 한 두 사람의 변화를 가지고는 광주의 시단이 변화하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들의 변화도 아직은 시작의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다음의 시를 보겠습니다.
왜 새들은
안보이는 나라로까지 날아가서 죽을까
그 마음을 아는 나뭇잎들이
땅에 떨어져 …… 갈 곳을 몰라하는
벌레들의 뒷등을 덮어준다.
-김준태의 「무제」 전문
참 고운 물살
머리카락 풀어 적셨네
출렁거리는 산들의
부신 허벅지 좀 봐
아무 때나 만나서
한몸되어 흐르는
눈물나는 저들 연분홍 사랑 좀 봐.
- 곽재구의 「찬 맑은 물살」 2연
앞의 시에서 우리는 자연의 섭리와 그 속에 깃든 오묘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시인의 눈에 비친 자연은 단순히 있음의 세계가 아니라 나눔의 세계임을 알게 됩니다. 자연의 섭리에 대한 질문에는 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맞는 새의 외로움을 "나뭇잎들"이 함께 나누고 있음을 느낄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시인과 함께 서로를 감싸 안으며, 사랑을 나누고 있는 내밀한 세계를 엿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 시 역시 참으로 아름다운 시입니다. 봄볕이 완연한 계곡물, 새싹으로 작은 생명들을 밀어올리는 나뭇가지와 산들의 일렁임 …… 작고 소중한 생명들이 뿜어내는 아름다움이 눈앞에 선연합니다. 두 편의 시 모두,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진실한 애정이 없이는 쓸 수 없는 시입니다. 이런 생명의 소중함과 기쁨을 노래하면서 그렇지 못한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음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또 다른 측면도 있습니다. 이런 생명들의 세계와 공간 -산과 들, 강과 바다-은 문명에 의해서, 인간의 욕망에 의해서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이제 자본주의적 관계로 변해 있습니다. 공존이냐 타협이냐를 놓고 끊임없이 저울질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 아직까지는 일방적인 개발의 논리에 의해 이런 관계가 순조롭게 이어지지는 않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개발의 논리에 의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세계가 위협받고 있고, 그 위협은 이미 전라도 땅에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올해 영광 원전사고와 여천 석유화학 공단의 공해문제가 전국적인 관심사로 떠올랐습니다. 저는 아직까지 그 심각성이 뼈속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작품을 대하지 못했습니다. 공해문제나 생태문제는 이미 지역적인 문제가 아닙니다만, 오늘의 우리 삶의 터전에서 파생된 중요한 생존에의 위협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런 문제가 현실에 깔려 있는 한 어떤 생명도 아름다운이나 소중함 그 가치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런 문제는 사회구조에 대한 분석이나 인간의 욕망, 생명의 존엄성을 철저하게 인식하는 데서 제기되는 깃이기에, 생명의 문께는 곧 우리의 중심문제여야 한다는 전제가 따릅니다. 생명문제에 관한 한, 가장 시급한 문제가 발생하는 곳이 곧 가장 선진적인 문명비판의 공간이요 또한 중심의 과제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현장에 서 있습니다.
이러한 비판은 앞서 지적한 두 번째의 문제 즉, 후기 산업사회에의 재빠른 편입과 연결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80년의 광주와 96년의 광주는 다릅니다. 한마디로 같은 정서를 공유하고 있되, 삶은 갈등을 지닌 산업사회의 계급구조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가진 자의 몫과 못가진 자의 몫이 다릅니다. 먹고사는 문제에 관한 한 우리 지역 역시 심한 갈등관계에 있습니다. 또한 가진 자의 오만과 무분별한 소비행태는 광주 전체를 단일한 소비문화 속에 가두고 있습니다. 가진 자의 생활을 쫓아가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자본의 논리와 힘은 이미 우리의 삶과 의식 곳곳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민주'나 '정의', '역사' 등 삶의 기본적인 덕목에 접근하는 것을 방해하고 하고 있습니다. 너도 나도 물질적인 욕망 속에 빠져 들고, 그 속에서 삶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현상이 광주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현재 우리 나라 전역을 덮고 있는 삶의 보편적 양상입니다.
문제는 시인만은 달라야 한다는 점입니다. 서두에 영웅에 대해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시인은 영웅도 아니고 그를 좇는 추종자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삶 속에서 그 허위를 발견하고, 현실을 직시하면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찾아내려는 탐구자입니다. 그렇기에 끊임없는 자기성찰이 요구됩니다. 세상은 변했는데 변화하는 삶에 맞춰 시를 쓰려고 해왔는지, 광주문제를 생각하듯 진실로 오늘날의 삶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있는지, 우리는 자신의 삶에 정직한지? 소비사회가 주는 온갖 혜택을 누리면서 민중의 삶을 시로 쓰고 있지나 않는지 생각해 볼 시기입니다.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식의 태도로는 시를 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지 의아해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삶의 정직성은 시의 정 직성이요 이것은 문학의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광주정신은 부당한 현실에 대한 맞섬의 정신이요, 이는 문학에서 리얼리즘의 정신과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지적했습니다만, 첨단 문명의 위력앞에서의 인간의 흔들리는 위상, 물질적 욕망의 분출과 확산되는 에로티시즘, 삶의 허무와 인간성 상실의 위기 ……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삶속에 들어와 있고, 우리는 무의식중에 여기에 젖어 있습니다. 그리고 문학에서 광주의 정신이 리얼리즘의 정신과 연결되어 있다고도 말씀드렸습니다. 범박하게 말해서 리얼리즘의 정신이란 다름아닌 온전한 삶을 위협하는 세력, 제도, 헛된 욕망에 대한 비판정신이고 저항정신입니다. 과거엔 그 비판과 저항의 표적이 독재정권에 고정되어 있었고 이에 대한 응전은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또 그만한 문학적 성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표적이 환경이나 공해, 욕망이나 소외 등 여러 형태로 분산되어 있고, 교묘하게 우리의 삶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문명의 편리함과 욕망 충족의 달콤함에 길들여져 가고 있습니다. 그 폐해를 생각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즐기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 유혹에 맞서 인간다운 삶에 대한 애정과 문명 속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기 위해 고민하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리얼리즘 정신이요, 오늘날에 요구되는 광주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의 달라진 삶을 인정하고, 진지하게 분석하고, 자신의 정직성 위에서 시를 쓰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순결성을 오해하여 여타의 다른 생각들을 부정하고 배제하려는 아집도 버려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우리 지역의 시는 과거 시의 답습이나, 과거의 정서 속에 함몰되어 헤어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인간적 삶을 위협하는 적의 정체를 분명히 인식하고, 또 자신의 내부에 있는 적과의 치열한 싸움을 할 시기입니다. 변화를 받아들이되 비판적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사치레"용 행사라는 비판과 "벌거벗은 아가씨들"이 활보하는 현실을 수긍하고, 다시 한 번 새로운 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각오를 다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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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지역의 문예지가 갖는 의의는 대략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지역은 문학을 활성화시키는 직접적인 계기요, 자극제로서의 의미입니다. 분산된 표적을 향해 오늘의 삶을 반성하고 내일의 바람직한 삶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이미 시작되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유독 우리만 예향의 맥을 잇고 있다는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그 방향을 모색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더우기 무엇을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고민이려니와 이를 발표할 매체도 마땅치 않았습니다. 이제는 차분한 방향 모색을 할 시기입니다. {시와 사람}은 그 고민과 토론을 함께 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들의 열려있는 정신으로 오늘과 내일의 시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뇌와 열정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지역의 중심화에 기여한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정치도 이젠 분권화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문단 역시 서울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만 이젠 그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앙문단에 대한 소외감이나 중앙의 권위에 연연해 있다면 그 극복은 불가능합니다. 물론, 우리 지역에 발표매체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여러 잡지가 있었지만, 동인지의 성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었기에 중앙문단을 극복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대구에 {시와 반시}, 부산에는 {열린시} 등의 지역 문예지가 이런 주변성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이미 중앙문단에서도 그 질적 깊이와 수준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광주를 대표할 만한 시전문지가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광주에서 발간되지만, 그 내용에 있어 최소한 중앙의 문예지와 같은 수준을 유지하고 더 나아가 한국시단의 흐름을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잡지가 우리 광주, 전남 문학인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로 또 작품 발표의 장으로 활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이 잡지의 자생력을 위해 여러분들의 협조가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 잡지가 크게 영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 추구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문학을 사랑하는 분들의 협조가 꼭 필요합니다. 서울에서 발간되는 문예지조차도 대부분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종합지는 소설가를 확보하여 나중에 단행본을 발행하여 적자의 폭을 메운다고 합니다. 또 이런 시도는 부분적으로 상업주의적 전략과 맞물려 성공을 하고 있습니다. 시전문지의 경우 이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문학학교를 운영한다거나 광고 수입을 올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원고료를 지불하지 않는다거나, 신인들에게 잡지를 강매한다던가 하는 여러 부정적인 소문이 들려오기도 합니다. 이래서는 결코 좋은 잡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잡지가 되기 위해서는 이 지역 기업인들의 물질적 지원이 꼭 필요합니다만, 문학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이 물심양면으로 이 잡지를 키워야 한다는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신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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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시와 사람} 창간 기념식에서 행한 강연의 내용입니다. 편집자의 요청에 따라 여기에 약간의 손질을 가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제목을 지역문예지 출발의 의의로 정했습니다만, 저는 오늘날의 삶의 양태와 관련지어 광주정신을 살펴보고, 앞으로 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지역문예지 창간의 의의 순서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최근 광남일보 「산내들」이란 칼럼에서 영웅신드롬이란 글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내용은 영상세대의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가 책읽기를 싫어하는 것인데, 이상하게도 {그리이스 로마신화}가 인기를 누리고, 이와 관련된 서적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이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이를 분석하는 방식이 재미있었습니다. 즉 첨단 문명과 거 대화되는 자본주의의 영향력 앞에 20세기말의 대중들은 왜소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비젼도 뚜렷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심리상태의 대중들에게 현실과 상상의 공간을 휘젓고 다니는 신화 속의 영웅들의 행동이 매력적으로 비쳐지기 때문에 이런 류의 책들이 잘 팔린다는 진단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월드컵의 펠레, 마라톤의 황영조, 탐험가 허영호 등 이런 인물들이 우리 시대의 우상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인간의 창조적 능력을 확대시키고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이런 영웅 신드롬이 영웅 자체를 이데올로기화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칼럼에서는 맹목적이고 영웅주의적 폭력이 집단화하는 것으로 그 폐해를 지적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본질적인 것은 패소해진 자신을 우리 스스로가 부정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동일시나 대리충족을 통해서 고통스런 현실을 잊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업주의 문학과 결부시켜 말한다면, 대리만족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자기 기만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자기 배설적인 형태를 띠기도 합니다. 즉 자신의 삶을 냉철하게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는 점이지요. 오늘의 현실을 생각해 보면, 그 폐해는 더욱 심각합니다. 생존의 문제를 놓고 벌이는 남북한의 정치행태나 환경·공해문제 등은 차치하고라도, 첨단 문명의 위력 앞에 왜소해진 우리의 삶을 생각해 봅시다.
우선 컴퓨터와 관련된 우리의 삶을 살펴봅시다. 현재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컴퓨터를 즐기고 있습니다. 컴퓨터를 즐기면서 우리는 컴퓨터의 암기력과 일을 처리하는 속도에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또 그 편리함에 길들여져서 불편함을 참지 못하지요. 한 예로, 요즈음의 원고 전달방식을 생각해 봅시다. 10여 년 전만해도 원고를 들고 잡지사를 찾거나, 정중한 안부편지와 함께 원고를 보냅니다. 요즘은 많은 작가들이 전자통신으로 원고를 출판사에 보냅니다. 따라서 작가들 사이에, 작가와 편집자 사이에 인간적인 교류가 별로 없습니다.
한가지 예를 더 들자면 요즘 유행하는 인터넷 강의를 들 수 있습니다. 교수가 인터넷을 통해 자신의 방을 만들고, 거기에 강의 내용을 제시하면 학생은 집에서 이를 보고 공부를 합니다. 교수는 교수대로 편리하고, 학생은 언제든지 여러 교수의 강의를 들을 수 있어서 좋다고들 합니다. 이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기계가 끼어 들면서 생겨난 자연스런 삶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런 편리함 속에서 우리들 삶의 중요한 것들이 희생된다는 것을 잊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기계에 대하서 두려움과 열등감을 갖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애써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기계보다 열등하다는 사실이 기분 나쁘기 때문이지요. 소외감보다 무서운 것이 옅등감입니다. 열등감은 우리 내부에서 모든 사물이나 사실을 왜곡시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애써 부정하려고 합니다만, 우리 내부에서는 이미 이런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인정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어떤 구체적인 방향을 찾아야 할 시기입니다. 문명과 더불어 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계에 중독된 삶 역시 위험합니다. 인간관계를 무시하고 편리를 도모한다는 생각 그러고 오로지 컴퓨터에 의지해 있는 삶이란 결국 비틀린 삶에 불과합니다.
둘째로 인간관계의 단절입니다. 학교에서의 공부는 선생과 학생사이의 인간관계가 중요합니다. 대학에서는 인간관계가 덜 중요하다고 합니다만, 학문하는 자세나 태도, 학문하는 목적 이러한 것들은 결국 인간적 교류를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편리함과 능률 때문에 이를 무시한다면 대학은 도덕적 품성을 갖추지 못한 기술자를 양성하는 기관에 불과 합니다. 또 능률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풍토가 점점 더 확산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에 의해 운용되는 지식이나 기술은 언제든 흉기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것 역시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요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가 생략된 삶이나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을 기회의 축소는 급기야 고립감을 불러오고, 이는 철저히 도덕적 불감증에 걸린 개인주의적인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현실이고 앞으로 이런 경향은 더 심화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젠 우리가 직면한 후기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을 생각해 봅시다.
충장로 거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몇 년 전하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해진 상점들, 패션 모델처럼 걸치고 다니는 사람들, 네온사인과 어울어진 들뜬 분위기, 마치 수많은 물질적 욕망이 들끓는 전시장을 걷고 있는 듯 합니다. 당연한 현실입니다. 후기 자본주의적 생활 양태는 소비생활로 특징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의 이면에는 물질적 욕망에 따른 삶의 순간성, 쾌락성 추구라는 인간 본성이 깔려 있습니다.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장 보드리야르가 {소비의 사회}에서 지적하고 있듯, 욕망은 또 다른 욕망을 재생산하기 때문에 욕망의 확산은 재화생산 속도를 넘어서게 됩니다. 인간은 이것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게 되고요. 브레이크가 없지요. 한마디로 근면, 성실이란 구호는 이미 지나간 시대의 것으로 여겨짐은 물론입니다. 여기엔 정신적인 가치나 윤리의식, 삶의 균형감각이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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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적 욕망에 추종하는 또 여기에 길들여지는 삶이 곧 인간적 품성의 상실로 이어진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요즘 급격하게 비디오를 통해 보편화되는 에로티시즘의 확산이나 인간조차 상품으로 전락하는 현상을 곳곳에서 보게 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이러한 현상들은 영상세대로 일컬어지는 새로운 세대의 생활양식이고 이미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문제는 이런 삶이 자연스럽게 우리의 생활이 되었고 우리는 여기에 길들여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연스럽게 다가온 변화를 무심히 따라가는 깃이 과연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인이라면 최소한 비판적 거리를 갖고 삶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경림의 시를 통해서 제 이야기를 발전시켜 볼까 합니다.
인사치레로 망월동에 가서 참배를 하고
울적하니까 셀프집에서 생맥주 천씨씨짜리 두어개 걸쳤다
만만한 게 사회주의라 디립다 씹고 밟고 찢고
그래도 화가 안 풀리면 이번에는 노래방이다
[무정부르스]를 목청껏 뽑고 [애모]를 악을 쓰고 부르다가
다 밝아 넝마가 되어 여관방에 와 누웠는데
이게 웬일이냐
금세 돌이 나르고 총알이 쏟아질 것 같은 금남로가
전봉준과 나란히 벽에 와 걸렸으니
정신이 번쩍 들어 불을 켜니
난데없이 벌거벗은 아가씨들이 떼로 몰려나와
자빠지고 엎어지고 온갖 요사를 다 떠는구나
저도 돌이 나는 금남로를 보겠다는 건지
창문으로 고개를 디민 저
하얀 아카시아 꽃떨기에 어린 것이 눈물일까 달빛일까
- [南道路室] 전문
이 시는 저희 창간호 {시와 사람}에 실린 문학평론가 문흥술 님의 글에서도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만, 오늘의 광주와 광주 시단을 조명하는데 매우 절절한 언술을 담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인사치레"의 망월동 참배와 "벌거벗은 아가씨들"의 행진이 보여주는 기묘한 관계입니다. 관계라기보다는 유사성이지요. 광주의 비극은 이미 기억 속에 사라지고, 그것이 주는 삶의 의미가 단지 형해화되어 인사치레용 행사로 남았다는 비판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 당연한 지적입니다. 아울러 전국의 다른 도시와 같이 욕망이 들끓는 공간으로 변한 것이 오늘의 광주임을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민주의 성지라고 말하는 광주가 양담배 소비율 전국 1위, 외제차 보유율 전국 2위라는 현실이 그것을 말해 주기도 합니다. 우리는 과거 광주항쟁 당시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구별없이 독재와 맞서 싸웠던 사실을 기억합니다. 이 싸움은 공동의 생존투쟁이었으며 민주화를 향한 열정의 표현이었습니다. '우리'라는 공동운명체 의식이 이 나라의 역사를 바꾸게 하는 결정적인 힘이었고, 다른 곳에서 볼 수 없었던 역사에 대한 신념으로 표출되었습니다. 그러나 반독재, 반제국주의에 맞서 싸웠던 열정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두 갈래의 양상을 띠고 전개되었습니다. 그 하나는 광주정신으로 무장한 순결주의고, 다른 하나는 후기 산업사회에의 재빠른 편승입니다. 전자의 경우, 지난 십 수년간 80년 오월의 상처와 기억, 이의 치유를 위한 어떤 노력도 발견할 수 없었기에 그 상처는 더욱 깊어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문제는 우리 시인들에게 있습니다. 90년대에 들어 저항이데올로기는 변화된 상황에 상응하여 내면화되고 보다 깊은 정서의 원천으로 자리해야 함에도 이를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왔던 것입니다. 마치 피할 수 없는 업보로 남아 이를 벗어나면 큰 죄를 짓는 양 두려워했습니다.
앞서 인용한 시에서 보듯 "인사치레"로 변한 행사와 "벌거벗은 아가씨들"이 온갖 요사를 떠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시단은 이런 현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움직임도 절실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을 인정하는 것이 광주의 정신을 훼손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빠져 있었던 것이나 아닌지? 이것은 분명 훼손이 아닙니다. 변화된 삶을 인식하고, 이에 따른 대응방식과 이런 상황에서 광주정신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느냐는 논의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과문한 탓인지 이런 노력들이 구체화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합의된(?) 침묵만이 있었다고 할까요? 이런 점에서 과거는 현재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규제하는 족쇄로 작용하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광주정신을 생각하고 이를 시화하기 위한 노력은 자기 비판의 정신으로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끊임없이 변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과연 이러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시와 사람} 창간호에 실린 정윤천과 김호균, 두 젊은 시인의 시를 보겠습니다.
누야는 막내를 업고 나는 새참 보퉁이 마을은 벌써 등 너
머끝이나 산입드는 탱자나무 길 고적한 울타리가엔 누군가 흘려
놓고 간 상여꽃 …… 하얀 …… 상여꽃 ……
어디선가 들쑥 향내는 바람에 일고
미영꽃 하얀 미영밭 속에 할매는 영락없는 한 송이 미영
꽃 엄니는 흙묻은 젖무덤 열어 엉거주춤 뒷태 돌아앉으면
우리 식구 그 산밭머리
어디선가 들쑥 향내는 바람에 일고
한 삼 년 미영농사 벌어 이불 세 벌 짓고 나면 누야는 삼
십리 길 시집가는 길 꽃처럼 그 길 위에 흘려놓고 간 손수건
…… 하얀 …… 손수건 ……
어디선가 들쑥 향내는 바람에 일고
-「들쑥 향내는 바람에 일고」 전문
장선우가 「꽃잎」 찍던 날
금남로는 온통 흑백 사진첩 속으로 들어가 버렸네
쏘아대는 총알 맞고 푹 쓰러지는 시민
이 실감나는 연기는 알고보면 계속되는 살이었네
딸 아이 안고 모형장갑차에 이르렀을 때도
소품으로 팔린 궂은 돌멩이 밟으니
마음 속의 과격이 돌을 던지더라니까
나의 소갈머리는 아직
그곳으로 열려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네
이 한 마디를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가로등이 고개 수그리고
도로에다 소리만 남겨두고 가는 자동차 또한
삶의 꼬리인 듯
시작과 끝이 없는 바퀴를 굴리며
눈물 골짜기 속으로 지나가 버리더군
엉킨, 엉킨 꽃잎 만장들 오늘도 지나가고 있더군.
-「꽃잎 만장」 전문
물론, 두 편의 시에서 받는 인상은 각기 다릅니다. 앞의 시는 농촌의 풍경을 배경으로한 회고적 서정, 뒤의 시에서는 광주항쟁의 정신을 바탕으로 현재의 삶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두 편의 시가 타 지역 시인들의 작품이라면 그 평가에 인색할 이유가 없습니다. 두 편의 작품 모두 독특한 개성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시인들이 광주에 살면서 우리 지역의 정서를 시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었음을 말씀드립니다. 즉 자기성찰의 대상으로 든 예라는 점입니다. 여기서의 문제는 광주항쟁의 정신이 보다 심화되거나 확대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비판정신이 철저한 현실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앞의 시에서 말하는 바, 회고적 서정의 바탕엔 오늘날의 농촌이 파괴되는 원인과 이유에 대한 고민이 드러나야 합니다. 단순한 회고적 서정이라면 이미 60년대 이후 계속 쓰여졌던 전통 서정시에서 한 발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오늘날의 농촌은 회고적 서정으로 바라보기에는 너무 참혹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두 번 째 시에서도 마찬가집니다. 화자는 "실감나는 연기"에서 오늘의 삶을 발견합니다. 오늘날에도 진실이 은폐되고, 그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는 지역적인 정서가 보입니다만, 이것도 사실은 제스쳐에 불과합니다. 보다 진실된 정서는 '마음속의 과격'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과격'이 나의 삶에 어떻게 투영되고 구체화되었느냐는 자문에서 우러나옵니다. 구체적인 현실과 연결되면서 자신이 삶을 냉철하게 돌아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 시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앞의 신경림의 시에서 말했습니다만, 우리가 80년 오월의 광주에 매달려 있다는 것은 내면화되지 못한 상태에서 오늘의 삶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진정으로 광주정신을 생각하고 이를 시화하기 위한 노력은 자기 비판의 정신으로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끊임없이 자기 변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광주정신의 순결성(비타협적인 태도) 때문에 변화하는 현실을 부정하고 회고적 서정에의 퇴행을 보이다거나 감성의 차원에서 아픔을 노래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길이기도 합니다. 몇 년 전부터 생태주의에 대한 관심이 드러나고 있습니다만, 한 두 사람의 변화를 가지고는 광주의 시단이 변화하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들의 변화도 아직은 시작의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다음의 시를 보겠습니다.
왜 새들은
안보이는 나라로까지 날아가서 죽을까
그 마음을 아는 나뭇잎들이
땅에 떨어져 …… 갈 곳을 몰라하는
벌레들의 뒷등을 덮어준다.
-김준태의 「무제」 전문
참 고운 물살
머리카락 풀어 적셨네
출렁거리는 산들의
부신 허벅지 좀 봐
아무 때나 만나서
한몸되어 흐르는
눈물나는 저들 연분홍 사랑 좀 봐.
- 곽재구의 「찬 맑은 물살」 2연
앞의 시에서 우리는 자연의 섭리와 그 속에 깃든 오묘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시인의 눈에 비친 자연은 단순히 있음의 세계가 아니라 나눔의 세계임을 알게 됩니다. 자연의 섭리에 대한 질문에는 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맞는 새의 외로움을 "나뭇잎들"이 함께 나누고 있음을 느낄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시인과 함께 서로를 감싸 안으며, 사랑을 나누고 있는 내밀한 세계를 엿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 시 역시 참으로 아름다운 시입니다. 봄볕이 완연한 계곡물, 새싹으로 작은 생명들을 밀어올리는 나뭇가지와 산들의 일렁임 …… 작고 소중한 생명들이 뿜어내는 아름다움이 눈앞에 선연합니다. 두 편의 시 모두,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진실한 애정이 없이는 쓸 수 없는 시입니다. 이런 생명의 소중함과 기쁨을 노래하면서 그렇지 못한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음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또 다른 측면도 있습니다. 이런 생명들의 세계와 공간 -산과 들, 강과 바다-은 문명에 의해서, 인간의 욕망에 의해서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이제 자본주의적 관계로 변해 있습니다. 공존이냐 타협이냐를 놓고 끊임없이 저울질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 아직까지는 일방적인 개발의 논리에 의해 이런 관계가 순조롭게 이어지지는 않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개발의 논리에 의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세계가 위협받고 있고, 그 위협은 이미 전라도 땅에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올해 영광 원전사고와 여천 석유화학 공단의 공해문제가 전국적인 관심사로 떠올랐습니다. 저는 아직까지 그 심각성이 뼈속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작품을 대하지 못했습니다. 공해문제나 생태문제는 이미 지역적인 문제가 아닙니다만, 오늘의 우리 삶의 터전에서 파생된 중요한 생존에의 위협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런 문제가 현실에 깔려 있는 한 어떤 생명도 아름다운이나 소중함 그 가치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런 문제는 사회구조에 대한 분석이나 인간의 욕망, 생명의 존엄성을 철저하게 인식하는 데서 제기되는 깃이기에, 생명의 문께는 곧 우리의 중심문제여야 한다는 전제가 따릅니다. 생명문제에 관한 한, 가장 시급한 문제가 발생하는 곳이 곧 가장 선진적인 문명비판의 공간이요 또한 중심의 과제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현장에 서 있습니다.
이러한 비판은 앞서 지적한 두 번째의 문제 즉, 후기 산업사회에의 재빠른 편입과 연결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80년의 광주와 96년의 광주는 다릅니다. 한마디로 같은 정서를 공유하고 있되, 삶은 갈등을 지닌 산업사회의 계급구조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가진 자의 몫과 못가진 자의 몫이 다릅니다. 먹고사는 문제에 관한 한 우리 지역 역시 심한 갈등관계에 있습니다. 또한 가진 자의 오만과 무분별한 소비행태는 광주 전체를 단일한 소비문화 속에 가두고 있습니다. 가진 자의 생활을 쫓아가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자본의 논리와 힘은 이미 우리의 삶과 의식 곳곳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민주'나 '정의', '역사' 등 삶의 기본적인 덕목에 접근하는 것을 방해하고 하고 있습니다. 너도 나도 물질적인 욕망 속에 빠져 들고, 그 속에서 삶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현상이 광주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현재 우리 나라 전역을 덮고 있는 삶의 보편적 양상입니다.
문제는 시인만은 달라야 한다는 점입니다. 서두에 영웅에 대해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시인은 영웅도 아니고 그를 좇는 추종자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삶 속에서 그 허위를 발견하고, 현실을 직시하면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찾아내려는 탐구자입니다. 그렇기에 끊임없는 자기성찰이 요구됩니다. 세상은 변했는데 변화하는 삶에 맞춰 시를 쓰려고 해왔는지, 광주문제를 생각하듯 진실로 오늘날의 삶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있는지, 우리는 자신의 삶에 정직한지? 소비사회가 주는 온갖 혜택을 누리면서 민중의 삶을 시로 쓰고 있지나 않는지 생각해 볼 시기입니다.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식의 태도로는 시를 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지 의아해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삶의 정직성은 시의 정 직성이요 이것은 문학의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광주정신은 부당한 현실에 대한 맞섬의 정신이요, 이는 문학에서 리얼리즘의 정신과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지적했습니다만, 첨단 문명의 위력앞에서의 인간의 흔들리는 위상, 물질적 욕망의 분출과 확산되는 에로티시즘, 삶의 허무와 인간성 상실의 위기 ……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삶속에 들어와 있고, 우리는 무의식중에 여기에 젖어 있습니다. 그리고 문학에서 광주의 정신이 리얼리즘의 정신과 연결되어 있다고도 말씀드렸습니다. 범박하게 말해서 리얼리즘의 정신이란 다름아닌 온전한 삶을 위협하는 세력, 제도, 헛된 욕망에 대한 비판정신이고 저항정신입니다. 과거엔 그 비판과 저항의 표적이 독재정권에 고정되어 있었고 이에 대한 응전은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또 그만한 문학적 성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표적이 환경이나 공해, 욕망이나 소외 등 여러 형태로 분산되어 있고, 교묘하게 우리의 삶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문명의 편리함과 욕망 충족의 달콤함에 길들여져 가고 있습니다. 그 폐해를 생각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즐기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 유혹에 맞서 인간다운 삶에 대한 애정과 문명 속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기 위해 고민하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리얼리즘 정신이요, 오늘날에 요구되는 광주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의 달라진 삶을 인정하고, 진지하게 분석하고, 자신의 정직성 위에서 시를 쓰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순결성을 오해하여 여타의 다른 생각들을 부정하고 배제하려는 아집도 버려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우리 지역의 시는 과거 시의 답습이나, 과거의 정서 속에 함몰되어 헤어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인간적 삶을 위협하는 적의 정체를 분명히 인식하고, 또 자신의 내부에 있는 적과의 치열한 싸움을 할 시기입니다. 변화를 받아들이되 비판적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사치레"용 행사라는 비판과 "벌거벗은 아가씨들"이 활보하는 현실을 수긍하고, 다시 한 번 새로운 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각오를 다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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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지역의 문예지가 갖는 의의는 대략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지역은 문학을 활성화시키는 직접적인 계기요, 자극제로서의 의미입니다. 분산된 표적을 향해 오늘의 삶을 반성하고 내일의 바람직한 삶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이미 시작되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유독 우리만 예향의 맥을 잇고 있다는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그 방향을 모색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더우기 무엇을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고민이려니와 이를 발표할 매체도 마땅치 않았습니다. 이제는 차분한 방향 모색을 할 시기입니다. {시와 사람}은 그 고민과 토론을 함께 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들의 열려있는 정신으로 오늘과 내일의 시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뇌와 열정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지역의 중심화에 기여한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정치도 이젠 분권화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문단 역시 서울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만 이젠 그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앙문단에 대한 소외감이나 중앙의 권위에 연연해 있다면 그 극복은 불가능합니다. 물론, 우리 지역에 발표매체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여러 잡지가 있었지만, 동인지의 성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었기에 중앙문단을 극복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대구에 {시와 반시}, 부산에는 {열린시} 등의 지역 문예지가 이런 주변성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이미 중앙문단에서도 그 질적 깊이와 수준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광주를 대표할 만한 시전문지가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광주에서 발간되지만, 그 내용에 있어 최소한 중앙의 문예지와 같은 수준을 유지하고 더 나아가 한국시단의 흐름을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잡지가 우리 광주, 전남 문학인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로 또 작품 발표의 장으로 활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이 잡지의 자생력을 위해 여러분들의 협조가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 잡지가 크게 영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 추구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문학을 사랑하는 분들의 협조가 꼭 필요합니다. 서울에서 발간되는 문예지조차도 대부분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종합지는 소설가를 확보하여 나중에 단행본을 발행하여 적자의 폭을 메운다고 합니다. 또 이런 시도는 부분적으로 상업주의적 전략과 맞물려 성공을 하고 있습니다. 시전문지의 경우 이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문학학교를 운영한다거나 광고 수입을 올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원고료를 지불하지 않는다거나, 신인들에게 잡지를 강매한다던가 하는 여러 부정적인 소문이 들려오기도 합니다. 이래서는 결코 좋은 잡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잡지가 되기 위해서는 이 지역 기업인들의 물질적 지원이 꼭 필요합니다만, 문학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이 물심양면으로 이 잡지를 키워야 한다는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