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기획특집Ⅲ 오래 지속될 미래, 단절되지 않는 '광주'의 꿈(문학포럼, 광주전남민속문화작가회의, 19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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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Ⅲ
오래 지속될 미래, 단절되지 않는 '광주'의 꿈
-광주민중항쟁의 문학적 형상화에 대하여
이 성 욱/문학평론가, 성공회대 강사
1980년 5월 16일부터 5월 27일까지 일어난 광주에서의 민중항쟁은 비록 열흘간의 사건이었지만 그 시간적 길이는 80년대 전체의 압축이었고 그 의미는 80년대 질풍노도의 반란적 에너지가 자신의 존재증명을 위해 언제나 회귀하던 언덕으로 자리했다. 80년대, 전두환 군사정권과 싸우고자 했던 사람들에게는 적어도 그랬다. 얼음왕국과 불기둥이 서로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면도날 같은 긴장 위에서 맞겨룸으로 일관하던 그 80년대, 학살자의 압제에 반란과 전복을 꿈꾸던 사람들에게 그 반란에의 맹약과 서원은 언제나 '광주'라는 두 글자 앞에서 이루어졌다. 광주민중항쟁 열흘 간 광주시민들이 보여주었던 눈물겨운 인간의 우애와 공동체의 형상은, 말하자면 그들이 꿈꾸는 이상적 사회의 현실적 투사물이었다. 그때 '광주'라는 두 글자는 퍼덕퍼덕 살아뛰는 저항적 생명력의 결정이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터이다. 그리고 20여 년이 흐른 지금, 그러나 광주는 이제 어느덧 '기념'의 자리로 물러나고 있다. 아니 그런 자리로 옮겨져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을 받는 느낌이기 조차하다. 용서와 화해의 언표는 난무하지만 정작 그 지시하는 내용은 텅 비어 있는 채, 그냥 껍데기만의 '신화'로 남으라는 강요를 받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이다.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광주민중항쟁은 70년대와 그 이후를 갈라놓는 날카로운 분기점이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막연한 자유주의에의 열망으로 요약되는 70년대까지의 반정부운동은 희대의 야만적 학살에 의해 좌절한다. 요컨대 자기재생산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야만의 극단을 선택할 수 있는 지배와 권력의 벌거벗은 속성을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확인한 것이다. 반미를 기저로 삼는 반제국주의, 좌파 이데올로기의 대중적 확산 그러고 사회주의적 지향을 통한 구체적인 변혁 사상과 조직화로 설명되는 80년대의 대세는 바로 70년대적 열망의 멸절 과정인 '광주'의 산물이자 동시에 '광주 이후'의 이정표였던 셈이다. '광주'는, 따라서 80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대략 두 갈래의 함의로 작용하고 있었다. 하나가 깊은 도덕적 죄의식 및 부채감의 환유물이라면 다른 하나는 현실 정치 및 권력행위의 본질에 대한 인식 확대의 결정적인 준거였다. 80년대 문학의 클 주류라 찰 수 있는 민족·민중문학이 당대의 핵심적 기획으로 간주하던 이른바 '변혁에의 복무'라는 명제 역시 예의 준거를 기반으로 삼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바였다. 또한 시각을 달리하여 이른바 자유주의 문학을 살펴보더라도 그 역시 광주라는 화두에서 마냥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광주문제에 대한 문학적 형상화라는, 일견 시대적 요청과 당위로 받아들여질 법한 맥락의 정당성 여부와는 별개로 그런 요청에 당대의 문학이 얼마나 충실히 회답하고 있었는가를 다시금 점검해 보면 유감스럽게 많은 공백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물론 '광주'에 대한 문학적 형상화가 광주민중항쟁을 직접적인 소재로 취해야 이루어지는 것임은 아닐 것이다. 광주민중항쟁의 함의가 80년대 이후 남한 사회의 바람직한 진전에 모두 관련된다면 80년대 내내 전개되었던 전국민의 민주화 의지와 좀더 나은 사회에 대한 열망도 그리고 80년대 중반부터 폭발적으로 확장된 노동자 계급을 비롯한 기층민중의 대중적 세력화도 광주민중항쟁의 직간접적인 산물일 터이다.
그렇기에 이 산물의 맥락이 여러 소설작업에 중대한 성찰의 계기로 작용하고 반영되었다면, 넓게 보아 그것 역시 광주민중항쟁의 문학적 문맥화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문제를 그런 식으로 해석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말 그대로 넓은 의미의 성긴 망으로 걷어올릴 때 그러한 것이다. 사안을 엄정하게 가려 본다면 결국 광주문제에 대한 그간의 문학적 형상화가 부실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특히나 '광주'를 80년대 문학의 발원처로 여기던 민족·민중문학에서조차 그렇다는 사실은 유다른 소회를 자아내게도 한다.
양과 질 공히 만족스럽지 못한 까닭을 찾아 볼 경우, 우리는 먼저 광주민중항쟁 이후, 항쟁의 의미, 개념 등이 80년대 변혁운동의 특정 범주 및 관점에 의해 재구성되는 과정을 주목해야 한다. 상술했다시피 80년대 변혁운동은 광주민중항쟁의 뼈저린 경험을 통해 운동의 내용과 방법이 이전과 달라야 한다는 점을 자각한다. 맑스주의에 기초하는 급진적 해방프로젝트가 그것인 바는 주지하는 대로이다. 계급투쟁 중심성을 핵심으로 하는 맑스주의는 당연히 광주민중항쟁을 계급투쟁론의 문맥에서 재해석하고자 했다. 광주항쟁 경험을 향후 계급투쟁의 교두보이자 이념적 거점으로 삼고자 하는 태도는 그런 재해석에 있어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을 것이다. 이는 어찌보면 당연한 소치일 수도 있다. 우리 경우만이 아니라 맑스주의적 변혁론의 지평에서는 '파리꼬뮌'을 비롯한 세계 역사상의 모든 항쟁들을 예의 계급투쟁론적 재구성의 과정을 거친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특정 시각을 통한 과거의 현재화라는, 바꿔말해 재구성이라는 범주의 개념적 지위가 정당한가 하는 점과는 별개로 그 재구성 작업이 재구성 대상의 진실을 얼마나 충분히 포착하고 있는가 하는 점은 언제나 근본적인 질문이 된다.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재구성 관점과 방법이 '광주의 진실'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가 하는 점은 그런 의미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질문이다. 과거형으로서의 항쟁 체험을 현재화시키고자 하는 재구성 노력 자체는 실상 항쟁의 연속성을 성취한다는 점에서 소중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재구성 과정 속에서 과거 사실이 굴절되거나 실용적 목적에 의한 가감 등이 발생할 때 일어난다. 또한 고의성은 없다하더라도 태도와 방법의 오류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정리하자면 80년대의 계급투쟁 담론이 꾀한 급진적 해방프로젝트와 광주민중항쟁의 의미론적 절합을 위한 재구성 논리는 광주민중항쟁을 당대의 담론적·실천적 전략 생산을 위해 일종의 생산질료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그런 재구성 과정이 예의 생산질료가 내포하고 있는, 그것만의 고유한 진실과 논리, 즉 광주민중항쟁의 '독자적'인 진실을 전면적으로 파악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일단의 문제를 낳았다. 정치적·계급론적 선택과 배제의 불가피한 논리를 밟게 되면서 '광주'의 의미의 깊이와 넓이가 상대적으로 축소되거나 사상되는 측면이 상당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계급투쟁 담론의 중심 성으로 '광주'를 호출하고 또 그 범역으로만 환원 하고자하는 태도와 방법으로 인해 그 범역 밖의 것은 부차적인 혹은 부분적 변수로 방치해 버렸다는 것이다. 물론 광주민중항쟁에 계급투쟁의 성격이 삼투되어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항쟁의 전면적 성격과 개별적 진실을 포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경향은 급기야 '광주'의 위상을 해석의 대상으로만 국한하는 역기능을 낳기도 했다.
광주민중항쟁은 이처럼 계급투쟁, 혹은 거대담론 중심성 의향도 아래 의미의 '과잉결정'을 겪게 되었다. 중복되는 말이지만 예의 해방 프로젝트가 광주민중항쟁의 세례 속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광주'에 대해 계급투쟁론적 해석을 수행하는 일은 그것대로 의의가 있기도 하고 또 불가피한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출발점에 대한 보다 복합적이고 심층적 진실 규명에의 충분한 노력이 수반되지 않는 가운데 전개되는 해방전략이라면, 그것은 많은 경우 '광주'를 특정 담론에 의한 당위전제로 고정시켜 버리기 십상이다. 그럴 경우 만약 역사현실의 변화에 따라 계급투쟁 중심성이 약화되거나 기각되는 형국에 이르면 당위전제는 어느덧 부당 전제로 전환되어 버린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당위전제와 부당전제 사이의 동요와 균열이 결국 광주민중항쟁의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일에 있어서도 균열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광주항쟁의 고유성에 대한 소설화가 부실하다는 점, 특히나 민족·민중문학의 작업이 그렇다는 점은 앞에선 이야기 한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광주항쟁에 대한 문학 자체로서의 문제의식과 총체적 서사화가 진득히 사고되기도 전에 계급론적 관점에 의한 '광주의 해석' 경향을 쉽게 받아들인 점이 그런 부실함의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눈 앞에 벌어지는 일에 대한 형상화와 일단 과거의 일로 간주되는 '광주'의 형상화 사이에 일련의 우선 순위를 매기게 되고 설혹 '광주'를 문학화 한다 해도 광주를 계기적으로 호명하는 일에 익숙해져 간 것이다. 광주민중항쟁을 소위 '각성된 노동자의 눈' 혹은 노동자계급 당파성의 관점으로 재구성해보고자 한 홍희담의 「깃발」나 「이제금 저 달이」 같은 작품은 그런 점에서 다중적인 평가의 대상이 된다 하겠다. 이 작품이 광주관련 문학의 새로운 지평 확장인 동시에 소중한 수확인 것만은 어김없는 사실이지만 이 작품을 둘러싼 논쟁이 거개노동자계급 당파성의 충실성 여부만을 중요 논점으로 삼았다는 점에서도 그렇거니와 작품을 볼 때도 앞에서 언급한 계급론적 환원주의의 혐의에서 아주 자유롭지는 못한 점에서도 그렇다.
정리하자면 80년대 중반까지의 광주관련 작품들은 일종의 부채의식이나 죄의식이 창작동기로 작용했던 반면 80년대 후반부터의 작품은 대개 '광주'를 노동자계급 당파성 혹은 민중적 현실주의라는 해석체계로 재구성하고자 하는 과정과 긴밀히 연관된다. 계급론적 시각에 의한 광주의 재구성·재의미화는 계급론적 해석체계 밖에 존재하는 '광주'를 방치하는 우를 범한다. 광주에서 일어난 일의 실제가 충분히 가려지기 전에 수행된 재구성으로서의 광주의 특정한 '개념화' 작업은 상황변화에 따라 새로운 재개념화 과정으로 나아간다. 그런 개념화·재개념화 과정 속에서 '광주'의 추상 수준은 더욱 상승되고 그 실제는 더욱 응축되었다. 상승은 땅에서 일어난 사건의 구체성과 역방향을 타기 쉽다. 다시 말해 땅에서의 일이 충분히 파악되기 전에 추상의 공간으로 '증류'되기 십상이다. 광주관련 소설을 비롯한 모든 소설은 자신의 존재를 구체성의 확보를 통해 증명하기 마련이다. 광주에 대한 전면적인 서사가 그간 제대로 성취되지 못한 것은 결국 '광주 소설'들이 구체보다는 추상 쪽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광주관련 소설이 만족스럽지 않은 이유는 다 맥락을 통해서도 추정 가능하다. 군말이지만 예술은 상상력의 후예이다. 서사문학 역시 마찬가지이다. 상상력의 서사적 조형은 자신이 취하는 소재나 대상에 대한 일정한 거리 확보를 통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를 비판적 거리 혹은 방법적 성찰의 간격이라 말한다. 이 거리는 소설쓰기의 밑받침이 되는 객관성을 탑재하는 데에 필수적인 요건이 된다.
소설에서 대상에 대해 객관성과 성찰의 거리를 확보한다함은 한편으로 대상과의 지나친 정서적 밀착을 경계하는 일이기도 하다. 상상력이라는 것 역시 자의적인 정서의 분비물이 아니라, 이를테면 감성적 판단과 오성적 판단의 종합이라 한다면, 이 상상력의 가동 역시 예의 객관성과 따로 떨어져 노는 것이 아님은 당연할 터이다. 그런 점에서 특정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서사를 만날 때 우리는 대개 두 가지 기대지평을 가지게 된다. 하나가 그 역사적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진실이라는 언사가 때로는 모호함의 곤란을 야기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마냥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는 바에야 그것의 사실적·의미론적 진실을 규정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의 복원이라면 다른 하나는 미학적 완성도이다. 이는 물론 역사현실에 대한 재현과 환기에 있어 서사적 글쓰기만이 내장하고 있는 독자적 기능과 효과에 대한 오랜 믿음으로 인해서이다.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그간의 소설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런 기대지평을 갖는다. 하지만 그 기대는, 뒤에서 이야기할 『봄날』이 나오기 전까지 유보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실용적 목적에 의해 쓰여진 것도 아니고 또한 소설 초년생들도 아닌, 서사의 역량이 상당한 작가들의 작품들을 대했을 때 그렇다는 것은 사실 의문거리이다. 우리는 그 까닭을 예의 미학적 거리의 부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거리의 부재는 작가가 마주하고 있는 묘사 대상의 사실성 자체에 내재해 있는 어떤 에너지의 엄청남이 작가를 덮어버리거나 압도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예의 에너지는 가공할 야만, 유례없는 비극성, 그로 인한 충격의 강도 등으로 구성된다고 하겠다.
그런 까닭에 묘사대상을 가로지르고 있는 비극성의 엄청난 에너지는 작가에게 충격의 극대치로 이항되고, 작가와 묘사대상의 관계에 있어 작가가 자신을 강타하는 그 대상의 충격적 속성을 넘어서지 못할 경우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죄책감, 부채의식 등도 그 충격의 사후효과이다). 광주의 참혹은 작가에게 말문을 막히게 하는 경악 그 자체였다. 말문이 막히는 일은 언어적 재현 이전에 지극히 직접적인 정서의 감응 상태를 야기한다.
서사에 있어서의 미학적 거리의 확보는 묘사대상으로부터 정서적으로 상대적인 자유가 전제될 때 가능하다. 그러나 묘사대상이어야 할 특정 사건의 충격성이 작가의 경악이나 혼절같은 정서 형태를 야기할 경우 그것은 묘사대상과 정서적으로 너무 밀착되어 버리는 셈이 된다. 그때 서사의 조형을 위한 미학적 거리 및 객관성의 획득은 상당한 곤란을 겪게 된다. 객관성의 산출 요건인 대상에 대한 냉정한 관찰자로 존재하기 어려운 경우 묘사대상에 대한 문학언어로서의 의미화 과정이 상당히 곤란할 것이라는 점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예상된다. 장편 「봄날」의 집필을 끝낸 임철우가 "이건 아무래도 내 작품이 아닌 것 같다. 쓰는 내내 보이지 않는 어떤 것들에 구속당해 있었다. 자유는 없었다. 십 년 동안, 자신이 파괴되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저 대리인에 지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 열흘 동안,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수많은 사람들의… 남들한테는 소설이지만 나에게는 아직도 현실이다. 수없이 더듬고 주물러야 하는 현실"이었다고 토로하는 대목도 심층적으로는 그런 문맥으로 읽힌다.
광주민중항쟁은 그 이후, 이념과 정치적 태도 여하에 상관없이 적어도 육체적·정신적 자유와 인간의 구원을 간구하는 작가들이라면 누구도 비켜갈 수 없는 화두였을 것이다. 80년대 중반에 제출된 임철우의 「직선과 독가스」, 「불임기」 등을 비롯해 여타 작가들의 광주 관련 중단편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80년대 중반은 한편으로는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의 강도가 점차 고양되던 시기였지만 그럼에도 광주문제에 대한 여하한 언급이나 담론은 여전히 재갈물려 있던 일종의 교착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광주를 소설형식으로 온전히 복구한다는 것이 마냥 쉬운 일은 아니었다. 광주를 다룬 초기 소설들이 그 제재나 형상화에 있어 우화적 방법이나 부분적 묘사로 에둘러 갈 수밖에 없었던 까닭도 그런 상황에 연루된다 하겠다. 이후 80년대 후반에 이르면 파시즘의 부분적 무력화에 힘입어 광주 관련 소설 작업이 상대적으로 활발해진다.
광주에 대한 소설화는 먼저 폭로와 고발의 형태를 취한다. 모든 언로가 차단당한 상태에서는 소설이 광주항쟁에 대한 증언과 실록을 대신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그런 태도를 낳았다고 하겠다. 그 고발의 밑바닥에는 모두 깊은 죄의식이 관류하고 있었다. 이웃과 형제 그리고 동료가 악마의 야만과 광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고 죽어 가는데도 자신은 아무 것도 안했거나 할 수 없었다는 무기력에의 회오, 이유야 어떻든 결과적으로 광주학살에 조력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깊은 죄의식 등이 그때 발표된 작품들의 '표면에 공공연히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그 작품들은 작가의 글쓰기 라기보다는 어쩌면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행할 수 있는 죄갚음의 형식들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편 작품에 자라 희생자 혹은 피해자 시점 중심으로 구성된 작품 또는 내부자와 외부자의 시점을 구분하여 '5월 광주'를 묘사하는 등 그 형식은 다양하게 변주되었다. 아울러 몇 작품은 광주민중항쟁의 통시적 확장을 꾀하기도 했다. 그런 작품은 항쟁이 단순히 일회적이고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한국 현대사를 횡단하고 있는 분단모순의 연장선 위에서 중층결정된 것이라는 문제의식을 내보인다. 문순태의 「일어서는 땅」같은 작품이 그런 유형이라 하겠다.
여기서 작가는 여순반란사건과 광주민중항쟁에서 각각 아버지와 아들을 잃어버리는 화자를 등장시켜 분단으로 인한 비극의 양상에 광주의 비극을 포개 놓는다. 단편에서 그런 커다란 사건들의 통합적 효과가 제대로 나타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비극의 대물림이라는 밑그림은 일정한 설득력을 지닌다. 거기다 광주의 환난 속에서 스스로 작은 십자가형을 선택하는 화자의 아들 '토마스'(영세명)를 구두닦이라는 기층민중으로 설정하여 광주민중항쟁의 계급적 성격의 일단까지 포괄하려는 시도마저 내비치고 있다. 이런 대목을 대하다 보면 작은 틀에다 지나치게 큰 이야기를 담으려 한다는 과욕을 지적하고자 하는 생각보다 제한된 조건 속에서나마 광주의 진실을 모두 이야기하고자 하는 작가의 어떤 소명론적 강박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광주항쟁에서 아들을 잃은 여인과 그 여인에게 연루되어 있는 분단문제를 드러내는 한승원 「당신들의 몬도가네」도 유사한 형태의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견실한 감명을 주는 박호재의 「다시 그 거리에 서면」 같은 작품은 광주항쟁 열흘간을 광주 안에서 보낸 한 가족의 눈으로 조망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부자 시점의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그려지는 광주의 비극성 역시 참담스러움의 실감으로 다가오지만 동시에 '형석 '으로 대변되는 살아남은 자의 고통이 광주 이후 얼마나 더 욕된 고통으로 남을까 하는 점을 자연스레이 환기시키거니와 그런 점은 독자들의 안타까움을 더욱 자아내게 한다.
윤정모의 「밤길」 역시 살아남은 자의 시선을 빌린 소설이다 (김신부와 요섭은 광주의 참상을 서울에 알리기 위해 도청함락 이전 광주를 빠져 나온다). 이 소설에서 무엇보다 당시 독자들의 마음을 아득하게 만들었던 대목은, 광주의 아비규환을 빠져 나온 김신부와 요섭이 당도한 다른 지역의 광경이다. 이를테면 그 지역은 "신명을 내는지 들까부는지 알 수 없는 여가수의 노래가 전파상의 확성기를 깍깍 울려대고" 지나는 행인은 "모두가 너무나 태평한 모습"에 젖어 있다. 야만의 광폭함 앞에서 절망적으로 죽어가는 광주와 별로 멀지도 않은 지역의 일상이 그리도 "태평한 모습"으로 흘러가는 것은 광주의 고립성이나 절박함과 너무나 비교되어 광주의 현실을 실로 비극적으로 부각시키거니와 그런 까닭에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도 혹시 바로 그때 그런 일상을 보내고 있지는 않았는가 하는 자책감을 불러 일으키기도한다.
이런 광경은 당시 광주 밖의 사람과 광주 안의 사람들이 얼마나 다른 현실을 겪어야 했는지, 그렇기에 그것은 얼마나 더 기막힌 일인가 하는 점을 환기시키면서 광주의 비극성을 더욱 고조시킨다. 약간은 다른 맥락이지만 광주 소식을 부분적으로 전해 들은 사람들이 생필품을 사재기하는 모습(이영옥, 「남으로 가는 헬리콥터」) 역시 비극성의 가중효과를 낳는다.
한편 형은 진압군으로 동생은 시위대로 나오고, 그러다 형에 의해 동생이 살해되는 이야기를 그린 정도상의 「십오방 이야기는」는 광주항쟁의 표면적 가해자인 공수부대 원을 등장시킨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이는 한편으로 광주항쟁의 전모를 그리기 위해서는 전방위적 시각이 동원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대한 부응이라 할 수 있다.
고발과 분노의 토로 그리고 죄 의식에서 출발하는 작품들은 민주화운동이 더욱 상승되어 가는 새로운 국면 속에서 일정한 변화를 요구받게 된다. 국면의 변화는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간접적인 흑은 부분적인 묘사를 넘어 항쟁의 전모와 진실이 총체적으로 재현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하게 된다. 아울러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요청하는 맑스주의적 계급문학론의 부각은 광주에 대한 간접적 묘사가 오히려 광주문제에 대한 인식의 교란과 균열이라는 역기능으로 작용한다는 생각을 낳는다. 그런 과정에서 출현한 작품이 홍희담의 「깃발」과 「이제금 저달이」다.
「깃발」은 계급운동이 한창 고조되던 시기에 발표되었다는 점과 계급론이 우리 사회의 주요담론으로 부상하는 맥락 그리고 노동자 계급을 항쟁의 중심으로 삼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 등이 상호 맞물려 상당한 주목과 논쟁을 유발한다. 그 논쟁은 대개 「깃발」의 사실성과 노동자계급 당파성의 관철 여분에 관해서였다. 요약하자면 '형자'나 여타 노동자에 대한 묘사는 88년경에나 출현할 법한 노동자형을 시간 이동시켜 80년에 대입시켜 놓은 것이기에 현실성이 없다는 지적에서부터 그들이 계급이론적 차원에서 요구되는 교과서류의 노동자형으로 묘사되어 있기엔 리얼리티가 훼손된다는 이적에 이르기까지 대개 노동자계급 당파성의 관철 여부를 놓고 벌of진 논쟁이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깃발」에 관련된 논의 역시 계급론적 재구성 방식만을 준거로 삼다보니 일종의 계급 환원론으로 기울어지고 마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현존 사회주의가 도괴하고, 90년대라는 경쾌한 시대가 도래하자 소설은 거의 '광주'에서 철수한다. 그러나 그 공백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광주의 진실'에 가장 가까운 장편과 조우한다. 임철우의 「봄날」이 그것이다. 우리는 「봄날」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5월 광주'의 핵심으로 들어 갈 수 있게 되었다. 그 동안 "흉흉한 풍문"과 곡해의 바다 위에 외로이 떠 있던 "절해의 고도"에 발을 내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고도에 상륙하는 순간 우리는, 광주민중항쟁 이후 20여 년에 가까운 시간의 격절감도 채 느낄 새 없이 곧바로 혈흔이 낭자하고 야만이 범람하는 현장 한복판에 낙하된다. 그간 중단편을 통해, 기록물을 통해 혹은 논문을 통해 단지 광주민중항쟁의 앞면, 겉면 또는 밑면 등만을 분산적으로 보아온 우리들은 순식간에 항쟁의 입체공간 속으로 이항되는 것이다. 「봄날」은 그 재앙의 현장 한 복판으로 우리를 호출하여 광주의 열흘을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겪게 만든다.
이 작품은 광주에 관련된 작가 자신의 작품들만이 아니라 그동안 나온 광주민중항쟁 관련 문학 전체를 그러모은 통합물이다. 비유하자면 80년대 광주관련 중단편들의 지류가 「봄날」이라는 큰 강으로 이제 합류하게 된 것이다. 아다시피 임철우만큼 광주문제에 줄기차게 매달려 온 작가도 없다. 많은 작가들이 광주문제에서 일찌감치 철수한 이후에도 그의 일관된 문학적 서원은 오로지 '광주에서부터!'였다.
그런데 일견 보고문학으로 읽혀질 법한 이 소설을 광주관련소설의 통합물로 본다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 동일한 소재나 대상에 대한 글쓰기의 경우 사실에 대한 보고나 실록 작성으로서의 글쓰기가 먼저 있고 나서 미학적 효과물로서의 문학작품이 뒤를 잇는다는 식의 무슨 법칙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 그런 순서를 밟아 오는 것 또한 상례인 점에서 보면 그런 이의가 가능할 법도 하다. 임철우 자신의 글쓰기도 어찌보면 순서가 거꾸로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임철우에게 있어서나 문단 전체에 있어서나 광주문제에 관한 거의 최초의 작품이자, 그러나 상당히 우의적인 방법을 차용했던 「직선과 독가스」, 「불임기」, 「사산하는 여름」등은 오히려 「봄날」 이후에나 나을 법한 소설들이 기에 그렇다. 알레고리적 방편을 사실주의 방법이나 미학적 장치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는 것이라 보는 문학적 통념이나 상식에 충실한 경우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예술 특유의 문법이나 효과를 통한 광주의 서사화는 임철우에게 상당히 저어되는 문제이다.
아직은 광주문제에 대한 서사화의 조건이 마땅찮다는 판단때문에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 지금 중요한 것은 또 광주의 서사화를 위해서라도 선행되어야 할 일은 광주의 진실이 온전히 밝혀져야 한다는 신념 때문에도 그렇다. 작가의 각종 인터뷰, 「봄날」의 서문을 비롯한 여러 대목들에서 그런 점은 상세히 설명된다.
작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그의 글쓰기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고통, 그로부터 간단없이 솟아나는 죄의식, 증언을 통한 죄갚음 의식으로 묶여진다. 더구나 그의 죄의식과 자책감의 속내는 광주에 대한 여타 사람들의 그것과 또한 다르다. 그 다름은 그의 육성에서 이렇게 확인된다.
나는 아주 개인적으로 5월항쟁에 대한 부채도 있어요. 대학생이었면서, 친구와 선후배들이 거기 있었는데도, 나는 막상 중요한 시기에 아무 것도 못했어요. 그 죄의식, 부채의식이 지금까지 나를 붙잡고 있었고, 나를 지탱해줬지요.(월간 <<말>>, 권두 인터뷰 16면)
계엄군의 최후의 진압작전이 개시되기 직전인 26일 밤 열시 반 경, P(작가의 친구-필자)에게서 세번째 전화를 받았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몰라서, 너한테 소리나마 전하려고 전화했다. 나, 별로 후회하지 않는다. 요 며칠동안, 난생 처음으로 사는 것처럼 열심히 살았던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그뿐이야"(자전소설 「낙서, 길에 대하여」, <<문학동네>>, 98년 봄)
P는 작가의 친밀한 벗이다. 이 묘사는 그에게 닥쳐온 광주의 시험을 재현해 놓은 것이다. 「봄날」에서도 동일하게 묘사되는 위 대목은 작가에게 평생에 걸친 죄의식의 깊디깊은 불도장을 새겨 놓는다. 베드로는 새벽이 오기까지 그리스도를 세 번 부인하고 살아 남는다. 그리고는 가슴을 치고 땅을 치며 통곡한다. 자신의 배반과 배덕에 대하여. 베드로는 이후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매달린다. 임철우의 분신일지 모르는 「봄날」의 '명기'는 벗의 죽음이 다가오던 순간 세 번 고개를 돌린다. 그 후 임철우에게 문학을 통한 광주의 증언은 자신의 배반과 비겁함에 대한 죄갚음인 동시에 보속의 도정이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이 작가와 광주항쟁 사이의 특별한 관계에서 빚어지는 양상이라면 광주에 대한 그의 집착은 또다른 이유로도 설명된다. 아래와 같은 말은 광주에 대한 우리의 여전한 곡해와 무감각을 불러 깨우는 언급인 바, 바로 그런 점이 그가 「봄날」을 완성시키지 않을 수 없던 객관적 까닭이기도 하다.
"광주항쟁에 대한 논문이나 정리된 기록은 나와 있어요, 그러나 그 기록에는 사실만 나와 있을 뿐 그때의 분위기나 사람들의 심정, 그 고통, 슬픔 같은 것들은 고스란히 빠져 있어요. …그 비극의 깊이를 몰라요. 진보적 지식인도 말입니다."
(월간 <<말>> 권두 인터뷰 18∼19면.)
무엇보다 그것이 이렇듯 쉽사리 잊혀지고 정략적으로 정리되어 가는 현실에 대해서, 그리고 광주시민들에겐 여전히 피눈물 솟구치는 '현실'이 타인들에게는 이미 정리되어진 한낱 '과거'일 뿐이어야 하는 이 비정한 세태에 대해서 말이다.
(자전소설 「낙서, 길에 대하여」, <<문학동네>> 98년 봄, 60∼61면.)
광주에 대한 추상적 이해, 성급한 망각, 정략적 이용 등도 그렇지만, 임철우가 보기에 광주 밖 사람들은 광주를 알기는 하지만 광주의 비극은 알지 못하고, 비극을 알기는 하지만 비극의 깊이는 알지 못하기에 결국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본다.
"쯧, 기대했던 것보다는 별 것도 아닌걸."(「관광객들」, <<달빛밟기>> 116면.)
망월동 묘역에 처음 가 본 사람들, 어찌 생각하면 우리 모두를 은유하는 '관광객'들의 위와 같은 말은 광주항쟁 열흘 간, 총칼에 죽어간 사람들 그리고 지금까지 숨막히는 죄의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담함과 자연스레이 오버랩된다. 관광객의 말을 다소 비약시켜 해석하자면 관광객으로 은유되는 외부인의 눈에는 혹여 광주민중항쟁이 일종의 역사적 스펙타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스펙타클은 그 규모가 크면 클수록 볼만하다고 생각하는 법, 그래서 만약 외부인들에게 광주가 이제는 하나의 스팩타클로 자리잡았다면 그들이 도대체 광주항쟁에서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하는 근원적인 회의를 갖게 된다. 어쨌든 광주민중항쟁은 여전히 곡해와 편견의 자리 안에 가로놓여 있다는 것이 작가의 생각인 셈이다.
그의 「봄날」은 결국 광주에 대한 지속적인 곡해와 편견을 바로 잡고자 하는 열망과 동시에 광주에 대한 부채를 일부분이나 갚아 나가는 제의성격의 결합으로 생산된 것이다. 이 작품이 보고문학에 근사하게 된 까닭도, 광주민중항쟁의 사실을 '정확히' 증언, 재현하고자 하는 견결한 의지도 모두 거기에 근원을 둔다 하겠다.
증언과 정확한 기록에의 강렬한 집착은 재현이라기보다는 재연에 가깝게 만들고 그 재연은 한편으로 일종의 염결성이 전환된 형태이다. 그가 이 작품에서 문학적 상상력을 상당부분 유보하게 되는 이유도 결국 광주의 진실과 깊이를 '사실 그대로' 재현해야 한다는 강한 염결성 때문이라는 말이다. 그 염결성의 순도는, 가령 소설에서 도청함락 시간이 묘사의 편의상 실제의 도청 함락 과정의 시간과 다소 달라지자 그것을 각주 처리하여 그 실제 시간을 정확히 밝혀 놓은 대목에 이르면 실로 극대화된다. 물론 이 작품이 자칫 건조해지기 쉬운 증언과 기록적 글쓰기만으로 축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집필 와중에 몇 번이나 울음을 컥컥 삼켜야 했다는 작가의 심정이 충분히 공감되고도 남게 인물과 사건의 그물 속에 서정적·서사적 효과는 간단없이 방출된다. 특히 도청 함락 직전 결단과 인간적 고뇌가 교차하는 시민군들의 행동과 내면에 대한 묘사는 어떤 소설보다 더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바이다.
광주민중항쟁은 광주시민 대 군사파시즘 및 미국의 제3세계 고강도정책 사이의 모순과 길항의 폭발이다. 물론 광주시민이라는 집합에 재야 및 학생을 포함하는 지식인과 기층민중의 구분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항쟁 이후 '5월 광주'에 대한 변혁론적 관점에서의 해석이 이 양자 사이의 계급론적 구분에 기반하고 있었다는 점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그런 차이에 대한 해석 이전에 먼저 파악되어야 할 문제는 광주항쟁 열흘간의 구체적 면모이다. 이 면모의 구축을 위해 작가는 그간 나왔던 각종 증언과 자신의 체험을 순차적 시간 배열로 사건화한다. 그리고 그 사건의 성격에 가장 적절한 인물들을 사건의 전달자로 배치한다. 이 인물은 허구성이 가미된 인물과 실제 인물의 병존으로 혼재되어 있는데 허구적 인물의 경우 한편으로는 광주민중항쟁을 바라보는 작가의 통시론적인 관점이 반영되기도 한다. 그에 비해 실제 인물에 대한 묘사는 통상 소설 전개의 필수적 요건이라 하는 성격의 발전 측면이 부재한 형편인데 이는 사실에 대한 충실한 재현이라는 원칙이 허구의 개입을 최대한 대로 막고 있기 때문일 터이다. 다중 시점 형식이 이미 광주 문제에 대한 입체적인 묘사의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입체성은 몇몇 개성으로 유형화되는 인물의 묘사를 통해 공고화된다. 이 입체성이 빛나는 것은 광주항쟁에 관련된 어떤 사람이건, 요컨대 온건파든 강경파든, 어떤 계급, 계층이든 흑은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어떤 생각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건 그 나름대의 진실을 가지고 있다는 작가의 균형 잡힌 사고로 인해서이다. "작은 불꽃들 하나" 하나의 존재가 "수백 수천 수만의 불기둥이 되고 마침내 거대한 불의 강"이라는 놀라운 공동체를 이룬다는 생각도 작은 불꽃 하나의 의미 조가 소홀히 취급되어서는 수만의 불기둥은 있을 수 없다는 예의 균형잡힌 사유의 발로이다. 그런 사유가 가능하기에 재야 및 학생을 포함하는 지식인, 온건파, 강경파, 성직자, 기층민중 등의 서로 다른 체험과 관점 등이 서로 차이짐에도 그 모든 것을 해방 공동체의 소중한 골격들로 평가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도 그랬지만 소설에서도 윤상현은 그 유형 중 가장 도드라지는 인물이다.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하다 계엄군의 총에 맞아 죽는 드라마틱한 측면에서부터 지식인의 성격과 노동자계급의 정서 등이 두루 통합되어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윤상현을 주목하는 까닭은 그의 영웅적 면모가 주는 매혹 때문이 아니다. 그의 관점과 행동이 바로 광주의 본질과 진실의 복합적인 측면을 아주 적절하게, 동시에 절절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윤상현에 관련된 다음과 같은 묘사들은 무참한 비극성과 해방공동체의 환희라는 광주항쟁의 양 극단적인 측면과 그것이 혼성되어 완성되는 광주항쟁의 중층적 면모를 곡진하게 보여준다.
1) 난 민중의 혼을, 폭발력을 믿고 싶네. 아니, 확실히 믿네, 자네도 지난 며칠 동안의 그 놀라운 싸움을 보지 않았나?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일이 우리들 속에서 일어난 거야. 그것만으로 우린 이미 절반쯤 승리한 것인지도 몰라.(「봄날」 5권, 139면.)
2) 저희들에겐 아직도 찾아야 할 그 무엇인가가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 며칠 동안 저희들은 참으로 많은 죽음들과 고귀한 희생들을 보아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껏 저희들이 살아온 모든 시간들을 다 합쳐도 얻지 못할 소중한 교훈들을, 그 이름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저희는 배웠습니다. 죽음보다 더 소중한 그 어떤 것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 저희들이 여기 남을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래서 인지도 모릅니다. 이 자리를 텅 비어들 채로, 그냥 아무런 흔적조차 없이 저희들은 이곳을 고스란히 내줄 수는 없습니다. 그것만이 저 수많은 고귀한 희생들을 헛되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어른신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이 싸움을 마무리할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어느 누군가가 지금 이 자리를 지켜야 한다면… 그렇다면 기꺼이 저희들이 남겠습니다. 다만 그것뿐입니다. (「봄날」 5권, 363∼364면.)
3) 결국 이렇게 끝나고 마는 것인가. 그 어디서고 끝내 구원의 손길 하나 내밀어 주지 않은 채로, 이렇게 우리들은 죽어가야 한다는 말인가. 이 도시만 끝내 버림받고 마는 것인가.… 서울이여! 부산, 대전, 인천, 대구여! 당신들이 달려와 주기를 우리는 기다렸다… 맨주먹만으로 수백 수천의 총구를 향해 미친 듯 달려나가면서도, 참혹하게 죽어간 자식의 시신을 껴안고 가슴이 찢어지도록 몸부림치고 통곡하면서도, 그래도, 그래도 그 기다림이 있었기에 우리는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다… 아아, 지금 당신들은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가. 왜 이 도시를 잊어버렸는가. 우리는 이렇게 죽어가고 있는데, 지금 당신들의 잠자리는 평안한가. 당신들이 꾸는 꿈은 아름다운가. 그대들과 우리들은 이 순간 얼마나 아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인가.(「봄날」 5권, 398∼399면.)
4) 윤상현은 말없이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먹물 같은 어둠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을 뿐 광장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윤상현은 저 열흘 동안의 뜨거운 싸움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한덩어리로 격렬하게 끓어넘치며 밀물처럼 저 광장으로 쏟아져 나오던 수만 수십만의 사람들을. 그들의 노도와 같은 함성을, 저마다 가슴 속에 간직한, 한겨울 보리싹마냥 작고도 지순한 인간애의 불꽃, 자유와 정의와 생명을 향한 그리움의 불꽃들을. 그리고 그 작은 불꽃들 한나가 모여 수백 수천 수만의 불기둥이 되고, 마침내 거대한 불의 강을 이루며 뜨겁게 굽이쳐 흘러가는, 그 찬란한 인간의 신화를. 그리움과 희망의 신화를… .(「봄날」 5권, 401면.)
민중의 혼 운운하는 1)에서부터 나머지 인용문 전체를 앞 뒤 맥락 없이 잘라서 보면 이른바 민중성에 대한 교과서적이고 도식적인 설명의 반복으로 읽힐 수도 있고 또 윤상원의 주관적 열망이 반영된 것으로 비칠 법도 하다. 그러나 「봄날」 전체에 한땀 한땀 꾹꾹 박혀 있는 '5월 광주'의 유례없는 야만성과 그에 극한적으로 비교되는 광주민중의 놀라운 인간애의 흐름을 곰곰이 되새겨보면 그것이 도식성의 반영이기는 커녕 얼마나 핍진한 현실의 반영인가를 알게된다. 그 반영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광주 민중항쟁에 깃들어 있는 가치와 의미의 보편성에 다달을 수 없는 것이다.
윤상현의 독백과, 인용문 4)와 같은 그에 대한 묘사 등은 결국 광주민중항쟁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한편으로는 짧은 기간 동안이지만 광주시민들이 자신의 희생과 헌신을 뭇사람들에게 열어 젖혀 보여 주었던 해방 공동체의 역사적 실현이 그것이다. 그것은 인간에의 가없는 신뢰와 기쁨이다. 다른 하나는 인용문 3)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형제와 이웃이 죽어가는 데도 누구하나 그들의 팔을 잡아 주지 않던 비극의 절정이 그것이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맹렬한 절망이다. 광주는 이렇듯 상반되는 두 기둥이 그래도 서로를 의지하며 서 있던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어쨌든 싸움은 끝난다. 도청을 사수하던 사람들은 사살당하거나 체포당하고 수많은 광주사람들은 그날 새벽 깊은 자괴감에 몸을 떨었다. 하지만 도청을 사수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수하고자 했던 것이 도청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싸움은 일단 패배할 것이고 도청은 함락될 것이라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도청을 사수하고자 했던 까닭은 그 도청의 사수가 결국에는 '5월 광주'의 사수로 승화될 것이라는 점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알았다기보다 그렇게 간곡한 기대를 했다고 보는 것이 더 온당할 터이다. 자신들은 비록 죽어가지만 그 죽음이 만약 하나의 가치를 지닐 수 있다면 훗날이나마 '5월 광주'의 귀한 가치가 전해지고 사람들이 그것을 소중히 받아들여 주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들의 기대와 희망이 옳았다는 것은 이제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봄날」은 바로 그 기대와 희망을 저버릴 수 없는 작가가 스스로 진혼의 만신이 되어 풀어낸 우리시대의 비극적 역설이다. 비극이 가장 찬란한 희망으로 자태를 바꾼다는 점에서.
'5월 광주'의 서사화가 가야 할 길은 아직 멀다. 「봄날」은 작가 스스로 '광주 문학'의 노둣돌이기를 바란다. 「봄날」 이후의 광주관련 소설은 이제 두 가지 과제를 감당해야 한다. 「봄날」이 광주 '안'의 총체적 구현이라면 그 이후 작품은 광주 안을 밖과 만나게 해서, 정히 안감의 총체적 지평에 도달해야 하는 과제를 안는다는 뜻에서 그렇다. 동시에 점점 희미해져 가고 도적질당하고 있는 광주민중항쟁의 엄중한 함의를, 말의 참된 뜻을 통해 언제나 당대화시켜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떠안게 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런 일은 「봄날」보다 더욱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봄날」에 무슨 의미가 남겠는가? 임철우가 만들어 논 노둣돌을 밟고서 더 높고, 더 구체적이고 더 복잡한 총체성의 광활한 지평에 올라서는 일이 가능할 때 비로소 '5월 광주'의 서사는 제 모습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광주는 오래 지속될 미래의 단절되지 않는 꿈으로 계속 남을 수 있을 것이다. 도청 함락 전야, 꺼칠한 시민군들이 마지막 담배를 나누면서 바라보았던 어두운 창공의 별빛은 바로 그런 꿈의 결정이 아니었을까?
오래 지속될 미래, 단절되지 않는 '광주'의 꿈
-광주민중항쟁의 문학적 형상화에 대하여
이 성 욱/문학평론가, 성공회대 강사
1980년 5월 16일부터 5월 27일까지 일어난 광주에서의 민중항쟁은 비록 열흘간의 사건이었지만 그 시간적 길이는 80년대 전체의 압축이었고 그 의미는 80년대 질풍노도의 반란적 에너지가 자신의 존재증명을 위해 언제나 회귀하던 언덕으로 자리했다. 80년대, 전두환 군사정권과 싸우고자 했던 사람들에게는 적어도 그랬다. 얼음왕국과 불기둥이 서로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면도날 같은 긴장 위에서 맞겨룸으로 일관하던 그 80년대, 학살자의 압제에 반란과 전복을 꿈꾸던 사람들에게 그 반란에의 맹약과 서원은 언제나 '광주'라는 두 글자 앞에서 이루어졌다. 광주민중항쟁 열흘 간 광주시민들이 보여주었던 눈물겨운 인간의 우애와 공동체의 형상은, 말하자면 그들이 꿈꾸는 이상적 사회의 현실적 투사물이었다. 그때 '광주'라는 두 글자는 퍼덕퍼덕 살아뛰는 저항적 생명력의 결정이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터이다. 그리고 20여 년이 흐른 지금, 그러나 광주는 이제 어느덧 '기념'의 자리로 물러나고 있다. 아니 그런 자리로 옮겨져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을 받는 느낌이기 조차하다. 용서와 화해의 언표는 난무하지만 정작 그 지시하는 내용은 텅 비어 있는 채, 그냥 껍데기만의 '신화'로 남으라는 강요를 받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이다.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광주민중항쟁은 70년대와 그 이후를 갈라놓는 날카로운 분기점이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막연한 자유주의에의 열망으로 요약되는 70년대까지의 반정부운동은 희대의 야만적 학살에 의해 좌절한다. 요컨대 자기재생산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야만의 극단을 선택할 수 있는 지배와 권력의 벌거벗은 속성을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확인한 것이다. 반미를 기저로 삼는 반제국주의, 좌파 이데올로기의 대중적 확산 그러고 사회주의적 지향을 통한 구체적인 변혁 사상과 조직화로 설명되는 80년대의 대세는 바로 70년대적 열망의 멸절 과정인 '광주'의 산물이자 동시에 '광주 이후'의 이정표였던 셈이다. '광주'는, 따라서 80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대략 두 갈래의 함의로 작용하고 있었다. 하나가 깊은 도덕적 죄의식 및 부채감의 환유물이라면 다른 하나는 현실 정치 및 권력행위의 본질에 대한 인식 확대의 결정적인 준거였다. 80년대 문학의 클 주류라 찰 수 있는 민족·민중문학이 당대의 핵심적 기획으로 간주하던 이른바 '변혁에의 복무'라는 명제 역시 예의 준거를 기반으로 삼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바였다. 또한 시각을 달리하여 이른바 자유주의 문학을 살펴보더라도 그 역시 광주라는 화두에서 마냥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광주문제에 대한 문학적 형상화라는, 일견 시대적 요청과 당위로 받아들여질 법한 맥락의 정당성 여부와는 별개로 그런 요청에 당대의 문학이 얼마나 충실히 회답하고 있었는가를 다시금 점검해 보면 유감스럽게 많은 공백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물론 '광주'에 대한 문학적 형상화가 광주민중항쟁을 직접적인 소재로 취해야 이루어지는 것임은 아닐 것이다. 광주민중항쟁의 함의가 80년대 이후 남한 사회의 바람직한 진전에 모두 관련된다면 80년대 내내 전개되었던 전국민의 민주화 의지와 좀더 나은 사회에 대한 열망도 그리고 80년대 중반부터 폭발적으로 확장된 노동자 계급을 비롯한 기층민중의 대중적 세력화도 광주민중항쟁의 직간접적인 산물일 터이다.
그렇기에 이 산물의 맥락이 여러 소설작업에 중대한 성찰의 계기로 작용하고 반영되었다면, 넓게 보아 그것 역시 광주민중항쟁의 문학적 문맥화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문제를 그런 식으로 해석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말 그대로 넓은 의미의 성긴 망으로 걷어올릴 때 그러한 것이다. 사안을 엄정하게 가려 본다면 결국 광주문제에 대한 그간의 문학적 형상화가 부실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특히나 '광주'를 80년대 문학의 발원처로 여기던 민족·민중문학에서조차 그렇다는 사실은 유다른 소회를 자아내게도 한다.
양과 질 공히 만족스럽지 못한 까닭을 찾아 볼 경우, 우리는 먼저 광주민중항쟁 이후, 항쟁의 의미, 개념 등이 80년대 변혁운동의 특정 범주 및 관점에 의해 재구성되는 과정을 주목해야 한다. 상술했다시피 80년대 변혁운동은 광주민중항쟁의 뼈저린 경험을 통해 운동의 내용과 방법이 이전과 달라야 한다는 점을 자각한다. 맑스주의에 기초하는 급진적 해방프로젝트가 그것인 바는 주지하는 대로이다. 계급투쟁 중심성을 핵심으로 하는 맑스주의는 당연히 광주민중항쟁을 계급투쟁론의 문맥에서 재해석하고자 했다. 광주항쟁 경험을 향후 계급투쟁의 교두보이자 이념적 거점으로 삼고자 하는 태도는 그런 재해석에 있어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을 것이다. 이는 어찌보면 당연한 소치일 수도 있다. 우리 경우만이 아니라 맑스주의적 변혁론의 지평에서는 '파리꼬뮌'을 비롯한 세계 역사상의 모든 항쟁들을 예의 계급투쟁론적 재구성의 과정을 거친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특정 시각을 통한 과거의 현재화라는, 바꿔말해 재구성이라는 범주의 개념적 지위가 정당한가 하는 점과는 별개로 그 재구성 작업이 재구성 대상의 진실을 얼마나 충분히 포착하고 있는가 하는 점은 언제나 근본적인 질문이 된다.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재구성 관점과 방법이 '광주의 진실'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가 하는 점은 그런 의미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질문이다. 과거형으로서의 항쟁 체험을 현재화시키고자 하는 재구성 노력 자체는 실상 항쟁의 연속성을 성취한다는 점에서 소중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재구성 과정 속에서 과거 사실이 굴절되거나 실용적 목적에 의한 가감 등이 발생할 때 일어난다. 또한 고의성은 없다하더라도 태도와 방법의 오류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정리하자면 80년대의 계급투쟁 담론이 꾀한 급진적 해방프로젝트와 광주민중항쟁의 의미론적 절합을 위한 재구성 논리는 광주민중항쟁을 당대의 담론적·실천적 전략 생산을 위해 일종의 생산질료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그런 재구성 과정이 예의 생산질료가 내포하고 있는, 그것만의 고유한 진실과 논리, 즉 광주민중항쟁의 '독자적'인 진실을 전면적으로 파악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일단의 문제를 낳았다. 정치적·계급론적 선택과 배제의 불가피한 논리를 밟게 되면서 '광주'의 의미의 깊이와 넓이가 상대적으로 축소되거나 사상되는 측면이 상당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계급투쟁 담론의 중심 성으로 '광주'를 호출하고 또 그 범역으로만 환원 하고자하는 태도와 방법으로 인해 그 범역 밖의 것은 부차적인 혹은 부분적 변수로 방치해 버렸다는 것이다. 물론 광주민중항쟁에 계급투쟁의 성격이 삼투되어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항쟁의 전면적 성격과 개별적 진실을 포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경향은 급기야 '광주'의 위상을 해석의 대상으로만 국한하는 역기능을 낳기도 했다.
광주민중항쟁은 이처럼 계급투쟁, 혹은 거대담론 중심성 의향도 아래 의미의 '과잉결정'을 겪게 되었다. 중복되는 말이지만 예의 해방 프로젝트가 광주민중항쟁의 세례 속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광주'에 대해 계급투쟁론적 해석을 수행하는 일은 그것대로 의의가 있기도 하고 또 불가피한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출발점에 대한 보다 복합적이고 심층적 진실 규명에의 충분한 노력이 수반되지 않는 가운데 전개되는 해방전략이라면, 그것은 많은 경우 '광주'를 특정 담론에 의한 당위전제로 고정시켜 버리기 십상이다. 그럴 경우 만약 역사현실의 변화에 따라 계급투쟁 중심성이 약화되거나 기각되는 형국에 이르면 당위전제는 어느덧 부당 전제로 전환되어 버린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당위전제와 부당전제 사이의 동요와 균열이 결국 광주민중항쟁의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일에 있어서도 균열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광주항쟁의 고유성에 대한 소설화가 부실하다는 점, 특히나 민족·민중문학의 작업이 그렇다는 점은 앞에선 이야기 한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광주항쟁에 대한 문학 자체로서의 문제의식과 총체적 서사화가 진득히 사고되기도 전에 계급론적 관점에 의한 '광주의 해석' 경향을 쉽게 받아들인 점이 그런 부실함의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눈 앞에 벌어지는 일에 대한 형상화와 일단 과거의 일로 간주되는 '광주'의 형상화 사이에 일련의 우선 순위를 매기게 되고 설혹 '광주'를 문학화 한다 해도 광주를 계기적으로 호명하는 일에 익숙해져 간 것이다. 광주민중항쟁을 소위 '각성된 노동자의 눈' 혹은 노동자계급 당파성의 관점으로 재구성해보고자 한 홍희담의 「깃발」나 「이제금 저 달이」 같은 작품은 그런 점에서 다중적인 평가의 대상이 된다 하겠다. 이 작품이 광주관련 문학의 새로운 지평 확장인 동시에 소중한 수확인 것만은 어김없는 사실이지만 이 작품을 둘러싼 논쟁이 거개노동자계급 당파성의 충실성 여부만을 중요 논점으로 삼았다는 점에서도 그렇거니와 작품을 볼 때도 앞에서 언급한 계급론적 환원주의의 혐의에서 아주 자유롭지는 못한 점에서도 그렇다.
정리하자면 80년대 중반까지의 광주관련 작품들은 일종의 부채의식이나 죄의식이 창작동기로 작용했던 반면 80년대 후반부터의 작품은 대개 '광주'를 노동자계급 당파성 혹은 민중적 현실주의라는 해석체계로 재구성하고자 하는 과정과 긴밀히 연관된다. 계급론적 시각에 의한 광주의 재구성·재의미화는 계급론적 해석체계 밖에 존재하는 '광주'를 방치하는 우를 범한다. 광주에서 일어난 일의 실제가 충분히 가려지기 전에 수행된 재구성으로서의 광주의 특정한 '개념화' 작업은 상황변화에 따라 새로운 재개념화 과정으로 나아간다. 그런 개념화·재개념화 과정 속에서 '광주'의 추상 수준은 더욱 상승되고 그 실제는 더욱 응축되었다. 상승은 땅에서 일어난 사건의 구체성과 역방향을 타기 쉽다. 다시 말해 땅에서의 일이 충분히 파악되기 전에 추상의 공간으로 '증류'되기 십상이다. 광주관련 소설을 비롯한 모든 소설은 자신의 존재를 구체성의 확보를 통해 증명하기 마련이다. 광주에 대한 전면적인 서사가 그간 제대로 성취되지 못한 것은 결국 '광주 소설'들이 구체보다는 추상 쪽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광주관련 소설이 만족스럽지 않은 이유는 다 맥락을 통해서도 추정 가능하다. 군말이지만 예술은 상상력의 후예이다. 서사문학 역시 마찬가지이다. 상상력의 서사적 조형은 자신이 취하는 소재나 대상에 대한 일정한 거리 확보를 통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를 비판적 거리 혹은 방법적 성찰의 간격이라 말한다. 이 거리는 소설쓰기의 밑받침이 되는 객관성을 탑재하는 데에 필수적인 요건이 된다.
소설에서 대상에 대해 객관성과 성찰의 거리를 확보한다함은 한편으로 대상과의 지나친 정서적 밀착을 경계하는 일이기도 하다. 상상력이라는 것 역시 자의적인 정서의 분비물이 아니라, 이를테면 감성적 판단과 오성적 판단의 종합이라 한다면, 이 상상력의 가동 역시 예의 객관성과 따로 떨어져 노는 것이 아님은 당연할 터이다. 그런 점에서 특정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서사를 만날 때 우리는 대개 두 가지 기대지평을 가지게 된다. 하나가 그 역사적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진실이라는 언사가 때로는 모호함의 곤란을 야기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마냥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는 바에야 그것의 사실적·의미론적 진실을 규정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의 복원이라면 다른 하나는 미학적 완성도이다. 이는 물론 역사현실에 대한 재현과 환기에 있어 서사적 글쓰기만이 내장하고 있는 독자적 기능과 효과에 대한 오랜 믿음으로 인해서이다.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그간의 소설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런 기대지평을 갖는다. 하지만 그 기대는, 뒤에서 이야기할 『봄날』이 나오기 전까지 유보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실용적 목적에 의해 쓰여진 것도 아니고 또한 소설 초년생들도 아닌, 서사의 역량이 상당한 작가들의 작품들을 대했을 때 그렇다는 것은 사실 의문거리이다. 우리는 그 까닭을 예의 미학적 거리의 부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거리의 부재는 작가가 마주하고 있는 묘사 대상의 사실성 자체에 내재해 있는 어떤 에너지의 엄청남이 작가를 덮어버리거나 압도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예의 에너지는 가공할 야만, 유례없는 비극성, 그로 인한 충격의 강도 등으로 구성된다고 하겠다.
그런 까닭에 묘사대상을 가로지르고 있는 비극성의 엄청난 에너지는 작가에게 충격의 극대치로 이항되고, 작가와 묘사대상의 관계에 있어 작가가 자신을 강타하는 그 대상의 충격적 속성을 넘어서지 못할 경우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죄책감, 부채의식 등도 그 충격의 사후효과이다). 광주의 참혹은 작가에게 말문을 막히게 하는 경악 그 자체였다. 말문이 막히는 일은 언어적 재현 이전에 지극히 직접적인 정서의 감응 상태를 야기한다.
서사에 있어서의 미학적 거리의 확보는 묘사대상으로부터 정서적으로 상대적인 자유가 전제될 때 가능하다. 그러나 묘사대상이어야 할 특정 사건의 충격성이 작가의 경악이나 혼절같은 정서 형태를 야기할 경우 그것은 묘사대상과 정서적으로 너무 밀착되어 버리는 셈이 된다. 그때 서사의 조형을 위한 미학적 거리 및 객관성의 획득은 상당한 곤란을 겪게 된다. 객관성의 산출 요건인 대상에 대한 냉정한 관찰자로 존재하기 어려운 경우 묘사대상에 대한 문학언어로서의 의미화 과정이 상당히 곤란할 것이라는 점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예상된다. 장편 「봄날」의 집필을 끝낸 임철우가 "이건 아무래도 내 작품이 아닌 것 같다. 쓰는 내내 보이지 않는 어떤 것들에 구속당해 있었다. 자유는 없었다. 십 년 동안, 자신이 파괴되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저 대리인에 지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 열흘 동안,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수많은 사람들의… 남들한테는 소설이지만 나에게는 아직도 현실이다. 수없이 더듬고 주물러야 하는 현실"이었다고 토로하는 대목도 심층적으로는 그런 문맥으로 읽힌다.
광주민중항쟁은 그 이후, 이념과 정치적 태도 여하에 상관없이 적어도 육체적·정신적 자유와 인간의 구원을 간구하는 작가들이라면 누구도 비켜갈 수 없는 화두였을 것이다. 80년대 중반에 제출된 임철우의 「직선과 독가스」, 「불임기」 등을 비롯해 여타 작가들의 광주 관련 중단편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80년대 중반은 한편으로는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의 강도가 점차 고양되던 시기였지만 그럼에도 광주문제에 대한 여하한 언급이나 담론은 여전히 재갈물려 있던 일종의 교착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광주를 소설형식으로 온전히 복구한다는 것이 마냥 쉬운 일은 아니었다. 광주를 다룬 초기 소설들이 그 제재나 형상화에 있어 우화적 방법이나 부분적 묘사로 에둘러 갈 수밖에 없었던 까닭도 그런 상황에 연루된다 하겠다. 이후 80년대 후반에 이르면 파시즘의 부분적 무력화에 힘입어 광주 관련 소설 작업이 상대적으로 활발해진다.
광주에 대한 소설화는 먼저 폭로와 고발의 형태를 취한다. 모든 언로가 차단당한 상태에서는 소설이 광주항쟁에 대한 증언과 실록을 대신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그런 태도를 낳았다고 하겠다. 그 고발의 밑바닥에는 모두 깊은 죄의식이 관류하고 있었다. 이웃과 형제 그리고 동료가 악마의 야만과 광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고 죽어 가는데도 자신은 아무 것도 안했거나 할 수 없었다는 무기력에의 회오, 이유야 어떻든 결과적으로 광주학살에 조력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깊은 죄의식 등이 그때 발표된 작품들의 '표면에 공공연히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그 작품들은 작가의 글쓰기 라기보다는 어쩌면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행할 수 있는 죄갚음의 형식들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편 작품에 자라 희생자 혹은 피해자 시점 중심으로 구성된 작품 또는 내부자와 외부자의 시점을 구분하여 '5월 광주'를 묘사하는 등 그 형식은 다양하게 변주되었다. 아울러 몇 작품은 광주민중항쟁의 통시적 확장을 꾀하기도 했다. 그런 작품은 항쟁이 단순히 일회적이고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한국 현대사를 횡단하고 있는 분단모순의 연장선 위에서 중층결정된 것이라는 문제의식을 내보인다. 문순태의 「일어서는 땅」같은 작품이 그런 유형이라 하겠다.
여기서 작가는 여순반란사건과 광주민중항쟁에서 각각 아버지와 아들을 잃어버리는 화자를 등장시켜 분단으로 인한 비극의 양상에 광주의 비극을 포개 놓는다. 단편에서 그런 커다란 사건들의 통합적 효과가 제대로 나타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비극의 대물림이라는 밑그림은 일정한 설득력을 지닌다. 거기다 광주의 환난 속에서 스스로 작은 십자가형을 선택하는 화자의 아들 '토마스'(영세명)를 구두닦이라는 기층민중으로 설정하여 광주민중항쟁의 계급적 성격의 일단까지 포괄하려는 시도마저 내비치고 있다. 이런 대목을 대하다 보면 작은 틀에다 지나치게 큰 이야기를 담으려 한다는 과욕을 지적하고자 하는 생각보다 제한된 조건 속에서나마 광주의 진실을 모두 이야기하고자 하는 작가의 어떤 소명론적 강박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광주항쟁에서 아들을 잃은 여인과 그 여인에게 연루되어 있는 분단문제를 드러내는 한승원 「당신들의 몬도가네」도 유사한 형태의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견실한 감명을 주는 박호재의 「다시 그 거리에 서면」 같은 작품은 광주항쟁 열흘간을 광주 안에서 보낸 한 가족의 눈으로 조망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부자 시점의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그려지는 광주의 비극성 역시 참담스러움의 실감으로 다가오지만 동시에 '형석 '으로 대변되는 살아남은 자의 고통이 광주 이후 얼마나 더 욕된 고통으로 남을까 하는 점을 자연스레이 환기시키거니와 그런 점은 독자들의 안타까움을 더욱 자아내게 한다.
윤정모의 「밤길」 역시 살아남은 자의 시선을 빌린 소설이다 (김신부와 요섭은 광주의 참상을 서울에 알리기 위해 도청함락 이전 광주를 빠져 나온다). 이 소설에서 무엇보다 당시 독자들의 마음을 아득하게 만들었던 대목은, 광주의 아비규환을 빠져 나온 김신부와 요섭이 당도한 다른 지역의 광경이다. 이를테면 그 지역은 "신명을 내는지 들까부는지 알 수 없는 여가수의 노래가 전파상의 확성기를 깍깍 울려대고" 지나는 행인은 "모두가 너무나 태평한 모습"에 젖어 있다. 야만의 광폭함 앞에서 절망적으로 죽어가는 광주와 별로 멀지도 않은 지역의 일상이 그리도 "태평한 모습"으로 흘러가는 것은 광주의 고립성이나 절박함과 너무나 비교되어 광주의 현실을 실로 비극적으로 부각시키거니와 그런 까닭에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도 혹시 바로 그때 그런 일상을 보내고 있지는 않았는가 하는 자책감을 불러 일으키기도한다.
이런 광경은 당시 광주 밖의 사람과 광주 안의 사람들이 얼마나 다른 현실을 겪어야 했는지, 그렇기에 그것은 얼마나 더 기막힌 일인가 하는 점을 환기시키면서 광주의 비극성을 더욱 고조시킨다. 약간은 다른 맥락이지만 광주 소식을 부분적으로 전해 들은 사람들이 생필품을 사재기하는 모습(이영옥, 「남으로 가는 헬리콥터」) 역시 비극성의 가중효과를 낳는다.
한편 형은 진압군으로 동생은 시위대로 나오고, 그러다 형에 의해 동생이 살해되는 이야기를 그린 정도상의 「십오방 이야기는」는 광주항쟁의 표면적 가해자인 공수부대 원을 등장시킨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이는 한편으로 광주항쟁의 전모를 그리기 위해서는 전방위적 시각이 동원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대한 부응이라 할 수 있다.
고발과 분노의 토로 그리고 죄 의식에서 출발하는 작품들은 민주화운동이 더욱 상승되어 가는 새로운 국면 속에서 일정한 변화를 요구받게 된다. 국면의 변화는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간접적인 흑은 부분적인 묘사를 넘어 항쟁의 전모와 진실이 총체적으로 재현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하게 된다. 아울러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요청하는 맑스주의적 계급문학론의 부각은 광주에 대한 간접적 묘사가 오히려 광주문제에 대한 인식의 교란과 균열이라는 역기능으로 작용한다는 생각을 낳는다. 그런 과정에서 출현한 작품이 홍희담의 「깃발」과 「이제금 저달이」다.
「깃발」은 계급운동이 한창 고조되던 시기에 발표되었다는 점과 계급론이 우리 사회의 주요담론으로 부상하는 맥락 그리고 노동자 계급을 항쟁의 중심으로 삼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 등이 상호 맞물려 상당한 주목과 논쟁을 유발한다. 그 논쟁은 대개 「깃발」의 사실성과 노동자계급 당파성의 관철 여분에 관해서였다. 요약하자면 '형자'나 여타 노동자에 대한 묘사는 88년경에나 출현할 법한 노동자형을 시간 이동시켜 80년에 대입시켜 놓은 것이기에 현실성이 없다는 지적에서부터 그들이 계급이론적 차원에서 요구되는 교과서류의 노동자형으로 묘사되어 있기엔 리얼리티가 훼손된다는 이적에 이르기까지 대개 노동자계급 당파성의 관철 여부를 놓고 벌of진 논쟁이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깃발」에 관련된 논의 역시 계급론적 재구성 방식만을 준거로 삼다보니 일종의 계급 환원론으로 기울어지고 마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현존 사회주의가 도괴하고, 90년대라는 경쾌한 시대가 도래하자 소설은 거의 '광주'에서 철수한다. 그러나 그 공백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광주의 진실'에 가장 가까운 장편과 조우한다. 임철우의 「봄날」이 그것이다. 우리는 「봄날」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5월 광주'의 핵심으로 들어 갈 수 있게 되었다. 그 동안 "흉흉한 풍문"과 곡해의 바다 위에 외로이 떠 있던 "절해의 고도"에 발을 내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고도에 상륙하는 순간 우리는, 광주민중항쟁 이후 20여 년에 가까운 시간의 격절감도 채 느낄 새 없이 곧바로 혈흔이 낭자하고 야만이 범람하는 현장 한복판에 낙하된다. 그간 중단편을 통해, 기록물을 통해 혹은 논문을 통해 단지 광주민중항쟁의 앞면, 겉면 또는 밑면 등만을 분산적으로 보아온 우리들은 순식간에 항쟁의 입체공간 속으로 이항되는 것이다. 「봄날」은 그 재앙의 현장 한 복판으로 우리를 호출하여 광주의 열흘을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겪게 만든다.
이 작품은 광주에 관련된 작가 자신의 작품들만이 아니라 그동안 나온 광주민중항쟁 관련 문학 전체를 그러모은 통합물이다. 비유하자면 80년대 광주관련 중단편들의 지류가 「봄날」이라는 큰 강으로 이제 합류하게 된 것이다. 아다시피 임철우만큼 광주문제에 줄기차게 매달려 온 작가도 없다. 많은 작가들이 광주문제에서 일찌감치 철수한 이후에도 그의 일관된 문학적 서원은 오로지 '광주에서부터!'였다.
그런데 일견 보고문학으로 읽혀질 법한 이 소설을 광주관련소설의 통합물로 본다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 동일한 소재나 대상에 대한 글쓰기의 경우 사실에 대한 보고나 실록 작성으로서의 글쓰기가 먼저 있고 나서 미학적 효과물로서의 문학작품이 뒤를 잇는다는 식의 무슨 법칙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 그런 순서를 밟아 오는 것 또한 상례인 점에서 보면 그런 이의가 가능할 법도 하다. 임철우 자신의 글쓰기도 어찌보면 순서가 거꾸로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임철우에게 있어서나 문단 전체에 있어서나 광주문제에 관한 거의 최초의 작품이자, 그러나 상당히 우의적인 방법을 차용했던 「직선과 독가스」, 「불임기」, 「사산하는 여름」등은 오히려 「봄날」 이후에나 나을 법한 소설들이 기에 그렇다. 알레고리적 방편을 사실주의 방법이나 미학적 장치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는 것이라 보는 문학적 통념이나 상식에 충실한 경우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예술 특유의 문법이나 효과를 통한 광주의 서사화는 임철우에게 상당히 저어되는 문제이다.
아직은 광주문제에 대한 서사화의 조건이 마땅찮다는 판단때문에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 지금 중요한 것은 또 광주의 서사화를 위해서라도 선행되어야 할 일은 광주의 진실이 온전히 밝혀져야 한다는 신념 때문에도 그렇다. 작가의 각종 인터뷰, 「봄날」의 서문을 비롯한 여러 대목들에서 그런 점은 상세히 설명된다.
작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그의 글쓰기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고통, 그로부터 간단없이 솟아나는 죄의식, 증언을 통한 죄갚음 의식으로 묶여진다. 더구나 그의 죄의식과 자책감의 속내는 광주에 대한 여타 사람들의 그것과 또한 다르다. 그 다름은 그의 육성에서 이렇게 확인된다.
나는 아주 개인적으로 5월항쟁에 대한 부채도 있어요. 대학생이었면서, 친구와 선후배들이 거기 있었는데도, 나는 막상 중요한 시기에 아무 것도 못했어요. 그 죄의식, 부채의식이 지금까지 나를 붙잡고 있었고, 나를 지탱해줬지요.(월간 <<말>>, 권두 인터뷰 16면)
계엄군의 최후의 진압작전이 개시되기 직전인 26일 밤 열시 반 경, P(작가의 친구-필자)에게서 세번째 전화를 받았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몰라서, 너한테 소리나마 전하려고 전화했다. 나, 별로 후회하지 않는다. 요 며칠동안, 난생 처음으로 사는 것처럼 열심히 살았던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그뿐이야"(자전소설 「낙서, 길에 대하여」, <<문학동네>>, 98년 봄)
P는 작가의 친밀한 벗이다. 이 묘사는 그에게 닥쳐온 광주의 시험을 재현해 놓은 것이다. 「봄날」에서도 동일하게 묘사되는 위 대목은 작가에게 평생에 걸친 죄의식의 깊디깊은 불도장을 새겨 놓는다. 베드로는 새벽이 오기까지 그리스도를 세 번 부인하고 살아 남는다. 그리고는 가슴을 치고 땅을 치며 통곡한다. 자신의 배반과 배덕에 대하여. 베드로는 이후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매달린다. 임철우의 분신일지 모르는 「봄날」의 '명기'는 벗의 죽음이 다가오던 순간 세 번 고개를 돌린다. 그 후 임철우에게 문학을 통한 광주의 증언은 자신의 배반과 비겁함에 대한 죄갚음인 동시에 보속의 도정이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이 작가와 광주항쟁 사이의 특별한 관계에서 빚어지는 양상이라면 광주에 대한 그의 집착은 또다른 이유로도 설명된다. 아래와 같은 말은 광주에 대한 우리의 여전한 곡해와 무감각을 불러 깨우는 언급인 바, 바로 그런 점이 그가 「봄날」을 완성시키지 않을 수 없던 객관적 까닭이기도 하다.
"광주항쟁에 대한 논문이나 정리된 기록은 나와 있어요, 그러나 그 기록에는 사실만 나와 있을 뿐 그때의 분위기나 사람들의 심정, 그 고통, 슬픔 같은 것들은 고스란히 빠져 있어요. …그 비극의 깊이를 몰라요. 진보적 지식인도 말입니다."
(월간 <<말>> 권두 인터뷰 18∼19면.)
무엇보다 그것이 이렇듯 쉽사리 잊혀지고 정략적으로 정리되어 가는 현실에 대해서, 그리고 광주시민들에겐 여전히 피눈물 솟구치는 '현실'이 타인들에게는 이미 정리되어진 한낱 '과거'일 뿐이어야 하는 이 비정한 세태에 대해서 말이다.
(자전소설 「낙서, 길에 대하여」, <<문학동네>> 98년 봄, 60∼61면.)
광주에 대한 추상적 이해, 성급한 망각, 정략적 이용 등도 그렇지만, 임철우가 보기에 광주 밖 사람들은 광주를 알기는 하지만 광주의 비극은 알지 못하고, 비극을 알기는 하지만 비극의 깊이는 알지 못하기에 결국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본다.
"쯧, 기대했던 것보다는 별 것도 아닌걸."(「관광객들」, <<달빛밟기>> 116면.)
망월동 묘역에 처음 가 본 사람들, 어찌 생각하면 우리 모두를 은유하는 '관광객'들의 위와 같은 말은 광주항쟁 열흘 간, 총칼에 죽어간 사람들 그리고 지금까지 숨막히는 죄의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담함과 자연스레이 오버랩된다. 관광객의 말을 다소 비약시켜 해석하자면 관광객으로 은유되는 외부인의 눈에는 혹여 광주민중항쟁이 일종의 역사적 스펙타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스펙타클은 그 규모가 크면 클수록 볼만하다고 생각하는 법, 그래서 만약 외부인들에게 광주가 이제는 하나의 스팩타클로 자리잡았다면 그들이 도대체 광주항쟁에서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하는 근원적인 회의를 갖게 된다. 어쨌든 광주민중항쟁은 여전히 곡해와 편견의 자리 안에 가로놓여 있다는 것이 작가의 생각인 셈이다.
그의 「봄날」은 결국 광주에 대한 지속적인 곡해와 편견을 바로 잡고자 하는 열망과 동시에 광주에 대한 부채를 일부분이나 갚아 나가는 제의성격의 결합으로 생산된 것이다. 이 작품이 보고문학에 근사하게 된 까닭도, 광주민중항쟁의 사실을 '정확히' 증언, 재현하고자 하는 견결한 의지도 모두 거기에 근원을 둔다 하겠다.
증언과 정확한 기록에의 강렬한 집착은 재현이라기보다는 재연에 가깝게 만들고 그 재연은 한편으로 일종의 염결성이 전환된 형태이다. 그가 이 작품에서 문학적 상상력을 상당부분 유보하게 되는 이유도 결국 광주의 진실과 깊이를 '사실 그대로' 재현해야 한다는 강한 염결성 때문이라는 말이다. 그 염결성의 순도는, 가령 소설에서 도청함락 시간이 묘사의 편의상 실제의 도청 함락 과정의 시간과 다소 달라지자 그것을 각주 처리하여 그 실제 시간을 정확히 밝혀 놓은 대목에 이르면 실로 극대화된다. 물론 이 작품이 자칫 건조해지기 쉬운 증언과 기록적 글쓰기만으로 축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집필 와중에 몇 번이나 울음을 컥컥 삼켜야 했다는 작가의 심정이 충분히 공감되고도 남게 인물과 사건의 그물 속에 서정적·서사적 효과는 간단없이 방출된다. 특히 도청 함락 직전 결단과 인간적 고뇌가 교차하는 시민군들의 행동과 내면에 대한 묘사는 어떤 소설보다 더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바이다.
광주민중항쟁은 광주시민 대 군사파시즘 및 미국의 제3세계 고강도정책 사이의 모순과 길항의 폭발이다. 물론 광주시민이라는 집합에 재야 및 학생을 포함하는 지식인과 기층민중의 구분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항쟁 이후 '5월 광주'에 대한 변혁론적 관점에서의 해석이 이 양자 사이의 계급론적 구분에 기반하고 있었다는 점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그런 차이에 대한 해석 이전에 먼저 파악되어야 할 문제는 광주항쟁 열흘간의 구체적 면모이다. 이 면모의 구축을 위해 작가는 그간 나왔던 각종 증언과 자신의 체험을 순차적 시간 배열로 사건화한다. 그리고 그 사건의 성격에 가장 적절한 인물들을 사건의 전달자로 배치한다. 이 인물은 허구성이 가미된 인물과 실제 인물의 병존으로 혼재되어 있는데 허구적 인물의 경우 한편으로는 광주민중항쟁을 바라보는 작가의 통시론적인 관점이 반영되기도 한다. 그에 비해 실제 인물에 대한 묘사는 통상 소설 전개의 필수적 요건이라 하는 성격의 발전 측면이 부재한 형편인데 이는 사실에 대한 충실한 재현이라는 원칙이 허구의 개입을 최대한 대로 막고 있기 때문일 터이다. 다중 시점 형식이 이미 광주 문제에 대한 입체적인 묘사의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입체성은 몇몇 개성으로 유형화되는 인물의 묘사를 통해 공고화된다. 이 입체성이 빛나는 것은 광주항쟁에 관련된 어떤 사람이건, 요컨대 온건파든 강경파든, 어떤 계급, 계층이든 흑은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어떤 생각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건 그 나름대의 진실을 가지고 있다는 작가의 균형 잡힌 사고로 인해서이다. "작은 불꽃들 하나" 하나의 존재가 "수백 수천 수만의 불기둥이 되고 마침내 거대한 불의 강"이라는 놀라운 공동체를 이룬다는 생각도 작은 불꽃 하나의 의미 조가 소홀히 취급되어서는 수만의 불기둥은 있을 수 없다는 예의 균형잡힌 사유의 발로이다. 그런 사유가 가능하기에 재야 및 학생을 포함하는 지식인, 온건파, 강경파, 성직자, 기층민중 등의 서로 다른 체험과 관점 등이 서로 차이짐에도 그 모든 것을 해방 공동체의 소중한 골격들로 평가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도 그랬지만 소설에서도 윤상현은 그 유형 중 가장 도드라지는 인물이다.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하다 계엄군의 총에 맞아 죽는 드라마틱한 측면에서부터 지식인의 성격과 노동자계급의 정서 등이 두루 통합되어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윤상현을 주목하는 까닭은 그의 영웅적 면모가 주는 매혹 때문이 아니다. 그의 관점과 행동이 바로 광주의 본질과 진실의 복합적인 측면을 아주 적절하게, 동시에 절절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윤상현에 관련된 다음과 같은 묘사들은 무참한 비극성과 해방공동체의 환희라는 광주항쟁의 양 극단적인 측면과 그것이 혼성되어 완성되는 광주항쟁의 중층적 면모를 곡진하게 보여준다.
1) 난 민중의 혼을, 폭발력을 믿고 싶네. 아니, 확실히 믿네, 자네도 지난 며칠 동안의 그 놀라운 싸움을 보지 않았나?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일이 우리들 속에서 일어난 거야. 그것만으로 우린 이미 절반쯤 승리한 것인지도 몰라.(「봄날」 5권, 139면.)
2) 저희들에겐 아직도 찾아야 할 그 무엇인가가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 며칠 동안 저희들은 참으로 많은 죽음들과 고귀한 희생들을 보아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껏 저희들이 살아온 모든 시간들을 다 합쳐도 얻지 못할 소중한 교훈들을, 그 이름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저희는 배웠습니다. 죽음보다 더 소중한 그 어떤 것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 저희들이 여기 남을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래서 인지도 모릅니다. 이 자리를 텅 비어들 채로, 그냥 아무런 흔적조차 없이 저희들은 이곳을 고스란히 내줄 수는 없습니다. 그것만이 저 수많은 고귀한 희생들을 헛되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어른신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이 싸움을 마무리할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어느 누군가가 지금 이 자리를 지켜야 한다면… 그렇다면 기꺼이 저희들이 남겠습니다. 다만 그것뿐입니다. (「봄날」 5권, 363∼364면.)
3) 결국 이렇게 끝나고 마는 것인가. 그 어디서고 끝내 구원의 손길 하나 내밀어 주지 않은 채로, 이렇게 우리들은 죽어가야 한다는 말인가. 이 도시만 끝내 버림받고 마는 것인가.… 서울이여! 부산, 대전, 인천, 대구여! 당신들이 달려와 주기를 우리는 기다렸다… 맨주먹만으로 수백 수천의 총구를 향해 미친 듯 달려나가면서도, 참혹하게 죽어간 자식의 시신을 껴안고 가슴이 찢어지도록 몸부림치고 통곡하면서도, 그래도, 그래도 그 기다림이 있었기에 우리는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다… 아아, 지금 당신들은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가. 왜 이 도시를 잊어버렸는가. 우리는 이렇게 죽어가고 있는데, 지금 당신들의 잠자리는 평안한가. 당신들이 꾸는 꿈은 아름다운가. 그대들과 우리들은 이 순간 얼마나 아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인가.(「봄날」 5권, 398∼399면.)
4) 윤상현은 말없이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먹물 같은 어둠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을 뿐 광장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윤상현은 저 열흘 동안의 뜨거운 싸움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한덩어리로 격렬하게 끓어넘치며 밀물처럼 저 광장으로 쏟아져 나오던 수만 수십만의 사람들을. 그들의 노도와 같은 함성을, 저마다 가슴 속에 간직한, 한겨울 보리싹마냥 작고도 지순한 인간애의 불꽃, 자유와 정의와 생명을 향한 그리움의 불꽃들을. 그리고 그 작은 불꽃들 한나가 모여 수백 수천 수만의 불기둥이 되고, 마침내 거대한 불의 강을 이루며 뜨겁게 굽이쳐 흘러가는, 그 찬란한 인간의 신화를. 그리움과 희망의 신화를… .(「봄날」 5권, 401면.)
민중의 혼 운운하는 1)에서부터 나머지 인용문 전체를 앞 뒤 맥락 없이 잘라서 보면 이른바 민중성에 대한 교과서적이고 도식적인 설명의 반복으로 읽힐 수도 있고 또 윤상원의 주관적 열망이 반영된 것으로 비칠 법도 하다. 그러나 「봄날」 전체에 한땀 한땀 꾹꾹 박혀 있는 '5월 광주'의 유례없는 야만성과 그에 극한적으로 비교되는 광주민중의 놀라운 인간애의 흐름을 곰곰이 되새겨보면 그것이 도식성의 반영이기는 커녕 얼마나 핍진한 현실의 반영인가를 알게된다. 그 반영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광주 민중항쟁에 깃들어 있는 가치와 의미의 보편성에 다달을 수 없는 것이다.
윤상현의 독백과, 인용문 4)와 같은 그에 대한 묘사 등은 결국 광주민중항쟁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한편으로는 짧은 기간 동안이지만 광주시민들이 자신의 희생과 헌신을 뭇사람들에게 열어 젖혀 보여 주었던 해방 공동체의 역사적 실현이 그것이다. 그것은 인간에의 가없는 신뢰와 기쁨이다. 다른 하나는 인용문 3)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형제와 이웃이 죽어가는 데도 누구하나 그들의 팔을 잡아 주지 않던 비극의 절정이 그것이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맹렬한 절망이다. 광주는 이렇듯 상반되는 두 기둥이 그래도 서로를 의지하며 서 있던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어쨌든 싸움은 끝난다. 도청을 사수하던 사람들은 사살당하거나 체포당하고 수많은 광주사람들은 그날 새벽 깊은 자괴감에 몸을 떨었다. 하지만 도청을 사수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수하고자 했던 것이 도청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싸움은 일단 패배할 것이고 도청은 함락될 것이라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도청을 사수하고자 했던 까닭은 그 도청의 사수가 결국에는 '5월 광주'의 사수로 승화될 것이라는 점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알았다기보다 그렇게 간곡한 기대를 했다고 보는 것이 더 온당할 터이다. 자신들은 비록 죽어가지만 그 죽음이 만약 하나의 가치를 지닐 수 있다면 훗날이나마 '5월 광주'의 귀한 가치가 전해지고 사람들이 그것을 소중히 받아들여 주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들의 기대와 희망이 옳았다는 것은 이제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봄날」은 바로 그 기대와 희망을 저버릴 수 없는 작가가 스스로 진혼의 만신이 되어 풀어낸 우리시대의 비극적 역설이다. 비극이 가장 찬란한 희망으로 자태를 바꾼다는 점에서.
'5월 광주'의 서사화가 가야 할 길은 아직 멀다. 「봄날」은 작가 스스로 '광주 문학'의 노둣돌이기를 바란다. 「봄날」 이후의 광주관련 소설은 이제 두 가지 과제를 감당해야 한다. 「봄날」이 광주 '안'의 총체적 구현이라면 그 이후 작품은 광주 안을 밖과 만나게 해서, 정히 안감의 총체적 지평에 도달해야 하는 과제를 안는다는 뜻에서 그렇다. 동시에 점점 희미해져 가고 도적질당하고 있는 광주민중항쟁의 엄중한 함의를, 말의 참된 뜻을 통해 언제나 당대화시켜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떠안게 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런 일은 「봄날」보다 더욱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봄날」에 무슨 의미가 남겠는가? 임철우가 만들어 논 노둣돌을 밟고서 더 높고, 더 구체적이고 더 복잡한 총체성의 광활한 지평에 올라서는 일이 가능할 때 비로소 '5월 광주'의 서사는 제 모습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광주는 오래 지속될 미래의 단절되지 않는 꿈으로 계속 남을 수 있을 것이다. 도청 함락 전야, 꺼칠한 시민군들이 마지막 담배를 나누면서 바라보았던 어두운 창공의 별빛은 바로 그런 꿈의 결정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