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기획특집 Ⅱ 광주항쟁과 시(문학포럼, 광주전남민속문화작가회의, 1998. 6)
본문
기획특집 Ⅱ
광주항쟁과 시
최 두 석/시인, 한신대교수
1
광주항쟁을 생각하면 새삼 역사의 흐름을 실감하게 된다. 바라는 일은 한없이 더디게 이루어지고 그날의 유혈과 절규는 너무도 쉽게 잊혀진다는 점에서 특히 역사의 냉엄한 흐름을 절감하게 된다. 광주항쟁 당시 시민들이 열망했던 다른 지역의 호응 혹은 봉기는 1987년 6월을 기다려야 했다. 하루하루 피를 말리며 "긴급구조" 혹은 "바람의 궐기"(임동확, [긴급송신])를 기다렸는데 배가 좌초되고 7년이 지나서야 구조대가 나타나다니! 그 후 간난신고 우여곡절 끝에 1997년에는 5·18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고 망월동에 새로 묘역이 조성되었다. 숙원사업이었으되 자칫 허울 좋은 일이기 쉬운 '기념일 지정'과 '묘역 정비'가 이루어지고 이제 겨우 한 해가 지났는데 광주항쟁은 먼 과거의 일로 급속히 잊혀져가고 있다.
망월동 5·18 묘역의 벽면에는 광주항쟁과 함께 동학농민전쟁 3·1운동 4월혁명의 부조가 함께 새겨져 있다.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지극히 뜻깊은 일의 반열에 광주항쟁을 올려놓고자 하는 시민들의 염원이 부조된 셈이다. 그렇듯이 광주항쟁은 역사의 한 장이 되었고 반면에 이제 많은 사람들은 잊어도 좋은 일로 치부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의의는 잊지 말고 뜻을 되새기자는 데 있다. 사람들이 잊지 않고 제대로 뜻을 샛길 때 살아 있는 역사가 된다. 이러한 사실은 이 글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광주항쟁이 이후의 시와 시사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으며 광주항쟁을 화두로 삼아 어떠한 시적 경향과 성취를 보였는가를 살피는 것이 이 글의 과제인데 그 일은 문학사적 시야를 통해 항쟁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진행될 것이다.
그동안 광주항쟁 관련 시편들은 두 권의 시선집, {누가 그대 큰 이름 지우랴}(인동, 1987)와 {하늘이여 땅이여, 아아 광주여}(황토, 1990)에 대체로 모여 있다. 한편, 두 권의 시선집에 일부 수록되어 있긴 하지만, 박몽구의 {십자가의 꿈}과 임동확의 {매장시편}은 광주항쟁을 집중적으로 다룬 연작시라는 점에서 김희수의 『오늘은 꽃잎으로 누울지라도』는 광주항쟁을 다룬 서사시라는 점에서 따로 주목할 만한 시집이다. 하지만 이 글은 광주항쟁 시편들에 대한 미시적 검토나 학술적 정리라기보다는 시를 매개로 광주항쟁의 의미를 음미하고 광주항쟁이 우리 현대시사에 미친 파장을 살피는 데 초점을 모으려 한다. 이 글의 논제를 '광주항쟁과 시'라고 다소 개방적으로 잡은 것도 그 둘 사이의 변증법적 관련을 거시적으로 살피려는 의도 때문이다.
2
1980년 5월의 광주 학살은 기습처럼 급격히 닥쳐왔고 그에 대한 항쟁은 열흘만에 진압되었다. 계엄군들의 잔혹한 학살과 광주 시민들의 꽃다운 헌신이 교차된 항쟁은 일단 좌절된 채 끝났다. 하지만 그때의 "폭탄처럼 망설임 없이 터져버리는 분노한 생명들"(이영진, 「단 한 줄의 시도 쓸 수가 없다」)의 영상과 그들의 싸움의 의미는 80년대 내내 세상을 제대로 살려는 자들의 마음속에서 계속해서 반추되었다. 때로는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으로 때로는 살아갈 길을 찾아가는 나침반으로 자기 시대를 진솔하게 살려는 자들의 가슴과 뇌리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아무래도 광주항쟁은 80년대 시대 정신의 원점 같은 것이었다. 그러한 사정은 사람의 마음을 표현하는 양식인 시의 경우 더욱 민감하고도 직접적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
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
우리들의 아들은
어디에서 죽어 어디에 파묻혔나
우리들의 귀여운 딸은
또 어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있나
우리들의 혼백은 또 어디에서
찢어져 산산이 조각나 버렸나
하느님도 새떼들도
떠나가버린 광주여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들만이
아침 저녁으로 살아남아
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러 했던
아아 통곡뿐인 남도의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김준태, 「아아 광주여 !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 부분
광주항쟁 시편들 가운데 절창으로 널리 알려진 시이다. 사태가 종료되고 닷새 후에 씌어진 이 시에는 항쟁의 열기와 숨가쁨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거니와 그러한 숨가쁜 호흡이 105행이나 되는 긴 시를 단숨에 읽게 한다. 항쟁이 긴박하게 진행된 열흘간 시민들은 누구나 마음으로 시를 썼겠고 그때에 느끼는 절박감과 절실함이 시심의 정수이겠으되 막상 시인이 시구를 원고화 할 여유는 없었다. 항쟁 당시 도청 앞 광장에서 낭송되었던 「민주의 나라」라는 시가 있기는 하나 그것은 예외적인 경우이고 대부분의 광주항쟁 시편들은 항쟁이 종결된 이후에 씌어졌다. 항쟁은 표면적으로 종결되었으되 그와 결부된 시편들이 왕성하고도 끈질기게 씌어진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시사하는 바 인용시는 그러한 시편들의 선두에 서 있다.
「아아 광주여 !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에서 집중적으로 모색하고 있는 것은 광주에서의 죽음의 의미이다. "정말 우리는 죽어버렸나"라고 자문하고 되물으며 시인이 본 것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넘어가는 예수의 이미지인데 그것은 죽음으로써 삶을 찾는 불사조의 이미지와 겹쳐서 나타난다. 즉 시인은 광주의 죽음에서 부활을 본 것이고 그러한 부활의 이미지에 근거를 두고 광주를 "영원한 청춘의 도시"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러한 부활의 이미지를 통해 시인이 깨달은 바는 광주항쟁은 패배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고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시를 비롯한 광주항쟁 시편들이 각별하게 시대적 의의를 획득한다. 항쟁의 패배와 좌절을 넘어서서 그 의미를 계승하고 되살려 나가는 일의 일익을 시인들이 떠맡게 된 것이다.
그곳은 어디인가
바라보면 산모퉁이
눈물처럼 진달래꽃 피어나던 곳은
우리가 매듭 굵은 손을 모아
여어이 여어이 부르면
어어이 어어이 눈물 섞인 구름으로
피맺힌 울음들이 되살아나는 그곳은
돌아보면 날 저물어 어둠이 깊어
홀로 누워 슬픔이 되는 그리운 땅에
오늘은 누가 정 깊은
저 뜨거운 목마름을 던지는지
아느냐 젊은 시인이여
눈 뜨고 훤히 보는 백일의
이 땅의 어디에도
가을바람 불면 가을바람 소리로
봄바람 일면 푸른 봄바람 소리로
강냉이 풋고추
눈 속의 겨울 애벌레와도 같은
죽지 않는 이 땅의 서러운 힘들이
저 숨죽인 그리움의 밀물 소리로
우리 쓰러진 가슴 위에 피어나고 있음을.
-곽재구, 「그리운 남쪽」 전문
광주항쟁을 창작의 원체험으로 삼고 1980년대 초·중반에 걸쳐 활동한 오월시 동인지에 발표된 시이다. 앞서 보았던 김준태의 시와는 달리 어조나 정서가 차분히 가라앉아 있다.
항쟁 당시의 분노나 격정 대신에 잔잔한 그리움이 주된 정조를 형성하고 있다. 그 점은 광주를 두고 앞의 시에서는 '통곡뿐인 남도'라 부르는데 비해 이 시에서는 '그리운 남쪽'이라 부르는 데서도 드러난다. 이러한 어조의 차이는 시가 씌어진 시기와 시인의 성향의 편차로부터 동시에 초래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유의할 사항은 "죽지 않는 이 땅의 서러운 힘들"에 대한 신뢰이다. 쓰러진 가슴 위에 피어나고 있는 이 땅의 서러운 힘이 항쟁의 패배를 디디고 일어서는 힘과 결부된다면 이 시 또한 일종의 부활의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즉 시인들은 각기 다른 목소리로 항쟁의 의미를 되살려 계승하고자 했던 것이다.
두루 알려져 있다시피 이러한 시들은 광주학살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세력들이 권세를 휘두르던 시기에 씌어졌다. 광주항쟁에 대한 최초의 기록물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5주기에 맞추어 간행되고 곧바로 압수된 사정을 감안하면 이 시기의 정황을 가늠할 수 있겠다. 현상적으로 광주항쟁은 열흘간의 투쟁으로 종결되었으되 80년대 내내 지속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한 지속성은 광주학살을 거쳐 정권을 장악한 세력과 대비되어 일종의 보이지 않는 전선을 형성한다. 항쟁의 의미를 되살려 계승하고자 하는 시인들이 설 자리는 당연히 군부 파쇼정권에 대한 저항의 편일 수밖에 없으며 그런 맥락에서 이 시기의 시쓰기가 강력하게 운동성을 획득한다. 또한 그런 맥락에서 광주항쟁은 80년대에 양심을 지키고 살아가려는 시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된다.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도시는 벌집처럼 쑤셔놓은 붉은 심장이었다
밤 12시
거리는 용암처럼 흐르는 피의 강이었다
밤 12시
바람은 살해된 처녀의 피묻은 머리카락을 날리고
밤 12시
밤은 총알처럼 튀어나온 아이의 눈동자를 파먹고
밤 12시
학살자들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시체의 산을 옮기고 있었다
아 얼마나 끔찍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조직적인 학살의 밤 12시였던가
-김남주, [학살 1] 부분
[학살 1]은 1987년 무렵 옥중에서 씌어져 유출된 시이다. 스스로 전사이기를 다짐하며 파쇼체제에 대한 대결의 전선에서 늘 선두에 서고자 하던 김남주 시인이 광주항쟁을 화두로 삼아 어떠한 성취를 보였나를 보여주는 듯한 시이다. 시간의 흐름이 정지된 듯한 순간인 밤 12시에 시인의 팽팽하게 긴장된 정신을 집중시켜 학살의 밤의 공포와 전율을 실감나게 되살려내고 있다. 반복되고 변주되는 시구에 연달아 출몰하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은 학살의 잔혹성을 유감없이 고발하고 있다. 이 시에서 볼 수 있듯 김남주의 옥중시에 나타난 강렬한 언어구사와 전투적 정서는 광주항쟁을 화두로 삼아 벼린 측면이 있고 역으로 광주항쟁은 그의 강렬한 언어와 정서가 실감을 얻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이 점을 확대하여 해석하면 광주항쟁은 1980년대에 광범위하게 번진 전투적 정서의 근원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광주항쟁이 80년대의 정신과 정서의 근원이 된 사실은 '오월'의 의미 변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오월시 동인이 결성되던 1981년 무렵만 해도 오월은 검열을 피해 은밀히 광주항쟁을 말하기 위한 암호처럼 쓰인 측면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점차 달의 의미를 넘어 광주항쟁을 의미하는 말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그러한 오월의 의미변화는 인용시 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가령, "바람에 울고 웃는 풀잎으로/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김남주,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와 같은 시구에는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음풍농월로 한가하게 오월을 노래할 수 없음을 언명하고 있는 바 광주항쟁과 무관하게 오월을 생각할 수 없다는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광주항쟁이 얼마나 80년대의 정신과 정서의 원천이 되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항쟁을 계기로 하여 의미 변화를 보인 시어로는 '오월' 이외에도 '광주' '금남로' '망월동' '무등산' 등을 거론할 수 있다. 가령 "엄동 같은 독재에도 얼지 않고/총알처럼 눈 퍼부어도/눈 쌓이지 않는/생수 솟는 김나는 샘/우리 사랑 광주"(김용택, 「우리 사랑 광주」)에서 광주는 그냥 지명으로서의 광주가 아니다. 민주를 갈망하는 정신의 성스러운 샘으로 의미가 부여되고 있는 바 광주항쟁이 80년대 시정신의 주요한 원천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의미부여는 광주항쟁의 정신을 수호하고 전파하려는 마음과 결부되어 있다. 다시 말해 광주항쟁은 80년대 많은 시인들의 가장 중요한 화두이고 광주항쟁을 화두로 삼은 시인들의 정진이 항쟁을 열흘간의 투쟁으로 끝나게 하지 않고 80년대 내내 지속되게 한 측면이 있다.
앞에 거론한 시들이 정규적인 문예지에 발표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일종의 유격적인 시쓰기와 시발표라는 당시의 문화풍토와 결부되기 때문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당시의 광주항쟁 관련 시들은 반파쇼 민주화 투쟁이라는 역사적 과제와 무관할 수 없었다. 사후 약방문 식이 아니고 당시의 역사적 과제와 밀착된 시쓰기라는 점이 시적 긴장을 유발하였고 그러한 시쓰기를 왕성하게 수행함으로써 사회의 진보에 기여하였던 것이다.
앞에서 역사의 냉엄한 흐름을 운위했지만 광주항쟁은 조속한 의미부여라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성공한 경우에 해당된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오랜 동안의 싸움이었던 동학농민전쟁의 경우 문학적으로 의미가 부여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던가와 비교할 때 특히 그러하다.]
3
광주항쟁에 대한 의미부여가 상대적으로 조속히 이루어진 것은 물론 수많은 사람들의 정성과 노력이 투입된 결과이지만 워낙 사안 자체가 당대의 역사적 과제와 맞물려 있다는 데도 이유가 있다. 민주주의를 표방한 나라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학살이 자행되고 그에 대해 민중들이 들고일어나 처절하게 저항했다는 사실로 인해 광주항쟁은 당대에 나날이 살아가는 의미를 묻고 민족사의 나아갈 길을 암시하는 뜨거운 상징이었다. 그리고 이 점은 많은 시인들이 광주항쟁을 화두로 삼게 된 이유로 작용하였다. 또한 역대 독재권력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던 반공 이데올로기 공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도 항쟁에 대한 조속한 의미부여에 일조했을 것이다. 그 점은 학살과 저항이라는 면에서 더욱 처절했던 제주항쟁의 경우와 비교할 때 선명히 드러난다.
광주항쟁에 대한 의미부여에 가장 커다란 장애로 작용한 것은 지역성 혹은 지역감정의 문제이다. 제주도 4·3항쟁의 경우 반공 이데올로기와 지역성 문제에 이중으로 갇혀 수십 년 동안 묻혀 있었고 그것은 아직도 족쇄로 작용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조속히 의미부여가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광주항쟁의 경우에도 지역성 문제는 아직도 극복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일종의 정신의 휴전선인 반공 이데올로기로 가르고 나서 다시 경상·전라의 지역감정으로 분할하는 것이 한국의 독재권력의 주요한 통치술이라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한 통치술이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먹혀들었다는 것은 한국 현대사의 뼈저리게 불행한 특수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수성이 우리의 현대시사에 반영되지 않을 수 없으니 전라도 출신 시인들이 1970∼80년대 저항시 혹은 민중시의 주류를 형성한 점이 그 증거이다.
무등산도 버리고 영산강도 버리고
버림받은 전라도 땅 위에
버림받은 우리네 설움만 두고
장성 갈재 후딱 넘어
그대 밤봇짐 싸버린 새벽만 남았어요.
살강에 먹다 남은 보리밥만 남았어요.
불타는 요내 가슴만 두고
활활 타오르는 진달래만 두고
나슬나슬 뽕잎 피는 아름다운 4월
장광에 고이는
눈부신 햇살만 두고
그대 서울로 가신 님아
살미친 푸름 속에 지글지글 타는 육신만 남았어요
빼앗긴 입술, 버림받은 빈 손가락만 남았어요.
논바닥도 타오르고 강바닥도 타오르고
우리네 가슴, 우리네 눈물도 타오르고
한많은 전라도가 몽땅 타고 있어요.
흉작의 들판이 타고
황톳빛 전라도가 몽땅 타고 있어요.
-문병란, 「나를 버리고 가신 님」 부분
1970년대 중반에 산출된 이 시에 집중적으로 표현된 것은 '버림받은 전라도' 혹은 '한많은 전라도' 의식이다. 버림받은 농촌 아낙의 목소리를 빌려 토로된 이 '한많은 전라도' 의식은 당시 전라도 사람들의 정서 일반을 대변하교 있다. 어느 지역 민중이나 고통받기는 마찬가지였겠으나 동학농민전쟁 이래 연면한 민중 정서에 특히 박정희 정권의 차별정책이 '한많은 전라도' 의식을 예각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라도 민중의 정서가 시인들의 시심 속에서 저항의식으로 단련되었으니 우연치 않게 전라도 출신 시인들이 1970년대 저항시 혹은 민중시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방금 거론한 문병란을 포함하여 고은·이성부·조태일·김지하·김준태·양성우·이시영 등의 활동을 감안하면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70년대 민중시의 성과가 전라도 출신 시인들의 정진에 의해 거두어진 측면이 많다는 것은 이 지역 민중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상대적으로 더욱 고양되어 있었다는 점과 상응한다. 그런데 1980년 5월 전두환을 정점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은 광주를 택해 민주화 열망을 짓밟고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작전을 수행한다. 신군부 세력의 주축인 경상도 출신이라는 사실은 박정희 정권의 차별정책이 초래한 기형적 현상이다. 광주가 특별히 작전의 대상이 된 것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강한 지역이라는 점 외에도 신군부 세력의 출신지가 아니라는 사실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이런 연유로 광주항쟁이 불가피하게 지역장정 혹은 지역성의 굴레를 쓰게 되었으니 그러한 굴레를 벗겨내는 작업 또한 시인들의 과제가 되었다.
봄의 탄성을 위해 싹틔운 너는
나에게 개화하는 일을 물려주었다
아는 사람은 안다
이 세상 떠도는 마음들이
한 마리 나비되어 앉을 곳 찾는데
인적만 남은 텅빈 한길에서 내가
왜 부르르 부르르 낙화하여 몸떨었는가
남도에서 꽃샘바람에 흔들리던 잎새를
보이지 않는 신음소리가 날 패마다
피같이 새붉은 꽃송이간 벙글어
우리는 인간의 크고 곧은 목소리를 들었다
갖가지 꽃들 함께 꽃가루 나눠 살려고
향기 내어 나비떼 부르기도 했지만
너와 나는 씨앗을 맺지 못했다
이 봄을 아는 사람은 이 암유도 안다
여름의 이 눈부신 녹음을 위해
우리는 못다 핀 꽃술로 남아 있다
-하종오, 「사월에서 오월로」 전문
인용시가 산출된 1983년 무렵만 해도 광주항쟁은 아직 암유를 통해 말해지던 시절이었다.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한 선결사항은 사월이 4월혁명을, 오월이 광주항쟁을 암유한다는 점을 아는 것이다. 나아가 사월이 '너'로, 오월이 '나'로 의인화된 점을 아는 것이다. 그랬을 때 "봄의 번성을 위해 싹틔운 너는/나에게 개화하는 일을 물려주었다"와 같은 시구의 의미를 해독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크고 곧은 목소리를 들었다"나 "우리는 못다 핀 꽃술로 남아 있다"와 같은 시구에서는 너와 나를 우리라 칭하고 있는데 사월혁명과 광주항쟁을 연결시킨 점이 주목된다. 전체적으로 비유가 비유를 낳으며 생생하게 시상이 전개되고 있는 바 사월혁명의 뜻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이 광주항쟁이라는 의미부여가 이루어지고 있다.
참다운 민주 세상을 이룩하기 위하여 피를 흘렸다는 점에서 사월혁명과 광주항쟁은 강력하게 친연성을 지닌다. 그리고 그 천연성을 형상으로 창조한 시가 「사월에서 오월로」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광주항쟁에 대해 지역감정의 굴레를 씌우는 것은 민주화를 가로막는 세력의 간특한 지혜라 하겠고 이 시는 그러한 간지를 타파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광주항쟁과 관련한 관련한 시쓰기에 전라도 출신 시인들이 대거 참여한 것은 인지상정의 발로로서 자연스러운 현상일 듯하다. 모름지기 시쓰기란 체험이나 심리적 거리와 무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용시의 시인 하종오의 출신지는 경상도이다. 참다운 민주 세상에 대한 염원이 광주항쟁을 화두로 삼아 지역감정을 타파하는 경우도 적지 않으니 인용시는 그러한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지도를 펴보자
광주는 어디에서 계속되고 있는가
광주를 헤쳐보자
오월은 어디에서 계속되고 있는가
광주는 이제 한반도 동서남북 어디에나 있다
파쇼의 패악성과 제국주의 독소를
집중투하한 노동자, 농민의 삶과
영웅적인 투쟁의 대열이 있는 곳
오월은 그곳에 살아 있다
노동자 동지들
오월을 더 이상
광주에 못박지 말아다오
우리의 자랑스런 투사들을
더이상 망월동에 묻어두지 말아다오
더이상 상처로만 치유하려거나
지난 역사에 맡기지 말아다오
오월은 노동자, 농민의
영웅적 투쟁의 대열에
살아있다
계속되고 있다
-백무산, 「오월은 어디에 있는가」 부분
1980년대 후반에 들어 고양된 노동운동의 열거가 스며들어 있는 시이다. 선동적인 어조로 '노동자 동지들'을 부르며 '오월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 설파하고 있다. 광주항쟁의 의미는 "노동자, 농민의/영웅적 투쟁의 대열에/살아있다"는 것인데 80년대의 대표적 노동자 시인다운 의미부여인 셈이다. "광주는 이제 한반도 동서남북 어디에나 있다"에서처럼 지역감정의 질곡을 훌훌 털어내고 있고 "더이상 상처로만 치유하려거나/지난 역사에 맡기지 말아다오"에서처럼 현재 진행되는 싸움 속에서 그 의미를 찾고 있다. 요는 광주항쟁의 소중한 뜻이 지역적 편견에 같질 수 없고 노동자와 농민의 투쟁에서 관철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일단 올바른 판단이라 하겠다. 다만 선언적 성격이 너무 강하다는 점이 문제로서 그것은 어느 정도 시의 약점으로 작용한다.
광주항쟁이 80년대의 각 부문운동에 강할 영향을 미쳤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그 점은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민중의 자발적 참여가 광주항쟁을 가능하게 했다는 역사적 경험은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키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도덕성의 확보와 운동에의 헌신이라는 점에서도 광주항쟁은 주요한 정신적 거점이 되었다. 자신들이 맞닥뜨려 싸우는 상대가 광주학살을 자행한 세력과 다르지 않다는 인식이 도덕적 긍지로 작용하였고 항쟁 당시에 보였던 사람들의 헌신성은 본받아야 할 전례로 작용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1980년대의 노동시와 농민시 분야의 성곽도 광주항쟁의 정신을 창조적으로 계승하고자 하는 노력과 무관할 수 없다 하겠다. 특히 노동시 분야의 두드러진 성과는 80년대의 노동운동을 선도한 측면이 있다.
시가 일인칭 양식이요 개인의 내면세계 표현에 적절한 양식이라 하지만 개인이 사회와 무관하게 살 수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무릇 광주항쟁은 직접 체험자에게는 말할 나위 없고 당시에 이 땅에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던 사회적 역사적 사건이다.
80년대 시에서 사회역사적 상상력이 넓고 깊게 작용한 것은 일단 광주항쟁이 끼친 영향으로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그 점은 광주항쟁을 직접 소재로 다루지 않은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앞에서 언급한 노동시와 농민시 뿐만 아니라 민족문제·통일문제·교육문제 등과 관련된 시적 성과가 괄목할 만하게 축적된 시기가 1980년대이다. 70년대에는 다소 막연하게 민중시라 했던 것이 80년대에는 각각의 영역에서 부딪치는 현안문제에 파고들어 성과를 거두었으니 그 계기로 작용한 것이 광주항쟁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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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에 들어선 이후 광주항쟁은 시적 화두로서의 자력을 많이 상실하였다. 광주학살의 주범들이 권좌에서 물러나게 됨으로써 전선이 흐려지고 심리적으로 거리가 생길 만큼 세월도 흘렀다.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세계 정세도 바뀌고 특히 최근에는 구제금융 상황이 닥침으로써 이러한 상황에서의 삶의 문제에 대한 대응이 시의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우리 현대시의 자랑스러운 전통 가운데 하나는 각 시대의 정신을 구현하면서 민족사의 전개에 기여해왔다는 점이다. 그런 맥락에서 시인들이 오늘날의 현안 문제에 몰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요 그러한 차원에서 창조성을 발휘하는 것이 문학사적 요청이다. 따라서 시대가 바뀐 것을 기회로 시인들이 개인의 밀실에 갇히거나 사사로움에 함몰되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우리의 시가 민족어의 사수라는 기본적인 사명을 띠고 형성되면서부터 민족사의 전개에 일익을 담당해 온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한 우리의 시가 자기 시대의 현안 문제에 창조적으로 대응한 정도는 시기별로 차이가 있다. 가령 분단을 고착화시킨 육이오 전쟁 직후 우리의 시는 사회적 대응이라는 면에서 역동성이 많이 위축되었고 그 점은 시적 성과의 부진함으로 연결되었다. 반면 광주항쟁 이후의 우리의 시는 자기 시대의 문제에 대해 괄목할 만한 대응을 보였고 그에 상응하는 시적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적 사회적 문제를 외면하고 개인의 사적인 문제에 몰두하는 오늘날의 많은 시인들에게 좋은 참고거리가 될 것이다. 개인과 사회 사이의 긴장을 생생하게 견디는 것은 창조적 시인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 자세이다.
방금 전에 시적 화두로서의 자력이 많이 떨어졌다고 했지만 광주항쟁을 화두로 창조성을 발휘할 여지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지역감정을 불식시키고 참된 민주사회를 이룩하는 것은 여전히 절실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변화된 현실 속에서 광주항쟁을 보고 광주항쟁을 통해 변화된 현실을 보는 것이다. 진상이 규명되지 못한 부분이 아직 남아있지만 그것은 그늘로 거느린 채 이제야 광주항쟁은 전사와 후사의 산맥 속에서 우뚝한 봉우리로 전모를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989년에 나온 김희수의 『오늘은 꽃잎으로 누울지라도』는 광주항쟁에 대한 본격적 서사시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업이로되 후사와의 연결이 빈약하기에 항쟁의 전모 또한 제대로 형상화되어 있지 않다. 이제 바야흐로 광주항쟁의 전모를 드러내는 서사시가 씌어질 시기가 아닌가 한다.
광주항쟁과 시
최 두 석/시인, 한신대교수
1
광주항쟁을 생각하면 새삼 역사의 흐름을 실감하게 된다. 바라는 일은 한없이 더디게 이루어지고 그날의 유혈과 절규는 너무도 쉽게 잊혀진다는 점에서 특히 역사의 냉엄한 흐름을 절감하게 된다. 광주항쟁 당시 시민들이 열망했던 다른 지역의 호응 혹은 봉기는 1987년 6월을 기다려야 했다. 하루하루 피를 말리며 "긴급구조" 혹은 "바람의 궐기"(임동확, [긴급송신])를 기다렸는데 배가 좌초되고 7년이 지나서야 구조대가 나타나다니! 그 후 간난신고 우여곡절 끝에 1997년에는 5·18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고 망월동에 새로 묘역이 조성되었다. 숙원사업이었으되 자칫 허울 좋은 일이기 쉬운 '기념일 지정'과 '묘역 정비'가 이루어지고 이제 겨우 한 해가 지났는데 광주항쟁은 먼 과거의 일로 급속히 잊혀져가고 있다.
망월동 5·18 묘역의 벽면에는 광주항쟁과 함께 동학농민전쟁 3·1운동 4월혁명의 부조가 함께 새겨져 있다.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지극히 뜻깊은 일의 반열에 광주항쟁을 올려놓고자 하는 시민들의 염원이 부조된 셈이다. 그렇듯이 광주항쟁은 역사의 한 장이 되었고 반면에 이제 많은 사람들은 잊어도 좋은 일로 치부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의의는 잊지 말고 뜻을 되새기자는 데 있다. 사람들이 잊지 않고 제대로 뜻을 샛길 때 살아 있는 역사가 된다. 이러한 사실은 이 글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광주항쟁이 이후의 시와 시사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으며 광주항쟁을 화두로 삼아 어떠한 시적 경향과 성취를 보였는가를 살피는 것이 이 글의 과제인데 그 일은 문학사적 시야를 통해 항쟁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진행될 것이다.
그동안 광주항쟁 관련 시편들은 두 권의 시선집, {누가 그대 큰 이름 지우랴}(인동, 1987)와 {하늘이여 땅이여, 아아 광주여}(황토, 1990)에 대체로 모여 있다. 한편, 두 권의 시선집에 일부 수록되어 있긴 하지만, 박몽구의 {십자가의 꿈}과 임동확의 {매장시편}은 광주항쟁을 집중적으로 다룬 연작시라는 점에서 김희수의 『오늘은 꽃잎으로 누울지라도』는 광주항쟁을 다룬 서사시라는 점에서 따로 주목할 만한 시집이다. 하지만 이 글은 광주항쟁 시편들에 대한 미시적 검토나 학술적 정리라기보다는 시를 매개로 광주항쟁의 의미를 음미하고 광주항쟁이 우리 현대시사에 미친 파장을 살피는 데 초점을 모으려 한다. 이 글의 논제를 '광주항쟁과 시'라고 다소 개방적으로 잡은 것도 그 둘 사이의 변증법적 관련을 거시적으로 살피려는 의도 때문이다.
2
1980년 5월의 광주 학살은 기습처럼 급격히 닥쳐왔고 그에 대한 항쟁은 열흘만에 진압되었다. 계엄군들의 잔혹한 학살과 광주 시민들의 꽃다운 헌신이 교차된 항쟁은 일단 좌절된 채 끝났다. 하지만 그때의 "폭탄처럼 망설임 없이 터져버리는 분노한 생명들"(이영진, 「단 한 줄의 시도 쓸 수가 없다」)의 영상과 그들의 싸움의 의미는 80년대 내내 세상을 제대로 살려는 자들의 마음속에서 계속해서 반추되었다. 때로는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으로 때로는 살아갈 길을 찾아가는 나침반으로 자기 시대를 진솔하게 살려는 자들의 가슴과 뇌리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아무래도 광주항쟁은 80년대 시대 정신의 원점 같은 것이었다. 그러한 사정은 사람의 마음을 표현하는 양식인 시의 경우 더욱 민감하고도 직접적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
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
우리들의 아들은
어디에서 죽어 어디에 파묻혔나
우리들의 귀여운 딸은
또 어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있나
우리들의 혼백은 또 어디에서
찢어져 산산이 조각나 버렸나
하느님도 새떼들도
떠나가버린 광주여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들만이
아침 저녁으로 살아남아
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러 했던
아아 통곡뿐인 남도의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김준태, 「아아 광주여 !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 부분
광주항쟁 시편들 가운데 절창으로 널리 알려진 시이다. 사태가 종료되고 닷새 후에 씌어진 이 시에는 항쟁의 열기와 숨가쁨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거니와 그러한 숨가쁜 호흡이 105행이나 되는 긴 시를 단숨에 읽게 한다. 항쟁이 긴박하게 진행된 열흘간 시민들은 누구나 마음으로 시를 썼겠고 그때에 느끼는 절박감과 절실함이 시심의 정수이겠으되 막상 시인이 시구를 원고화 할 여유는 없었다. 항쟁 당시 도청 앞 광장에서 낭송되었던 「민주의 나라」라는 시가 있기는 하나 그것은 예외적인 경우이고 대부분의 광주항쟁 시편들은 항쟁이 종결된 이후에 씌어졌다. 항쟁은 표면적으로 종결되었으되 그와 결부된 시편들이 왕성하고도 끈질기게 씌어진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시사하는 바 인용시는 그러한 시편들의 선두에 서 있다.
「아아 광주여 !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에서 집중적으로 모색하고 있는 것은 광주에서의 죽음의 의미이다. "정말 우리는 죽어버렸나"라고 자문하고 되물으며 시인이 본 것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넘어가는 예수의 이미지인데 그것은 죽음으로써 삶을 찾는 불사조의 이미지와 겹쳐서 나타난다. 즉 시인은 광주의 죽음에서 부활을 본 것이고 그러한 부활의 이미지에 근거를 두고 광주를 "영원한 청춘의 도시"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러한 부활의 이미지를 통해 시인이 깨달은 바는 광주항쟁은 패배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고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시를 비롯한 광주항쟁 시편들이 각별하게 시대적 의의를 획득한다. 항쟁의 패배와 좌절을 넘어서서 그 의미를 계승하고 되살려 나가는 일의 일익을 시인들이 떠맡게 된 것이다.
그곳은 어디인가
바라보면 산모퉁이
눈물처럼 진달래꽃 피어나던 곳은
우리가 매듭 굵은 손을 모아
여어이 여어이 부르면
어어이 어어이 눈물 섞인 구름으로
피맺힌 울음들이 되살아나는 그곳은
돌아보면 날 저물어 어둠이 깊어
홀로 누워 슬픔이 되는 그리운 땅에
오늘은 누가 정 깊은
저 뜨거운 목마름을 던지는지
아느냐 젊은 시인이여
눈 뜨고 훤히 보는 백일의
이 땅의 어디에도
가을바람 불면 가을바람 소리로
봄바람 일면 푸른 봄바람 소리로
강냉이 풋고추
눈 속의 겨울 애벌레와도 같은
죽지 않는 이 땅의 서러운 힘들이
저 숨죽인 그리움의 밀물 소리로
우리 쓰러진 가슴 위에 피어나고 있음을.
-곽재구, 「그리운 남쪽」 전문
광주항쟁을 창작의 원체험으로 삼고 1980년대 초·중반에 걸쳐 활동한 오월시 동인지에 발표된 시이다. 앞서 보았던 김준태의 시와는 달리 어조나 정서가 차분히 가라앉아 있다.
항쟁 당시의 분노나 격정 대신에 잔잔한 그리움이 주된 정조를 형성하고 있다. 그 점은 광주를 두고 앞의 시에서는 '통곡뿐인 남도'라 부르는데 비해 이 시에서는 '그리운 남쪽'이라 부르는 데서도 드러난다. 이러한 어조의 차이는 시가 씌어진 시기와 시인의 성향의 편차로부터 동시에 초래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유의할 사항은 "죽지 않는 이 땅의 서러운 힘들"에 대한 신뢰이다. 쓰러진 가슴 위에 피어나고 있는 이 땅의 서러운 힘이 항쟁의 패배를 디디고 일어서는 힘과 결부된다면 이 시 또한 일종의 부활의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즉 시인들은 각기 다른 목소리로 항쟁의 의미를 되살려 계승하고자 했던 것이다.
두루 알려져 있다시피 이러한 시들은 광주학살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세력들이 권세를 휘두르던 시기에 씌어졌다. 광주항쟁에 대한 최초의 기록물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5주기에 맞추어 간행되고 곧바로 압수된 사정을 감안하면 이 시기의 정황을 가늠할 수 있겠다. 현상적으로 광주항쟁은 열흘간의 투쟁으로 종결되었으되 80년대 내내 지속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한 지속성은 광주학살을 거쳐 정권을 장악한 세력과 대비되어 일종의 보이지 않는 전선을 형성한다. 항쟁의 의미를 되살려 계승하고자 하는 시인들이 설 자리는 당연히 군부 파쇼정권에 대한 저항의 편일 수밖에 없으며 그런 맥락에서 이 시기의 시쓰기가 강력하게 운동성을 획득한다. 또한 그런 맥락에서 광주항쟁은 80년대에 양심을 지키고 살아가려는 시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된다.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도시는 벌집처럼 쑤셔놓은 붉은 심장이었다
밤 12시
거리는 용암처럼 흐르는 피의 강이었다
밤 12시
바람은 살해된 처녀의 피묻은 머리카락을 날리고
밤 12시
밤은 총알처럼 튀어나온 아이의 눈동자를 파먹고
밤 12시
학살자들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시체의 산을 옮기고 있었다
아 얼마나 끔찍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조직적인 학살의 밤 12시였던가
-김남주, [학살 1] 부분
[학살 1]은 1987년 무렵 옥중에서 씌어져 유출된 시이다. 스스로 전사이기를 다짐하며 파쇼체제에 대한 대결의 전선에서 늘 선두에 서고자 하던 김남주 시인이 광주항쟁을 화두로 삼아 어떠한 성취를 보였나를 보여주는 듯한 시이다. 시간의 흐름이 정지된 듯한 순간인 밤 12시에 시인의 팽팽하게 긴장된 정신을 집중시켜 학살의 밤의 공포와 전율을 실감나게 되살려내고 있다. 반복되고 변주되는 시구에 연달아 출몰하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은 학살의 잔혹성을 유감없이 고발하고 있다. 이 시에서 볼 수 있듯 김남주의 옥중시에 나타난 강렬한 언어구사와 전투적 정서는 광주항쟁을 화두로 삼아 벼린 측면이 있고 역으로 광주항쟁은 그의 강렬한 언어와 정서가 실감을 얻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이 점을 확대하여 해석하면 광주항쟁은 1980년대에 광범위하게 번진 전투적 정서의 근원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광주항쟁이 80년대의 정신과 정서의 근원이 된 사실은 '오월'의 의미 변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오월시 동인이 결성되던 1981년 무렵만 해도 오월은 검열을 피해 은밀히 광주항쟁을 말하기 위한 암호처럼 쓰인 측면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점차 달의 의미를 넘어 광주항쟁을 의미하는 말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그러한 오월의 의미변화는 인용시 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가령, "바람에 울고 웃는 풀잎으로/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김남주,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와 같은 시구에는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음풍농월로 한가하게 오월을 노래할 수 없음을 언명하고 있는 바 광주항쟁과 무관하게 오월을 생각할 수 없다는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광주항쟁이 얼마나 80년대의 정신과 정서의 원천이 되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항쟁을 계기로 하여 의미 변화를 보인 시어로는 '오월' 이외에도 '광주' '금남로' '망월동' '무등산' 등을 거론할 수 있다. 가령 "엄동 같은 독재에도 얼지 않고/총알처럼 눈 퍼부어도/눈 쌓이지 않는/생수 솟는 김나는 샘/우리 사랑 광주"(김용택, 「우리 사랑 광주」)에서 광주는 그냥 지명으로서의 광주가 아니다. 민주를 갈망하는 정신의 성스러운 샘으로 의미가 부여되고 있는 바 광주항쟁이 80년대 시정신의 주요한 원천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의미부여는 광주항쟁의 정신을 수호하고 전파하려는 마음과 결부되어 있다. 다시 말해 광주항쟁은 80년대 많은 시인들의 가장 중요한 화두이고 광주항쟁을 화두로 삼은 시인들의 정진이 항쟁을 열흘간의 투쟁으로 끝나게 하지 않고 80년대 내내 지속되게 한 측면이 있다.
앞에 거론한 시들이 정규적인 문예지에 발표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일종의 유격적인 시쓰기와 시발표라는 당시의 문화풍토와 결부되기 때문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당시의 광주항쟁 관련 시들은 반파쇼 민주화 투쟁이라는 역사적 과제와 무관할 수 없었다. 사후 약방문 식이 아니고 당시의 역사적 과제와 밀착된 시쓰기라는 점이 시적 긴장을 유발하였고 그러한 시쓰기를 왕성하게 수행함으로써 사회의 진보에 기여하였던 것이다.
앞에서 역사의 냉엄한 흐름을 운위했지만 광주항쟁은 조속한 의미부여라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성공한 경우에 해당된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오랜 동안의 싸움이었던 동학농민전쟁의 경우 문학적으로 의미가 부여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던가와 비교할 때 특히 그러하다.]
3
광주항쟁에 대한 의미부여가 상대적으로 조속히 이루어진 것은 물론 수많은 사람들의 정성과 노력이 투입된 결과이지만 워낙 사안 자체가 당대의 역사적 과제와 맞물려 있다는 데도 이유가 있다. 민주주의를 표방한 나라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학살이 자행되고 그에 대해 민중들이 들고일어나 처절하게 저항했다는 사실로 인해 광주항쟁은 당대에 나날이 살아가는 의미를 묻고 민족사의 나아갈 길을 암시하는 뜨거운 상징이었다. 그리고 이 점은 많은 시인들이 광주항쟁을 화두로 삼게 된 이유로 작용하였다. 또한 역대 독재권력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던 반공 이데올로기 공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도 항쟁에 대한 조속한 의미부여에 일조했을 것이다. 그 점은 학살과 저항이라는 면에서 더욱 처절했던 제주항쟁의 경우와 비교할 때 선명히 드러난다.
광주항쟁에 대한 의미부여에 가장 커다란 장애로 작용한 것은 지역성 혹은 지역감정의 문제이다. 제주도 4·3항쟁의 경우 반공 이데올로기와 지역성 문제에 이중으로 갇혀 수십 년 동안 묻혀 있었고 그것은 아직도 족쇄로 작용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조속히 의미부여가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광주항쟁의 경우에도 지역성 문제는 아직도 극복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일종의 정신의 휴전선인 반공 이데올로기로 가르고 나서 다시 경상·전라의 지역감정으로 분할하는 것이 한국의 독재권력의 주요한 통치술이라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한 통치술이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먹혀들었다는 것은 한국 현대사의 뼈저리게 불행한 특수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수성이 우리의 현대시사에 반영되지 않을 수 없으니 전라도 출신 시인들이 1970∼80년대 저항시 혹은 민중시의 주류를 형성한 점이 그 증거이다.
무등산도 버리고 영산강도 버리고
버림받은 전라도 땅 위에
버림받은 우리네 설움만 두고
장성 갈재 후딱 넘어
그대 밤봇짐 싸버린 새벽만 남았어요.
살강에 먹다 남은 보리밥만 남았어요.
불타는 요내 가슴만 두고
활활 타오르는 진달래만 두고
나슬나슬 뽕잎 피는 아름다운 4월
장광에 고이는
눈부신 햇살만 두고
그대 서울로 가신 님아
살미친 푸름 속에 지글지글 타는 육신만 남았어요
빼앗긴 입술, 버림받은 빈 손가락만 남았어요.
논바닥도 타오르고 강바닥도 타오르고
우리네 가슴, 우리네 눈물도 타오르고
한많은 전라도가 몽땅 타고 있어요.
흉작의 들판이 타고
황톳빛 전라도가 몽땅 타고 있어요.
-문병란, 「나를 버리고 가신 님」 부분
1970년대 중반에 산출된 이 시에 집중적으로 표현된 것은 '버림받은 전라도' 혹은 '한많은 전라도' 의식이다. 버림받은 농촌 아낙의 목소리를 빌려 토로된 이 '한많은 전라도' 의식은 당시 전라도 사람들의 정서 일반을 대변하교 있다. 어느 지역 민중이나 고통받기는 마찬가지였겠으나 동학농민전쟁 이래 연면한 민중 정서에 특히 박정희 정권의 차별정책이 '한많은 전라도' 의식을 예각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라도 민중의 정서가 시인들의 시심 속에서 저항의식으로 단련되었으니 우연치 않게 전라도 출신 시인들이 1970년대 저항시 혹은 민중시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방금 거론한 문병란을 포함하여 고은·이성부·조태일·김지하·김준태·양성우·이시영 등의 활동을 감안하면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70년대 민중시의 성과가 전라도 출신 시인들의 정진에 의해 거두어진 측면이 많다는 것은 이 지역 민중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상대적으로 더욱 고양되어 있었다는 점과 상응한다. 그런데 1980년 5월 전두환을 정점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은 광주를 택해 민주화 열망을 짓밟고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작전을 수행한다. 신군부 세력의 주축인 경상도 출신이라는 사실은 박정희 정권의 차별정책이 초래한 기형적 현상이다. 광주가 특별히 작전의 대상이 된 것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강한 지역이라는 점 외에도 신군부 세력의 출신지가 아니라는 사실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이런 연유로 광주항쟁이 불가피하게 지역장정 혹은 지역성의 굴레를 쓰게 되었으니 그러한 굴레를 벗겨내는 작업 또한 시인들의 과제가 되었다.
봄의 탄성을 위해 싹틔운 너는
나에게 개화하는 일을 물려주었다
아는 사람은 안다
이 세상 떠도는 마음들이
한 마리 나비되어 앉을 곳 찾는데
인적만 남은 텅빈 한길에서 내가
왜 부르르 부르르 낙화하여 몸떨었는가
남도에서 꽃샘바람에 흔들리던 잎새를
보이지 않는 신음소리가 날 패마다
피같이 새붉은 꽃송이간 벙글어
우리는 인간의 크고 곧은 목소리를 들었다
갖가지 꽃들 함께 꽃가루 나눠 살려고
향기 내어 나비떼 부르기도 했지만
너와 나는 씨앗을 맺지 못했다
이 봄을 아는 사람은 이 암유도 안다
여름의 이 눈부신 녹음을 위해
우리는 못다 핀 꽃술로 남아 있다
-하종오, 「사월에서 오월로」 전문
인용시가 산출된 1983년 무렵만 해도 광주항쟁은 아직 암유를 통해 말해지던 시절이었다.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한 선결사항은 사월이 4월혁명을, 오월이 광주항쟁을 암유한다는 점을 아는 것이다. 나아가 사월이 '너'로, 오월이 '나'로 의인화된 점을 아는 것이다. 그랬을 때 "봄의 번성을 위해 싹틔운 너는/나에게 개화하는 일을 물려주었다"와 같은 시구의 의미를 해독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크고 곧은 목소리를 들었다"나 "우리는 못다 핀 꽃술로 남아 있다"와 같은 시구에서는 너와 나를 우리라 칭하고 있는데 사월혁명과 광주항쟁을 연결시킨 점이 주목된다. 전체적으로 비유가 비유를 낳으며 생생하게 시상이 전개되고 있는 바 사월혁명의 뜻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이 광주항쟁이라는 의미부여가 이루어지고 있다.
참다운 민주 세상을 이룩하기 위하여 피를 흘렸다는 점에서 사월혁명과 광주항쟁은 강력하게 친연성을 지닌다. 그리고 그 천연성을 형상으로 창조한 시가 「사월에서 오월로」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광주항쟁에 대해 지역감정의 굴레를 씌우는 것은 민주화를 가로막는 세력의 간특한 지혜라 하겠고 이 시는 그러한 간지를 타파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광주항쟁과 관련한 관련한 시쓰기에 전라도 출신 시인들이 대거 참여한 것은 인지상정의 발로로서 자연스러운 현상일 듯하다. 모름지기 시쓰기란 체험이나 심리적 거리와 무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용시의 시인 하종오의 출신지는 경상도이다. 참다운 민주 세상에 대한 염원이 광주항쟁을 화두로 삼아 지역감정을 타파하는 경우도 적지 않으니 인용시는 그러한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지도를 펴보자
광주는 어디에서 계속되고 있는가
광주를 헤쳐보자
오월은 어디에서 계속되고 있는가
광주는 이제 한반도 동서남북 어디에나 있다
파쇼의 패악성과 제국주의 독소를
집중투하한 노동자, 농민의 삶과
영웅적인 투쟁의 대열이 있는 곳
오월은 그곳에 살아 있다
노동자 동지들
오월을 더 이상
광주에 못박지 말아다오
우리의 자랑스런 투사들을
더이상 망월동에 묻어두지 말아다오
더이상 상처로만 치유하려거나
지난 역사에 맡기지 말아다오
오월은 노동자, 농민의
영웅적 투쟁의 대열에
살아있다
계속되고 있다
-백무산, 「오월은 어디에 있는가」 부분
1980년대 후반에 들어 고양된 노동운동의 열거가 스며들어 있는 시이다. 선동적인 어조로 '노동자 동지들'을 부르며 '오월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 설파하고 있다. 광주항쟁의 의미는 "노동자, 농민의/영웅적 투쟁의 대열에/살아있다"는 것인데 80년대의 대표적 노동자 시인다운 의미부여인 셈이다. "광주는 이제 한반도 동서남북 어디에나 있다"에서처럼 지역감정의 질곡을 훌훌 털어내고 있고 "더이상 상처로만 치유하려거나/지난 역사에 맡기지 말아다오"에서처럼 현재 진행되는 싸움 속에서 그 의미를 찾고 있다. 요는 광주항쟁의 소중한 뜻이 지역적 편견에 같질 수 없고 노동자와 농민의 투쟁에서 관철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일단 올바른 판단이라 하겠다. 다만 선언적 성격이 너무 강하다는 점이 문제로서 그것은 어느 정도 시의 약점으로 작용한다.
광주항쟁이 80년대의 각 부문운동에 강할 영향을 미쳤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그 점은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민중의 자발적 참여가 광주항쟁을 가능하게 했다는 역사적 경험은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키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도덕성의 확보와 운동에의 헌신이라는 점에서도 광주항쟁은 주요한 정신적 거점이 되었다. 자신들이 맞닥뜨려 싸우는 상대가 광주학살을 자행한 세력과 다르지 않다는 인식이 도덕적 긍지로 작용하였고 항쟁 당시에 보였던 사람들의 헌신성은 본받아야 할 전례로 작용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1980년대의 노동시와 농민시 분야의 성곽도 광주항쟁의 정신을 창조적으로 계승하고자 하는 노력과 무관할 수 없다 하겠다. 특히 노동시 분야의 두드러진 성과는 80년대의 노동운동을 선도한 측면이 있다.
시가 일인칭 양식이요 개인의 내면세계 표현에 적절한 양식이라 하지만 개인이 사회와 무관하게 살 수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무릇 광주항쟁은 직접 체험자에게는 말할 나위 없고 당시에 이 땅에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던 사회적 역사적 사건이다.
80년대 시에서 사회역사적 상상력이 넓고 깊게 작용한 것은 일단 광주항쟁이 끼친 영향으로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그 점은 광주항쟁을 직접 소재로 다루지 않은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앞에서 언급한 노동시와 농민시 뿐만 아니라 민족문제·통일문제·교육문제 등과 관련된 시적 성과가 괄목할 만하게 축적된 시기가 1980년대이다. 70년대에는 다소 막연하게 민중시라 했던 것이 80년대에는 각각의 영역에서 부딪치는 현안문제에 파고들어 성과를 거두었으니 그 계기로 작용한 것이 광주항쟁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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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에 들어선 이후 광주항쟁은 시적 화두로서의 자력을 많이 상실하였다. 광주학살의 주범들이 권좌에서 물러나게 됨으로써 전선이 흐려지고 심리적으로 거리가 생길 만큼 세월도 흘렀다.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세계 정세도 바뀌고 특히 최근에는 구제금융 상황이 닥침으로써 이러한 상황에서의 삶의 문제에 대한 대응이 시의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우리 현대시의 자랑스러운 전통 가운데 하나는 각 시대의 정신을 구현하면서 민족사의 전개에 기여해왔다는 점이다. 그런 맥락에서 시인들이 오늘날의 현안 문제에 몰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요 그러한 차원에서 창조성을 발휘하는 것이 문학사적 요청이다. 따라서 시대가 바뀐 것을 기회로 시인들이 개인의 밀실에 갇히거나 사사로움에 함몰되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우리의 시가 민족어의 사수라는 기본적인 사명을 띠고 형성되면서부터 민족사의 전개에 일익을 담당해 온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한 우리의 시가 자기 시대의 현안 문제에 창조적으로 대응한 정도는 시기별로 차이가 있다. 가령 분단을 고착화시킨 육이오 전쟁 직후 우리의 시는 사회적 대응이라는 면에서 역동성이 많이 위축되었고 그 점은 시적 성과의 부진함으로 연결되었다. 반면 광주항쟁 이후의 우리의 시는 자기 시대의 문제에 대해 괄목할 만한 대응을 보였고 그에 상응하는 시적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적 사회적 문제를 외면하고 개인의 사적인 문제에 몰두하는 오늘날의 많은 시인들에게 좋은 참고거리가 될 것이다. 개인과 사회 사이의 긴장을 생생하게 견디는 것은 창조적 시인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 자세이다.
방금 전에 시적 화두로서의 자력이 많이 떨어졌다고 했지만 광주항쟁을 화두로 창조성을 발휘할 여지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지역감정을 불식시키고 참된 민주사회를 이룩하는 것은 여전히 절실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변화된 현실 속에서 광주항쟁을 보고 광주항쟁을 통해 변화된 현실을 보는 것이다. 진상이 규명되지 못한 부분이 아직 남아있지만 그것은 그늘로 거느린 채 이제야 광주항쟁은 전사와 후사의 산맥 속에서 우뚝한 봉우리로 전모를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989년에 나온 김희수의 『오늘은 꽃잎으로 누울지라도』는 광주항쟁에 대한 본격적 서사시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업이로되 후사와의 연결이 빈약하기에 항쟁의 전모 또한 제대로 형상화되어 있지 않다. 이제 바야흐로 광주항쟁의 전모를 드러내는 서사시가 씌어질 시기가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