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5·18광주민주화운동 다른 대하소설「봄날」작가 임철우(신동아, 1998. 5)
본문
소설가 이상락의 이 사람의 삶
5·18 광주민주화운동 다룬 대하소설 『봄날』작가
임철우
그때 당신은 서울 인천 부산에서 무얼 하고 있었나?
작가 임철우는 대하소설 『봄날』을 쓰는 데 11년을 보냈다. 그 기간에 그는 5·18 당시 희생된 원혼들 속으로 들어가 살기를 원했다. 주변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면서 그렇게 핏빛 5월 그날을 되살려냈다.
다시 5월이 온다. 5일은 어린이 날, 8일은 어버이날, 15일은 스승의 날이다. 뭉뚱그려서 가정의 달이자 보은의 달이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팍팍해진 세상이라지만 금년에도 이 날들이 되면 음식점이나 놀이동산이나 유원지는 인파로 붐빌 것이고, 정성이 담긴 선물이나 꽃다발을 가지고 어버이나 스승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도 분주해질 것이다 실로 미풍이자 양속이다. 신록은 우거지고, 날씨는 화창하다. 아름다운 봄날이다.
5·18? 그거야 남녘 어디 그 지방에서 [당사자들]끼리 기념식도 하고 참배도 하고 무슨 공연도 하고 걸개그림도 내걸고… 잘하면 텔레비전으로 실황중계도 하겠지만, 18년이나 지난 옛날 얘기가 아닌가. 이미 진상규명도 했고, 용서도 했고, 화해도 했잖은가. 그 시간에 프로야구나 연속극 한 편을 시청하는 편이 더 낫지 .
만일 당신의 5월 맞이 방식이 이런 식이라면 당신은 한 중년 사내가 10여 년간 가슴속의 숫돌로 벼려온 비수를 받을 준비를 해야 한다. 소설가 임철우(44)가 당신에게 들이댄 비수는 대하장편 소설 {봄날}(문학과지성사)이다. 그는 [오월은 푸르구나…]를 구가하고 있는 당신들에게 그 5월을 피울음으로 맞이하고 있을 남녘 [광주] 사람들을 생각하라고 강요하지 않으며, 더더구나 흘러간 유행가 취급도 못 받는 [살벌한] 5월의 노래나 출정가를 새삼스레 함께 불러주기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와 남녘의 그 곳 사람들은 이미 당신들의 무관심에 익숙해 있다.
『그 해 5월, 우리는 이래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여기서, 이렇게 싸웠고 또 그렇게 죽어갔소. 우리는 폭도가 아니었고 집단혁명을 꿈꾸었던 불순분자도 아닌 평범한 시민이었소. 이게 그 증거요』
[그때 당신들은 무얼 하고 있었나?]
우리가 이 사내가 내미는 핏빛 손수건을 보고 [아, 그랬었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여 주는 일은 사사로운 것이지만 작게는 한 소설가를 감동하게 만들 수 있고, 크게는 상처 입은 그 곳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일이며 , 더 크게는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을 힘이 되는 것이다.
{[봄날]이 전5권으로 완간되던 날 플래카드라도 들고 거리를 누비면서 제발 이 책을 많이 좀 읽어 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는 임씨의 고백은 그에게 있어 이 소설작업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어렴풋이나마 짐작케 한다. 10여 년 동안, 정확하게는 11년 동안 혼신의 기력을 다해 매달려온 작품이니 그럴 만도 하겠다고 섣불리 단정해서는 안 된다. 기실 그가 플래카드에 적어 들고서 광주 바깥의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말은 이런 것이다.
{우리가 수많은 대한민국 국군의 총과 탱크에 포위된 채 분노와 공포에 떨며 당신들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을 때, 당신들은 서울에서 인천에서 부산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우리는 그의 소설을 읽고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한다. 변명거리가 없으면 [화해]니 [용서]니 [역사의 장에 맡기자]는 가해자 쪽의 공작에 고개를 끄덕였던 과오라도 반성해야 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들 마음속에 어떤 모양으로든 은연중에 자리잡은 「광주」를 말끔히 지워내고 이 소설이 들려주는 새로운 「광주의 5월」을 진실로 새겨 두기를 권한다. {봄날}은 작가가 소설적인 필요에 의해 투입한 일부 주인공과 최소한의 장치를 제외하고는 철저한 증언과 자료에 바탕하여 기록한 그 해 5월 16일 새벽부터 27일까지의 「광주 보고서]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를 만나러 경기도 일산으로 떠난다.
11년 동안 5·18에 매달려
사실은 불필요한 해명이지만, 혹 임철우씨와 필자가 같은 고향(전남 완도)임을 들어 {끼리끼리 해먹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독자를 위해 사족을 붙이자면, 매월 [이 사람의 삶]의 취재 대상을 선정하는 일은 필자의 몫이 아니라 「신동아」 데스크의 몫이다. 우리는 둘다 완도라는 본도(本島)가 아니고 완도군에 속하는 금일면 출신이다. 그는 면소재지가 있던 평일도 출신이고, 필자는 그 옆에 붙은 작은 섬 생일도 출신이다. 동갑이고 동향에다 동업에 종사하는 관계로, 만났어도 여러 번 만났어야 하는데 어찌어찌 하다보니 이번 취재길이 그를 처음 만나러 가는 길이라는 사실도 고백해야겠다. {봄날}에도 주인공들의 어머니가 청산댁 충도댁 등으로 설정돼 있는데, 임철우씨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낙일도는 사실은 그의 고향 평일도이고, 청산도 충도 보길도 노화도 등도 그 일대 바다에 떠있는 섬이다. 서남해안의 지도를 펴놓고 한번쯤 확인해 보는 것도 임철우 문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임씨는 {봄날}의 서문에서 "학살극의 주역인 두 전직 대통령은 옥에 갇혀 있고…}라고 썼다. 그런데 필자가 그를 만나러 가는 길에 펴든 시사 주간지에는, 설악산 신흥사에서 열린 법회에 장세동·안현태·이원홍·이양우 씨 등 이른바 5공 실세들과 함께 참석한 전두환씨의 의기양양한 모습의 사진이 크게 실려 있고, 전씨가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경제 실정을 비판했다는 기사가 곁들여 있다. 문민정부의 실정은 어느 정도 국민적인 공분을 사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전 아무개 그 사람이 입에 올릴 사안은 아니지 않을까 한국 정치의 우스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우리는 일산 아파트 숲 사이에 있는 커피숍에 자리를 잡았다. 임씨를 처음 만난 사람은 마흔 넷이라는 나이간 실감되지 않는 미남형의 곱상한 외모 때문에 부잣집에서 귀염받고 자란 그래서 그 또래 사람들이 겪었을 세파가 그만은 비켜갔을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필자는 지금부터 그의 유년시절부터의 성장과정을 관찰해보려고 하는 바, 그렇게 하는 것이 그의 문학 전반을 이해하는데 뿐만 아니라 글쓰는 이들이 이미 문학의 소재로 삼기에는 한 물 갔다고 판단을 내린 5월 광주에 10년이 넘게 매달려온 배경의 일면을 읽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아버지의 좌익운동
임씨는 앞에서 기술했듯 전라남도 완도군에 해당하는 평일도(平日島)라는 작은 섬에서 태어났다. 4남 3녀 중 셋째 아들이었는데 아버지가 당시 면(面)에서 단 3명뿐인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고, 또 한 사람은 그의 당숙이었다. 아버지와 당숙은 서울에서 함께 하숙을 했었는데, 해방을 전후하여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그랬듯이 두 사람은 좌익사상이 심취하게 된다. 학교를 도중에 그만두고 고향 낙도로 내려온 두 사람은 좌익계열의 청년단을 조직하여 주도하게 된다. 임씨의 부친은 도중에 발을 뺏으나 당숙은 청년단장을 맡아 활동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과 합류하여 그들이 퇴각할 때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돼 저항한다. 토벌대에 붙잡힌 당숙은 20년간을 갇혀 있다 지난 82년에야 출감하게 된다.
{나는 아버지의 좌익활동 내력을 까마득히 몰랐어요. 그런데 내가 대학 1학년 때 은행원으로서 진급을 앞두고 있던 형님이 느닷없이 밤중에 집에 내려와서는 아버지의 [성분] 때문에 불이익을 받았다고 항의를 하는 겁니다. 우리 형제들을 불러 모은 아버지가 처음으로 당신이 좌익활동이 간여했던 내용을 설명하시면서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남해안의 자잘한 섬지방은 상대적으로 동족상잔이라 일컫는 6·25의 상처로부터 안전한 지대였으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전쟁기간 동안 섬 주민들에게 아주 별난 희생을 강요했던 지역이었다. 뚜렷한 전선(戰線)도 없이 점령군이 인민군에서 국군(주로 경찰부대)으로 혹은 그 반대로 수시로 바뀌면서 그 때마다 무수한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특히 인민군의 남하에 밀쳐 완도지역으로 후퇴한 경찰부대(나주부대)가 인민군 복장으로 위장하고 도처의 섬에 나타나 영문 모르고 그들을 환영했던 사람들을 쏘아 죽인 이른바 「나주부대 사건」은 육지전황에 어두웠던 섬 주민들에게 가장 아픈 상처를 남겼다.
임철우씨는 예닐곱 살 때부터 이야기를 아주 실감나게 잘 해주기로 이름난 할아버지로부터 인민군 혹은 아군에 의해서 섬 주민들이 학살당했던 정황이며 무수한 시체가 조류를 따라 바다를 떠다니던 얘기들을 이솝우화보다 더 먼저 듣고 자랐다.
{마을 사람들 중 일부는 인민군이 머물던 시절이 좋았다고 들려주기도 했어요. 그들이 퇴각할 때 송별회를 열어주기도 했다는 겁니다. 그런 특수한 환경이 반공 이데올로기가 맹위를 떨치던 때에도 양쪽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생각됩니다}
임씨가 나고 자란 섬지역과 6·25 얘기를 필자가 비교적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은, 그의 문학이 바로 그런 배경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후 세대로서는 분단과 전쟁 얘기를 처음으로 다룬 그의 출세작 {아버지의 땅}을 비롯, 나주부대의 만행을 고발한 {물 그림자}와 {그 섬에 가고 싶다}, 그리고 {봄날}의 전편(前篇)에 해당하는 {붉은 산, 흰 새} 등은 전쟁과 분단의 혹독한 상처를 입었고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고향 섬사람들이 아니었으면 생산될 수 없는 작품이었다.
이제 필자는 한국의 대표적 중견작가의 반열에 올라선 임씨가 청소년기에 못말릴 [문제아]였다는 사실을 고자질하고자 한다.
임씨의 부모는 그가 3살 때 사업상 거주지를 목포로 옮기게 되고 임씨는 작은 누나와 둘째 형과 함께 고향 평일도에 남아 조부모와 생활했다.
{어린 나이에는 보통 스스로가 외롭단 생각 자체를 못하잖아요. 그런데 당시의 나는 할머니가 밭을 매는 언저리에 앉아서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버림받았구나, 난 참 외로운 아이로구나, 하고… 어린 자신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어쩌다 어머니가 오시는 날이면 그 반가움은 말로 다 못하지요. 한 번은 여섯 살 때쯤이었는데, 그 날도 어머니가 오시는 날이었어요. 하루 종일 동구밖만 내다보고 있는데 드디어 어머니가 오시는 겁니다. 어머니의 모습을 먼 발치에서 보자 가슴부터 마구 뛰었어요. 다른 아이들 갈았으면 당연히 달려나가 매달렸을 텐데 그 때 난 집 뒤안으로 숨어버렸어요.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이긴 했지만 그 때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못말리는 사춘기 문제아
임씨가 초등학교 4학년 무렵에 조부모와 부모를 비롯하여 모든 식구들이 광주로 이사해 모처럼 함께 살게 되지만, 전기도 없는 마을에서 올라온 [촌놈]은 선생님과도 학생들과도 그리고 학교생활과 그 큰 도시와 심지어는 가족과도 적응을 못한 채 겉돌게 된다. 무엇보다 부모님의 그에 대한 무관심까지 겹쳐 초등학교 3학년 때 첫 가출을 감행한다.
{할아버지의 장롱 자물쇠를 망치로 부수고 돈을 훔쳐 가지고 집을 나갔어요. 기차 타고 목포까지 갔다가 연건 대합실에서 쪼그리고 자고, 배고프면 우동도 사 먹고…그런 가출이 고2때까지 무수하게 되풀이 됩니다. 처음엔 그저 충동적으로 가출을 했지만 갈수록 계획적이 돼요. 며칠간에 걸쳐서 가방을 숨기고 돈을 마련하고…더러 도망치다 붙잡히기도 했지요. 우리 집 7형제는 다 공부도 잘 하고 착했는데 나만 유독 주위가 산만한 문제아가 된 거지요. 게다가 초등학교 때부터 고2때까지 결핵을 앓았던 게 큰 충격이었어요. 중학교 때에는 퇴학처분을 받기도 했는데 교감 선생님이 아버지의 친구였던 관계로 다시 복학했지요. 난 가족으로부터도 철저히 소외당했어요. 따지고 보면 내 일탈행위는 애정을 얻기 위한 행동이었는데 그걸 아무도 몰라주는 겁니다. 가끔 [내가 이 집의 가족인가]를 의심해보기도 했습니다}
임씨 가문의 그 [문제아]는 드디어 가족에 의해 정신병원으로 끌려가게 되는데, 의사와 상담을 하면서 그 때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의 얘기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이 없었고, 그 역시 지신의 내면을 단 한 번도 누구에게 털어놓은 적이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정신 병원에서 절절이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결국 내 삶은 내 몫이구나 하는 것을 느낀 거지요. 그 때 철이 들었어요}
평론가 김현이 그의 작품의 도처에서 {자폐적 분위기를 풍긴다}고 했는데, 그 역시 인정했다. 그는 고2때부터 [갑자기] 철이 들어 무섭게 공부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부모님은 그의 변화를 반가워하며 {아들 하나 건졌다}고 했으면서도, 우등생인 형과 함께 책상에 앉아 있는 그를 보고는 {형 공부에 방해되는데 안 자고 뭘하느냐}고 핀잔을 줄만큼 여전히 그는 관심과 애정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그가 대학 시험을 보던 날 점심 시간이 됐는데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시험장 옥상에 올라가 다른 수험생들이 가족들과 북적거리는 모습을 보며 울었다고 했다. 뒤늦게 같은 대학(전남대) 의대 다니던 형이 사온 빵과 콜라를 급히 우겨넣고 트림을 해가면서 시험을 치렀다. 그는 미달이 예상되는 농대에나 가라던 가족의 권유를 뿌리치고, 법학과에 이어 두 번째로 경쟁이 치열했던 영문과에 보기 좋게 합격했다.
{지금은 부모님이 그 시절 일들을 아주 미안해 하시고 잘 대해 주십니다. 내가 워낙 문제아였기 때문에 이후에는 내 말이라면 무조건 수용을 하셨어요. 대학 다니다 휴학을 하겠다고 해도 그래라, 방을 얻어서 따로 자취를 하겠다고 해도 그래라, 결혼을 하겠다고 해도 그래라. 고2 때 처음 맘을 잡았을 때 놀랐던 부모님은 대학 4학년 때인 81년도에 신춘문예에 당선되자 경악을 하셨어요. 우리 식구들은 지금까지 계속 경악 중입니다}
남다른 역사적 배경을 가진 고향을 둔 점, 그리고 좀처럼 흉내내기 어려운 궤적을 그려보인 그의 청소년기가 어쩌면 기름진 문학적 토양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젠 [광주]와 {봄날}얘기를 해볼 차례다.
{이 총으로 죽여야 할 적이 누군가?}
1980년 5·18이 터졌을 때 그는 영문과 4학년에 다니다 한 달 전에 휴학한 상태였다. 당시 그는 친구인 P씨(임씨는 신춘문예 당선소감을 P씨에게 띄우는 편지글 형식으로 썼을 만큼 그와 절친했다)가 활동하고 있던 [광대]라는 마당극 단체에 들어가 문화운동을 하고 있었다. 5월 18일 아침까지만 해도 [광대] 당원들은 황석영의 {한씨 연대기}를 각색하여 연습 중이었다. 그러나 이미 전날 자정을 기해 계엄이 확대되고 휴교령이 내리자 전부터 불온단체로 찍혀서 당국의 감시를 받고 있던 터라 단원들은 피신하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흩어진다.
임씨는 [문학동네] 봄호에 발표한 자전소설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항쟁이 시작된 18일부터 계엄군이 도청에서 철수한 21일 오후까지, 내가 한 일이라곤 여기저기 시위대에 섞여 몇 개의 돌멩이를 던지거나, 개처럼 거리에서 허둥지둥 쫓겨다니기 만 한 것뿐이다}
임씨는 [광대] 단원들이 그 불길의 한가운데에 뛰어들어 (투사회보) 활동을 하는 상황에서도 자신은 전면에 나서 참여하지 못했고, 나중에 무장투쟁을 벌일 때에도 {이 총으로 죽여야 할 적이 누군가?}라는 번민 끝에 총을 들지 못했을 뿐 아니라, 군인들의 진압작전으로 투사들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공포에 질린 채 다락방에 숨어 떨고 있었던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과 자책감을 넘어 자기혐오에 시달려야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광주나 5·18에 대한 뉘앙스만 풍겨도 무사하지 못하던 80년대초, 중반에 그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광주의 5월을 소설에 담았다. 83년에 발표된 [동행]을 시작으로 85년에 발표한 [사산하는 여름] 등 일련의 중단편을 발표하게 되는데, 알레고리 기법의 그 소설들이 항쟁 기간에 입었던 그 자신의 정신적 의상을 치유하기에는 턱없었으나 그는 [5·18]을 다룬 자신의 초기 소설들에 대단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나를 보고 대표적인 [5월 작가]라고들 했지만, 내가 써냈던 건 중단편 정도였거든요. 80년대 후반까지는 내 자신의 개인적인 상처가 너무 깊어서 [광주]를 장편으로 쓴다는 건 엄두도 못 냈어요. 그 엄청난 [역사]를 내 역량으로 할 수 있다고 믿지도 않았고요. 그러나 그 작업은 광주에서 당시 상황을 지켜본 사람이라야 쓸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자료나 상상력으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거든요. 당시 현장에서 수십 만의 시민들이 만들어낸 분위기를 현장에 있지 않았던 사람이 그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마침 호흡이 긴 장편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결국 내가 써야겠다고 결심을 한 겁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멀고도 험한 {봄날}만들기에 돌입한다.
{봄날}은 철저히 자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기록한 다큐멘터리 형식의 소설이다. [5월18일 12:00, 조선대학교 부근] [5월19일 20:00, 도청앞 광장」[5월20일 14:00, 금남로] 등의 소제목이 말해주듯 이 소설에서 일어난 모든 상황과 사건은 [있을 법한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거나 여러 사람의 증언을 통해 [있었음이 거의 확실한]사건들이다. 같은 시각에 서로 다른 장소에서 일어난 사건을 동시에 그리기도 하고, 같은 시각에 발생한 같은 사건을 다르게 체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중복해서 소개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소설 작품에서는 이례적으로 각주를 달거나 사건 현장의 약도를 곁들여 사실성을 입증하고 있다. 이 다섯 권의 소설을 읽고 나면 광주항쟁의 발발 배경과 발단, 전개과정, 그리고 결말을 상세하게 체험하게 된다.
5·18 관련 자료들이 지금은 상당히 체계 있게 갖춰져 있으나 발생 초기인 5월 18일과 20일 사이의 시내 상황은 정리된 게 없다. 그런데 전남대 5·18문제연구소(소장 송기숙 교수·소설가)관계자마저 {우리가 그 동안 초기 3일간의 자료를 아무리 정리하려고 해도 안돼서 포기했는데 임철우씨가 대신 해줬다}고 할 정도였다니 그가 이 소설을 위해 쏟은 열정을 짐작할 수 있다.
{항쟁 기간에 매일매일 일어난 상황들을 정리하고 내 느낌도 곁들여 적어놨어요. 시내에 배포된 전단도 빠짐없이 보관하고, 심지어는 항쟁 이전에 교내에 나돌았던 소위 「어용교수 백서」라는 문건까지 아직 보관하고 있을 정돕니다. 시내에 나도는 유언비어들도 다 기록하고 항쟁 전후에 발간된 지방신문들도 다 모아 뒀어요. 당시로서는 나중에 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는데, 내가 생각해도 참 희한해요. 사실 18일부터 21일까지는 수십 만 시민이 바글바글 끓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기록한 일지도 뭣도 없는 형편이거든요. 내 메모가 아니었으면 재현해 내기가 힘들었을 거예요}
-당시에 언론이 철저히 외면했거나 왜곡했기 때문에 시민들이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하기가 어려웠을 턴데….
{물론이지요. 우리 집이 변두리인 산수동에 있었는데, 시내에서는 난리법석인데 산수동 다방에 가보니까 아무 것도 모른 채 사람들이 롯데하고 고려대하고 붙은 야구경기 중계를 보고 있어요. 불과 걸어서 20분 거리인데… 그리고 유언비어만 해도 어떤 유언비어가 나왔느냐에 따라 첫날 상황과 둘째날 상황이 달라요. 시내 상황을 보고온 어떤 할아버지는 학생들과 시민들을 마구잡이로 구타하는 사람들이 국군이 아니라 김일성이 군대가 변장한 것이라면서 112에 신고를 한다고도 했고…}
죽은 원혼들과 11년간 산 셈
-증인들의 증언을 듣는 일도 어려웠겠지만 그 증언들을 종합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겠어요.
{증인들의 증언도 글 파편화 돼 있어요. 한국현대사 사료연구회에서 펴낸 [광주민중항쟁사료전집]에 나오는 5백 명의 증언을 장소별, 시간별, 인물별로 분류해서 카드로 만들었어요. 그런 다음에 가령 19일 오후 1시 중앙교회 앞 상황을 증언한 것들을 다 모아 놓으면 입체적인 모양이 나와요. 그런데 더러 인파를 부풀리기도 하기 때문에 증인간에 숫자 차이가 많이 나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럴 경우 내가 그 시간에 다른 지역 인파를 참고해서 인원을 추정해서 결정을 하는 방식을 취했어요. 동일한 시간에 수십 군데서 상황이 벌어지는 데다 1분 사이에도 여러 가지 상황이 발생할 수 있거든요. 그 파편적인 증언들을 모자이크하듯 조합해놓으면 커다란 벽화가 나오는 것이지요}
-미진하거나 아쉽게 생각되는 부분이 있다면….
{22일부터는 시내상황이 딱 정지돼버리고 도청을 중심으로 활동하게 되는데, 물론 그 안에서의 상황은 증언과 기록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투항파는 비겁자들처럼 돼버리고 항쟁파가 영웅시되는 면이 있거든요. 당시 투항파의 주장도 인정해 줄 것은 인정을 해줘야 할 텐데…이 소설에서 그런 시도를 해볼까 생각도 했으나 부담이 너무 컸어요. 내가 목격하지도 못했고, 또 내 자신이 자유로운 입장이 못돼서 투항파들이 왜 그런 입장을 취했는지를 규명해보지 못했어요. 결국 기록에 나타난 대로 가자고 방향을 정했지요. 그 부분이 대단히 부담스러워 고심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훗날 쓰는 사람은 보다 자유롭게 쓸 수 있겠지요}
-고통스러운 체험을 다시 한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을텐데요.
{11년 동안 죽어간 원혼들하고 같이 산 셈입니다. 광주 항쟁 중에 가장 참혹하게 죽은 임산부 최미애의 경우 사실은 내 친구 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 사람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야 쓸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기도를 했습니다 당신 얼마나 할 말이 많겠소, 제발 내 안으로 들어오십시요, 하고…. 내가 그 사람이라고 자기 체면을 거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소설을 쓰는 내내 주남마을에서 죽은 사람으로, 거리에서 학살당한 사람으로, 교도소에서 죽어간 사람으로 살았지요. 현실은 밥 먹고 똥 누는 행위만 있지 아무 의미가 없어요. 대학(한신대 문창과)에서 학생들이나 동료 교수들과 얘기중에 무의식 중에 5·18얘기가 나와버려요. 그러다 또 그 얘기한다고 핀잔을 받기도 했고…}
임씨가 {봄날}을 탈고하고 어느 정도 평온을 되찾아 학교에 갔더니 사람들이 {그 동안 참 불안해 보이고 좀 이상했다}고 하더란다.
임씨는 그리려는 대상이 자기 안으로 들어와 주지 않아서 한밤중에 망월동 묘소에 찾아가서 제발 도와달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그는 11년간을 5·18에 매어 살아온 셈이다. 임씨가 노리는 것은 사람들에게, 5·18을 재체험 시키는 것이라 했다.
{김병익 선생(문학평론가)께서 [사무실에서 {봄날}을 읽다가 잠깐 밖을 내다보았는데 바깥 거리로 시위대와 진압군이 몰려올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고 하시더라고요. 바로 그런 체험을 독자들이 해주기를 바라는 겁니다}
-청문회도 거쳤고, 단편적이나마 문학작품들도 나왔고, 또 세인들의 관심이나 문학 조류도 변화된 상황에서 5·18을 그토록 오래 붙잡고 있다보면 힘이 빠질 때도 있었을 텐데….
{한 마디로 아직도 5·18이냐는 얘기를 들었을 때 느꼈던 고립감은 말로 표현 못하지요. 가장 친한 친구로부터까지 [그거 빨리 끝내고 작품 써야지」라는 말을 들었을 때 너무 힘들었어요. 오히려 문학하는 사람 아닌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가끔 격려를 받았습니다}
임씨는 가금 자긴 있는 부인을 흔들어 깨워서는 {나 훌륭한 일 하고 있지?}라고, 옆구리 찔러 절받기식 위로라도 받아야 버틸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피해자이자 가해자라고 자책
임씨는 광주 바깥지역 사람들에게 할 말이 많다.
그는 82년에 서강대 대학원에 입학했는데, 그가 서울에서 만난 교수나 작가나 대학원생 등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들까지도 그가 들려주는 얘기를 유언비어 취급을 했다.
{아무리 열심히 설명을 해 주어도 내 얘기에 호응을 해주지 않고 긴가민가 가늠해 보는 듯한 그들의 표정을 대할 때면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감정이 극도로 격앙되고 잠이 안와요. 5월시들을 줄줄이 외우면서 거리를 걷다보면 눈물이 줄줄 나요. 하교 뒤 노고산을 보면 무등산이 생각나서 또 울고.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광주 사람들은 그 공포 속에서도 굳게 버티기만 하면 서울 부산 대구 인천 사람들이 들고일어날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전두환 무리는 곧 무너진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어요. 실제로 도청 앞에서는 일부러 거짓말을 하기도 했어요. 지금 전주에서, 서울에서 우리를 지지하는 데모가 대대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시민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였지요. 그런데 바깥 사람들은 그때 뭘 했습니까? 서울 사람들한테 이렇게 말하고 싶었어요. 우리가 전두환이 때문에만 죽었냐? 너희들은 그 때 뭣하고 있었느냐? 그렇게 원망을 퍼붓고 싶은데, 이런 일이 있었으니 제발 믿어 달라고 애걸을 해야 했으니…. 그런 점에서 외지 사람들도 반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또 하나 광주 사람들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를 피해자이면서 또한 가해자라고 자책하고 있다는 것이다.
5월27일, 이미 진압군이 시내에 들어와 잇는 상황에서 시민들은 공포에 떨고 있는데 {나와서 싸웁시다!} {시민 여러분 우리의 형제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나와서 살려 주십시요}라는 절박한 가두방송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갔다 하면 폭도로 몰려 사살될 게 뻔했기 때문에 시민들은 집안에서 떨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당시 새벽기도를 하러 나가다가 총에 맞아 죽은 사람도 있었다. 집안에서 공포에 질려 나갈 엄두를 못냈던 시민들은 다른 사람들이 총 맞아 죽어 가는데도 나가서 함께 싸우진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를 가해자라고 생각하여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피해 당사자들은 죄책감에 시달려야 하고 외지인들은 그렇게 당당할 수 있습니까? 더러 외지인들이 괴롭고 고통스러워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난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그렇게 말할 수 있어서 참 좋겠다고. 나는 다른 지역 사람들이 [우리도 책임 있다]는 걸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비겁했다」
자, 이 부분에서 짚어볼 것이 한 가지 있다. 그는 소설 {봄날}을 내면서 [나는 비겁했다]는 고백을 한 바 있다 임씨의 그 고백을 받아서 {항쟁 기간 중에 그가 투사의 면모를 보이지 못한 데 대한 자책이다}라고 개인적인 것으로만 받아들이려는 목소리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그런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한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조차도 책임이 있다. 당신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내가 느끼는 죄책감은 내가 현지에 있었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이다}
임씨의 의견에 의하면 5월을 소재로 한 시들도 광주를 체험한 시인의 시는 절절한 고통과 슬픔이 배어나는데 반해 다른 사람들이 쓴 시들은 목소리가 아주 크고 당당하다.
{문화방송에서 최초로 [광주]를 다룬 [어머니의 노래]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난 집에 제사가 있어서 광주에 가 있었습니다. 제사를 보러 온 삼사십 명의 식구들이 모두 둘러앉아 텔레비전을 보면서 울음을 터트리는 겁니다. 나도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었지요. 나는 그들이 차라리 분노로 치를 떨지 않고 왜 그렇게 서럽게 울까를 생각해봤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동안 유언비어로 치부당하고, 폭도라고 모략당하다가 처음으로 공적인 전파를 타고 사실의 일단이 외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됐구나, 그 회한이 복받친 겁니다. 그런데 다음날 서울에 왔더니 사람들이 저를 보고 그 프로그램 보았느냐고 물어요. 봤다고 했더니 그 사람들 대꾸가 어땠는지 아십니까? 세상에, 그렇게 프로그램을 엉터리로 만들 수 있느냐고 콧방귀를 뀌는 겁니다. 광주의 당사자들은 서럽게 우는 데 그들은 엉터리라며 냉소를 하더란 말입니다}
임씨는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자신도 모르게 치올라오는 격정을 감추려 하지 않았고, 가끔은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잊을 건 잊고 해야 하는데 워낙 소화 능력이 없어서…}라고 말꼬리를 흐렸다.
이야기가 전·노 쪽으로 옮아갔다.
{물론 DJ도 그 자신이 광주의 피해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광주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지난 선거 때 보세요. 대통령 한 번 배출해보겠다고 선거기간 내내 입 다물고, 지지율 높게 나오면 불리하다면서 여론 조사할 때 엉뚱한 응답을 해가면서까지 성원을 보냈던 그렇게 아픈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지난번 전두환 노태우를 특사로 석방하는 것보고 실망했습니다. 광주 사람들도 그들을 용서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를 하더라도 광주 사람들이 해야지요. 그런 절차와 격식 정도는 갖췄어야지요. 사면이야 DJ가 하더라도 광주 시민들이 용서하는 절차를 거쳤어야 시민들이 그나마 위로 받고 보상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랬더라면 참 감격적이었을 텐데, 딴 사람이 용서하고 악수도 해버렸어요. 일언반구 반성의 변도 없는 사람들을…. 이제는 그들로부터 반성의 말을 받아낼 기회도, 광주 시민들이 그들을 용서할 기회도 다 물건너가 버렸어요}
소설 말고 「광주」를 읽어달라
듣고 보니 그렇다. 명백한 가해자들인 그 두 전직 대통령들은 재임시에 "이제는 용서하고 화합할 때"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외쳤다. 참 혼란스러운 일이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향해서 용서를 강요하고, 잠시 영어의 몫이 되었던 그들은 그들의 주장대로 광주 시민들 몫의 용서를 [쟁취]했다.
-{봄날} 때문에 쓰고싶은 작품을 못쓰고 유예한 게 많을 텐데 다음 작품에 대한 구상은 어떻게 됩니까?
"그 동안 [봄날]에만 매달려 있다보니 다음 징검다리를 하나도 안 놓아 뒀어요"
임씨는 아직 [5월 광주]라는 가위눌림으로부터 말끔히 해방되지 못한 듯 보였다. 그는 하루 한 갑 이상 피우던 담배를 끊었다. 18년전 5월의 상황을 재체험 하다보니 그 자체가 파괴적인 에너지가 되어서 자신을 죽일 것 같다는 불안에 휩싸였다. 자다가도 숨이 막히고, 눈물이 흔해져서 펑펑 울고, 신경 쇠약에 시달리기도 했다.
임씨는 자신의 작품 {봄날}에 대해서 문학성 운운의 평가는 사양한다고 했다. 그건 문학작품이지만 문학 이상의 것이므로 기법이 어떻고 구성이 어떻고 완성도가 어떻다는 식의 접근은 바라는 바가 아니라고 했다. 소설을 읽지 말고 [광주]를 읽어내라는 요구가 아닐까.
{인세를 한 푼도 안 받아도 좋으니 제발 많은 사람들이 읽으면 좋겠습니다. 광주 사람들한테는 크게 새로울 것이 없을 테니 외지인들이 읽으면 좋겠습니다. 머리로. 혹은 논리로 읽지 말고 가슴으로 읽어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읽고 나서 "아, 그랬구나"라고 고개를 끄덕여 주기만 한다면 무엇보다 광주 사람들에겐 큰 위안이 될 것이라고 했다.
긴 시간의 얘기를 마치고 헤어지면서 금년 5·18은 그가 조금쯤 덜 아퍼하며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
5·18 광주민주화운동 다룬 대하소설 『봄날』작가
임철우
그때 당신은 서울 인천 부산에서 무얼 하고 있었나?
작가 임철우는 대하소설 『봄날』을 쓰는 데 11년을 보냈다. 그 기간에 그는 5·18 당시 희생된 원혼들 속으로 들어가 살기를 원했다. 주변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면서 그렇게 핏빛 5월 그날을 되살려냈다.
다시 5월이 온다. 5일은 어린이 날, 8일은 어버이날, 15일은 스승의 날이다. 뭉뚱그려서 가정의 달이자 보은의 달이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팍팍해진 세상이라지만 금년에도 이 날들이 되면 음식점이나 놀이동산이나 유원지는 인파로 붐빌 것이고, 정성이 담긴 선물이나 꽃다발을 가지고 어버이나 스승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도 분주해질 것이다 실로 미풍이자 양속이다. 신록은 우거지고, 날씨는 화창하다. 아름다운 봄날이다.
5·18? 그거야 남녘 어디 그 지방에서 [당사자들]끼리 기념식도 하고 참배도 하고 무슨 공연도 하고 걸개그림도 내걸고… 잘하면 텔레비전으로 실황중계도 하겠지만, 18년이나 지난 옛날 얘기가 아닌가. 이미 진상규명도 했고, 용서도 했고, 화해도 했잖은가. 그 시간에 프로야구나 연속극 한 편을 시청하는 편이 더 낫지 .
만일 당신의 5월 맞이 방식이 이런 식이라면 당신은 한 중년 사내가 10여 년간 가슴속의 숫돌로 벼려온 비수를 받을 준비를 해야 한다. 소설가 임철우(44)가 당신에게 들이댄 비수는 대하장편 소설 {봄날}(문학과지성사)이다. 그는 [오월은 푸르구나…]를 구가하고 있는 당신들에게 그 5월을 피울음으로 맞이하고 있을 남녘 [광주] 사람들을 생각하라고 강요하지 않으며, 더더구나 흘러간 유행가 취급도 못 받는 [살벌한] 5월의 노래나 출정가를 새삼스레 함께 불러주기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와 남녘의 그 곳 사람들은 이미 당신들의 무관심에 익숙해 있다.
『그 해 5월, 우리는 이래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여기서, 이렇게 싸웠고 또 그렇게 죽어갔소. 우리는 폭도가 아니었고 집단혁명을 꿈꾸었던 불순분자도 아닌 평범한 시민이었소. 이게 그 증거요』
[그때 당신들은 무얼 하고 있었나?]
우리가 이 사내가 내미는 핏빛 손수건을 보고 [아, 그랬었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여 주는 일은 사사로운 것이지만 작게는 한 소설가를 감동하게 만들 수 있고, 크게는 상처 입은 그 곳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일이며 , 더 크게는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을 힘이 되는 것이다.
{[봄날]이 전5권으로 완간되던 날 플래카드라도 들고 거리를 누비면서 제발 이 책을 많이 좀 읽어 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는 임씨의 고백은 그에게 있어 이 소설작업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어렴풋이나마 짐작케 한다. 10여 년 동안, 정확하게는 11년 동안 혼신의 기력을 다해 매달려온 작품이니 그럴 만도 하겠다고 섣불리 단정해서는 안 된다. 기실 그가 플래카드에 적어 들고서 광주 바깥의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말은 이런 것이다.
{우리가 수많은 대한민국 국군의 총과 탱크에 포위된 채 분노와 공포에 떨며 당신들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을 때, 당신들은 서울에서 인천에서 부산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우리는 그의 소설을 읽고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한다. 변명거리가 없으면 [화해]니 [용서]니 [역사의 장에 맡기자]는 가해자 쪽의 공작에 고개를 끄덕였던 과오라도 반성해야 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들 마음속에 어떤 모양으로든 은연중에 자리잡은 「광주」를 말끔히 지워내고 이 소설이 들려주는 새로운 「광주의 5월」을 진실로 새겨 두기를 권한다. {봄날}은 작가가 소설적인 필요에 의해 투입한 일부 주인공과 최소한의 장치를 제외하고는 철저한 증언과 자료에 바탕하여 기록한 그 해 5월 16일 새벽부터 27일까지의 「광주 보고서]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를 만나러 경기도 일산으로 떠난다.
11년 동안 5·18에 매달려
사실은 불필요한 해명이지만, 혹 임철우씨와 필자가 같은 고향(전남 완도)임을 들어 {끼리끼리 해먹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독자를 위해 사족을 붙이자면, 매월 [이 사람의 삶]의 취재 대상을 선정하는 일은 필자의 몫이 아니라 「신동아」 데스크의 몫이다. 우리는 둘다 완도라는 본도(本島)가 아니고 완도군에 속하는 금일면 출신이다. 그는 면소재지가 있던 평일도 출신이고, 필자는 그 옆에 붙은 작은 섬 생일도 출신이다. 동갑이고 동향에다 동업에 종사하는 관계로, 만났어도 여러 번 만났어야 하는데 어찌어찌 하다보니 이번 취재길이 그를 처음 만나러 가는 길이라는 사실도 고백해야겠다. {봄날}에도 주인공들의 어머니가 청산댁 충도댁 등으로 설정돼 있는데, 임철우씨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낙일도는 사실은 그의 고향 평일도이고, 청산도 충도 보길도 노화도 등도 그 일대 바다에 떠있는 섬이다. 서남해안의 지도를 펴놓고 한번쯤 확인해 보는 것도 임철우 문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임씨는 {봄날}의 서문에서 "학살극의 주역인 두 전직 대통령은 옥에 갇혀 있고…}라고 썼다. 그런데 필자가 그를 만나러 가는 길에 펴든 시사 주간지에는, 설악산 신흥사에서 열린 법회에 장세동·안현태·이원홍·이양우 씨 등 이른바 5공 실세들과 함께 참석한 전두환씨의 의기양양한 모습의 사진이 크게 실려 있고, 전씨가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경제 실정을 비판했다는 기사가 곁들여 있다. 문민정부의 실정은 어느 정도 국민적인 공분을 사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전 아무개 그 사람이 입에 올릴 사안은 아니지 않을까 한국 정치의 우스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우리는 일산 아파트 숲 사이에 있는 커피숍에 자리를 잡았다. 임씨를 처음 만난 사람은 마흔 넷이라는 나이간 실감되지 않는 미남형의 곱상한 외모 때문에 부잣집에서 귀염받고 자란 그래서 그 또래 사람들이 겪었을 세파가 그만은 비켜갔을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필자는 지금부터 그의 유년시절부터의 성장과정을 관찰해보려고 하는 바, 그렇게 하는 것이 그의 문학 전반을 이해하는데 뿐만 아니라 글쓰는 이들이 이미 문학의 소재로 삼기에는 한 물 갔다고 판단을 내린 5월 광주에 10년이 넘게 매달려온 배경의 일면을 읽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아버지의 좌익운동
임씨는 앞에서 기술했듯 전라남도 완도군에 해당하는 평일도(平日島)라는 작은 섬에서 태어났다. 4남 3녀 중 셋째 아들이었는데 아버지가 당시 면(面)에서 단 3명뿐인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고, 또 한 사람은 그의 당숙이었다. 아버지와 당숙은 서울에서 함께 하숙을 했었는데, 해방을 전후하여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그랬듯이 두 사람은 좌익사상이 심취하게 된다. 학교를 도중에 그만두고 고향 낙도로 내려온 두 사람은 좌익계열의 청년단을 조직하여 주도하게 된다. 임씨의 부친은 도중에 발을 뺏으나 당숙은 청년단장을 맡아 활동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과 합류하여 그들이 퇴각할 때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돼 저항한다. 토벌대에 붙잡힌 당숙은 20년간을 갇혀 있다 지난 82년에야 출감하게 된다.
{나는 아버지의 좌익활동 내력을 까마득히 몰랐어요. 그런데 내가 대학 1학년 때 은행원으로서 진급을 앞두고 있던 형님이 느닷없이 밤중에 집에 내려와서는 아버지의 [성분] 때문에 불이익을 받았다고 항의를 하는 겁니다. 우리 형제들을 불러 모은 아버지가 처음으로 당신이 좌익활동이 간여했던 내용을 설명하시면서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남해안의 자잘한 섬지방은 상대적으로 동족상잔이라 일컫는 6·25의 상처로부터 안전한 지대였으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전쟁기간 동안 섬 주민들에게 아주 별난 희생을 강요했던 지역이었다. 뚜렷한 전선(戰線)도 없이 점령군이 인민군에서 국군(주로 경찰부대)으로 혹은 그 반대로 수시로 바뀌면서 그 때마다 무수한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특히 인민군의 남하에 밀쳐 완도지역으로 후퇴한 경찰부대(나주부대)가 인민군 복장으로 위장하고 도처의 섬에 나타나 영문 모르고 그들을 환영했던 사람들을 쏘아 죽인 이른바 「나주부대 사건」은 육지전황에 어두웠던 섬 주민들에게 가장 아픈 상처를 남겼다.
임철우씨는 예닐곱 살 때부터 이야기를 아주 실감나게 잘 해주기로 이름난 할아버지로부터 인민군 혹은 아군에 의해서 섬 주민들이 학살당했던 정황이며 무수한 시체가 조류를 따라 바다를 떠다니던 얘기들을 이솝우화보다 더 먼저 듣고 자랐다.
{마을 사람들 중 일부는 인민군이 머물던 시절이 좋았다고 들려주기도 했어요. 그들이 퇴각할 때 송별회를 열어주기도 했다는 겁니다. 그런 특수한 환경이 반공 이데올로기가 맹위를 떨치던 때에도 양쪽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생각됩니다}
임씨가 나고 자란 섬지역과 6·25 얘기를 필자가 비교적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은, 그의 문학이 바로 그런 배경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후 세대로서는 분단과 전쟁 얘기를 처음으로 다룬 그의 출세작 {아버지의 땅}을 비롯, 나주부대의 만행을 고발한 {물 그림자}와 {그 섬에 가고 싶다}, 그리고 {봄날}의 전편(前篇)에 해당하는 {붉은 산, 흰 새} 등은 전쟁과 분단의 혹독한 상처를 입었고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고향 섬사람들이 아니었으면 생산될 수 없는 작품이었다.
이제 필자는 한국의 대표적 중견작가의 반열에 올라선 임씨가 청소년기에 못말릴 [문제아]였다는 사실을 고자질하고자 한다.
임씨의 부모는 그가 3살 때 사업상 거주지를 목포로 옮기게 되고 임씨는 작은 누나와 둘째 형과 함께 고향 평일도에 남아 조부모와 생활했다.
{어린 나이에는 보통 스스로가 외롭단 생각 자체를 못하잖아요. 그런데 당시의 나는 할머니가 밭을 매는 언저리에 앉아서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버림받았구나, 난 참 외로운 아이로구나, 하고… 어린 자신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어쩌다 어머니가 오시는 날이면 그 반가움은 말로 다 못하지요. 한 번은 여섯 살 때쯤이었는데, 그 날도 어머니가 오시는 날이었어요. 하루 종일 동구밖만 내다보고 있는데 드디어 어머니가 오시는 겁니다. 어머니의 모습을 먼 발치에서 보자 가슴부터 마구 뛰었어요. 다른 아이들 갈았으면 당연히 달려나가 매달렸을 텐데 그 때 난 집 뒤안으로 숨어버렸어요.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이긴 했지만 그 때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못말리는 사춘기 문제아
임씨가 초등학교 4학년 무렵에 조부모와 부모를 비롯하여 모든 식구들이 광주로 이사해 모처럼 함께 살게 되지만, 전기도 없는 마을에서 올라온 [촌놈]은 선생님과도 학생들과도 그리고 학교생활과 그 큰 도시와 심지어는 가족과도 적응을 못한 채 겉돌게 된다. 무엇보다 부모님의 그에 대한 무관심까지 겹쳐 초등학교 3학년 때 첫 가출을 감행한다.
{할아버지의 장롱 자물쇠를 망치로 부수고 돈을 훔쳐 가지고 집을 나갔어요. 기차 타고 목포까지 갔다가 연건 대합실에서 쪼그리고 자고, 배고프면 우동도 사 먹고…그런 가출이 고2때까지 무수하게 되풀이 됩니다. 처음엔 그저 충동적으로 가출을 했지만 갈수록 계획적이 돼요. 며칠간에 걸쳐서 가방을 숨기고 돈을 마련하고…더러 도망치다 붙잡히기도 했지요. 우리 집 7형제는 다 공부도 잘 하고 착했는데 나만 유독 주위가 산만한 문제아가 된 거지요. 게다가 초등학교 때부터 고2때까지 결핵을 앓았던 게 큰 충격이었어요. 중학교 때에는 퇴학처분을 받기도 했는데 교감 선생님이 아버지의 친구였던 관계로 다시 복학했지요. 난 가족으로부터도 철저히 소외당했어요. 따지고 보면 내 일탈행위는 애정을 얻기 위한 행동이었는데 그걸 아무도 몰라주는 겁니다. 가끔 [내가 이 집의 가족인가]를 의심해보기도 했습니다}
임씨 가문의 그 [문제아]는 드디어 가족에 의해 정신병원으로 끌려가게 되는데, 의사와 상담을 하면서 그 때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의 얘기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이 없었고, 그 역시 지신의 내면을 단 한 번도 누구에게 털어놓은 적이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정신 병원에서 절절이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결국 내 삶은 내 몫이구나 하는 것을 느낀 거지요. 그 때 철이 들었어요}
평론가 김현이 그의 작품의 도처에서 {자폐적 분위기를 풍긴다}고 했는데, 그 역시 인정했다. 그는 고2때부터 [갑자기] 철이 들어 무섭게 공부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부모님은 그의 변화를 반가워하며 {아들 하나 건졌다}고 했으면서도, 우등생인 형과 함께 책상에 앉아 있는 그를 보고는 {형 공부에 방해되는데 안 자고 뭘하느냐}고 핀잔을 줄만큼 여전히 그는 관심과 애정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그가 대학 시험을 보던 날 점심 시간이 됐는데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시험장 옥상에 올라가 다른 수험생들이 가족들과 북적거리는 모습을 보며 울었다고 했다. 뒤늦게 같은 대학(전남대) 의대 다니던 형이 사온 빵과 콜라를 급히 우겨넣고 트림을 해가면서 시험을 치렀다. 그는 미달이 예상되는 농대에나 가라던 가족의 권유를 뿌리치고, 법학과에 이어 두 번째로 경쟁이 치열했던 영문과에 보기 좋게 합격했다.
{지금은 부모님이 그 시절 일들을 아주 미안해 하시고 잘 대해 주십니다. 내가 워낙 문제아였기 때문에 이후에는 내 말이라면 무조건 수용을 하셨어요. 대학 다니다 휴학을 하겠다고 해도 그래라, 방을 얻어서 따로 자취를 하겠다고 해도 그래라, 결혼을 하겠다고 해도 그래라. 고2 때 처음 맘을 잡았을 때 놀랐던 부모님은 대학 4학년 때인 81년도에 신춘문예에 당선되자 경악을 하셨어요. 우리 식구들은 지금까지 계속 경악 중입니다}
남다른 역사적 배경을 가진 고향을 둔 점, 그리고 좀처럼 흉내내기 어려운 궤적을 그려보인 그의 청소년기가 어쩌면 기름진 문학적 토양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젠 [광주]와 {봄날}얘기를 해볼 차례다.
{이 총으로 죽여야 할 적이 누군가?}
1980년 5·18이 터졌을 때 그는 영문과 4학년에 다니다 한 달 전에 휴학한 상태였다. 당시 그는 친구인 P씨(임씨는 신춘문예 당선소감을 P씨에게 띄우는 편지글 형식으로 썼을 만큼 그와 절친했다)가 활동하고 있던 [광대]라는 마당극 단체에 들어가 문화운동을 하고 있었다. 5월 18일 아침까지만 해도 [광대] 당원들은 황석영의 {한씨 연대기}를 각색하여 연습 중이었다. 그러나 이미 전날 자정을 기해 계엄이 확대되고 휴교령이 내리자 전부터 불온단체로 찍혀서 당국의 감시를 받고 있던 터라 단원들은 피신하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흩어진다.
임씨는 [문학동네] 봄호에 발표한 자전소설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항쟁이 시작된 18일부터 계엄군이 도청에서 철수한 21일 오후까지, 내가 한 일이라곤 여기저기 시위대에 섞여 몇 개의 돌멩이를 던지거나, 개처럼 거리에서 허둥지둥 쫓겨다니기 만 한 것뿐이다}
임씨는 [광대] 단원들이 그 불길의 한가운데에 뛰어들어 (투사회보) 활동을 하는 상황에서도 자신은 전면에 나서 참여하지 못했고, 나중에 무장투쟁을 벌일 때에도 {이 총으로 죽여야 할 적이 누군가?}라는 번민 끝에 총을 들지 못했을 뿐 아니라, 군인들의 진압작전으로 투사들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공포에 질린 채 다락방에 숨어 떨고 있었던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과 자책감을 넘어 자기혐오에 시달려야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광주나 5·18에 대한 뉘앙스만 풍겨도 무사하지 못하던 80년대초, 중반에 그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광주의 5월을 소설에 담았다. 83년에 발표된 [동행]을 시작으로 85년에 발표한 [사산하는 여름] 등 일련의 중단편을 발표하게 되는데, 알레고리 기법의 그 소설들이 항쟁 기간에 입었던 그 자신의 정신적 의상을 치유하기에는 턱없었으나 그는 [5·18]을 다룬 자신의 초기 소설들에 대단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나를 보고 대표적인 [5월 작가]라고들 했지만, 내가 써냈던 건 중단편 정도였거든요. 80년대 후반까지는 내 자신의 개인적인 상처가 너무 깊어서 [광주]를 장편으로 쓴다는 건 엄두도 못 냈어요. 그 엄청난 [역사]를 내 역량으로 할 수 있다고 믿지도 않았고요. 그러나 그 작업은 광주에서 당시 상황을 지켜본 사람이라야 쓸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자료나 상상력으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거든요. 당시 현장에서 수십 만의 시민들이 만들어낸 분위기를 현장에 있지 않았던 사람이 그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마침 호흡이 긴 장편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결국 내가 써야겠다고 결심을 한 겁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멀고도 험한 {봄날}만들기에 돌입한다.
{봄날}은 철저히 자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기록한 다큐멘터리 형식의 소설이다. [5월18일 12:00, 조선대학교 부근] [5월19일 20:00, 도청앞 광장」[5월20일 14:00, 금남로] 등의 소제목이 말해주듯 이 소설에서 일어난 모든 상황과 사건은 [있을 법한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거나 여러 사람의 증언을 통해 [있었음이 거의 확실한]사건들이다. 같은 시각에 서로 다른 장소에서 일어난 사건을 동시에 그리기도 하고, 같은 시각에 발생한 같은 사건을 다르게 체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중복해서 소개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소설 작품에서는 이례적으로 각주를 달거나 사건 현장의 약도를 곁들여 사실성을 입증하고 있다. 이 다섯 권의 소설을 읽고 나면 광주항쟁의 발발 배경과 발단, 전개과정, 그리고 결말을 상세하게 체험하게 된다.
5·18 관련 자료들이 지금은 상당히 체계 있게 갖춰져 있으나 발생 초기인 5월 18일과 20일 사이의 시내 상황은 정리된 게 없다. 그런데 전남대 5·18문제연구소(소장 송기숙 교수·소설가)관계자마저 {우리가 그 동안 초기 3일간의 자료를 아무리 정리하려고 해도 안돼서 포기했는데 임철우씨가 대신 해줬다}고 할 정도였다니 그가 이 소설을 위해 쏟은 열정을 짐작할 수 있다.
{항쟁 기간에 매일매일 일어난 상황들을 정리하고 내 느낌도 곁들여 적어놨어요. 시내에 배포된 전단도 빠짐없이 보관하고, 심지어는 항쟁 이전에 교내에 나돌았던 소위 「어용교수 백서」라는 문건까지 아직 보관하고 있을 정돕니다. 시내에 나도는 유언비어들도 다 기록하고 항쟁 전후에 발간된 지방신문들도 다 모아 뒀어요. 당시로서는 나중에 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는데, 내가 생각해도 참 희한해요. 사실 18일부터 21일까지는 수십 만 시민이 바글바글 끓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기록한 일지도 뭣도 없는 형편이거든요. 내 메모가 아니었으면 재현해 내기가 힘들었을 거예요}
-당시에 언론이 철저히 외면했거나 왜곡했기 때문에 시민들이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하기가 어려웠을 턴데….
{물론이지요. 우리 집이 변두리인 산수동에 있었는데, 시내에서는 난리법석인데 산수동 다방에 가보니까 아무 것도 모른 채 사람들이 롯데하고 고려대하고 붙은 야구경기 중계를 보고 있어요. 불과 걸어서 20분 거리인데… 그리고 유언비어만 해도 어떤 유언비어가 나왔느냐에 따라 첫날 상황과 둘째날 상황이 달라요. 시내 상황을 보고온 어떤 할아버지는 학생들과 시민들을 마구잡이로 구타하는 사람들이 국군이 아니라 김일성이 군대가 변장한 것이라면서 112에 신고를 한다고도 했고…}
죽은 원혼들과 11년간 산 셈
-증인들의 증언을 듣는 일도 어려웠겠지만 그 증언들을 종합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겠어요.
{증인들의 증언도 글 파편화 돼 있어요. 한국현대사 사료연구회에서 펴낸 [광주민중항쟁사료전집]에 나오는 5백 명의 증언을 장소별, 시간별, 인물별로 분류해서 카드로 만들었어요. 그런 다음에 가령 19일 오후 1시 중앙교회 앞 상황을 증언한 것들을 다 모아 놓으면 입체적인 모양이 나와요. 그런데 더러 인파를 부풀리기도 하기 때문에 증인간에 숫자 차이가 많이 나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럴 경우 내가 그 시간에 다른 지역 인파를 참고해서 인원을 추정해서 결정을 하는 방식을 취했어요. 동일한 시간에 수십 군데서 상황이 벌어지는 데다 1분 사이에도 여러 가지 상황이 발생할 수 있거든요. 그 파편적인 증언들을 모자이크하듯 조합해놓으면 커다란 벽화가 나오는 것이지요}
-미진하거나 아쉽게 생각되는 부분이 있다면….
{22일부터는 시내상황이 딱 정지돼버리고 도청을 중심으로 활동하게 되는데, 물론 그 안에서의 상황은 증언과 기록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투항파는 비겁자들처럼 돼버리고 항쟁파가 영웅시되는 면이 있거든요. 당시 투항파의 주장도 인정해 줄 것은 인정을 해줘야 할 텐데…이 소설에서 그런 시도를 해볼까 생각도 했으나 부담이 너무 컸어요. 내가 목격하지도 못했고, 또 내 자신이 자유로운 입장이 못돼서 투항파들이 왜 그런 입장을 취했는지를 규명해보지 못했어요. 결국 기록에 나타난 대로 가자고 방향을 정했지요. 그 부분이 대단히 부담스러워 고심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훗날 쓰는 사람은 보다 자유롭게 쓸 수 있겠지요}
-고통스러운 체험을 다시 한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을텐데요.
{11년 동안 죽어간 원혼들하고 같이 산 셈입니다. 광주 항쟁 중에 가장 참혹하게 죽은 임산부 최미애의 경우 사실은 내 친구 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 사람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야 쓸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기도를 했습니다 당신 얼마나 할 말이 많겠소, 제발 내 안으로 들어오십시요, 하고…. 내가 그 사람이라고 자기 체면을 거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소설을 쓰는 내내 주남마을에서 죽은 사람으로, 거리에서 학살당한 사람으로, 교도소에서 죽어간 사람으로 살았지요. 현실은 밥 먹고 똥 누는 행위만 있지 아무 의미가 없어요. 대학(한신대 문창과)에서 학생들이나 동료 교수들과 얘기중에 무의식 중에 5·18얘기가 나와버려요. 그러다 또 그 얘기한다고 핀잔을 받기도 했고…}
임씨가 {봄날}을 탈고하고 어느 정도 평온을 되찾아 학교에 갔더니 사람들이 {그 동안 참 불안해 보이고 좀 이상했다}고 하더란다.
임씨는 그리려는 대상이 자기 안으로 들어와 주지 않아서 한밤중에 망월동 묘소에 찾아가서 제발 도와달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그는 11년간을 5·18에 매어 살아온 셈이다. 임씨가 노리는 것은 사람들에게, 5·18을 재체험 시키는 것이라 했다.
{김병익 선생(문학평론가)께서 [사무실에서 {봄날}을 읽다가 잠깐 밖을 내다보았는데 바깥 거리로 시위대와 진압군이 몰려올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고 하시더라고요. 바로 그런 체험을 독자들이 해주기를 바라는 겁니다}
-청문회도 거쳤고, 단편적이나마 문학작품들도 나왔고, 또 세인들의 관심이나 문학 조류도 변화된 상황에서 5·18을 그토록 오래 붙잡고 있다보면 힘이 빠질 때도 있었을 텐데….
{한 마디로 아직도 5·18이냐는 얘기를 들었을 때 느꼈던 고립감은 말로 표현 못하지요. 가장 친한 친구로부터까지 [그거 빨리 끝내고 작품 써야지」라는 말을 들었을 때 너무 힘들었어요. 오히려 문학하는 사람 아닌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가끔 격려를 받았습니다}
임씨는 가금 자긴 있는 부인을 흔들어 깨워서는 {나 훌륭한 일 하고 있지?}라고, 옆구리 찔러 절받기식 위로라도 받아야 버틸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피해자이자 가해자라고 자책
임씨는 광주 바깥지역 사람들에게 할 말이 많다.
그는 82년에 서강대 대학원에 입학했는데, 그가 서울에서 만난 교수나 작가나 대학원생 등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들까지도 그가 들려주는 얘기를 유언비어 취급을 했다.
{아무리 열심히 설명을 해 주어도 내 얘기에 호응을 해주지 않고 긴가민가 가늠해 보는 듯한 그들의 표정을 대할 때면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감정이 극도로 격앙되고 잠이 안와요. 5월시들을 줄줄이 외우면서 거리를 걷다보면 눈물이 줄줄 나요. 하교 뒤 노고산을 보면 무등산이 생각나서 또 울고.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광주 사람들은 그 공포 속에서도 굳게 버티기만 하면 서울 부산 대구 인천 사람들이 들고일어날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전두환 무리는 곧 무너진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어요. 실제로 도청 앞에서는 일부러 거짓말을 하기도 했어요. 지금 전주에서, 서울에서 우리를 지지하는 데모가 대대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시민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였지요. 그런데 바깥 사람들은 그때 뭘 했습니까? 서울 사람들한테 이렇게 말하고 싶었어요. 우리가 전두환이 때문에만 죽었냐? 너희들은 그 때 뭣하고 있었느냐? 그렇게 원망을 퍼붓고 싶은데, 이런 일이 있었으니 제발 믿어 달라고 애걸을 해야 했으니…. 그런 점에서 외지 사람들도 반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또 하나 광주 사람들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를 피해자이면서 또한 가해자라고 자책하고 있다는 것이다.
5월27일, 이미 진압군이 시내에 들어와 잇는 상황에서 시민들은 공포에 떨고 있는데 {나와서 싸웁시다!} {시민 여러분 우리의 형제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나와서 살려 주십시요}라는 절박한 가두방송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갔다 하면 폭도로 몰려 사살될 게 뻔했기 때문에 시민들은 집안에서 떨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당시 새벽기도를 하러 나가다가 총에 맞아 죽은 사람도 있었다. 집안에서 공포에 질려 나갈 엄두를 못냈던 시민들은 다른 사람들이 총 맞아 죽어 가는데도 나가서 함께 싸우진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를 가해자라고 생각하여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피해 당사자들은 죄책감에 시달려야 하고 외지인들은 그렇게 당당할 수 있습니까? 더러 외지인들이 괴롭고 고통스러워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난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그렇게 말할 수 있어서 참 좋겠다고. 나는 다른 지역 사람들이 [우리도 책임 있다]는 걸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비겁했다」
자, 이 부분에서 짚어볼 것이 한 가지 있다. 그는 소설 {봄날}을 내면서 [나는 비겁했다]는 고백을 한 바 있다 임씨의 그 고백을 받아서 {항쟁 기간 중에 그가 투사의 면모를 보이지 못한 데 대한 자책이다}라고 개인적인 것으로만 받아들이려는 목소리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그런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한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조차도 책임이 있다. 당신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내가 느끼는 죄책감은 내가 현지에 있었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이다}
임씨의 의견에 의하면 5월을 소재로 한 시들도 광주를 체험한 시인의 시는 절절한 고통과 슬픔이 배어나는데 반해 다른 사람들이 쓴 시들은 목소리가 아주 크고 당당하다.
{문화방송에서 최초로 [광주]를 다룬 [어머니의 노래]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난 집에 제사가 있어서 광주에 가 있었습니다. 제사를 보러 온 삼사십 명의 식구들이 모두 둘러앉아 텔레비전을 보면서 울음을 터트리는 겁니다. 나도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었지요. 나는 그들이 차라리 분노로 치를 떨지 않고 왜 그렇게 서럽게 울까를 생각해봤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동안 유언비어로 치부당하고, 폭도라고 모략당하다가 처음으로 공적인 전파를 타고 사실의 일단이 외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됐구나, 그 회한이 복받친 겁니다. 그런데 다음날 서울에 왔더니 사람들이 저를 보고 그 프로그램 보았느냐고 물어요. 봤다고 했더니 그 사람들 대꾸가 어땠는지 아십니까? 세상에, 그렇게 프로그램을 엉터리로 만들 수 있느냐고 콧방귀를 뀌는 겁니다. 광주의 당사자들은 서럽게 우는 데 그들은 엉터리라며 냉소를 하더란 말입니다}
임씨는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자신도 모르게 치올라오는 격정을 감추려 하지 않았고, 가끔은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잊을 건 잊고 해야 하는데 워낙 소화 능력이 없어서…}라고 말꼬리를 흐렸다.
이야기가 전·노 쪽으로 옮아갔다.
{물론 DJ도 그 자신이 광주의 피해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광주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지난 선거 때 보세요. 대통령 한 번 배출해보겠다고 선거기간 내내 입 다물고, 지지율 높게 나오면 불리하다면서 여론 조사할 때 엉뚱한 응답을 해가면서까지 성원을 보냈던 그렇게 아픈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지난번 전두환 노태우를 특사로 석방하는 것보고 실망했습니다. 광주 사람들도 그들을 용서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를 하더라도 광주 사람들이 해야지요. 그런 절차와 격식 정도는 갖췄어야지요. 사면이야 DJ가 하더라도 광주 시민들이 용서하는 절차를 거쳤어야 시민들이 그나마 위로 받고 보상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랬더라면 참 감격적이었을 텐데, 딴 사람이 용서하고 악수도 해버렸어요. 일언반구 반성의 변도 없는 사람들을…. 이제는 그들로부터 반성의 말을 받아낼 기회도, 광주 시민들이 그들을 용서할 기회도 다 물건너가 버렸어요}
소설 말고 「광주」를 읽어달라
듣고 보니 그렇다. 명백한 가해자들인 그 두 전직 대통령들은 재임시에 "이제는 용서하고 화합할 때"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외쳤다. 참 혼란스러운 일이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향해서 용서를 강요하고, 잠시 영어의 몫이 되었던 그들은 그들의 주장대로 광주 시민들 몫의 용서를 [쟁취]했다.
-{봄날} 때문에 쓰고싶은 작품을 못쓰고 유예한 게 많을 텐데 다음 작품에 대한 구상은 어떻게 됩니까?
"그 동안 [봄날]에만 매달려 있다보니 다음 징검다리를 하나도 안 놓아 뒀어요"
임씨는 아직 [5월 광주]라는 가위눌림으로부터 말끔히 해방되지 못한 듯 보였다. 그는 하루 한 갑 이상 피우던 담배를 끊었다. 18년전 5월의 상황을 재체험 하다보니 그 자체가 파괴적인 에너지가 되어서 자신을 죽일 것 같다는 불안에 휩싸였다. 자다가도 숨이 막히고, 눈물이 흔해져서 펑펑 울고, 신경 쇠약에 시달리기도 했다.
임씨는 자신의 작품 {봄날}에 대해서 문학성 운운의 평가는 사양한다고 했다. 그건 문학작품이지만 문학 이상의 것이므로 기법이 어떻고 구성이 어떻고 완성도가 어떻다는 식의 접근은 바라는 바가 아니라고 했다. 소설을 읽지 말고 [광주]를 읽어내라는 요구가 아닐까.
{인세를 한 푼도 안 받아도 좋으니 제발 많은 사람들이 읽으면 좋겠습니다. 광주 사람들한테는 크게 새로울 것이 없을 테니 외지인들이 읽으면 좋겠습니다. 머리로. 혹은 논리로 읽지 말고 가슴으로 읽어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읽고 나서 "아, 그랬구나"라고 고개를 끄덕여 주기만 한다면 무엇보다 광주 사람들에겐 큰 위안이 될 것이라고 했다.
긴 시간의 얘기를 마치고 헤어지면서 금년 5·18은 그가 조금쯤 덜 아퍼하며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