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소설로 읽는 삶과 역사. 강형철(발효의 시학, 살림터, 199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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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읽는 삶과 역사 2
강형철
1. 일어서는 땅
80년 5월 광주항쟁 소설집
80년 5월 광주항쟁 소설집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일어서는 땅}은 한승원, 문순태 등 10인의 중단편 모음집이다.
책의 부제로 '80년 5월 광주항쟁 소설집'이라는 말을 당당하게 내보였다는 점에서 새삼 말이란 지배계층과 피 지배계층의 힘의 역학관계에서 전취, 소멸된다는 말을 떠올려 준단. 다시 말해서 80년, 저 청천벽력 같던 학살극의 상황 직후에 막연히 '사태'라는 말로 운위되거나 그도 못하면 어렴풋한 말로 냄새만 풍기면서 오그라들던 지적 풍토를 떠올려 주기도 한다는 말이다.
사실 그 동안 누구나 관통하고 싶었지만, 아니 누구나 그 깊은 상처를 통과하여 피가 묻어 있으면 묻은 채로 상처가 나면 상처 그대로 드러내 보여야 한다고 다짐했지만, 그 다짐의 당위성은 때로 이 땅의 작가, 시인들에게 희망보다는 절망을, 미래보다는 늘 어둡고 칙칙한 어제에 물귀신처럼 밀어 넣었다는 짐에서 이에 대한 성숙한 통과의례가 화급히 요청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은 쉽지 않았다. 결국 이러한 공백은 주지하다시피 일군의 젊은 시인들이 나름대로 성실히 견뎌내고 있었으며 또한 이들이 중심이 되어 동인지들을 간행하면서 일정한 거점을 확보하면서 그 공백을 메꾼 바 있다. 그러한 성과뿐 중의 하나가 인동에서 간행한 {누가 그대 큰 이름 지우랴}라는 광주항쟁 시선집이었다.
편집과정에서의 다소 작위적인 흠집을 제외하고는 이 책이 견뎌준 중량은 대단한 바 있다. 그러나 이번에 간행된 {일어서는 땅}은 문화적 공백과 이후의 소설적 진로를 가늠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길잡이가 될 것임에 틀림없으리라 여겨진다.
{일어서는 땅}에는 11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다. 80년대의 중요한 작가로 부각된 반 있는 임철우, 윤정모, 김남일을 위시하여 광주항쟁 당시 전남매일신문사 부국장으로 일하던 소설가 문순태는 물론 80년대 이후 소설가로 등장한 김중태, 이영옥, 김유택, 박호재, 정도상 제씨들은 각각 나름대로 성실한 얘기를 가다듬어 민족사적 질곡을 향해 정면돌파를 기도하고 있다.
이 작품들 중 문순태의 [일어서는 땅], 임철우의 [봄날], 윤정모의 [밤길], 김중태의 [모당]등은 이미 각종 문예지에 실려 심란한 충격을 준 바 있는데 이번에 소설집으로 묶이면서 부분부분 개작을 하여 신작과 다름없는 작품들로 선뵈고 있다. 이러한 작품의 손질행위는 발표 당시의 지면이 갖고 있던 제약에서 풀려난다는 의미도 있을 것이고 또한 작가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자유(이것은 민중의 힘에 비례한다)의 한 척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집의 중도한 성과로는 전혀 새로운 작가들의 훨씬 더 진솔한 정서를 보단 확고한 시선으로 전휘하고 있음을 드러내보여 준다는 점에 있다 신작들을 순서대로 살펴보자.
박호재의 [다시 그 거리에 서면]은 광주 외곽지역에 사는 여교사인 지숙의 눈을 통해 항쟁 당시의 광주상황과 그 상황 속에서의 가족사적 불행이 리얼하게 묘사됨으로써 항쟁 자체가 보통의 일상인들을 강타한 구석구석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이영옥의 [남으로 가는 헬리콥터]는 작가의 말에 의지해 살피건대, 항쟁 당시 인근 도시에서 교사로서 재직하던 자의 솔직한 자기 점검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띄고 있다. 이 점은 결국 그 당시 현장 이외에 있던 사람들이 '거기 서 있었는가'라는 질문 앞에 자유롭지 않아 자괴감에 빠져 있는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하나의 교두보라 하겠는데 작품의 말미 부분이 한없이 밝고 힘차게 매듭지어져 있음이 특히 눈에 띈다.
김남일의 [망명의 끝]은 10·26이후 학생운동권의 한인자가 수배되어 잠행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잠행하는 과정에서 풍문으로만 듣던 항쟁을 풍문식으로 기술하는 형식을 취하다가 결국 체포되면서 그 풍문의 실체에 몸던져 섞여지면서 다시 오늘의 역사로 돌아오는 과정이 실감있게 그려지고 있다. 마지막 부분에서 "아니다, 끝이 아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고 깨달으면서 들판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는 벼들에서 희망을 찾아내는 것은 단지 체포된 자의 막연한 억지 희망이 아닌, 자기 땅에 대한 굳건한 신뢰의 표현임에 틀림없다.
김유택의 [목부 이야기]는 광주항쟁 이후 끊임없는 격론의 대상이 되어 왔던 사망자 수에 대한 의문을 소설가적 솜씨로 탁월하게 제기하여 광주항쟁의 진상조차도 아직은 밝혀지지 않고 있음을 강력하게 말하고 있다.
정도상의 [십오방 이야기]는 학생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주인공 원태가 겪은 감옥생활의 이야기가 골조인데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이야기 거리는 감방 안에서 만난 만복이라는 살인범의 정신착란증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광주항쟁 당시 계엄군 소속으로 광주에 투입되었다가 우연하게 동생 만수를 만나는데 거기서 끔찍한 비극이 벌어진다. 즉 만복과 같이 갔던 소대장이 자기의 동생인 만수 즉 시민군을 총으로 쏘아 죽이는 모습을 곁에서 보게 되는 것이다. 이후 만복은 정신 이상이 되어 당시 계엄군 소대장이었던 인물을 찾아 복수하기 위해 헤매다가 찾지 못하고, 소대장 비슷한 사람을 쏘아 죽여 살인범으로 체포되어 들어왔는데, 이 인물의 삶의 역정을 신인답지 않은 능숙한 솜씨로 엮어내면서 광주항쟁의 의미나 역사적 맥락에 대한 대범한 검토를 시도하고 있다.
아무튼 그 동안 침묵에 빠져 있느니, 직무유기니 하는 비판을 듣던 소설가들에게 하나의 정당한 대답거리는 마련된 셈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일 것이다. 이제 보다 더 원숙하고 폭넓은 시각 속에 광주문제에 대한 소설적 천착이 계속되리라 여겨진다. 그 과정에서 이 소설집이 지니고 있는 몇 가지 흠 즉 아직도 쓸데없는 자괴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나, 산견되는 이야기의 도식성 (가령 밑도 끝도 없는 희망을 손쉽게 얘기하는 점을 들 수 있다)을 확실히 극복한 소설을 탄생시키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한층 믿음직스러운 일은 이 작품집 자체를 기획, 성과물로 제출한 기획진의 의도와 다부진 신예 소설가들의 패기이다.
2. 괴롭지만 즐거운 기억
양귀자의 『잘가라 밤이여』
이 땅에 '주민등록'을 한다는 것은 괴롭지만 즐거운 일이다. '괴롭지만 즐거운' 이란 말을 나는 서슴없이 썼지만 그 두 낱말에 오늘의 우리 현실 특히 현대사를 얹어보면 그렇게 쉽게 쓸 수 있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점에서 양귀자의 『잘가라 밤이여』는 작가가 고심참담하면서 이 땅에 주민등록한다는 것의 의미를 성공적으로 추궁한 빛나는 기록으로 여겨진다.
소설의 주인공 삼수생 우연에 가해진 이 시대의 제도적 외압을 자주적으로 까뭉개면서 장엄한 성년의 문턱에 도달해서 마침내 생산직 노동자의 구인 광고판 앞에서 눈부시도록 밝은 출구를 찾아냄으로써 종결되는 이 소설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직·간접적으로 억압하는 모순의 실상을 실감 있게 만난다. 그러나 중요한 일은 삶의 화폭으로 그 모순의 입질을 드러냄으로써 이제 삶의 출발점에 있는 청소년들뿐만 아니라, 물론 그 모순의 담지자인 우리 모두에게 삶을 반성적으로 되돌아보게 함은 물론 그 모순을 깨부수지 않으면 안 될 것임을 너무도 분명하게 깨닫게 해준다는 점에 이 소설의 미덕은 올연하다.
자분자분한 어조로 우리의 주인공 우연이 어리벙벙한 태도로 통과해 가는 삶의 현장은 대체로 다음의 세 가지이다.
첫번째는 가족주의 혹은 소시민성의 폐해이다. 이 소설에선 나성여관 안주인이면 우연의 어머니로서 때로 징글맞게 때로 너무도 씩씩하게 형상화되어 있는데 자신의 자식들에 대한 무분별한 집착과 기대로써 요약된다. 그 형상 속에는 미국병에 걸린 무능력한 가장을 사육(?)하면서 적당히 학대하고 그러면서도 남편의 외도를 용납지 않는 평균적인 어머니상이 있는가 하면 장남에 대한 터무니 없는 기대 그리고 실망, 딸에 대한 봉건적인 군림을 통해 자식들로부터 전혀 존경받지 못하는 어머니상이 뒤엉키면서 그 모순의 불꽃이 담겨 있다.
두번째는 이 사회를 관통하는 분단의 모순과 그것의 뿌리이다. 소설에선 나성여관의 장기 투숙객인 노인으로, 중동 취업자 찌르레기 아저씨 강용우로, 나성여관 둘째딸로 형상화되어 있는데 그들의 삶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우리 이웃의 얼굴 아니 우리 모두의 얼굴과 만나게 된다.
세번째는 이러한 모순과 정면으로 부닥쳐 가는 이른바 투쟁하는 사람들의 정신 저 안창에 놓인 내면풍경이다. 도연의 선배 이정하, 도연의 애인 홍정미는 물론 강용우의 고독한 적의는 이 땅에 칭칭 둘러쳐진 모순은 극복되어야 할 것 그리고 이를 위해 투쟁할 것을 은밀하게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이러한 우리 사회의 모순에 대한 단순한 검증에 머물지 않고 있다. 그러한 모순을 혁파해 나갈 미래의 인물로 이 소설의 주인공 우연과 그의 애인 보라, 그리고 도연의 애인 홍정미가 제시되는데 한결같이 속된 세상의 악습에 물들지 않은 물기 초롱초롱한 사랑으로 뭉쳐진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이 땅에 '주민등록'을 하기 위해 치러야 할 장엄한 성년제의 의미로써 중요한 성장소설 혹은 교양소설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이 땅에 산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묻는 리얼리즘 소설의 한 전형으로 기록될 만하다고 생각된다.
아쉬움이 있다면 삼수생 우연이 일 년의 기간 동안 치러낸 '고통의 축제'가 질·양의 측면에서 너무 과도하지 않았나 하는 안타까움이다. 우연을 너무 고생시켰다. 하지만 어쩔 것이냐. 오늘 우리 삶이 전쟁터인 것을.
(* 이 작품은 작가에 의해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재발간되었다.)
3. 젊은 소설가의 꼼꼼한 세상읽기
이용범의 『그 겨울의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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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이 글을 쓰기 전까지 이용범의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다. 어렴풋이 이름자를 내걸고 가끔 글을 쓰는 처지에 동료문인들의 작품을 인지 않는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결례이며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순전히 편집일을 하는 이재무 시인 때문이다. 그러나 실례된다는 것을 전제하고 이 글을 쓰겠다고 결심하고 작품을 읽으면서 필자는 심한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작품 하나하나에 가해진 꼼꼼한 소설가의 정직한 탐색이 필자에게 놀라움을 건네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용범은 삶의 구석구석 어느 후미진 곳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며, 그 서성거림이 삶의 전체적 화폭을 발견해 내고 전진해 가는 데 질곡으로 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서성거림이 전체적 삶의 총체성을 확보해 나가는 중요한 바탕이 되고 있다 이 점이 이 소설집의 작품을 읽으면서 필자가 느낀 가장 커다란 깨달음이다.
소설에서의 이러한 성실성은 우리에게 고통과 자책으로 다가왔던 80년대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 그물처럼 빼곡한 정치적 삶을 확실하게 깨닫게 해주는 각성제로 작용하고 있으며 그것은 우리가 살아내야 할 삶의 방향을 정지해 주는 푯대로 드러날 수 있는 것이리라.
주지하다시피 80년 개막 이후 엄청난 충격으로 우리의 문학은 자기의 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그 충격은 우리에게 삶의 총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여백을 허락하지 않았고 부서진 심장의 끝을 트러내며 다소 혼란스런 모습으로 대응케 하도록 강요했다고 하겠다. 그러나 단순한 시간의 집적이 아니라 거센 항쟁과 민중의 줄기찬 노력을 바탕으로 그러한 질곡을 총체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였고 그것은 우리에게 분단의 상황이라는 사실과 제국주의의 침탈 그리고 계급모순이라는 분명한 문제점을 각인시켜 내기에 이르렀다. 요약하면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의 문제를 통합된 문제로 인식하면서 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분명한 과제를 인식하기에 이른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과제의 인식이 그 동안 우리 민중의 가열찬 싸움의 결과이듯이 그 해결 또한 민중의 몫이다. 그런데 이 과제를 각기 자신의 부문 속에서 정직하게 떠맡고 이를 자신의 부문적 특수성을 최대한 확보하면서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소설로 한정시켜 말하자면 소설이라는 장르 그것이 포괄되는 문학운동, 문화운동의 맥락을 충분히 숙지하면서 그것이 큰 의미의 정치운동, 우리에게는 민족·민주운동의 맥락 속에 유기적으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은 자연스런 결론이다. 그런데 거기에서 일차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소설이라는 장르가 갖고 있는 특수성을 여하히 옳게 구현하고 있는가라는 점이다. 바로 그 점에서 이용범 소설이 가진 일차적인 의의가 획득되는 것이다. 이제 그의 작품을 중심으로 이런 문제를 이야기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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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범에 있어서도 이 시대는 '등화관제된 사회'이다. 초저녁의 불빛을 우리의 유년 시절로 돌아가서 규정해 보면 그것은 별이다. 하나 둘 불빛이 들어오는 것이야말로 캄캄한 암흑 속에서 사람이 살고 있다는 확실한 징표인 것이다. 그것은 처음 남의 떡이 커보인다는 것처럼 부러움이자 희망이며 동경이다. 자신의 삶의 공간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어떤 풍요로운 삶을 타인들이 향유하고 있다는 증표인 것이다. 그러나 점차 성숙해지면서 우리는 그 꿈을 버리고 보통의 삶이 주는 그 해괴망칙한 서글픔에 물들고 그리하여 보통의 우리가 살고 있는 사람살이의 확실한 깨달음으로 전환된다. 그 속엔 나와 우리의 삶에 대한 대강의 인식이 배어 나면서 우리가 살아야 할 현실의 미래가 깃들어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이 땅에서는 일제히 불을 끄고 거짓 침묵을 강요당하게 되었다. 대개 민방공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엄청난 공포감 속에 시행되는바 그것은 현실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것은 '강간처럼 폭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등화관제」란 작품이 얘기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점이다. 이 작품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작중화자인 나는 전쟁 중에 부모를 잃고 피난대열에 휩쓸렸다가 어느 낯선 오두막집을 간신히 찾아 거기서 기거한다. 그 집엔 징용갔다가 돌아온 미치광이가 자신의 딸과 기거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쟁의 와중에 일단의 사내들에 의해 그 소녀는 강간을 당한다. 하지만 목숨은 그것을 상처로 남기는 것만을 강요하고 피난민 대열에 합류시켜 마침내 청계천 하꼬방에서 작중화자인 내가 그 소녀를 아내로 삼고 또 그 미치광이를 아버지로 알고 30여 년을 살아오게 된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그날의 상처에 더욱 미쳐서 지금도 불이 꺼지는 등화관제 시간에는 참지 못하고 불을 끄라고 외치고 다닌다. 그런데 어느 등화관제날 작중화자의 딸이 폭행을 당하고 돌아온다. 처음에는 딸이 술을 마시고 돌아온 것으로 알았던 나는 대를 이어 지속되는 이 환난에 몸서리친다.
이런 얘기를 통해 작자는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일까. 우리에게 엄청난 폭력으로 다가오고 있는 시대의 허위, 시대가 강요하는 '짐승의 시간' 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등화관제란 어둠은 전쟁의 어둠과 하등 다를 바 없으며 그것은 우리 삶의 어느 곳에도 드리워져 있는 이데올로기의 캄캄한 숲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주인공 나의 모습은 우리에게 또 다른 미래를 예시해 준다. 다음의 대목이 그것이다.
'누가, 누가 널….'
하늘이 어지럽게 소용돌이쳤다 땅과 하늘, 하늘과 땅이 맞물려 어둠 속에서 범벅이 되었다. 난 얼른 딸애의 등을 가려주었다 미경이는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나는 한껏 심호흡을 하고 질끈 눈을 감았다. 자꾸만 눈물이 솟구쳤다.
"여보 불을 켜."
나는 울부짖었다. 그 소리는 약수동의 산날망까지 달려갔다간 성급히 되돌아왔다. 불이 켜졌다. 옆집에서도 불을 켰다. 불빛은 삽시간에 위에서 아래로 물결치듯 쏟아져 내렸다.
물론 이러한 행위자체로 이미 튼튼하게 길들여진 등화관제의 습성은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그러나 소설을 통해 그 어둠 속에 길들여진 이 시대의 어둠을 드러냄으로써 우리는 그 비극에 함몰되지 않고 싱싱하게 일어서는 젊은 작가혼을 만날 수 있다. 그것은 "아직 공습경보야, 병신들아"라는 말을 오히려 병신으로 만들면서 밝은 미래로 이어지는 것이다.
다소 익숙한 소설거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 시대의 질곡과 그 질곡의 피투성이 돌파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이러한 태도는 여타 작품에서도 그대로 변주된다. 「유형의 아침」이란 작품에서 작중화자인 공의철 기자가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다는 강박관념을 갖게 되면서부터 배설행위도 시원찮게 되고 말더듬이가 되어버리는 모습과 「녹색의 시간」에서 강제 징집되어 이른바 녹화사업의 이름으로 죽음에 이르는 모습이 그 비극적인 삶의 양태에서는 동일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의철 기자가 자신의 생각만큼 철저하게 감시당하고 있지 않음을 깨닫고 그것은 허위의식이 빚어낸 피해망상증임을 인식하는 모습이나 「녹색의 시간」에서 나의 친구인 경수가 자살로 위장되는 것에 대해 저항하는 모음은 그 극복의 또 다른 패러다임으로 밝혀진다.
요컨대 그는 시대의 아픔을 절망하지 않고 통과하면서 소설의 형식을 빌어 이 땅 위에 그 극복의 모습을 정성스럽게 기록해 놓은 것이다. 비극의 인식 그리고 각성의 구조를 갖고 있는 이러한 소설적 태도는 그런 점에서 의식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비극의 인식이 단순한 인식에 그치지 않고 그 비극적 삶 혹은 삶의 구조를 확실하게 타파해 가는 실천적 모습을 모여주는 작풍도 있다. 「몽유도원도」 「사람이 있는 풍경」이 그것이다. 또한 「당신의 등지」도 그러하다. 「사람이 있는 풍경」을 보자. 이 작품은 변두리 술집을 전전하다가 이제사 겨우 식당 한 칸을 마련하고 이른바 소시민적 삶의 또아리를 가까스로 틀고 있는 문향이라는 주인공이 철거민의 투쟁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그러한 동참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고 자신의 식당에서 우린 뼈다귀를 얻어다가 먹고 사는 한 꼬마의 삶에 대한 크나큰 애정이 바탕이 된 것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안락함보다는 이웃의 삶에 대한 뜨거운 애정에 기초한 것이어서 자못 의미심장하다. 제대로 정책적인 배려를 받지 못하고 이곳 저곳 단순한 환경미화를 이유로 쫓겨다니는 이웃의 삶이 자신의 삶과 하등 다를 바 없다는 건강한 각성은 그것 자체로도 매우 중요하지만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 삶이 총체적으로 짓눌리고 있는 모순의 타파에 소시민의 삶이 유력한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외침이어서 더욱 귀한 것이다.
"나보다 많이 알고 많이 배우신 여러분. 여러분이 모를 리가 있습니까? 제가 왜 여기에 서 있고 여러분이 왜 거기에 서 있는지를요. 내일은 달라질 겁니다.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한 걸음만 앞으로 나오세요. 딱 한 걸음씩만요."
이것은 철거민의 투쟁헌장에서 문향의 식당에서 뼈다귀를 얻어다 먹던 꼬마의 누이가 그 철거민의 투쟁이 갖는 의미를 사람들에게 설법하고 같이 동참할 것을 요청하는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두가 자기가 위치한 자리에서 한 걸음씩만 앞으로 발을 딛는 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어떠한 자리라 하더라도 좋은 세상을 이루는 데 있어서 한 발자국 진보적인 방향으로 나설 때 갖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말에 문향은 동참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문향의 고막까지 저리저리하게 파고들었다.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하지만 사람들은 한 걸음을 요구하는 그녀 앞에서 두 걸음을 뒤로 물러섰다. 문향은 힘껏 발을 내딛었다.
행렬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풀풀 날아오르는 분말이 문향의 얼굴로 덮쳐왔다. 문향은 허리를 꺾고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지반을 울리며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문향은 질끈 눈을 감고 부글거리는 속엣것을 토해냈다. 아릿한 현기증이 전신을 핥아갔다. 내일 아침은 또 이렇게 맑아올 것인가 새벽은 매음한 연기에 젖어 있고 새들은 또 울지 않을 것이다.
문향은 점점 멀어져 가는 행렬의 뒷자락에 시선을 모으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용이 길어졌지만 그 행렬에 참여하는 것은 소시민적 삶에 있어서의 고난을 의미한다. 우선은 눈 아리고 코 매운 현실적 몸의 고통이 있을 것이고 거기에 더하여 변두리의 술집을 전전하며 겨우 마련한 음식점이 거덜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용문에서 보듯 거듭거듭 좌절을 딛고 그 옳음의 세계 혹은 진정한 세계에의 몸담음은 우리로 하여금 소시민적 삶의 긍정적인 활로를 환하게 깨닫도록 해준다 하겠다.
아무튼 이용범의 작풍세계는 끝내 좌절에 머물지 않고 늘 미래를 향한 문으로 열려져 있다. 그 점이 우리에게 넉넉한 신뢰를 준다. 우리가 보통 맞닥뜨릴 수 있는 질곡을 차근차근하게 드러내 보이면서도 그 질곡을 질곡으로 놔두지 않고 극복해 나가는 인식과 실천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올곧게 보여주는바 우리는 그를 낙관주의적 짜가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3
이상에서 이용범의 작품세계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러나 단순히 낙관적인 전망에 닿아 있다고 해서 늘 좋은 작가인 것은 아니며 그것은 또한 쉽게 식상해 버릴 소지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에게서 그러한 흠집을 말하기보다 장점을 얘기하는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어서이다.
오가는 자동차의 행렬이 뜸해지자 나는 속도를 내었다 굽이를 에워갈 때마다 허연 솜털을 세운 산들이 길을 내주었다. 휘우듬히 굽은 산자락엔 애옥한 집들이 발자국처럼 찍혀 있고 길가에 늘어선 미루나무들이 스럭스럭 살을 부벼댔다.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나뭇가지들은 한 웅큼씩의 눈을 덜어내어 차유리에 쏟아놓았다. 나는 도로 위에 시선을 못질해 두고 바깥 풍경을 곁눈질했다. 정지해 버린 화면처럼 사방은 적요했고, 흩뿌리는 눈발은 앙가슴에 안겨 있기라도 하를 골짜기마다에 이드거니 고여 있었다.
-「당신의 둥지」 중에서
방은 비좁았다. 안방이라고는 하지만 장롱 위에 올려진 고리짝 옆으로 올곡한 거미줄이 걸려 있었고, 퀘퀘한 곰팡내가 자릿했다. 윗방과는 샛장지로 질러놓았고 방 굽도리에 발려진 신문지가 누렇게 떠있었다. 나는 목 밑의 단추를 풀고 셔츠를 벌룸하게 헤쳐놓았다. 추녀 끝에서 듣는 낙숫물 소리가 여간 뒤숭숭하게 들리지 않았다.
-「음지」 중에서
인용한 부분은 이용범의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배경묘사 장면이다. 언뜻 느껴지는 대로 행갈이만 하면 시라고 부를 만큼 아름답다. 물론 그 아름다움은, 상황과 배경의 섬세한 묘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언뜻 우리에게 낯설지만 기실은 우리들의 조상이 살면서 가꿔온 순수한 우리말의 구사가 일으키는 감동의 또 다른 이름이다. '으밀아밀', '을밋을밋', '휘스락휘스락', '곱송그리는', '희깔스런', '자밤자밤' 등등의 말들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구사하면서 우리에게 이야기할 때 우리 모두는 찬탄을 금치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말은 곧 우리의 삶이요, 또한 삶이 배어 있는 집과도 같은 것이라 할 때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이토록 계발하고 있는 그는 분명 우리 소설문학의 장래를 짊어지고 나갈 든든한 역량임에 틀림없으리라.
거기에 더하여 그의 소설이 주는 재미를 빼놓을 수 없다. 그의 데뷰작 「유형의 아침」이 보여주는 반전의 미학은 읽는 이로 하여금 한 순간도 숨쉴 틈도 주지 않게 긴박하게 전개되고 「서울로 가는 길」에서 보여주는 어느 룸펜의 행태는 흔한 비도덕적 삶도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착각에 빠져들 만큼 흥미진진하다. 요컨대 아무리 추하고 쓸데없는 이야기라도 이용범의 붓끝에서는 너무나 아름답고 아프도록 진실하다. 이를 일컬어 필자는 '소설의 재미'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런 점에서 그는 탁월한 이야기꾼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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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그에 대한 기대 대신 몇 마디 우려의 말을 덧붙이기로 하자.
앞에서 필자는 그가 대단히 능력 있는 이야기꾼이며, 일상적 삶과 정치적 삶의 문제를 통합시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꾸리는 점에서 대단히 뛰어나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그 말을 좀더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항용 신인은 그 작풍의 형식적 성숙도보다는 그 정신의 발랄함과 패기가 덧붙여져 있을 때 그 미래가 훨씬 밝다고 얘기된다. 이러한 말이 갖는 의미는 한 작가의 작품이 아직 정형화되기 전에 작가의 세계와 그 세계를 천착해 가는 태도의 폭과 깊이를 넓히고 심화시킬 것을 요구하는 데 있을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자기의 세계를 드러내고 90년대를 향해 날카로운 칼을 벼리고 있는 이용범의 작품세계도 그러한 점에서 아쉬움이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함이다. 앞에서도 얼핏 얘기한 바와 같이 그의 작품세계는, 일상적 삶에 대한 탐구가 정도에 지나치게 될 때 자칫하면 세태소설의 범주로 떨어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과정에서 작품의 전체적인 구조가 상투적으로 떨어질 위험이 다분히 있다. 가령 「푸른곰팡이」나 「녹색의 시간」이 그가 체험적으로 통과하면서 형상화한 작풍이라 할 때 그 속에 나오는 주인공의 삶이 소설의 구조 속에선 충분히 설득력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익숙한 대학의 풍경과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좀더 끈 의미를 가지려면 그 대학생들의 삶이 그렇게 분열될 수밖에 없는 사회 전반의 모순과 구조에 작가의 시선이 닿아야 할 텐데 그 점에서는 아주 미흡하다. 그 정은 「몽유도원도」에 나오는 대학생들의 모습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가령 효자동에 살고 있는 손씨 집에 들어간 미술과 학생이 그 벽에 그림운동을 전개한다는 것에는 별 무리가 없겠으나 그렇다고 단순히 그 학생이 그 그림의 복원을 위해 야밤에 물걸레 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너무나도 소박한 예술가의 모습뿐이다. 구청직원이 수성 페인트로 그림을 지을 만큼 무지하지도 않을 터이지만 소위 미술운동이 갖는 전체적인 민족민주운동의 맥락 속의 의미를 그렇게 속화시키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 점은 단순한 트집으로 여겨질 수도 있으나 그의 소설작품이 전체적으로 드러내는 세계가 좀더 진취적이지 않고 문제적이지 않다는 불만에서 비롯되는 것인바 이 점에 유의해 주었으면 한다. 이러한 필자의 욕심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의 소설작품 전체가 그야말로 아담하고 탄탄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불만이 있을 수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좀더 힘있는 전망에 연결되지 않고 있다는 얘기와 통하는 이이기이다.
물론 이 창작집이 단편 중심의 책이어서, 단편소설이 갖는 형식상의 한계를 유념하지 않는 바 아니지만 이제 그가 확실하게 자신의 세계를 넓게 확장하고 그 속에서 진정 자기가 복무해야 할 자리에 서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얘기이기도 하다.
모쪼록 그가 좀더 대범하게 큰 문제를 껴안고 몸부림치 길 빌어 보라. 적어도 그에게는 어떤 문제라도 과감하게 그러나 치밀하게 도달할 힘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의 창작집이 빛나는 출발점이길 빈다.
강형철
1. 일어서는 땅
80년 5월 광주항쟁 소설집
80년 5월 광주항쟁 소설집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일어서는 땅}은 한승원, 문순태 등 10인의 중단편 모음집이다.
책의 부제로 '80년 5월 광주항쟁 소설집'이라는 말을 당당하게 내보였다는 점에서 새삼 말이란 지배계층과 피 지배계층의 힘의 역학관계에서 전취, 소멸된다는 말을 떠올려 준단. 다시 말해서 80년, 저 청천벽력 같던 학살극의 상황 직후에 막연히 '사태'라는 말로 운위되거나 그도 못하면 어렴풋한 말로 냄새만 풍기면서 오그라들던 지적 풍토를 떠올려 주기도 한다는 말이다.
사실 그 동안 누구나 관통하고 싶었지만, 아니 누구나 그 깊은 상처를 통과하여 피가 묻어 있으면 묻은 채로 상처가 나면 상처 그대로 드러내 보여야 한다고 다짐했지만, 그 다짐의 당위성은 때로 이 땅의 작가, 시인들에게 희망보다는 절망을, 미래보다는 늘 어둡고 칙칙한 어제에 물귀신처럼 밀어 넣었다는 짐에서 이에 대한 성숙한 통과의례가 화급히 요청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은 쉽지 않았다. 결국 이러한 공백은 주지하다시피 일군의 젊은 시인들이 나름대로 성실히 견뎌내고 있었으며 또한 이들이 중심이 되어 동인지들을 간행하면서 일정한 거점을 확보하면서 그 공백을 메꾼 바 있다. 그러한 성과뿐 중의 하나가 인동에서 간행한 {누가 그대 큰 이름 지우랴}라는 광주항쟁 시선집이었다.
편집과정에서의 다소 작위적인 흠집을 제외하고는 이 책이 견뎌준 중량은 대단한 바 있다. 그러나 이번에 간행된 {일어서는 땅}은 문화적 공백과 이후의 소설적 진로를 가늠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길잡이가 될 것임에 틀림없으리라 여겨진다.
{일어서는 땅}에는 11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다. 80년대의 중요한 작가로 부각된 반 있는 임철우, 윤정모, 김남일을 위시하여 광주항쟁 당시 전남매일신문사 부국장으로 일하던 소설가 문순태는 물론 80년대 이후 소설가로 등장한 김중태, 이영옥, 김유택, 박호재, 정도상 제씨들은 각각 나름대로 성실한 얘기를 가다듬어 민족사적 질곡을 향해 정면돌파를 기도하고 있다.
이 작품들 중 문순태의 [일어서는 땅], 임철우의 [봄날], 윤정모의 [밤길], 김중태의 [모당]등은 이미 각종 문예지에 실려 심란한 충격을 준 바 있는데 이번에 소설집으로 묶이면서 부분부분 개작을 하여 신작과 다름없는 작품들로 선뵈고 있다. 이러한 작품의 손질행위는 발표 당시의 지면이 갖고 있던 제약에서 풀려난다는 의미도 있을 것이고 또한 작가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자유(이것은 민중의 힘에 비례한다)의 한 척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집의 중도한 성과로는 전혀 새로운 작가들의 훨씬 더 진솔한 정서를 보단 확고한 시선으로 전휘하고 있음을 드러내보여 준다는 점에 있다 신작들을 순서대로 살펴보자.
박호재의 [다시 그 거리에 서면]은 광주 외곽지역에 사는 여교사인 지숙의 눈을 통해 항쟁 당시의 광주상황과 그 상황 속에서의 가족사적 불행이 리얼하게 묘사됨으로써 항쟁 자체가 보통의 일상인들을 강타한 구석구석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이영옥의 [남으로 가는 헬리콥터]는 작가의 말에 의지해 살피건대, 항쟁 당시 인근 도시에서 교사로서 재직하던 자의 솔직한 자기 점검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띄고 있다. 이 점은 결국 그 당시 현장 이외에 있던 사람들이 '거기 서 있었는가'라는 질문 앞에 자유롭지 않아 자괴감에 빠져 있는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하나의 교두보라 하겠는데 작품의 말미 부분이 한없이 밝고 힘차게 매듭지어져 있음이 특히 눈에 띈다.
김남일의 [망명의 끝]은 10·26이후 학생운동권의 한인자가 수배되어 잠행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잠행하는 과정에서 풍문으로만 듣던 항쟁을 풍문식으로 기술하는 형식을 취하다가 결국 체포되면서 그 풍문의 실체에 몸던져 섞여지면서 다시 오늘의 역사로 돌아오는 과정이 실감있게 그려지고 있다. 마지막 부분에서 "아니다, 끝이 아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고 깨달으면서 들판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는 벼들에서 희망을 찾아내는 것은 단지 체포된 자의 막연한 억지 희망이 아닌, 자기 땅에 대한 굳건한 신뢰의 표현임에 틀림없다.
김유택의 [목부 이야기]는 광주항쟁 이후 끊임없는 격론의 대상이 되어 왔던 사망자 수에 대한 의문을 소설가적 솜씨로 탁월하게 제기하여 광주항쟁의 진상조차도 아직은 밝혀지지 않고 있음을 강력하게 말하고 있다.
정도상의 [십오방 이야기]는 학생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주인공 원태가 겪은 감옥생활의 이야기가 골조인데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이야기 거리는 감방 안에서 만난 만복이라는 살인범의 정신착란증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광주항쟁 당시 계엄군 소속으로 광주에 투입되었다가 우연하게 동생 만수를 만나는데 거기서 끔찍한 비극이 벌어진다. 즉 만복과 같이 갔던 소대장이 자기의 동생인 만수 즉 시민군을 총으로 쏘아 죽이는 모습을 곁에서 보게 되는 것이다. 이후 만복은 정신 이상이 되어 당시 계엄군 소대장이었던 인물을 찾아 복수하기 위해 헤매다가 찾지 못하고, 소대장 비슷한 사람을 쏘아 죽여 살인범으로 체포되어 들어왔는데, 이 인물의 삶의 역정을 신인답지 않은 능숙한 솜씨로 엮어내면서 광주항쟁의 의미나 역사적 맥락에 대한 대범한 검토를 시도하고 있다.
아무튼 그 동안 침묵에 빠져 있느니, 직무유기니 하는 비판을 듣던 소설가들에게 하나의 정당한 대답거리는 마련된 셈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일 것이다. 이제 보다 더 원숙하고 폭넓은 시각 속에 광주문제에 대한 소설적 천착이 계속되리라 여겨진다. 그 과정에서 이 소설집이 지니고 있는 몇 가지 흠 즉 아직도 쓸데없는 자괴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나, 산견되는 이야기의 도식성 (가령 밑도 끝도 없는 희망을 손쉽게 얘기하는 점을 들 수 있다)을 확실히 극복한 소설을 탄생시키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한층 믿음직스러운 일은 이 작품집 자체를 기획, 성과물로 제출한 기획진의 의도와 다부진 신예 소설가들의 패기이다.
2. 괴롭지만 즐거운 기억
양귀자의 『잘가라 밤이여』
이 땅에 '주민등록'을 한다는 것은 괴롭지만 즐거운 일이다. '괴롭지만 즐거운' 이란 말을 나는 서슴없이 썼지만 그 두 낱말에 오늘의 우리 현실 특히 현대사를 얹어보면 그렇게 쉽게 쓸 수 있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점에서 양귀자의 『잘가라 밤이여』는 작가가 고심참담하면서 이 땅에 주민등록한다는 것의 의미를 성공적으로 추궁한 빛나는 기록으로 여겨진다.
소설의 주인공 삼수생 우연에 가해진 이 시대의 제도적 외압을 자주적으로 까뭉개면서 장엄한 성년의 문턱에 도달해서 마침내 생산직 노동자의 구인 광고판 앞에서 눈부시도록 밝은 출구를 찾아냄으로써 종결되는 이 소설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직·간접적으로 억압하는 모순의 실상을 실감 있게 만난다. 그러나 중요한 일은 삶의 화폭으로 그 모순의 입질을 드러냄으로써 이제 삶의 출발점에 있는 청소년들뿐만 아니라, 물론 그 모순의 담지자인 우리 모두에게 삶을 반성적으로 되돌아보게 함은 물론 그 모순을 깨부수지 않으면 안 될 것임을 너무도 분명하게 깨닫게 해준다는 점에 이 소설의 미덕은 올연하다.
자분자분한 어조로 우리의 주인공 우연이 어리벙벙한 태도로 통과해 가는 삶의 현장은 대체로 다음의 세 가지이다.
첫번째는 가족주의 혹은 소시민성의 폐해이다. 이 소설에선 나성여관 안주인이면 우연의 어머니로서 때로 징글맞게 때로 너무도 씩씩하게 형상화되어 있는데 자신의 자식들에 대한 무분별한 집착과 기대로써 요약된다. 그 형상 속에는 미국병에 걸린 무능력한 가장을 사육(?)하면서 적당히 학대하고 그러면서도 남편의 외도를 용납지 않는 평균적인 어머니상이 있는가 하면 장남에 대한 터무니 없는 기대 그리고 실망, 딸에 대한 봉건적인 군림을 통해 자식들로부터 전혀 존경받지 못하는 어머니상이 뒤엉키면서 그 모순의 불꽃이 담겨 있다.
두번째는 이 사회를 관통하는 분단의 모순과 그것의 뿌리이다. 소설에선 나성여관의 장기 투숙객인 노인으로, 중동 취업자 찌르레기 아저씨 강용우로, 나성여관 둘째딸로 형상화되어 있는데 그들의 삶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우리 이웃의 얼굴 아니 우리 모두의 얼굴과 만나게 된다.
세번째는 이러한 모순과 정면으로 부닥쳐 가는 이른바 투쟁하는 사람들의 정신 저 안창에 놓인 내면풍경이다. 도연의 선배 이정하, 도연의 애인 홍정미는 물론 강용우의 고독한 적의는 이 땅에 칭칭 둘러쳐진 모순은 극복되어야 할 것 그리고 이를 위해 투쟁할 것을 은밀하게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이러한 우리 사회의 모순에 대한 단순한 검증에 머물지 않고 있다. 그러한 모순을 혁파해 나갈 미래의 인물로 이 소설의 주인공 우연과 그의 애인 보라, 그리고 도연의 애인 홍정미가 제시되는데 한결같이 속된 세상의 악습에 물들지 않은 물기 초롱초롱한 사랑으로 뭉쳐진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이 땅에 '주민등록'을 하기 위해 치러야 할 장엄한 성년제의 의미로써 중요한 성장소설 혹은 교양소설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이 땅에 산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묻는 리얼리즘 소설의 한 전형으로 기록될 만하다고 생각된다.
아쉬움이 있다면 삼수생 우연이 일 년의 기간 동안 치러낸 '고통의 축제'가 질·양의 측면에서 너무 과도하지 않았나 하는 안타까움이다. 우연을 너무 고생시켰다. 하지만 어쩔 것이냐. 오늘 우리 삶이 전쟁터인 것을.
(* 이 작품은 작가에 의해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재발간되었다.)
3. 젊은 소설가의 꼼꼼한 세상읽기
이용범의 『그 겨울의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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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이 글을 쓰기 전까지 이용범의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다. 어렴풋이 이름자를 내걸고 가끔 글을 쓰는 처지에 동료문인들의 작품을 인지 않는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결례이며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순전히 편집일을 하는 이재무 시인 때문이다. 그러나 실례된다는 것을 전제하고 이 글을 쓰겠다고 결심하고 작품을 읽으면서 필자는 심한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작품 하나하나에 가해진 꼼꼼한 소설가의 정직한 탐색이 필자에게 놀라움을 건네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용범은 삶의 구석구석 어느 후미진 곳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며, 그 서성거림이 삶의 전체적 화폭을 발견해 내고 전진해 가는 데 질곡으로 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서성거림이 전체적 삶의 총체성을 확보해 나가는 중요한 바탕이 되고 있다 이 점이 이 소설집의 작품을 읽으면서 필자가 느낀 가장 커다란 깨달음이다.
소설에서의 이러한 성실성은 우리에게 고통과 자책으로 다가왔던 80년대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 그물처럼 빼곡한 정치적 삶을 확실하게 깨닫게 해주는 각성제로 작용하고 있으며 그것은 우리가 살아내야 할 삶의 방향을 정지해 주는 푯대로 드러날 수 있는 것이리라.
주지하다시피 80년 개막 이후 엄청난 충격으로 우리의 문학은 자기의 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그 충격은 우리에게 삶의 총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여백을 허락하지 않았고 부서진 심장의 끝을 트러내며 다소 혼란스런 모습으로 대응케 하도록 강요했다고 하겠다. 그러나 단순한 시간의 집적이 아니라 거센 항쟁과 민중의 줄기찬 노력을 바탕으로 그러한 질곡을 총체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였고 그것은 우리에게 분단의 상황이라는 사실과 제국주의의 침탈 그리고 계급모순이라는 분명한 문제점을 각인시켜 내기에 이르렀다. 요약하면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의 문제를 통합된 문제로 인식하면서 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분명한 과제를 인식하기에 이른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과제의 인식이 그 동안 우리 민중의 가열찬 싸움의 결과이듯이 그 해결 또한 민중의 몫이다. 그런데 이 과제를 각기 자신의 부문 속에서 정직하게 떠맡고 이를 자신의 부문적 특수성을 최대한 확보하면서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소설로 한정시켜 말하자면 소설이라는 장르 그것이 포괄되는 문학운동, 문화운동의 맥락을 충분히 숙지하면서 그것이 큰 의미의 정치운동, 우리에게는 민족·민주운동의 맥락 속에 유기적으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은 자연스런 결론이다. 그런데 거기에서 일차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소설이라는 장르가 갖고 있는 특수성을 여하히 옳게 구현하고 있는가라는 점이다. 바로 그 점에서 이용범 소설이 가진 일차적인 의의가 획득되는 것이다. 이제 그의 작품을 중심으로 이런 문제를 이야기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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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범에 있어서도 이 시대는 '등화관제된 사회'이다. 초저녁의 불빛을 우리의 유년 시절로 돌아가서 규정해 보면 그것은 별이다. 하나 둘 불빛이 들어오는 것이야말로 캄캄한 암흑 속에서 사람이 살고 있다는 확실한 징표인 것이다. 그것은 처음 남의 떡이 커보인다는 것처럼 부러움이자 희망이며 동경이다. 자신의 삶의 공간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어떤 풍요로운 삶을 타인들이 향유하고 있다는 증표인 것이다. 그러나 점차 성숙해지면서 우리는 그 꿈을 버리고 보통의 삶이 주는 그 해괴망칙한 서글픔에 물들고 그리하여 보통의 우리가 살고 있는 사람살이의 확실한 깨달음으로 전환된다. 그 속엔 나와 우리의 삶에 대한 대강의 인식이 배어 나면서 우리가 살아야 할 현실의 미래가 깃들어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이 땅에서는 일제히 불을 끄고 거짓 침묵을 강요당하게 되었다. 대개 민방공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엄청난 공포감 속에 시행되는바 그것은 현실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것은 '강간처럼 폭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등화관제」란 작품이 얘기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점이다. 이 작품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작중화자인 나는 전쟁 중에 부모를 잃고 피난대열에 휩쓸렸다가 어느 낯선 오두막집을 간신히 찾아 거기서 기거한다. 그 집엔 징용갔다가 돌아온 미치광이가 자신의 딸과 기거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쟁의 와중에 일단의 사내들에 의해 그 소녀는 강간을 당한다. 하지만 목숨은 그것을 상처로 남기는 것만을 강요하고 피난민 대열에 합류시켜 마침내 청계천 하꼬방에서 작중화자인 내가 그 소녀를 아내로 삼고 또 그 미치광이를 아버지로 알고 30여 년을 살아오게 된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그날의 상처에 더욱 미쳐서 지금도 불이 꺼지는 등화관제 시간에는 참지 못하고 불을 끄라고 외치고 다닌다. 그런데 어느 등화관제날 작중화자의 딸이 폭행을 당하고 돌아온다. 처음에는 딸이 술을 마시고 돌아온 것으로 알았던 나는 대를 이어 지속되는 이 환난에 몸서리친다.
이런 얘기를 통해 작자는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일까. 우리에게 엄청난 폭력으로 다가오고 있는 시대의 허위, 시대가 강요하는 '짐승의 시간' 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등화관제란 어둠은 전쟁의 어둠과 하등 다를 바 없으며 그것은 우리 삶의 어느 곳에도 드리워져 있는 이데올로기의 캄캄한 숲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주인공 나의 모습은 우리에게 또 다른 미래를 예시해 준다. 다음의 대목이 그것이다.
'누가, 누가 널….'
하늘이 어지럽게 소용돌이쳤다 땅과 하늘, 하늘과 땅이 맞물려 어둠 속에서 범벅이 되었다. 난 얼른 딸애의 등을 가려주었다 미경이는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나는 한껏 심호흡을 하고 질끈 눈을 감았다. 자꾸만 눈물이 솟구쳤다.
"여보 불을 켜."
나는 울부짖었다. 그 소리는 약수동의 산날망까지 달려갔다간 성급히 되돌아왔다. 불이 켜졌다. 옆집에서도 불을 켰다. 불빛은 삽시간에 위에서 아래로 물결치듯 쏟아져 내렸다.
물론 이러한 행위자체로 이미 튼튼하게 길들여진 등화관제의 습성은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그러나 소설을 통해 그 어둠 속에 길들여진 이 시대의 어둠을 드러냄으로써 우리는 그 비극에 함몰되지 않고 싱싱하게 일어서는 젊은 작가혼을 만날 수 있다. 그것은 "아직 공습경보야, 병신들아"라는 말을 오히려 병신으로 만들면서 밝은 미래로 이어지는 것이다.
다소 익숙한 소설거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 시대의 질곡과 그 질곡의 피투성이 돌파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이러한 태도는 여타 작품에서도 그대로 변주된다. 「유형의 아침」이란 작품에서 작중화자인 공의철 기자가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다는 강박관념을 갖게 되면서부터 배설행위도 시원찮게 되고 말더듬이가 되어버리는 모습과 「녹색의 시간」에서 강제 징집되어 이른바 녹화사업의 이름으로 죽음에 이르는 모습이 그 비극적인 삶의 양태에서는 동일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의철 기자가 자신의 생각만큼 철저하게 감시당하고 있지 않음을 깨닫고 그것은 허위의식이 빚어낸 피해망상증임을 인식하는 모습이나 「녹색의 시간」에서 나의 친구인 경수가 자살로 위장되는 것에 대해 저항하는 모음은 그 극복의 또 다른 패러다임으로 밝혀진다.
요컨대 그는 시대의 아픔을 절망하지 않고 통과하면서 소설의 형식을 빌어 이 땅 위에 그 극복의 모습을 정성스럽게 기록해 놓은 것이다. 비극의 인식 그리고 각성의 구조를 갖고 있는 이러한 소설적 태도는 그런 점에서 의식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비극의 인식이 단순한 인식에 그치지 않고 그 비극적 삶 혹은 삶의 구조를 확실하게 타파해 가는 실천적 모습을 모여주는 작풍도 있다. 「몽유도원도」 「사람이 있는 풍경」이 그것이다. 또한 「당신의 등지」도 그러하다. 「사람이 있는 풍경」을 보자. 이 작품은 변두리 술집을 전전하다가 이제사 겨우 식당 한 칸을 마련하고 이른바 소시민적 삶의 또아리를 가까스로 틀고 있는 문향이라는 주인공이 철거민의 투쟁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그러한 동참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고 자신의 식당에서 우린 뼈다귀를 얻어다가 먹고 사는 한 꼬마의 삶에 대한 크나큰 애정이 바탕이 된 것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안락함보다는 이웃의 삶에 대한 뜨거운 애정에 기초한 것이어서 자못 의미심장하다. 제대로 정책적인 배려를 받지 못하고 이곳 저곳 단순한 환경미화를 이유로 쫓겨다니는 이웃의 삶이 자신의 삶과 하등 다를 바 없다는 건강한 각성은 그것 자체로도 매우 중요하지만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 삶이 총체적으로 짓눌리고 있는 모순의 타파에 소시민의 삶이 유력한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외침이어서 더욱 귀한 것이다.
"나보다 많이 알고 많이 배우신 여러분. 여러분이 모를 리가 있습니까? 제가 왜 여기에 서 있고 여러분이 왜 거기에 서 있는지를요. 내일은 달라질 겁니다.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한 걸음만 앞으로 나오세요. 딱 한 걸음씩만요."
이것은 철거민의 투쟁헌장에서 문향의 식당에서 뼈다귀를 얻어다 먹던 꼬마의 누이가 그 철거민의 투쟁이 갖는 의미를 사람들에게 설법하고 같이 동참할 것을 요청하는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두가 자기가 위치한 자리에서 한 걸음씩만 앞으로 발을 딛는 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어떠한 자리라 하더라도 좋은 세상을 이루는 데 있어서 한 발자국 진보적인 방향으로 나설 때 갖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말에 문향은 동참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문향의 고막까지 저리저리하게 파고들었다.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하지만 사람들은 한 걸음을 요구하는 그녀 앞에서 두 걸음을 뒤로 물러섰다. 문향은 힘껏 발을 내딛었다.
행렬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풀풀 날아오르는 분말이 문향의 얼굴로 덮쳐왔다. 문향은 허리를 꺾고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지반을 울리며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문향은 질끈 눈을 감고 부글거리는 속엣것을 토해냈다. 아릿한 현기증이 전신을 핥아갔다. 내일 아침은 또 이렇게 맑아올 것인가 새벽은 매음한 연기에 젖어 있고 새들은 또 울지 않을 것이다.
문향은 점점 멀어져 가는 행렬의 뒷자락에 시선을 모으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용이 길어졌지만 그 행렬에 참여하는 것은 소시민적 삶에 있어서의 고난을 의미한다. 우선은 눈 아리고 코 매운 현실적 몸의 고통이 있을 것이고 거기에 더하여 변두리의 술집을 전전하며 겨우 마련한 음식점이 거덜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용문에서 보듯 거듭거듭 좌절을 딛고 그 옳음의 세계 혹은 진정한 세계에의 몸담음은 우리로 하여금 소시민적 삶의 긍정적인 활로를 환하게 깨닫도록 해준다 하겠다.
아무튼 이용범의 작풍세계는 끝내 좌절에 머물지 않고 늘 미래를 향한 문으로 열려져 있다. 그 점이 우리에게 넉넉한 신뢰를 준다. 우리가 보통 맞닥뜨릴 수 있는 질곡을 차근차근하게 드러내 보이면서도 그 질곡을 질곡으로 놔두지 않고 극복해 나가는 인식과 실천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올곧게 보여주는바 우리는 그를 낙관주의적 짜가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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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이용범의 작품세계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러나 단순히 낙관적인 전망에 닿아 있다고 해서 늘 좋은 작가인 것은 아니며 그것은 또한 쉽게 식상해 버릴 소지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에게서 그러한 흠집을 말하기보다 장점을 얘기하는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어서이다.
오가는 자동차의 행렬이 뜸해지자 나는 속도를 내었다 굽이를 에워갈 때마다 허연 솜털을 세운 산들이 길을 내주었다. 휘우듬히 굽은 산자락엔 애옥한 집들이 발자국처럼 찍혀 있고 길가에 늘어선 미루나무들이 스럭스럭 살을 부벼댔다.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나뭇가지들은 한 웅큼씩의 눈을 덜어내어 차유리에 쏟아놓았다. 나는 도로 위에 시선을 못질해 두고 바깥 풍경을 곁눈질했다. 정지해 버린 화면처럼 사방은 적요했고, 흩뿌리는 눈발은 앙가슴에 안겨 있기라도 하를 골짜기마다에 이드거니 고여 있었다.
-「당신의 둥지」 중에서
방은 비좁았다. 안방이라고는 하지만 장롱 위에 올려진 고리짝 옆으로 올곡한 거미줄이 걸려 있었고, 퀘퀘한 곰팡내가 자릿했다. 윗방과는 샛장지로 질러놓았고 방 굽도리에 발려진 신문지가 누렇게 떠있었다. 나는 목 밑의 단추를 풀고 셔츠를 벌룸하게 헤쳐놓았다. 추녀 끝에서 듣는 낙숫물 소리가 여간 뒤숭숭하게 들리지 않았다.
-「음지」 중에서
인용한 부분은 이용범의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배경묘사 장면이다. 언뜻 느껴지는 대로 행갈이만 하면 시라고 부를 만큼 아름답다. 물론 그 아름다움은, 상황과 배경의 섬세한 묘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언뜻 우리에게 낯설지만 기실은 우리들의 조상이 살면서 가꿔온 순수한 우리말의 구사가 일으키는 감동의 또 다른 이름이다. '으밀아밀', '을밋을밋', '휘스락휘스락', '곱송그리는', '희깔스런', '자밤자밤' 등등의 말들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구사하면서 우리에게 이야기할 때 우리 모두는 찬탄을 금치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말은 곧 우리의 삶이요, 또한 삶이 배어 있는 집과도 같은 것이라 할 때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이토록 계발하고 있는 그는 분명 우리 소설문학의 장래를 짊어지고 나갈 든든한 역량임에 틀림없으리라.
거기에 더하여 그의 소설이 주는 재미를 빼놓을 수 없다. 그의 데뷰작 「유형의 아침」이 보여주는 반전의 미학은 읽는 이로 하여금 한 순간도 숨쉴 틈도 주지 않게 긴박하게 전개되고 「서울로 가는 길」에서 보여주는 어느 룸펜의 행태는 흔한 비도덕적 삶도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착각에 빠져들 만큼 흥미진진하다. 요컨대 아무리 추하고 쓸데없는 이야기라도 이용범의 붓끝에서는 너무나 아름답고 아프도록 진실하다. 이를 일컬어 필자는 '소설의 재미'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런 점에서 그는 탁월한 이야기꾼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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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그에 대한 기대 대신 몇 마디 우려의 말을 덧붙이기로 하자.
앞에서 필자는 그가 대단히 능력 있는 이야기꾼이며, 일상적 삶과 정치적 삶의 문제를 통합시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꾸리는 점에서 대단히 뛰어나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그 말을 좀더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항용 신인은 그 작풍의 형식적 성숙도보다는 그 정신의 발랄함과 패기가 덧붙여져 있을 때 그 미래가 훨씬 밝다고 얘기된다. 이러한 말이 갖는 의미는 한 작가의 작품이 아직 정형화되기 전에 작가의 세계와 그 세계를 천착해 가는 태도의 폭과 깊이를 넓히고 심화시킬 것을 요구하는 데 있을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자기의 세계를 드러내고 90년대를 향해 날카로운 칼을 벼리고 있는 이용범의 작품세계도 그러한 점에서 아쉬움이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함이다. 앞에서도 얼핏 얘기한 바와 같이 그의 작품세계는, 일상적 삶에 대한 탐구가 정도에 지나치게 될 때 자칫하면 세태소설의 범주로 떨어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과정에서 작품의 전체적인 구조가 상투적으로 떨어질 위험이 다분히 있다. 가령 「푸른곰팡이」나 「녹색의 시간」이 그가 체험적으로 통과하면서 형상화한 작풍이라 할 때 그 속에 나오는 주인공의 삶이 소설의 구조 속에선 충분히 설득력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익숙한 대학의 풍경과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좀더 끈 의미를 가지려면 그 대학생들의 삶이 그렇게 분열될 수밖에 없는 사회 전반의 모순과 구조에 작가의 시선이 닿아야 할 텐데 그 점에서는 아주 미흡하다. 그 정은 「몽유도원도」에 나오는 대학생들의 모습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가령 효자동에 살고 있는 손씨 집에 들어간 미술과 학생이 그 벽에 그림운동을 전개한다는 것에는 별 무리가 없겠으나 그렇다고 단순히 그 학생이 그 그림의 복원을 위해 야밤에 물걸레 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너무나도 소박한 예술가의 모습뿐이다. 구청직원이 수성 페인트로 그림을 지을 만큼 무지하지도 않을 터이지만 소위 미술운동이 갖는 전체적인 민족민주운동의 맥락 속의 의미를 그렇게 속화시키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 점은 단순한 트집으로 여겨질 수도 있으나 그의 소설작품이 전체적으로 드러내는 세계가 좀더 진취적이지 않고 문제적이지 않다는 불만에서 비롯되는 것인바 이 점에 유의해 주었으면 한다. 이러한 필자의 욕심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의 소설작품 전체가 그야말로 아담하고 탄탄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불만이 있을 수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좀더 힘있는 전망에 연결되지 않고 있다는 얘기와 통하는 이이기이다.
물론 이 창작집이 단편 중심의 책이어서, 단편소설이 갖는 형식상의 한계를 유념하지 않는 바 아니지만 이제 그가 확실하게 자신의 세계를 넓게 확장하고 그 속에서 진정 자기가 복무해야 할 자리에 서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얘기이기도 하다.
모쪼록 그가 좀더 대범하게 큰 문제를 껴안고 몸부림치 길 빌어 보라. 적어도 그에게는 어떤 문제라도 과감하게 그러나 치밀하게 도달할 힘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의 창작집이 빛나는 출발점이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