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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자료실

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한청련과 윤한봉을 찾아.윤정모(말, 1989. 9)

본문

■ 윤정모의 아메리카대륙 기행①

한청련과 윤한봉을 찾아

윤정모(소설가)



반미소설『고삐』를 쓴 윤정모씨가 지난 6월 미국기행에 올랐다. 그가‘제국의 안뜰’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무엇일까? 이미 방북교포가 4천명이 넘는다는 재미교포사회와 해외동포운동의 현주소 그리고‘산골아낙’에 처음 직접 비친 미국사회의 모습, 이러한 것들이 윤정모씨가 미국에서 보낸 제1신이다.

‘제국의 안뜰’에 거지와 마약이

산골 촌아낙이 비행기를 타고 취재를 떠난다 싶자 마치 학생 옷을 빌려입은 듯 띰띰하고 낮뜨거웠다. 그러나 배웅 나온 벗들이“마침내 제국의 안뜰을 가는가?” 라거나“기왕에 가는길, 얼마나 잘 사는지 똑똑히 보고 오라”는 말들을 선물처럼 안겨주었을 때 은근히 의무감이랄까, 자신감이 뭉쳐지기도 했다. 그런데 L.A공항에 내린 순간 나는 그만 되돌아가고 싶었다. 경찰인지 보안관인지 모두 권총을 차고는 유독 내 짐만을 낱낱이 검사하는가 하면 알아듣지 못할 질문들도 얼먹이는 것이었다. 한국인은 어디에서나 이런 대접을 받는가? 신경과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그 까다로운 검사를 참아냈다.

공항을 나오자 고향후배가 마중나와 있었다. 그는 내가 관광차 온 것으로 알았는지 집으로 가기 전 먼저 영화의 거리 헐리웃부터 둘러보자고 했다. 포장도로에 어느 영화배우의 발자국이 찍혀 있는데 그것이 자랑거리라고 했다. 우습게도 그것을 보러온 관광객들이 나말고도 많았다. 나는 다시 자존심을 회복하고 그들을 비웃었다. 얼마나 문화가 없는 나라면 배우의 발자국을 자랑으로 삼을까. 다음은 백인들의 거주지인 호화주택가로 향했다. 거리 곳곳엔 이상스레 키가 큰 열대식물이 머리를 풀고 하늘로 치솟았고, 넓은 잔디밭이나 꽃밭엔 곳곳에 수도꼭지가 박혀 내내 물을 뿜어주고 있었다. 사막 위에 만들어졌다는 녹지대와 궁전같은 집들은 멀고먼 콜로라도에서 끌어 온 물로 그렇게 지탱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후배가 말했다.“여긴 흑인들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 당장 경찰이 따라붙지요. 여기선 강도사건만 나도 그 즉시 수십대의 경찰차가 와서 거리를 차단하고, 헬기가 뜨고 생 야단을 부리며 기어이 범인을 잡아내지요. 신문에서도 대서특필 하구요.

그러나 흑인이나 우리같은 소수민족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면 사건 다 지난 뒤에 어슬렁거리며 나타나고 신문에도 단 한줄 나지 않습니다.”오후 3시쯤 후배의 집으로 향했다. 그는 내가 실망할까봐“집값이 싸서 흑인거주지역에 살아요”라고 죄스럽게 말했다. 30분쯤 달리자 벌써 낡고 헐어버린 집들, 거리의 쓰레기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왕래가 뜸해서일까, 괴괴하고 살벌한 공기가 거리와 주택지를 감싸고 있었다. 마약과 가난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흑인거리. 같은 빈민들이지만 생명력이 끓어넘치는 서울의 창신동이나 난곡동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분위기였다. 또한 빈부격차가 심한 자본주의 나라에선 당연한 현상이겠지만 가끔 비닐봉지에 누더기를 담아 다니는 거지들이 눈에 뛴다는 것도 나에겐 새삼스러웠다.“실업자들은 국가에서 보조금을 준다더만 거지가 있네?”“월 4백불씩 받습니다만 방 하나를 빌어도 보통 5백불입니다. 그러니 집없이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이 저렇게 많은 거지요.”그때 우리 차를 앞질러 경찰차와 엠블란스가 경적을 울리며 지나갔다. 미국에 온지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여러 차례 듣게 된 경찰차의 경적. 5분이나 10분 간격으로 그 경적 소리를 들을 만큼 미국엔 사고와 범죄가 많다고 했다.

인종차별과 총격전의 거리

6월 24일 주말의 밤이었다. 후배의 약혼녀와 나는 밤이 새도록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새벽이 오고 있을 때 바깥거리에서 총성이 들려왔다. 두 발, 세 발, 창밖을 내다보았다. 놀랍게도 바로 길건너 주유소 앞에서 흑인들이 총격전을 벌이고 있었고, 이미 한 사람은 피를 흘리고 쓰러졌고, 또 한사람은 배를 움켜잡고 쓰러지는 중이었다. 내가 졸도할 지경으로 뻣뻣이 창틀을 잡고 있자 후배의 약혼녀가 급히 전기불을 끄면서 어서 엎드리라고 했다. 혹시 목격자를 향해 총을 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나는 완전히 인사불성으로 창틀밑에 주저앉아 아이 이름만 불러댔다. 총성이 멈추자 후배가 창밖을 내다보며, 시체들은 그냥 널부러져 있는데 주유소에서도 나와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게 자주 앵앵거리며 거리를 질주하던 경찰차는 뒤늦게야 나타나서 시체에 보자기를 씌웠고 엠블란스에 실어갔다. 후배가 불을 켜면서 말했다.“마약 갱들이 구역 싸움을 한 것이지요. 주말이면 저런 총격전은 더 극심하구요. 죽일놈들, 다 백인들 탓입니다.”흑인 지역엔 어디에나 조직을 가진 마약 갱들이 있고, 그들이 구역 싸움으로 죽고 죽이는 사람도 수없이 많지만 여론화되는 일은 극히 드물단다. 또한 흑인과 북미 원주민들은 7할 이상이 마약중독자라는데 그것을 백인들이 정치적으로 조장한다는 것이다. 군인들이 수송기로 마약을 실어날랐다 해서 여론이 들끓은 적도 있지만 그런 문제는 슬며시 덮혀버리고 만다. 지금 아메리카는 분명 백인의 나라다. 정치, 경제, 사회 그 모든 것을 그들이 틀어쥐고 소수민족을 지배하면서 호의호식하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총기소유를 자유화 해서 정당방위란 이름하에 위협적인 요소는 쉽게 제거할 수 있는 법률도 두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막강한 힘의 소유자들이 무엇 때문에 굳이 소수민족들의 의식을 마약으로 잠재우고 나아가 자기네들끼리 죽고 죽이도록 내버려두고 있을까. 어쩌면 그들은 두려워하는게 아닐까. 북미원주민들로부터 땅을 빼앗고, 흑인들을 노예로 학대했던 죄상이 드러날까봐서? 그래서 이제는 마약과 광란과 범죄와 인종차별로 그들을 지배하면서 죄상을 덮고 싶은 것일까. 아니라고 한다. 그들에게 인종차별은 최하 계급의식과 일치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저 지배하기 위해 그런 정책을 쓴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야릇한 것은 백인들은“당신은 인종차별자냐?”라는 말을 가장 듣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비겁자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의 생활습관이 위선으로 이루어진 탓이란다. 어느 유학생은말한다.“그들은 인권운동은 잘 협조를 한다.

그러나 민족해방운동가는 어떤 방법을 동원하든 암살해버린다. 말콤 엑스가 그렇고 킹 목사가 그렇고 인디안이나 중남미 여러 지도자들이 그렇게 죽어갔다”고. 필라델피아 어느 흑인 거주지엔 이런 글씨가 씌어져 있었다.“민족지도자는 죽어도 민족해방운동은 영원하다.”그것은 그래도 떨치고 일어 서 보려는 흑인들의 몸부림일까.미국엔 중학생도 마약을 한다. 뉴욕에서 뉴저지를 넘어가는 어느 중학교 앞엔‘마약없는 학교를 만들자’는 푯말이 붙어 있었다. 소수민족 의식을 마비시키려는 마약이 이젠 청소년은 물론 백인 사회에도 서서히 침투해들고 있다니, 그것은 자업자득일까. 고등학생들도 점심시간에 공공연히‘코케인’이란 마약을 거래하고 있다고 한다. 국민학교 때 이민온 동포 학생은 중학교 때부터 마약을 한 경험이 있고, 그것은 다른 동포학생들에게도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했다.

또한 여기엔 집집마다 총이 있다. 어느 중학생은 기관총을 들고와 국민학생과 여선생까지 30여명이나 쏴죽인 일도 있었다. 중고등학생들도 파티 때 파트너 문제로 총격전을 벌이기도 한단다. 총과 마약의 희생자는 절대다수가 소수민족이다. 저소득층엔 도덕이 마비되어버리고 고소득층엔 위선의 두께만 늘어가는 사회. 총과 범죄와 마약의 사회. 넘쳐나는 물질과 넘쳐나는 쓰레기의 사회. 그럼에도 엄청난 자원 때문에 쉽게 망할 것 같지도 않다는 것이 신학공부를 하는 동포학생의 말이었다.

이튿날 아침 나는 현장을 둘러본 뒤 흑인지역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전봇대나 벽마다 이상한 그림들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것은 갱들이 자기 구역을 암시한 표시라고 했다. 그렇다면 지난밤의 사건도 구역 침범 때문에 일어난 것일까. 그날 신문을 죄다 사서 후배한테 읽어보게 했지만 주유소 앞의 살인사건은 어디에도 보도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미주판 한국신문에서 보았다. 가게를 하다가 흑인의 총에 살해를 당한 우리 동포들의 기사를. 그런 사실이 아주 빈번히 발생한다는 것도 나는 점차 알게 되었다. 멕시칸 갱에게 아들을 살해당한 어머니의 처절한 부르짖음,“아들을 위해 미국으로 온 것도 죄입니까?”1만불의 현상금을 내걸자 비로소 발벗고 나서는 경찰관들이 야속하다는 동포들 사이엔 조국으로 되돌아가는 역이민 바람이 조용히 일고 있다는 기사를 나는 몇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미주 운동세력의 갈래들

미주에서 통일 운동을 한다는 윤한봉을 만나기 위해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으나 그는 L.A에 없었다. 그때 서경원의원 사건이 터졌고, 내가 만나고자 한 윤한봉과 재미한국청년연합(이하 한청련)이 친북단체, 혹은 북한에서 자금 지원을 받은 것으로 신문에 보도되었다. 그것이 정말일까. 나는 은근히 두려워져 만나기를 포기할까하다가 확실한 내막이나 알아보자고 다시 연락을 취해보았다. 그는‘평화행진’을 위해 뉴욕으로 갔다고 했다. 비행기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당일 비행기를 타면 요금이 비싸지만 며칠 후로 예약을 하면 50불 이상이 싸다고 했다. 나는 예약을 했다. 이틀간의 시간이 남았다. 후배는 미주 청년조국통일협의회 청년들이 평양축전에 떠나는 발대식을 갖는데 조금 친북이다, 그래도 한번 가보겠느냐고 물었다.

“신문엔 한청련이 친북단체라는데?”

“글쎄요. 나도 언젠가 한번‘민족학교’에 가보았는데 거긴 남도 북도 조국이다라고 확실하게 말하던데요?”여긴 한국이 아닌 미국이었다. 그래서인지 동포들은 어느 회합장이든 아무런 제약없이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평양 발대식’회장에 가보았다. 그곳 참가 청년들은 모두 흥분해 있었고, 오직 북한 자랑 뿐이었다. 나는 남한이 도외시된데 대한 소외감과 해외운동가들이 그렇게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과연 통일운동에 도움이 될까 하는 의구심 때문에 곧 회합장을 나와 버렸다. 잠깐 미주 운동 세력의 갈래부터 살펴보면 현재 미주운동엔 세 갈래의 정치적 입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째, 내가 가 본 미주청년 조국통일협의회(이하 청협)는 조국통일북미주 협회(이하 통협)와 한 계열로서 남한과는 별 관계없이 오직 북한에만 의존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조국통일에 관한 한 자신들이 남한의 운동세력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믿고 있었으며 그동안 북한을 드나들면 저서를 냈고, 기행물을 쓴 것이 해외에서의 운동권은 물론 남한 운동권에도 일정하게 영향을 미치면서 조국통일운동을 선도해 오고 있다고 자처하는 단체였다.

그러니까 남한에서도 출판이 된‘북한 기행’이나,‘미완의 귀향일기’같은 책들의 저자들과 함께 자주 북한을 방문해 오고 있는 단체다. 둘째는 온건하고 보수적인 입장에서 반공, 반북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주로 반군부독 재민주화운동에만 참여해 온 세력이 있다. 이 세력은 남한의 야당정치인, 명망가, 기독교계운동 세력과 밀접한 이해관계에 얽혀 있었는데 지난 선거과정에서 특정야당후보에 대한 절대적 지지론으로 선회하였으나 노대통령의 집권이 현실화되자 충격을 받았고 일부는 정계진출을위해 귀국해버려 그역량이 감소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단체들에 대한 동포들의 비판은 정치의식의 한계 때문에 해외운동 세력으로서의 독자적 위치와 고유한 역할, 임무를 방기하고 남한 운동에 대한 종속적 주변적 위치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 짧은 시기에 가장 큰 조직을 묶어낸 한청련은 남, 북을 하나로 보면서 해외운동세력으로서의 독자성을 인식하고 남북의 운동역량에 상응하는 고유한 역할 임무, 즉 남한운동 지원사업, 해외에서의 조국통일 운동 국제연대활동을 위해서 일해오는 세력이라고 한다. 이세력은 첫 번째의 단체로부터는 보수적이라는 비판을, 두 번째 단체로부터는 또 급진적이라는 비판을 각각 받고 있고, 그럼에도 미국내에서는 가장 강력한 운동역량을 구축해오고 있으며 재미동포 대중 속에서 자신의 존립근거와 운동역량을 찾아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미쳐있는’뉴욕의 도심

지하철에서 열세살짜리 흑인소녀가 백인신사에게 한푼달라고 구걸하다가 총 맞아 죽었다는 뉴욕(그럼에도 그 백인은 6개월만에 석방되었다던가.)주소를 들고 간신히 찾아낸 한청련은 잭슨 헤이트란거리에 있었다. 지하철과 멀지 않은 육중한 옛날 건물앞에는‘뉴욕청년봉사교육원’이란 한글 간판이 외롭게 걸려 있었다. 계단을 올라 허술한 사무실 문을 열었다. 30평쯤 되어보이는 강당에서는 여러청년들이‘국제평화행진’과‘미주평화행진’용 깃발과 피켓을 만드느라 정신들이 없었다. 내가 윤한봉을 찾자 한 젊은이가‘봉사실’이라는 문패가 붙은 사무실 문을 열어주며 안에 들어가서 물어보라고 했다. 그 방엔 임산부여성이 영어를 몰라 곤욕을 당한 한 할아버지에게 영문판 서류를 꾸며주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먼저 윤한봉을 찾았다.“그 형님 지금 여기 계시지 않는데요.”한국 대학가에서 처럼 여기서도 여성이나 남성 모두가 그를 형님이라 부르는 모양이었다. 한데 그는 여기에도 없다? 원, 대통령 만나기보다 힘들구나.

나는 한국에서 온 누구라고 밝힌 후 그를 만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여성은 자신도 내 소식을 읽었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그는 요즘 너무 바빠서 조용히 만나 이야기할 짬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내가 다시 물어보았다.“워싱턴 DC에 계신데 아마 곧 또 필라델피아로 가실것입니다.”그 젊은 여성의 설명에 의하면 행진 행사 준비 때문에 그는 거의 잠도 자지 못하고 각 센타마다 뛰어다닌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나는 이제 어쩐다? 산골 촌아낙이 핑핑 돌아간다는 이 뉴욕바닥에서? 내가 난색을 띄우자 여성은 센타에서 숙식은 제공해주겠다고 말했다. 문득 신문기사가 떠올랐다.“한청련은 북쪽에서 자금을 지원받고…”그것의 사실 여하는 접어두고라도 자칫하면 한데 엮어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나는 다음날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무실을 나섰다.

나는 연극공부하러 온 친구 김혜련한테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집은 30분 거리에 있는 뉴저지라고 했다. 방송 작가였던 그녀의 남편 정하연씨가 차를 몰고 데리러 왔다. 그들은 웬일로 미국까지 왔냐고 히죽거리며 날 놀려대다가 먼저 소호 빌리지로 안내하겠으니 차에 타라고 했다.맨하탄을 지나는 동안 나는 내내 소름이 돋았다. 살벌하고 더러운 지하철, 거리마다 쓰레기들, 여기저기 홈이 파인 도로, 난잡한 벽화, 차속에 손을 쑥 내밀고 돈을 달라는 백인거지, 과일을 사라고 외치는 멕시코나 중남미 불법 체류자들, 세워진 차에 잽싸게 뛰어들어 지갑까지 날치기해 간다는 흑인소녀들. 어휴, 내가 무슨 죄를 지어 아름다운 내 강토를 두고 이런 연옥에 던져졌단 말인가. 더욱이 센트럴파크를 지날 때 흑인 거지떼들이 여기저기 득실거리고… 친구 혜련이가 내 손을 잡으며 설명했다.

“미국은 어디에나 도심지엔 가난하고 돈없는 흑인, 소수민족들이 산단다. 차가 없어도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지. 돈 좀 있는 사람들은 모두 변두리로 나가 잔디와 꽃나무에 들러싸인 저택에 살고… 그래서 뉴욕 도심지는 이렇게 정신없고 지저분하고 시끄럽단다.”뉴욕에 비하면 LA는 조용한 미국이었다. 여긴 경적을 울리는 경찰차, 소방차들이 더 빈번하게 도심지를 질주하고 다녔다. 소돔과 고모라… 차를 주차시키고 오헨리가 살았다는 예술가의 거리 소호 빌리지로 갔다. 친구가 여기선 코를 베어가니 가방을 꼭 잡으라고 일렀다. 나는 손이 아프도록 가방을 움켜잡고 거리 찻집에 앉았다. 먼저 닭날개와 맥주를 시킨 뒤 혜련이가 근처 NYU종합대학 기숙사에 있는 친구를 불러내기 위해 전화를 걸러갔다.

“여긴 돈만 있으면 어떤 대학도 들어갈 수가 있어요. 하바드나 예일도 옛날 말이죠, 요즘은 거기도 돈이니까요. 교육까지도 돈장사 하는 곳… 여기에 비하면 우리나라 대학은 아직도 살았단 말입니다.”그때 별안간 도로를 찢는 듯한 폭음이 들려왔다. 바퀴가 커다란 오토바이를 탄 수십명의 무리들이 형언할 수 없는 폭음을 울려대며 차도로 지나가는 것이었다. 나는 내 고막이 염려되어 얼른 귀를 막았다.“저것들이 의사들이랍니다. 퇴근 후 스트레스를 저런식으로 푼다나요? 원 사회 봉사원이고 뭐고 다 함께 미쳐돌아가니…”연속적으로 바퀴 터지는 소리를 내며 질주하는 오토바이는 미국에서나 유행이었다. 또 디스코 홀 하나를 통째로 떠메고 다니듯 쾅쾅거리며 지나 다니는 자들도 허다했다. 때문에 귀에 이상이 생긴 미국인이 많다고 한다. 얼빠진 사람들이 정신없이 설쳐대는 나라… 그때 기숙사에 있다는 유학생이 왔다.

언젠가 어느 잡지사에 갔을 때 본 얼굴이었다. 나는 맥주를 마시며 그들로부터 미국에서 당한, 기가 질리는 이야기들을 더 많이 들었고 그동안에도 흑인 거지들은 수없이 손을 내밀에 구걸하며 지나갔다. 주로 공원이나 거리에서 잠을 자는 빈민이거나 마약중독자들이라고 했다. 정하연씨가 웨이트레스를 불러놓고 닭날개를 더 주문 할 때였다. 유학온 여성이 어머나?하고 비명을 질렀다. 흑인여성이 그녀의 손지갑을 탈취해서 벌써 저만치 달아나고 있었다. 정하연씨가 경찰을 부르려고 했으나 그 여성이 만류했다. 그래봤자 이미 늦었다는 것이다.“난 완전 저애들의 밥이에요. 벌써 이 거리에서 핸드백, 지갑을 탈취당한 것이 여러번째거든요.”

한국사람은 현찰을 많이 지니고 다닌다는 소문 때문에 강도나 들치기에게 가장 좋은 상대란다. 내가 정하연씨에게 물었다.“이런데서 어떻게 살아요?”“습관이 되면 대충 또 살아내는게 인간 아닙니까?”습관. 엄청난 물질을 소모하고 엄청난 쓰레기를 내놓고, 극도로 이기적이 되어가는 백인들도 말하자면 습관에 의해서… 어쨌거나 뉴욕 예술인의 거리, 코 베어간다는 소호 빌리지는 자정이 넘어도 조용해질줄 몰랐다.

거리의 투사들

아무래도 윤한봉을 놓칠 것같아 나는 다시 한청련센타로 갔다. 청년들은 아예 센터에서 먹고 자면서 잠을 쪼개어 일들을 하고 있었다. 여성들은 행진 기간중 풍물패가 입을 농민복을 만드느라 재봉틀을 돌리고 흰 티샤쓰에 우리나라 지도와‘조국은 하나다’라는 글씨를 프린트하고, 또 한쪽에선 거리에서 돌릴 선전문안을 작성했고, 또 한쪽에선 깃발과 걸게 그림을 그리느라 물감을 늘어놓아 발디딜 틈도 없었다. 그때 두명의 젊은 남녀가 들어오더니 서명용지를 챙겨들었다. 한국에서 핵을 몰아내달라는 10만명 서명운동을 전개중인데 그것을 19일부터 도보행진을 해서 27일 워싱턴 DC국회의사당에 전달할 것이라 했다. 나도 심심하던 차에 그 젊은이들을 따라 나섰다. 맨하탄을 지나서 한참이나 지저분한 거리를 달려가더니 어느 공원앞에 차를 세웠다. 워싱턴 스퀘어 공원이었다. 그 공원 주변엔 진보적인 뉴욕대학 캠퍼스가 있다는데 60년대 히피들이 시위도 하고 집회도 해서 지금도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많이 모인다고 했다. 또한 연극, 쇼맨,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나와 자기 기량을 닦거나 구경을 시키면서 돈을 받기도 한단다.

주말이어서인지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말을 할 줄 모르니까 서명을 받는 젊은이들을 따라다니며 구경을 했다. 얼굴에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판토마임을 하는 사람, 인디언 운동가들이 악기를 치며 민속노래를 부르고, 한쪽에서는 남자 허벅지보다 굵은 뱀을 목에 감고 이상한 쇼를 하고, 또 한쪽에선 중국학생들이 6·4시위에 대한 그림엽서와 호소문을 나눠주고, 머리에 빨강물을 들이고 검은옷을 입은 히피 후예들이 분수대 주변에 앉아 있고…. 거기에선 흑인, 백인 온갖 민족들이 거리낌없이 어울려 드나들고 있었다. 책을 읽는 사람, 엘살바도르와 필리핀 운동가들이 페넌트를 팔고…. 함께 간 아가씨가 한 백인 대학생에게 서명을 부탁하자 그 청년은 고개를 저으며“노스코리아, 김일성 스트롱”해서 핵과 미군이 철수하면 안된다는 말을 했다. 한청련아가씨는‘너는 부시와 한통속’이라고 되받아주면서 등을 돌렸다.

잠시 후 동상 앞에서 한 흑인이 백인과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 백인은 흑인에게“아프리카로 돌아가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중미, 남미사람, 핵서명을 받던 우리 아가씨까지 뛰어들어 그 백인에게 소리쳤다.“고 백 투 유럽!”그러자, 백인은 금방 시무룩해져서 돌아서는 것이었다.“글쎄, 쟤들은 저렇다니까요. 난처하면 당장 안 그런척해요.”너희들이야말로 유럽으로 돌아가고, 이땅은 원주민들에게 돌려주라? 듣자하니 근사하고 시원한 말이었다.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모인다는 공원에서도 백인들은 그런 모습들이었다.

한청련 윤한봉과 8년만의 해후

7월 1일, 새벽 두시경에 윤한봉이 센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워싱턴 DC에서 달려오는 길이라고 했다. 퀑한눈, 더벅한 머리, 피곤에 졸고, 여윈 얼굴. 80년도의 그 젊음은 어디로 가고 겉늙어버린 중년 사내로 변했단 말인가. 목구명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오직 통일을 위해 장가도 들지않고 운동한다는 사람, 한국인임을 잊지 않기 위해 영어는 물론 쓰지 않고 오늘까지도 보름에 한번 목욕을 하고 절대로 침대에서 자지않는다는 사람, 아무데서나 자고 아무 옷이나 걸치고 다니는 민족통일주의자, 한국을 떠나서도 내내 중상모략에 시달리는 외골수 운동가, 자신의 소유에 대해서는 철저히 배격하는 청교도. 8년만에 우리는 악수를 했다. 이국땅에서 만나는 서글픈 해후였음에도 그는 무척 반가와했다. 그렇게 번쩍거리던 눈이 이젠 잠이 부족해서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그럼에도 그는 마주 앉으며 조국의 소식부터 듣고 싶어했다. 나는 차마 그의 잠을 뺏어먹을 수가 없어서 얼른 눈부터 좀 붙이라고 권하며 자리를 떴다.

이튿날 아침, 그는 또 필라델피아로 가야 했다. 떠나기 전 우리는 약 30분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먼저 내가 신문을 보았느냐, 서경원씨 문제와 정말로 북한에서 지원을 받고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웃었다.“지원요? 젠장 국제평화대행진 준비 자금도 전부 우리동포들 주머니에서 나온 겁니다. 우리 신문기자들 그 벌을 어떻게 다 받으려고 확인해보지도 않은 엉터리 기사들을 잘도 엮어내는지…”“국제평화대행진을 위해 한청련이 애를 많이 썼다는데…”“그 성격부터 말하지요. 6·25전쟁은 유엔의 이름으로 16개국이 참전을 했습니다. 그 16개국 대표들이 전부 평양축전 뒤 행진에 참여해서 전쟁의 악몽을 씻어내자는 것인데, 남에서는 한라에서 판문점, 북에서는 백두에서 판문점으로 행진하는 것이지요. 그 행사에 우리의 다른 지역 동포들, 러시아 교민, 일본 교민, 호주, 중국 각지에서 참여할 모양이고… 미주에서도 참여하는데 그 행사를 위해 눈코 뜰새가 없습니다.”“어째서 국제평화대행진을 주최할 생각을 했는지…”“이 행사주최는 런던에 있는‘국제평화대행진 국제사무국’주최에 우리가 주인으로 참여하는 것인데 그 이유는 그 누구보다 같은 민족으로서 우리 교민들 모두가 열렬히 통일을 바라온 결과지요.

‘반공의 원산지’에서 싹튼 통일운동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 네시간을 잤을 뿐인데 그의 눈은 다시 정기를 모아 번쩍였다. 그는 다시 이었다.“그러니까 제가 처음 미국에 와서 미국화되고 제도화된 교민들에게 그토록 실망을 했는데, 수년 지나면서 다시 깨달은 것은 내가 겉모습과 현상만을 봤더란 말입니다. 깊이 들여다보니 광주학살에 대한 상처들이 아주 깊었어요. 여기서 우리 민족의 정서와 문화를 다시 확인한 셈인데, 이를테면 우리는 큰 죄를 지었을 때‘죽을 죄를 졌다’고 하고 가장 나쁜 놈은‘죽일놈’으로 표현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곧 우리 민족에겐 생명을 존중하는 인본의식이 강하기 때문이지요. 제가 곧잘‘자기 문화에 토대를 두지 않는 운동은 성공하지 못한다’라고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데 예를 들어 중남미 사람들은 우리와 달라요. 그쪽은 운동가들까지도 자기 민족이 학살당하는 일을 예사로 여겨요. 그러면서‘너희 나라는 어떻게 노동자 한 사람 분신하고, 학생 하나가 고문에 의해 죽었다고 해서 그렇게 온 나라가 엄청난 반응을 일으키며 들끓을 수 있느냐’는 겁니다. 어쨌든 광주학살이 동포 사회에 충격과 자극을 주면서 여러 갈래의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첫 번째가 반북, 반공적 입장에서 조국의 민주화를 열망했던 세력들이 남쪽에 대해 절망하면서 분단이 존재하는 한, 다시 말해서 대결구조를 극복하지 않는 한 민주화도 통일도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거죠.

그래서 홧김에 서방질한다는 말처럼 갑자기 방북이다, 혈육상봉이다, 고향방문의 바람이 일어난 거지요. 살아 생전에 통일을 바라볼 수 없을 것 같으니까 우선 만나라도 보고 싶었을게 아닙니까. 물론 일반대중과 동떨어져서 너무 급진적으로 앞서간 것이 탈이었지만 북한 바로 알기의 문을 열었다는 공로는 인정해야지요. 그리고 일반 동포들은 6·29선언이 나오자 이제 민주화가 다 되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야 뭐, 국내에서도 그랬다면서요? 그래서 무슨 집회나 강연을 열어도 8, 9백명 모이던 동포들이 2백명 이상 모인 적이 없어요. 그리고 하는 말이“저 사람들은 민주화 다 되었는데 멀라고 또 저런 일을 하는가? 민주화 되나 안돼나 취미로 하는 모양이지?”하고 이상하게 생각해 버리는 겁니다. 그럴 때에 백기완선생이 오셔서 강연을 하시고 통일마당 한돌 쌓기 운동을 벌였는데, 그것이 대중성을 얻은 것입니다. 그래,‘통일운동이라면 할 만하지’하고 여기저기서 모금운동이 시작되었는데, 약 8만불가량 걷히더란 말입니다. 그 액수가 일제 때 재미동포들이 조국광복을 위해 모금해 보낸 전체 액수보다 많은 것입니다. 또한 45년 이후로도 처음입니다. 한 사람당 한돌이 10불이었는데 아무튼 미주운동사에도 기억에 남을 일이지요.

그렇게 해서 자주화 통일운동이 대중성을 확대하기 시작했달까요. 다음이 정론에 대한 갈망인데 미주<한겨레신문> 창간추진 위원회 때 제가 딱 20일을 뛰었는데 추진위원회에 적극 참여하겠다는분이 그 사이만도 850명이 나왔어요. 그 때 제가 새삼스레 느낀 것은 그간 다른 대책 수단이 없어서 기존 신문을 봐왔을 뿐이지 정론지가 나오기만 하면 엄청난 반응을 가져오겠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비록 6·29이후 해이되긴 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통일운동 부분과 정론에 대한 갈망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더란 말입니다. 이번‘국제평화대행진’‘미주평화대행진’을 추진하는데도 15일 동안 모금을 벌였더니 동포사회에서 3만5천불이란 후원금이 나왔습니다. 요즘 미국 경기가 별로 좋지 않은데도 말입니다. 제가 7년간 움직이면서 몸으로 느낀 것은 앞으로 동포사회엔 민주화운동보다 통일운동에대한 가능성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반공의 원산지이고, 미국 관료들도 실제 적대 관계에 있는 쿠바의 카스트로나 니카라과의 오르테가보다 북한 지도자를 더 싫어한다는데 어떻게 이 땅에 와서 살고 있는 동포들이 통일운동을 주도해낼 수 있을까요?”“동포들은 미국의 제도엔 별관심이 없습니다. 살기가 바쁘니까요. 그럼에도 조국의 뉴스엔 당장 귀가 쏠리지요. 조국이니까요. 그런 분들이 통일운동을 담보해낼수 있는 첫째 요건은 해외에 건너와 보니 우선 남도 북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가 있고, 둘째는 분단에 이권이 걸려 있는 세력이 아니니까 굳이 분단을 지탱 고집할 필요가 없어지는 거지요 이민온 분들은 대체로 중간계층이 많은데, 말하자면 분단 수혜계층이 아니니까 보다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민족문제를 통일적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겁니다. 셋째, 여기선 국내처럼 통일하자고 부르짖어도 실제로 탄압을 받지는 않으니까 통일운동에 대한 상당한 가능성이 잠재해 있다고 보는거지요.”

방북교포가 4천명이 넘는다는데

“한청련 젊은이들은 북을 북부조국, 남은 남부조국, 또 타국의 운동가들은 타민족형제라고 지칭하던데 그것은 어쨌든 지금까지 북한에 다녀온 교포들이 4천여명이 된다지요? 처음에 어떻게 시작되어 그렇게 많은 분들이 다녀오게 되었는지 간단하게 좀 정리해 주시겠습니까?”“처음은 캐나다에서『뉴코리아 타임스』를 발간하시는 전중림씨가 다녀왔는데 그분이 가장 큰 공로를 하신거지요. 다음은 통협인데, 그분들이 처음엔 개인 개인으로‘통일 심포지움’이니‘북과의 대화’니 하면서 북한을 오고 가면서 누가 이산가족 찾기를 부탁하면 찾아주기도 하다가 작년 <통협>으로 묶어지면서 본격적으로 이산가족 찾기운동을 벌여온 거지요.”“통협이라면<청협>과 같은 계열이지요? 그쪽은 완전히 친북인 것 같던데?”“아니, 윤형까지 그런 표현을 쓰는거요? 아니, 미주운동까지 남북으로 갈라져야 하는 거요? 일본의 조총련과 민단처럼? 그건 해외운동에 대한 모독이요! 그분들이 한민족으로서 이산가족 찾기나 대화의 벽을 뚫은 것은 인정하지 않고…”나는 아차, 했다. 또 직감이 앞선 것이다. 통협이 정부의 음성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단체가 아닐까 의심한 것은 정부로부터 친북단체라거나 자금을 받았다는 그 어떤 비방도 받지 않고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어쩌면 내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그간의 정치적 왜곡과 음모에 대해 남한의 지식인들은 거의 과민성이 되었고, 그리하여 조금만 이상해도 역공작으로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런 반응일 것이다.

아무튼 7월 19일, 유엔 건물앞에서 시위를 할 때 통협 어른들을 만나 이야기해본 결과 그분들은 남한 운동권과의 깊은 연관이 없다는 것을 알았고, 따라서 남한 운동권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 단체는 정부나 안기부의 관심 밖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다시 방북 붐의 초창기로 말머리를 잡았다.“초창기 북한을 방문한 사람들에겐 영사관에서 빨갱이니 뭐니 갖은 악선전을 하고 또 FBI로 하여금 개인적으로 찾아다니게 하면서 겁을 주기도 했지만 동포들은 결단을 내려 한 사람에서 두 사람 그렇게 갔다 왔는데 물론 처음은 쉬쉬한 거지요. 갔다온 것을 알면 교회서 쫓겨나, 친구들 발걸음도 끊어져, 성가대에서도 쫓겨나, 또 북에 가면 간첩질 해야한다, 김일성 만세 부르지 않으면 인질로 잡아놓고 보내주지 않는다, 인간으로 할 수 없는 가장 비열한 소문을 막 퍼뜨려대니 그 악선전에 많은 괴로움을 당했지요.

그러면 왜 그런 악선전이 횡횡하는가, 그 이유는 여긴 국내와 달리 직접적인 탄압수단, 즉 정치적 물리적 탄압을 쓸 수가 없고 유일한 수단이 중상모략과 비방으로 동포사회로부터 고립을 시키는 것인데 사람이 위대한 것은 진심이 아닌 것은 언제건 스스로 벗겨낼 줄도 안다는 겁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점차 통일운동으로 확산되어 온 거지요.”행사가 다 끝난 8월 초순 국내 신문에서 김대중총재의 증언이 보도되고 있을 때 나는 다시 그를 만났다. 신문 보도대로 북한에 다녀왔느냐는 나의 물음에 대해 그는 여러 말은 하지 않고 먼저 자신의 여행증명서를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그가 갈 수 없는 나라로 쿠바, 베트남, 북한이라고 분명히 명시되어 있었다. 그는 북한을 갈 수 없는 사람이며 자금을 받았다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일국의 대통령 후보가 확인해 보지도 않은 말을 그렇게 서슴없이 할 수 있고, 자기 민족의 한 젊은이를 그렇게 서슴없이 할 수 있고, 자기 민족의 한 젊은이를 그렇게 쉽게 매도할 수 있는가 라고 내가 고개를 젖자 그는 분명하게 대답했다.“그분의 뜻이 아닐지도 모르오. 정말 그분이 그런 말을 했는지 경위가 밝혀질 때까지 우린 절대로 그분을 비방해서는 안되요.”해외에서 갖은 중상모략에 시달려온 결과 저렇게 신중해진 것일까. 나 역시 그 발표가 진실로 김총재의 발언이 아니기를 간절히 빌면서 더 많은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룬다.<계속>

8월 5일 뉴욕에서 윤정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