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돌아온 부메랑 정동년(국민신문, 1988. 11)
본문
징소리
돌아온 부메랑
정동년 (민주쟁취국민운동 전남본부 공동의장)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지는 부메랑이란 창이 있다. 그 창은 신기하게도 던진 사람에게로 되돌아 오는 기능이 있다고 전해진다. 경제학에서는 이것을 원용해 ‘부메랑효과’라는 용어까지 생겨났다. 요즘 우리의 정치 현실을 보면 이 부메랑을 원용한 정치학 용어가 곧 생겨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5공화국 권좌에서 서슬 퍼런 칼날을 휘두르던 자들이 갖가지 비리로 인구에 희자되고 굴비두름처럼 구속되는 현실 앞에 그 같은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닐 성싶다. 문제는 5공(共)비리 정도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5공 권력의 집권시 발판마련의 계기가 된 ‘광주학살’의 일부진상이 국회청문회 등을 통해 떠오르면서 새삼스럽게 가슴을 찢어 놓는다. 학살만행과 사건 조작, 고문 이런 것 없이는 한시도 지탱할 수 없었던 5공권력을 향해 학살의 업보가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광주특위’의 청문회를 보면서 5공화국과 6공화국이 어떻게 무엇이 다른가 하는 의혹이 깊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다. 80년 학살 당시 ‘광주항쟁’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조작했던 당사자들이 아직 남아 8년이 지난 지금도 조작, 은폐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청문회에서 학살 주범들을 계속 비호하고 있는 민정당 의원들이 그들이다. 6공화국 정권의 입법부에 들어 앉은 그들은 ‘광주학살’의 불가피성을 한사코 강변하고 있다. 광주항쟁의 성격과 의미를 알 수 있는 발발원인을 그들은 한결같이 지역감정이나 공수대의 과잉진압, 김대중씨의 구속 등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아직도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한심한 작태들이다.
이러한 주장에는 일란성 쌍생아다운 편견과 저의가 내재되어 있다. 우리의 현대사에서 지역감정이란 국민의 지지기반이 전혀 없는 독재자가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미일 외세를 등에 업고 국민을 이간 분열시켜 통치하는 수단이었다. 그들은 민주적방식에 의하여 정치권력을 국민으로부터 정당하게 수임받지 못했기 때문에 혈연, 지연, 학연 등으로 야합한 무리들로 구성된다. 또 그들 집단은 필연적으로 반민주적이고 반민족일 수밖에 없다. 요즘의 이른바 ‘TK사단’도 예외는 아니다. 그것은 자기들의 권력과 부를 유지·확대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폐쇄 이기주의 집단이다. 이러한 성격의 박정희 정권때부터 폭력으로 권력을 잡자마자 친미 독재권력의 구조적 사회 모순을 전라도 지역에 집중적으로 이전시켰다. 경제성장과 소득재분배 과정에서 전라도민은 항상 희생양이 되었고 지금도 전라도민의 평균 소득은 전국 평균치 이하를 휠씬 밑돌고 있다. 물론 소외된 쪽은 이 땅의 민중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소득재분배의 불균형을 지역적으로 전라도에 편중시켰던 것이다.
그러므로 정권욕예 사로잡힌 전두환 군부가 총칼로 권력을 탈취하려고 했을 때 이지역 광주·전남도민의 가열찬 저항에 부딪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다. 이것은 생존권의 표현이지 지역감정이 아니다. 역시 지역감정 조작은 독재권력의 통치수단이다. 그들은 망국적 풍조로 지역감정을 얘기하고 이 지역감정을 해소하기 위하여 국민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고 떠들어대지만 실제로 지난 대통령선거때 서울 타워호텔에 흑색선전부를 두고 지역감정을 부추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런 민정당이 지역감정 운운하는 것은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설의 주장도 일견 그럴 듯 해 보인다.
그러나 과잉진압이라는 주장뒤에는 당시 공수부대가 치안유지상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시위대가 과격하게 맞섰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과잉진압을 하고 발포까지 하게 되었다는 논리가 깔려 있다. 다시 말해 치안유지의 목적만 있었을 뿐 처음부터 살상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광주시민은 잘 알고 있다. 한 손에 대검, 한 손에 철심 든 곤봉을 들고 미쳐 날뛰며 처음부터 학살 만행을 저질렀던 공수부대의 만행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과잉진압의 차원이 아니라 국민의 저항의지를 절멸하고 권력을 탈취하기 위한 전두환세력의 음모와 만행이었다.
김대중씨의 구속에서 발발 원인의 전부를 찾아내는 것도 권력의 음모다. 김대중씨가 받았던 고난은 바로 이 지역 대중이 받았던 수난의 일부분이다. 김대중씨의 구속은 광주항쟁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게 한 어느정도의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광주항쟁의 발발 원인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광주항쟁은 80년 민주화의 봄을 맞아 활화산처럼 터져 나온 민중의 민주화 열망을 짓밟고 권력을 탈취하고자 한 12·12군부 쿠데타 주역들의 계획적 탈취 음모에 광주·전남 민중의 자주·민주·통일을 쟁취하고자 맞선 민중봉기였다.
이러한 시각이 왜곡된다면 청문회도 결국 독재권력의 이용물이 되고 말 것이다. 청문회 이후에도 계속되어야 할 것은 ‘학살자 처단’이란 민중의 요구에 겸허하게 귀 기울이는 자세이다. 바야흐로 학살만행의 응보는 시작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학살자 스스로가 던진 부메랑이다. 스스로 뿌린 악의 씨앗이 다시 목에 칼이 되어 되돌아 온 것이다. 그것은 결코 전두환씨로만 향하고 있지 않다. 12·12쿠데타와 광주학살로 출발한 5공화국과 6공화국 권부 모두에게 되돌아온 부메랑이다.
돌아온 부메랑
정동년 (민주쟁취국민운동 전남본부 공동의장)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지는 부메랑이란 창이 있다. 그 창은 신기하게도 던진 사람에게로 되돌아 오는 기능이 있다고 전해진다. 경제학에서는 이것을 원용해 ‘부메랑효과’라는 용어까지 생겨났다. 요즘 우리의 정치 현실을 보면 이 부메랑을 원용한 정치학 용어가 곧 생겨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5공화국 권좌에서 서슬 퍼런 칼날을 휘두르던 자들이 갖가지 비리로 인구에 희자되고 굴비두름처럼 구속되는 현실 앞에 그 같은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닐 성싶다. 문제는 5공(共)비리 정도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5공 권력의 집권시 발판마련의 계기가 된 ‘광주학살’의 일부진상이 국회청문회 등을 통해 떠오르면서 새삼스럽게 가슴을 찢어 놓는다. 학살만행과 사건 조작, 고문 이런 것 없이는 한시도 지탱할 수 없었던 5공권력을 향해 학살의 업보가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광주특위’의 청문회를 보면서 5공화국과 6공화국이 어떻게 무엇이 다른가 하는 의혹이 깊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다. 80년 학살 당시 ‘광주항쟁’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조작했던 당사자들이 아직 남아 8년이 지난 지금도 조작, 은폐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청문회에서 학살 주범들을 계속 비호하고 있는 민정당 의원들이 그들이다. 6공화국 정권의 입법부에 들어 앉은 그들은 ‘광주학살’의 불가피성을 한사코 강변하고 있다. 광주항쟁의 성격과 의미를 알 수 있는 발발원인을 그들은 한결같이 지역감정이나 공수대의 과잉진압, 김대중씨의 구속 등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아직도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한심한 작태들이다.
이러한 주장에는 일란성 쌍생아다운 편견과 저의가 내재되어 있다. 우리의 현대사에서 지역감정이란 국민의 지지기반이 전혀 없는 독재자가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미일 외세를 등에 업고 국민을 이간 분열시켜 통치하는 수단이었다. 그들은 민주적방식에 의하여 정치권력을 국민으로부터 정당하게 수임받지 못했기 때문에 혈연, 지연, 학연 등으로 야합한 무리들로 구성된다. 또 그들 집단은 필연적으로 반민주적이고 반민족일 수밖에 없다. 요즘의 이른바 ‘TK사단’도 예외는 아니다. 그것은 자기들의 권력과 부를 유지·확대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폐쇄 이기주의 집단이다. 이러한 성격의 박정희 정권때부터 폭력으로 권력을 잡자마자 친미 독재권력의 구조적 사회 모순을 전라도 지역에 집중적으로 이전시켰다. 경제성장과 소득재분배 과정에서 전라도민은 항상 희생양이 되었고 지금도 전라도민의 평균 소득은 전국 평균치 이하를 휠씬 밑돌고 있다. 물론 소외된 쪽은 이 땅의 민중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소득재분배의 불균형을 지역적으로 전라도에 편중시켰던 것이다.
그러므로 정권욕예 사로잡힌 전두환 군부가 총칼로 권력을 탈취하려고 했을 때 이지역 광주·전남도민의 가열찬 저항에 부딪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다. 이것은 생존권의 표현이지 지역감정이 아니다. 역시 지역감정 조작은 독재권력의 통치수단이다. 그들은 망국적 풍조로 지역감정을 얘기하고 이 지역감정을 해소하기 위하여 국민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고 떠들어대지만 실제로 지난 대통령선거때 서울 타워호텔에 흑색선전부를 두고 지역감정을 부추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런 민정당이 지역감정 운운하는 것은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설의 주장도 일견 그럴 듯 해 보인다.
그러나 과잉진압이라는 주장뒤에는 당시 공수부대가 치안유지상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시위대가 과격하게 맞섰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과잉진압을 하고 발포까지 하게 되었다는 논리가 깔려 있다. 다시 말해 치안유지의 목적만 있었을 뿐 처음부터 살상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광주시민은 잘 알고 있다. 한 손에 대검, 한 손에 철심 든 곤봉을 들고 미쳐 날뛰며 처음부터 학살 만행을 저질렀던 공수부대의 만행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과잉진압의 차원이 아니라 국민의 저항의지를 절멸하고 권력을 탈취하기 위한 전두환세력의 음모와 만행이었다.
김대중씨의 구속에서 발발 원인의 전부를 찾아내는 것도 권력의 음모다. 김대중씨가 받았던 고난은 바로 이 지역 대중이 받았던 수난의 일부분이다. 김대중씨의 구속은 광주항쟁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게 한 어느정도의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광주항쟁의 발발 원인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광주항쟁은 80년 민주화의 봄을 맞아 활화산처럼 터져 나온 민중의 민주화 열망을 짓밟고 권력을 탈취하고자 한 12·12군부 쿠데타 주역들의 계획적 탈취 음모에 광주·전남 민중의 자주·민주·통일을 쟁취하고자 맞선 민중봉기였다.
이러한 시각이 왜곡된다면 청문회도 결국 독재권력의 이용물이 되고 말 것이다. 청문회 이후에도 계속되어야 할 것은 ‘학살자 처단’이란 민중의 요구에 겸허하게 귀 기울이는 자세이다. 바야흐로 학살만행의 응보는 시작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학살자 스스로가 던진 부메랑이다. 스스로 뿌린 악의 씨앗이 다시 목에 칼이 되어 되돌아 온 것이다. 그것은 결코 전두환씨로만 향하고 있지 않다. 12·12쿠데타와 광주학살로 출발한 5공화국과 6공화국 권부 모두에게 되돌아온 부메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