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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그때 그 목소리의 주인공,전옥주는 누구인가? 나의갑(월간예향, 1988. 5)

본문

특집/「光州」계속되고 있는가

그때 그 목소리의 주인공

전옥주는 누구인가?

의문을 뿌리고「女子를 잃은」그녀 그 뒤



빨간T셔츠에 청바지를 받쳐입은 긴머리 처녀―80년 5월, 광주의 어느 젊은 시인이 있어‘이 나라의 십자가를 메고 무등산을 넘어/골고다언덕을 넘어가는/아아 온몸에 상처 뿐인 죽음 뿐인’이라고 절규했듯, 그숨막히는 역사의 현장에 그녀는 이런 차림으로 뛰어들었다. 그녀의 이런 차림새는 그녀 특유의 열정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집안나이로 올해 막마흔. 지금도 청바지를 즐겨입는다는 그녀는, 5ㆍ18당시 32세의 나이를 갖고 있었다. 5월에 부는 바람. 그 바람결에 전설처럼 묻어오는 청바지의 그녀, 전옥주(全玉珠)씨.「8년」이란 시간이 어둠으로 흘러가고, 그 어둠속에 묻힌 그녀의 서러운 외침―잊지 못한다.

광주의 가슴은.

그 외침은 슬프도록 고운 자운영빛이었고, 부엉이의 피울음이었다. <전투경찰 아저씨, 우리들에게 최루탄을 쏘지 마십시오. 여러분과 우리는 함께 힘을 모아 광주시민을 몰살 하려는 ×××을 몰아냅시다><우리는 맨주먹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이깁니다><끝까지 물러서지 맙시다. 우리 스스로 광주시를 수호합시다><공수부대가 우리 형제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도청으로! 도청으로!>마이크를 통해 흘러나온 그녀의 목소리를 일부 정리해 본 것이다. 당시 그녀는 가두방송원이었다.

5월 그날, 거리로 뛰쳐나왔건 집에 있었건, 그녀의 이 애처로운 목소리가 가슴 어디쯤 한 구석에 남아 있지 않은 광주사람은 드물 것이다. 용달차나 군용 지프, 혹은 버스등을 타고 사방군데를 돌아다니며‘그 성과 또한 대단했던 걸로 광주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다. 그만큼 그녀의 목소리는 흡인력이 강했다.「마력의 목소리」를 가졌다고나할까,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슈퍼급에 해당했던 것이다.“학교 다닐 때 웅변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랬던 모양이지요.”

청바지적 열정과 분노가 어우러져

거기에 청바지적 열정과 분노가 한데 어우러져 그런 목소리를 만들어냈을 것이란 생각을, 그녀와의 짧은 만남에서 얼른 읽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단순한 가두방송원만은 아니었다. 시위주도 능력도 수준급이었고, 협상능력 또한 프로급에 속했다. 어쨌거나 그녀는 이 능력 때문에‘망한 여자’가되고 만다. 간첩누명으로 그랬고, 프락치의혹으로 그랬다.“저는 여자로선 병 신입니다.”그녀는 스스럼 없이 이 말을 했다. 나라는 국민에게 무엇이며, 나라의 폭력은 또 무엇인가. 그녀는 나라에「여자」를 찢긴 셈이 될 것이다. 간첩누명이야 법정에서 말끔히 벗었지만, 프락치의혹은 그녀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프락치라니 무슨 말입니까? ‘전옥주가 5공화국을 탄생시킨 히로인’이라고들 말들이 있는 모양인데, 만나보지도 않고 왜 그런 글을 씁니까? 순전이 추측으로 말입니다「신동아」9월호엔가 나에 대한 글이 나왔다고 어떤 선배가 전화를 해줘 알았는데, 정말 억울하고 분했어요.‘그때’처럼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더라고요. 당장「신동아」에 쫓아가 항의하고 문답식으로 사과문을 내라고 했습니다.”

지난해「신동아」9월호는 ‘광주사태 다섯가지 의문점’이라는 큰 제목을 다는 한편,‘청바지 차림의 의문의 퇴장’이란 작은 제목아래 전옥주씨를 의심했던 것인데, 계엄군쪽이 아니었겠느냐는 것이 의문의 골자. 그녀는 프락치였을까? 이글을 다읽고나면 그 의문은 풀리리라. 지난 2월 8일, 그녀는 민주화합추진위원회의 증언대에 섰다. 조용히, 아니 숨어살다시피 하는 그녀에게 증언대에 서게 된 이유를 물어보았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민화위증언대에

“민화위의 일부 인사들의 발언에 화가 났어요. 터무니 없는 증언이었으니까요. 박병권위원장에게 전화를 넣어 문의를 한 뒤 증언대에 서기로 결심했습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였죠. 당시 광주교도소장이란 사람(한도희씨)의 증언도 사실과 다르지 않습니까? 담양쪽으로 진출하려면 반드시 교도소앞을 거쳐야 하는데, 그걸 습격이라고 증언하지 않던가요.”한씨의 민화위증언은 이렇다.“20일 직원가족들로부터 교도소 습격정보가 들어왔습니다. 교도소앞이 3거리인데, 시위대가 들어오려는 것을 무기가 등장하기까지는 우리가 막았습니다. 그러나 21일 오후부터 무기가 등장했습니다. 22일에도 수차례나 교도소앞 3백m 전방까지 시위대가 나타나 침입을 시도했으나 결국 못들어왔습니다.”한도희씨등 일부인사들의 증언은 본인들의 요청에 따라 비공개로 진행되었음을 밝혀둔다.

그러나 전옥주씨는 증언대에서‘교도소 습격’건을 전면 부정하는 한편, 계엄군의 술책이었다고 몰아붙이고 있다.“당시 광주시민들은 절대로 교도소를 탈취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늘을 두고 맹세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것은 계엄군의 작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담양쪽에 연ㆍ고대생이 서울에서 내려와 계엄군의 제지를 받고 있다고 해 그쪽으로 가보면 없고, 그 뒤 곧 송정리, 목포쪽에서 온다는 소문이 계속 나돌았습니다.”그녀의 증언은 이어진다.“그것은 우리를 흩어지게 하기 위한 계엄군의 술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중에 광주교도소를 탈취하려했던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강도나 절도등도 절대로 없었습니다”계엄군의 작전쪽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대라면, 이런 것이 있다. 가두방송을 할 때, 그때 그때 상황을 봐 외치기도 했지만, 시위대들이 메모를 해 건네주는 ‘쪽지’를 그대로 읽어내려가는 경우가 많았다는데 주의표시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녀는 이 두 경우가 반반쯤 될거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쪽지’나 소문이 죄다「시위대의 것」이라고 믿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말하자면「계엄군쪽의 것」도 있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게 된다. 당시의 상황이 어떤 상황인데 계엄군측에서 시위대열에 끼어들지 않았겠는가. 이는 작전의 상식에 속하는 것이리라.

시위가담은 19일부터

―언제부터 시위에 가담했습니까?“무궁화보급운동 관계로 서울에 사는 이모님댁에 갔다가, 19일 밤9시엔가 9시 30분에 새마을호편으로 송정역에 도착했습니다. 물론 광주소식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죠. 송정리에서 자가용영업차를 5천원을 주고 탔습니다. 광주에 오다가 서창검문소에서 잡혔어요.(서창검문소는 광주와 송정의 중간쯤에 있다)검문하는 사람들이‘통행금지가 돼 시내에 못들어간다’면서‘여관에서 자고 내일 낮에 들어가라’고 하더군요.‘광주엔 난리가 났으니 들어가면 죽는다’고 했을땐 겁이 덜컥 나기도 했지요.”타고난 말재주에다, 민화위에서 증언을 한지 얼마 안되어서인지는 몰라도 그녀의 말은 막힘이 없었다. 이모는 명승희씨로 대한무궁화여성중앙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당시 그녀는 이모일을 돕는 처지였다.“솔직한 심정으로 광주일이 궁금했습니다. 궁금증도 없지 않고 집에도 가야 할 입장이어서‘우리집은 화정동 국군통합병원옆에 있으니까 시내까지 안들어가도 된다’면서‘보내달라’고 사정했더니 트럭 하나를 잡아주더군요. 국군통합병원 밑에서 내려 운전사에게 담배 값이나 하라고 얼마를 주고 집에 들어가니까, 식구들이 모두 깜짝 놀라요. 이 난리에 어떻게 왔느냐고 해서 과정이야기를 쭉 했습니다.”

그날 밤 그녀는 친구와 약속이 되어 있었다. 친구도 만날겸 서울차림 그대로 몰래 집을 빠져 나왔다. 어머니의 걱정스런 눈빛이, 오빠의‘밖에 나가면 큰일난다’는 우격다짐이 그녀의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 32세. 이것만으로도‘보통여자’이기를 거부하는 그녀를 그릴 수 있을 것 같다.“충금지하상가(당시 공사중)에 이르렀을 때 정말 피가 거꾸로 솟구쳤습니다. 도망치다 벗겨진 신발들이 무수히 널려 있는 것을 보니까 눈물이 핑 돌더라고요. 처음엔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는 시위대에 물을 떠다 날랐습니다.”광주시민의 자격으로 5ㆍ18에 가담했다고 밝히는 전옥주씨―. 그녀의 신상에 관한 소문은 당시 이랬었다.

본적=전남 보성, 학력=조선대 무용과 중퇴, 경력=마산서 무용학원 경영. 가담동기에는 소문이 두 개나 있다. 하나는 위에서 밝힌 바와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서, 고향에 왔다가 광주참상을 보고 가담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동생이 희생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을 참지못해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소문을 이렇게 정정했다. 본적은 맞지만, 서울서 대학을 다녔으며, 고전무용을 전공했다는 것이다. 또 마산에다 무용학원을 차려볼 생각으로 마산을 다녀온 적은 있었고, 2남매의 막내이므로 동생희생설은 터무니 없는 것이라며 밝게 웃는다.

그녀는 프락치인가

문제는 꼬투리를 잡으려는 시각에 있다.「소문」과 「실제」가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프락치가 아니냐고 의혹을 품는 일은 온당치 못하다는 얘기다. 그 자신 가두방송을 통해 신상에 관해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 그런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흥분상태에서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입으로 망한 여자’의 길을 처음 그녀는 어떻게 열었을까. 마이크를 어떻게 해서 잡게 되었느냐는 얘기가된다.“학생들은 그날 밤(19일 밤)마이크를 준비하기 위해 금남로에서 모금운동을 했습니다. 학생들은 5분만에 45만원을 모금했습니다. 곧 그돈으로 앰프를 구해왔으나 최루탄에 맞아 금방 절단나고 말았습니다.”그 와중에서도 그녀는 동사무소에 가면 앰프가 있지 않을까 하는생각을 하게 된다. 학운동사무소를 택했다. 대학생 2명과 ■■■씨가 그녀를 따라 나섰다. 그녀와 ■씨―. 그녀가 사수라면 가톨릭신자였던 ■씨는 성실한 조수였다. 나중 ■씨도 그녀와 거의 같은 죄명으로 붙잡혀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돈 7만원을 내놓으면서 내일 아침 6시까지만 앰프를 빌려달라고 했더니 안된다고 그래요. 그래서 7만원을 공무원에게 던져주고 학생들에겐 앰프를 떼어내라고 했습니다.”이 때문에 그녀에게는 「특수공갈」이라는 죄명까지붙는다.이후 그녀는 ‘계엄군 아저씨, 당신들은 피도 눈물도 없습니까’등 목이 쉬도록 외치며 시가지를 누비는데, ‘계엄군 아저씨…’란 호소로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될 듯 싶다. 그녀의 서럽고 뜨거운 목소리―. 그건 광주의 가슴을 온통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질서를 지킵시다”

‘기물을 파괴해서는 안됩니다. 질서를 지킵시다. 불순분자를 색출해냅시다. 불순분자가 있으면 저희방송반으로 알려주십시오.’그녀의 또 다른 호소다. 열정은 「32」라는 나이를 뛰어넘고 있었다. 어떤 논자는 5·18을 다섯국면으로 구분한다.

제 1국면(18일) : 학생시위, 항쟁의 발단 시기

제 2국면(19일) : 민중봉기로의 발전 시기

제 3국면(20∼21일 오전) : 전면적 민중봉기로 발전 시기

제 4국면(21일 오후∼22일 아침) : 무장투쟁과 승리의 쟁취 시기

제 5국면(22∼27일) : 민중해방의 시기

전면적 민중봉기로 발전시기에 있어 전옥주씨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불꽃같은 활약」이란 표현도 약한 수식일지 모른다.「불의 날」로 요약되는 20일. 이날 밤 금남로에서는 차량시위가 벌어지고, 광주문화방송국이 불 탄다. 이른바 신역전투고 이튿날 새벽 4시까지 전개된다. 전옥주씨도 잠 한숨 붙이지 못한다.“신역에서 시신 2구를 맨처음에 발견한 사람이 바로 접니다. 그때가 새벽 6시쯤 됐을 겁니다. 그 시신들은 신역현관 앞에 있었는데, 정말 몸서리가 나도록 비참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어떻게 물러설 수 있었겠어요. 아무리 여자지만….”그녀는 남자들과 함께 시신을 거두어 리어커에 싣고 대형태극기를 덮은 뒤, 가두방송을 하면서 금남로로 돌아왔다. 금남로는 이내 ‘사람의 강물’로 넘실대고 있었다. 그것은 ‘분노의 강물’이었다. 계엄군의 진압자세는 전날에 비하면 상당히 누그러져 있었다.“그때 계엄군과 1시간 가까이 대치하면서 좋은 어조로 대화가 됐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아무런 원한이 없다. 우리 위대한 광주시민들을 왜 당신들은 무참하게 죽이느냐.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니까? 중령 한 사람이 ‘자신도 표현을 못 하겠다. 우리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느나’고 물었습니다.”그녀는 곧 차 위로 올라가 이렇게 호소한다.“일단 군인들도 명령을 따랐을뿐이니 저들에게 돌을 던질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협상을 하면 어떻습니까?”

협상대표로도 활약

시위대의 반응은 좋았다. 5명씩 스크럼을 짜도록 하고 연좌시켰다. 그리고는 시신들을 계엄군앞으로 보냈다.“그 중령이 다시 요구사항을 묻더군요. 그래서 ‘지금 시민들이 불안해 하고 있고, 시신들의 눈이 다 파헤쳐져 있으며, 심지어는 학생들을 태워준 택시기사들까지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했다. 그러니 계엄사령관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그 중령이 ‘사령관을 만나려면 우선 도지사를 만나야 하니까 도청으로 가자’고 했습니다.”협상대표에는 그녀를 포함, 5명이 뽑혔다.“도청으로 들어가 장형태도지사의 모친상 관계로 한 30분을 기다렸다가 장지사를 만났습니다. 주소와 이름을 대고 찾아온 이유를 얘기했습니다. ‘지금 시민들이 불안해 하고 있으니까 계엄군들은 시민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후퇴하고, 현재 잡혀간 학생과 시민들은 소재와 사상자수를 정식으로 보도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협상대표들은 장지사로부터 이런 답변을 듣는다.“계엄사령관의 소재파악이 안되고 있으니 좀 기다려 주십시요.”협상은 순탄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가 사령관을 만나 전체적인 얘기를 할테니 몇시까지 해주겠느냐고 물었지요. 낮 12시까지 만나게 해주겠다고 하더군요.”그녀는 장지사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고 한다.“제가 그냥 나가게 되면 시민들이 다시 분산돼 소란해질테니 장지사께서 직접 나가 시민들을 자중시켜 주시고 사과의 말씀을 해주십시요라고 건의했습니다.”그때 장시사는 “먼저 시민들에게 나가 자중을 하게 하면 5분후에 나가겠다”고 말했다 한다.“다시 시민들 앞에 나와 묵념을 올리고 노래를 서너곡이나 불러도 그 분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30분정도 지나니까 시민들이 저에게 ‘당신이 협상한다고 들어가는 바람에 아까운 시간만 낭비했다’며 질책하더군요.”그때였다. 앞에서 갑자기 장갑차가 밀고 들어왔다.엉겁결에 광주관광호텔 쪽으로 피했는데 그게 화근이 된다.“시위대쪽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왜 계엄군쪽으로 빠져나갔느냐고들 의심을 하는데 그 급박한 상황에서 피할 길이라고는 거기밖에 없었습니다. 계엄군쪽이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한 채 본능적으로 피한 것이죠. 그때 피하다가 바로 옆에서 최루탄이 터져 쓰러졌습니다”이말 끝에 그녀는 기자들이 바로 이 대목에 강한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고 밝혔다.“얼마나 지났을까, 그 중령이 나타나 마이크를 주워다 주면서 ‘지금 광주시민들이 당신말은 들어도 우리말은 듣지 않는다’면서 수습을 해달라고 부탁하더군요”이 대목도 일단 의문을 달 수 있다. 그러나 금방까지 협상대표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의문은 사라진다.

다시 마이크를 잡고

그녀는 다시 마이크를 잡는다.“지프를 타고 방송할 때였는데 어떤 부인이 날계란 두 개를 깨 먹여주기도 하더군요.” 그녀는 그것을 ‘광주의 마음’으로 새겨두고 있었다. 26일 새벽 5시, 그녀는 차라리 울었다. 그 새벽, 그녀의 외침은 눈물이었다.‘광주시민여러분! 지금 계엄군들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모두 잠에서 일어나 가족들과 시민들을 보호합시다. 우리는 그들과 민주적으로 싸워 그들을 물리칩시다. 빨리 잠에서 깨어나 도청앞으로 나오십시오!’이날 새벽 계엄군이라는 농성동에서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진입중이라는 제보가 「시민군」의 무전기를 타고 도청으로 흘러 들어와 전옥주씨가 광주의 새벽잠을 흔들어 깨웠던 것이다. 당시 수습위에 참여했던 김성용신부가 그 새벽 상황을 「분노보다는 슬픔이」란 수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새벽 5시 30분경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돌연 초비상사태를 맞이했다. 탱크가 진입해온다. 순간 수라장으로 화했다. 총을 가진 시민군, 학생 전원이 소리를 지르며 달렸으며, 혼란은 극에 달했다. 어떻게 할 것이냐. 모두 자폭하자. 상황실에서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차가 출동하였으며, 여기저기 다이얼을 돌리면서 농성동 부근의 동태를 물었다. 의자에서 자고 있던 부지사가 벌떡 일어나 확인해 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나가서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또 속은 것이다.

이 일을 어찌할 것인가. 답답하고 불안하다. 철야로 화약고를 지키고 어떻게 하든지 이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불안과 공포속에서 설득을 계속해 왔는데….’이날 아침 수습위원들은 농성동입구까지 「죽음의 행진」을 벌인다. 행진에 앞서 ①1시간이내에 군은 본래의 위치로 철퇴하라②그렇지 않으면 전시민의 무장화를 호소하고③게릴라전으로 싸웁시다④최후의 순간이 오면 TNT를 폭발시켜 전원 자폭합시다등 4개항을 결의하고서.그녀의 외침은 아침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계엄군이 공격해옵니다. 탱크가 진격해옵니다. 오전 10시까지 모두 도청앞으로 모여주십시오.’이날 새벽의 작전은 시험작전이었음이 민화위증언에서도 밝혀졌다.이날 오전 그녀는 ‘모란꽃’이 된다. 청천에 날벼락같은 일이지만 얽어매는데는 도리가 없었다.“시신 3구를 광주적십자병원에 옮기고 오던 도중인데 도청앞 군중들 틈에서 「어떤 사람」이 갑자기 ‘저 여자는 간첩이다. 이북에서 온 사람이 아니고서는 저렇게 말을 잘 할 수 없다’고 소리치지 않겠어요.”「어떤 사람」은 당시 점퍼차림에 스포츠형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붙잡히는 순간 그녀는 함정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모란꽃’이란 수사과정에서 얻은 그녀의 억지암호다.그녀는 수사과정에서 고문이야기를 퍽 길게 했다. 이 대목을 꼭 많이 써 달라는 부탁과 함께.

“그날(26일)부터 장장 10일동안 고문을 당했습니다. 잠도 재워주지 않고 백열등을 켜놓은채 고문을 했습니다. 제 얼굴이 지금 푸르면서 윤곽이 고문 전과는 판이하게 바뀌어 버렸습니다. 당시 저를 봤던 분들이 지금 보신다면 몰라볼 것입니다. 옆방에서 들리는 학생들의 고문소리를 들려주면서 저것이 네 오빠라고 할 때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습니다. 송곳으로 찌르면서 ‘네 아버지는 충신인데, 너는 역적이 돼서야 되는가’‘모란봉에서 교육을 얼마나 받았느냐’등으로 사람을 괴롭혔습니다.”인터뷰중 그녀는 송곳에 찔렸다는 무릎과 부러진 오른쪽 팔목을 보여주기도 했다.다음은 그녀가 들려주는 아버지 전평근(작고)씨의 얘기.“아버님은 보성군 율어지서장을 지내셨는데 6·25때 공을 많이 세웠습니다.”15년 구형에 10년 선고를 받은 그녀는 81년 4월 3일 5·18관련자 58명과 함께 대통령 사면조치로 출옥한 뒤 한(恨)많은 광주를 뜬다. 그리고 이미 5·18이전부터 알고 지냈던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게 된다. 현재 그녀는 서울에 살고 있다.「전옥주」는 그녀의 본명이 아니다. 「옥주」는 집에서 부르는 이름이고, 「춘심(春心)」이 호적이름이다.5·18기록을 보다 보면 사람은 하나인데 「옥주」로도 나오고 「춘심」으로도 나오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5·18광주문제는 어떻게 풀어져야 한다고 봅니까?“무엇보다도 먼저 광주시민의 명예회복이 이뤄져야 합니다. 이것이 이뤄지면 다음 문제는 자동적으로 풀어집니다. 「광주」는 어떤 개인이나 단체의 것이 아니고, 전 시민의 것, 전 도민의 것, 더 나아가 전 국민의 것입니다. 「광주」를 말할 때 이점을 빠뜨려서는 안됩니다.”그녀는 이 말을 몇번이나 거듭했다. 그녀는 「5·18광주의거부상자회」회원이다. 지난 2월에 회원이 된 것인데, 부상자회 3월 월례회에 참석중이었을 때 「예향」 이 그녀를 만났다.

글/나 의 갑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