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 이달에 만난 사람 - 5·18 기념 재단 초대 이사장 조비오 신부(월간예향, 1995. 5)
본문
○ 이달에 만난 사람
5·18 기념 재단 초대 이사장 조비오 신부
광주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그는 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 광주를 짊어졌다. 80년 5월 죽음의 행진, 88년 광주 청문회의 증언, 그리고 이제 만신창이가 된 5월을 다시 세우기 위해 혼연스럽게 나섰다
인터뷰/이재의 기자
광주 봉선동 천주교회에서 느껴지는 첫 인상은‘엄숙함’이다.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이 적절하게 배합된 성당은 정교가 지배하던 서구 중세의 엄숙하고 절제된 종교적 분위기를 진하게 풍긴다. 작년에 신축한 이 성당은 무질서하게 들어선 주변의 아파트 숲과 기묘한 대비를 이룬다. ‘광주의 고뇌’-. 5월 광주의 아픔과 고뇌를 이야기할 때 우리의 뇌리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한 인물이 있다. 현재 광주 봉선동 천주교 주임신부를 맡고 있는 조비오 신부가 바로 그다. ‘사제적 양심’을 걸고‘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 조비오 신부는 광주의 진실을 증언했다. 광주를 벗어난 어떤 지역에서도 광주의 진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을 때, 가해자집단이 권력의 정상에서 서슬퍼런 칼자루를 쥐고 있을 때, 그가 쏟아낸 증언은 파문을 일으켰다. 89년 2월23일 국회 광주청문회에서 조비오 신부는‘신부인 나 조차도 손에 총이 있으면 쏘고 싶었다’고 했으며 광주진압군의‘헬기 기총소사’를 증언했다.
이는 당시‘자위권 발동’운운하던 가해자측의 방어논리를 정면으로 뒤집는 결정적인 증언이었다. 가해측의 직접 당사자인 육군항공대는 조신부의 증언이 위증이라며 그를 즉각 고소했다.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곧바로 다음과 같은 취지의 성명을 냈다.“예언자적 고발은 언제나 회심에의 초대인 것입니다. 우리는 진실을 말해야 할 때 침묵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를 뼈 아프게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조비오 신부의 증언이… 회개를 촉구한‘사제적 양심의 발로’임을 믿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5·18 15주기를 맞는 1995년 오늘, 조비오 신부는 또 광주를 위해‘사제적 양심’으로‘십자가’를 지는 위치에 서 있다. 그간‘5월’은 만신창이가 됐다. 5월을 훼손하고자 하는 외부 세력으로부터는 온갖 음해에 시달려야 했고, 5월을 현실 정치에 이용하고자 하는 내부 세력에게는 이전투구식의 갈등을 겪는 등 이중의 상처에 시달려야 했다. 이런 와중에서 5월을 아끼고 사랑하던 사람들마저 환멸을 느껴 하나씩 둘씩 등을 돌렸다. 이제 빈껍질만 남은 듯 왜소해질대로 왜소해진 5월, 그런 5월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조신부가 나섰다. 그는 5월 광주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이렇듯 선구자적인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1980년 5월26일 고립무원 포위된 광주를 구하기 위한 마지막 노력으로 조신부는 소위‘죽음의 행진’대열에 참가했다. 1988년 오랜 침묵을 깨고 광주의 진실이 전국민에게 알려질 때 조신부는 또 광주의 중심부에 서있었다.
국회 광주청문회에서 가장 큰 파문을 일으킨‘헬기 기총소사’를 군 당국의 온갖 협박과 위협 속에서도 용기있게 증언했다. 그는 광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언제나 엄숙한 사제적 양심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1995년, 광주항쟁으로부터 15년이 흐른 이 시점에서 그는 세 번째로‘광주의 위기’와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지난해 8월30일 창립된 5·18기념재단의 초대 이사장직을 맡은 것이다. -먼저 초대 이사장을 맡으신 소감을 약간 늦은 감이 있습니다만 한 말씀 해주시죠.“그 누가 아무리 5월을 폄하시키려 해도 5월정신은 여전히 숭고합니다. 민주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5월정신이야 말로 온국민정신으로 확산돼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민족의 정기가 서고 장래가 있습니다. 약간의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5월정신 자체가 통째로 매도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지금까지 다소 불미스런 점이 있었다면 이를 극복하고 80년 5·18 당시의 정신으로 돌아가‘모두가 하나’되는 새로운 마음자세로 5월기념재단을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숭고한 5월정신
5월재단의 출범은 5월민주화운동의‘합법성 획득’이라는 점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그간 산발적으로 추진됐던 5월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기념사업을 5월재단의 틀 안에서 해나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어찌보면 이런 성격을 갖는 5월기념재단의 초대 이사장에 조비오 신부가 뽑힌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그간 5월재단이 출벌하기까지 어려움도 많은 걸로 아는데요?“그렇죠. 솔직히 그간 내부적인 갈등의 골은 깊고, 그럴수록 외부로부터 고립되고, 이런 사태가 지속되자 광주시민들 뿐 아니라 광주를 아끼는 국민들로부터도 5월단체의 위신이 추락됐죠. 한때 저를 포함해 광주에서 뜻있는 몇분이‘9인위원회’라는 걸 만들어 수습해보고자 나섰으나 덕망과 역량이 부족해 지지부진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결국 극적으로‘통합’해 5월이 하나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셈입니다.”-다른 분들도 많이 계실텐데 어떻게 해서 하필 신부님이 5월재단의 초대 이사장에 뽑혔다고 보십니까? “제 개인의 능력이나 자격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단지 종교인이라는 제 신분이 개인의 영리에 구애받지 않고 객관적인 위치에 설 수 있기 때문에 상징적인 인물로 내세운 게 아니냐, 그래서 이의없이 만장일치로 초대 이사장에 선출됐다, 그렇게 봅니다.”-5월재단이 출범은 했으나 통합과정에서 노출된 갈등이 아직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채‘봉합’된 수준에 불과하다는 견해도 있는데요? “아직 그런 갈등이 완전히 해소됐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어찌됐든 약간 생각이 다르더라도 5월재단이라는 하나의 틀 속에서 서로 양보하는 자세로 의견을 조율한다면 머지 않아 그런 갈등의 앙금은 해소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5월재단에 거는 광주시민과 국민의 기대는 크다.
그러나 잘 될 수 있을까 하는 우려의 시각도 없지 않다. 그간 내부갈등이 너무 심했고 재단의 출범을 서로 견해가 다른 세력들 사이의‘통합’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내부에선 여전히 팽팽한 견해차가 존재하고 있음을 뜻한다. 바로 이런 어려움을 뚫고‘5월정신’를 5월 당사자만의 것이 아니라 광주시민 전체, 한걸음 더 나아가 국민적인 것, 혹은 세계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당위적인 요구를 얼마나 실현시킬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누구에게나 재단 문호개방
-5월기념재단을 이끌고 갈 조타수 역할을 맡으셨는데 앞으로 재단운영에 대한 기본방침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5월기념재단 설립의 목적과 취지에 찬동하는 모든 사람에게 문호를 개방해 가입을 공개적으로 권유하겠습니다. 명실공히 5월재단이 운동집단만의 것이 아니라 광주시민의 재단, 전국민의 재단으로 확산하고, 나아가 세계 곳곳에 살고 있는 뜻 있는 해외교포들과도 연락해 가입토록 할 생각입니다. 이를 통해 내부의 상처를 치유하고 손상된 이미지를 회복해 5·18의 세계화를 이루도록 할 생각입니다.”
-재단에 가입할 수 있는 범위나 자격에 제한을 두지 않겠다는 생각이신가요. 목적과 취지에 찬동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죠. 재단이 특정정당인과 연계를 갖는 정치단체를 지양하고 비정치적이며 사회공익단체이기 때문에 광주시민은 물론 국민 개개인이 개인자격으로 참가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정치인도 여·야를 막론하고 평화 협동(통일) 아닙니까? 바로 이런 정신이 국민정신이 돼야 하고 자라나는 어린 새싹들에게 민족정기의 기초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재단을 통한 5·18의 세계화는?
“세계적으로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다 고통과 비극을 겪은 광주와 유사한 경험을 가진 세계 각처의 시민들과 유대관계를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재단차원에서 펼쳐가겠다는 생각입니다.”
-재단의 활동방향은?
“재단은 5월기념사업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총괄추진할 것입니다. 5월운동의 역사적 자리매김, 교과서 수록, 국가차원의 기념관 건립 및 기념비 설치, 교육·장학사업, 5·18 피해자에 대한 자립과 복지를 위한 수익사업 등을 관계기관과 긴밀히 협조해 추진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현재 재단에 4개의 분과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기념사업위원회, 정신계승사업위원회, 재정위원회, 기획위원회 등입니다.”
5월광주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조비오 신부. 5월과 관련해 많은 사람들이 조신부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만 막상 그가 신부로서 어떤 사람인지, 어떤 과정을 거쳐 성장했는지를 아는 사람은 흔치 않다.
광산 본량이 고향
-신부님은 어떻게 해서 성직자의 길을 걷기로 했습니까?
“네? 아-, 그거요?”5월문제로만 치닫던 질문이 갑자기 바뀌자 약간 당혹스러워 하는 모습이다.“제 고향은 광주에 편입된 광산 본량입니다. 10남매(6남4녀) 가운데 다섯째로 태어났죠. 6·25전쟁 직후 광주사범을 다녔어요. 전쟁후 농촌은 피폐할대로 피폐해 농민들은 삶을 겨우 연명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런 풍경을 보면서 저는 농민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일을 해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에게 삶의 보람을 안겨주고 싶었어요.”그래서 교사가 될 결심을 했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하기 전 심하게 아팠다. 투병하는 동안 종교서적을 접하게 됐다. 점차 그쪽으로 이끌렸고 급기야 신앙으로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결심한다.“할아버지를 비롯해 부모님들은 처음엔 완고하게 반대하셨죠. 내가 신부가 되겠다는 소식을 듣고 펄쩍 뛰셨어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서당을 하면서 한학을 가르치는 선비집안이었거던요.‘우리집 망칠 놈’이라며 진노하셨어요.”그러나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대신 온갖 노력을 다해 부모님을 성실하게 모셨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부모에게‘충성’을 다한 것이다. 조신부의 이런 노력은 마침내 자신의 부모는 물론 형제, 친척까지 모두 천주교 신자로 변화시켰다. 현재 TV에서 코미디언으로 활동하고 있는 조정현씨는 친 사촌인데 그도 역시 조신부의 영향을 받아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됐다고 한다.
지난해 출간된‘사제의 증언’에는 조신부의 약력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전남 광산 출생(1936), 대건신학대학 졸업(1969), 사제서품(1969), 사레지오여고 지도신부(1971), 명상의 집 피정 지도신부(1972), 광주대교구 나주 본당 주임(1973), 광주대교구 계림동 본당 주임(1976), 레지오 마리애 광주 세나뚜스 지도신부(1977), 광주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지도신부(1977), 광주대교구 진도 본당 주임(1981), 광주가톨릭대학 교수(1983), 푸른군대 지도신부(1986), 레지오 마리애 광주세나뚜스 지도신부(1986), 사회복지법인 소화자매원 원장(1987), 광주대교구 순천 저전동 본당주입(1987), 광주대교구 화순 본당 주임(1992), 광주민주언론협의회 의장(1992), 광주대교구 봉선동 본당 주임(1993).
학구파, 8권의 책 저술
조신부가 기거하는 봉선동 성당 왼편에 독립된 건물 사제관 응접실은 보통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아파트 거실과 비슷하다. 벽에는 몇 년전 서울을 방문한 교황과 조비오 신부가 포옹하는 장면의 사진이 걸려 있다. 다른 쪽에는 조신부가 백두산 천지에서 찍은 사진과 몇 개의 그림, 판화 따위가 눈에 띈다. 길쭉한 소파가 거실 한켠을 차지하고 나머지는 온통 서가(書架)다. 세계사상전집을 비롯해 신앙서적, 동양사상에 관한 책들이 즐비하다. 안방에 있는 책까지 합치면 6천여권의 장서가 있다. 거실에 세워진 책꽂이에는 신앙에 관한 여러 가지 월간 잡지 가운데 섞여 있는 진보적인 시사잡지‘월간 말’도 눈에 띈다. -신부님은 책도 꽤 많이 쓰신 걸로 아는데요?“글쎄요. 그걸 많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동안 미사때 틈틈이 만든 강론자료와 각종 신문이나 방송에서 청탁을 받아 써두었던 원고를 묶어 그때그때 책으로 만들다보니 벌써 8권째가 됐군요.”‘사랑은 미움보다 강하다는데’‘인간회복을 요구하는 시대’‘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신앙과 조국(번역서)’‘듣고 보고 묵상하며 전하는 말씀’‘찬란한 새벽을 위하여(시집)’‘사제의 증언’따위다. 조신부는 학구파다. 가톨릭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8년간 공부했고, 그후 2년간 전남대 경영대학원에세 석사과정(4회)을 마쳤다. 동양철학에도 관심이 깊어 전남대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려 했으나 대학측의 사정으로 무산됐다. 가톨릭대학시절에는 교황청이 있는 로마로 유학을 가려고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자신을 가르치던 미국인 교수들이‘여기서나 로마에서나 똑같은 내용을 배운다’면서 굳이 로마에 갈 필요가 없다고 추천서를 써주지 않았다. 그 바람에 로마유학 기회를 놓쳤다.“당시 로마를 가지 못 했던 게 항상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지금도 저는 내 경험에 비춰 공부라는 게 역시 때가 있다는 걸 항상 어린 학생들에게 강조합니다. 그때 대건신학대학에서 2년간 함께 공부했던 박홍 신부(현 서강대 총장)는 당시 로마유학을 다녀왔었죠.”-아, 박홍 총장과 함께 공부하셨던가요?“네, 그랬어요. 후배였죠.”그렇잖아도 최근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박홍 총장에 대해 같은 신부로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이야길 물어보려던 참인데 마침 잘 됐다 싶었다. -그럼 박총장을 잘 아시겠네요? 작년 주사파발언파동에 이어 최근 북한의 박총장 암살사건 등 연이어 뉴스의 포커스가 되고 있는데요. 같은 신부의 입장에서 박총장의 행동을 어떻게 보십니까? “예-, 그러니까….”눈을 지그시 내려 감는다.
잠시 찌푸려진 미간에 긴장이 슬쩍 스쳐 지나간다. 한참만에 무겁게 입을 뗀다.“이건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제가 아는 박홍 신부는 적어도 확신을 가지고 주사파에 대한 발언을 했다고 봅니다. 저는 그분의 고충을 잘 압니다. 아마 제가 그분의 위치에 있었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스스로 완벽한 판단과 선택이 미숙한, 한창 공부해야 할 학생들이 정말로 이데올로기에 감염돼 사상적으로, 조직적으로(북한과) 연결됐다는 걸 파악했다면 당연히 그 부분의 교정을 위해 나서는 게 교육자이자 성직자의 몫이죠. 아마 제 생각으로는 박 총장이 많은 학생들을 접하다보니 실제로 그런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분은 주사파의 교조적인 논리로부터 학생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스스로 방패막이가 되겠다고 나선 분입니다. 저는 그분의 본심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방법상 매스컴에 학생과 만난 결과를 폭로하는 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잘못이었다고 봅니다. 그런 학생들과 토론의 광장을 만들어 끈기를 가지고 설득 했어야 옳습니다. 설령 그 학생이 이데올로기에 물들어 있다 해도 신분보장을 하면서 학구적으로 수백번이라도 계속 만나 설득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자로서 방법적인 면에서 서툴렀다고 봅니다.”
이젠 화염병 대신 실력으로
조신부는 지난 3월2일, 광주 시민연대모임과 균형사회를 위한 모임이 주관하고 광주일보와 광주문화방송이 주최한‘21세기 광주·전남 활로개척 시민대토론회’에서 기조발제자로 참가해 지역발전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피력해 꽤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얻기도 했다. -그때 신부님이 밝힌 지역발전에 대한 견해를 간단히 요약한다면 어떤 것입니까? “‘이젠 투쟁의 시대를 벗어나 실력으로 나서야 할 때다. 지금까지 투쟁으로 단련된 이 지역의 자긍심을 지역 발전을 위해 쏟아 붓자’이런 취지죠. 이제 더 이상 투쟁일변도는 안됩니다. 대학생들을 설득해서 무모한 희생을 막고 그 에너지를 실력배양에 쏟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광주·전남)는 지금 맨주먹밖에 없습니다. 아무도 도와주려 하지 않아요. 명예? 광주사람 외에 누가 지금 그 명예를 얼마나 알아주나요? 솔직히 말해서….”목소리의 톤이 높아지면서 손을 홰홰 젓는다. “이건 제가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얻은 결론이자 확신입니다. 1960년대부터 군사정권 하에서 이 지역의 젊고 유능한 엘리트들이 민주화투쟁을 위해 싸우면서 얼마나 많이 희생됐습니까? 전국단위의 운동단체 간부들 가운데 40∼60%가량이 호남출신 젊은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들은 지난 30여년간 군사정권에 의해 요시찰인물로 낙인찍혀 철저히 사회진출이 차단당해 왔습니다. 이 사람들의 행적을 보세요. 나이가 벌써 40대와 50대 초반인데 아직까지도 밥벌이를 해결하기 어려울 만큼 힘든 지경에 처해 있습니다. 반면 호남이 아닌 타지역 사람들을 보세요. 그 나이면 모두 탄탄한 사회적인 기반을 바탕으로 맘껏 활동하고 있습니다. 호남은 이제 인맥이 끊겨버렸습니다. 모두 지리멸렬해졌어요. 이래가지고는 지역발전이고 뭐고 안됩니다.
그렇다고 저는 호남사람들의 그간 민주화투쟁이 전부 잘못됐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탓만 하고 있을 필요도 여유도 없습니다. 이미 과거 집권자들의 잘못은 우리 모두 잘 아는 사항입니다. 우리 스스로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무엇보다도 절실합니다. 결과가 뻔한 악순환을 언제까지 되풀이할 겁니까? 이제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에 방법도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실력으로 이겨보는 겁니다. 인재를 양성해야죠. 아까운 인재가 더 이상 버려지지 않도록 모두 노력해야 해요.”흥분된 어조로 말의 속도가 더욱 빨라진다.“이제 막무가내로 불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비처럼 최루탄과 화염병, 각목만 가지고는 결과가 너무 뻔합니다. 안됩니다. 이런 방법은 우리 스스로를 고립시킬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실력을 기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실력이 있어야지 광주의 명예도 되살릴 수 있고 남이 얕보지 않습니다. 지금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뒤떨어진 걸 방치하다보면 숭고한 5월 광주정신 자체까지도 패배의식 속으로 더욱 빠져들어 나오기 힘들 것이 확실합니다.
현재로서는 호남이 살고 5월이 살고 우리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 이길 외에 다른방법이 있을 수 없다고 저는 확신합니다.”-얼마전 광주시가 주도해서 그와 비슷한 취지의‘광주평화선언’을 한 적이 있는 걸로 아는데요?“그거요? 그건 제가 주장하는 논리와는 다르죠. ‘평화’는 힘의 논리가 아니라 협력과 사랑의 논리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대결이 아니라 국민 각자의 균등한 참여기회를 보장하는 상태에서 공존공생할 때 가능한 겁니다.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의 모든 집단들 즉, 노동자 기업가 등 이해관계가 대립돼 있는 집단과 학생, 기타 각 시민단체 등이 모두 합의할 수 있고 그들의 이해관계를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억압과 불이익을 받는 집단의 소외감을 해소할 수 있어야 가능합니다. 관련 사회집단이 모여 함께 토론하고 합의해야 분출되는 불만요인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이런 본질적인 문제는 접어두고 대표들만 불러다놓고 선언만 하면 평화가 되는 겁니까? 평화선언자체가 그런 일방적인 문제는 접어두고 대표들만 불러다놓고 선언만 하면 평화가 되는 겁니까? 평화선언자체가 그런 일방적인 방식으로는 성립될 수 없죠.
그러다보니 일반 시민들의 분위기도 그 평화선언에 대해 냉랭해지고….”광주항쟁 15주년을 맞는 올해는 광주문제 관련자들에 대한 형사소송법상 공소시효가 만료되는 해다. 시효만기를 앞두고‘법적청산’문제가 올 5월정국을 뜨겁게 달굴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법적청산’에 대한 신부님의 견해를 말씀해 주십시오.“언필칭 문민정부라는 현 정권의 핵심에는 아직 가해자집단이 잔류해 있습니다. 문민정부 자체가 5·18 가해세력과 야합해서 태어난 정권 아닙니까? 따라서 현 정권하에서는 모든 게 청신될 수 없을 것입니다. 순수한 문민정부가 들어설 때 5월문제의 법적 청산과 명예회복이 실제로 가능하고 모든 진상이 밝혀질 것입니다.”
조비오 신부는 지난해 5월 광주항쟁과 관련 자신의 국회증언을 중심으로 기록한‘사제의 증언’이라는 책을 냈다. 이 책의 부제가 재미있다.‘진실을 말해도 믿지 않는 세상’. 이 부제는 5월광주학살에 대한 당국의 어정쩡한 태도와 아직도‘설마 그런 일이 일어났을려고…’하면서 여전히 광주학살을 좀체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 타지역 사람들에 대한 답답한 심정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듯 하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조신부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이젠 타지역 사람들에게 이해해 달라고 더 이상 떠들 필요없이 우리 스스로 실력과 힘을 갖춰 5월광주의 정당성을 널리 알리자’는 게 아닐까? 인터뷰를 끝내고 사제관을 나오면서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다.
5·18 기념 재단 초대 이사장 조비오 신부
광주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그는 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 광주를 짊어졌다. 80년 5월 죽음의 행진, 88년 광주 청문회의 증언, 그리고 이제 만신창이가 된 5월을 다시 세우기 위해 혼연스럽게 나섰다
인터뷰/이재의 기자
광주 봉선동 천주교회에서 느껴지는 첫 인상은‘엄숙함’이다.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이 적절하게 배합된 성당은 정교가 지배하던 서구 중세의 엄숙하고 절제된 종교적 분위기를 진하게 풍긴다. 작년에 신축한 이 성당은 무질서하게 들어선 주변의 아파트 숲과 기묘한 대비를 이룬다. ‘광주의 고뇌’-. 5월 광주의 아픔과 고뇌를 이야기할 때 우리의 뇌리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한 인물이 있다. 현재 광주 봉선동 천주교 주임신부를 맡고 있는 조비오 신부가 바로 그다. ‘사제적 양심’을 걸고‘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 조비오 신부는 광주의 진실을 증언했다. 광주를 벗어난 어떤 지역에서도 광주의 진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을 때, 가해자집단이 권력의 정상에서 서슬퍼런 칼자루를 쥐고 있을 때, 그가 쏟아낸 증언은 파문을 일으켰다. 89년 2월23일 국회 광주청문회에서 조비오 신부는‘신부인 나 조차도 손에 총이 있으면 쏘고 싶었다’고 했으며 광주진압군의‘헬기 기총소사’를 증언했다.
이는 당시‘자위권 발동’운운하던 가해자측의 방어논리를 정면으로 뒤집는 결정적인 증언이었다. 가해측의 직접 당사자인 육군항공대는 조신부의 증언이 위증이라며 그를 즉각 고소했다.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곧바로 다음과 같은 취지의 성명을 냈다.“예언자적 고발은 언제나 회심에의 초대인 것입니다. 우리는 진실을 말해야 할 때 침묵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를 뼈 아프게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조비오 신부의 증언이… 회개를 촉구한‘사제적 양심의 발로’임을 믿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5·18 15주기를 맞는 1995년 오늘, 조비오 신부는 또 광주를 위해‘사제적 양심’으로‘십자가’를 지는 위치에 서 있다. 그간‘5월’은 만신창이가 됐다. 5월을 훼손하고자 하는 외부 세력으로부터는 온갖 음해에 시달려야 했고, 5월을 현실 정치에 이용하고자 하는 내부 세력에게는 이전투구식의 갈등을 겪는 등 이중의 상처에 시달려야 했다. 이런 와중에서 5월을 아끼고 사랑하던 사람들마저 환멸을 느껴 하나씩 둘씩 등을 돌렸다. 이제 빈껍질만 남은 듯 왜소해질대로 왜소해진 5월, 그런 5월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조신부가 나섰다. 그는 5월 광주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이렇듯 선구자적인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1980년 5월26일 고립무원 포위된 광주를 구하기 위한 마지막 노력으로 조신부는 소위‘죽음의 행진’대열에 참가했다. 1988년 오랜 침묵을 깨고 광주의 진실이 전국민에게 알려질 때 조신부는 또 광주의 중심부에 서있었다.
국회 광주청문회에서 가장 큰 파문을 일으킨‘헬기 기총소사’를 군 당국의 온갖 협박과 위협 속에서도 용기있게 증언했다. 그는 광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언제나 엄숙한 사제적 양심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1995년, 광주항쟁으로부터 15년이 흐른 이 시점에서 그는 세 번째로‘광주의 위기’와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지난해 8월30일 창립된 5·18기념재단의 초대 이사장직을 맡은 것이다. -먼저 초대 이사장을 맡으신 소감을 약간 늦은 감이 있습니다만 한 말씀 해주시죠.“그 누가 아무리 5월을 폄하시키려 해도 5월정신은 여전히 숭고합니다. 민주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5월정신이야 말로 온국민정신으로 확산돼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민족의 정기가 서고 장래가 있습니다. 약간의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5월정신 자체가 통째로 매도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지금까지 다소 불미스런 점이 있었다면 이를 극복하고 80년 5·18 당시의 정신으로 돌아가‘모두가 하나’되는 새로운 마음자세로 5월기념재단을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숭고한 5월정신
5월재단의 출범은 5월민주화운동의‘합법성 획득’이라는 점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그간 산발적으로 추진됐던 5월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기념사업을 5월재단의 틀 안에서 해나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어찌보면 이런 성격을 갖는 5월기념재단의 초대 이사장에 조비오 신부가 뽑힌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그간 5월재단이 출벌하기까지 어려움도 많은 걸로 아는데요?“그렇죠. 솔직히 그간 내부적인 갈등의 골은 깊고, 그럴수록 외부로부터 고립되고, 이런 사태가 지속되자 광주시민들 뿐 아니라 광주를 아끼는 국민들로부터도 5월단체의 위신이 추락됐죠. 한때 저를 포함해 광주에서 뜻있는 몇분이‘9인위원회’라는 걸 만들어 수습해보고자 나섰으나 덕망과 역량이 부족해 지지부진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결국 극적으로‘통합’해 5월이 하나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셈입니다.”-다른 분들도 많이 계실텐데 어떻게 해서 하필 신부님이 5월재단의 초대 이사장에 뽑혔다고 보십니까? “제 개인의 능력이나 자격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단지 종교인이라는 제 신분이 개인의 영리에 구애받지 않고 객관적인 위치에 설 수 있기 때문에 상징적인 인물로 내세운 게 아니냐, 그래서 이의없이 만장일치로 초대 이사장에 선출됐다, 그렇게 봅니다.”-5월재단이 출범은 했으나 통합과정에서 노출된 갈등이 아직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채‘봉합’된 수준에 불과하다는 견해도 있는데요? “아직 그런 갈등이 완전히 해소됐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어찌됐든 약간 생각이 다르더라도 5월재단이라는 하나의 틀 속에서 서로 양보하는 자세로 의견을 조율한다면 머지 않아 그런 갈등의 앙금은 해소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5월재단에 거는 광주시민과 국민의 기대는 크다.
그러나 잘 될 수 있을까 하는 우려의 시각도 없지 않다. 그간 내부갈등이 너무 심했고 재단의 출범을 서로 견해가 다른 세력들 사이의‘통합’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내부에선 여전히 팽팽한 견해차가 존재하고 있음을 뜻한다. 바로 이런 어려움을 뚫고‘5월정신’를 5월 당사자만의 것이 아니라 광주시민 전체, 한걸음 더 나아가 국민적인 것, 혹은 세계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당위적인 요구를 얼마나 실현시킬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누구에게나 재단 문호개방
-5월기념재단을 이끌고 갈 조타수 역할을 맡으셨는데 앞으로 재단운영에 대한 기본방침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5월기념재단 설립의 목적과 취지에 찬동하는 모든 사람에게 문호를 개방해 가입을 공개적으로 권유하겠습니다. 명실공히 5월재단이 운동집단만의 것이 아니라 광주시민의 재단, 전국민의 재단으로 확산하고, 나아가 세계 곳곳에 살고 있는 뜻 있는 해외교포들과도 연락해 가입토록 할 생각입니다. 이를 통해 내부의 상처를 치유하고 손상된 이미지를 회복해 5·18의 세계화를 이루도록 할 생각입니다.”
-재단에 가입할 수 있는 범위나 자격에 제한을 두지 않겠다는 생각이신가요. 목적과 취지에 찬동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죠. 재단이 특정정당인과 연계를 갖는 정치단체를 지양하고 비정치적이며 사회공익단체이기 때문에 광주시민은 물론 국민 개개인이 개인자격으로 참가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정치인도 여·야를 막론하고 평화 협동(통일) 아닙니까? 바로 이런 정신이 국민정신이 돼야 하고 자라나는 어린 새싹들에게 민족정기의 기초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재단을 통한 5·18의 세계화는?
“세계적으로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다 고통과 비극을 겪은 광주와 유사한 경험을 가진 세계 각처의 시민들과 유대관계를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재단차원에서 펼쳐가겠다는 생각입니다.”
-재단의 활동방향은?
“재단은 5월기념사업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총괄추진할 것입니다. 5월운동의 역사적 자리매김, 교과서 수록, 국가차원의 기념관 건립 및 기념비 설치, 교육·장학사업, 5·18 피해자에 대한 자립과 복지를 위한 수익사업 등을 관계기관과 긴밀히 협조해 추진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현재 재단에 4개의 분과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기념사업위원회, 정신계승사업위원회, 재정위원회, 기획위원회 등입니다.”
5월광주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조비오 신부. 5월과 관련해 많은 사람들이 조신부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만 막상 그가 신부로서 어떤 사람인지, 어떤 과정을 거쳐 성장했는지를 아는 사람은 흔치 않다.
광산 본량이 고향
-신부님은 어떻게 해서 성직자의 길을 걷기로 했습니까?
“네? 아-, 그거요?”5월문제로만 치닫던 질문이 갑자기 바뀌자 약간 당혹스러워 하는 모습이다.“제 고향은 광주에 편입된 광산 본량입니다. 10남매(6남4녀) 가운데 다섯째로 태어났죠. 6·25전쟁 직후 광주사범을 다녔어요. 전쟁후 농촌은 피폐할대로 피폐해 농민들은 삶을 겨우 연명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런 풍경을 보면서 저는 농민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일을 해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에게 삶의 보람을 안겨주고 싶었어요.”그래서 교사가 될 결심을 했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하기 전 심하게 아팠다. 투병하는 동안 종교서적을 접하게 됐다. 점차 그쪽으로 이끌렸고 급기야 신앙으로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결심한다.“할아버지를 비롯해 부모님들은 처음엔 완고하게 반대하셨죠. 내가 신부가 되겠다는 소식을 듣고 펄쩍 뛰셨어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서당을 하면서 한학을 가르치는 선비집안이었거던요.‘우리집 망칠 놈’이라며 진노하셨어요.”그러나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대신 온갖 노력을 다해 부모님을 성실하게 모셨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부모에게‘충성’을 다한 것이다. 조신부의 이런 노력은 마침내 자신의 부모는 물론 형제, 친척까지 모두 천주교 신자로 변화시켰다. 현재 TV에서 코미디언으로 활동하고 있는 조정현씨는 친 사촌인데 그도 역시 조신부의 영향을 받아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됐다고 한다.
지난해 출간된‘사제의 증언’에는 조신부의 약력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전남 광산 출생(1936), 대건신학대학 졸업(1969), 사제서품(1969), 사레지오여고 지도신부(1971), 명상의 집 피정 지도신부(1972), 광주대교구 나주 본당 주임(1973), 광주대교구 계림동 본당 주임(1976), 레지오 마리애 광주 세나뚜스 지도신부(1977), 광주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지도신부(1977), 광주대교구 진도 본당 주임(1981), 광주가톨릭대학 교수(1983), 푸른군대 지도신부(1986), 레지오 마리애 광주세나뚜스 지도신부(1986), 사회복지법인 소화자매원 원장(1987), 광주대교구 순천 저전동 본당주입(1987), 광주대교구 화순 본당 주임(1992), 광주민주언론협의회 의장(1992), 광주대교구 봉선동 본당 주임(1993).
학구파, 8권의 책 저술
조신부가 기거하는 봉선동 성당 왼편에 독립된 건물 사제관 응접실은 보통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아파트 거실과 비슷하다. 벽에는 몇 년전 서울을 방문한 교황과 조비오 신부가 포옹하는 장면의 사진이 걸려 있다. 다른 쪽에는 조신부가 백두산 천지에서 찍은 사진과 몇 개의 그림, 판화 따위가 눈에 띈다. 길쭉한 소파가 거실 한켠을 차지하고 나머지는 온통 서가(書架)다. 세계사상전집을 비롯해 신앙서적, 동양사상에 관한 책들이 즐비하다. 안방에 있는 책까지 합치면 6천여권의 장서가 있다. 거실에 세워진 책꽂이에는 신앙에 관한 여러 가지 월간 잡지 가운데 섞여 있는 진보적인 시사잡지‘월간 말’도 눈에 띈다. -신부님은 책도 꽤 많이 쓰신 걸로 아는데요?“글쎄요. 그걸 많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동안 미사때 틈틈이 만든 강론자료와 각종 신문이나 방송에서 청탁을 받아 써두었던 원고를 묶어 그때그때 책으로 만들다보니 벌써 8권째가 됐군요.”‘사랑은 미움보다 강하다는데’‘인간회복을 요구하는 시대’‘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신앙과 조국(번역서)’‘듣고 보고 묵상하며 전하는 말씀’‘찬란한 새벽을 위하여(시집)’‘사제의 증언’따위다. 조신부는 학구파다. 가톨릭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8년간 공부했고, 그후 2년간 전남대 경영대학원에세 석사과정(4회)을 마쳤다. 동양철학에도 관심이 깊어 전남대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려 했으나 대학측의 사정으로 무산됐다. 가톨릭대학시절에는 교황청이 있는 로마로 유학을 가려고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자신을 가르치던 미국인 교수들이‘여기서나 로마에서나 똑같은 내용을 배운다’면서 굳이 로마에 갈 필요가 없다고 추천서를 써주지 않았다. 그 바람에 로마유학 기회를 놓쳤다.“당시 로마를 가지 못 했던 게 항상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지금도 저는 내 경험에 비춰 공부라는 게 역시 때가 있다는 걸 항상 어린 학생들에게 강조합니다. 그때 대건신학대학에서 2년간 함께 공부했던 박홍 신부(현 서강대 총장)는 당시 로마유학을 다녀왔었죠.”-아, 박홍 총장과 함께 공부하셨던가요?“네, 그랬어요. 후배였죠.”그렇잖아도 최근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박홍 총장에 대해 같은 신부로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이야길 물어보려던 참인데 마침 잘 됐다 싶었다. -그럼 박총장을 잘 아시겠네요? 작년 주사파발언파동에 이어 최근 북한의 박총장 암살사건 등 연이어 뉴스의 포커스가 되고 있는데요. 같은 신부의 입장에서 박총장의 행동을 어떻게 보십니까? “예-, 그러니까….”눈을 지그시 내려 감는다.
잠시 찌푸려진 미간에 긴장이 슬쩍 스쳐 지나간다. 한참만에 무겁게 입을 뗀다.“이건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제가 아는 박홍 신부는 적어도 확신을 가지고 주사파에 대한 발언을 했다고 봅니다. 저는 그분의 고충을 잘 압니다. 아마 제가 그분의 위치에 있었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스스로 완벽한 판단과 선택이 미숙한, 한창 공부해야 할 학생들이 정말로 이데올로기에 감염돼 사상적으로, 조직적으로(북한과) 연결됐다는 걸 파악했다면 당연히 그 부분의 교정을 위해 나서는 게 교육자이자 성직자의 몫이죠. 아마 제 생각으로는 박 총장이 많은 학생들을 접하다보니 실제로 그런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분은 주사파의 교조적인 논리로부터 학생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스스로 방패막이가 되겠다고 나선 분입니다. 저는 그분의 본심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방법상 매스컴에 학생과 만난 결과를 폭로하는 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잘못이었다고 봅니다. 그런 학생들과 토론의 광장을 만들어 끈기를 가지고 설득 했어야 옳습니다. 설령 그 학생이 이데올로기에 물들어 있다 해도 신분보장을 하면서 학구적으로 수백번이라도 계속 만나 설득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자로서 방법적인 면에서 서툴렀다고 봅니다.”
이젠 화염병 대신 실력으로
조신부는 지난 3월2일, 광주 시민연대모임과 균형사회를 위한 모임이 주관하고 광주일보와 광주문화방송이 주최한‘21세기 광주·전남 활로개척 시민대토론회’에서 기조발제자로 참가해 지역발전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피력해 꽤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얻기도 했다. -그때 신부님이 밝힌 지역발전에 대한 견해를 간단히 요약한다면 어떤 것입니까? “‘이젠 투쟁의 시대를 벗어나 실력으로 나서야 할 때다. 지금까지 투쟁으로 단련된 이 지역의 자긍심을 지역 발전을 위해 쏟아 붓자’이런 취지죠. 이제 더 이상 투쟁일변도는 안됩니다. 대학생들을 설득해서 무모한 희생을 막고 그 에너지를 실력배양에 쏟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광주·전남)는 지금 맨주먹밖에 없습니다. 아무도 도와주려 하지 않아요. 명예? 광주사람 외에 누가 지금 그 명예를 얼마나 알아주나요? 솔직히 말해서….”목소리의 톤이 높아지면서 손을 홰홰 젓는다. “이건 제가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얻은 결론이자 확신입니다. 1960년대부터 군사정권 하에서 이 지역의 젊고 유능한 엘리트들이 민주화투쟁을 위해 싸우면서 얼마나 많이 희생됐습니까? 전국단위의 운동단체 간부들 가운데 40∼60%가량이 호남출신 젊은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들은 지난 30여년간 군사정권에 의해 요시찰인물로 낙인찍혀 철저히 사회진출이 차단당해 왔습니다. 이 사람들의 행적을 보세요. 나이가 벌써 40대와 50대 초반인데 아직까지도 밥벌이를 해결하기 어려울 만큼 힘든 지경에 처해 있습니다. 반면 호남이 아닌 타지역 사람들을 보세요. 그 나이면 모두 탄탄한 사회적인 기반을 바탕으로 맘껏 활동하고 있습니다. 호남은 이제 인맥이 끊겨버렸습니다. 모두 지리멸렬해졌어요. 이래가지고는 지역발전이고 뭐고 안됩니다.
그렇다고 저는 호남사람들의 그간 민주화투쟁이 전부 잘못됐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탓만 하고 있을 필요도 여유도 없습니다. 이미 과거 집권자들의 잘못은 우리 모두 잘 아는 사항입니다. 우리 스스로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무엇보다도 절실합니다. 결과가 뻔한 악순환을 언제까지 되풀이할 겁니까? 이제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에 방법도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실력으로 이겨보는 겁니다. 인재를 양성해야죠. 아까운 인재가 더 이상 버려지지 않도록 모두 노력해야 해요.”흥분된 어조로 말의 속도가 더욱 빨라진다.“이제 막무가내로 불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비처럼 최루탄과 화염병, 각목만 가지고는 결과가 너무 뻔합니다. 안됩니다. 이런 방법은 우리 스스로를 고립시킬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실력을 기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실력이 있어야지 광주의 명예도 되살릴 수 있고 남이 얕보지 않습니다. 지금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뒤떨어진 걸 방치하다보면 숭고한 5월 광주정신 자체까지도 패배의식 속으로 더욱 빠져들어 나오기 힘들 것이 확실합니다.
현재로서는 호남이 살고 5월이 살고 우리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 이길 외에 다른방법이 있을 수 없다고 저는 확신합니다.”-얼마전 광주시가 주도해서 그와 비슷한 취지의‘광주평화선언’을 한 적이 있는 걸로 아는데요?“그거요? 그건 제가 주장하는 논리와는 다르죠. ‘평화’는 힘의 논리가 아니라 협력과 사랑의 논리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대결이 아니라 국민 각자의 균등한 참여기회를 보장하는 상태에서 공존공생할 때 가능한 겁니다.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의 모든 집단들 즉, 노동자 기업가 등 이해관계가 대립돼 있는 집단과 학생, 기타 각 시민단체 등이 모두 합의할 수 있고 그들의 이해관계를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억압과 불이익을 받는 집단의 소외감을 해소할 수 있어야 가능합니다. 관련 사회집단이 모여 함께 토론하고 합의해야 분출되는 불만요인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이런 본질적인 문제는 접어두고 대표들만 불러다놓고 선언만 하면 평화가 되는 겁니까? 평화선언자체가 그런 일방적인 문제는 접어두고 대표들만 불러다놓고 선언만 하면 평화가 되는 겁니까? 평화선언자체가 그런 일방적인 방식으로는 성립될 수 없죠.
그러다보니 일반 시민들의 분위기도 그 평화선언에 대해 냉랭해지고….”광주항쟁 15주년을 맞는 올해는 광주문제 관련자들에 대한 형사소송법상 공소시효가 만료되는 해다. 시효만기를 앞두고‘법적청산’문제가 올 5월정국을 뜨겁게 달굴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법적청산’에 대한 신부님의 견해를 말씀해 주십시오.“언필칭 문민정부라는 현 정권의 핵심에는 아직 가해자집단이 잔류해 있습니다. 문민정부 자체가 5·18 가해세력과 야합해서 태어난 정권 아닙니까? 따라서 현 정권하에서는 모든 게 청신될 수 없을 것입니다. 순수한 문민정부가 들어설 때 5월문제의 법적 청산과 명예회복이 실제로 가능하고 모든 진상이 밝혀질 것입니다.”
조비오 신부는 지난해 5월 광주항쟁과 관련 자신의 국회증언을 중심으로 기록한‘사제의 증언’이라는 책을 냈다. 이 책의 부제가 재미있다.‘진실을 말해도 믿지 않는 세상’. 이 부제는 5월광주학살에 대한 당국의 어정쩡한 태도와 아직도‘설마 그런 일이 일어났을려고…’하면서 여전히 광주학살을 좀체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 타지역 사람들에 대한 답답한 심정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듯 하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조신부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이젠 타지역 사람들에게 이해해 달라고 더 이상 떠들 필요없이 우리 스스로 실력과 힘을 갖춰 5월광주의 정당성을 널리 알리자’는 게 아닐까? 인터뷰를 끝내고 사제관을 나오면서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다.
- 이전글[월간지 관련기사] 특집/광주민중항쟁, 그후 15년(생활성서, 1995. 5) 07.05.30
- 다음글[월간지 관련기사] 특집/5·18 뒤안길에 묻힌 사연 07.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