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특집Ⅱ 12주년 맞는 5·18 항쟁의 현주소(월간예향, 1995. 5)
본문
특집Ⅱ 12주년 맞는 5·18 항쟁의 현주소
광주관련 망명 11년의 마지막 미복권자
‘계속되는 항쟁의 불씨’안고 귀국 염원
5월 항쟁의 최후 수배자 윤한봉
임 동 확<광주일보 월간국 기자>
1980년 5월 광주항쟁의 최후 수배자, 혹은 마지막 남은 미복권자로 통하는 망명객 윤한봉씨(45)의 귀국문제가 5월 항쟁의 12주년를 전후로 새삼스런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일전에 기자와 직접 통화로도 확인된 바지만 그는 현재‘일단 정원식 국무총리에게 안전하고 자유스런 귀국은 가능한가, 만일 불가능하다면 그 이유는 뭔가’하는 질문을 서면(書面)으로 보내 놓고 있는 중이다.
한편 광주에서도 재야세력의 일각에서 그의 귀국운동을 조심스레 펼치고 있다. 구체적으로 지난 3월 17일‘5·18 광주만중항쟁연합과 윤한봉 선생 귀국 추진위원회’,‘민주주의 민족통일 광주·전남연합’측은 미국에서 망명중인 그의 귀국문제와 관련, 정부당국에‘윤씨에 대한 지명 수배 해제’등을 촉구하는 성명을 냈다. 또한 지난 3월20일‘윤한봉 선생 귀국 대책위원회’가 주최한‘구속자 석방을 위한 시와 노래 낭송회’가 광주·전남 민족문학인회 등을 주축으로 열리기도 했다.
그러나 윤한봉 귀국 주선 움직임은 이번에 처음으로 일어났던 것은 아니다. 1988년 12월 광주지역의 강신석 목사, 남재희 신부, 문병란 시인 등과 김승훈 신부, 이부영·유연창씨 등 국내 재야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윤한봉씨의 귀국을 돕기 위한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었다.
그런데도 그는 왜 돌아올 수 없었고, 없는가. 우선 그건 1988년 12월 20일‘윤한봉 선생 귀국 대책위’가 당시 법무·외무장관과 검찰총장 앞으로 보낸 서한을 통해 확인된 바대로 그가‘내란 주요임무 종사 및 계엄법 위반 등의 혐의로 현재 지명 수배 중’이라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1984년 미국 현지에서 결성한‘한국청년 연합’을 국가보안법에 저촉되는 반국가 단체로 규정, 실정법 위반자로 지명수배 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그는‘비록 구속되더라도 광주로 돌아오고 싶다’는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미 광주 관련 인사들이 전원 복권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만이‘내란음모 주동자’라는 법률적 멍에가 그의 안전한 귀국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내란 음모 주동자’법률적 멍에 여전
그런 그의 망명은 알려진 대로 1981년 4월 29일 밤 11시 20분경, 경남 마산항에서 화물선 갑판 밑에 숨어들면서부터 시작됐다. 오랜만에 꽃핀 민주화의 열망에 찬물을 끼얹는 비상계엄령 확대조치와 곧이어 밀어닥친 검거선풍을 피해 그는 모든 연락을 끊은 채 열다섯 군데 이상이나 은신처를 옮겨다니며 몸을 숨겼다. 만일 체포될 경우, 당시 정황으로 보아 엄청난 고문은 물론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할 긴박한 상황이었고, 그간에 보여준 그의 행적-대표적으로 1974년 4월 민청학련 결성으로 인한 긴급조치 위반 등-으로 이미 당국은 그에 수배령을 내려 수사의 손길을 뻗치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더 이상 도피하기도 지쳤지만 당시 정세로 보아 별다른 활동을 할 수 없는 처지여서‘국외탈출’을 통한 새로운 전기(轉機)를 마련해 보자는 생각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 날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빨리 왔다. 그의 망명 가능성을 타진하고 주선하던 한 후배는 갑자기 승선할 날이 하루밖에 안남았다며 29일 새벽, 밤차로 윤씨를 방문했던 것이다. 그는 처음엔 당황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각오하고 일어섰다. 그리고 4만t급의 화물선 갑판 2층에 있는 약국으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말이 약국이지 정확히 말해 그가 35일 간의 긴 항해를 보내야 했던 곳은 환자용 화장실이었다. 그는 비상식량이라곤 잣, 멸치, 새우 한 주먹과 식빵 2봉지만으로 반평짜리 공간 속에서 갇혀 지내야 했다.그 와중에 호주에 도착한 그는 모처럼 라면식사라는 호강(?)을 누려보기도 했으나 앞일을 생각해 절제를 해야 했다. 대신 안내자가 구해준 벌꿀 한 병을, 매일 한 숟갈씩 떠 먹으며 건강을 지탱해 갔다.
드디어 6월 3일, 그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독의 긴 향해 끝에 미국 시애틀 북방의 벨링햄에 도착했다. 그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미국에 망명한 그는 곧바로 주(州) 이민국에 망명신청을 했다. 그러나 한미(韓美)간의 국제문제화를 꺼려하는 미국측의 입장으로 계속 법원에서 보류되다가 87년 4월 17일에야 허용됐다. 87년 4·13호헌조치 등에 대한 압력수단으로 이른바‘윤한봉 카드’를 사용한 것이다.
당시 정황 긴박, 국외 탈출
어찌됐든 그는 그곳 거주의 한국 정치인과 에드워두 케네디 상원의원 등의 도움으로 미국생활을 익혀 갔고, 그 해 9월 노동허가서를 받음으로써 어느 정도의 활동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첫사업으로 미교포들에게 민족정신을 일깨우는‘민족학교’(KOREAN RESOURCE CENTER)를 탄생시켰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의료봉사센터, 워싱턴에 한겨레 미주 홍보원이라는 기관을 개설하기도 했다. 그리고 84년 1월엔 재미(在美) 청년단체를 규합,‘재미한국청년연합’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근래의 남북학생회담 때 남북 양측에 대표를 보내 국내에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망명생활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반한(反韓) 교포신문은 그를 첩보기관원으로 오해를 하기도 했고, 친북(親北) 단체로부터는 그들과 입장을 같이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또다른 모략을 당하기도 했다. 그만큼 그의 처신이 어려운 지경에 놓여 있다고 보여지는데, 그는 LA의 민족학교를 거점으로 주로 교포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고통일운동에 헌신해 왔다. 또한 미국은 물론 국제적 진보세력들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며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특이한 것은, 그가 미국에 살면서 영어를 쓰지 않는다는 점과 민족학교 뒤편 텃밭에 고추, 상추, 무우, 호박 등 채소를 직접 가꾸어 먹는다는 점이다. 그만큼 철저한 민족주의자고, 어떤면에서 반미(反美)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지금도 민족학교 내부에 단군, 전봉준, 김구, 장준하 등의 초상화를 차례로 걸어놓고 있다. 또한 여러개의 위패와 광주 망월동 묘지에서 파온 흙을 제기(祭器)와 함께 모셔두고 있기도 하다. 광주·전남 민주화 운동의 산증인이자 소위‘민청학련’세대의 대표주자라고도 할 수 있는 그는 1948년 12월 22일 전남 강진군 칠량면 동백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광주일고(제11회)를 졸업하고 전남대 축산학과에 입학, 2학년을 마친 뒤 군대에 입대했다가 1973년 복학했다.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첫발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그는 3선개헌과 곧이어 단행된‘유신’에 분기, 반독재 민주화 투쟁대열의 앞장에 서게 된다. 1974년 4월 3일 박정권의 발표문에 따르면, 그는‘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전남·북 총책임자로 지목 되었다. 그후 곧바로 유인물을 뿌리다가 체포 기소된 그는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서 15년형을 구형받았으나 이듬해 2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사실 대학에 복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늘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던 순수한 농학도였으나, 그때 같이 구속된 11명의 전남대생을 주축으로 그는 이때부터 확고한 신녑을 가진 운동가로 변신한다.
1977년‘부활절 사건’으로 재수감, 78년 출옥 후 민청협 구성과 문화운동의 전개가 바로 그것이고, 1979년 10월 다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구속돼 세 번째로 옥살이를 한 것이 그 증표다. 그와 고행(苦行)를 같이 했던 김상윤씨(43·하심의료기 상사 대표)는 그런 그를 두고“한마디로 윤씨는 운동을 위해 태어난 것 같다. 유신 당시에도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항시 방에다 태극기를 걸어 놓고 경건하게 지냈다. 일례로 그의 형량(刑量)이 많아 당연히 예비군 훈련 면제대상임에도 불구하고 훈련을 꼬박꼬박 받았으며, 심지어 정보부에서 땅굴견학을 제의했을 때 그가 솔선수범하여‘민청학련’세대를 이끌고 다녀오기도 했다”고 전한다.
그러면서 김씨는 그가 집안으로 보나 사상적으로 보나 철저한 민족주의자일 뿐, 당국에서 그에게 씌운 혐의들은 터무니 없는 것이라고 했다. 한편으로 그는 5·18이후 수배 당시 늘 가슴 속에 면도칼을 갖고 다녔는데 그가 체포될 경우 광주운동 조직의‘싹’을 보호하기 위해 언제라도 자결(自決)할 준비를 갖추고 있을 정도로 헌신성이 있었다고 덧붙인다.‘윤한봉 선생 귀국 대책위’위원장인 강신석 목사(광주 무진교회)도 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는 이론이 명확하고 그 무엇보다도 자신이 뱉은 말은 반드시 책임지는 실천가라는 점이다.“그는 운동권이나 기타 다른 단체에서 기금 마련 티킷판매라도 할 경우 제일 먼저 책임지고 판매합니다. 또한 어깨에 메는 가방 속엔 전국 교소도에 수감되어 있는 모든 양심수의 명단이 어김없이 들어 있었는데, 그는 해당지역에 갈 땐 반드시 기찻간이든 버스 속에서든 볼펜이라도 팔아서 가장 고통받고 가난한 수감자에게 영치금을 넣어주곤 했지요. 정말 특이하다 할 정도로 보기드문 실천가 였는데, 일례로 그가 우리 교회에 나오겠다 약속한 후로 광주에 있는 한 한 번도 빠졌던 적이 없었습니다.
철저한 민족주의자
문병란 시인도 그런 그를‘합수로 위하여’란 부제(副題)가 붙은‘불의 사나이’란 시를 통해 <깡마르고 여윈 검은 살결/그러나, 천근의 분노로 다져진/그대 부르쥔 주먹, 앙다문 입술, /이빨을 갈며/모질게 분노를 축적하며/원통한 망명의 타국하늘 아래서도/동포의 눈물을 모아/혁명의 불길을 만들며/돌아갈 내일의 항로 위에/한줄기 민족의 등대로 타오르고> 있다고 그를 찬양하고 있다. 참고로‘합수’는 광주운동권이 그를 부를 때 사용하던 애칭으로, 전라도 지방에선 분뇨와 빗물이 합쳐진 상태를 지칭하는데 기꺼이 광주운동권의 밑거름이 되고자 했던 그의 운명을 미리 암시한 호칭이었다고 생각된다. 여하튼 본의 아니게 광주 오월의 마지막 피해자로 남아 있는 그의 귀국을 위한 법적 안정보장이 선행되지 않는 한 현상적으로나마 광주문제는 여전히 미해결된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과 상관없이 그는 세월의 힘에 의해 자꾸만 훼손되어 가고 꺼져가는 광주 항쟁의 마지막 불씨를 간직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는 또한‘광주는 아직도 게속되고 있다’는 명제를 명증하게 보여주는 산증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지난 3월17일 그의 안전한 귀국을 위한‘시와 노래 낭송회’에 보낸 서신을 통해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저의 안전하고 자유로운 귀국을 위해 애써주시는 여러분들에게 멀리서 인사드립니다. 요즈음 저는 연말까지는 귀국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속에서 망월동 영령들과 유가족, 부상자 여러분들, 그리고 고문 당하고 갇히신 분들게 항시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온 지난 11년간의 망명생활을 하나 둘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귀국하게 되면 여러분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짐꾼처럼 일하고 퇴비처럼 살아갈 계획입니다. 모두 다 보고 싶습니다’라고. 그렇다.
그는 미국 영주권과 시민권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왜 한국인이 외국 시민권을 가져야 하느냐’반문할 정도로 투철한 신념을 가진 애국주의자임에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미 원인 무효화된 80년 5월에 의한 최후의 피해자임과 동시에 증언자다. 그의 귀국은, 그러므로 80년 5월의 외형적 마무리자 내면적으로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지 모른다. 현재 속에 엄연히‘살아있는 눈’으로서 광주 5월. 그 12주년을 전후로 그의 귀국문제가 새삼 전면으로 부상하고 있는 까닭은 거기에 있다. 그의 귀국여부가 단순히 그의 가족이나 운동권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로 다가서는 것도 광주 5월이 지닌 역사성과 투쟁성 때문이기도 하다.
광주관련 망명 11년의 마지막 미복권자
‘계속되는 항쟁의 불씨’안고 귀국 염원
5월 항쟁의 최후 수배자 윤한봉
임 동 확<광주일보 월간국 기자>
1980년 5월 광주항쟁의 최후 수배자, 혹은 마지막 남은 미복권자로 통하는 망명객 윤한봉씨(45)의 귀국문제가 5월 항쟁의 12주년를 전후로 새삼스런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일전에 기자와 직접 통화로도 확인된 바지만 그는 현재‘일단 정원식 국무총리에게 안전하고 자유스런 귀국은 가능한가, 만일 불가능하다면 그 이유는 뭔가’하는 질문을 서면(書面)으로 보내 놓고 있는 중이다.
한편 광주에서도 재야세력의 일각에서 그의 귀국운동을 조심스레 펼치고 있다. 구체적으로 지난 3월 17일‘5·18 광주만중항쟁연합과 윤한봉 선생 귀국 추진위원회’,‘민주주의 민족통일 광주·전남연합’측은 미국에서 망명중인 그의 귀국문제와 관련, 정부당국에‘윤씨에 대한 지명 수배 해제’등을 촉구하는 성명을 냈다. 또한 지난 3월20일‘윤한봉 선생 귀국 대책위원회’가 주최한‘구속자 석방을 위한 시와 노래 낭송회’가 광주·전남 민족문학인회 등을 주축으로 열리기도 했다.
그러나 윤한봉 귀국 주선 움직임은 이번에 처음으로 일어났던 것은 아니다. 1988년 12월 광주지역의 강신석 목사, 남재희 신부, 문병란 시인 등과 김승훈 신부, 이부영·유연창씨 등 국내 재야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윤한봉씨의 귀국을 돕기 위한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었다.
그런데도 그는 왜 돌아올 수 없었고, 없는가. 우선 그건 1988년 12월 20일‘윤한봉 선생 귀국 대책위’가 당시 법무·외무장관과 검찰총장 앞으로 보낸 서한을 통해 확인된 바대로 그가‘내란 주요임무 종사 및 계엄법 위반 등의 혐의로 현재 지명 수배 중’이라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1984년 미국 현지에서 결성한‘한국청년 연합’을 국가보안법에 저촉되는 반국가 단체로 규정, 실정법 위반자로 지명수배 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그는‘비록 구속되더라도 광주로 돌아오고 싶다’는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미 광주 관련 인사들이 전원 복권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만이‘내란음모 주동자’라는 법률적 멍에가 그의 안전한 귀국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내란 음모 주동자’법률적 멍에 여전
그런 그의 망명은 알려진 대로 1981년 4월 29일 밤 11시 20분경, 경남 마산항에서 화물선 갑판 밑에 숨어들면서부터 시작됐다. 오랜만에 꽃핀 민주화의 열망에 찬물을 끼얹는 비상계엄령 확대조치와 곧이어 밀어닥친 검거선풍을 피해 그는 모든 연락을 끊은 채 열다섯 군데 이상이나 은신처를 옮겨다니며 몸을 숨겼다. 만일 체포될 경우, 당시 정황으로 보아 엄청난 고문은 물론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할 긴박한 상황이었고, 그간에 보여준 그의 행적-대표적으로 1974년 4월 민청학련 결성으로 인한 긴급조치 위반 등-으로 이미 당국은 그에 수배령을 내려 수사의 손길을 뻗치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더 이상 도피하기도 지쳤지만 당시 정세로 보아 별다른 활동을 할 수 없는 처지여서‘국외탈출’을 통한 새로운 전기(轉機)를 마련해 보자는 생각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 날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빨리 왔다. 그의 망명 가능성을 타진하고 주선하던 한 후배는 갑자기 승선할 날이 하루밖에 안남았다며 29일 새벽, 밤차로 윤씨를 방문했던 것이다. 그는 처음엔 당황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각오하고 일어섰다. 그리고 4만t급의 화물선 갑판 2층에 있는 약국으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말이 약국이지 정확히 말해 그가 35일 간의 긴 항해를 보내야 했던 곳은 환자용 화장실이었다. 그는 비상식량이라곤 잣, 멸치, 새우 한 주먹과 식빵 2봉지만으로 반평짜리 공간 속에서 갇혀 지내야 했다.그 와중에 호주에 도착한 그는 모처럼 라면식사라는 호강(?)을 누려보기도 했으나 앞일을 생각해 절제를 해야 했다. 대신 안내자가 구해준 벌꿀 한 병을, 매일 한 숟갈씩 떠 먹으며 건강을 지탱해 갔다.
드디어 6월 3일, 그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독의 긴 향해 끝에 미국 시애틀 북방의 벨링햄에 도착했다. 그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미국에 망명한 그는 곧바로 주(州) 이민국에 망명신청을 했다. 그러나 한미(韓美)간의 국제문제화를 꺼려하는 미국측의 입장으로 계속 법원에서 보류되다가 87년 4월 17일에야 허용됐다. 87년 4·13호헌조치 등에 대한 압력수단으로 이른바‘윤한봉 카드’를 사용한 것이다.
당시 정황 긴박, 국외 탈출
어찌됐든 그는 그곳 거주의 한국 정치인과 에드워두 케네디 상원의원 등의 도움으로 미국생활을 익혀 갔고, 그 해 9월 노동허가서를 받음으로써 어느 정도의 활동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첫사업으로 미교포들에게 민족정신을 일깨우는‘민족학교’(KOREAN RESOURCE CENTER)를 탄생시켰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의료봉사센터, 워싱턴에 한겨레 미주 홍보원이라는 기관을 개설하기도 했다. 그리고 84년 1월엔 재미(在美) 청년단체를 규합,‘재미한국청년연합’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근래의 남북학생회담 때 남북 양측에 대표를 보내 국내에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망명생활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반한(反韓) 교포신문은 그를 첩보기관원으로 오해를 하기도 했고, 친북(親北) 단체로부터는 그들과 입장을 같이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또다른 모략을 당하기도 했다. 그만큼 그의 처신이 어려운 지경에 놓여 있다고 보여지는데, 그는 LA의 민족학교를 거점으로 주로 교포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고통일운동에 헌신해 왔다. 또한 미국은 물론 국제적 진보세력들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며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특이한 것은, 그가 미국에 살면서 영어를 쓰지 않는다는 점과 민족학교 뒤편 텃밭에 고추, 상추, 무우, 호박 등 채소를 직접 가꾸어 먹는다는 점이다. 그만큼 철저한 민족주의자고, 어떤면에서 반미(反美)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지금도 민족학교 내부에 단군, 전봉준, 김구, 장준하 등의 초상화를 차례로 걸어놓고 있다. 또한 여러개의 위패와 광주 망월동 묘지에서 파온 흙을 제기(祭器)와 함께 모셔두고 있기도 하다. 광주·전남 민주화 운동의 산증인이자 소위‘민청학련’세대의 대표주자라고도 할 수 있는 그는 1948년 12월 22일 전남 강진군 칠량면 동백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광주일고(제11회)를 졸업하고 전남대 축산학과에 입학, 2학년을 마친 뒤 군대에 입대했다가 1973년 복학했다.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첫발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그는 3선개헌과 곧이어 단행된‘유신’에 분기, 반독재 민주화 투쟁대열의 앞장에 서게 된다. 1974년 4월 3일 박정권의 발표문에 따르면, 그는‘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전남·북 총책임자로 지목 되었다. 그후 곧바로 유인물을 뿌리다가 체포 기소된 그는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서 15년형을 구형받았으나 이듬해 2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사실 대학에 복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늘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던 순수한 농학도였으나, 그때 같이 구속된 11명의 전남대생을 주축으로 그는 이때부터 확고한 신녑을 가진 운동가로 변신한다.
1977년‘부활절 사건’으로 재수감, 78년 출옥 후 민청협 구성과 문화운동의 전개가 바로 그것이고, 1979년 10월 다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구속돼 세 번째로 옥살이를 한 것이 그 증표다. 그와 고행(苦行)를 같이 했던 김상윤씨(43·하심의료기 상사 대표)는 그런 그를 두고“한마디로 윤씨는 운동을 위해 태어난 것 같다. 유신 당시에도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항시 방에다 태극기를 걸어 놓고 경건하게 지냈다. 일례로 그의 형량(刑量)이 많아 당연히 예비군 훈련 면제대상임에도 불구하고 훈련을 꼬박꼬박 받았으며, 심지어 정보부에서 땅굴견학을 제의했을 때 그가 솔선수범하여‘민청학련’세대를 이끌고 다녀오기도 했다”고 전한다.
그러면서 김씨는 그가 집안으로 보나 사상적으로 보나 철저한 민족주의자일 뿐, 당국에서 그에게 씌운 혐의들은 터무니 없는 것이라고 했다. 한편으로 그는 5·18이후 수배 당시 늘 가슴 속에 면도칼을 갖고 다녔는데 그가 체포될 경우 광주운동 조직의‘싹’을 보호하기 위해 언제라도 자결(自決)할 준비를 갖추고 있을 정도로 헌신성이 있었다고 덧붙인다.‘윤한봉 선생 귀국 대책위’위원장인 강신석 목사(광주 무진교회)도 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는 이론이 명확하고 그 무엇보다도 자신이 뱉은 말은 반드시 책임지는 실천가라는 점이다.“그는 운동권이나 기타 다른 단체에서 기금 마련 티킷판매라도 할 경우 제일 먼저 책임지고 판매합니다. 또한 어깨에 메는 가방 속엔 전국 교소도에 수감되어 있는 모든 양심수의 명단이 어김없이 들어 있었는데, 그는 해당지역에 갈 땐 반드시 기찻간이든 버스 속에서든 볼펜이라도 팔아서 가장 고통받고 가난한 수감자에게 영치금을 넣어주곤 했지요. 정말 특이하다 할 정도로 보기드문 실천가 였는데, 일례로 그가 우리 교회에 나오겠다 약속한 후로 광주에 있는 한 한 번도 빠졌던 적이 없었습니다.
철저한 민족주의자
문병란 시인도 그런 그를‘합수로 위하여’란 부제(副題)가 붙은‘불의 사나이’란 시를 통해 <깡마르고 여윈 검은 살결/그러나, 천근의 분노로 다져진/그대 부르쥔 주먹, 앙다문 입술, /이빨을 갈며/모질게 분노를 축적하며/원통한 망명의 타국하늘 아래서도/동포의 눈물을 모아/혁명의 불길을 만들며/돌아갈 내일의 항로 위에/한줄기 민족의 등대로 타오르고> 있다고 그를 찬양하고 있다. 참고로‘합수’는 광주운동권이 그를 부를 때 사용하던 애칭으로, 전라도 지방에선 분뇨와 빗물이 합쳐진 상태를 지칭하는데 기꺼이 광주운동권의 밑거름이 되고자 했던 그의 운명을 미리 암시한 호칭이었다고 생각된다. 여하튼 본의 아니게 광주 오월의 마지막 피해자로 남아 있는 그의 귀국을 위한 법적 안정보장이 선행되지 않는 한 현상적으로나마 광주문제는 여전히 미해결된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과 상관없이 그는 세월의 힘에 의해 자꾸만 훼손되어 가고 꺼져가는 광주 항쟁의 마지막 불씨를 간직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는 또한‘광주는 아직도 게속되고 있다’는 명제를 명증하게 보여주는 산증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지난 3월17일 그의 안전한 귀국을 위한‘시와 노래 낭송회’에 보낸 서신을 통해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저의 안전하고 자유로운 귀국을 위해 애써주시는 여러분들에게 멀리서 인사드립니다. 요즈음 저는 연말까지는 귀국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속에서 망월동 영령들과 유가족, 부상자 여러분들, 그리고 고문 당하고 갇히신 분들게 항시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온 지난 11년간의 망명생활을 하나 둘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귀국하게 되면 여러분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짐꾼처럼 일하고 퇴비처럼 살아갈 계획입니다. 모두 다 보고 싶습니다’라고. 그렇다.
그는 미국 영주권과 시민권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왜 한국인이 외국 시민권을 가져야 하느냐’반문할 정도로 투철한 신념을 가진 애국주의자임에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미 원인 무효화된 80년 5월에 의한 최후의 피해자임과 동시에 증언자다. 그의 귀국은, 그러므로 80년 5월의 외형적 마무리자 내면적으로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지 모른다. 현재 속에 엄연히‘살아있는 눈’으로서 광주 5월. 그 12주년을 전후로 그의 귀국문제가 새삼 전면으로 부상하고 있는 까닭은 거기에 있다. 그의 귀국여부가 단순히 그의 가족이나 운동권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로 다가서는 것도 광주 5월이 지닌 역사성과 투쟁성 때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