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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박창신 신부가 쓴 수기…광주항쟁관련“나는 이렇게 테러를 당했다.”(월간예향, 1988.12)

본문

朴昌信신부가 쓴 手記…광주항쟁 관련‘나는 이렇게 당했다’

한밤중에 사제관 급습 칼·쇠망치 휘둘러대고 ‘일단후퇴’외치며 사라진 짧은 머리 청년들

범인 뻔한데 안잡는다!!

저녁이 되자 내리기 시작한 보슬비에 후덥지근한 더위가 한풀 꺾이면서 땅바닥이 축축해졌다. 1980년 6월 25일, 그날은 수요일이었다. 전북 익산군 여산면 여산성당 주임신부로 있던 나는 구역내 금마공소(현재 금마성당. 당시엔 여산성당 관할의 공소였다)에서 수요일 미사와 예비자 교리를 끝내고 임을영씨(34·당시 전북대생), 소화숙씨(28·여)와 함께 여산성당 사제관으로 돌아왔다. 이 때가 밤 10시 30분께.

그날은 내내 이상한 불안감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내가 젊은이들을 밤이 깊은 시각, 사제관에 함께 데려온 일은 이전에는 없었던 행동이었다. 금마공소에서 여산성당까지는 12㎞나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리발 여산행 막차 시내버스를 타고 여산에 거의 다왔을때는 밤 10시 25분께나 됐을까, 우리가 탄 버스를 추월하는 택시 한 대가 무심코 내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게 그 택시가 눈에 걸렸다.

그렇게 밤늦은 시각, 이 마을에 택시가 들어오는 일은 드물었다. 그것이 그날밤 나를 테러한 범인들과의 운명적인 해후였다는 것은 뒤에야 안 일이었다. 사제관 2층 거실에서 담소를 하던 우린 헨델의 ‘메시아’를 함께 듣고 있었다. 언제 들어도 감동적인, 거룩함과 경외감이 되살아 나는 그 음악에 우린 빨려들고 있었다. 이때 사제관 아래층에서 과일과 음료를 준비하던 식복사(신부를 돕는 사람)정양이 위층 사제관으로 허검지검 뛰어들면서 “신부님 바깥에 수상한 사람들의 그림자가 얼씬 거려요”하며 몸을 떨었다.

자정의 사제관에 울린 벨소리

불현 듯 몇 개월전 우리 성당에 도둑이 들었던 일이 생각났다.“못 된 녀석 같으니라구.”내가 플래시를 들고 임을영씨와 함께 아래층 현관문으로 내려가는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한발 먼저 아래층에 내려간 임씨가 현관문을 막 여는 순간 4명의 괴한들이 들이닥치면서 한명이 임씨의 양 어깨를 쇠파이프로 내려친 후 복도 끝에 있는 방으로 끌고 갔다. 나머지는 뒤따라 계단을 내려가던 나에게 달려 들어 플래시를 들고 있는 왼쪽 손목을 쇠파이프로 갈겼다. 그리고 쇠파이프로 우측 대퇴부를 맞는 찰나 나는 힘없이 쓰러졌다. 순간 그들의 칼과 쇠파이프가 잽싸게 내 몸에 날라 들었다. 순간적으로 양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온몸이 얼얼한 느낌이 들면서 나는 정신을 잃엇다. 그들의 무자비하게 휘두른 쇠파이프에 사제관의 콘크리트의 벽은 수술자국마냥 흉직한 상처를 내면서 패이기도 했다. 그 단단한 콘크리트 벽이 패이도록 쇠파이프를 휘둘러 댔으니 몸이 성할리 없다. 그들에게 왜 그렇게 무자비하게 맞아야 했는가, 나는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임씨는 당시 건강한 26세의 대학생으로 한 괴한과 뒤엉켜 격투를 벌였는데 그때 그 괴한이 때리는 막대가 쇠파이프임을 알았다. 임씨의 고함과 아래층의 소란한 소리에 놀라 내려오는 소화숙씨의 모습을 본 괴한들은 “일단 후퇴”라는 외침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들 테러범들이 한 말은 ‘일단 후퇴’한마디였으며 시간은 2∼3분에 지나지 않는, 한 순식간의 일이었다. “신부님이 큰일났어요. 도와줘요.”울부짖으며 허겁지겁 마을 신도들 집을 찾아 내닫는 정양은 동네 개에게 다리를 물린 줄도 모른채 어둠속을 헤맸다. 다행히 임씨는 타박상에 그쳤다. 나는 온 몸을 쇠파이프로 맞아 갈비뼈가 부러진데다 몸 6군데를 칼로 찔려 꼼짝할 수가 없었다.

마을의 여산의원에 옮겨진 나는 칼로 찔린 곳만 우선 꿰매는 응급처치를 받고 하룻밤을 뜬 눈으로 지샌 뒤 전북대 부속병원으로 다시 옮겨졌다. 고통이 전신을 꿰뚫고 지나다니면서 심한 화상을 입은 것처럼 동맥이 지끈지끈 쑤셔왔다. 눈앞이 흐릿해지고 심하게 구역질이 솟아 올랐다. 그리고 나는 곧 의식을 잃고 말았다. 열흘동안은 온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3주간의 입원치료 끝에 퇴원을 했는데 부러진 갈비뼈는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은 상태였다. 그후 1년쯤 지난 뒤 상처가 재발되면서 하반신에 마비가 와 81년 8월 22일부터 10월말까지 두달 이상을 전북대병원, 서울성바울로병원에서 입원치료을 받아야 했다.

고통 잊기위해 ‘여산순교성지’개발

내가 덮고 자는 요·이불도 넘을 수 없게 돼버린 두 다리의 감각을 되찾기 위해 하루종일 다리를 주무르며 지압을 하면서 남몰래 울던 일, 그리고 용변시의 쓰라림 등은 평생 지울 수 없는 고통이었다. 하체의 마비는 급기야 나의 정신까지 좀먹기 시작했다. 기억상실증이 찾아 든 것이었다. 서울의 성바울로병원 생활을 기억해 낼 수 있는 것은, 퇴원할 때 나의 아버님이 새벽 일찍이 나를 찾아왔던 일과 현신부님 차를 타고 여산성당에 오던 일, 이 두가지 장면이 고작이었다. 문병차 나를 찾아 온 신부님들이 “신부 한사람을 잃게 됐다”며 탄식했다는 얘기는 나중에야 들은 일이었다.

퇴원해서 여산성당에 돌아온 나는 며칠 밤낮을 잠속에서 헤멘지 모른다. 내가 어렴풋이 눈을 떴을 때 걱정스레 나를 내려다보고 계시는 부모님의 말간얼굴이 맨 먼저 눈 안에 들어왔다. 나에 이어 한 여동생을 수녀로 하느님께 바칠때도 아픔을 전혀 내색하지 않으셨던 불쌍하신 우리 부모님. 남들처럼 가정을 이뤄 부모님을 편히 모실 수 없는 인간적인 고뇌가 나를 괴롭히는 순간이었다.

나의 건강은 극도로 악화됐다. 사목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릴없이 누워 지낼 수 만은 없었다. 몸을 움직여야 한다. 교회앞 5백여m 떨어진 순교지의 성역화작업에 나서기로 했다. 나는 기다시피 그 곳을 왕래하면서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수도 없이 삼켜야만 했다. 81년부터 시작한 여산순교성지작업은 85년까지 꼬박 4년이 걸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어려운 일을 불구의 몸을 이끌고 의지 하나로 끝마친데서 나는 심신의 건강을 다시 찾아온 것 같다. 여산순교성지는 병인(1886년)박해가 일어나면서 금산·진산·고산에서 잡혀온 22명의 신자들이 순교한 곳이다. 이곳에서 순교한신 분들의 무덤은 인근 천호산 기슭 천호공소부근에 있다. 여산순교성지 완공후 나는 정상적으로 사목에 전념할 수 있을 정도의 건강을 되찾았다. 그러나 8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오른쪽다리를 절룩거려 ‘절름발이 신부님’으로 통한다. 병원에서 퇴원한 나는 그후 1년을 목발을 짚고 다니다가 지난 84년 4월까지는 지팡이를 짚고 다녔고, 지금은 오른쪽다리를 저는 장애자가 되었다.

범인들, 얼굴 모래흙으로 위장 스포츠형 머리

테러사건이 있었던 날, 그날따라 이상하게 젊은이들과 이야기가 하고 싶어 늦은 시간인데도 사제관까지 데리고 온 일, 괴한이 쇠파이프로 내려칠 때 머리만은 맞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으로 팔로 머리를 감싼 일 등이 없었더라면 나는 그때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나와 같이 있었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20대가량의 괴한들의 머리는 짧게 깎은 스포츠형이었고 얼굴에는 모래흙을 발라 위장을 한 모습이었다. 또 흑색상의와 회색바지 차림으로 파란색 바탕에 흰줄이 있는 축구화를 신고 있었는데 이는 젖은 땅에 남아있는 발자국과 일치했다.

나는 이들의 나이와 차림새, 그리고 도망갈 때 일반시민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일단 후퇴’라는 구령을 외쳤다는 점 등에 비추어 군인이라는 심증을 충분히 굳힐 수 있다. 이밖에도 나는 군요원에 의한 테러라는 몇가지 정황증거를 가지고 있다. 80년 5월 19일은 함평 고구마사건 1주년 기념식이 광주 북동성당에서 열리는 날이었다. 당시 가톨릭농민회 지도신부였던 나는 교회일에 바빠 기념식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광주를 다녀온 가농회원들로부터 금남로와 공용버스정류장등지에서 공수부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당하는 광주 데모대의 소식을 소상히 들을 수가 있었다.

그때부터 광주에 관한 각종 유언비어가 나돌기 시작했는데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끔찍한 내용들이었다. 당시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광주에서 일어나고 있던 사건을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몇몇 신부들이 직접 담양·장성등지를 다녀왔기 때문에 광주의 참상을 상세하게 전해 들을 수가 있었다. 5월 21일, 서울 절두산 성지순례를 마치고 내려오던 나는 문득 고속도로에 광주고속이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닫고 겁이 벌컥 났다. 그날 밤 전주교구는 긴급 사제단회의를 갖고 광주에서 탈출한 김현장씨(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으로 수감중)가 작성한 ‘전두환의 광주 상륙작전’이라는 유인물 1만매를 복사해 신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한편 옥외마이크로 강론을 통해 그 진상을 폭로하기로 했다.

유인물 돌려 ‘광주학살’폭로

당시 유인물의 일부 내용을 옮겨본다.“아! 민족사의 대비극이다. 하늘은 어찌 이리도 무심하단 말인가! 신성한 국토방위의 의무를 국민들로부터 위임받은 군인이 제 2의 거창 양민학살사건을 자행하고 있다. …중략……3천여명의 공수특전단들은 대검을 빼어 들고 미친 망나니처럼 호박을 찌르듯이 닥치는대로 찔러 피가 강물처럼 흐르는 시체들을 군 트럭에다 내어던지고 그것도 부족하여 달아나는 시민들과 어린 여학생들을 대문까지 부수고 끌어내어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대검으로 난자하였다. 이러한 만행에 온 시민들은 치를 떨며 저항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맨손인 시민들은 도리어 칼질을 당하였고 손녀같은 여학생이 피흘리며 죽어 가는 것을 보고 공수부대의 멱살을 잡은 70노파는 도리어 칼로 찔리어 죽음을 당했다. 남학생들에게 돌을 날라다 주었다는 여학생을 대낮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대검으로 난자하였고, 피를 보고 울부짖는 시민들을 향하여, 공수부대는 피묻은 칼을 흔들어 대며 죽이겠다고 소리쳤다. …중략…

…시외버스터미널에서는 이러한 만행에 항거하는 시민들과의 싸움중에 공수부대의 칼에 맞아 죽은 젊은이들의 시체가 대합실에 즐비하였고 미처 치우지 못한 시체는 밤늦게까지 길가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나마 맞아죽기를 면한 젊은이들은 조기떼를 엮어매듯 길바닥에 죽은 시체처럼 늘어 놓았으며, 이때 공수특전단의 구호는 ‘젊은 놈들은 모조리 죽여 버려라’였으니…. …중략……미친 개 전두환일파를 몰아내지 못한다면 이 땅의 우리가 후손에게 물려 줄 유산은 끝없는 억압과 착취뿐이라는 것을 마음속 깊이 새기고 우리 모두 투쟁의 일선에 일어서서 애국가를 목이 터지도록 부르며 나아가자. 대한민국 만세! 민주주의 만세! 이상의 믿어지지 않은 참상은 80만 광주시민이 그 증인이다. 광주시민은 최후의 한사람까지 투쟁할 것이다. …후략…”

몸조심해라 군종신부 귀뜀

나는 사제단의 결정에 따라 여산본당과 관내 9개공소에 사람을 시켜 유인물을 배포했다. 그리고 이들 공소에서 강론시 옥외마이크를 설치, 광주학살만행을 폭로하기 시작했다. 특히 광주에 직접 진입한 군부대가 있는 금마공소에서 강론할 때는 “국민을 죽이는 군대는 민족의 군대가 아니다. 민족의 배신자다. 그들에게는 집을 세주거나 쌀을 팔지 말라”고 외쳐 금마 전체가 술렁이기도 했다. ‘전두환 광주 살륙작전’이라는 유인물이 성당을 통해 신자들과 일반 시민에게 배포되고, 강론을 통해 신자들과 시민들에게 광주학살의 참상이 폭로되어도 전북계엄사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광주에서의 투쟁의 열기가 전주까지 번져오는 것을 크게 우려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천주교 전주교구는 당시 잘 짜여진 조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산성당은 상황이 달랐다. 여산성당에는 전주교구 소속의 마전·신근리·봉동·두화·화하·고분 등 6개공소가 행정구역상으로는 충남에 속해 있었다. 이는 전북 금산이 충남으로 편입될 때 익산군 화하면이 충남 연무읍으로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당의 관할은 행정구역의 변경에도 불구하고 여산성당 관할구역으로 남아 있었다. 이때 6개공소중 마전공소 교리교사이던 당시 여중학생 3명(유영희·현미숙·김양순)이 성당에서 나눠 준 유인물을 보고 크게 분개, 길거리에서 이를 충청도 주민들에게 배포하다 주민의 신고로 충남 강경경찰서에 수감되었고, 신근리 공소의 이명구회장도 대전에 있는 충남계엄사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나는 대전계엄사를 찾아 당시 군종신부에게 “죄는 나에게 있으니 나를 잡아들이고 신자들을 풀어달라”는 교섭을 의뢰했다. 그러나 “신부님이 올때가 아직 안 됐으니 내려가라”는게 그들의 대답이었다. 이어 군종신부는 “군기관에서 박신부를 주목하고 있으니 몸조심하라”는 귀뜀을 해주었다.이와 비슷한 충고는 논산군 연무대의 군종신부에게서도 있었다. 군 기밀실에서 나의 이름이 자주 거론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때부터 테러의 불안을 느끼기 사작했다.

치정관계로 몰아 여러 사람 피해 줘

여산성당은 익산군 여산리 마을인근 해발 1백50여m되는 구릉의 중턱에 지난 1958년 세워졌는데, 소나무와 전나무의 고목으로 뒤덮힌 언덕이 주위를 둘러싸는 경치 좋은 곳이다. 후덥지근한 밖의 더위에도 성당안에만 들어오면 참으로 쾌적했다. 사제관은 성당 바로 옆에 위치한 자그마한 2층건물로 건물 바로 앞에는 두손을 모은채 하늘을 향해 얼굴을 반쯤 올려보고 있는 대리석의 성모마리아상이 자리하고 있다. 항상 평화롭기만 했던 이 하느님의 성전이 사제의 피로 얼룩지게 되자 전주교구사제단, 정의평화위원회, 수녀연합회, 가톨릭농민회 등 교구단체와 본당에서 진상의 철저한 규명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군·경합동수사반은 수사의 방향을 ‘치정에 의한 원한관계’로 몰고 가려는듯한 인상을 강하게 풍겼다. 합동수사반은 본당 식복사의 가족상황, 인간, 애인관계 등을 조사하면서 사건전후 여산성당 사제관 및 식당을 다녀간 여자들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군 수사반은 사건발생 사흘후인 28일 식복사를 연행, “병원에 박신부를 찾아갔을 때 어떤 모습으로 대하더냐. 박신부의 여자관계를 다 알고 있다.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며 무고죄로 구속하겠다”며 새벽 3시까지 취조했다. 사건의 수사가 이처럼 왜곡된 방향으로 흘러 나가자 전주교구는 게엄하에서는 더 이상의 진상을 밝혀 내기가 어렵겠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7월 18일 교구정의평화위원회 명의로 합동수사반에 ‘수사중지’공문을 발송했다.

이 공문에서 정평위는 “박신부님이 당한 상처를 현시국의 한 희생으로 조용히 감수키로 하고, 수사를 계속함으로 인해 새로 빚게 될 물의와 다른 희생들(선의의 피해자들이나 인권침해의 폐)을 막기 위해서 부득이 수사중지를 요청하기로 했다”고 전제한 후 “오직 범인 스스로의 자각과 회오에 의한 따뜻한 용서의 순간이 언젠가 주어지기를 빌뿐, 인도적인 견지에서도 더 이상의 무모한 희생(수사관들의 수고와 주민들의 피해)들이 바람직하지 못하도고 판단했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이후 사건수사는 흐지부지돼 경찰은 사건발생 6개월만에 ‘미제사건’으로 처리, 수사를 일단락시켰다. 이 테러사건의 피해당사자인 나를 비롯 직·간접의 목격자들이 그날 테러범들이 군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는 나름대로의 근거가 충분하다.

범인 태워준 택시기사 회유도

①그날 범인들은 군인들의 머리형태인 스포츠형이었고②도주시에도 일반시민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일단 후퇴’라는 구호를 외쳤다.③뿐만인가, 당시 사건발생시각 직전 금마에서 여산까지 범인들로 추정되는 괴한들을 태워다 준 운전기사 신동식씨도 “당시 손님들이 군인들이 군인들 같은 느낌이었는데 보자기를 하나 들었다”고 말했다. 운전사 신씨는 사건발생후 이리경찰서와 전북도경, 전주에 있는 군 수사기관에 불려가 8일 동안이나 연금된 채 목격자조서를 받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당시 이리경찰서 백모 정보과장이 신씨를 이리 명보여관에서 이틀간에 걸쳐 수사를 했다는 점이다. 정보과장이 직접 수사에 나서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지만 “일이 잘되면 개인택시 면허를 얻도록 협조해주겠다”고 회유했다는 점이다. 또 전주보안대에서는 신씨를 유리창을 통해 아래층의 수사받는 광경이 보이는 2층방에 들여 넣어 겁을 주면서 조사를 했다는 것이다. 그는 “행동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내무반에서 군인들하고 같이 잤다”고 폭로했으며 그가 “내보내주지 않으며 죽여버리겠다”고 소리지르며 가족들 생계를 걱정하자 “가족들 쌀걱정은 말라”며 달랬다는 점이다. 그래도 그가 계속 소리지르고 몸부림치자 비로소 보내 주었다한다. 당시 부대장 심모대령은 “나가더라도 (사건을)입밖에 내지말라. 그렇지 않으면 범인들이 해를 가할것이니 일체 얘기하지 말라”고 협박한 후 이리경찰서 전모 서장의 허락하에 풀려 나왔다. 증거는 또 있다. ④당시 금마공수부대내에 “여산성당을 싹 쓸어버렸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으며⑤여산·금마에 무성했던 “범인들이 부대앞 오토바이상회에서 쇠파이프를 구입해 갔다”는 얘기들⑥사제에 대한 테러를 항의했다고 직위해제를 당한 신자군인 장재구소령사건(당시 논산훈련소 근무)⑦범인들이 얼굴에 모래 흙으로 위장을 했다는 점 등이다. 그후 8년이 지나도록 나는 그 사건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왔다. 광주에서 그때 죽은 사람도 많은데 내 부상쯤이야….

전주교구 정의구현 사제단 재수사 요청

그런데 최근 언론인 테러사건과 우리마당 피습사건 등을 보고 새삼 분노가 치밀었다. 8·15분단 뒤에 단정수립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폭력이 난무했던가. 독립촉성회와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대한노총 친일세력인 한민당 등이 반공을 내세워 독립운동가들을 매국노로 몰아 전국토를 폭력화했는데, 이에 맞선 민중의 투쟁으로 46년 철도노조를 중심으로 한 대구항쟁, 단정수립을 반대했던 제주 4·3항쟁등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부상을 당했던가.

이승만 독재체제가 들어서면서는 더욱 무서운 폭력들이 횡행했다. 반민특위해체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 백골단, 딱벌떼, 민중자결단과 유지광의 장충단강연회 테러사건, 4·19의거를 유발한 4·18고려대생 습격사건 등 우익테러의 악령 등-. 뿐만인가, 박정희 군정시대에 최종길교수 사건에 이어 민청학련사건, 긴급조치로 인한 극심한 인권탄압 그리고 80년에 있었던 광주민중항쟁, 언론인·공직자 해직, 삼청교육대, 박종철고문치사사건, 이한열의 죽음 등으로 거리마다 최루탄과 백골단의 폭력이 난무하는 암혹의 세상이 돼버린 것이다. 새 민주시대를 여는 시점에서 청산돼야 할 구시대의 잔재가 여전히 건재하고 있다는데서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전주교구정의구현 사제단과 상의, 8년전 사건에 대해 재수사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에 천주교정의구현 전주교구 사제단은 9월15일 회의를 갖고 19일 전주지검검사장과 전북도경국장에게 제출한 재수사요구를 통해 “지난 1980년 6월 25일 밤 전북 익산군 여산면 여산리 여산천주교회 사제관에서 당시 주임신부였던 박창신신부에게 공수부대원이 확실시되는 사복군인들에 의해 자행된 잔인한 테러사건이 당국의 고의에 의해 은폐되어 왔음을 기억하며, 이제는 진실이 밝혀져야 할 때가 왔음을 믿는다”고 천명했다. 이어 사제단은 “공인인 사제가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다가 군인들에 의해 테러를 당한 것은 대단히 중대한 사태라고 생각한다”면서 “사건의 정확한 진상과 배후자를 철저히 밝혀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고 밝혔다. 사제단은 “재수사가 올바로 완료될 때까지 수사상황을 지켜보면서 가능한 모든 힘과 노력을 동원할 것”이라면서 “준비된 증거자료를 통해 강력히 대처해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나의 테러사건은 5공비리조사 또는 광주시민항쟁 조사과정에서 규명돼야 한다고 믿는다. 당시 테러범들은 군인이며, 사건의 진상이 군·경수사기관에 의해 은폐돼 왔기 때문이다.

‘진상규명으로 폭압행위 사죄하라’

지난 10월 17일 저녁 7시 30분 전주시 전동성당에서 전주교구정의구현 사제단이 주최한 나에 대한 테러사건 규탄대회가 열렸다. 이날 대회는 며칠전 본당에 의문의 화재가 발생했기 때문에 별관 2층에서 치러졌다. 4백여명이 발디딜틈이 없이 좁은 강당을 메운 이날 대회에서 전북민주화운동협의회 전북인권선교협의회, 전주지구기독청년회, 전북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는 공동성명을 통해 “무장한 정규공수부대에 의해 참혹하게 학살당한 이세종열사(80년 전북대민주화투쟁당시 5·18일 새벽에 진주한 공수부대에 의해 교내에서 학살됨)의 죽음과 광주학살의 참극을 밝히고 고발했다는 이유로 야밤에 성당 사제관을 급습하여 한쪽 다리를 저는 불구의 몸이 되도록 폭행을 당한 박창신신부 테러사건은 파쇼테러통치의 악랄함을 보여 준 우리 지역에서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고 전제한 후 “최근 극좌·극우논쟁은 이러한 폭력행사의 전초작업으로서 치밀하게 계산된 저들의 준비공작이다. 군부파쇼정권은 저들의 기만적 본질을 ‘일부 소수군인들’의 ‘극우적 충성심’에서 나온 국한된 것으로 호도하고 더욱이 자주와 민주를 주장하는 수많은 애국민중을 이에 대립하는 극좌세력으로 매도함으로써 앞으로 예상되는 대대적 탄압의 명분으로 삼으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단언하건데 우리 사회에 극우는 없다. 있다면 극소수 정치군인과 매판자본가, 그리고 그들의 수족으로 충성하는 어용관료집단과 친미사대매국노들이 있을뿐이다. 우리 사회에 극좌는 없다. 극악한 파쇼테러통치에 반대하여 자주민주통일에 살려는 애국 민주세력, 짓밟히고 살해당하고 절대적 폭압아래 신음하면서도 일어서는 애국민중이 있을뿐이다”고 천명했다.

테러규탄대회 앞두고 성당에 의문의 불

협의회는 이어 “현 노태우정권이 진정으로 국민앞에 속죄하고 희생하는 길은 지금과 같은 기만적 개량조치와 탄압으로 국민을 일시적으로 속여 넘기는 것이 아니라 지난 시기에 빚어진 모든 학살만행의 진상을 낱낱이 공개하고 모든 폭압행위를 중지 할 것”을 천명했다. 협의회는 이날 나에 대한 테러사건 진상규명외에도 전두환·이순자 구속, 정치군부의 반동적 도발행위 중지, 합법적 고문·테러기관인 안기부·보안사·백골단의 즉각 해체를 요구했다.

이에 앞서 지난 10월 10일 정오께 전주 천주교 전동성당에 의문의 화재가 발생했다. 전동성당 이수현주임신부(49)에 따르며 ▲화재발생직후 스포츠형 머리와 점퍼차림의 20대 청년 4명이 성당안에서 정문을 통해 황급히 뛰쳐 나가는 것을 담장 하나를 이웃으로 한 성심여중 2층건물에서 음악교사 김모씨와 2학년 이모양·윤모양 등이 목격한 점▲당일 오전 10시 성당에서 거행된 사도예절(장례식)때 성당안에 스포츠형 머리의 낯선 청년 2∼3명이 서성대는 것을 신도가 목격한 점▲화재 당일인 10일 오후 3시께 전주교구청 사목국에 신자라고 밝힌 50대 남자가 전화로 “전동성당화재는 누전이 아니니 철저히 조사하라”고 말한 뒤 끊은 점▲다음날 새벽 2시께 전동성당 수녀원에 괴전화가 걸려와 머뭇거리며 고뇌하는 음성으로 “내일 말씀드리겠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은 점을 들어 계획적인 방화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이신부는 또 “현장을 감식한 치안본부화재감식반과 전북대 전기공학과 김성중교수와 함께 현장조사를 한 결과 발화지점 부근의 전선이 1m간걱으로 두군데가 끊긴 단락현상을 발견하고 타다남은 전선의 형태로 미뤄 누전에 의한 화재는 아닌 것 같다는 견해를 밝혀 방화일 가능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단정했다. 전동성당은 전주의 가톨릭신자뿐 아니라 전주시민들의 마음의 고향이다. 국가지정 기념물 사적 288호인 전동성당일대는 한국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바오로·33세)과 권상연(야고버·41세)이 1791년 2월에 참수되었으며 1801년 9월 유항검과 아우 관검, 그리고 윤지충의 아우 지헌(프란치스코·38세), 김유산(토마스·40세)등이 순교한 곳이다.

‘제도화된 폭력 근절돼야’

1세기가 지난 후 전동성당 초대신부인 보두네는 1908년 순교자의 피어린 땅위에 전동성당건립을 착공하여 1914년에 완공하였는데 명동성당의 설계를 그대로 본뜬 아름답고 유서깊은 건축물이다. 72년의 역사, 한국 최초의 순교지로서 전주교구 10만 신자들의 마음의 본당이 전동성당을 불로 더럽혔던 저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17일에 있을 예정이었던 나의 테러사건 규탄대회를 방해하기 위한 일종의 경고였을까. 여산 천주교회 사제관을 담장 하나 사이에 두고 있는 여산장로교회 강동선목사는 지난 9월 13일자 한겨레신문 ‘국민기자석’에 다음과 같이 투고했다. “…80년 6월 25일 밤11시를 전후에서 짧은머리를 한 채 사복을 입은 괴한들이 사제관 울타리 개들이 출입하는 구멍으로 들어와서 사제관 2층에 있던 박창신신부를 아래층으로 불러내 전신을 쇠몽둥이로 후려치고 예리한 칼로 여러번 난자했다. 이 일로 해서 박신부는 수 개월간 입원 치료를 받고 지금도 오른쪽 다리를 절룩거리는 장애자가 되고 말았다.…이 사건의 범인은 누가 보아도 군인들이었다.…당시 사건을 지켜보고 8년을 안타까와했던 사람으로서 가톨릭 성직자들과 함께 어떠한 노력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다.…성직자가 진실을 설교했다고 해서 칼에 맞아 쓰러져도 속수무책인 사회라면 우리 모두의 장래가 걱정이 아닐 수 없다.…후략”억울했다.

내가 억울한 것은 테러를 당해 다리를 절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역사가 극악한 자들의 힘에 의해서 흘러 갈 수밖에 없었던 사실 때문이다. 해방이후 분단 44년을 통틀어 무수한 깡패집단의 공공연한 폭력과 살인행위를 비롯하여 정규무력을 사용한 80년 광주대학살, 삼청교육대 만행, 민주와 통일을 주장하는 애국자에 대한 살인적 고문과 대인 테러로 이어지는 일상화되고 제도화된 폭력이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서글픈 것이다. 44년간 갈라져 살아온 우리민족을 하나의 조국, 하나의 민족으로 뭉치게 함으로써 조국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이념과 제도의 일치에 앞서 우선 우리민중의 통일이 선행돼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와 농민들이 착취를 당하고 있는, 압제자에 의해 거꾸로 가고 있는 역사의 진로가 바로 잡혀져야만 한다. 교회를 창건한 예수는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위선자라 규정했다. 그리고 사회에서 제일 소외된 계층안에 활동하다 십자가의 극형을 받았다. 자신을 죽이는 속죄양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세워지고 존재하기 위해서 예수와 같지는 않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 이원론속에 빠져 사회에 대하여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한다. 영적인 축복으로만 흘러가고 있으니 잘못가도 한참 잘 못가고 있는 셈이다. 마음의 안식과 위안만을 찾고 세상과 사회악에 관심있는 사람들을 오히려 타락한 자들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제 교회는 세상과 신앙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분열주의자의 모임체가 되고 말았다. 비뚤어진 역사속에서 옳은 길을 찾기 위해 예전의 교회는 얼마나 자신을 헌신적으로 버려야만 했었던가.

독재자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비호해 주거나 인정해줌으로써 권력에 빌붙어 기생하는 교회 지도자들은 깨달아야 한다. 교회는 온갖 박해에도 비뚤어진 민족사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옳은 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8년전 발생해 아직도 미궁에 빠져 있는 나에 대한 테러사건은 국정감사의 대상이 됐다. 지난 10월 8일 내무위 지방감사2반의 최락도의원(평민)은 전북도경의 국정감사에서 “온몸을 칼로 여섯군데나 찌르고 야간에 다중이 무참히 폭력을 행사한 것은 살인에 대한 미필적인 고의가 있었다고 보는데 이에 대한 경찰국장의 견해는 무엇이냐”고 따졌다. 정균환의원(평민)은 “택시운전기사가 군 보안부대에서 조사를 받은 것으로 미루어 단순폭력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심증이 굳어진다”고 당시 군 수사기관에 수사의뢰를 했는지의 여부를 따졌다. 최기선의원(민주)은 증인으로 나온 신종식씨에게 “당시 경찰이 제보 안하고 침묵하면 개인택시 면허발급을 약속했느냐”고 질문했다. 답변에 나선 김우진경찰국장은 “당시 군 수사기관에 수사를 의뢰했는지는 이 사건의 공소시효가 87년 6월 25일로 만료되면서 수사기록을 일체 폐기처분,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증언을 통해 “엉터리 수사로 충분히 잡을 수 있는 범인을 안 잡은 당시 김모경찰국장, 전모 이리서장, 심모 전주보안대장 등을 처벌하라”고 주장했다. 경찰은 이 사건을 단순폭력사건으로 취급, 지난해 6월 25일을 공소시효만료일로 사건기록 일체를 파기해버렸다. 자칫 사람이 살해됐을지도 모를 당시의 사건이 어떻게 폭력사건으로 간단히 처리됐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한편 경찰은 여론의 압력이 높아지자 10월12일 전북도경에 도경수사과장을 반장, 이리경찰서장을 부반장으로 하고 수사과 형사 8명을 반원으로 하는 수사전담반을 구성, 재수사에 나섰다. 도경 8명의 전담형사가 배치된 수사본부는 피해 당사자인 나를 비롯, 사건 당일 밤 공수부대가 있던 금마면에서 괴한들을 여산천주교회까지 태워다 주었다는 택시기사 신종식씨(40), 신씨를 조사했던 당시 이리경찰서 정보과장 백필남씨(정년퇴직), 나와 함께 사제관에 있었던 임을영씨(34·당시 전북대 3년·이리모중학교사)등에게 진술을 받았다. 한편 재수사를 지휘하고 있는 전주지검 노옥기부장검사는 “당시 사건관계자와 수사관계자 참고인등을 모두 재조사, 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겠다”고 밝히고 “이번 수사과정에서는 당시 사건이 단순폭력인지 또는 살인미수혐의가 있었는지 여부에 대해서도 철저히 가려질것”이라고 밝히고 이에 따른 증거수집등 본격수사를 전개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수사는 여전히 제자리 걸음에서 맴돈채 미궁을 헤매고 있다. 이 사건의 진상이 과연 백일하에 명백히 드러날 것인가.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테러행위나 목숨을 빼앗는 죄악을 밝히는 일은 회생자나 유족의 개인적 한을 풀어주는 일로 그쳐서는 안된다. 일제의 고등경찰이 민족운동가들에게 가하던 잔학한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8·15이래 수없이 자행된 테러와 암살의 진상을 밝히고 응분의 처벌을 하지 않는다면 그 ‘전통’은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