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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5·18주역 윤한봉 미국 망명기.전용호(월간경향, 1988. 5)

본문

미신고 부상자를 찾아서

무명용사 박노택씨 인터뷰

대담자 : 김태홍 사무국장



악몽의 80년 5월 19일

그동안 광주항쟁과 그 희생자 그들에 관한 많은 기사와 대담들이 있었다. 매스컴에 거론된 피해자들의 대부분은 부상자동지회나 유가족협의회 소속 회원들이었다. 그러나 실은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있거나 기존의 모임에 얼굴을 내밀기에는 세상 돌아가는 속을 너무 모르고 있거나, 한 끼니 한 끼니를 때우기에 너무 쫓기는 광주항쟁 피해자들이 부지기수로 많다. 그들은 대부분 그같은 모임들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체념해 버린 사람들이다. 『말』지는 부상자회에도 끼지 못하고 아무런 피해 보상도 받지 못했을뿐더러 독재정권에 저항할 엄두도 못내는 무지랭이 광주시민을 찾아 나섰다. 안내를 받아 간 곳은 광주시 변두리 봉선동 버스종점이었다.주변이 허허 벌판인 종점에, 모서리가 각을 이룬 네모진 꼴도 아닌 얼기설기 만들어진 포장마차가 있었다. 포장마차 주인이 바로 만나야 할 사람이었다. ―어디를 다치셨습니까?“오른쪽 허벅지에 파편이 박혀 불에 덴 것처럼 아프고 당장 걸을 수가 없어 기어서 도망가는데, 계엄군이 쫓아와서‘이자식, 총맞았구만’하고서 성한 왼쪽 다리를 개머리 판으로 짓이기고 군화발로 찍어버려 왼쪽다리 복숭아뼈 위가 부러졌습니다”

나이는 28살이라 한다. 엎드려 그릇을 씻고 계신 할머니가 어머니란다. 본인 이름은 박노택, 어머니 성함은 김순조씨다. 전북 정읍이 고향이고 아버지도 목수, 자기도 목수였다는 것이다.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16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목수 일을 배웠다. ―어디서 부상을 당했습니까?“하도 분통이 터져서 다음날 다시 시내에 나갔습니다. 전남의대 병원 입구에서 총기를 나누어 주기에 총을 받았습니다. 밤 12시쯤 화순 방면으로 나가기 위해 숭의중학교 앞에서 군인들과 대치했지요. 그러다가 갑자기“펑”하는 소리를 들은 후 왼쪽 다리에 부상을 입고 군인들에게 오른쪽 다리를 다쳐 허덕이고 있는데, 마침 아버지 친구분을 만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병원도 못가 부친이 치료

―그 뒤고 치료는 어떻게 했습니까?“병원에 가면 다 죽인다는 소문이 나서 아버지가 판자로 다리를 묶고 치료를 하는데, 다리가 부어 오르다가 부기가 빠진 뒤로 가죽이 얇아진 후 손가락만한 뼈를 빼냈습니다. 얼마 후에 왼쪽 다리가 또 곪아 아버지가 칼로 째고 치료를 했습니다.”―아버님은 어디 계십니까?“아버님은 제가 부상을 당한 후 홧병이 나셔서 혼자 술만 잡수고 다니시다가 시름시름 앓은 후 82년에 돌아가셨습니다.”―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가정 형편은 어떠했습니까?“파편 맞은 다리가 아파 돌아 다닐 수도 없었고 84년까지 술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어머니와 저, 단 두 식구생계를 위해 어머니가 밤낮으로 남의 밭을 매러 다니셨습니다. 저는 자포자기에 빠져 술을 마셔대기도 했지만 몸이 약해지고 기운을 쓸수가 없었으며, 무엇을 해보겠다는 용기도 나지 않았습니다. 한때 구루마를 끌고 과일 장사도 해보았지만 다리가 아파 어린애처럼 울어버렸습니다.”그러고 보니 얘기를 나누고 있는 박노택씨의 얼굴에는 생기가 있어 보이지도 않고 말씨도 어눌하여 발음이 똑똑하지가 않았다.

―포장마차는 언제부터 하게 되었습니까?“생각다 못해 87년 10월 시내에서 오토바이센터를 하는 고향친구에게 찾아가 통사정을 해서 20만원을 빌려다가 헌 나무를 사서 포장마차를 지었는데. 아직까지 그빚을 갚지 못하고 있습니다.”그는 요즘도 몸이 약해 낮에도 한숨을 자야할 정도로 피곤하다는 것이다. 87년 겨울에 부상자 회원들의 알선으로 병원에 가서 엣스레이를 찍었더니 아직도 빼내야할 뼈가 있다는 것이었다. 시청에는 부상자 명단에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진료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부상자동지회가 있었다는 것을 몰랐습니까?“일 나갔다 돌아오면 9시 뉴스가 끝난 후가 되고 집에 돌아오면 다리가 아파 드러누워 잠에 떨어지고 했기 때문에 바깥세상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작년 어느날 일 다니는 아저씨가 부상자 동지회 유인물을 갖다줘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오늘 노태우씨가 광주에 온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아침에 버스를 타고 순환도로를 가다가 노태우씨 일행을 만났습니다.”“어떻게 국민의 한 사람으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있을까? 참으로 뻔뻔한 사람이다., 나는 저 사람을 대통령이라 인정할 수 없다.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이 한번이라도 대통령이라 생각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광주항쟁이 일어나게 된 책임이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하십니까?“전두환과 노태우라고 생각합니다”―당시 직접 박노택씨를 구타했던 사람들을 지금 만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죽여부러도 원이 안 풀릴 것입니다.”

박씨의 가장 큰 소망

―지금 가장 큰 소망은 무엇입니까?“장사라도 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머니가 허리가 아파 약을 써야 하는데 약도 쓰지 못하시고 일만 하고 계시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만 합니다. 전에는 전세방에서 단란하게 살았는데…”박노택씨와 대담을 하다가 저쪽 식탁에서 묵묵히 일만 하고있는 어머니가 옆에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퍼뜩 떠 올랐다. 어머니에게 앉기를 권했다.7순이 다 된 어머니 김순조씨는 그저 부끄럽고 민망하기만 한 듯. 괜히 사람을 바로 쳐다 보지도 못하고 아래 쪽만 두리번거리는 것이었다.―아드님이 부상당하고 아버님께서 술로 날을 지새실 때 어떠하셨습니까?“지 같은 사람이 뭣을 알간디요, 그저 세 식구 굶지 않을려고 호멩이로 남의 밭만 매러 다녔구만요. 지는 일만 할 뿐이지 아무것도 몰라요.”기자를 안내했던 부상자회 동료가 나를 보면서“바로 저런 분이 우리들의 어머니”라고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이때 박노택씨가 부시럭 부시럭 편지 두장을 호주머니에서 꺼냈다.한 장은 광주 부상자회 정통성을 지키고 있는 「5ㆍ18광주민중혁명부상자동지회」(회장 이지현)에서 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위 기관의 앞잡이로 전락했다는 박옥재ㆍ박영순이 이끄는「5ㆍ18광주의거부상자회」에서 온 것이었다.「부상자회」에서 온 것은 광주 어린이 대공원에서 야유회를 갖자는 것이고, 「부상자동지회」에서 온 것은 「부상자회가 기관의 앞잡이라는 것, 보상 이전에 진상규명이 있어야한다는 것, 적자운영의 어린이대공원을 주겠다는 것은 부상자들에게 더욱 큰 타격을 주리라는 것, 대공원 야유회는 5월정신을 훼손하는 것이라는 등의 문안이 씌어 있었다.―어린이대공원과 부상자동지회와는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81년 국민들의 성금을 거둬 광주항쟁 희생자들을 지원하라고 했는데 당시 광주시장이 이 돈으로 어린이대공원을 지었으며, 그 관리권도 지금 시에 있습니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요즘도 술을 그렇게 마십니까?“술 끊은지 3년이 되었습니다. 84년 7월에 수박장사를 하다 설익은 것을 사들여 몽땅 망했습니다. 눈앞이 캄캄하여 약을 먹으려 했으나 어머니가 눈에 떠올라 먹지 못했습니다. 또 85년 3월에는 하도 몸이 아프고 살길이 막막해 술을 먹고 일부러 철도를 베고 잠이 들었는데, 동네아이들이 우연히 발견해 잠을 깨워 버렸습니다. ―이곳 주소좀 알려 주십시오.“광주직할시 서구 봉선동 473-3 19통 4반 우편번호 502-060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