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5·18주역 윤한봉 미국 망명기.전용호(월간경향, 1988. 5)
본문
5·18 주역 윤한봉 미국 亡命記
전 용 호 출판인
이 글은 5·18이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현재 활동중인 윤한봉에 관한 기록으로 그를 안전하게 미국으로 망명시켰던 당사자인 정용화로부터 취재한 내용이다. 정용화는 82년 3월 광주지역에 배포된 지하유인물사건과 밀항법으로 수배되었다 12월 치안본부에 출두하여 8일간 수사받고 석방되었고 현재 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미국망명! 사실인가?
82년 세칭 ‘오송희’국가보안법 위반사건이 치안본부에 의해 발표되면서, 사건현장인 군산을 비롯한 전북지역과 서울 및 광주에는 이상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내용은 그 사건에 광주출신 청년 운동가가 한 사람 개입되었으며 그 사람은 이미 미국으로 망명을 했다는 이야기였다. 소문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보다 구체성을 띤 이야기로 발전되었는데, 배로 밀항 하였으며 2개월간 밀폐된 공간에선 식빵만 먹고 살았다느니 하는 믿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해방 이후 국토가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이데올로기 논의가 통제돼 왔던 이 땅에서, 더욱이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에서 누가 감히 망명을 생각할 수 있으며, 설사 한다고 해도 어떻게 성공할 수 있겠는가? 듣는 이의 의문과 불신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그동안 정치적 망명이나 범법자들의 밀항 따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치적 망명이라고 해보아야 비행기로 국외출입이 가능한 특수층이나, 파벌싸움으로 해외 도피하는 권력 상층부의 모습만을 보아왔지 않았던가. 이름조차 생소한 청년운동가가 비밀스럽게 배 밑바닥에 숨어서 미국으로 망명했다는 사실은 의구심과 더불어 어떤 비밀스런 흥분마저 자아내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안개처럼 무성한 소문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그는 정말 미국으로 망명했는가, 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어떻게 미국으로 망명한 것일까? 81년 4월 21일 새벽1시경 마산앞 부두에서 출항하기 위해 선착해 있던 삼미라인 소속의 화물선 레오폴드호에 세 사나이가 어깨동무를 한 채 검문소를 통과하여 탑승하였다. 세 사람은 술에 취한 듯 비틀거렸다. 검문소의 경비는 한번 항해를 시작하면 몇 개월씩 걸리는 외항선의 밤풍경으로 간주하는 듯했다. 몇 달동안 땅을 밟지 못하는 승무원들은 정박하면 육지에 내려 그간의 스트레스를 한껏 해소하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오랬만에 밟아보는 고국의 흙내음이고, 오랬만에 향유하는 고국의 대기가 아닌가. 경비원은 창문으로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시선을 한쪽으로 돌려버렸다. 잠시후 금방 비틀거리며, 배위에 올랐던 세사람중 두명이 다시 나와 근처의 여관에 들어섰다.
여관방에는 남자 2명과 여자 1명이 초조하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두 손님을 맞으며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이듯 물었다. “무사히 통과했어요?”두 선원 중 하나가 대답했다.“걱정마십쇼. 약국 방안에다 곱게 모셔놓았지요.” 이 말을 들은 세사람은 다소 안심한 듯 맥주를 따서 서로의 안전을 기원하는 술잔을 들었고, 잠시후 여자가 눈시울을 붉히더니 마침내 울음을 터트렸다. 이는 80년 광주 5ㆍ18로 수배되었던 윤한봉의 미국망명기록이다. 그의 망명을 주선했던 세사람은 그의 운동권 후배인 정용화(현 5ㆍ18광주민중항쟁 동지회 부회장)ㆍ정찬용(현 거창YMCA 총무)ㆍ김은경(당시 전남민주청년협의회 회원)이었다. 그를 부축하며 배안으로 인도했던 선원은 정찬용씨의 아우인 정찬대씨(2등기관사)와 최동현씨(3등항해사)다. 이들은 세칭‘광주사태’로 1년여동안 수배중인 광주 청년운동의 핵심지도부인 윤한봉을 미국으로 망명시키기 위해 3개월 동안 치밀하게 세워뒀던 계획을 마침내 단행한 것이다.
윤한봉, 그는 누구인가
박정희정권이 꿈꾸었던 영구집권 음모의 산물 유신헌법이 국민투표로 확정된 1972년 이후의 한국은 정치적 암흑시대였다. 칠흙같이 어두운 민주주의 말살의 시기였다. 철저한 정보정치와 가차없는 탄압으로 일시 조용하듯 보였던 전국 각 대학에서는 서서히 유신반대시위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회 각계각층에서도 유신악법을 반대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대학캠퍼스에 민족양심의 보루인 대학생들의 시위를 촉구하는 지하유인물이 발견되고, 여기저기서 활발한 토론이 비밀리에 전개되었다.박정권은 눈에 가시였던 학생운동에 철퇴를 가했다.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사건으로 전남에서도 15명이 구속되었는데, 전남북 책임자 윤한봉, 전남대 책임자 김상윤, 조선대 책임자 김운기 등 전남대와 조선대 학생들이었다. 윤한봉은 1971년 대학 3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 73년 제대한 후 복학하여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농학과에 재학중이었다. 당시 전남에는 1960년대 4ㆍ19의거의 맥을 이어받아 농촌연구활동을 주과제로 설정하고 문학토론 및 역사문제ㆍ민족문제ㆍ사회문제 등을 학습해 왔던 광주제일고등학교의‘광랑독서회’를 중심으로 하는 학생운동 흐름이 있었다. 70년대 들어서면서‘광랑독서회’출신들이 전남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최초의 사회과학서클인 민족사회연구회가 조직되었다. 전남대 학생운동은 이 민사연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전개되었다.
그러나 윤한봉은 민사연회원이 아니었다. 농과대학을 수석으로 입학하여 줄곧 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윤한봉, 그의 운동입문은 상당히 특수했다. 그는 군대생활 3년을 마치고 74년 복학하였다. 착실하고 순수한 그의 천성은 장기집권을 위해 국민의 목을 바짝 조이는 유신헌법에 항거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도록 만들었다. 민사연 회원들을 중심으로 한 운동권 학생들에게, 윤한봉은 나이도 위고 학년도 높았지만, 운동은 늦게 시작한 후배였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새는 줄 모른다고, 이제 그의 일과는 운동에서 시작해서 운동으로 끝났다. 헌신적인 자세, 순수한 성품, 성실한 생활태도로 그는 점차 지도력을 획득해갔다. 윤한봉에게는 몇가지 신화가 남아있는데, 그가 재학당시 따냈던 학교성적은 지금까지도 최고점수로 기록되고 있으며, 어떤 교수는 윤한봉의 답안지를 모범답안으로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또 교수가 운동권학생들에게‘하려면 윤한봉만큼 해라’는 말을 한다고 한다. 여하간 그는 교수와 학생들에게 두터운 신뢰를 받았고 뜻을 세워 한번 시작하면 기필코 이루고야 만다는 과감한 추진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 간선, 긴급조치 등 비상대권의 확대, 유정희 국회의원 신설로 대표되는 유신헌법에 항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그는, 73년부터 학생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마침내 그는 학생운동 전남북총책임자로 추대되어 열성적으로 활동하였던 것이다.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된 그는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서 15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던 중 75년 2월 전국적인 대사면령으로 석방되었다.
사회운동의 초석을 다지고
감옥에서 나온 그는 산산조각난 학생운동조직을 재건하는 한편 사회운동의 씨앗을 뿌린다. 학내로는 민청학련사건으로 와해된 민사연의 후신으로「교양독서회」,「맷돌」,「메시아」등의 독서서클을 조직하고, 학외로는 YWCA산하「고임돌」이라는 문화서클을 등록한다. 이런 맹렬한 활동 도중 1977년 부활절 사건으로 그의 두 번째 옥살이가 시작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그의 의식은 처음 현상적인 정치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촉발된 체제내적 비판논리에서 발전하여, 정치현상의 근저에 뿌리박힌 사회경제적인 근본요인을 인식함으로써, 민족 민주화운동이념으로 질적 성장을 거듭한다. 70년대 고도성장이라는 미명 하에 강행된 수출드라이브 공업화과정의 근간을 이룬 저곡가ㆍ저임금정책으로 농촌의 궁핍화와 이농이 가속화되었다. 농촌지역의 수탈적 소비도시인 광주는 농민운동과 접맥된다. 그는 70년대 후반부터 점차 활성화되는 농민운동과 궤를 같이하게 되며, 농민운동의 지원체제 혹은 선도적 견인차로서의 학생운동, 사후수습과 측면지원을 위한 교회운동 및 사회인권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이러한 필요에 부응해 내부의 역할분담이 이루어진다.
그는 광주구속자협의회라는 공개단체를 조직하여 초대회장으로 선출되었고, 놈민운동에 이강(현 민주쟁취국민운동 전남본부 사무차장), 학생운동에 김상윤(현 전남사회문제연구소 소장), 도시농촌간 직거래를 통한 생활운동부문에 정상용(현 5ㆍ18광주항쟁동지회 회장), 교회운동에 나상기(현 농민문제연구소 소장) 등으로 부문별 역할을 분담, 체계화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합수’윤한봉
박정권 말기인 1978년 전남대의 송기숙ㆍ명노근교수 등을 중심으로 6ㆍ28 민주교육지표 선언사건이 일어난다. 진리 탐구의 상아탑인 대학의 교수들이 들고 일어선 것이다. 다음날 제자들인 全大 재학생 3천여명의 교수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시위가 거세게 이어졌다. 구속된 교수와 학생들을 석방하라는 요구가 외쳐지고, 석방을 촉구하는 집회가 계속되었다. 윤한봉은 이제 눈코뜰새 없이 바빠졌다. 몇몇이서 외롭게 시작했던 운동이 차츰 대중운동으로 전화할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이제 더욱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했다. 그들 사이에서 교량역할을 하면서 다양한 모임을 만들어나갔다. 이때 붙여진 별명이 合水이다. 합수는 전라도 말로 똥물을 일컫는다. 세상만사를 인간이 배설하는 똥에 비유하여 설명한다고해서 합수라는 별명이 주어졌다. 나중에 합수라는 말은 물(水)이 모인다(合)로 그가 가는 곳엔 항상 사람이 많이 집결된다는 그럴듯한 의미로 재해석되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과 만나 동참을 호소했다. 어찌나 진지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이야기를 하는지 그의 고교동창들은 만나기를 두려워했을 정도라 한다. 그를 몇번 만나면 예외없이 운동에 입문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는 할 이야기가 너무도 많았고 입에 침마를 날이 없다고 해서‘거품’이라는 별명도 붙여졌다. 1979년 운동의 발전에 따라 구속자를 회원으로 하던 광주구속자협의회를 확대 개편하여「전남민주청년협의회」를 창립하고, 산하에「현대문화연구소」를 설치하였다. 그는 여성운동에도 관심을 표방하여 구속자 가족 및 미혼여성 등을 중심으로「송백회」를 조직했고 양서조합ㆍ문화운동도 적극 지원하였다. 박정권의 단발마적 탄압이 자행되던 79년 10월, 전대생의 동향은 감시하고 문제학생을 불러 구타 등을 일삼던 사찰요원이 상주하는 상담지도관실에 불이 활활 타올랐다. 계획적인 방화였다. 대중속에 뿌리내리는 운동권에 위협을 느낀 정보사찰당국은 상담지도관실 방화사건의 배후주모자로 윤한봉을 지목한다. 그의 왕성한 활동력과 뛰어난 지도력에 쐐기를 박음으로써 운동의 확산을 막기 위함이었다.
1979년 10월 26일 광주 서부경찰서 숙직실에서는 5명의 형사가 윤한봉을 묶어 놓고 고문을 하고 있었다. 며칠째 계속되는 수사에도 계속 부인하는 윤한봉에게 방화사건을 교사했음을 시인하라는 것이었다. 그를 무자비한 구타ㆍ물고문ㆍ통닭구이 등으로 며칠째 잠도 재우지 않은채 괴롭히고 있었다. 바로 옆 유치장에는 학생들과 전남민주청년협의회 회원들 30여명이 들어와 이미 조사를 끝낸 채 갇혀 있었다. 그들은 윤한봉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담요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렸다. 새벽이 다 되도록 고문과 비명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유치장 당직은 비명소리를 상쇄하고자 라디오를 크게 틀었다. 새벽 뉴스에서 박정희대통령 저격사건이 보도되었다. 유치장에 갇혀있던 수감자는 물론 당직경찰도, 고문하던 수사관도 윤한봉도 모두 놀랐다. 박정희는 그토록 비참한 종말을 고한 것이다. 조사는 급속히 마무리되었고 그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구속되어 광주교도소로 송치되었다. 그의 3번째 징역살이는 12월20일 구속집행정지로 석방됨으로써 끝났다. 그해 민주화 운동권의 망년회는 벅찬 기대와 희망속에서 훈훈하게 치뤄졌다.
민주화의 봄은 어디로
80년 3월 대학가의 개강에 즈음하여 대중투쟁이 활화산처럼 솟구치면서 민주화의 봄은 시작되었다. 전남지역에서도 피땀으로 다져지고 각고의 노력으로 일구어진 민주화의 밭에 푸른 싹들이 쑥쑥자라난 듯 했다. 전국적으로도 민주국민연합(공동의장 윤보선ㆍ함석헌 등)이 결성되고 위장결혼식 사건 등를 통해 그동안 억지로 막아왔던 민주화의 물꼬가 터졌다. 광주지역 노동야학의 출발점이 된 들불야학은 광천동 빈민지역 주민운동과 연결되어 활동의 폭을 넓혀나갔으며, 학내에서는 학도호국단을 거부하고 박관현을 학생회장으로 하는 전대 총학생회를 구성하였다. 문화패「광대」는 돼지값 폭락으로 인한 농민문제를 고발하는『돼지풀이』를 성황리에 공연하였다. 학생ㆍ재야ㆍ청년ㆍ종교ㆍ문화ㆍ여성ㆍ등 모든 부문이 활성화되면서 그는 완전히 운동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 되었다. 당시 후배인 정용화(당시 현대문화연구소 소장)와 함께 자취방을 얻어 생활하던 그는 아침부터 밤까지 운동화를 신고 동분서주했다. 금주와 절제된 흡연으로 건강을 유지하였으며 하루하루의 활동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섬세하게 실천하여, 일단 기획하면 실패하는 일이 없었다. 애들 백일이나 생일 혹은 이사나 초상집에서 번거롭고 궂은 일을 도맡아하던 그를 기억하고 있다.
4월이 지나 5월에 접어들면서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열기는 하늘을 찔렀다. 점차 가두로 진출하였고 시민들의 동조 분위기도 절정에 달했다. 며칠후 피의 향연이 시작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5월 5일 모처럼 활기찬 어린이날을 맞아 민주가족야유회가 푸르른 들에서 있었다. 그는 예언처럼 힘주어 말했다.“민주주의는 안일한 분위기에서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항상 긴장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이다. 스르로 항상 깨어 일어나 반성하고 자각하는 자세로 실천에 임해야 한다”이후 14, 15, 16일 전남지역 대학생 3만여명은 가두로 진출하여 3차례의 민주화 대성회를 개최하였고 마지막날 5ㆍ16화형식 및 횃불행진을 평화적으로 진행하여 시민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5ㆍ18과 도피생활
민주화대성회가 한참 고조되어갈 때 다급한 목소리의 비상전화가 걸려왔다. 이화여대에서 열렸던 전국대학생대표자회의장에 일단의 군인들이 급습하여 수명을 연행했다는 내용이었다.연락을 받은 사람은 ‘설마’하면서도 불안해 했으나 다음날인 17일까지 별일이 없자 낙관적으로 관망했다. 그리고 평상시와 다름없이 윤한봉과 정용화는 현대문화연구소의 하루일과를 마무리하고 사무실문을 나섰다. 16일 梨大 소식을 들은 후 내내 표정이 어두웠던 그는 정용화에게 한모금도 못마시는 술을 한잔 하자며 가까운 막걸리집으로 앞장섰다. 술잔을 받고도 침묵만을 지키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정용화를 시켜 선배ㆍ동료ㆍ어른들께 문안전화를 걸어보라고 시켰다. 녹두서점을 경영하던 김상윤이 권총을 착용한 수사관에게 연행되어 지프차로 실려갔다는 소식을 김상윤의 부인으로부터 들은 때는 통금이 가까운 시각이었다. 또한 박형선ㆍ문덕희ㆍ정동년(당시 민청협 회원)씨 등이 거의 동시에 연행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즉시 윤한봉에게 알렸다. 올것이 왔다는 듯 그는 숙소로 향하지 않았다. 여관도 임검이 있어 위험하다고 판단한 그는 유명인사의 집이 도리어 안전하다고 계산한 후 시인 문병란 집으로 향하였다. 문시인과 함께 새벽까지 향후 정국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던 윤한봉은 새벽4시 통금이 해제되자 대학 동기집으로 몸을 피하여 18일을 맞았다.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발표된 비상계엄확대조치로 18일 전국 각 대학 앞에는 계엄군이 주둔하였고 야당정치인 및 재야 민주인사 상당수가 검거되었다. 추가검거 및 수배가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광주에서도 상황은 똑같이 진행되었고 오전 11시 전남대 정문앞에서 계엄군과 대치한 대학생의 시위로 5ㆍ18광주항쟁은 촉발되었다. 70년대 암흑의 유신치하에서 3차례의 투옥과 조사과정에서의 살인적인 고문 등으로 살얼음판을 걷듯이 조심스럽게, 주도면밀한 활동을 전개해온 윤한봉, 그는 오히려 여유를 가지면서 급변하는 사태를 직시코자 했다. 연행되면 그것으로 끝난다는 살인적 공포를 느끼며 윤한봉과 정용화는 시내외곽을 돌면서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다가 20일 새벽 백운동 검문소를 통과하여 나주로 향했다. 정용화는 고교 은사이신 康津의 김용근선생댁으로 은신하고, 윤한봉은 서울로 빠져나가려 기차를 탔는데, 누군가 뒤를 미행하자 짐을 두고 대전역에서 하차하여 다시 하행열차를 타고 내려와 광주와 나주를 거쳐 26일 역시 康津의 김용근선생댁에 정용화와 함께 피신한다. 이곳에서 27일 광주사태 진압경과와 윤상원(5ㆍ18 당시 도청시민수습위 대변인, 도청에서 사망), 박용준(투사회보팀, 5ㆍ27사망)의 사망소식과 이양현(당시 수습위 기획위원), 정상용(당시 수습위 부위원장)의 연행소식에 윤한봉은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며칠후 정용화만 남고 윤한봉은 서울로 떠난다.
서울 도피생활
20여일 후 낯선 청년이 머물고 있는 것을 수상히 여긴 동네사람의 신고로 정용화는 구속되었다. 김용근선생도 은닉죄로 구속되었다. 서울로 올라온 윤한봉은 당국의 검거망을 피하기위해 연고자를 포기하고 전혀 새로운 인간관계속에서 은신처를 찾아 철저한 도피생활을 한다. 81년 4월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11개월 동안에 무려 십수군데나 거처를 옮겼었다. 도피중에도 그의 철저함은 변함이 없었다. 비상시를 대비해 항상 옷을 입은채 잠을 청했다. 윤한봉의 후배로서 피를 나눈 형제보다 절친하게 동고동락한 정용화와는 81년 1월 해후한다. 정용화는 광주제일고의 광랑독서회 출신으로 고교때부터 학생운동에 관심을 가져왔다. 78년 전대교수들의 민주교육지표선언 시위로 제적되어, 사회운동을 계속하여 현대문화연구소장을 맡은 청년운동가이다. 그들은 자취방을 얻어 숙식을 같이 하였고 5ㆍ18기간에도 같이 피신하였다. 80년 10월 1심에서 형집행면제로 석방된 정용화는 흩어진 살림을 모으듯 폐허가 된 광주지역운동권을 규합해나갔다. 그러던 정용화에게 서울서 보고싶다는 꿈같은 연락이 왔다. 구정 직후 정용화는 서울서 윤한봉을 만나 밤을 새워 회포를 푼다.
망명이냐? 청산가리냐?
그들이 제일 먼저 풀어야할, 그러나 풀기 어려운 문제는 윤한봉의 거취문제였다. 정부는 광주사태의 책임을 누구에겐가 전가하기 위해 김대중과 그의 사주를 받은 정동년을 수괴로 규정했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들은 불신하였고, 그러기에 더욱 그럴듯한 각본이 필요한 상황이 아닌가. 그런 상황에서 광주청년운동권의 총사령탑이었던 윤한봉만 잡힌다면 종교권 및 재야인사들이 포함된 새로운 각본을 그릴 수 있다는 추측이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런 인식을 공유한 그들의 고민은 깊었고 계속 도피하는 것외에 다른 대안을 찾기 어려웠다. 정용화가 불쑥 말을 꺼냈다.“형님, 지금 잡히면 수십명이 다시 연행되고 수사가 전면재개될 것 같아요, 어떻게 처신할까요.”윤한봉은 말이 없었다. 다시 정용화가 말을 이었다. “연행 순간 자살을 하든지, 아니면 국외로 나가는 방법밖에 없는 것같아요.”그러자 윤한봉이 대답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되는구나. 권총이나 청산가리 캡슐을 구했으면 좋겠구나. ”머리와 논리로 운동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몸과 발로 뛰면서 생명을 걸고 동료와 운동권을 지키려고하는 치열한 삶을 살아가지 않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그 순간 경찰서 고문실에서 거꾸로 매달려 고춧가루 물을 먹어가면서도 동료를 밀고하지 않으려고 참다 참다 혼절을 했던 79년의 겨울이 뇌리를 스친 것일까? 아니면 80년 5월 27일 새벽 도청을 지키다 쓰러져간 동지들이 떠오른 것일까?
보름후 한차례 더 만난 정용화는 광주에 내려와 밀항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목포와 여수ㆍ부산등지를 수소문하다 만난 사람이 거창 운동권 선배인 정찬용이다. 정찬용의 동생이 외항선의 선원으로 근무하여 망명계획은 급진전헀다. 수만톤급 화물선의 2등항해사인 정찬대는 형 정찬용의 영향으로 운동권에 우호적이기도 했으며 고향사람이라는 점에 마음이 움직여 같은 배의 동향인 3등항해사 최동현도 합류시켜 거사를 결정한다. 4월 중순 잠깐 귀국한 정찬대가 정용화를 찾아왔다. D데이를 4월 21일 새벽으로 확정하고 마산에서 만나기로 한 후 헤어진 이들은 한명은 마산으로, 한명은 서울로 향했다. 새벽에 서울에 도착한 정용화는 윤한봉의 은신처에서 내일 떠나야한다고 말했다. 망명이야기를 두 번 나눈적은 있지만 이렇게 갑자기 떠나리라 예기치 못한 사태에 윤한봉은 얼마나 가슴이 섬찟하였을까.
배의 약국에서 2개월
그렇다면 그는 배의 어디서 어떻게 숨어지냈을까. 배는 몇만톤에 이르지만 화물선이라 총 승선인원은 슴무원 10여명과 하역선부 40여명 도합 50여명밖에 안된다. 게다가 배의 관리책임은 10명의 승무원이 구역을 분담하게 되어 있다. 그 넓은 공간중에 사람이 한명 숨어서 지낼 공간은 생기기 마련이고 그것으로 밀항은 가능했다. 한번 출항을 하면 몇 개월씩 여행을 하기 때문에 배안에 인간생활에 필요한 갖가지 시설이 있다. 약국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선원들은 자신의 약을 스스로 소지하기 때문에 약국은 거의 무용지물이다. 또한 선원의 출입도 없다. 바로 이 약국 조제실에 딸린 방이 윤한봉의 숙소이다. 식사는 출발시 사서 넣어준 마른 음식과 통조림, 음료수 등으로 연명하였다. 승무원들에게 들키지 않기위해 숨소리 한번 크게 내쉬지 못하고, 교도소보다 더한, 말 그대로 생지옥이었다.
21일 윤한봉을 떠나보낸 정용화는 광주로 돌아와 미국에서 신병을 인도할 사람을 물색했다. 화물선이 미국에 도착하여 하역작업으로 며칠을 정박하면 제일 먼저‘선상예배’를 본다. 이 때 예배는 미국거주 한국인 목사가 집전한다. 이때 윤한봉의 신병을 인도할 사람을 찾아야하는 것이다. 배가 미국에 도착하려면 2개월의 시간이 남아있다. 정용화의 마지막 남은 임무는 윤한봉을 세례집전한 강신석(광주 무진교회 시무)목사와 조아라장로(전YWCA회장)가 맡아주었다.드디어 배가 미국에 도착했다. 배는 5박6일간 정박하기로 되어 있다. 2개월동안 바짝 여윈 윤한봉은 그 5일동안 반해골이 되었다. 하역이 끝나가는 6일째 목사님이 도착했다. 암호가 오고갔다. 목사집에 묵게된 그는 양주 한병을 요구하여 그대로 병째로 입에 털어넣은 후 24시간을 내내 잠만 잤다고 한다.
민족학교 교장, 윤한봉 선생
윤한봉은 현재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민족학교 교장이다. 민족학교는 30만 한인이 모여사는 이곳에서 교포2세 청년들을 중심으로 민주화와 민족통일 그리고 인간해방의 이념을 불어넣는 전당이다. 교육내용은 국사ㆍ국어ㆍ탈춤ㆍ태권ㆍ민요 등의 상설강좌와 역사 및 사회에 대한 인식을 토론을 통해 획득할 수 있도록 부정기 강좌가 개설되어 있다. 몸은 비록 수천만리 떨어진 이국땅에 살고 있으나 배달 민족주의 후예라는 자부심과 민족애를 청년들에게 고취시키는 산 교육장으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조국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그리고 평화운동이라는 세가지 목표를 설정하고 있는 민족학교는 그동안 몇차례의 국제적인 학술세미나도 개최하였다. 민중교육학으로 유명한 파울로 프레이리를 초빙하여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에 대해 강의를 들었는가 하면, 니카라구아에서 투쟁하고 있는 전사를 초빙하여 운동사례 연구도 하였고, 필리핀에서 활동하고 있는 운동가를 초빙하여 대담도 하였다. 자칫 조국을 잊고 자칫 물질만능의 자본주의 첨단인 미국사회에 안주해버릴 수 많은 교포2세 청년들에게 민족주의적 역사관과 의식계발에 성공하여 현재는 민족학교의 이념에 동조하는 청년조직이 각 지역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LA, 샌프란시스코등 13개 도시로 확산해 나가 지금은「재미한인청년연합」이라는 거대한 공식기구까지 발족되어 활발하게 대중사업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미국에 도착한 첫 해인 81년부터 몇 년간 그는 김상돈(이승만정권당시 반민특위 부위원장, 5ㆍ16당시 망명, 87년 작고)선생집에서 기거하였다. 미국실정도 익히고 무엇을 어떻게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인가 하는 설계도 해야하고 그리고 건강도 관리해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였던 그에게 1년의 휴식은 오히려 짧다고 해야 할 것이다. 미국에 정착하는 일이 쉬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배에 숨어서 망명했다는 믿기 어려운 사실 때문에 교민들의 입에 KCIA의 공작원으로 선전이 되면서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1년여를 충분히 휴식을 취한 그는 82년 5월 민족학교의 개설과 동시에‘망명신청’을 하여 재판을 받게 되었다.
87년 마침내 승소하여 영주권과 시민권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오자 그는 시민권은 청구하지 않은 채 영주권만 신청하였다. 한국사람이 외국시민권을 가지고 무엇을 하겠느냐는 그의 당연한 결정이었다. 전라도 강진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민중들과 함께 하고자 가시밭길을 헤치는 고초를 겪다가 독재정권의 칼날을 피하여 수천만리 외국까지 도피해야만 했던 그에게 미국 시민권을 선택하라는 것은 오히려 불쾌감과 치욕을 안겨주는 것이 되리라. 이제 그는 그의 진심을 받아들인 교민 한사람이 기증한 150평의 대지에 2층의 강당까지 가진 민족학교에서 건강하게 자라나는 교포2세 청년들과 함께 운동에 전념하고 있다. 그 옛날 광주에서 수많은 동지들과 함께 생활하듯이……
고향 동지들과 어머니가 보고파…
세끼 굶은 새끼들위해 옥수수 하나 훔쳐오다
머리채 휘둘러서 밭고랑에 쳐박힌 채
새끼들 울며불며 재넘어 올때까지 오열하던 어머님을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앓아 누운 지아비의 눈치보며 빠져나와
이집 저집 구걸하다 개에 물려 절뚝인채
보리쌀 한되에 옷을 벗고 이 악물던 어머님을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
귀머거리, 봉사, 벙어리 삼년 죽은 듯이 참고살고
시앗보는 지아비도 하늘처럼 섬겼건만 아닌밤중 소박맞고 친정집에 찾아갔다‘출가외인’
호통아래 문전에서 되쫓기셔
밤새도록 달을 보며 골목안을 서성이던 어머님을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친정아비 갑오년에 죽창들다 맞아죽고 시아비는 의병나가 머리카락만 돌아오고
지아비는 항일투쟁 만주벌의 귀신되고 큰아들은 징용으로 외동딸은 정신대로 작은 아들 6
ㆍ25에 큰손자 4ㆍ19에…
어머니!
뜬눈으로 밤새우고 애태우며 찾아갔다.
하나남은 막내손자 이를 갈며 키운 손자
민주ㆍ통일 부르짖다 칼에 찢겨 즉사하자
굽은 허리 곧추펴고 고함치며 달려들다
앙상한 팔 휘두르며 악을 쓰며 달려들다
흰 고무신 흰 옷인데 흰머리만, 흰 머리만…
어머니!
부릅뜬 두눈에 백년한 남기고 가「무등산」젊은 원혼들의 피투성이 등에 업혀
「백두」「한라」넘나들며 민주, 통일 울부짖는 어머님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어머님……
(85년 미주 민주 국민연합 회보에 게재된 윤한봉의 시‘어머님’中에서)
현재 광주에는 장형 윤태선씨가 72세 되는 노모를 모시고 서석동에서 살고 있다. 또한 둘째형 윤광장씨(현 전남민주교사추진협의회 회장) 가족도 서석동에서 살고 있다. 아버님은 78년 윤한봉이 두 번째 옥고를 치룰 때 근심으로 밤을 새우다가 기어이 자식 손도 못잡아본 채 눈을 감으셨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그를 자나깨나 걱정하고 계실 노모가 얼마나 보고 싶을까. 위 시에서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이 구구절절하게 표현돼 있다. 위 시의 어머님은 조국에 대한 사랑이자 육천만 동포들에 대한 똑같은 사랑인 것이다. 생전에 자식 손 한번 잡아보고 눈을 감는 것이 소원이시다는 어머님, 무등산 젊은 원혼들의 피투성이 등에 업혀 민주ㆍ통일 울부짖는 어머님을 그는 오늘도 애타게 그리고 있을 것이다. 지난 2월 제6공화국 대통령취임시 사면복권난에 윤한봉이란 이름도 끼어 있었다. 하지만 그 내용이 74년도의 민청학련사건인지 77년 부활절 시위 사건인지 아니면 사면만 되었는지 복권까지 되었는지, 80년 이후 수배되었던 사건니 완전히 풀려서 이제 귀국해도 체포를 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아직 아무도 알 수가 없다.‘주민등록표’에는 이름과 전에 살던 거주지 주소가 기재된 위에 붉은줄만 두줄 그어져 있을 뿐 침묵을 하고 있다.
작년 6월 국민투쟁으로 직접선거가 실시되고 과정이야 어떻든 제6공화국이 출범했다. 하지만 국민들은 65% 이상 다른 정치인들은 선택하였으나 결실을 맺지 못한 채 88년에 들어섰다. 민주화하겠다고 외치는 정권이 들어섰음에도 노동자들은 요구하며, 농민들은 농축산물 수입하지 말라고 외치고 있으며, 학생들은 자주적 정부를 쟁취하자며 시위를 연일 벌리고 있다. 아직도 현 정부가 풀어야할 매듭은 도처에 산적해 있는 현실인 것이다. 최근 노태우대통령은 소위 광주치유책을 발표했으나 아직은 미봉책일 뿐으로 평가되고 있다. 광주치유책의 하나로 제기되고 풀려야할 윤한봉의 귀국문제. 그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은 운동화를 신고 여기저기 바삐 움직였던 그를 결코 잊지 못하며,그가 하루빨리 조국의 품에 안기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전 용 호 출판인
이 글은 5·18이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현재 활동중인 윤한봉에 관한 기록으로 그를 안전하게 미국으로 망명시켰던 당사자인 정용화로부터 취재한 내용이다. 정용화는 82년 3월 광주지역에 배포된 지하유인물사건과 밀항법으로 수배되었다 12월 치안본부에 출두하여 8일간 수사받고 석방되었고 현재 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미국망명! 사실인가?
82년 세칭 ‘오송희’국가보안법 위반사건이 치안본부에 의해 발표되면서, 사건현장인 군산을 비롯한 전북지역과 서울 및 광주에는 이상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내용은 그 사건에 광주출신 청년 운동가가 한 사람 개입되었으며 그 사람은 이미 미국으로 망명을 했다는 이야기였다. 소문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보다 구체성을 띤 이야기로 발전되었는데, 배로 밀항 하였으며 2개월간 밀폐된 공간에선 식빵만 먹고 살았다느니 하는 믿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해방 이후 국토가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이데올로기 논의가 통제돼 왔던 이 땅에서, 더욱이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에서 누가 감히 망명을 생각할 수 있으며, 설사 한다고 해도 어떻게 성공할 수 있겠는가? 듣는 이의 의문과 불신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그동안 정치적 망명이나 범법자들의 밀항 따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치적 망명이라고 해보아야 비행기로 국외출입이 가능한 특수층이나, 파벌싸움으로 해외 도피하는 권력 상층부의 모습만을 보아왔지 않았던가. 이름조차 생소한 청년운동가가 비밀스럽게 배 밑바닥에 숨어서 미국으로 망명했다는 사실은 의구심과 더불어 어떤 비밀스런 흥분마저 자아내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안개처럼 무성한 소문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그는 정말 미국으로 망명했는가, 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어떻게 미국으로 망명한 것일까? 81년 4월 21일 새벽1시경 마산앞 부두에서 출항하기 위해 선착해 있던 삼미라인 소속의 화물선 레오폴드호에 세 사나이가 어깨동무를 한 채 검문소를 통과하여 탑승하였다. 세 사람은 술에 취한 듯 비틀거렸다. 검문소의 경비는 한번 항해를 시작하면 몇 개월씩 걸리는 외항선의 밤풍경으로 간주하는 듯했다. 몇 달동안 땅을 밟지 못하는 승무원들은 정박하면 육지에 내려 그간의 스트레스를 한껏 해소하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오랬만에 밟아보는 고국의 흙내음이고, 오랬만에 향유하는 고국의 대기가 아닌가. 경비원은 창문으로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시선을 한쪽으로 돌려버렸다. 잠시후 금방 비틀거리며, 배위에 올랐던 세사람중 두명이 다시 나와 근처의 여관에 들어섰다.
여관방에는 남자 2명과 여자 1명이 초조하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두 손님을 맞으며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이듯 물었다. “무사히 통과했어요?”두 선원 중 하나가 대답했다.“걱정마십쇼. 약국 방안에다 곱게 모셔놓았지요.” 이 말을 들은 세사람은 다소 안심한 듯 맥주를 따서 서로의 안전을 기원하는 술잔을 들었고, 잠시후 여자가 눈시울을 붉히더니 마침내 울음을 터트렸다. 이는 80년 광주 5ㆍ18로 수배되었던 윤한봉의 미국망명기록이다. 그의 망명을 주선했던 세사람은 그의 운동권 후배인 정용화(현 5ㆍ18광주민중항쟁 동지회 부회장)ㆍ정찬용(현 거창YMCA 총무)ㆍ김은경(당시 전남민주청년협의회 회원)이었다. 그를 부축하며 배안으로 인도했던 선원은 정찬용씨의 아우인 정찬대씨(2등기관사)와 최동현씨(3등항해사)다. 이들은 세칭‘광주사태’로 1년여동안 수배중인 광주 청년운동의 핵심지도부인 윤한봉을 미국으로 망명시키기 위해 3개월 동안 치밀하게 세워뒀던 계획을 마침내 단행한 것이다.
윤한봉, 그는 누구인가
박정희정권이 꿈꾸었던 영구집권 음모의 산물 유신헌법이 국민투표로 확정된 1972년 이후의 한국은 정치적 암흑시대였다. 칠흙같이 어두운 민주주의 말살의 시기였다. 철저한 정보정치와 가차없는 탄압으로 일시 조용하듯 보였던 전국 각 대학에서는 서서히 유신반대시위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회 각계각층에서도 유신악법을 반대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대학캠퍼스에 민족양심의 보루인 대학생들의 시위를 촉구하는 지하유인물이 발견되고, 여기저기서 활발한 토론이 비밀리에 전개되었다.박정권은 눈에 가시였던 학생운동에 철퇴를 가했다.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사건으로 전남에서도 15명이 구속되었는데, 전남북 책임자 윤한봉, 전남대 책임자 김상윤, 조선대 책임자 김운기 등 전남대와 조선대 학생들이었다. 윤한봉은 1971년 대학 3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 73년 제대한 후 복학하여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농학과에 재학중이었다. 당시 전남에는 1960년대 4ㆍ19의거의 맥을 이어받아 농촌연구활동을 주과제로 설정하고 문학토론 및 역사문제ㆍ민족문제ㆍ사회문제 등을 학습해 왔던 광주제일고등학교의‘광랑독서회’를 중심으로 하는 학생운동 흐름이 있었다. 70년대 들어서면서‘광랑독서회’출신들이 전남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최초의 사회과학서클인 민족사회연구회가 조직되었다. 전남대 학생운동은 이 민사연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전개되었다.
그러나 윤한봉은 민사연회원이 아니었다. 농과대학을 수석으로 입학하여 줄곧 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윤한봉, 그의 운동입문은 상당히 특수했다. 그는 군대생활 3년을 마치고 74년 복학하였다. 착실하고 순수한 그의 천성은 장기집권을 위해 국민의 목을 바짝 조이는 유신헌법에 항거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도록 만들었다. 민사연 회원들을 중심으로 한 운동권 학생들에게, 윤한봉은 나이도 위고 학년도 높았지만, 운동은 늦게 시작한 후배였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새는 줄 모른다고, 이제 그의 일과는 운동에서 시작해서 운동으로 끝났다. 헌신적인 자세, 순수한 성품, 성실한 생활태도로 그는 점차 지도력을 획득해갔다. 윤한봉에게는 몇가지 신화가 남아있는데, 그가 재학당시 따냈던 학교성적은 지금까지도 최고점수로 기록되고 있으며, 어떤 교수는 윤한봉의 답안지를 모범답안으로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또 교수가 운동권학생들에게‘하려면 윤한봉만큼 해라’는 말을 한다고 한다. 여하간 그는 교수와 학생들에게 두터운 신뢰를 받았고 뜻을 세워 한번 시작하면 기필코 이루고야 만다는 과감한 추진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 간선, 긴급조치 등 비상대권의 확대, 유정희 국회의원 신설로 대표되는 유신헌법에 항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그는, 73년부터 학생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마침내 그는 학생운동 전남북총책임자로 추대되어 열성적으로 활동하였던 것이다.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된 그는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서 15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던 중 75년 2월 전국적인 대사면령으로 석방되었다.
사회운동의 초석을 다지고
감옥에서 나온 그는 산산조각난 학생운동조직을 재건하는 한편 사회운동의 씨앗을 뿌린다. 학내로는 민청학련사건으로 와해된 민사연의 후신으로「교양독서회」,「맷돌」,「메시아」등의 독서서클을 조직하고, 학외로는 YWCA산하「고임돌」이라는 문화서클을 등록한다. 이런 맹렬한 활동 도중 1977년 부활절 사건으로 그의 두 번째 옥살이가 시작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그의 의식은 처음 현상적인 정치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촉발된 체제내적 비판논리에서 발전하여, 정치현상의 근저에 뿌리박힌 사회경제적인 근본요인을 인식함으로써, 민족 민주화운동이념으로 질적 성장을 거듭한다. 70년대 고도성장이라는 미명 하에 강행된 수출드라이브 공업화과정의 근간을 이룬 저곡가ㆍ저임금정책으로 농촌의 궁핍화와 이농이 가속화되었다. 농촌지역의 수탈적 소비도시인 광주는 농민운동과 접맥된다. 그는 70년대 후반부터 점차 활성화되는 농민운동과 궤를 같이하게 되며, 농민운동의 지원체제 혹은 선도적 견인차로서의 학생운동, 사후수습과 측면지원을 위한 교회운동 및 사회인권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이러한 필요에 부응해 내부의 역할분담이 이루어진다.
그는 광주구속자협의회라는 공개단체를 조직하여 초대회장으로 선출되었고, 놈민운동에 이강(현 민주쟁취국민운동 전남본부 사무차장), 학생운동에 김상윤(현 전남사회문제연구소 소장), 도시농촌간 직거래를 통한 생활운동부문에 정상용(현 5ㆍ18광주항쟁동지회 회장), 교회운동에 나상기(현 농민문제연구소 소장) 등으로 부문별 역할을 분담, 체계화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합수’윤한봉
박정권 말기인 1978년 전남대의 송기숙ㆍ명노근교수 등을 중심으로 6ㆍ28 민주교육지표 선언사건이 일어난다. 진리 탐구의 상아탑인 대학의 교수들이 들고 일어선 것이다. 다음날 제자들인 全大 재학생 3천여명의 교수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시위가 거세게 이어졌다. 구속된 교수와 학생들을 석방하라는 요구가 외쳐지고, 석방을 촉구하는 집회가 계속되었다. 윤한봉은 이제 눈코뜰새 없이 바빠졌다. 몇몇이서 외롭게 시작했던 운동이 차츰 대중운동으로 전화할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이제 더욱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했다. 그들 사이에서 교량역할을 하면서 다양한 모임을 만들어나갔다. 이때 붙여진 별명이 合水이다. 합수는 전라도 말로 똥물을 일컫는다. 세상만사를 인간이 배설하는 똥에 비유하여 설명한다고해서 합수라는 별명이 주어졌다. 나중에 합수라는 말은 물(水)이 모인다(合)로 그가 가는 곳엔 항상 사람이 많이 집결된다는 그럴듯한 의미로 재해석되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과 만나 동참을 호소했다. 어찌나 진지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이야기를 하는지 그의 고교동창들은 만나기를 두려워했을 정도라 한다. 그를 몇번 만나면 예외없이 운동에 입문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는 할 이야기가 너무도 많았고 입에 침마를 날이 없다고 해서‘거품’이라는 별명도 붙여졌다. 1979년 운동의 발전에 따라 구속자를 회원으로 하던 광주구속자협의회를 확대 개편하여「전남민주청년협의회」를 창립하고, 산하에「현대문화연구소」를 설치하였다. 그는 여성운동에도 관심을 표방하여 구속자 가족 및 미혼여성 등을 중심으로「송백회」를 조직했고 양서조합ㆍ문화운동도 적극 지원하였다. 박정권의 단발마적 탄압이 자행되던 79년 10월, 전대생의 동향은 감시하고 문제학생을 불러 구타 등을 일삼던 사찰요원이 상주하는 상담지도관실에 불이 활활 타올랐다. 계획적인 방화였다. 대중속에 뿌리내리는 운동권에 위협을 느낀 정보사찰당국은 상담지도관실 방화사건의 배후주모자로 윤한봉을 지목한다. 그의 왕성한 활동력과 뛰어난 지도력에 쐐기를 박음으로써 운동의 확산을 막기 위함이었다.
1979년 10월 26일 광주 서부경찰서 숙직실에서는 5명의 형사가 윤한봉을 묶어 놓고 고문을 하고 있었다. 며칠째 계속되는 수사에도 계속 부인하는 윤한봉에게 방화사건을 교사했음을 시인하라는 것이었다. 그를 무자비한 구타ㆍ물고문ㆍ통닭구이 등으로 며칠째 잠도 재우지 않은채 괴롭히고 있었다. 바로 옆 유치장에는 학생들과 전남민주청년협의회 회원들 30여명이 들어와 이미 조사를 끝낸 채 갇혀 있었다. 그들은 윤한봉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담요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렸다. 새벽이 다 되도록 고문과 비명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유치장 당직은 비명소리를 상쇄하고자 라디오를 크게 틀었다. 새벽 뉴스에서 박정희대통령 저격사건이 보도되었다. 유치장에 갇혀있던 수감자는 물론 당직경찰도, 고문하던 수사관도 윤한봉도 모두 놀랐다. 박정희는 그토록 비참한 종말을 고한 것이다. 조사는 급속히 마무리되었고 그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구속되어 광주교도소로 송치되었다. 그의 3번째 징역살이는 12월20일 구속집행정지로 석방됨으로써 끝났다. 그해 민주화 운동권의 망년회는 벅찬 기대와 희망속에서 훈훈하게 치뤄졌다.
민주화의 봄은 어디로
80년 3월 대학가의 개강에 즈음하여 대중투쟁이 활화산처럼 솟구치면서 민주화의 봄은 시작되었다. 전남지역에서도 피땀으로 다져지고 각고의 노력으로 일구어진 민주화의 밭에 푸른 싹들이 쑥쑥자라난 듯 했다. 전국적으로도 민주국민연합(공동의장 윤보선ㆍ함석헌 등)이 결성되고 위장결혼식 사건 등를 통해 그동안 억지로 막아왔던 민주화의 물꼬가 터졌다. 광주지역 노동야학의 출발점이 된 들불야학은 광천동 빈민지역 주민운동과 연결되어 활동의 폭을 넓혀나갔으며, 학내에서는 학도호국단을 거부하고 박관현을 학생회장으로 하는 전대 총학생회를 구성하였다. 문화패「광대」는 돼지값 폭락으로 인한 농민문제를 고발하는『돼지풀이』를 성황리에 공연하였다. 학생ㆍ재야ㆍ청년ㆍ종교ㆍ문화ㆍ여성ㆍ등 모든 부문이 활성화되면서 그는 완전히 운동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 되었다. 당시 후배인 정용화(당시 현대문화연구소 소장)와 함께 자취방을 얻어 생활하던 그는 아침부터 밤까지 운동화를 신고 동분서주했다. 금주와 절제된 흡연으로 건강을 유지하였으며 하루하루의 활동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섬세하게 실천하여, 일단 기획하면 실패하는 일이 없었다. 애들 백일이나 생일 혹은 이사나 초상집에서 번거롭고 궂은 일을 도맡아하던 그를 기억하고 있다.
4월이 지나 5월에 접어들면서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열기는 하늘을 찔렀다. 점차 가두로 진출하였고 시민들의 동조 분위기도 절정에 달했다. 며칠후 피의 향연이 시작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5월 5일 모처럼 활기찬 어린이날을 맞아 민주가족야유회가 푸르른 들에서 있었다. 그는 예언처럼 힘주어 말했다.“민주주의는 안일한 분위기에서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항상 긴장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이다. 스르로 항상 깨어 일어나 반성하고 자각하는 자세로 실천에 임해야 한다”이후 14, 15, 16일 전남지역 대학생 3만여명은 가두로 진출하여 3차례의 민주화 대성회를 개최하였고 마지막날 5ㆍ16화형식 및 횃불행진을 평화적으로 진행하여 시민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5ㆍ18과 도피생활
민주화대성회가 한참 고조되어갈 때 다급한 목소리의 비상전화가 걸려왔다. 이화여대에서 열렸던 전국대학생대표자회의장에 일단의 군인들이 급습하여 수명을 연행했다는 내용이었다.연락을 받은 사람은 ‘설마’하면서도 불안해 했으나 다음날인 17일까지 별일이 없자 낙관적으로 관망했다. 그리고 평상시와 다름없이 윤한봉과 정용화는 현대문화연구소의 하루일과를 마무리하고 사무실문을 나섰다. 16일 梨大 소식을 들은 후 내내 표정이 어두웠던 그는 정용화에게 한모금도 못마시는 술을 한잔 하자며 가까운 막걸리집으로 앞장섰다. 술잔을 받고도 침묵만을 지키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정용화를 시켜 선배ㆍ동료ㆍ어른들께 문안전화를 걸어보라고 시켰다. 녹두서점을 경영하던 김상윤이 권총을 착용한 수사관에게 연행되어 지프차로 실려갔다는 소식을 김상윤의 부인으로부터 들은 때는 통금이 가까운 시각이었다. 또한 박형선ㆍ문덕희ㆍ정동년(당시 민청협 회원)씨 등이 거의 동시에 연행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즉시 윤한봉에게 알렸다. 올것이 왔다는 듯 그는 숙소로 향하지 않았다. 여관도 임검이 있어 위험하다고 판단한 그는 유명인사의 집이 도리어 안전하다고 계산한 후 시인 문병란 집으로 향하였다. 문시인과 함께 새벽까지 향후 정국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던 윤한봉은 새벽4시 통금이 해제되자 대학 동기집으로 몸을 피하여 18일을 맞았다.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발표된 비상계엄확대조치로 18일 전국 각 대학 앞에는 계엄군이 주둔하였고 야당정치인 및 재야 민주인사 상당수가 검거되었다. 추가검거 및 수배가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광주에서도 상황은 똑같이 진행되었고 오전 11시 전남대 정문앞에서 계엄군과 대치한 대학생의 시위로 5ㆍ18광주항쟁은 촉발되었다. 70년대 암흑의 유신치하에서 3차례의 투옥과 조사과정에서의 살인적인 고문 등으로 살얼음판을 걷듯이 조심스럽게, 주도면밀한 활동을 전개해온 윤한봉, 그는 오히려 여유를 가지면서 급변하는 사태를 직시코자 했다. 연행되면 그것으로 끝난다는 살인적 공포를 느끼며 윤한봉과 정용화는 시내외곽을 돌면서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다가 20일 새벽 백운동 검문소를 통과하여 나주로 향했다. 정용화는 고교 은사이신 康津의 김용근선생댁으로 은신하고, 윤한봉은 서울로 빠져나가려 기차를 탔는데, 누군가 뒤를 미행하자 짐을 두고 대전역에서 하차하여 다시 하행열차를 타고 내려와 광주와 나주를 거쳐 26일 역시 康津의 김용근선생댁에 정용화와 함께 피신한다. 이곳에서 27일 광주사태 진압경과와 윤상원(5ㆍ18 당시 도청시민수습위 대변인, 도청에서 사망), 박용준(투사회보팀, 5ㆍ27사망)의 사망소식과 이양현(당시 수습위 기획위원), 정상용(당시 수습위 부위원장)의 연행소식에 윤한봉은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며칠후 정용화만 남고 윤한봉은 서울로 떠난다.
서울 도피생활
20여일 후 낯선 청년이 머물고 있는 것을 수상히 여긴 동네사람의 신고로 정용화는 구속되었다. 김용근선생도 은닉죄로 구속되었다. 서울로 올라온 윤한봉은 당국의 검거망을 피하기위해 연고자를 포기하고 전혀 새로운 인간관계속에서 은신처를 찾아 철저한 도피생활을 한다. 81년 4월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11개월 동안에 무려 십수군데나 거처를 옮겼었다. 도피중에도 그의 철저함은 변함이 없었다. 비상시를 대비해 항상 옷을 입은채 잠을 청했다. 윤한봉의 후배로서 피를 나눈 형제보다 절친하게 동고동락한 정용화와는 81년 1월 해후한다. 정용화는 광주제일고의 광랑독서회 출신으로 고교때부터 학생운동에 관심을 가져왔다. 78년 전대교수들의 민주교육지표선언 시위로 제적되어, 사회운동을 계속하여 현대문화연구소장을 맡은 청년운동가이다. 그들은 자취방을 얻어 숙식을 같이 하였고 5ㆍ18기간에도 같이 피신하였다. 80년 10월 1심에서 형집행면제로 석방된 정용화는 흩어진 살림을 모으듯 폐허가 된 광주지역운동권을 규합해나갔다. 그러던 정용화에게 서울서 보고싶다는 꿈같은 연락이 왔다. 구정 직후 정용화는 서울서 윤한봉을 만나 밤을 새워 회포를 푼다.
망명이냐? 청산가리냐?
그들이 제일 먼저 풀어야할, 그러나 풀기 어려운 문제는 윤한봉의 거취문제였다. 정부는 광주사태의 책임을 누구에겐가 전가하기 위해 김대중과 그의 사주를 받은 정동년을 수괴로 규정했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들은 불신하였고, 그러기에 더욱 그럴듯한 각본이 필요한 상황이 아닌가. 그런 상황에서 광주청년운동권의 총사령탑이었던 윤한봉만 잡힌다면 종교권 및 재야인사들이 포함된 새로운 각본을 그릴 수 있다는 추측이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런 인식을 공유한 그들의 고민은 깊었고 계속 도피하는 것외에 다른 대안을 찾기 어려웠다. 정용화가 불쑥 말을 꺼냈다.“형님, 지금 잡히면 수십명이 다시 연행되고 수사가 전면재개될 것 같아요, 어떻게 처신할까요.”윤한봉은 말이 없었다. 다시 정용화가 말을 이었다. “연행 순간 자살을 하든지, 아니면 국외로 나가는 방법밖에 없는 것같아요.”그러자 윤한봉이 대답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되는구나. 권총이나 청산가리 캡슐을 구했으면 좋겠구나. ”머리와 논리로 운동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몸과 발로 뛰면서 생명을 걸고 동료와 운동권을 지키려고하는 치열한 삶을 살아가지 않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그 순간 경찰서 고문실에서 거꾸로 매달려 고춧가루 물을 먹어가면서도 동료를 밀고하지 않으려고 참다 참다 혼절을 했던 79년의 겨울이 뇌리를 스친 것일까? 아니면 80년 5월 27일 새벽 도청을 지키다 쓰러져간 동지들이 떠오른 것일까?
보름후 한차례 더 만난 정용화는 광주에 내려와 밀항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목포와 여수ㆍ부산등지를 수소문하다 만난 사람이 거창 운동권 선배인 정찬용이다. 정찬용의 동생이 외항선의 선원으로 근무하여 망명계획은 급진전헀다. 수만톤급 화물선의 2등항해사인 정찬대는 형 정찬용의 영향으로 운동권에 우호적이기도 했으며 고향사람이라는 점에 마음이 움직여 같은 배의 동향인 3등항해사 최동현도 합류시켜 거사를 결정한다. 4월 중순 잠깐 귀국한 정찬대가 정용화를 찾아왔다. D데이를 4월 21일 새벽으로 확정하고 마산에서 만나기로 한 후 헤어진 이들은 한명은 마산으로, 한명은 서울로 향했다. 새벽에 서울에 도착한 정용화는 윤한봉의 은신처에서 내일 떠나야한다고 말했다. 망명이야기를 두 번 나눈적은 있지만 이렇게 갑자기 떠나리라 예기치 못한 사태에 윤한봉은 얼마나 가슴이 섬찟하였을까.
배의 약국에서 2개월
그렇다면 그는 배의 어디서 어떻게 숨어지냈을까. 배는 몇만톤에 이르지만 화물선이라 총 승선인원은 슴무원 10여명과 하역선부 40여명 도합 50여명밖에 안된다. 게다가 배의 관리책임은 10명의 승무원이 구역을 분담하게 되어 있다. 그 넓은 공간중에 사람이 한명 숨어서 지낼 공간은 생기기 마련이고 그것으로 밀항은 가능했다. 한번 출항을 하면 몇 개월씩 여행을 하기 때문에 배안에 인간생활에 필요한 갖가지 시설이 있다. 약국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선원들은 자신의 약을 스스로 소지하기 때문에 약국은 거의 무용지물이다. 또한 선원의 출입도 없다. 바로 이 약국 조제실에 딸린 방이 윤한봉의 숙소이다. 식사는 출발시 사서 넣어준 마른 음식과 통조림, 음료수 등으로 연명하였다. 승무원들에게 들키지 않기위해 숨소리 한번 크게 내쉬지 못하고, 교도소보다 더한, 말 그대로 생지옥이었다.
21일 윤한봉을 떠나보낸 정용화는 광주로 돌아와 미국에서 신병을 인도할 사람을 물색했다. 화물선이 미국에 도착하여 하역작업으로 며칠을 정박하면 제일 먼저‘선상예배’를 본다. 이 때 예배는 미국거주 한국인 목사가 집전한다. 이때 윤한봉의 신병을 인도할 사람을 찾아야하는 것이다. 배가 미국에 도착하려면 2개월의 시간이 남아있다. 정용화의 마지막 남은 임무는 윤한봉을 세례집전한 강신석(광주 무진교회 시무)목사와 조아라장로(전YWCA회장)가 맡아주었다.드디어 배가 미국에 도착했다. 배는 5박6일간 정박하기로 되어 있다. 2개월동안 바짝 여윈 윤한봉은 그 5일동안 반해골이 되었다. 하역이 끝나가는 6일째 목사님이 도착했다. 암호가 오고갔다. 목사집에 묵게된 그는 양주 한병을 요구하여 그대로 병째로 입에 털어넣은 후 24시간을 내내 잠만 잤다고 한다.
민족학교 교장, 윤한봉 선생
윤한봉은 현재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민족학교 교장이다. 민족학교는 30만 한인이 모여사는 이곳에서 교포2세 청년들을 중심으로 민주화와 민족통일 그리고 인간해방의 이념을 불어넣는 전당이다. 교육내용은 국사ㆍ국어ㆍ탈춤ㆍ태권ㆍ민요 등의 상설강좌와 역사 및 사회에 대한 인식을 토론을 통해 획득할 수 있도록 부정기 강좌가 개설되어 있다. 몸은 비록 수천만리 떨어진 이국땅에 살고 있으나 배달 민족주의 후예라는 자부심과 민족애를 청년들에게 고취시키는 산 교육장으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조국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그리고 평화운동이라는 세가지 목표를 설정하고 있는 민족학교는 그동안 몇차례의 국제적인 학술세미나도 개최하였다. 민중교육학으로 유명한 파울로 프레이리를 초빙하여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에 대해 강의를 들었는가 하면, 니카라구아에서 투쟁하고 있는 전사를 초빙하여 운동사례 연구도 하였고, 필리핀에서 활동하고 있는 운동가를 초빙하여 대담도 하였다. 자칫 조국을 잊고 자칫 물질만능의 자본주의 첨단인 미국사회에 안주해버릴 수 많은 교포2세 청년들에게 민족주의적 역사관과 의식계발에 성공하여 현재는 민족학교의 이념에 동조하는 청년조직이 각 지역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LA, 샌프란시스코등 13개 도시로 확산해 나가 지금은「재미한인청년연합」이라는 거대한 공식기구까지 발족되어 활발하게 대중사업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미국에 도착한 첫 해인 81년부터 몇 년간 그는 김상돈(이승만정권당시 반민특위 부위원장, 5ㆍ16당시 망명, 87년 작고)선생집에서 기거하였다. 미국실정도 익히고 무엇을 어떻게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인가 하는 설계도 해야하고 그리고 건강도 관리해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였던 그에게 1년의 휴식은 오히려 짧다고 해야 할 것이다. 미국에 정착하는 일이 쉬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배에 숨어서 망명했다는 믿기 어려운 사실 때문에 교민들의 입에 KCIA의 공작원으로 선전이 되면서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1년여를 충분히 휴식을 취한 그는 82년 5월 민족학교의 개설과 동시에‘망명신청’을 하여 재판을 받게 되었다.
87년 마침내 승소하여 영주권과 시민권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오자 그는 시민권은 청구하지 않은 채 영주권만 신청하였다. 한국사람이 외국시민권을 가지고 무엇을 하겠느냐는 그의 당연한 결정이었다. 전라도 강진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민중들과 함께 하고자 가시밭길을 헤치는 고초를 겪다가 독재정권의 칼날을 피하여 수천만리 외국까지 도피해야만 했던 그에게 미국 시민권을 선택하라는 것은 오히려 불쾌감과 치욕을 안겨주는 것이 되리라. 이제 그는 그의 진심을 받아들인 교민 한사람이 기증한 150평의 대지에 2층의 강당까지 가진 민족학교에서 건강하게 자라나는 교포2세 청년들과 함께 운동에 전념하고 있다. 그 옛날 광주에서 수많은 동지들과 함께 생활하듯이……
고향 동지들과 어머니가 보고파…
세끼 굶은 새끼들위해 옥수수 하나 훔쳐오다
머리채 휘둘러서 밭고랑에 쳐박힌 채
새끼들 울며불며 재넘어 올때까지 오열하던 어머님을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앓아 누운 지아비의 눈치보며 빠져나와
이집 저집 구걸하다 개에 물려 절뚝인채
보리쌀 한되에 옷을 벗고 이 악물던 어머님을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
귀머거리, 봉사, 벙어리 삼년 죽은 듯이 참고살고
시앗보는 지아비도 하늘처럼 섬겼건만 아닌밤중 소박맞고 친정집에 찾아갔다‘출가외인’
호통아래 문전에서 되쫓기셔
밤새도록 달을 보며 골목안을 서성이던 어머님을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친정아비 갑오년에 죽창들다 맞아죽고 시아비는 의병나가 머리카락만 돌아오고
지아비는 항일투쟁 만주벌의 귀신되고 큰아들은 징용으로 외동딸은 정신대로 작은 아들 6
ㆍ25에 큰손자 4ㆍ19에…
어머니!
뜬눈으로 밤새우고 애태우며 찾아갔다.
하나남은 막내손자 이를 갈며 키운 손자
민주ㆍ통일 부르짖다 칼에 찢겨 즉사하자
굽은 허리 곧추펴고 고함치며 달려들다
앙상한 팔 휘두르며 악을 쓰며 달려들다
흰 고무신 흰 옷인데 흰머리만, 흰 머리만…
어머니!
부릅뜬 두눈에 백년한 남기고 가「무등산」젊은 원혼들의 피투성이 등에 업혀
「백두」「한라」넘나들며 민주, 통일 울부짖는 어머님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어머님……
(85년 미주 민주 국민연합 회보에 게재된 윤한봉의 시‘어머님’中에서)
현재 광주에는 장형 윤태선씨가 72세 되는 노모를 모시고 서석동에서 살고 있다. 또한 둘째형 윤광장씨(현 전남민주교사추진협의회 회장) 가족도 서석동에서 살고 있다. 아버님은 78년 윤한봉이 두 번째 옥고를 치룰 때 근심으로 밤을 새우다가 기어이 자식 손도 못잡아본 채 눈을 감으셨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그를 자나깨나 걱정하고 계실 노모가 얼마나 보고 싶을까. 위 시에서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이 구구절절하게 표현돼 있다. 위 시의 어머님은 조국에 대한 사랑이자 육천만 동포들에 대한 똑같은 사랑인 것이다. 생전에 자식 손 한번 잡아보고 눈을 감는 것이 소원이시다는 어머님, 무등산 젊은 원혼들의 피투성이 등에 업혀 민주ㆍ통일 울부짖는 어머님을 그는 오늘도 애타게 그리고 있을 것이다. 지난 2월 제6공화국 대통령취임시 사면복권난에 윤한봉이란 이름도 끼어 있었다. 하지만 그 내용이 74년도의 민청학련사건인지 77년 부활절 시위 사건인지 아니면 사면만 되었는지 복권까지 되었는지, 80년 이후 수배되었던 사건니 완전히 풀려서 이제 귀국해도 체포를 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아직 아무도 알 수가 없다.‘주민등록표’에는 이름과 전에 살던 거주지 주소가 기재된 위에 붉은줄만 두줄 그어져 있을 뿐 침묵을 하고 있다.
작년 6월 국민투쟁으로 직접선거가 실시되고 과정이야 어떻든 제6공화국이 출범했다. 하지만 국민들은 65% 이상 다른 정치인들은 선택하였으나 결실을 맺지 못한 채 88년에 들어섰다. 민주화하겠다고 외치는 정권이 들어섰음에도 노동자들은 요구하며, 농민들은 농축산물 수입하지 말라고 외치고 있으며, 학생들은 자주적 정부를 쟁취하자며 시위를 연일 벌리고 있다. 아직도 현 정부가 풀어야할 매듭은 도처에 산적해 있는 현실인 것이다. 최근 노태우대통령은 소위 광주치유책을 발표했으나 아직은 미봉책일 뿐으로 평가되고 있다. 광주치유책의 하나로 제기되고 풀려야할 윤한봉의 귀국문제. 그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은 운동화를 신고 여기저기 바삐 움직였던 그를 결코 잊지 못하며,그가 하루빨리 조국의 품에 안기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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