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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자료실

작성일2007-05-30

[성명서 및 유인물] 광주 사태에 대한 진상/천주교 광주대교구 사제단 1980.6.

본문

광주사태에 대한 진상



오월은 싱그럽고 아름다운 달이다.

그러나 80년 5월은 6.15이후 가장 참혹한 민족사의 비극이 일어났던 대 참변의 달이다. 국토 방위의 신성한 임무를 띤 국군과 후방 지원을 담당하는 동족의 유혈충돌로 빚어진 엄청난 광주사태가 바로 그것이다. 전라도민은 물론 양식있는 전 국민들의 비통을 자아내게 하는 이 사태는 비상 계엄이라는 너울 속에 정부 당국의 거짓된 발표와 통제된 언론의 편향보도로 인하여 철저히 왜곡되고 있음을 광주시민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오도된 국민으로부터 자업자득이었다는 비난과 함께 질시의 눈초리를 당하고 있다. 거짓은 폭로되고 진실은 밝혀지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임을 잘 알고 있는 우리는 양심과 신앙의 충동에 따라 사태의 진상을 전 국민 앞에 발표하는 것만이 우리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며, 이 사태로 죽어간 영령들을 위로하고 한맺힌 광주 시민의 아픔에 동참하는 길이라고 결정하여 아래와 같이 전 국민 앞에 밝히고자 한다.


평화적인 학생 데모

비상계엄이 확대 실시되기 전까지 광주 대학가는 교내 시국 성토대회를 벌리다가 <민주화 시국성회>를 갖기 위해 전남 도청앞 분수대에 모였으며, 이후 전남대를 비롯하여 10개의 대학 전문대학 학생 3만여명이 대규모 집회 및 횃불 행렬로 시위를 벌였다. 많은 학생 데모였지만 평화적인 것이었고 경찰과의 충돌조차 없었으며, 학생들은 이 집회로써 그동안의 시위를 끝내고 정부 당국의 성의있는 답을 기다리며 수업에 전념할 것을 결의 했었다. 이 평화적인 시위가 왜 참담한 살육이 자행되는 눈뜨고 볼 수 없는 비극으로 돌변하고 말았을까.1 그 진범은 누구일까.1


공수 특전단의 만행

만일 휴교 조치에 대비하여 학교 앞에 모이기로 사전 합의한 전남대생들은 비상계엄이 확대 선포되고 데모 주동 학생들이 체포되던 5월 18일 아침 교내로 들어가려다가 총을 든 군인들에 의해 제지를 당하자 투석전을 벌였다. 계엄군에게 쫓겨난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연좌시위를 벌렸고 경찰이 최루탄과 경찰봉으로 해산시키려 하자 다시 투석전이 벌어졌다. 경찰력으로 진압이 실패되자 오후 3시경 공수부대를 투입시켰다. 착검한 M16에 방망이로 무장한 공수 대원들은 학생들을 해산시키기 위하여 남·여학생들을 붙잡아 방망이를 휘둘러 마구 난타했다. 뒷통수를 맞고 피를 낭자하게 흘리며 쓰러진 학생들이 많았다. 이에 격분한 학생들이 보도블럭을 깨서 돌을 만들어 집어 던졌다.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는데도 붙잡혀온 학생들에게 군화발로 짓밟거나 기합을 주었으며, 심지어는 다시 방망이를 휘둘렀다. 반항하는 경우 M16에 꽂은 칼(대검)으로 등과 허벅지를 사정없이 찔러 그었다. 피흘리는 학생들을 굴비처럼 엮어 군인 트럭에 싣고 갔으며, 통금이 밤 9시로 단축된 것이 발표되자 귀가하는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까지 무조건 두들겨 패고 연행했다. 이를 만류하는 시민들까지 개머리판으로 마구 때렸다.

다음날(19일) 시내의 표정은 무섭게 가라앉은 상태에서 술렁대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금남로 일대에 이루 셀 수 없는 시민들이 모여 들었으며, 이날 아침 몇명되지 않는 공수부대원들은 어제와는 달리 모여드는 학생과 시민들을 쫓았다. 그러다가 데모 학생들이 몰려들자 붙잡아 옷을 벗기어 길거리에 꿇어 앉혔고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학생들을 계속 구타했다. 공수대의 잔인성을 직접 목격한 군중들은 울분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흥분하기 시작했다. 오후에는 가택수색까지 해가며 학생들을 붙잡아 갔고, 얻어 맞아 택시에 실려가는 학생들까지도 차에서 끌어 내려 두들겼으며, 심지어는 운전수들까지도 두들겨 팼다. 흥분된 시민들이 합세하기 시작하자 남녀노소를 구별치 않고 구타하거나 대검으로 난자했다. 칼로 옆구리가 찔린 학생과 등이 ×자로 그어있는 시체가 추후에 확인되었다. 이때 체포된 학생수가 927명이라고 계엄사는 발표했다. 양 이틀간의 무자비한 공수대의 만행은 많은 시민을 데모에 가담케 했으며, 군중의 분노를 가열케 했다.


데모대의 무장 경위

공수대의 만행과 체포가 그치자 시민들이 가족을 찾아 각 병원 응급실, 시체실을 메웠다. 그런데도 계엄사는 20일 민간인 사망자 1명, 계엄군 사망자 4명이라고 발표하여 시민들을 더욱 분노케 했다. 일부 시민들은 공수대원들의 무차별 만행에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방법들을 찾기 시작했다. 시내버스, 택시 운전사들이 차를 몰아 도청을 최후의 저지선으로 지키고 있는 군경을 향해 돌진해 갔다가 최루탄에 의해 밀려났다. 수만명의 학생과 시민들로 차도와 인도가 가득찼고 시민들은 함성과 시위를 벌렸다. 아세아 공장에서 납품하려던 장갑차와 군용 짚과 트럭을 빼앗아 계엄군을 향해 시민들이 함께 나아가다가 연이은 총성과 함께 많은 시민들이 쓰러졌다. 여러대의 헬기가 상공을 배회했고 사상자는 계속 늘어나기 시작했다. 전남의대를 비롯한 3개의 종합병원, 182개의 개인 병원으로 총상자들이 분산되어 응급치료를 받았다. 총소리에 쫓겨 놀란 시민들은 뿔뿔히 흩어지기 시작했고 숨을 곳을 찾아 나서자 거리는 텅비어 버렸다.

맨 주먹으로 대항하던 주민들은 이에 대항할 무기의 필요성을 깨달아 화순을 비롯한 인근 경찰서에 들어가 경찰 예비군용 총기, 실탄, 수류탄, 화순탄광에서 사용하는 티·엔·티를 빼앗아 시내로 모이자 시가지는 완전 전쟁상태로 돌변했다. 총을 든 시민들에 의해 계엄군은 외곽으로 퇴각했으며 이 때도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밤새껏 쉬지않고 총소리가 났으며 밤에는 도청이 데모 군중에 의해 점거당했다.


도청철수 이후의 광주상황

학생들 스스로 시내 치안을 담당하기 위한 조직을 구성했다. 점거된 도청이 학생들의 임시 본부가 되자 도청앞 광장과 금남로 시가는 인파로 몰렸으며 다시 질서있게 “시민 궐기대회”를 가지며, ‘계엄 철폐’, ‘전두환퇴진’, ‘김대중 석방’, ‘구속자 석방’ 등의 구호를 외쳤다.

종교계, 학생대표, 학계, 법조계, 언론계 등의 인사로 수습위원회가 스스로 구성되었다. 수습위원들은 더 이상의 유혈사태를 막기 위하여 계엄군의 시내진입을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무기 수거에 나섰다. 시민과 대화를 하겠다고 발표한 신임 박 총리는 광주 상공을 헬기로 정찰하고 계엄사 전남북 본부에만 들려 상황을 청취한 뒤 일방적인 특별 담화문을 발표하여 시민을 경악케 했다. 수습위원들의 활동으로 총기와 실탄이 상당수 회수되었다. 수습 위원회가 요구조건을 내었으나 원만한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근본적인 수습을 위해 최대통령이 광주사태의 잘못을 인정하고 국민 앞에 사과하고 보상과 추후 정치적 보복을 없앨 것에 대한 성의있는 답변을 공개 천명토록 요구할 것을 결정했다. 이런 논의가 진행되는 사이 계엄사는 약속을 어기고 시내 무장 진주를 시도하자 학생들은 수거한 무기를 다시 분배 무장했다. 계엄군이 진주할 경우 시가지가 피로 물들 사태가 발생할 것을 염려한 수습위원들은 비폭력의 죽음으로 항거하자고 결의하여 탱크 앞까지 죽음의 행진을 했다. 계엄군이 양보하여 퇴진했고 계엄사와 수습위원이 다시 회동했다.

사태 수습이 사령관의 권한 밖임을 암시하자 수습대변인이 대통령 면담을 위해 서울로 떠났다. 유혈사태를 우려하던 수습위원들의 인내와 수고가 무시된 채, 5월 27일 새벽 2시 섬광탄을 쏘고 총격전이 전개되어 유혈이 흐르는 가운데 계엄군이 다시 시가지를 장악했다. 계엄사는 이날 유혈진압에 17명의 사망자 뿐이라고 했지만 섬광탄에 희생되거나 총상을 입어 사망한 수는 새벽녘에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알 길이 없다. 평화롭게 해결될 수 있는 기회가 계엄군의 성급한 진군으로 유혈진압이 되어버린 것이다. 피를 부르며 시가지를 장악한 계엄군은 마치 적진을 탈환 한 것 같은 승리감에 차 있었다고 아사이 신문은 전했다. 피를 머금은 땅은 흔적이 없듯이 열흘동안의 민주화를 부르짖던 함성도 흔적없이 사라진 것 같다. 그러나 광주사태에 대한 민주 시민의 긍지를 역사가 평가하여 줄 때가 오리라 믿는다.


폭도는 누구인가.1

사태가 수습되었다는 당국의 발표를 듣고 ‘폭도’, ‘난동자’, ‘불순분자’, ‘극렬분자’에 의해 파괴되었을 법한 광주시를 찾아온 외래객들은 너무나도 평온한 시내의 분위기에 의아심을 갖는다. 파괴로 휩쓸린 도시가 아닌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사태 중 광주 MBC, KBS, CBS 방송국들과 두 개의 신문사는 사실을 보도해야 할 언론과 매스컴의 책임을 이행하지 못했음은 물론, 사상자 수에 대한 허위 보도, 시민들을 무장폭도 및 난동자로 규정하였으므로 시민들의 분노를 사 파괴 및 방화되었다. 많은 총기가 탈취당했는데도 몇건의 사고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은행 강도도 없고 전기 수도가 공급된 것은 시민의 수준이 높은 증거라는 외신기자의 말에 공감을 느낀다. 남녀 대학생들이 치안대를 조직하여 은행과 농협 쌀창고를 지켰으며, 일부 지각없는 청년들의 횡포를 신속·정확하게 막았다 한다. 광주 경찰서 현관과 벽에는 “본 경찰서는 우리의 재산, 기물 파괴는 세금의 과중, 스스로 보호합시다. 학생 일동”이리는 표어가 붙어있었다. 계엄군이 외부와 통신 교통을 차단시켜 생필품과 식량이 공급되지 않는 가운데도 매점 매석 행위나 폭리를 취하는 자가 없었다. 언제 풀릴지 모르는 사태 속에서도 서로 식량을 나누어 먹었고, 총상으로 인한 환자가 급증하여 피가 부족하게 되자 헌혈하는 시민들의 수가 무한히 늘어서 지금도 헌혈 받은 피들이 남아 돌고 있다. 부녀자들은 데모 대원들에게 스스로 음식과 약품을 제공했고 배고파 하는 계엄군들에게도 미움을 잊은 채 먹을 것을 제공해 주었다.


사건의 전모가 발표되지 않았으나 3명의 간첩 협의자를 잡았다. 소위 치안부재의 10일, 곳곳에 흩어진 돌맹이, 유리, 최루탄 파편을 쓸어내는 시민들, 총격의 위험을 무릎쓰고 환자를 운반 간호했던 의사, 간호원들, 생명을 내어 맡기며 젊은이를 보호했던 운전사들, 어느 때 보다도 가장 선량했던 세칭 부랑아와 버림받은 이들. 방망이를 휘둔 공수대원 앞에 너무나 섧게 섧게 울어버린 어느 아낙의 따스한 마음, 파괴와 방화를 하지 말자며 만류하던 우리 모든 광주 시민들!! 그것은 우리가 아는 폭도들의 짓이 아니다. 저들이 불순 분자라면 감히 할 수 없는 일들이다. 그런데도 저들은 불순분자와 폭도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연행, 체포의 위험 속에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광주 시민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민주시민의 긍지를 마음 속에 갖지만 응어리진 마음은 풀리지 않은 채 이재민에게 처럼 보내지는 구호품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며 외면하고 있다.


군은 이상과 같은 한국 근래사상 유래없는 유혈사태를 유발하여 놓고 그 책임을 광주시민에게 전가하기 위해 일체의 보도를 통제하고 사실을 은폐함으로써 광주시민들과 우리 국민 전체의 가슴에 피맺힌 한을 남겨 놓았다. 더욱 그들이 스스로 저지른 잔인한 만행에 대해 추호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1980년 6월


천주교 광주대교구 사제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