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성명서 및 유인물] 광주사태보고/목격자 이로사리아 1980.5.30.
본문
광주사태 보고
광주사태는 인구 80만의 광주시민이 전 시가지에 걸쳐 5월 18일부터 27일 새벽까지 피의 항전을 계속했으며, 전라남도의 각 시·군에 파급되어 대규모 민중봉기로 타오르므로서 우리 역사상 처음보는 대규모 반독재 투쟁이었다. 이 투쟁의 밑바닥에는 공수특전단에 의한 처참한 인간 살육이 전개되어 눈을 뜨고는 차마 볼수 없으며 혀를 두고도 차마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겨놓고 있다. 광주시민이 모든 궐기하여 ‘계엄철폐’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씨 석방하라’ ‘피를 보상하라’ 고 외친 이 사건은 민족사상 가장 비참한 동족살상의 예로 손꼽힐 것이며, 광주사태의 교훈은 군사독재가 이땅에 뿌리를 내리는 한 민주 한국의 앞날은 암흑이요 절망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시민의 피로써 증언해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광주시민은 이 비국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광주사태는 비상계엄하의 언론통제로 철저히 진실이 왜곡되어 어떤 경우에는 사실이 정반대로 전달되고 있다. 광주사태의 진실은 영원히 역사에 새겨질 것이다. 광주사태의 본질을 가리려는 당국의 행위는 해를 손바닥으로 가리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것임을 보고자는 천주교 신자의 양심으로 증언하고자 한다.
이 보고는 극히 한정된 상황을 사실에 입각하여 기록한 것이다.
사태의 발단
광주사태는 전국의 대학생들이 계엄철폐를 외치며 대규모 시위를 벌인 것과 기본 정신을 같이하고 있다. 계엄당국은 5월 18일 0시를 기해 계엄을 확대 실시하고, 정치지도자들과 데모 주동 학생들을 체포했다.
그런데도 광주의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 학생들 400여명은 일요일인 5월18일 오전 10시반경 금남로 1가에서 평화적인 데모를 벌이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300여명의 시민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기동경찰은 폐퍼포그를 쏘아대며 경찰봉을 휘둘러 이 데모를 해산했다. 학생들은 일단 흩어져 이날 종일 시내 곳곳에서 게릴라식 데모를 벌이며 돌멩이로 기동경찰에 맞서 싸웠다. 공수특전단 소속 군인들은 이날 오후 4~5시경에 군인 트럭을 타고 시내중심가에 들어와 데모 학생들을 M16 개머리판과 방망이로 무차별 구타하며 연행했다. 군인들은 학생들이 피흘리며 쓰러지면 구두발로 짓이긴후 군인트럭이 집어던진 후 머리를 수그리게 해서 굴비를 쌓아놓은 것처럼 포개 놓았다. 시민들은 이 광경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18일 데모 첫날 상황은 대체로 기동경찰들이 데모 진압을 담당했고 공수단 군인들이 지원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데모 진압을 지원하던 군인들이 학생과 일반시민을 무차별 난타하므로서 시민들의 격분을 샀다. 18일 저녁까지는 대체로 군인들이 개머리판과 방망이와 구두발로 구타하는 것이 상태였지만 칼을 쓴 경우도 있었다. 즉, 18일 오후 3시경 전남대학교 안으로 학생들이 들어가려하자 교문을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들이 M16에 꽂은 대검으로 학생들을 찔러 1명이 숨졌다. 오후 6시경에 군인들을 금남로에서 데모하는 학생들을 연행하며 칼로 찌르는 광경이 눈에 띄었다. 시민들은 피를 보자 울음을 터뜨리며 분노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학생데모는 밤에도 계속됐다.
계엄당국은 이날 통행금지 시간을 밤9시로 앞당기고 시내 전역에 걸쳐 검문을 강화했다. 군인들은 19일 새벽 4시부터 시내를 일제히 검문하며 젊은이들을 무조건 구타했다. 택시 운전기사들도 이유없이 구타당했다. 시민들이 학생 데모에 가담하게된 직접적인 동기는 공수대들의 잔인한 살상행위가 저질러면서부터라고 말할 수 있다.
사태의 심각성
(1) 시민·학생 살륙의 현장
나는 19일 (월요일) 오전 9시반에 가톨릭센타에 들어서며 데모 광경을 자세히 보았다. 도청앞에서 전일빌딩까지 장갑차가 늘어서 있고 무장군인, 기동대들이 몇겹으로 진을치고 있었다. 공수부대원들은 데모학생은 말할 필요도 없고 길가는 사람들 중 젊은이들을 보면 무조건 총으로 밀어 쓰러뜨리고 총끝에 달린 대검으로 머리, 어깨, 목을 마구 찔렀다. 그들은 피를 흘리며 길바닥에 쓰러져 갔다. 공수부대원들은 피흘리는 젊은이들을 나일론 끈으로 묶어 큰 길가운데로 끌고가서 꿇어 앉혔다. 광주의 번화가인 금남로는 피가 혼건히 고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금남로 2가에 있는 광주 관광호텔앞에 학생들을 꿇어 앉힌 후 뒤로 팔을 묶은 후 머리를 땅에 닿게 하고 심지어는 배까지 닿게 총으로 찍어 눌렀다. 몸이 약한 어떤 대학생은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두대 얻어 맞은 후 입에 거품을 물고 갈가에 쓰러지기도 했다.
광주시민들은 이때부터 분노가 극도로 치밀어 올라 군인과 기동경찰들에게 돌을 던지며 학생들과 본격적으로 합세하여 데모를 벌이기 시작했다. 19일 오전 10시반쯤에는 금남로 1가에서 유동까지 약 2㎞거리를 채우며 ‘계엄철폐’ ‘김대중씨 석방’ ‘피를 보상하라’를 외치기 시작했다. 80대 할아버지부터 유치원생까지 끼어 있었다. 국민학생들까지 길가에 돌맹이를 들어나르며 “군인들이 오면 때려 죽이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어느 청년이 제일은행 뒷건물 옥상에서 군인들에게 돌을 던지자 군인들은 그 건물의 옥상으로 쳐들어가 10여명을 붙잡아 난타하는 모습도 보였다. 군인들이 남녀노소를 묻지않고 구타하여 칼로 찔러댔다. 온통 피비린내가 광주 도심지에 깔리기 시작했다. 나는 다리에 힘이 쭉 빠지며 현기증이 들었다. 나는 가톨릭센터 앞에서 먹은 것을 토했다.
군인들은 도망하는 젊은이들이 민가에 숨어들면 쳐들어가서 끌어내고 모두 잡아가며 구타하고 칼로 찔렀다. 공수부대원들은 대학생 한사람을 군용트럭 뒤에 매달아 시내를 끌고 다니며 비참하게 숨지게 했다. 시민들은 그것도 모르고 군용트럭에 돌을 던지다가 차뒤에 끌려 늘어져 있는 대학생을 발견했으나 그 학생은 이미 숨진 뒤였다. 공수부대소속 군인들의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나는 상무동 근처에서 얼굴이 으깨진채 손수건으로 피를 닦으며 울고 서 있는 시내 중앙여고 학생을 보았다. 그 여학생은 반쯤 넋을 잃고 있었다. 내가 자초지종을 물으니 그 여학생은 10여분경에 다소 진정한 뒤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학교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데모를 하려 했으나 군인들이 교문을 지켰어요. 우리들이 수업을 마치고 정문으로 나오려는데 군인들이 총에 꽃은 칼로 우리들을 마구 찔러 교문 앞에서 친구 20여명이 피를 흘리며 죽었습니다. 우리 교감 선생님도 군인들의 칼에 찔려 죽었습니다…아! 떨려요 흐흑” 이날 그러니까 5월 19일 오후 시외버스 공용터미날에서 계엄군이 학생 2명을 죽도록 두들겨 팼다. 운전기사 1명이 부상 학생들을 차에 실으러 하자 군인들은 운전사를 칼로 찔러 죽이고 차까지 불태웠다. 광주의 전시가지는 공포의 도가니로 변했다. 시민들의 적개심도 머리끝까지 타올랐다. 이날 오후 시민들은 가톨릭센타에 있는 기독교 방송국을 점령하고 있던 계엄군에게 진격해 무장을 해제시키고 공수대 소속 군인 1명을 붙잡아 5층에서 길바닥에 내던져 죽였다. 군인들은 가톨릭 센터를 쳐들어와 사무실에 세들어 근무하던 사람들까지 200여명을 모조리 붙잡아 갔다. 이날 가톨릭센터 건물에는 시체6구가 널려져 있었다.
(2) 시민·학생의 방어와 무장
시민들은 공수대원들이 무차별 만행에 치를 떨며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좀 더 적극적인 저항을 하기 시작했다. 20일 오후 7시경 시내버스와 택시 운전사들이 “전 시민이 죽어가는데 우리도 나서자”하고 공설운동장에 모여 궐기한 후 도청 방향으로 일제히 차를 몰았다. 모든 차는 헤트라이트를 켠 체 경적을 울렸다. 계엄군들은 도청으로 접근하는 차들을 향해 발포 했으나 성난 차량의 행렬은 멈출줄 몰랐다. 이 순간 군인들의 발포로 죽은 운전사와 거리에 물려든 시민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이와 같은 공방전이 계속되다가 21일 자정이 조금 지나 시민들은 도청을 접수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어디론가 철수했다. 시민들은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21일부터 예비군 무기고 등을 습격하여 총기류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무장의 동기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군인들은 헬리곱터에서 최루탄을 시내에 뿌려 시내 중심가는 갓난아기까지 숨을 쉬기가 어려울 정도로 시민들은 괴로움을 겪어야만 했다. 나는 21일 오후 5시 상무동에서 국민학생과 노인들까지 나와 바리케이트를 치는 것을 보았다. 상무대는 일반군인들이 많이 주둔하고 있는 곳이다. 시민들은 상무대를 향해 “대한 국군 만세”를 소리높이 외쳤다. 나는 군인 한명이 불러서 근처에 가 보았다. 그는 양평에서 왔다고 말하며 “광주시민이 왜 이러느냐?”고 의아해 했다. “우리가 듣기는 간첩들이 광주에 와서 난동을 부린다고 해서 왔다”고 그는 말했다. 나는 “그렇지 않다. 시민들의 저렇게 극렬하게 싸우는 것은 공수부대원들이 시민을 너무나 무지막지하게 찔려죽이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 군인은 무전으로 무엇인가를 보고하고 있었다. 부근에 있는 광주시민들은 내말을 듣고 안전지대로 피신해 있었다. 군인 한 사람은 이북 간첩들이 광주의 방송국을 점령해서 이북 방송을 내보내고 있다’고 엉뚱한 소리를 했다.
분노한 시민들은 광주문화방송국, 케이비에스 광주방송국, 노동청, 세무서 등을 불태웠다. 방송국 두개를 불태운 것은 광주 사태를 엉터리로 보도한 원흉들이었기 때문이다. 노동청과 세무사는 시민들의 원성을 자아내던 표본이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시민들은 갈가에 있던 차량들을 불태웠으나 이러한 행위는 계엄군이 공격해 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시민들은 아무리 분노가 극에 달했어도 각 은행과 학교, 도청, 교회 등을 방화하지 않은 것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 해독불능 …
그들의 말을 빌자면 군인들은 머리가 깨지고 온몸이 칼에 찔려 중태에 빠진 젊은이들까지 시체더미 속에 내던져 얼마나 죽어가고 있는지 모른다”고 하소연 했다. 5월 25일 도청앞에서 시민궐기 대회가 열렸다. 이날은 온종일 비가 세차게 내렸다. 도청 앞에 모인 수십만 시민들은 희생된 시민들을 위해 묵념했다. 한 학생이 “지금 내리는 이 비는 무참히 죽어간 우리 젊은이들의 눈물이다. 우리는 이 비를 모두 맞아야 한다”고 외쳤다. 억수같이 퍼붓는 빗줄기에도 우산을 펴든 시민은 거의 없었다. 내가 직접 본 시체의 모습을 증언하겠다. 내가 본 것은 극히 한정된 것임을 미리 말해 둔다. 도청 구내에 있는 1층 건물안에 널이 20여개 놓여 있었다. 시체들은 얼굴만 내보여진 상태로 가족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체의 얼굴은 대체로 세하야한 색갈이었다. 그러나 이 가운데 몇구는 퉁퉁 부어오른 채로 흑인처럼 새까맣게 그슬려 있었다. 군인들이 화염방사기를 썼다는 소문도 나돌고 있다. 26일 오후 5시경 도청 앞에서 일어난 일이다. 고등학교 10여명이 계엄군에 의해 숨진 동료학생의 시체를 운구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도청에서부터 분향소가 마련된 상무관까지 50여미터 가량을 행진했다. 관 위에는 대형 태극기가 펼쳐져 있었다. 고등학생들은 동료학생들의 시체를 들고가며 울먹인 목소리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나라 찾는데 통일, 이겨레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오라, 통일이여 오라”는 노래를 불렀다. 연도에 늘어선 시민들도 나도 모두 이 순간을 지켜보며 엉엉 울었다.
광주 사태의 전망
(1) 광주사태는 계엄을 철폐하고 조속한 민주헌정을 수립하려는 전 시민적 항쟁이었다. 이 사건은 계엄군이 이 광주시를 27일 새벽에 점령하므로서 일단 끝난 것처럼 보일른지 모른다. 그러나 광주사태는 완전히 진압된 것도 아니며, 완전한 종결된 것도 아니라고 본다. 학생, 시민들이 소리높이 외쳤던 구호들이 아직 하나도 실천되지 않고 있다. 정확한 사망자 수와 부상자 수 마저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무참히 학살당한 광주시민의 골수에 사무친 원한과 상처는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광주사태의 핵심적인 요구사항을 실현하는 것만이 전 국민적 과제라고 생각한다.
(2) 광주사태는 결코 지역감정에서 일어난 편협한 운동이 아니다. 광주사태는 국민의 의지를 집약해서 용기있게 표현한 거룩한 항쟁이었다. 광주시민의 용기는 인권운동 사상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인 시민의식의 발로를 지역감정에서 기인한 불만의 폭발이라고 몰아세우는 당국의 태도는 민족분열의 죄악을 스스로 자행하는 용서 받을 수 없는 행위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광주사태는 민주주의를 갈구하는 우리 민족의 기백과 용기를 전 세계에 알린 역사적 사건의 하나라고 본다.
(3)광주사태에 공수특전단이 저지른 만행은 유언비어라고 하면서 덮어둘 성질의 것이 아니다. 공수부대의 만행은 적군에게 하는 것 이상으로 치를 떨게 한 것으로서 우리 국민이 영원히 기억해야 할 사항이라고 본다. 이러한 잘못과 실수를 없는 것으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정적인 잘못은 솔직히 인정해야만 화해의 토대가 마련된다고 볼 수 있다. 누구든 과오와 실수를 덮어두고 사실을 반대로 전파하는데만 신경을 쓴다면 국민과 군간에 형성된 이질감은 좀처럼 해소될 길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광주시민에 대해 야수적인 억압책을 뜬 군 지휘관은 마땅히 엄중문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광주시민이 바램이다.
(4) 광주시민은 물질적인 보상 보다는 정신적인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광주시민돕기 운동이 물질적 도움에 치중하면 형식에 그칠 뿐이라고 생각된다. 광주시민이 구호금품이나 받으려고 이 엄청난 운동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광주사태의 정신사적 의의 즉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라는 목표와 이의 실현을 위한 부단한 노력임을 국민 모두가 잊지 말아야 하겠다.
1980년 5월 30일
목격자 이로사리아
광주사태는 인구 80만의 광주시민이 전 시가지에 걸쳐 5월 18일부터 27일 새벽까지 피의 항전을 계속했으며, 전라남도의 각 시·군에 파급되어 대규모 민중봉기로 타오르므로서 우리 역사상 처음보는 대규모 반독재 투쟁이었다. 이 투쟁의 밑바닥에는 공수특전단에 의한 처참한 인간 살육이 전개되어 눈을 뜨고는 차마 볼수 없으며 혀를 두고도 차마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겨놓고 있다. 광주시민이 모든 궐기하여 ‘계엄철폐’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씨 석방하라’ ‘피를 보상하라’ 고 외친 이 사건은 민족사상 가장 비참한 동족살상의 예로 손꼽힐 것이며, 광주사태의 교훈은 군사독재가 이땅에 뿌리를 내리는 한 민주 한국의 앞날은 암흑이요 절망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시민의 피로써 증언해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광주시민은 이 비국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광주사태는 비상계엄하의 언론통제로 철저히 진실이 왜곡되어 어떤 경우에는 사실이 정반대로 전달되고 있다. 광주사태의 진실은 영원히 역사에 새겨질 것이다. 광주사태의 본질을 가리려는 당국의 행위는 해를 손바닥으로 가리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것임을 보고자는 천주교 신자의 양심으로 증언하고자 한다.
이 보고는 극히 한정된 상황을 사실에 입각하여 기록한 것이다.
사태의 발단
광주사태는 전국의 대학생들이 계엄철폐를 외치며 대규모 시위를 벌인 것과 기본 정신을 같이하고 있다. 계엄당국은 5월 18일 0시를 기해 계엄을 확대 실시하고, 정치지도자들과 데모 주동 학생들을 체포했다.
그런데도 광주의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 학생들 400여명은 일요일인 5월18일 오전 10시반경 금남로 1가에서 평화적인 데모를 벌이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300여명의 시민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기동경찰은 폐퍼포그를 쏘아대며 경찰봉을 휘둘러 이 데모를 해산했다. 학생들은 일단 흩어져 이날 종일 시내 곳곳에서 게릴라식 데모를 벌이며 돌멩이로 기동경찰에 맞서 싸웠다. 공수특전단 소속 군인들은 이날 오후 4~5시경에 군인 트럭을 타고 시내중심가에 들어와 데모 학생들을 M16 개머리판과 방망이로 무차별 구타하며 연행했다. 군인들은 학생들이 피흘리며 쓰러지면 구두발로 짓이긴후 군인트럭이 집어던진 후 머리를 수그리게 해서 굴비를 쌓아놓은 것처럼 포개 놓았다. 시민들은 이 광경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18일 데모 첫날 상황은 대체로 기동경찰들이 데모 진압을 담당했고 공수단 군인들이 지원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데모 진압을 지원하던 군인들이 학생과 일반시민을 무차별 난타하므로서 시민들의 격분을 샀다. 18일 저녁까지는 대체로 군인들이 개머리판과 방망이와 구두발로 구타하는 것이 상태였지만 칼을 쓴 경우도 있었다. 즉, 18일 오후 3시경 전남대학교 안으로 학생들이 들어가려하자 교문을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들이 M16에 꽂은 대검으로 학생들을 찔러 1명이 숨졌다. 오후 6시경에 군인들을 금남로에서 데모하는 학생들을 연행하며 칼로 찌르는 광경이 눈에 띄었다. 시민들은 피를 보자 울음을 터뜨리며 분노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학생데모는 밤에도 계속됐다.
계엄당국은 이날 통행금지 시간을 밤9시로 앞당기고 시내 전역에 걸쳐 검문을 강화했다. 군인들은 19일 새벽 4시부터 시내를 일제히 검문하며 젊은이들을 무조건 구타했다. 택시 운전기사들도 이유없이 구타당했다. 시민들이 학생 데모에 가담하게된 직접적인 동기는 공수대들의 잔인한 살상행위가 저질러면서부터라고 말할 수 있다.
사태의 심각성
(1) 시민·학생 살륙의 현장
나는 19일 (월요일) 오전 9시반에 가톨릭센타에 들어서며 데모 광경을 자세히 보았다. 도청앞에서 전일빌딩까지 장갑차가 늘어서 있고 무장군인, 기동대들이 몇겹으로 진을치고 있었다. 공수부대원들은 데모학생은 말할 필요도 없고 길가는 사람들 중 젊은이들을 보면 무조건 총으로 밀어 쓰러뜨리고 총끝에 달린 대검으로 머리, 어깨, 목을 마구 찔렀다. 그들은 피를 흘리며 길바닥에 쓰러져 갔다. 공수부대원들은 피흘리는 젊은이들을 나일론 끈으로 묶어 큰 길가운데로 끌고가서 꿇어 앉혔다. 광주의 번화가인 금남로는 피가 혼건히 고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금남로 2가에 있는 광주 관광호텔앞에 학생들을 꿇어 앉힌 후 뒤로 팔을 묶은 후 머리를 땅에 닿게 하고 심지어는 배까지 닿게 총으로 찍어 눌렀다. 몸이 약한 어떤 대학생은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두대 얻어 맞은 후 입에 거품을 물고 갈가에 쓰러지기도 했다.
광주시민들은 이때부터 분노가 극도로 치밀어 올라 군인과 기동경찰들에게 돌을 던지며 학생들과 본격적으로 합세하여 데모를 벌이기 시작했다. 19일 오전 10시반쯤에는 금남로 1가에서 유동까지 약 2㎞거리를 채우며 ‘계엄철폐’ ‘김대중씨 석방’ ‘피를 보상하라’를 외치기 시작했다. 80대 할아버지부터 유치원생까지 끼어 있었다. 국민학생들까지 길가에 돌맹이를 들어나르며 “군인들이 오면 때려 죽이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어느 청년이 제일은행 뒷건물 옥상에서 군인들에게 돌을 던지자 군인들은 그 건물의 옥상으로 쳐들어가 10여명을 붙잡아 난타하는 모습도 보였다. 군인들이 남녀노소를 묻지않고 구타하여 칼로 찔러댔다. 온통 피비린내가 광주 도심지에 깔리기 시작했다. 나는 다리에 힘이 쭉 빠지며 현기증이 들었다. 나는 가톨릭센터 앞에서 먹은 것을 토했다.
군인들은 도망하는 젊은이들이 민가에 숨어들면 쳐들어가서 끌어내고 모두 잡아가며 구타하고 칼로 찔렀다. 공수부대원들은 대학생 한사람을 군용트럭 뒤에 매달아 시내를 끌고 다니며 비참하게 숨지게 했다. 시민들은 그것도 모르고 군용트럭에 돌을 던지다가 차뒤에 끌려 늘어져 있는 대학생을 발견했으나 그 학생은 이미 숨진 뒤였다. 공수부대소속 군인들의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나는 상무동 근처에서 얼굴이 으깨진채 손수건으로 피를 닦으며 울고 서 있는 시내 중앙여고 학생을 보았다. 그 여학생은 반쯤 넋을 잃고 있었다. 내가 자초지종을 물으니 그 여학생은 10여분경에 다소 진정한 뒤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학교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데모를 하려 했으나 군인들이 교문을 지켰어요. 우리들이 수업을 마치고 정문으로 나오려는데 군인들이 총에 꽃은 칼로 우리들을 마구 찔러 교문 앞에서 친구 20여명이 피를 흘리며 죽었습니다. 우리 교감 선생님도 군인들의 칼에 찔려 죽었습니다…아! 떨려요 흐흑” 이날 그러니까 5월 19일 오후 시외버스 공용터미날에서 계엄군이 학생 2명을 죽도록 두들겨 팼다. 운전기사 1명이 부상 학생들을 차에 실으러 하자 군인들은 운전사를 칼로 찔러 죽이고 차까지 불태웠다. 광주의 전시가지는 공포의 도가니로 변했다. 시민들의 적개심도 머리끝까지 타올랐다. 이날 오후 시민들은 가톨릭센타에 있는 기독교 방송국을 점령하고 있던 계엄군에게 진격해 무장을 해제시키고 공수대 소속 군인 1명을 붙잡아 5층에서 길바닥에 내던져 죽였다. 군인들은 가톨릭 센터를 쳐들어와 사무실에 세들어 근무하던 사람들까지 200여명을 모조리 붙잡아 갔다. 이날 가톨릭센터 건물에는 시체6구가 널려져 있었다.
(2) 시민·학생의 방어와 무장
시민들은 공수대원들이 무차별 만행에 치를 떨며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좀 더 적극적인 저항을 하기 시작했다. 20일 오후 7시경 시내버스와 택시 운전사들이 “전 시민이 죽어가는데 우리도 나서자”하고 공설운동장에 모여 궐기한 후 도청 방향으로 일제히 차를 몰았다. 모든 차는 헤트라이트를 켠 체 경적을 울렸다. 계엄군들은 도청으로 접근하는 차들을 향해 발포 했으나 성난 차량의 행렬은 멈출줄 몰랐다. 이 순간 군인들의 발포로 죽은 운전사와 거리에 물려든 시민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이와 같은 공방전이 계속되다가 21일 자정이 조금 지나 시민들은 도청을 접수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어디론가 철수했다. 시민들은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21일부터 예비군 무기고 등을 습격하여 총기류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무장의 동기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군인들은 헬리곱터에서 최루탄을 시내에 뿌려 시내 중심가는 갓난아기까지 숨을 쉬기가 어려울 정도로 시민들은 괴로움을 겪어야만 했다. 나는 21일 오후 5시 상무동에서 국민학생과 노인들까지 나와 바리케이트를 치는 것을 보았다. 상무대는 일반군인들이 많이 주둔하고 있는 곳이다. 시민들은 상무대를 향해 “대한 국군 만세”를 소리높이 외쳤다. 나는 군인 한명이 불러서 근처에 가 보았다. 그는 양평에서 왔다고 말하며 “광주시민이 왜 이러느냐?”고 의아해 했다. “우리가 듣기는 간첩들이 광주에 와서 난동을 부린다고 해서 왔다”고 그는 말했다. 나는 “그렇지 않다. 시민들의 저렇게 극렬하게 싸우는 것은 공수부대원들이 시민을 너무나 무지막지하게 찔려죽이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 군인은 무전으로 무엇인가를 보고하고 있었다. 부근에 있는 광주시민들은 내말을 듣고 안전지대로 피신해 있었다. 군인 한 사람은 이북 간첩들이 광주의 방송국을 점령해서 이북 방송을 내보내고 있다’고 엉뚱한 소리를 했다.
분노한 시민들은 광주문화방송국, 케이비에스 광주방송국, 노동청, 세무서 등을 불태웠다. 방송국 두개를 불태운 것은 광주 사태를 엉터리로 보도한 원흉들이었기 때문이다. 노동청과 세무사는 시민들의 원성을 자아내던 표본이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시민들은 갈가에 있던 차량들을 불태웠으나 이러한 행위는 계엄군이 공격해 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시민들은 아무리 분노가 극에 달했어도 각 은행과 학교, 도청, 교회 등을 방화하지 않은 것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 해독불능 …
그들의 말을 빌자면 군인들은 머리가 깨지고 온몸이 칼에 찔려 중태에 빠진 젊은이들까지 시체더미 속에 내던져 얼마나 죽어가고 있는지 모른다”고 하소연 했다. 5월 25일 도청앞에서 시민궐기 대회가 열렸다. 이날은 온종일 비가 세차게 내렸다. 도청 앞에 모인 수십만 시민들은 희생된 시민들을 위해 묵념했다. 한 학생이 “지금 내리는 이 비는 무참히 죽어간 우리 젊은이들의 눈물이다. 우리는 이 비를 모두 맞아야 한다”고 외쳤다. 억수같이 퍼붓는 빗줄기에도 우산을 펴든 시민은 거의 없었다. 내가 직접 본 시체의 모습을 증언하겠다. 내가 본 것은 극히 한정된 것임을 미리 말해 둔다. 도청 구내에 있는 1층 건물안에 널이 20여개 놓여 있었다. 시체들은 얼굴만 내보여진 상태로 가족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체의 얼굴은 대체로 세하야한 색갈이었다. 그러나 이 가운데 몇구는 퉁퉁 부어오른 채로 흑인처럼 새까맣게 그슬려 있었다. 군인들이 화염방사기를 썼다는 소문도 나돌고 있다. 26일 오후 5시경 도청 앞에서 일어난 일이다. 고등학교 10여명이 계엄군에 의해 숨진 동료학생의 시체를 운구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도청에서부터 분향소가 마련된 상무관까지 50여미터 가량을 행진했다. 관 위에는 대형 태극기가 펼쳐져 있었다. 고등학생들은 동료학생들의 시체를 들고가며 울먹인 목소리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나라 찾는데 통일, 이겨레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오라, 통일이여 오라”는 노래를 불렀다. 연도에 늘어선 시민들도 나도 모두 이 순간을 지켜보며 엉엉 울었다.
광주 사태의 전망
(1) 광주사태는 계엄을 철폐하고 조속한 민주헌정을 수립하려는 전 시민적 항쟁이었다. 이 사건은 계엄군이 이 광주시를 27일 새벽에 점령하므로서 일단 끝난 것처럼 보일른지 모른다. 그러나 광주사태는 완전히 진압된 것도 아니며, 완전한 종결된 것도 아니라고 본다. 학생, 시민들이 소리높이 외쳤던 구호들이 아직 하나도 실천되지 않고 있다. 정확한 사망자 수와 부상자 수 마저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무참히 학살당한 광주시민의 골수에 사무친 원한과 상처는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광주사태의 핵심적인 요구사항을 실현하는 것만이 전 국민적 과제라고 생각한다.
(2) 광주사태는 결코 지역감정에서 일어난 편협한 운동이 아니다. 광주사태는 국민의 의지를 집약해서 용기있게 표현한 거룩한 항쟁이었다. 광주시민의 용기는 인권운동 사상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인 시민의식의 발로를 지역감정에서 기인한 불만의 폭발이라고 몰아세우는 당국의 태도는 민족분열의 죄악을 스스로 자행하는 용서 받을 수 없는 행위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광주사태는 민주주의를 갈구하는 우리 민족의 기백과 용기를 전 세계에 알린 역사적 사건의 하나라고 본다.
(3)광주사태에 공수특전단이 저지른 만행은 유언비어라고 하면서 덮어둘 성질의 것이 아니다. 공수부대의 만행은 적군에게 하는 것 이상으로 치를 떨게 한 것으로서 우리 국민이 영원히 기억해야 할 사항이라고 본다. 이러한 잘못과 실수를 없는 것으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정적인 잘못은 솔직히 인정해야만 화해의 토대가 마련된다고 볼 수 있다. 누구든 과오와 실수를 덮어두고 사실을 반대로 전파하는데만 신경을 쓴다면 국민과 군간에 형성된 이질감은 좀처럼 해소될 길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광주시민에 대해 야수적인 억압책을 뜬 군 지휘관은 마땅히 엄중문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광주시민이 바램이다.
(4) 광주시민은 물질적인 보상 보다는 정신적인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광주시민돕기 운동이 물질적 도움에 치중하면 형식에 그칠 뿐이라고 생각된다. 광주시민이 구호금품이나 받으려고 이 엄청난 운동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광주사태의 정신사적 의의 즉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라는 목표와 이의 실현을 위한 부단한 노력임을 국민 모두가 잊지 말아야 하겠다.
1980년 5월 30일
목격자 이로사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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