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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헌혈하고 간 여고생 시체로 다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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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5·18 뒤안길에 묻힌 사연

“헌혈하고 간 여고생 시체로 다시 왔다”

-의사가 겪은 5·18 참상

계엄군이 쏜 총알은 강철탄환이 아닌 납탄이어서 뼈에 닿으면 납덩이가 산산조각이 나면서 10∼15㎝ 너비의 조직을 파괴해 수술 후에도 회복이 불가능했다.

김성봉<김성봉외과의원 원장>

1980년의 오월이 지난 지 벌써 15년이 넘었으나 당시를 회상해 보면, 끔찍하다는 생각보다는 가슴 벅찬 그 어떤 것이 전신을 팽창시켜 부풀리면서 몸서리쳐지는 것을 느낀다. 정권찬탈자들과 그들의 하수인들에 의한 무자비한 학살-이 거대한 폭력 앞에서 비굴한 굴종을 하느니 차라리 죽을지언정 분연히 들고 일어났던 광주시민들의 불굴의 용기와 정의감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국가 공권력에 의한 치안이 완전히 공백이었던 7일간 좀도둑조차 없었고 만나는 사람마다 피붙이, 친형제같은 정겨움으로 가벼운 흥분이 온 도시를 덮고 있던‘광주공화국’의 높은 시민의식과 형제애, 진압 당한 후에도 굴하지 않고 15년을 투쟁해온 끈질김은 몇몇 사상자들의 영웅적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온 광주시민들의 마음과 행동이 하나로 뭉쳐서 맺은 열매가 아니겠는가.

이제 가벼운 흥분을 가라 앉히고 내가 당시 근무하던 광주 기독병원 응급실과 수술실을 떠올려 본다. 병원응급실은 18일 늦은 오후부터 공수부대 군인들에게 몽둥이, 총개머리판, 군화발 등으로 얻어맞아 중상을 입은 시민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기독 병원은 시내 중심가에서 2㎞ 남짓 떨어져 있기 때문에 나는 학살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진 못했지만 환자들로부터 공수부대의 잔악한 만행을 낱낱이 들었다. 공수부대는 젊은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개 패듯이 두들겨 패고 시위대가 급한 김에 가까운 집안으로 도망가면 그 집안에까지 들어가서 찾아내 두들겨 패며 끌고 갔다고 한다. 이 광경을 옆에서 보던 시민들이 항의하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시위대와 마찬가지로 두들겨 패는데 어떤 노인도 항의하다 얻어맞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했다.

또 어떤 젊은이들은 끈질기게 따라 붙은 진압군 두명에 쫓겨 급한 김에 적십자 병원 앞 2㎞ 깊이의 천변으로 뛰어내렸으나 군인들이 그곳까지 따라 붙자 이를 보다 못한 시민들이 우르르 뛰어내려가 두 군인들에게 몰매를 가했는데 이로 인해 그 일대 모든 집들을 공수부대원들이 뒤지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중상 입은 시민들 응급실마다 북새통

그날 밤이 되자 시내는 공포스런 분위기 속에 여기저기 항의하는 시위대로 인해 소란했으나 젊은이들은 가족들이 집에서 잡아 두었기 때문에 응급실에 오는 환자는 적었다. 다음날인 5월 19일에는 공수부대가 길에서 젊은 사람만 보면 무조건 잡아가는 것은 물론 집에까지 들어와 잡아간다고 하여 주변에 살던 어떤 집에서는 아들들을 미국선교사 집에 피신시키는 것도 보았다. 대학생이었던 내 외사촌 동생은 산수동에서 일단 순천으로 탈출하여 벌교, 강진을 거쳐 목포 본가에 간신히 돌아갈 수 있었다. 공수부대가 이날 젊은 사람을 태운 택시를 세워 이유없이 그들을 끌어내려 두들겨 패고 잡아가려 하자 택시기사들이 항의, 심하게 얻어 맞고 다쳤다. 광주 기독병원 응급실에서도 몇사람의 운전 기사가 진압봉에 의한 타박상과 늑골골절 등으로 치료받기도 했다.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상황에서 광주시민들은 더 거세게 항의시위를 벌였으며 군인들은 장갑차까지 동원해 진압하려 했다. 그러나 성난 군중들은 조금도 두려워 하지 않고 시내 전역으로 시위를 확산했다.

이런 상황에서 장갑차에 타고 있던 장교가 위기를 느낀 나머지 고등학생을 권총으로 쏴 총상을 입힌 일이 처음 발생했다고 한다. 밤이 되자 항의 시위는 광주 전역에 걸쳐 더욱 격렬하게 일어났다. 지금까지 듣던 최루탄 쏘는 총성이 아닌 진짜 총소리가 들렸는데 새벽이 되어서야 시내는 조용해졌다. 그래도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양림동에 있는 기독병원 응급실까지는 환자가 오지 않았다. 간밤에 온 시내가 시끄러웠지만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던 첫날과는 달리 시민들이 힘을 합쳐 대항했기 때문에 많은 환자가 생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5월20일, 시내는 시내버스와 택시 운전기사들의 조직적인 차량시위 등 시민들의 뭉친 힘이 진압군인 들에게 위협을 줄 정도로 커졌으며 금남로 주변은 온통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이젠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며 온 광주시민들이 똘똘 뭉쳐 거대한 군중의 힘으로 대항해 나오니까 진압하러 나온 군인들이 힘의 부족함을 느끼고 M-16 소총 실탄을 지급받은 것 같다.

밤은 진압군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그날 밤은 시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해서 시내에 있던 주요공공건물이 불태워졌으며 시위하는 함성과 M-16 총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내가 M-16 총소리였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그날밤 학동 남광주역 부근에서 시위하던 20대의 남자가 총상을 입고 기독병원 응급실을 통해 외과로 입원했는데 그의 좌측 쇄골 직상부에 조그만 총상 입구가 있었으며 X선 촬영 결과 윗가슴 뒤편에 산탄총알같은 것들이 퍼져서 박혀 있었다.

납 파편 박힌 부위 수술로도 회복 안돼

그 환자는 결국 수술을 받지 못하고 수일후에 식도파열 및 종격동염으로 사망했는데, 다음날 금남로 집단 발포때 총상입은 환자들도 X선 소견이 그와 비슷한 산탄총 맞은 것 같은 모양을 했다. 그런데 환자들을 수술해서 확인해 보니 얇은 총알 껍질 속에 강철탄환 대신 납탄이 들어있어 몸속의 단단한 부위에 닿으면 종이같이 얇은 구리합금 피복은 찢어지고 그 안에 있던 납덩이가 산산조각이 나면서 직경10∼15㎝ 정도 너비의 조직을 파괴하면서 박힌 X선 소견을 보였다. 이렇게 넓은 부분을 닥치는 대로 휘젓고, 찢고, 자른 후 박힌 이 납총알 파편들은 척추나 기타 주요 신경이 있는 부위를 수술로도 회복시킬 수 없는 손상을 줘서 목숨을 건지더라도 불구의 몸을 만들었다. 여러 총상 환자들에게서 뽑은 일그러지고 쪼개진 납탄환들은 광주기독병원 외과의사들이 사진 촬영해뒀는데‘오월 그날이 오면’(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편, 1987) 43쪽에 컬러 사진으로 게재되어 있다.

역사적인 5월 21일 아침이 밝았으나 오전 동안은 폭풍전야처럼 고요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휴게실에서 차를 한잔 마시고 있는데 갑자가 시내쪽에서 콩볶듯 쏘아대는 총소리가 연속해서 들렸다. 무슨 큰 일이 벌어졌구나 싶어 응급실로 나왔더니 잠시 후에 총상환자들이 차에 실려 한꺼번에 몰려 들어오는 게 아닌가. 응급실이 좁아 병원 환자 대기실을 치운 후 바닥에 모포를 깔고 순식간에 수십명을 눕혀놓고 먼저 응급처치와 부상 정도를 확인하였다. 이날 도착한 환자들의 총 맞은 부위를 시간대 별로 구분해 보면 의미있는 추론을 해볼 수 있다. 즉 처음 도착한 환자들은 총상이 허벅지 아래 하체 부분이 대부분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위로 올라와 복부와 흉부 등 상체에 총상을 입었다. 이것은 군인들이 정조준 해서 사격했으며 처음에는 교육받은 대로 하체를 조준하여 쏘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체를 겨냥하여 짐승 사냥하듯이 마구 쏘아댔던 것이 아닌가 한다.

나는 응급실장이면서 외과 과장이었기 때문에 부상환자들을 전문으로 확인하고 응급 순위를 매겨 그 순번대로 수술실로 보내는 일을 하였다. 당시 나는 팔, 다리에 총상을 입어서 우선 순위가 뒤로 밀려난 환자들이 거칠게 항의하는 바람에 이에 대해 설명해 주고 이해시키는 데도 진땀을 뺐다. 기독병원 수술실에는 당시에 다섯 개의 방이 있었는데 그 방 전부를 열었고 수술에는 외과·정형외과 의사들이 모두 참여, 3일 밤낮을 계속해 50명이 넘는 총상환자가 한명도 죽지 않고 모두 살아나는 기적적인 결과를 얻었다. 또한 총상환자가 넘치자 전에 기독병원에 근무하다 퇴직한 직원들도 자발적으로 찾아와 각 분야에 배속되어 구호 활동에 참여하였다. 특히 군에서 휴가 왔다 이 소식을 들은 기독병원 출신 외과 군의관이 자원하여 밤낮 없이 수술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내 가슴을 뭉클하게 했던 일은 헌혈 하겠다고 대기하는 시민들이 수백명씩이나 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이제 피가 더 필요 없다고 되돌려 보내려 했는데도 대기자들이 내 피도 뽑아주고 싶다고 애원하던 모습이다. 그러나 해맑은 미소를 띠고 찾아와 조금 전에 헌혈하고 갔던 여고생이, 얼굴이 거의 없어져버린 피투성이 시체가 되어 다시 응급실로 실려 왔을 때는 보는 이 모두가 경악했으며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은 이내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변했다.

시민군 카빈 강철탄환 M-16 납탄과 구분

이 여고생은 헌혈하고 나서 수송차로 소태동 부근을 지나다가 도청에서 퇴각하면서 미친 듯이 휘갈겨 쏘아대는 공수부대 장갑차의 기관포에 머리를 맞고 참담한 모습으로 산화했다 한다. 금남로에서 대량으로 발생한 총상환자들에 대한 광주시민들의 구조활동은 너무나 헌신적이며 능동적인 것이었다. 총에 맞고 쓰러진 시민들을 구조하러 들어가다가 자신이 총에 맞은 시민도 많았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무릎쓰고 총에 맞은 시민들을 구출한 용기있는 시민들과 신속히 차량으로 후송 하던 시민들. 모두 위대한‘광주항쟁’의 주역들이었다.

광주시민군이 폭압 군인들을 모두 몰아내고 스스로 치안을 맡았던 6일간은 시내가 평온했다. 시외곽의 산발적 전투에서 부상 당하거나 사망한 시민들도 있었지만 병원 응급실은 조용했다. 그때 오랜만에 망중한을 즐기며 금당산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난데 없이 엄청나게 큰 연속 폭발음과 함께 검은 연기가 구름버섯처럼 금당산 너머로 피어 올랐다. 또 한번 바빠지겠구나 싶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알고 보니 군인들이 자기들끼리 시위대로 오인, 대전차포를 쏘아대며 난리가 났다고 한다. 5월27일 새벽에 진압군의 작전이 시작되어 광주는 콩 볶는 듯한 총소리와 트럭, 장갑차, 탱크들의 쇠바퀴가 아스팔트 도로위를 굴러가는 굉음으로 뒤범벅이 되었는데 이 와중에도 애간장을 끊을 듯한 처절한 울부짖음으로 진압군에 대항하자고 확성기를 이용, 외치고 다니는 어떤 여인의 목소리는 밤잠 못이루며 뜬 눈으로 지새운 나를 한없이 서글프게 만들었다.

진압할 때 엄청나게 많은 사상자가 났다지만 이들은 군부대로 압송되고 광주 기독병원 응급실에는 단 한 사람의 복부총상환자가 도착했다. 이 사람은 경찰이었으며 복귀명령으로 아침 일찍 걸어 나오다 계림동 파출소 부근에서 시민군이 쏜 총에 맞았다. 즉시 개복수술을 하여 오랜만에‘총알 같은 총알’을 찾아냈다. 다름 아닌 카빈 총탄이었는데 강철탄환이 두꺼운 구리황금 껍질에 싸여 있어 단단한 조직에 박혀도 일그러지지 않았다. 군인들이 진압한 후에 발표하기를 시민들끼리 서로 총을 쏴서 많이 다쳤다고 했다. 그러나 시민군의 탄환은 바로 이 카빈의 강철탄환으로 쉽게 구분되는데 시민들 청상에서 뽑은 총알은 모두 맞으면 쉽게 터져 산탄처럼 되는 M-16 납탄이었으며 카빈의 강철탄은 한 건도 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허위라 할 수 있다. 즉 시민들에 대한 사격은 모두 군인들이 쏜 총알이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벌써 15년이 지났지만 우리가 치료해 주었던 환자들 중에는 깨끗이 나아서 정상적 생활을 하고 있는 분들도 많지만 중추신경 등의 중요한 부분의 고칠 수 없는 손상으로 불구가 되어 아직도 고생하고 있는 분들도 적지않다. 당시 환자정리와 동시에 수술을 맡았던 외과의사로서 인간능력의 한계를 느끼며 안타까운 마음 그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