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특집/5·18 뒤안길에 묻힌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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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5·18 뒤안길에 묻힌 사연
광주 밖의‘광주 동지들’명예회복 절실
-타지역의 5월 피해자들
80년 계엄포고령 위반자와 타지에서 광주진상을 알리다 구속처벌 받은 5·18피해자들은 5·18특별법 제정을 계기로 모임을 만들고 피해 배상과 명예회복을 요구하고 있다.
박광우<광주일보 월간국기자>
“뭐 피해 받은 것 있어요?”지난해 12월초‘80년 민주화운동 관련 계엄포고령 피해자 협의회’대표인 이우재씨(당시 서울대 복학생, 반유신운동기념사업회장)와 운영위원인 소준섭씨(당시 외국어대 복학생, 새사회연대 기획실장), 김준묵씨(당시 출판사 경영, 미래사 대표)등이 국회를 방문해 의원들과 면담하던 중 광주가 지역구인 모의원이 한 말이다. 이씨 등은 당시 국회에서 한창 논의중이던 5·18 특별법 제정과 함께‘12·12와 5·17내란에 항거한 민주화운동 관련 피해자 명예회복과 피해배상 특별법’(가칭) 입법을 요구하는 로비를 하던 중이었다. 이들의 주장은 80년 전국 방방곡곡에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 광주항쟁을 알리다가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명예회복과 원상복구였다. 하지만 그 의원의 말처럼 그동안 80년의 피해자는 광주시민으로만 인식되고 있었다.
80년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은 정권장악을 위해 광주를‘제물’로 선택했지만 그들은 광주만을 유린한 것이 아니었다. 광주라는 이름에 묻힌 수많은 타지역 희생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개 5·17 계엄확대에 항거하다 붙잡히거나 5·18 이후 광주항쟁을 알리다가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수배, 구속 및 투옥, 제적, 강제징집, 해직되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전국적으로 1천여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알려진 5·18 피해자들이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 관련자 24명, 광주시민 연행자 2천5백22명과 이중에 유죄판결을 받은 3백89명 등임을 감안할 때 타지역의 피해자들도 무시하지 못할 숫자다.
5·17최초 희생자 전북대 이세종군
그해 전국 대부분의 대학은 3월 개강을 기다렸다는 듯 총학생회를 부활시켰고 학원민주화투쟁을 시작으로 5월부터는‘계엄철폐’‘전두환 퇴진’등 정치투쟁으로 전환해 갔다. 투쟁양상도 4월30일을 기점으로 5월2일부터는 가두시위가 시작된다. 전국 최초의 5·18희생자가 나왔던 전북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5월2일부터 가두로 진출할 학생들은 14일에는 도청앞 연좌시위, 16일에는 전주 오거리에서 시민들과 함께 시위를 벌인다. 이들은 16일 최규하 대통령의 귀국설 이래 어느 정도 휴지기에 들어가지만 학내에서 철야농성을 계속한다. 5월17일 밤에도 전북대 제1학생회관 2층 교수회의실(지금의 대학방송국)에서 40여명의 학생들이 철야농성을 하고 있었다. 드디어 18일 새벽0시를 기해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7공수여단 계엄군이 교내로 진입, 학생회관을 포위하고 농성장을 진압해 들어갔다. 총칼로 무장한 계엄군은 농성학생을 진압해 들어갔다. 총칼로 무장한 계엄군은 농성학생을 무차별 구타하며 연행해 갔고 이세종군(당시 임학과 2학년)은 옥상으로 피신했다. 그날밤 농성중이던 학생 32명은 연행됐고 새벽1시30분경 이군은 학생회관 옆 땅바닥에 피투성이로 발견돼 전북대 병원으로 옮겼으나 새벽 6시30분 끝내 사망했다.
당시 계엄군은 이군의 사망 원인을‘진압을 피해 옥상으로 달아나다 떨어진 단순 추락사’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목격자들에 의하면 발견 당시 이군은 두개골과 간장이 심하게 파열됐고 옷이 칼에 찢겨 있었으며 온몸이 피멍이 든 상태였다고 한다. 특히 당시 이군의 사체를 부검했던 전북대병원 이동근 박사는 지난 93년 6월 가족들의 신청에 따라 발급한“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신청용 의견서’에서‘이군의 두개골은 광범위한 복합골절 양상을 보였고 안면부, 흉부, 복부, 사지 등에 많은 타박상이 존재했다. 이들 손상 가운데 상당부분은 추락이전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생각된다”고 기술, 계엄군의 발표내용과 상당부분 차이가 났다.
이처럼 이군은 심한 구타에 의해 살해된 후 옥상에서 던져져 추락사를 가장한 타살의 가능성이 높지만 16년이 지난 지금도 의문의 죽음으로 남아 있다. 이군 사건은 사망시간으로 볼 때 5월18일 오전 광주에서 계엄군에 의해 사상자가 발생하기 이전이어서 최초의 5월항쟁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 93년 광주보상법에 의한 보상도 안됐고 역사적 평가는 물론, 진상규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전두환의 광주 살육작전’배포한 이상호씨
전북 지역의 또다른 피해자는 이상호씨(45·서울덕산중 교사)와 한상렬 목사 등이다. 이들은 5월21일경 광주에서 탈출한 김현장씨가 작성한‘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이라는 유인물을 배포하다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당국에 체포돼 옥살이를 해야 했다. 특히 이상호씨는 당시 전주 완산여상 교사 신분으로 학생들과 함께 이 일을 했다가 해직됐다. 그후 이씨는 83년 광주·전남지역 5·18관련 교사들이 모두 복직발령을 받았는데도 계속 해직교사로 남아있다 88년 일시복직됐으나 전북도 교육감의 생활근거지(당시 부인이 서울 난우중 교사) 발령 약속 불이행에 따른 출근 거부와 고교생에 대한 시국강연 등으로 89년 6월 다시 파면됐다. 그는 지난해 6월에야 서울 덕산중학교로 복직됐지만, 전남대 학생처 직원으로 해직됐다.
김영삼정부 출범 들어 원직복직했던 서명원씨가 해직기간 동안의 임금을 모두 보상받은 것에 비해 이씨는 아직까지 그렇지 못한 상태다. 또한‘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1만매를 복사해 신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한편 옥외 마이크로 강론을 통해 그 진상을 알렸던 박창신 신부(당시 전북 여산 성당 주임신부, 현재 남원성당 주임신부)도 5·18의 피해자다(월간‘예향’88년 12월호, 박창신 신부가 쓴 수기-‘나는 이렇게 테레를 당했다’). 박 신부는 이 일로 광주항쟁의 확산을 우려한 당국에 연행되지는 않았지만 같은해 6월25일 밤 10시30분경‘군인으로 보이는’젊은이들에 의해 칼과 몽둥이로 테러를 당했다. 박 신부는 그때 수개월동안 입원 치료를 받았고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오른쪽 다리를 절룩거리는 ‘장애자’가 되었다.
당시 이 사건은 사제와 신도들이 진상규명 요구에 따라 당국이 마지 못해 수사에 착수했고 목격자들의 한결같은 증언에도 불구 미제사건으로 일단락되고 말았다. 특히 지난 88년 여소야대 정국에서 국정감사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당시 전북경찰청장은“공소시효가 87년 6월26일로 만료돼 수사기록이 모두 폐기처분됐다”고 보고해 자칫 박 신부가 살해됐을지도 모를 당시의 사건은 영원히 미궁으로 남게됐다.
‘서울의 봄’.
당시 어느 때보다도 민주화의 열망과 열기가 드높았던 서울에서는 왜 신군부의 5·17 계엄확대조치에 대해 강력한 저항이 없었을까? 소준섭씨는 “5월15일 서울역 회군으로 투쟁의 맥이 끊겼다”고 진단했다. 하지만“공포에 질렸다”는 이우재씨의 분석이 더 설득력이 있다. 사실 서울의 대학들도 만약 휴교령이 내려지면 지역별로 서울역, 청량리, 광화문, 신촌 등에 각각 모여 신군부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기로 약속돼 있었다. 하지만 신군부의 치밀한 계획 아래 5·17조치와 함께 민주인사와 학생운동 지도부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진행됐다. 이때 보안사는 물론, 서울시내 모든 경찰서가 예비검속으로 연행된 인사들로 발붙일틈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날 검거되지 않은 사람들은 대부분 잠적했고 일부가 5·17에 항거하는 시위를 벌이거나 20일이후에는 광주의 진상을 알리는 유인물을 배포하기도 했지만 서울시내 요소요소에 진주한 계엄군의 서슬퍼런 총칼앞에 무력하기만 했다. 이우재씨와 윤여연씨(당시 숭실대 총학생회장) 등의 증언에 따르면 18일과 21일 영등포에서, 21일에는 단성사앞 등지에서 2백∼3백명 규모의 시위가 벌어지려는 순간 강제해산 되고 말았다. 그후 서울시내에서는 시위가 벌어졌다는 증언이 없다. 5·17 조치로 연행된 대부분의 인사들은 구속영장도 없이 보안사나 경찰서에서 구타와 고문을 받다 60일, 심지어 80일만에 군법회의에 회부되기도 했다. 이들중 고학년이나 군대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은 대부분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들은 7, 8월경 공소취하로 석방돼 곧바로 강제징집 당하는 신세가 됐다. 당시 고려대생이던 이명식씨(39·통일시대 국민회의 정책위원)는“8월초에 논산훈련소로 강집당했는데 그곳에서만도 나와 동시에 들어간 사람들이 50여명에 이르렀다”고 말할 정도다.
5월이후 8월까지 간간이 광주항쟁의 진상을 알리는 사람도 있었으나 쥐도 새도 모르게 연행, 구속됐고 2학기 개학이 되어서야 학생운동세력이 교내에서 유인물을 살포하고 수백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80년 10월17일 고려대 시위에서는 12명이 구속되고 이튿날 휴업했으며 11월에는 연세대가 휴교되기도 하였다. 서울대는 12월 9명이 구속된 교내시위를 계기로 80명 정도의 운동권 학생이 장기간 감금상태에서 수사받고 수명이 구속되고 수십명이 강제입영당하는, 소위‘무림’사건이 발생한다. 이 무림사건은 지금 영화감독으로 유명한 여균동씨(당시 철학과 2년)도 관계된 사건이다.
지역은 달라도 교도소 ‘한솥밥 동지’
80년 계엄포고령 위반자들은 지역은 다르지만 한 곳에서 만났다. 바로 교도소다. 각 지역에서 군법회의를 거친 인사들은 8월말경 광주권은 성동구치소에, 서울권은 서울구치소에 그외 지역은 영등포구치소에 모두 모이게 되었다. 또한 이곳에서 형을 선고 받은 사람들은 다시 안양교도소와 청주교도소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때문에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실형을 살았던 사람들은 대개 지역에 관계없이 서로를 아는 경우가 많다. 대전충청, 대구경북, 강원, 부산 지역 계엄포고령 위반자들이 서로를 알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은‘교도소 한솥밥 인연’때문이었다.
대전 충청지역에도 계엄포고령 위반자들이 40여명에 달한다. 김윤오 목사(당시 목원대 총학생회장,서머나감리교회), 선병규씨(충남대, 새정치국민회의 지구당위원장), 김재수씨(충북대, 노동자의 집 대표), 이상헌씨(공주대, 상업)등이 그들이다. 대전지역의 경우 대학생들이 5월3일 대전역 가두시위를 시작으로 5월16일까지‘계엄철폐’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계속하다 5·17 조치와 함께 일제 검거된다. 청주도 대전과 비슷하다. 다만 5·18의 진상을 알리다고초를 치른 경우가 김창규 목사(현재 청주 빛고을교회)다. 김 목사는 당시 전남대 졸업생인 정병석이란 사람으로부터 광주항쟁 사진과<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우리나라 십자가여!>라는 시를 받아 이를 청주시내와 대학가 일원에 뿌렸다는 이유로 당국에 체포돼 청주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대구지역도 마찬가지다. 당시 경북대와 계명대, 영남대 학생들이 중심이 돼 대구시내에서 연일 가두시위를 벌였으며 그 결과 5·17직후 예비검속에 걸려 대구50사단으로 연행된 사람만도 2백명에 달했다고 한다.
또한 5·18이후 광주의 진상을 알리는 유인물을 산발적으로 뿌리다 체포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최근 김진태씨(계명대, 민주당 지구당위원장)를 중심으로 피해자협의회를 결성할 준비를 하고 있다. 강원도 춘천에도 80년 계엄포고령 피해자들이 숫자를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많다. 춘천은 4월20일 전국 최초로 가두시위가 벌어졌을 정도로 민주화 열기가 뜨거웠던 곳이다. 때문에 강원대에서만도 5월17일 학교로 진입한 계엄군에 의해 1백50여명이 연행돼 그중 구속됐던 사람들만 17명에 달한다. 나머지는 강제징집 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이때 잡히지 않은 강원대생 안재성(축산학과 2년, 소설가), 이동섭(행정학과 3년), 박진숙씨(미술학과 3년)등은 서울과 춘천에서 광주의 진상을 알리는 유인물을 뿌리다 뒤늦게 구속돼 수감생활을 했다. 최윤씨(강원대, 개혁신당지구당 위원장) 등 당시 피해자들은 지난해 12월 14일 협의회를 구성하고 고문피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요구하기도 했다.
부산에도 5·18희생자 있다
“우리는 그동안 지역 특성상 5·18 자체를 이야기 하기가 힘들었심니더. 부산에서는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광주전남에서도 알아주지 않심니더. 하지만 광주문제를 지역문제로만 국한되지 않게 하려면 타지역의 희생자들을 생각해야 될낍니더.”‘부산 5·18동지회’회장 신종권씨(43·부산 내성중 교사)의 말이다. 동지회는 부산지역에서 5·17을 전후해 보안사로 연행돼 갖은 고문과 구타후 투옥되거나 강제징집 당했던 50여명의 인사들의 모임이다. 그해 부산지역은 79년 부마항쟁의 여파 등으로 5·17직전 까지도 타지역과 달리 학내시위 외에 가두시위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 지역도 5·17 자정을 전후로 수많은 학생들과 민주인사들이 계엄당국에 끌려 갔다. 이들은 크게 학생운동그룹과 민주헌정동지회 등 김대중 그룹으로 나뉘었는데 한결같이 김대중씨와의 관계를 집중추궁 당했다. 당시 부산대 재학생 김종세(4년), 사공술(1년), 안승운씨(4년) 등과 민헌회의 김갑주, 송현종씨와 박행운씨(사진작가) 등이 그들이다.
부산에서도 5·18이후 진상을 알리다가 계엄당국에 연행된 사람들이 있다. 당시 영남상고 교사였던 신종권씨 등이 대표적인 경우다. 신씨는 당시 동아대 학생이던 이광호씨 등과 함께 5월25일 부산 남포동 부영극장 앞에서 시위를 벌이려다 합수부 지하실에서 모두 만나게 되었고 당시 부산대 학생이던 김영(필명 김하기)과 노재열씨 등도‘선전포고에 즈음하여’라는 유인물을 부산 광복동과 남포동에 뿌리다 체포돼 강제징집 당했다. 신종권씨는 그후 학교에서 해직돼 안해 본 장사가 없을 정도로 생활전선에서 악전고투하다 지난해 6월에야 복직됐다. 또한 감리교 임기윤 목사도 5월 이후 5·18의 진상을 알리는 활동을 하다 그해 7월에 보안대에 연행돼 조사를 받던 중 사망해 많은 이들을 애석하게 했다. 부인 최광병씨는 최근까지 임 목사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소송 등을 진행하고 있다.
이외에도 당시 경희대생이던 신경준씨(39·경주 신문 편집국장)는 5월 항쟁기간 중 우연히 광주에 왔다가 계엄군의 만행을 보고 5월 항쟁기간 중 우연히 광주에 왔다가 계엄군의 만행을 보고 5월 이후 타지에서 광주 진상을 알리다 구속됐다. 또한 당시 인하공전생이던 이교정씨(37·일산출판단지사업조합)는 5월중순부터 7월까지 3차례에 걸쳐 인천시내에 광주진상을 알리는 유인물배포와 대자보를 부착했다가 당국에 구속수감돼 수형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알려진 경우 외에도 5·18과 관련된 피해자는 전국 도처에 산재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광주’가 광주만의 것일 수 없는 이유중의 하나도 이들이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광주문제를 지역문제로만 국한하지 않기 위해서도 이들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오월항쟁동지회 윤광장 회장의“5·18특별법이 제정돼 미흡하지만 광주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광주문제를 5월18일부터 27일사이에 발생한 일로 국한해서는 안된다. 전국에서 5·18진상규명을 요구하다 투옥되고 처벌받은 분들도 모두 명예회복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 그것이다. 피해자협의회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이들 문제의 해결은 물론, 5·18문제 해결을 통한 진정한 역사 바로세우기의 방향을 제시하는 주장이어서 우리 모두 귀담아 들을 만하다.“최근 전두환, 노태우 등 군사반란과 내란의 주모자들이 처벌받게 되었지만 이에 항거해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희생됐던 사람들은 아직도 전과자로 남아 있다. 이 문제는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문제다. 불법적인 내란에 항거했던 사람들이 정당하게 대접 받지 못한다면 앞으로 누가 온몸을 바쳐 민주주의와 헌법 수호를 위해 나서겠는가? 독립운동가들이 해방된 조국에서도 친일파에 눌려 살던 우리 역사의 비극을 또다시 되풀이 해서는 안된다.”
광주 밖의‘광주 동지들’명예회복 절실
-타지역의 5월 피해자들
80년 계엄포고령 위반자와 타지에서 광주진상을 알리다 구속처벌 받은 5·18피해자들은 5·18특별법 제정을 계기로 모임을 만들고 피해 배상과 명예회복을 요구하고 있다.
박광우<광주일보 월간국기자>
“뭐 피해 받은 것 있어요?”지난해 12월초‘80년 민주화운동 관련 계엄포고령 피해자 협의회’대표인 이우재씨(당시 서울대 복학생, 반유신운동기념사업회장)와 운영위원인 소준섭씨(당시 외국어대 복학생, 새사회연대 기획실장), 김준묵씨(당시 출판사 경영, 미래사 대표)등이 국회를 방문해 의원들과 면담하던 중 광주가 지역구인 모의원이 한 말이다. 이씨 등은 당시 국회에서 한창 논의중이던 5·18 특별법 제정과 함께‘12·12와 5·17내란에 항거한 민주화운동 관련 피해자 명예회복과 피해배상 특별법’(가칭) 입법을 요구하는 로비를 하던 중이었다. 이들의 주장은 80년 전국 방방곡곡에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 광주항쟁을 알리다가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명예회복과 원상복구였다. 하지만 그 의원의 말처럼 그동안 80년의 피해자는 광주시민으로만 인식되고 있었다.
80년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은 정권장악을 위해 광주를‘제물’로 선택했지만 그들은 광주만을 유린한 것이 아니었다. 광주라는 이름에 묻힌 수많은 타지역 희생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개 5·17 계엄확대에 항거하다 붙잡히거나 5·18 이후 광주항쟁을 알리다가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수배, 구속 및 투옥, 제적, 강제징집, 해직되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전국적으로 1천여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알려진 5·18 피해자들이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 관련자 24명, 광주시민 연행자 2천5백22명과 이중에 유죄판결을 받은 3백89명 등임을 감안할 때 타지역의 피해자들도 무시하지 못할 숫자다.
5·17최초 희생자 전북대 이세종군
그해 전국 대부분의 대학은 3월 개강을 기다렸다는 듯 총학생회를 부활시켰고 학원민주화투쟁을 시작으로 5월부터는‘계엄철폐’‘전두환 퇴진’등 정치투쟁으로 전환해 갔다. 투쟁양상도 4월30일을 기점으로 5월2일부터는 가두시위가 시작된다. 전국 최초의 5·18희생자가 나왔던 전북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5월2일부터 가두로 진출할 학생들은 14일에는 도청앞 연좌시위, 16일에는 전주 오거리에서 시민들과 함께 시위를 벌인다. 이들은 16일 최규하 대통령의 귀국설 이래 어느 정도 휴지기에 들어가지만 학내에서 철야농성을 계속한다. 5월17일 밤에도 전북대 제1학생회관 2층 교수회의실(지금의 대학방송국)에서 40여명의 학생들이 철야농성을 하고 있었다. 드디어 18일 새벽0시를 기해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7공수여단 계엄군이 교내로 진입, 학생회관을 포위하고 농성장을 진압해 들어갔다. 총칼로 무장한 계엄군은 농성학생을 진압해 들어갔다. 총칼로 무장한 계엄군은 농성학생을 무차별 구타하며 연행해 갔고 이세종군(당시 임학과 2학년)은 옥상으로 피신했다. 그날밤 농성중이던 학생 32명은 연행됐고 새벽1시30분경 이군은 학생회관 옆 땅바닥에 피투성이로 발견돼 전북대 병원으로 옮겼으나 새벽 6시30분 끝내 사망했다.
당시 계엄군은 이군의 사망 원인을‘진압을 피해 옥상으로 달아나다 떨어진 단순 추락사’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목격자들에 의하면 발견 당시 이군은 두개골과 간장이 심하게 파열됐고 옷이 칼에 찢겨 있었으며 온몸이 피멍이 든 상태였다고 한다. 특히 당시 이군의 사체를 부검했던 전북대병원 이동근 박사는 지난 93년 6월 가족들의 신청에 따라 발급한“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신청용 의견서’에서‘이군의 두개골은 광범위한 복합골절 양상을 보였고 안면부, 흉부, 복부, 사지 등에 많은 타박상이 존재했다. 이들 손상 가운데 상당부분은 추락이전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생각된다”고 기술, 계엄군의 발표내용과 상당부분 차이가 났다.
이처럼 이군은 심한 구타에 의해 살해된 후 옥상에서 던져져 추락사를 가장한 타살의 가능성이 높지만 16년이 지난 지금도 의문의 죽음으로 남아 있다. 이군 사건은 사망시간으로 볼 때 5월18일 오전 광주에서 계엄군에 의해 사상자가 발생하기 이전이어서 최초의 5월항쟁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 93년 광주보상법에 의한 보상도 안됐고 역사적 평가는 물론, 진상규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전두환의 광주 살육작전’배포한 이상호씨
전북 지역의 또다른 피해자는 이상호씨(45·서울덕산중 교사)와 한상렬 목사 등이다. 이들은 5월21일경 광주에서 탈출한 김현장씨가 작성한‘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이라는 유인물을 배포하다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당국에 체포돼 옥살이를 해야 했다. 특히 이상호씨는 당시 전주 완산여상 교사 신분으로 학생들과 함께 이 일을 했다가 해직됐다. 그후 이씨는 83년 광주·전남지역 5·18관련 교사들이 모두 복직발령을 받았는데도 계속 해직교사로 남아있다 88년 일시복직됐으나 전북도 교육감의 생활근거지(당시 부인이 서울 난우중 교사) 발령 약속 불이행에 따른 출근 거부와 고교생에 대한 시국강연 등으로 89년 6월 다시 파면됐다. 그는 지난해 6월에야 서울 덕산중학교로 복직됐지만, 전남대 학생처 직원으로 해직됐다.
김영삼정부 출범 들어 원직복직했던 서명원씨가 해직기간 동안의 임금을 모두 보상받은 것에 비해 이씨는 아직까지 그렇지 못한 상태다. 또한‘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1만매를 복사해 신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한편 옥외 마이크로 강론을 통해 그 진상을 알렸던 박창신 신부(당시 전북 여산 성당 주임신부, 현재 남원성당 주임신부)도 5·18의 피해자다(월간‘예향’88년 12월호, 박창신 신부가 쓴 수기-‘나는 이렇게 테레를 당했다’). 박 신부는 이 일로 광주항쟁의 확산을 우려한 당국에 연행되지는 않았지만 같은해 6월25일 밤 10시30분경‘군인으로 보이는’젊은이들에 의해 칼과 몽둥이로 테러를 당했다. 박 신부는 그때 수개월동안 입원 치료를 받았고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오른쪽 다리를 절룩거리는 ‘장애자’가 되었다.
당시 이 사건은 사제와 신도들이 진상규명 요구에 따라 당국이 마지 못해 수사에 착수했고 목격자들의 한결같은 증언에도 불구 미제사건으로 일단락되고 말았다. 특히 지난 88년 여소야대 정국에서 국정감사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당시 전북경찰청장은“공소시효가 87년 6월26일로 만료돼 수사기록이 모두 폐기처분됐다”고 보고해 자칫 박 신부가 살해됐을지도 모를 당시의 사건은 영원히 미궁으로 남게됐다.
‘서울의 봄’.
당시 어느 때보다도 민주화의 열망과 열기가 드높았던 서울에서는 왜 신군부의 5·17 계엄확대조치에 대해 강력한 저항이 없었을까? 소준섭씨는 “5월15일 서울역 회군으로 투쟁의 맥이 끊겼다”고 진단했다. 하지만“공포에 질렸다”는 이우재씨의 분석이 더 설득력이 있다. 사실 서울의 대학들도 만약 휴교령이 내려지면 지역별로 서울역, 청량리, 광화문, 신촌 등에 각각 모여 신군부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기로 약속돼 있었다. 하지만 신군부의 치밀한 계획 아래 5·17조치와 함께 민주인사와 학생운동 지도부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진행됐다. 이때 보안사는 물론, 서울시내 모든 경찰서가 예비검속으로 연행된 인사들로 발붙일틈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날 검거되지 않은 사람들은 대부분 잠적했고 일부가 5·17에 항거하는 시위를 벌이거나 20일이후에는 광주의 진상을 알리는 유인물을 배포하기도 했지만 서울시내 요소요소에 진주한 계엄군의 서슬퍼런 총칼앞에 무력하기만 했다. 이우재씨와 윤여연씨(당시 숭실대 총학생회장) 등의 증언에 따르면 18일과 21일 영등포에서, 21일에는 단성사앞 등지에서 2백∼3백명 규모의 시위가 벌어지려는 순간 강제해산 되고 말았다. 그후 서울시내에서는 시위가 벌어졌다는 증언이 없다. 5·17 조치로 연행된 대부분의 인사들은 구속영장도 없이 보안사나 경찰서에서 구타와 고문을 받다 60일, 심지어 80일만에 군법회의에 회부되기도 했다. 이들중 고학년이나 군대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은 대부분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들은 7, 8월경 공소취하로 석방돼 곧바로 강제징집 당하는 신세가 됐다. 당시 고려대생이던 이명식씨(39·통일시대 국민회의 정책위원)는“8월초에 논산훈련소로 강집당했는데 그곳에서만도 나와 동시에 들어간 사람들이 50여명에 이르렀다”고 말할 정도다.
5월이후 8월까지 간간이 광주항쟁의 진상을 알리는 사람도 있었으나 쥐도 새도 모르게 연행, 구속됐고 2학기 개학이 되어서야 학생운동세력이 교내에서 유인물을 살포하고 수백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80년 10월17일 고려대 시위에서는 12명이 구속되고 이튿날 휴업했으며 11월에는 연세대가 휴교되기도 하였다. 서울대는 12월 9명이 구속된 교내시위를 계기로 80명 정도의 운동권 학생이 장기간 감금상태에서 수사받고 수명이 구속되고 수십명이 강제입영당하는, 소위‘무림’사건이 발생한다. 이 무림사건은 지금 영화감독으로 유명한 여균동씨(당시 철학과 2년)도 관계된 사건이다.
지역은 달라도 교도소 ‘한솥밥 동지’
80년 계엄포고령 위반자들은 지역은 다르지만 한 곳에서 만났다. 바로 교도소다. 각 지역에서 군법회의를 거친 인사들은 8월말경 광주권은 성동구치소에, 서울권은 서울구치소에 그외 지역은 영등포구치소에 모두 모이게 되었다. 또한 이곳에서 형을 선고 받은 사람들은 다시 안양교도소와 청주교도소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때문에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실형을 살았던 사람들은 대개 지역에 관계없이 서로를 아는 경우가 많다. 대전충청, 대구경북, 강원, 부산 지역 계엄포고령 위반자들이 서로를 알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은‘교도소 한솥밥 인연’때문이었다.
대전 충청지역에도 계엄포고령 위반자들이 40여명에 달한다. 김윤오 목사(당시 목원대 총학생회장,서머나감리교회), 선병규씨(충남대, 새정치국민회의 지구당위원장), 김재수씨(충북대, 노동자의 집 대표), 이상헌씨(공주대, 상업)등이 그들이다. 대전지역의 경우 대학생들이 5월3일 대전역 가두시위를 시작으로 5월16일까지‘계엄철폐’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계속하다 5·17 조치와 함께 일제 검거된다. 청주도 대전과 비슷하다. 다만 5·18의 진상을 알리다고초를 치른 경우가 김창규 목사(현재 청주 빛고을교회)다. 김 목사는 당시 전남대 졸업생인 정병석이란 사람으로부터 광주항쟁 사진과<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우리나라 십자가여!>라는 시를 받아 이를 청주시내와 대학가 일원에 뿌렸다는 이유로 당국에 체포돼 청주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대구지역도 마찬가지다. 당시 경북대와 계명대, 영남대 학생들이 중심이 돼 대구시내에서 연일 가두시위를 벌였으며 그 결과 5·17직후 예비검속에 걸려 대구50사단으로 연행된 사람만도 2백명에 달했다고 한다.
또한 5·18이후 광주의 진상을 알리는 유인물을 산발적으로 뿌리다 체포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최근 김진태씨(계명대, 민주당 지구당위원장)를 중심으로 피해자협의회를 결성할 준비를 하고 있다. 강원도 춘천에도 80년 계엄포고령 피해자들이 숫자를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많다. 춘천은 4월20일 전국 최초로 가두시위가 벌어졌을 정도로 민주화 열기가 뜨거웠던 곳이다. 때문에 강원대에서만도 5월17일 학교로 진입한 계엄군에 의해 1백50여명이 연행돼 그중 구속됐던 사람들만 17명에 달한다. 나머지는 강제징집 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이때 잡히지 않은 강원대생 안재성(축산학과 2년, 소설가), 이동섭(행정학과 3년), 박진숙씨(미술학과 3년)등은 서울과 춘천에서 광주의 진상을 알리는 유인물을 뿌리다 뒤늦게 구속돼 수감생활을 했다. 최윤씨(강원대, 개혁신당지구당 위원장) 등 당시 피해자들은 지난해 12월 14일 협의회를 구성하고 고문피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요구하기도 했다.
부산에도 5·18희생자 있다
“우리는 그동안 지역 특성상 5·18 자체를 이야기 하기가 힘들었심니더. 부산에서는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광주전남에서도 알아주지 않심니더. 하지만 광주문제를 지역문제로만 국한되지 않게 하려면 타지역의 희생자들을 생각해야 될낍니더.”‘부산 5·18동지회’회장 신종권씨(43·부산 내성중 교사)의 말이다. 동지회는 부산지역에서 5·17을 전후해 보안사로 연행돼 갖은 고문과 구타후 투옥되거나 강제징집 당했던 50여명의 인사들의 모임이다. 그해 부산지역은 79년 부마항쟁의 여파 등으로 5·17직전 까지도 타지역과 달리 학내시위 외에 가두시위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 지역도 5·17 자정을 전후로 수많은 학생들과 민주인사들이 계엄당국에 끌려 갔다. 이들은 크게 학생운동그룹과 민주헌정동지회 등 김대중 그룹으로 나뉘었는데 한결같이 김대중씨와의 관계를 집중추궁 당했다. 당시 부산대 재학생 김종세(4년), 사공술(1년), 안승운씨(4년) 등과 민헌회의 김갑주, 송현종씨와 박행운씨(사진작가) 등이 그들이다.
부산에서도 5·18이후 진상을 알리다가 계엄당국에 연행된 사람들이 있다. 당시 영남상고 교사였던 신종권씨 등이 대표적인 경우다. 신씨는 당시 동아대 학생이던 이광호씨 등과 함께 5월25일 부산 남포동 부영극장 앞에서 시위를 벌이려다 합수부 지하실에서 모두 만나게 되었고 당시 부산대 학생이던 김영(필명 김하기)과 노재열씨 등도‘선전포고에 즈음하여’라는 유인물을 부산 광복동과 남포동에 뿌리다 체포돼 강제징집 당했다. 신종권씨는 그후 학교에서 해직돼 안해 본 장사가 없을 정도로 생활전선에서 악전고투하다 지난해 6월에야 복직됐다. 또한 감리교 임기윤 목사도 5월 이후 5·18의 진상을 알리는 활동을 하다 그해 7월에 보안대에 연행돼 조사를 받던 중 사망해 많은 이들을 애석하게 했다. 부인 최광병씨는 최근까지 임 목사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소송 등을 진행하고 있다.
이외에도 당시 경희대생이던 신경준씨(39·경주 신문 편집국장)는 5월 항쟁기간 중 우연히 광주에 왔다가 계엄군의 만행을 보고 5월 항쟁기간 중 우연히 광주에 왔다가 계엄군의 만행을 보고 5월 이후 타지에서 광주 진상을 알리다 구속됐다. 또한 당시 인하공전생이던 이교정씨(37·일산출판단지사업조합)는 5월중순부터 7월까지 3차례에 걸쳐 인천시내에 광주진상을 알리는 유인물배포와 대자보를 부착했다가 당국에 구속수감돼 수형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알려진 경우 외에도 5·18과 관련된 피해자는 전국 도처에 산재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광주’가 광주만의 것일 수 없는 이유중의 하나도 이들이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광주문제를 지역문제로만 국한하지 않기 위해서도 이들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오월항쟁동지회 윤광장 회장의“5·18특별법이 제정돼 미흡하지만 광주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광주문제를 5월18일부터 27일사이에 발생한 일로 국한해서는 안된다. 전국에서 5·18진상규명을 요구하다 투옥되고 처벌받은 분들도 모두 명예회복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 그것이다. 피해자협의회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이들 문제의 해결은 물론, 5·18문제 해결을 통한 진정한 역사 바로세우기의 방향을 제시하는 주장이어서 우리 모두 귀담아 들을 만하다.“최근 전두환, 노태우 등 군사반란과 내란의 주모자들이 처벌받게 되었지만 이에 항거해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희생됐던 사람들은 아직도 전과자로 남아 있다. 이 문제는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문제다. 불법적인 내란에 항거했던 사람들이 정당하게 대접 받지 못한다면 앞으로 누가 온몸을 바쳐 민주주의와 헌법 수호를 위해 나서겠는가? 독립운동가들이 해방된 조국에서도 친일파에 눌려 살던 우리 역사의 비극을 또다시 되풀이 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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