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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내가 겪은 5·18과 그 이후. 박시종,김준태,박효선,방철호,김양애,김선출,김경주,김연순(금호문화, 199…

본문

특집

내가 겪은 5·18과 그 이후



·오월은 늘 새롭게 되살아나야 ―박시종

·그때, 光州는 달이었다 ―김준태

·그날의 연극 ―박효선

·잃어버린 역사를 다시 찾는 얼 ―방철호

·내 자신의 정신만은 안 뺏길라요 ―김양애

·양심이 무엇이길래 ―김선출

·10년전의 초파일 ―김경주

·올해도 어김없이 철쭉은 피고 ―김연순



오월은 늘 새롭게 되살아나야

글·박 시 종<서울대 정치학과 4년>



다시금 오월이 다가오면서‘그날’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민족의 절규와 함성이 남도의 지축을 흔들고 붉은 피 흘러흘러 산하를 적시던 10년전‘그날’이 다가오면 진정으로 가슴 뜨겁게 맥동질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이름만 들어도 두 눈 부릅떠지는‘오월 광주민중항쟁-.’ 그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지도 어느덧 10년. 그러나 우리는 그저 기꺼운 마음으로 오월을 맞이할 수가 없다.

역사란 단순의 과거에 발생한, 그래서 세월에 묻혀 잊혀져도 좋을 그 어떤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역사를 돌이켜 보는 것은 비단 과거를 회상하고자 함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 현재를 재조명하고 나아가 미래를 개척하는데 유의미한 기초로 삼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광주항쟁 10주년을 맞이하는 지금 결코 감상적 회상의 대상으로 10년 전‘그날’을 격하시켜서는 안될 것이다.‘광주민중항쟁’은 독재와 억압으로 얼룩진 암흑의 현대사에 종지부를 찍고자 분기한 것이었다. ‘광주민중항쟁’은 강요된 침묵과 굴종에 포로가 되어있던 우리 민중들이 스스로 그 굴레를 벗어던지고 구국의 깃발을 치켜들었던 민중항쟁의 위대한 금자탑이었다. 물론 광주민중항쟁은 매우 커다란 역사적 의미를 지님에도 불구하고 당시 시산혈해를 이룬 채 끝났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광주항쟁의 의미를 조금도 훼손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만, 더욱 중요한 것은 현재 살아있는, 살아서 이 시대의 역사를 껴안고 나아가는 사람들이 어떠한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즉 광주항쟁의 정신과 역사적 의의를 끝끝내 무덤 속에 매장하느냐 아니면 그것을 우리들 사이에 살아 숨쉬는 질기디 질긴‘생명’으로 부활시켜 내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는 말이다. 광주민중항쟁의 그 모든 위대한 족적과 영예는‘죽은 자’에게, 그리고 광주항쟁의 모든 역사적 유산과 그것의 현재적 계승에 대한 책무는‘산 자’에게 돌려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광주항쟁은 우리 모두에게 지울 수 없는 역사적 책무를 부여하고 있으며 우리들은 결코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할 것이다.나는 여기서 잠시 개인적 이야기를 언급해 보고 싶다. 나는 80년 광주항쟁 당시 시내 모고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학생이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소위 공부밖에 모르는 순진한 학생이었다. 그리하여 항쟁 당시 나는 의분에 찬 전사도 아니었으며 조그마한 일에도 제대로 기여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끊임없이 시내를 배회하고 저질러지는 만행에 울고 분노하며 우리 조국에 대한 갖가지 의문들로 날을 지새울 뿐이었다.

그러나 이 때의 체험과 고뇌-그것은 결국 내 인생의 방향을 뒤흔들어 놓고 말았으니! 82년 서울의 모대학에 진학했던 나는 그 해 5월 학내에서 벌어진 시위에 자신도 모르게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로 소위‘운동권’의 일원이 되었으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살고자 노력해 왔다. 잘못된 역사는 바로 잡혀야 한다. 모순투성이 사회는 그 누군가의 책임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책임이다. 이러한 생각들이 늘 머리 속을 맴돌고 있었다. 특히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나를 휩싸고 돌았던 것은 조국을 위해 자신들의 목숨조차 아끼지 않았던 광주항쟁의 선배영령들이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오월 광주의 후예이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 분들에 비추어 지금 이 순간까지도 스스로 부끄러워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흑자는 광주항쟁은 이미 끝나버린 과거의 일이라고 말할 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정한 시기에 발생했던 하나의 사건으로서 광주항쟁은 끝이 났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이 추구했던 목표와 숭고한 정신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우리들을 부르고 있다. 누가 이것을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광주민중항쟁은 민중적 저항의 순결한 표상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순결성이 더렵혀지고 능욕당하고 있다. 이것은 소위 정치권에서의 광주항쟁에 대한 정치적 처리과정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사실 우리는 현 집권세력에게 광주학살에 대한 정치적 원죄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점은 차치하고라도 광주항쟁에 대한 정치적 처리과정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진상을 밝히기는 커녕 은폐하려 들고 또한 특정지역의 문제로 몰아가 지역감정, 지역주의를 부추기고 심지어 돈으로 영령들의 목숨과 정신을 매수하려는 작태 등 오히려 분노하게끔 하는 사람들은 대단히 많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광주항쟁을 희석화하려는 것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광주를 다시 한 번 더 죽이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이유들로 해서 우리는 그저 기꺼운 마음으로 오월을 맞이할 수 없는 것이다. 단순한 회상이 아닌, 주기적 행사치레가 아닌 새롭게 우리 자신을 다잡아 보는 각오로 영령들 앞에 서자. “오월은 우리를 통해 되살아 날 테니-.”



그때, 光州는 달이었다.

글·김 준 태<시인>



「5·18 광주민중항쟁과 그 이후를 원고지 12장에 써서 보내주십시오, 부탁합니다」「금호문화」편집실에서 걸려온 전화내용이다. 그러나 나는 선뜻 원고지에 손길을 옮길 수 없을만큼, 전신이 굳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아니 나의 전신이 또 다시 어떤 거대한 바람속에 세워지는 듯한 그런「아픔」에 휘말리고…. 그러나 나는 역시 원고청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끙끙거리다가, 이윽고 1980년 5월 24일의 일기 한 편을 옮긴 우리들의 사랑, 빛고을 光州에 바쳤던 300여편의 時중에서 가장 짧게 썼다고 생각되는 「달」이라는 시를 먼저 소개한 다음, 지면 관계로 다른 얘기는 못하고 5월 24일 그날의 일기만을 아주 그대로 옮긴다.

달나라에는 죽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달은 밝습니다.

―필자의 時「달」全文

◎ 5월 24일<금>. 서로 나눠 먹고, 서로 함께 울어주는 세상라디오에선, 광주에는 지금 생필수품이 바닥이 났느니, 생업이 막혀 우선 먹고 살기에 대단한 지장이 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어디 어디에선 금은방이 털리고 불량배들이 득실거린다고 한다. 한 말로 라디오는 광주를 난장판으로만, 무법천지로만 몰고 있었다. 라디오는 어쩌면 냉혈기계, 바로 그것인지도 몰랐다. 아아, 그럴까. 나는 채소류를 사러 나가는 아내를 따라 시장에 나가 보았다.

그러나 평상시처럼 물가는 거의 그대로였다. 또 상점주인들이나 물건울 벌여놓는 사람들은 그렇게 홋가를 말하지 않았다. 서로 고생하는 처지에「어디 나만 잘 먹고 잘 살겠소?」라는 대답이었다. 그들의, 상인들의 얼굴에선 한결같이 광주를 염려하고 있었다.평소에 아는 J신부님을 만났더니, 이런 말씀을 했다.「거리의 부랑아들이라고 사람들이 부르는 그런 젊은이들을 만났더니, 그러니까 혈혈단신 사고무친의 고아같은 부랑아 젊은이들을 만나, ‘그렇게 총기를 들고 다니면 안되네. 그러지 말고 우선 내가 가지고 있는 여기 10만원을 줄테니, 다시 소속된 집으로 가서 라면이나 끓여 먹게나’말했어요.

그러자 그 젊은이들은‘신부님, 우리에겐 그런 돈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도 광주시민입니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지만, 우리는 광주시민이란 말씀입니다. 우리도 광주시민을 위해서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총을 든 것입니다.’라고 해요.」그러면서 J신부님은 울먹거렸다.전남여고 옆 광주전신전화국 앞을 지나갈 때, 나는 무장을 한 젊은이 몇을 보았다. 그들은 전신전화국 현관과 후문쪽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누군가가 전신전화국을 파괴할지도 모른다는 도청시민군팀의 배려 속에서, 마치 사수하듯이 예의 건물을 엄호하고 있었다. 「전화는 광주시민들의 생명선이에요」라고 그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도 했다. 공동체정신·이웃과 함께 살아가 보려는 시민정신을 보는 것 같아, 왠지 나는 목이 메었다.아아, 그러나 밤이 찾아오면 개짖는 소리만 도처에서 하늘을 물어뜯는 듯 들려온다. 거기다가 이따금씩 총성이 울려퍼지고, 별똥처럼 예광탄도 날으고 있었다. 밤이 오면 이층의 옥상에 올라가기조차 무서울 만큼 돼버린 광주! 밤 9시쯤 되면 모든 집들은 소등하기에 바빴다. 그리고 여름이불 같은 것으로 창문을 가리고, 날아오는 유탄을 피해보자는 생각들을 가진 집들이 많아졌다.

오늘 역시, 학생·시민·종교인으로 이루어진「수습대책위원회」가 전남북 계엄분소라는 상무대사령부를 방문했단다. 시체반납 및 구속자 석방을 놓고 논의했으나 이는 결렬됐다는 말이 시내 전역에 번져 나갔다. 그런 사이에도, 조의를 표하는 일단의 장례식(광주사태희생자 시민장이라는)이 도청 앞에서 전개됐다. 찬송가와 노래와 울음으로. 시민들은 그때 어떤 한가닥 희망같은 것을 말하기도 했으니, 그것은 우방 미국의 대함대가 부산 앞바다에 와 있다는 것이었다. 오끼나와에선 조기경보기 2대가 날아와 광주상황을 체크하는 것으로, 혹은 사태를 풀어주려는 것으로, 착각해서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얼마나 단순한 심리인가. 어쨌든 각국의 외신기자들이 도청앞을 오고 가면서 취재하기도 했다. 상무관에서는 가족에 의해 일부 확인된 시체가 입관된채 60여구 정도가 태극기로 포장되어 있었다. 반쯤 열려진 관뚜껑을 젖히고, 어떤 여인네들이 죽은 사내들의 피묻은 얼굴을 씻어주고 있었다. 그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조의를 표하는 검은 리본을 받았다. 도청내에서는 신원이 미확인된시체가 50여구 있었고, 전남대 의대역시 신원이 미확인된 시체 10여구 정도가 하늘은 향하여 눈을 감고 있었다.

도청 안에서, 혹은 YWCA안에서 모인 여자들은 조의를 표하기 위해 시민들에게 나누어 줄 검은 리본을 계속 만들고 있었다. 젊고 용감한 여인네들은, 그리고 여대생과 여고생, 심지어는 황금동의 술집 호스티스같은 여인네들은 조를 편성하여,「헌혈반」,「취사반」,「홍보반」,「리본반」,「방송반」,「헌금반」을 두었다. 헌혈반은 중상을 입은 사람들에게 수혈을 하도록 시민들에게 권장하는 것이 주임무였으며, 취사반은 사태 기간 중 식사를 놓친 시민군 남자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자 손수 가마솥 따위를 설치해 놓고 밥을 짓는 팀이었다. 그리고 홍보반은 이런 상황으로 인하여 라디오나 TV, 또는 신문 들의 혜택을 입지 못한 채 온갖 초조함고 궁금중에 시달리고 있는 시민들에게 그때그때 터저 나오는「새소식?」을 대자보 작성 등을 통하여 전하는 것이 주임무였다. 방송반은 시위가 있을 때 남자들과 같은 장소에 있으면서, 예컨대 가두방송 따위를 통해 상황을 전하는 일을 담당했다. 헌금반은 취사반이나 홍보반, 리본반 등에서 필요한 금액을 마련해 내기 위해 주로 가두에서 즉석 헌금을 시도했다.광주위 어머니들·여대생들·여고생들, 계층을 떠나서 함께 한 여인네들은 정말 헌신적이었다.



그날의 연극

글·박 효 선<극단「토박이」대표>



80년 5월, 항쟁의 불화산이 폭발하기 직전, 나는 변두리 모여고 교사를 그만두고 한씨연대기(韓氏年代記)를 연출하며 소극장 설비공사에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작품도 애착이 가는것이었지만 소극장은 연극쟁이의 꿈이었다. 이름도 그럴싸했다. 신재효의 호를 본딴 동리(桐里) 소극장.

항쟁의 도화선이었던 18, 19일 극단의 단원들과 나는 예술과 혁명 중 한쪽은 선택해야만 되었다. 마른 나뭇가지같이 노인들이 넘어졌고, 앳된 풀줄기같이 아녀자들과 어린아이들이 짓밟혔고 열혈의 청년학생들이 검은 포도 위에 선지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장동로터리 소극장 앞길에서도 시골경찰들을 붙잡아 놓고 협상을 벌이던 학생들이 한순간에 얼룩무늬들이 제물이 되었다. 군중 속에 섞여있던 우리는 인도에 주저앉거나, 혹은 전봇대를 부여안고 요열을 터뜨렸다.

혁명은 먼훗날이 아니라 어느날 불현 듯 찾아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인텔리겐챠의 속성 그대로 그 참혹한 조건 속에서 마저 이해득실을 저울질하고 있었던 것이다.아무튼 우리는 예술을 포기했다. 그것은 후에 깨달았지만 속화된 예술적 욕망으로부터 이탈하는 순간이었다.단원들은 시위에 동참했고 투쟁의 깃발을 높이 들기 시작했다. 수류탄을 품고서 밤을 새워 지하유인물을 밀었고 날이 새면 자전거나 군용지프를 타고 정보에 갈증난 시민들 틈바구니를 누비고 다녔다. 국세청 뜨락을 접수(?)해 플래카드와 피킷을 제작했고 시청과 대학에서 차량을 징발해다 가두선전방송을 하였다.우리들의 투쟁은 시민궐기대회의 운영에서 절정에 달했다. 분수대 단 아래에서 시를 짓고 즉석 연설문구를 작성하던 우리는 혁명적 극작가였다. 단 위에 올라서서 노동자, 농민, 학생, 부인네 역할을 맡아 연설을 하던 단원들은 말 그대로 살아있는 배우요 혁명적 예술가였다.

대여섯 차례 궐기대회를 치르면서 우리는 어느덧 우리가 이제껏 보지도 듣지도 못한 진짜 연극 한편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의 몰골은 흉칙해졌고 수면부족으로 퀭한 얼굴들이었지만 눈빛만은 초롱초롱했다. 우리는 누구보다 승리를 믿고 싶었다. 대중의 의식과 실천을 견인해내야 한다는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었기에 그랬다.투쟁의 깃발이 꺾이고 우리는 패배하였다. 누구는 죽었고 혹자는 끌려갔으며 아무개는 도망쳤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별탈없이 저들의 그물에 걸려들지 않은 단원도 있었다.그로부터 10여 성상이 흘렀다. 세상은 변화해 왔고 그날의 항쟁의 의미도 많은 변화의 곡선을 그어왔다. 작년엔 청문회도 열렸고 나도 거길 불려갔었다. 이젠 보상이 아닌 배상이니 하는 얘기도 들리고 머잖아 광주바닥에 돈이 좀 흔할것이라는 소문도 자자하다. 올해가 10주기이니 뭔가 새로운 내용의 볼거리가 있을 것도 같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분명히 해 두자.학살의 주범들은 아직도 권좌에 있고 막후세력인 제국주의자들은 여전히 그늘진 옹달 속에서 독사같이 미소짓고 있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더욱 강고해진 물리력과 조직력으로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시인은 무등산의 영혼을 노래하지만 그산 꼭대기엔 누구를 겨냥하는지 모를 미사일이 배치되어 있고 황룡강 뱃노래 대신 송정리엔 제국주의자들의 핵폭탄 저장시설이 있을 뿐이다.그보다 무서운 건 우리 내부의 적이다. 그날의 피젖은 포도 위엔 잘빠진 자가용차들이 씽씽거리고 주식값의 오름과 내림에 입술이 붓거나 번질거리는 소시민의 보수성이 그것이다. 5월을 추억의 사진첩으로 여기고 필요하거나 생각날 때 들추고 펴는 사이비 지식인이 그것이다. 망월동은 참배객들의 들뜬 정서를 달래주거나 가난한 시인의 노랫말을 위한 곳이라는 게 또한 그것이다.

5월을 빌미로 출세하려는 자, 죽은 아들을 적들의 돈으로 매매하려는 자, 5월을 망각에 묻어두고자 하는자, 모두가 우리의 적이다,부릅뜬 눈으로 투쟁하는 사람만이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 앙다문 입술로 복수의 칼날을 가는 사람만이 최후의 승리, 그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5월의 패배를 눈감아선 안된다. 그렇다고 분노만으로 극복될 일도 아니다. 학살자들을 이겨내고 빚갚음하는 길은 민중의 단결된 힘으로써만 가능하다. 민중은 곧 노동자요 농민이다. 솔직히 우리 광주시민들 중 그 어느 누구는 노동자 아닌 이, 농민의 아들 아닌 이가 있을 것인가.정치의식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광주사람들! 하지만 막연한 정치의식, 모호한 단결력으론 또다른 패배의 반복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조직을 꾸려야 한다. 조직은 곧 힘이요, 작은 힘 하나하나가 모이고 쌓여져 커다란 힘으로 결집될 때 승리의 노래는 들려오기 마련이다.

문득 5월 어느날이 생각난다. 버스를 타고 차창밖으로 머리띠를 두른 채 차체를 각목으로 쾅쾅치며“독재타도! 민주쟁취!”를 부르던 여성노동자들, 도청 민원실 2층 강당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시민군의 밥을 해주던 여공들이 떠오른다.5월 동지는 지금, 여기에서 투쟁하는 사람들만이 진실한 5월동지이다.광주의 명예가 회복되는 날, 단원들과 함께 도청 앞 광장을 무대삼아 살아있는 연극을, 신명난 연극을 해보고 싶다.



잃어버린 역사를 다시 찾는 얼

글·방 철 호<주월 성결교회 목사>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고 본다. 그간 5·18 광주의거에 대한 진상들의 각계의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얘기되어 왔다. 그러나“광주시 기독교 비상구호위원회”의 활동 상황이 밝혀지지 않은 채 오늘까지 침묵하고 있었던 것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일하는 기독교의 정신이기도 했지만, 1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이제 여기 제한된 지면으로나마 밝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1980년 5월 18일(주일) 오후 2시경 예배를 드리고 잠시 쉼을 취하고 있을 때 평소 유신정권에 저항하면서 자주 만나오던 목사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내용인즉, 지금 시내는 온통 공수부대의 무차별 과잉진압으로 인해 잔학무도하고 극악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5월 18일 이전 김대중씨 외 많은 정치인이 검거된 터여서 학생들이 시위를 하려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또 내가 시무하는 교회 장로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목사님, 이럴수가 있습니까. 큰일났습니다”하는 이야기였다.나는 피곤을 무릎쓰고 시내로 나가 한일은행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거리에는 특전대원들로 삼엄하였다. 광주천에서 한일은행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걸어가고 있는데 내 앞에서 한 젊은이가 그 무엇엔가 맞아 머리가 피투성이가 되어 끌려가고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을 보는 순간 소름이 끼치고 비인도적인 잔악함에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나는 “이놈들아 심하게 굴지마”하고 절규하였다. 순간“저놈 잡아”하는 명령과 함께 수 명의 군인이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것을 직감하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악당들에게 너희가 찾는 예수가“나노라”고 나선 것처럼 담대하지 못하고 비굴하게도 나는 있는 힘을 다해 한일은행 정문을 넘어 피신하였다.

이것이 내가 처음 겪은 5·18의거의 한 장면으로서 나는 은행 한구석에 숨어 자신을 정리해 보았다. 시민과 학생의 함성에 메아리쳐 오며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일들이 전개되고 있음을 느꼈다. 왜 이런 비극이 이 땅 예향의 도시, 빛고을 광주땅에서 일어나야만 했을까, 동학혁명의 피를 이어받고 광주학생운동의 발원지여서 그러할까, 생각하며 이 의거야말로 민중해방운동이며 민중의 주체의식을 찾는 운동이며 군부세력에 대한 저항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인생의 삶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 보통의 생각이며 우리 인생은 죽음을 무서워 한다. 그런데 이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죽어간 자가 있으니 그 이름 장하지 아니한가. 이들은 바로 우리들의 형제요 우리 광주의 시민이며 하늘의 백성인 것입니다. 이미 사상자가 속출하는 중 21일에는 시체위에 태극기가 덮혀 있고 그 시신을 사이에 두고 선량하기만 한 시민과 독기에 차 있는 계엄군이 가톨릭센타 앞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이 민족 비극의 고비만 넘기면 어둠의 장막이 서서히 걷혀질 것이라고 막연히 기대를 걸면서 광주의 목회자 71명이 누구의 소집도 없이 자연적으로 제일장로 교회에 모여 22일에 기독교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23일에는 사망자를 위한 관 구입비 백만 원을 즉석 헌금하여 전달하기도 하였는데 나중에 당국은 이것을 거사자금으로 몰기도 하였다.

나는 시민대책회의에 기독교 대표로 참여하면서 무저항 비폭력을 주장하였고 다른 목사님과 함께 총기회수를 요구했다. 회의 중에 나와서 권총을 들이대고 총기를 버리자는 안을 취소하라던 강경파의 울부짖음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일의 하나이다.27일, 도청이 계엄군에 점령 당한 뒤 시신을 매장하기 위하여 몇 사람의 유족대표와 함께 구용상 시장에게 장지를 망월동 지금의 묘지에 별도로 마련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29일에 시장과 목사님 몇 분 그리고 유족들과 함께 47구의 시신을 싣고 망월묘지에서 비절참절한 역사적인 합동장례식을 집행하였다.

삶이란 얼마나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오래사는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나에게 필요한 공간 속에서 얼마나 바른 시간을 살고 있는가에 삶의 의미가 더 있다고 생각한다. 죽인 자는 저주를 받고 영벌에 들어가지만 죽어진 자는 역사의 민중들에게 잃어버린 역사를 다시 찾는 일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겨우 연명할 수 있었던 초라한 공간과 숨막히는 시간을 하나님의 의와 공평을 위하여,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하여 바친 시신을 놓고 장례를 집행하는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눈물이었다. 그리고 5월 19일부터 6월 8일까지 나는 상근하다시피 총무일을 담당하면서 입으로 형언할 수 없는 비극의 장면들을 보고 겪었다.중요일지를 다음과 같이 간추려 본다. 전국교회에서 모금된 7천여만 원으로 구호 활동 명목으로 행사한 것이다.

5월 21일, 목사 71명이 모여 22일에 기독교대책회의 구성.

5월 23일, 사망자 관 구입비 100만원 전달.

5월 29일, 1차로 47구의 합동장례식 거행.

5월 30·31일, 조대병원, 전대병원, 기독병원, 적십자병원 중상자 549명 방문, 위로금 전달.

6월 20일, 광산경찰서 방문, 26명에 금일봉 전달.

6월 24일, 통합병원방문, 군 부상자에게 위문금 전달.

6월 28일, 외지 부상자에게 목사 파송, 위문금 전달(서울34명, 대구7명, 대전3명, 부산3명,

진해1명), 경찰사망자 2명에 금일봉 전달, 사망자 105명에 12팀으로 구성된 목사님들이 가정

방문, 금일봉 전달(10만원∼50만원).

7월 23일, 2차로 부상자 위문, 금일봉 전달(102명)

8월 3일, 나라를 위한 연합예배를 드림(실내제육관 앞 광장 5만명).

8월 18일, 3차 부상자 금일봉 전달(36명).

9월 1일, 2차로 사망자 가족 위문 금일봉 전달(5명).

9월 6일, 4차로 부상자에 금일봉 전달(62명).

9월 18일∼23일, 구속자 가정방문과 금일봉 전달(10∼50만원).

10월 21일, 24일 교도소 방문, 위문품 전달(사과 40상자).

11월 8일, 기독교 비상구호위원회 해체함.

내가 지난번 청문회에서나 언론에 꼭 한번은 밝히고 싶었는데 웬일인지 기회가 주어지지 아니한 것에 다소 서운함이 있었다. 기독교의 활동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되어진 일을 이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 사실 그대로 알리고 싶을 뿐이었음을 밝혀둔다.

내 자식의 정신만은 안 뺏길라요

글·김 양 애 <광주시 양동시장 상인>

그때가 10년전 5월 16일로 기억한다. 둘째가 동국대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줄곧 시끄럽던 세상은 5월이 되면서 극에 달해 보였다. 텔레비젼을 통해 본 서울은 연일 대학생들의 데모로 금방 터져버릴 것처럼 들끓고 있었다. 5월 들어 나는 처음 내 슬하를 떠나 서울에서 자취를 하며 학교에 다니던 둘째의 걱정을 한시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나는 견디다 못해 둘째를 광주로 불러내렸다. 그대로 서울에 두었다가는 아무래도 둘째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5월 16일, 애들 이모를 시켜 둘째에게 전화를 했다. 그때까지 광주는 조용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광주에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곁에 두는 것이 마음 편할 것 같았다. 조용하기만 했던 광주도 둘째에게 전화를 한 이후부터 슬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16일의 대학생들의 데모는 이상하리 만치 평화적이었다. 교수들이 앞장섰다는 이날 데모는 서울처럼 돌멩이가 날으지도 않았고 최루탄이 터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18일부터는 상황이 급변했다. 이날 아침 전남대 정문으로부터 시작된 충돌은 광주시민 모두들 긴장과 공포에 휩싸이게 했다. 19일이 되면서 외부로부터 교통이 두절되기 시작했다. 둘째가 광주에 내려온 것은 이날 오후였다. 둘째를 태우고 내려온 차는 터미널에 들어서지 못하고 역전에 서서 사람들을 내려놓고 있었다. 우리 내외는 불안한 나머지 광주역까지 마중 나갈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 식구들과 함께 하루밤을 잔 둘째는 다음날부터 데모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남달리 의협심이 강했던 그 아이는 친구들의 처참한 죽음과 시민들에게 자행하는 계엄군들의 만행을 보고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일, 21일 이틀동안 계엄군은 광주를 온통 통곡만이 가득한 도시로 만들어 놓고 빠져나가 버렸다. 계엄군이 광주를 빠져 나가고서야 둘째는 집에 얼굴을 나타냈다. 도청에서 시민·학생수습위원회에서 일을 하고 있다며 수시로 식구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집에 들어오거나 전화를 해왔다.

시장에 살고 있던 나는 계엄군이 퇴각한 이후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아줌마들과 함께 돈과 쌀을 걷어 주먹밥을 지어 시민군들에게 날라댔다. 계엄군이 없었기 때문에 도청에만 있겠다던 둘째에 대한 걱정은 다소 덜어졌다. 주먹밥이며 음료수와 과일들을 날라다 줄 때마다 청년들은 고마움에 몸둘 바를 몰라했고, 광주를 지켜야한다는 사명감과 정의감으로 충만된 청년들이 모두 자식같은 생각이 들곤 해서인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얼굴둘이 눈에 선하다. 계엄군이 광주의 씨를 말려버리기 위해 다시 쳐들어 온다는 흉흉한 소문이 사실이 된 26일, 둘째는 여동생에게 농담 섞인 안부 전화를 마지막으로 도청에서 27일 새벽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죽었다. 결국 서울에 있는 아이를 불러내린 것이 자식을 죽게 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지금도 망월동 자식의 무덤 앞에 서면 그때 서울에 그냥 있게 내버려뒀으면 하는 생각으로 숨이 막혀온다.

27일 동이 트자마자 곧장 도청으로 상무대로 찾아 헤맸지만 둘째는 없었다. 이틀동안 시내를 뒤지다가 도청앞 상무관에 나붙은 27일 새벽, 상황판의 사망자명단에서‘박병규’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상무관에 놓인 둘째의 관을 차마 열어보지는 못하고 그 아이가 입고 나갔던 옷가지로 확인하고서 며칠 후 망월동에 묻어야 했다. 애 아버지는 그후 수시로 시들시들 앓기 시작했다. 큰애가 군에 가 있어 나는 자식을 잃은 원한과 설움에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자주 앓아 눕는 남편과 학교에 다니고 있는 자식들의 생계 때문에 폭도의 누명을 쓴 둘째의 원통 한 죽음을 속으로, 속으로만 삼키며 살아 갈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었다. 그 후 정부 고위층 인사가 광주에 올 때마다 나는 다른 유가족들과 함께 며칠씩 연금되거나 강제로 납치되곤 했다. 돌이켜 보면 지난 10년의 세월을 어떻게 견뎠는지 아득하게만 느껴질 따름이다. 이제 내 가슴에 묻혀져 있던 둘째의 원한이 자꾸 사무쳐 내가 죽더라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없을 것 같다. 둘째를 죽인 놈들에 대한 뼛골 깊이 사무친 회한과 분노 때문이다. 더구나 내 자식을 비롯해 그 많은 사람을 죽여놓고 이제와서 금전으로 문제를 매듭지으려는 정치권의 작태에 울화가 치밀어 견딜수가 없다.

이미 내 자식은 죽었지만 그 아이의 이름 앞에 최소한 명예가 회복될 어떤 말이 제도적으로 붙여져야 할 것이다. 그 아이의 죽음과 지난 10여년의 내 고통을 보상받고자 함이 아니라 그렇게 죽어간 자식의 이름만은 보상이라는 미명으로 팔려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양심이 무엇이길래

글·김 선 출<무등일보 사회부 기자>

솔직히 말해 해마다 5월이 되면 나는 답답한 심정과 무력감을 떨칠 수가 없다. 그날 이후 10년이 된 올해도 별 수 없이 같은 심정을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더한 속앓이를 해야 할 성 싶다. 80년 5월 나는 유신치하에서 긴급조치 위반으로 제적당한 후 그해 3월 복학한 25세의 전남대사회학과 학생이었다. 나를 포함해 소위「탈춤반 1세대」들은 79년 겨울, 학교 밖에서는 극단「광대」를 조직했고 학교 안에서는「민속문화연구회」를 재가동 해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마당극」을 중심으로 한 문화운동을 이끌어 갔다. 이때「광대」는 돼지파동을 풍자한 마당극「돼지풀이」를 광주시내와 농촌현장을 돌며 10여차례의 정치풍자 마당극을 공연해 민주화를 갈망하는 시민·학생·노동자·농민 등 대중들의 정서를 결집하여 당시 빈번했던 집회·시위의 문화선전대 역할을 주도했다.

그러던 중「돼지풀이」이후 다음 작품을 준비하던「광대」팀은 광주민중항쟁의 기폭제가 됐던 5월「민주화 성회」를 맞아 공연준비를 중단하고 마침내 5·17 계엄확대 조치가 내려지자 이후 5월 항쟁에 본격적으로 참여케 된다. 당시「광대」회원들이 했던 일은 소식 전단발행(후에「투사회보」로 연결됨), 대자보 부착, 궐기대회 개최 등이 주였으나 항쟁이 격화되면서 투쟁지도부나 무장투쟁조에 들어가기도 했다.

나는 그때 그 투쟁현장과 그곳에서 만난 몇 사람의 눈빛이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5월 18일, 나는「광대」회원 전용호·김태종(당시 구속) 등과 투쟁소식지를 등사해 뿌리던중 19일 윤상원 선배(항쟁지도부 대변인, 도청진압시 사망)를 그의 광천동 자취방에서 만났다. 당시「들불야학」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을 하던 윤 선배는 밤새「투사회보」를 만들다 잠시 찬방에 누워 무언가 골똘히 생각중이었던 모양이다. 후배들에게 자상했고 고운 심성을 가졌던 윤선배는 그날 따라 두 눈에 피빛이 서리며 유난히 큰 눈이 섬찟할 정도로 빛을 발했다. 순간 나는「형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겠구나」하는 불길한 예감이 일었으며 윤 선배는 그 자리에세 벌떡 일어나「형제들의 죽음을 내버려 둘 수 없다」며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후 농민의 맏아들인 윤 선배는 27일 새벽 계엄군에 맞서 싸우다 결혼도 못한 채 최후를 마쳤다. 같은 날 광천동「들불야학」에 들어가니 박용준형(「투사회보」제작 후 27일 새벽,YWCA에서 사망)이 작은 칼을 갈고 있었다. 고아로 자라나 구두닦이 등「천대받는 사람들을 위해 산다」며 빈민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박형은 그날 그 칼로 전투훈련을 하다 허벅지를 찔려 인근병원에서 몇 바늘을 꿰메는 치료까지 받았다. 그날 박형은 칼은 갈 때 이빨을 부드득 갈았으며 안면근육이 뒤틀리는 등 적개심으로 충만돼 있었다. 그는 YWCA에서 총을 들고 방어를 하다 이미 죽음을 예감하고 유언장까지 썼다. 「우리의 피를 원한다면 하느님, 이 조그만 한몸의 희생으로 얻을 수 있다면 희생하겠습니다……양심이 그 무엇입니까. 왜 이토록 무거운 멍에를 매게 하십니까. 이렇게 주께 갈급하게 구해야만 세상일을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하렵니다. 하느님.」26일 오후 광주 외곽이 차단된 채 계엄군 진입 소문이 들리고「광대」팀은 마지막 궐기대회를 마쳤다. 그날 상무관에서 시체들 염을 했던 누나와 나의 학비를 대주었던 형도 그 자리에 참석해 땅거미가 지는 어스름한 초저녁의 불안을 같이 했다.

이윽고 최후결사조가 편성되고 각 곳으로 배치되는 행렬에서 누나와 형은 마지막 호소의 눈길을 보냈다.「집으로 가자」는 무언의 눈빛은 삶과 죽음의 선택이었다. 자꾸만 도청쪽으로 고개가 돌려지면서 동료들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천길 발걸음은 무의식중에 남동 집에 도착했다. 밤잠을 못자고 뜬눈으로 지샌 새벽, 마침내 콩볶는 듯한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순간 피투성이로 얼룩진 동료들이 쓰러지는 모습이 번득번득 스치고 마침내 나는 울음과 함께 이불속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아침이 되자 차마 도청에 남아있던「친구」의 집에 전화를 걸 수 없었다. 그후 상무대 영창에서「친구」를 만나고 같이 군에 징집됐다. 이제 또 다시 5월을 맞는다. 그러나「님」들이 가신 뒤 살아남은「형제」들이 또 쓰러지고 지금도「싸움」은 계속되고 있건만 어느 한 가지「5월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10주년을 맞는다.오히려 최근의 정치상황은 5월 영령들이 남긴 뜻과는 달리 반전과 후퇴의 기류를 보이고 있고 배고픈 이웃들의 생존권 또한 희망과는 점점 멀어져 가는 이때, 광주시민의 속앓이는 깊어가고만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지난 10년 세월은 5월단체들의 꿋꿋한 활동과 민족·민주운동의 발전으로 5월정신은 민주화와 역사화에 일정한 자리매김을 했다. 이제 남은 것은 정부의 책임이 됐다. 아울러 다시는 5월의 상처가 후세에 되풀이되지 않게 민족성원 모두가 진정한 민족·민주·통일운동의 주체가 돼야 할 것이다. 이것이 5월영령들이 지하에서까지 부르짖는 통곡일 것이다.

10년전의 초파일

글·김 경 주<화가>

금년 4월 초파일을 달력에서 확인해 보니 양력 5월 2일이 되는 모양이다. 십년 전의 초파일은 5월 21일이었던가? 매년 절기가 달라 음력 양력간에 얼마간씩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대개는 우리가 보는 달력으로 5월 어디쯤인가를 짚어보면‘석가탄신일’이라는 작은 글씨가 보인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되 그날은 경축일로 지정되어 빨간숫자가 인쇄되어 있고 山寺를 찾는 부녀자들의 공양행렬이 어느 곳이나 즐비한 날이다. 불경스러운 얘기일 지 모르지만 만산에 진달래 흐드러지고 골목마다 산수유 개나리 백목련이 소담스럽게 피었다 잦아들 무렵, 이젠 참말로 봄이다 싶을 때 그 떨어진 꽃잎들 위로 오시는 석가모니는 탄신일 하나는 참 잘 잡아 오셨다 싶은 생각이 아니不字不敎인 나같은 사람에게도 든다. 그런 좋은 날인 초파일 얘기를 하고 싶다. 그러니까 1935년 4월 8일에 강진의 白蓮寺가 마주보이는 마을에서 태어나 蓮心이라는 이름을 지니게 된 여자 얘기이다.

때가 일제의 강점하로 중일전쟁 이태 전, 수탈이 심한 때라 그녀의 집, 빈궁한 농가살림에 먹을 것, 입을 것이 오죽 했겠는가마는 그녀가 이목구비 단정하고 총기있게 생겨 어려운 속에서도 부모사랑을 듬뿍받고 자랐다. 나이 열한 살 되던 해 해방을 맞고 몇 해 있다가 전쟁이 터졌는데 전쟁이 끝나갈 무렵 그녀의 백부가 좌익부역을 들었다는 혐의로 토벌경찰지휘관에게 즉결처분을 당할 지경에 이르렀다.

온 집안식구들이 초죽음이 되어 벌벌 떨기만 하고있을 때 그 토벌경찰이 백부에게 겨눴던 총을 거두고 모종의 제안을 해왔는데 연심이를 자기에게 주며 그녀의 백부를 살려주겠다는 조건 이었다. 그렇게 해서 열일곱의 나이에 연심은 그 토벌 경찰의 첩으로 갔다. 백부를 살려야 한다는 식구들의 바람을 받아들여 어린 속에도 그저 운명이거니 하고…. 처음엔 소실이긴 해도 지아비 되는 사람이 지서주임으로 발령을 받아 그다지 곤궁하지 않은 살림에 딸 하나 아들 하나 낳아 애지중지하는 재미도 없지 않았다. 4·19가 있던 해에는 그 와중에도 지서주임인 자기 남편이 잘못되지 않을까 염려도 하고, 지서주임을 그만두고 면장직에 있을 때 터진 5·16에도 비슷한 걱정을 하면서….

그러나 남편이 면장직을 몇 핸가 더하고 그만 두게 되자 차츰 어려움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본댁과의 마찰도 그랬거니와 거처를 아예 그쪽으로 옮겨버리고 가뭄에 콩나듯 들어다보는 남편의 무책임, 그리고 그동안 별 얘기들이 없었던 주위사람들의 눈총도 따가와 지고….생각다 못해 일찍 혼자되신 아버지에게 자초지종의 심경을 말하고 고향을 뜨겠다고 했을 때 그녀의 아버지는 차라리 그편이 낫겠다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애들 둘을 데리고 光州에 올라와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했다. 행상도 하고 양동시장 노점상인들에게 일수돈도 놓고, 어떻든 악착같이 살아서 애들은 부럽잖게 키워야 한다며 밤낮없이 뛰어다녔다.

그런 속에서도 자신의 삶이 특별히 모질고 고달프다고 느끼거나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간혹 백부가 잡혔을 때가 생각나기도 했지만 조카딸로서 그럴수 있는 일이겠거니 치부했고 만일 그렇게라도 되지 않았더라면 꼼짝없이 백부의 총살장면을 지켜만 보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곧 잊어버리곤 했다. 가끔 찾아뵌 백부는 늘 울었다. 죽을 때를 찾아 죽지 못했다며……애들은 효성깊게 잘 자라 주었다. 매년 초파일이면 어머니의 생일을 잊지 않고 작은 선물이라도 준비했다가 꼭 은헤를 갚겠다는 쪽지와 함께 내밀곤 했다. 1980년이 되었을 때 그녀의 애지중지하는 아들은 스무살이었다. 그해 초파일에도 그 아들은 작은 선물을 준비했다가 내놓았고, 생일상에 모여 식구들끼리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는 그날 오후밖에 나간 아들에게 사고가 있었다. 그날이 양력으로 5월 21일 이었다. ……………… ………………. 나는 5월을 겪지 않았다. 군대에 있었다. 다만 80년 5월이 10년 지난 지금, 이제는 쉰여섯 초로의 나이가 되었을 한 여자의 개인사를 떠올려 보고 싶었을 따름이다. 그리고 누구에겐가 묻고 싶어졌다. 연심이라는 여자 스스로는 자신의 운명이 초파일과 緣이 닿지 않는 사주팔자라고만 느낄 뿐 자기와는 무관한 것으로 믿고 있을 그놈의‘역사’라는 것이 세월이 가면서 조금씩이라도 진보하기는 하는 것이냐, 그렇다고 한다면 일제로부터 5·18에 이르기까지 한평생 역사의 공물처럼 살아온 연심이라는 여자의 개인사는 무엇이냐 하고……. 노파심에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나는 소설가가 아니다,―하긴 이땅의 연심이가 한둘이랴만은…….

올해도 어김없이 철쭉은 피고

글·김연순<광주시 동구 동명동>

창을 통해 청명한 오월의 하늘을 바라보노라니, 문득 지난해 폭설과 이상난동으로 오락가락하며 우리 마음을 짓눌렀던 음울한 긴 겨울이 떠오른다. 어느덧 계절은 정직한 변천을 거듭하여 오늘 묵연히 바라보는 하늘은 평화롭게 나의 영혼과 육신을 껴안아주는 듯 하다. 무언가 말하는 듯한 하늘, 무엇인가 들려주는 듯한 바람소리 속에 이 오월에도 어김없이 늦은 철쭉꽃이 만개했다. 새로 꾸민 정원에 온 식구가 작은 철쭉 몇 그루를 심은 것도 이젠 십여년 전의 먼 옛날 일이 되었나 보다. 역사의 변혁이 무섭도록 긴박하게 우리 곁에 다가서던 그해 봄은 오랫동안 숨겨졌던 구조적 모순의 실상이 파헤쳐지고 너나없이 자신의 새로운 삶에 대한 욕구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던 시기였다.

그땐 나도‘세월이 참 수상하다’는 남편의 말에 개혁이니 민주화이니로 매일같이 가슴속이 들썩이곤 했다. 허나 마음 한켠에서는 변화에 대해 두려워 하며 현실에 안주하고자 희구하는 일렁임을 완전히 배제할 수도 없었다. 연일 서울에선 학생시위가 잇달아 발생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서울에서 대학 다니던 큰 아들 걱정으로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차츰 광주 시내에도 평화적이긴 하나 학생시위가 시작되었고, 어떻게든 빨리 잔잔해지기만을 바라던 나의 단순한 소시민적 근성에 쐐기를 박기라도 하듯, 시위는 갈수록 심각한 양상으로 발전해갔다.

그러던 중 계엄확대조치 발표로 모처럼 일요일에 계획되었던 가족나들이가 취소되었고, 오후엔 시내에 공수부대가 시위진압을 위해 들어왔다는 소식도 들렸다. 다음날 갖가지 소문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학생들이 무자비하게 맞으며 끌려간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당시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두아들의 학교로 향하였다. 변두리에 위치해 있어 그때까지 시내소식에 어두웠던 학교는 그제야 긴급회의에 들어갔고 학생들 안전 귀가조치를 내렸다. 돌아오는 동안 차창으로 내다본 시가지는 전쟁통을 방불케 하는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었다. 총칼을 앞세운 공수부대는 마구잡이로 청년들 옷을 벗겨 곤봉으로 때리고 일렬로 세워 어디론가 실어 나르고 있었다. 외곽으로 돌고 돌아 겨우 집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안도감을 느꼈으나, 한편 무분별한 호기심으로 시내로 몰려드는 아들 또래의 어린 중고생들이 너무 걱정스럽기도 했다.

멀리서 함성소리 최루탄 터지는 소리만 들리던 그날, 얼마나 많은 어머니들이 귀가하지 않는 아들 딸들을 기다리며 긴 밤을 지새웠을 것인가. 누구를 향한 무엇을 위한 외침이며 항거인지, 피해자도 가해자도 불분명한 가운데 광주에서는 연일 시가전이 계속 되었고, 동별로 어머니들이 밥을 하고 계란을 쪄나르기도 하며 거기에서 허기진 시민군을 도왔다. 무장한 시민군과 계엄군 사이에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으며 제복을 벗어던지고 피해가는 일선파출소 경찰들이 집을 찾아와 헌 옷가지와 신발을 달라고 했다. 그들에게도 때아닌 이변일테고 걱정하며 기다리는 가족이 있을 것을 염려하며 동네 부인들끼리 옷을 모아 내주었다. 오후엔 또 학생들이 집집마다 찾아와 협력을 호소하며 쌀을 추렴하며 다녔다. 신념에 찬 그들의 모습에서 신뢰감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애잔한 마음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물자조달이 약간 어려웠지만 합심하고 양보하며 아름다운 인간애를 느끼고 실천했던 때였다고 지금도 기억된다. 다만 하루 벌어 근근이 연명하던 영세한 노무자 가족들에게는 견딜 수 없이 두려웠던 때 였으리라.

하지만 일단의 계엄군이 철수한 후 광주는 평화를 되찾았다. 무기를 스스로 회수하며 부서진 시가지를 청소하는 가운데 공동체로서의 질서를 회복해 가고 있었다. 모든 통신과 매스컴이 두절되었던 그때의 광주는 따사로운 오월의 햇살 아래 무인도처럼 홀로 앉아 아픈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고 위로 하던 역사의 고아같은 존재였다고나 할까. 수많은 시민들이 도청앞 광장에 모여 사태수습과 대책을 함께 논의하던 그때, 상무대에 임시로 마련된 영안실에서 아들의 죽음을 확인하고 오열하던 한 노인의 모습을 난 지금도 잊지 못한다. 태풍의 눈과도 같았던 정적의 순간이 지나고 27일 새벽, 다시 계엄군이 쳐들어 온다는 한 여자의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갑작스런 총소리 폭음소리가 콩볶듯이 한동안 요란했다. 솜이불을 뒤집어 쓰고 지샌 그 새벽이 지나자 계엄군이 광주를 완전 장악했다는 소식과 무수한 학생 시민군이 살상되어 어디론가 실려갔다는 얘기만 황폐화된 거리에 떠돌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저 정의만을 외치다 뜻모를 죽음을 당한 수많은 내 아들 또래의 청년들이 있었다. 사건과는 완전 무관하게 부모곁으로 가족곁으로 찾아가다 불의의 총탄을 맞고 쓰러진 이도 있었다. 거리에서 가족을 찾아 헤매는 많은 사람들의 피맺힌 절규속에 6·25를 다시 보는 듯이 느껴졌고 솟구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거대한 역사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개인이 추구하는 작은 행복과 소박한 가치는 그 얼마나 쉽고도 무참하게 망가져 버리곤 하는지 모른다 두려운 가운데도 한마음으로 뭉쳐 무조건적인 사랑과 동조로 불의에 항거했던 그 며칠 동안의 열정에 뒤이어 찾아온 순간적인 파괴와 엄청난 죽음의 참사는 우리 가슴에 예리한 송곳처럼 꽂혀 버렸다.

누가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 우리 모두의 육신을 깔고 유린하였는가. 죽음과 행방불명, 부상 그리고 불명예스런 멍에까지 걸머지고 사태에서 민중항쟁으로의 십여년 세월이 침묵 속에 흘렀다. 원인조차 모른 채 열병처럼 치루었던 그날이건만 많은 시련 속에 무관심했던 정치에도 눈을 뜨게 되었고, 어제는 누구라도 옳고 그름을 이야기할 수는 있게 되었다. 그때 나 몰래 대문을 빠져나가 도청 앞에서 시위하는 형들 틈에 끼기도 하여 무던히도 내가슴을 태우던 두 아들은 어둡고 어수선한 80년 대를 거쳐 대학을 마치고 이젠 결혼도 하였다. 그러고도 아직껏 모든 진실은 밝혀지지 않아 오늘도 다시금 바라보는 오월의 청명한 하늘은 가슴 속의 비애를 깊게만 만든다. 아무도 오는 봄을 막을 수는 없어 올해도 어김없이 붉은 철쭉꽃은 만발 하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