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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성명서 및 유인물] 광주 사태/계엄사령부 1980.6.

본문

계엄사 발표 “광주사태”전문



지난 5월 18일 광주시내 대학생 시위에서 발단하여 5월 27일 진입되기까지 광주시 일원에서 발생하였던 폭동사태는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고, 국정의 정상적 수행을 저해하였을 뿐 아니라 국민여러분에게도 불안과 깊은 염려를 끼치게 한 유례없는 비극이었는 바, 다행히도 5월 27일 계엄군의 효과적인 진압에 의해 질서와 평정을 되찾게 되었고 사태수습이 진행되고 있음에 즈음하여 계엄사령관으로서 국민여러분께 심심한 유감의 뜻을 표하면서 광주사태의 경위 및 진상과 사후처리의 방침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는 바이다.


1. 사태 배경 및 동기

- 금년 3월 개학 이후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전개되어 왔던 각종 농성 및 시위가 소요·폭동화로 변전함에 따라 5월18일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와 휴교조치로 종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광주시에서만은 전남대학생 2백여명의 가두시위가 5월 18일에도 계속되어 경찰과의 격렬한 대치로 저지가 어려워 지자 부득이 계엄군이 포고령을 위반한 학생 난동시위를 저지키 위해 투입되었으며, 저지 과정에서 일어난 군과 시위군중간의 충돌과 오해에 기인한 감정의 촉발이 기상천외한 온갖 유언비어의 난무로 급격히 확대됨으로써 끝내는 총기를 쟁취한 무장폭도의 난동으로 광주시 일원을 무법천지화하게된 것이다.

- 시국에 대한 집단적 의사표시의 한계를 훨씬 넘어 폭력과 무질서를 격화시키고 무장 폭도에 의한 실상 파괴, 방화, 약탈과 심지어는 정부에 대항하는 시민군을 자처하여 저항, 봉기를 선동획책한 이번 광주사태의 진상은 비록 일부 소수의 불순선동분자와 철없는 난동폭도의 소행이라 하더라도 우리 국민들이 다같이 깊은 성찰과 회오의 계기로 삼아야 할 중대사태가 아닐 수 없다.

- 이러한 뜻에서 그동안 일부 보도와 일부 구전을 통해 그릇되게 사태의 진상과 경위를 규명하고 여기에서 파생된 엄청난 국가적 손실을 통하여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다짐하려한다.


2. 사태 경위

가. 군과 데모 군중과의 충돌 진상

- 5월 18일 오전 10시경 광주 시내 중심가로 불법 진출한 전남대생 2백여명의 시위 행렬은 계엄 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점차 격렬화, 오후 2시경에는 1천여명으로 늘어나 경찰과 투석전으로 대치하면서 경찰 지프에 방화하는 등 도저히 경찰력으로서는 저지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 이에 계엄당국은 부득이 오후 5시 40분경 군병력을 투입하여 강력저지에 나섰으며, 이때의 시위군중은 대부분 학생들었는 자, 저지에 나선 젊은 군인에게 학생들은 투석과 폭행으로 대항하였고 주변 건물의 일부 시민이 합세하여 군인에게 투석함으로써 상호간 부상자가 발행하자, 다같이 혈기왕성한 젊은 군인과 학생들은 감정 폭발, 욕설과 고함으로 대항하기에 이르렀으며, 이러한 소란 중에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보이는 유언비어로써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의 씨를 말리러 왔다” “경상도 군인만 골라서 왔다”는 등 냉철한 이성으로써는 상상할 수 없는 지역감정을 촉발 선동하는 말들이 삽시간에 전 광주시내에 퍼져, 시민을 흥분시키고 시위 양상을 극렬화하게 되었던 것이다.

- 이러한 근거없는 유언비어는 젊은 군인이 격렬한 고란의 와중에서 저지 임무를 수행하게 되니 자연 시위 학생을 군중 면전에서 제지 연행하지 않을 수 없고, 학생에게 얻어 맞으면서 다소 과격하게 다루거나 도피하는 학생을 추적하여 잡는 과정에서 기물이 파손될 수 있는 상황에 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시위 군중과 시민들을 고의적으로 자극 흥분시키려는 목적 하에 조작, 유포시킨 것으로서 이는 우리 내부의 분열과 혼란을 극대화시키려는 고첩과 불순분자들의 계획적 소행이었다.

나. 진입시까지의 난동 경과

- 19일에도 유언비어는 시내에 더욱 퍼져 이성과 냉철을 상실한 군중심리가 광주시내를 휩쓸게 되었고 흥분한 일부 군중이 극렬한 시위를 감행하면서 화염병으로 파출소를 방화하는가 하면, 차량도 방화·파괴하였으며 유언비어도 더욱 감정을 자극하는 내용이 시시각각으로 조작되어 유포되었다. 20일에는 흥분한 군중 1만명이 시위하면서 엠비시 방송국을 방화, 시청 파괴, 도청앞 저지경찰관 4명을 차로 압사하는가하면 시내 수개 파출소를 파괴하면서 철야 시위를 계속하였다.

- 21일에는 광주 세무서를 방화, 전소케하면서 평소의 원념을 발산하여 난동으로 시비에스 방송국과 차량을 탈취, 방화하였고 방산업체인 아세아 자동차 공장을 습격, 군에 납품할 장갑차를 비롯한 군용 차량과 민수용 차량 2백여대를 탈취하여 나주, 화순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티엔티 폭약, 총기를 닥치는대로 약탈, 완전히 무장 폭도화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 특히 이날 무장폭도들은 간첩 및 좌익인 170여명이 내포된 2천7백 여명의 복역죄수가 수용되어 있는 광주교도소를 5차에 걸쳐 습격하여, 이들을 탈소시켜서 폭도에 가담시키기 위해 교도소를 지키고 있는 계엄군과 고전, 양측에 사상자를 내게하는 폭거를 자행하였으며, 시내를 무법천지의 공포 도시로 화하였다. 더우기 시민의 봉기를 선동하는 가두 방송외에도 용의주도하게 만들어진 전단과 심지어는 지하신문(18일~26일간 9호까지 발행)까지 발행하면서 계엄군 섬멸을 구호로 외치는 외에 연행된 김대중 석방을 요구, 주장하였다. 또한 공교롭게도 이날 신현확 전 국무총리 사임과 전 각료 사퇴를 계기로 “우리들의 항쟁으로 신총리 이하 전 각료가 굴복, 퇴진하였다.” “최대통령은 곧 하야하게 되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면서 폭도들을 고무하였고 시민들을 현혹시킨 바 있다.

- 군은 무장폭도들과 충돌로 무고한 시민의 생명과 재산에 손상을 입히는 불행한 결과를 회피하기위해 21일밤 외곽지대로 철수, 시내와 외부와의 교류를 차단-봉쇄하는 한편, 여타 지역에서의 난동을 진압하는데 주력하였으며, 계엄군에게 일체 발포치않도록 엄중히 시달, 최소한의 자위권 발동마저도 자체하였던 것이다.

- 22일 광주시는 무장폭도들의 지배하에 완전히 장악되어 치안 부재의 무법천지가 계속되는 가운데 도청앞 광장에서 사체를 진열한 폭도들이 합동 장례식을 거행한다는 명목 하에 시민들 동원 진풍들이 벌어졌고, 약탈행위는 극에 달하였는데, 이를 바라보는 시민들이 냉정을 회복하기 시작, 점차 이탈하는 기색이 늘어났으며, 폭도들은 불량배와 특정 정치 목적을 가진 불순분자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학생은 30%정도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장폭도들의 난동은 극렬화된 채 시내 전역을 공포 분위기로 몰아 넣었던 것이다.

- 23일에 이르러 일부 지방 유지와 온건파 학생들이 사태의 수습의 필요성을 내세워 수습위원회를 구성, 무기의 회수와 당국과의 협의를 통한 사태 수습을 모색하였으며 강경파인 불순 배후 조종분자와의 대립으로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도리어 일부 회수된 무기를 강경파 분자들에게 탈취당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희생자 시체를 진열하고 분향을 구실로 시민 집결을 유도하였다. 특히 이날 온건파 수습위원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현지 계엄분소를 방문하였는데 이들은 수습위원회의 명분을 세우기 위하여 구속자 석방과 책임 면제, 사망자 보상을 요구하기도 하였으며, 한편으로 강경파 폭도들은 광주에서의 봉기에 호응하여 전국 각지에서도 소요 사태가 일어나고 외국 우방이 자신들을 지원하기로 되었다는 유언비어를 시내에 퍼뜨리기도 하였다.

- 24일 폭도들은 시민의 호응과 집결을 유도하기 위해 위령제를 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1만5천명이 모인 가운데 궐기대회를 열었고, 특정인의 화형식을 가진뒤 위령제를 연기 조처하였는데 한편에서는 수습위원회가 강·온건파로 갈린 채 각기 수습을 둘러 싼 대결상을 보이면서 난동은 그대로 지속되었다.

- 25일에도 수습위원회 활동이 강·온 양파로 갈린 채 각각 별도의 행동을 보여 아무런 진전을 이루지 못하는 가운데 강경파에 의한 시민궐기대회가 시민 5만명 참가 아래 열려 “김대중 석방”, “계엄철폐” 등을 요구하는 결의를 하였고 시가 행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반시민들의 호응도가 더욱 줄어들자 폭도들이 “계엄군은 못들어온다. 5일간만 견디면 된다”고 선동하면서 “대세가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시민들은 우리 시민군에 가담하여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자”고 충동하였다.

- 특히 계엄군이 진입, 진압하기 전날인 26일에는 강경파 폭도들은 도청내의 지휘본부에서 계엄군이 일부 차단지역에서 점차 압축해 들어가자, 무장 폭도들을 신속하게 기동배치하는 조직적 지휘와 기동성까지 발휘하였으며, 계엄군이 약속을 위반, 무력 진주하려하니 시민들은 궐기, 대항하자. 고 선동을 계속하여 이날 오후 3시경 5천명이 다시 궐기대회와 시위 행진을 감행했던 것이다.

- 이상과 같은 9일간의 광주폭동사태의 경위와 진상을 살펴볼때 비록 발단을 계엄군과 전남대학생들의 충돌에서 일어났다고는 하나 조직적이고 치밀한 배후 조종과 교묘한 난동을 통해서 광주 지역 시민들의 지역감정을 촉발, 흥분시킴으로써 걷잡을 수 없는 군중심리의 폭발로 유도하여 사태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 넣은데에는 첫째, 북괴의 고첩과 이에 협력하는 불순분자들이 책동 흔적이 있는 바 전남 해안으로 상륙 침투하여 광주일원에서 활동타가 서울로 잠입, 공작 임무를 확산시키려다 23일 검거된 남파간첩 이창용의 그간의 필답필문에 의한 진술과 당국에 포착된 몇가지 징후가 일치 실증되었으며,

둘째, 불순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학생 소요 사태를 배후 조정해 온 김대중이 광주시의 전남대와 조선대 내 추종학생(주로 복학생 중심)들을 조종 선동하여 온 것이 소요사태의 발단이 되었고 사태의 악화와 폭동의 과정에서 광주시내 골수 추종분자들이 단계적이며 조직적으로 이를 격화시킨 사실이 수사 과정에서 계속 판명되고 있는 것이다.

다. 주요 배후 주동 분자와 활동

- 5월 17일 24시를 기하여 계엄령의 전국 확대가 선포된 직후 4월 중순경부터 김대중을 면담하여 김대중 저 “민족혼” “한신대, 동국대 연설집”을 전달받으면서 이른바 민주화 시위를 일으키도록 조종 받은 정동년(37. 전남대 화학4)등 복학생들은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을 사주하여 각 단과대학생회장들과 약속된 사전 계획에 따라 휴고령 발동 다음날인 5월 18일 09시 30분 학생 2백여명이 책가방 속에 돌을 넣어 위장하고 전남대 정문에 모여 계엄군에 투석전을 전개한 후 광주시 중심가로 이동, 시민호흥을 유도하였고,

-조선대 김인원(법 4)은 4월 15일 동료 학생19명과 함께 김대중을 면담하고 광주에 내려온 후 이우정(국문 4)으로 하여금 민투위 위원 12명과 함께 시위를 적극 전개토록 사주하여 5월13일 전남대생 가두시위에 합류하였으며,

- 김대중 측근으로서는 10.16이후 6회에 걸쳐 상경 접촉한 바 있는 홍남순(변호사)은 조선대 김운기(경영 2)에게 4월 하순 “김대중 사건 범행자 리스트”라는 불순 유인물 50여장을 입수 조선대 교정에 살포케하는 등 학생시위를 조종하였고, 폭도들이 도청을 점거하자 5월 23일~26일간 시민 수습 대책 위원이라는 구실로 도청에 출입, 김신근 목사 등 강경파 위원들과 함께 투쟁비 명목으로 1백만원을 지원하면서 “우리의 주장이 관철될때까지 절대로 무기를 반납치말라. 5일만 더 투쟁하면 승리할 것이다. 정치적 문제까지 요구하라”는 등 폭도들을 조종 격려하였다.

- 조선대생 김종배(27. 무역 3)는 5.13 전남도청에서 대학생이 폭도를 총지휘해야 한다는 구실하에 5월 21일부터 지휘중인 김원갑(25. 3수생)을 몰아내고 소위 투쟁위원회장에 취임, 투쟁위원장 산하에 행정부위원장(허규정, 조대 공대2) 외무부위원장(정상용, 31. 보성기업 영업과장) 기획부장(김영철, 33.와이 더블유 신협) 상황실장(박남선, 26. 골재운반 운전사), 기동타격대장(윤석루, 24.자개공), 치안부장(김준봉, 21.회사원) 대변인 등 10개 서부장을 임명, 조직적인 장기 투쟁 전개를 확책하였다.

- 이들중 상황실장 박남선은 5월23일 도청으로 들어가 실권을 장악하고 기동타격대장 윤석루와 함께 총기 회수를 극력 반대, 폭도들에게 재무장을 지시하고 계엄군에 응사하되 여의치 않을 경우 도청내에 보관중인 막대한 양의 티엔티와 수류탄을 폭발시켜 옥쇄한다는 방침하에 요구 사항이 관철될때까지 극한 투쟁을 전개할 것을 주장했다.

- 특히 5월 26일 오후 8시경 자칭 예비역 대위라는 33세 가량의 성명 불상자는 광주 와이 더블유 강당에서 도청 기동타격대와는 별도로 폭도 50명으로 기동타격대를 조직, 총기 조작법과 사격술 훈련을 실시한 후 상황실장 박남선과 협조, 다량의 총기와 실탄을 지급하고 10~12명씩 4개조를 편성하여 도청을 중심으로 광주 무등산장 입구, 남광주 역전, 광주고교 앞에 배치계엄군에 대항할 준비를 완료하고 대기중, 계엄군에 의해 검거되었다.


3. 무력 진압의 불가피성

- 광주사태가 무장폭도들에 의해 무법천지화한 단계에서도 군은 끝까지 무익한 자극과 무고한 시민의 피해를 염려하여 최소한의 자위권 발동마저도 자제하였으며 비록 비록 군인이 폭도에서 잡혀 무참히 난자, 학살되는 것을 보면서도 총 한방 쏘지 않고 사태의 악화 방지에 주력하였다.

- 또한 계엄군이 시내에 머물러 있는 것이 유익하지 못하다는 판단 하에 21일 시외곽지로 철수하여 다만 봉쇄에 만전을 기하면서 시민 자체의 수습 노력을 지켜보는 최대한의 인내도 감수하였으며, 21일 박충훈 국무총리서리의 담화와 25일 대통령 각하의 현지 특별담화, 그리고 계엄사령관 담화를 통해 간곡하고 절실하게 자제와 질서 회복을 호소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사태는 악화일로를 거듭하면서 시민 자체의 수습력이 하등의 실효를 거두지 못했을 뿐아니라 폭도들은 시민군을 자처하면서 무등산과 화순 방향 및 외곽 산야지대에 진지를 구축하여 장기 게릴라전 태세를 갖추어가고 있었고 도청내의 거점에서는 엄청난 양의 티엔티 폭약을 장전하고 자폭 태세를 갖추는 등 더이상 폭도들의 기도를 방치할 경우 돌이킬 수 없는 참화가 일어날 것이 예측되기에 이르렀다.

- 이에 계엄군은 26일 밤 시내에 은밀리에 폭도를 가장 침투시켰던 요원과 매수했던 난동분자로 하여금 도청내 폭약 폭발 장치 신관을 빼어 못쓰게 만들고 총기를 작동이 못하도록 공작하는 과정에서 폭도에 들켜 1명 피살, 1명 중상의 귀중한 희생을 치르면서도 끝내 성공시켜 27일 새벽, 군병력을 투입한 기습진압작전에서 쌍방간에 큰 피해를 모면케 하는데 크게 기여 하였으며 선량한 시민과 폭도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음을 확인 한 후 효과적인 진압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4. 피해상황

가. 인명 피해

이번 사태에서 발행된 인명 피해는 민간인 144명, 군인 22명, 경찰 4명의 사망과 민간인 127명과, 군인 109명, 경찰 144명이 부상된 것으로 밝혀졌다.

- 민간인 사상자는 중화기로 무장한 폭도들이 방산업체와 군경으로부터 탈취한 장갑차, 트럭, 지프를 앞세워 5월 20~5월 22일간 5차에 걸쳐 광주 교도소를 습격하였을때 고수 방위중인 계엄군과의 교전으로 사망 28, 부상 70여명이 발생했고, 시내버스, 군·경차량 등을 마구 탈취한 폭도들이 시위를 선동하거나 무기탈취를 위해 이동중 음주 운전 및 과속으로 인한 전복 충돌 등의 교통사고를 일으켜 32명의 사상자가 발생되었음이 검사 결과 밝혀졌는 바, 탈취한 소총, 수류탄 등 무기류 취급 미숙에 의한 15명의 자체 오발 사고와 진압차 투입된 계엄군에 대한 발악적 무력 저항 저지에 따른 17명의 희생, 그리고 폭도 간의 강·온 양파 간에 의한 살인 자행 등에의해 일단 밝혀졌는 바 수사 진전에 따라 사망 원인이 대체로 구분되리라 전망된다. 특히 군·경의 사상 피해가 의외로 279명에 달하고 있는것은 사태가 초기 시위군중들의 냉정을 기대하면서 부여된 최소한의 자위권마저 억제한 결과이다.

나. 물적피해

- 군용물자 - 기간중 폭도들에 의해 치탈된 무기는 군·경 예비군용 중기관총, 경기관총, 자동소총, 엠16, 엠1, 칼빈소총, 권총 등 총 5천4백1정에 달하고 있고, 5월30일 현재 이중 약 80%가 회수되었으며

- 탄약류는 소총탄 28만 9천 5백 43발, 수류탄 5백52개, 티엔티 3천6백 상자를 탈취당했고, 현재 약 70%를 회수했으며,

- 차량은 트럭, 장갑차 등 3백 13대의 각종 차량을 군·경, 방산업체로부터 탈취, 폭동에 사용하였는 바, 이들중 대부분은 파괴되어 사용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 민간 및 공공 재산 피해 - 이번 사태로 야기된 민간 및 공공 재산 피해액은 현재까지 총 2백 69억원 상당으로 추정되며, 금후 정밀 조사를 함에따라 더 늘어간 것이 예상되고 있다.

- 공공재산은 광주세무서 등 8개 건물 소실, 도청 등 13개 건물 일부 파손, 차량 68대 소실 및 파손, 기타 장비 비품 6백50여점 소실 등이며,

- 민간 재산은 엠비시 방송국 등 건물 8동 소실, 광주 카톨릭 센터 43동 파괴, 민간 차량 3백81대, 유류 3천여드럼, 방송시설 파괴 등이다.

- 특히, 방산업체인 아시아 자동차는 군수차량 3백14대, 민수 차량 82대, 기차 18대 등 도합 414대의 각종 차량을 피탈당하는 피해를 있었다.


5. 검거자 현황 - 처리방법

가. 검거자 현황

5월 18일 광주 일원에서 폭력사태가 발생한 이후 동 사태와 관련하여 계엄당국이 현지에서 총 1천 7백 40명을 검거, 조사하여 1천 10명을 기훈방하였고, 5.17이후 검거된 5백 23명을 포함하여 현재 조사중인 자는 7백30명 이른 바, 이들을 거주지별로 보면 전남 686명, 서울 26명, 여타지역 18명으로서 서울 등 외지에서 투입된 흔적이 있으며, 연령은 20세 이하 3백 15명, 20대 10명, 30대 77명, 40대 이상 28명으로서 대부분 6.15를 체험치 못한 연령층이고, 직업별로 보면 고교 및 대학생 153명과(재수생 24명 포함), 무직 126명, 공원 83명, 노동 79명, 운전사 55명, 농업과 상업이 각각 47명, 점원 44명, 회사원 37명 기타 59명으로 판정되었다.

나. 금후 처리방법

이번 광주 폭동 사태에 대한 수사를 진행중인 계엄당국은 선량한 시민·학생들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총기, 탄약, 티엔티, 장갑차 등 인명을 대량 살상할 수 있는 무기를 대량 탈취, 시민군을 자처하면서 이를 직접 사용 했다는 사실과, 계엄군의 투입 저지를 위한 장애물 설치 방법의 기묘성, 도 투쟁위원회 상황실에서 계엄군의 동정이 시시각각 파악 전달된 사실, 그리고 즉각 폭도들의 행동방침 등이 제시되는 등 조직적인 배후조종세력의 존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일부 연행자 가택수사 결과 불온 유인물이 발견되는 한편 지하신문이 발견되었음이 확인되었으며, 사태악화를 촉진하는 유언비어가 신속·적절하게 날조·유포 되었고, 이탈하는 선량한 일반시민을 끌어 들이기 위해 갖은 책동을 다했을뿐만 아니라 폭도들의 만행을 계엄군에 전가하고, 상당수가 5차에 걸쳐 공격했을뿐아니라 교도소 인근에 기관총을 설치, 계속 발사하면서 수용자들을 자극하여 소내 폭동을 유도했던 점 등을 열의 분석, 배후를 철저히 규명할 계획이며, 조사진행에 따라 주동자, 극렬적 악질행위자, 살인범 등 범범자들을 엄격히 선별하여 계엄군법회의에 회부, 계엄중 처단할 계획이며, 일시적인 단순시위 가담자나 부화 뇌동자 등 범법 행위가 경미한 자에 대하여는 과감히 석방함으로써 선량한 시민을 생업에 정진할 수 있도록 관용을 베풀 방침이다.


6. 당부드리는 글

광주사태는 그 발단과 동기가 무엇이었고 시비 곡직이 여하했든 간에 다시는 이와 같은 불행한 사태가 발행하여서는 아니되며 더우기 지역 감정에 연유된 설항 현상이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군이 이번 사태의 와중에서 현지 시민들과의 융화에 다소 문제점이 있었으며, 이에 대한 적절한 조처를 강구중 임을 알려드리고 심심한 유감의 뜻을 다시한번 표하면서 국민 여러분께서는 이번 광주사태의 귀중한 교훈을 반성과 자제의 계기로 삼아 난국을 극복하는데 정진하시기를 당부드리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