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성명서 및 유인물] 광주사태 구속자의 구명과 석방을 위하여/광주사태 구속자 가족 일동 1981.1.
본문
광주사태 구속자의 구명과 석방을 위하여
사형수를 비롯한 모든 광주사태 구속자가 당하고 있는 고통과 그들이 지고 있는 십자가는 온 국민이 져야 할 것이며, 그들이 받아야 할 벌도 이 사회 전체의 것입니다. 죽음의 날을 가다리고 있는 사형수들과 고통을 당하고 있는 구속자들은 구원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차 례>
1. 광주사태 이전의 국내 상황
2. 광주사태 직전 광주의 학생시위
3. 5월 18일 시위의 발단과 공수부대의 만행
4. 시민과 학생의 무장 경위`─계엄군의 무차별 사격
5. 도청 철수 이후의 광주 상황
6. 계엄군에 의한 도청과 시가지 장악
7. 폭도란 과연 누구였는가?
8. 광주사태 이후의 당국의 태도
9. 광주사태 이후의 수사 상황`─고문과 억지 조작 수사
10. 광주사태 이후의 재판과정
11. 구속자에 대한 처우와 구금상태
12. 구명운동의 전개
13. 광주사태 구속자 가족의 입장─광주사태는 끝났는가?
1. 광주사태 이전의 국내 상황
60년대와 70년대를 거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민중과 하나님의 뜻을 묵살한 채 온갖 정치·경제·사회적 모순들을 누적시켜 온 유신정권이 급기야 1979년 10월 부·마 시민시위로 그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집권체제 내의 각료인 김재규의 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저격으로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국내·외의 모든 여론이 하루빨리 계엄을 해제하고 진정한 민의에 의거한 헌법제정과 새 공화국의 출범을 요구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최규하 대통령의 과도정부는 이 여론을 수용할 만한 능력이 없는 약체의 정부였습니다. 결국 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해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 선포되면서 양심적인 민주인사와 학생들이 대량으로 검거, 투옥됨으로써, 암울한 유신독재의 엄동설한을 이기고 이제 바야흐로 피어나기 시작하던 민주와 자유의 꽃봉오리는 무참히 짓밟혀져 버렸습니다.
2. 광주사태 직전 광주의 학생시위
1980년 5월 14일부터 광주시내의 도청앞 광장과 금남로를 중심으로 시작된 학생들의 시위는 5월 16일의 ‘횃불행진’에 이르기까지 시내 파출소의 유리창 한 장도 깨진 일 없고, 경찰들과의 사소한 건의 충돌도 일어나지 않은 질서 있고 평화적인 시위였습니다. 대학생 약 3만 명과 시민 약 2만 명이 함께한 가운데 5월 16일 밤에 막을 내린 이 ‘민주민족화 시국성회’를 끝으로 학생들은 그 동안의 시위를 끝내고 정부당국의 성의 있는 답을 기다리며 수업에 전념할 것을 결의했습니다. 이러한 학생시위는, 시위를 지켜본 한 가지의 표현을 빌자면 “광주의 아크로폴리스”라고 불리웠던 도청 앞 분수대의 꽃 이파리 하나 상하지 않았다”는 정도였습니다.
3. 5월 18일 시위의 발단과 공수부대의 만행
이처럼 시민들의 조용한 호응과 성원 가운데 점차 고조되고 있던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이 5?8조치로 좌절되게 되자, 만일의 휴교조치에 대비하여 시내와 학교 앞에 모이기로 사전 합의한 학생들은 대부분의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이 검거되거나 피신해 버린 상태에서 소규모로 이곳저곳에서 시위를 기도하였습니다. 경찰측에서 최루탄과 경찰봉으로 진압이 실패하게 되자, 18일 오후 3시경 공수부대가 투입되었습니다. 착검한 M16에 방망이로 무장한 공수부대원들의 학생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시위하는 남녀 학생은 물론 일반시민까지도 마구 방망이를 휘둘러 난타하였습니다. 백주의 시내 한복판에서 붙잡힌 학생과 젊은 시민들은 군화발에 짓밟히고 몽둥이에 머리가 깨어지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공수부대원의 굴욕적 진압의 피해를 당해야 했습니다. 반항하는 사람은 M16 대검으로 등과 허벅지 등을 찔렸고, 피 흘리는 학생들은 굴비처럼 엮어져 군인트럭에 실려 갔습니다. 통금이 밤 9시로 단축되자 귀가하는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 회사원, 공장 노동자까지 무조건 두들겨 패고 연행했습니다. 이를 만류하는 시민들까지 개머리판으로 얻어 맞았습니다. 19일, 시내의 표정은 무겁고 가라앉은 상태에서 술렁대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금남로 일대에 이루 셀 수 없는 시민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 날 아침 몇 명 되지 않는 공수부대원들이 어제와 달리 모여드는 학생과 시민을 쫓았습니다. 그들은 데모학생들이 몰려들자 옷을 벗기고 꿇어앉혔고 피 흘리며 쓰러지는 학생을 계속 구타하였습니다. 칼로 옆구리가 찔린 학생과 등에 X자가 그어 있는 시체가 추후 확인되었습니다. 오후엔 가택수색을 하여 학생들을 붙잡아 갔고, 얻어 맞아 택시에 실려 가는 학생까지 차에서 끌어내려졌으며 운전사들까지도 두들겨 패고 대검으로 난자하였습니다. 칼에 옆구리가 찔린 학생과 등에 X자가 그어 있는 시체가 추후 확인되었습니다. 이때 체포된 숫자가 9백27명이라고 계엄사는 발표했습니다.(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광주사태에 대한 진상」참조).
4. 시민과 학생의 무장 경위-계엄군이 무차별 사격
18일~19일의 공수부대의 만행을 본 시민들은 각 병원 응급실, 시체실로 가족을 찾아 나서게 되었고 또 시위에 가담하게 되어, 20일 약 20만 명으로 불어난 시민들의 함성과 분노와 슬픔이 온 시가를 뒤덮은 가운데 시내버스·택시 운전사들이 계엄군의 퇴진을 요구하며 차를 몰아 도청을 향해서 돌진했다가 밀려나기도 했습니다. 21일 0시경 신역 부근에서 시민들은 대검에 눈이 찔린 채 잔혹하게 죽어 있는 시체를 발견하고, 당시 까지 계엄사가 발표한 사상자는 없다는 내용이 허구임을 증명하고자 7시경 도청 앞 계엄군 앞에 갖다 놓았습니다. 분노한 시민들의 수는 더욱 늘어갔으나 조용하게 계엄군이 물러가기를 바라면서 기다리고 있는 시민들에게 13시 50분경 연이은 총성과 함께 시민들이 쓰러져 갔습니다. 심지어 계엄군은 대공사격용 기관총을 무차별하게 휘둘러 대서 목이 달아나 버린 시체, 허리가 반으로 잘려져 버린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기막힌 분노와 보상될 수 없는 억울함으로 울부짖던 시민들은 마침내 파출소와 예비군 무기고에서 무기와 총탄을 꺼내고 화순탄광에서 가져온 TNT를 이용하여 대치하였습니다.결국 계엄군은 외곽으로 퇴각했으며 이 때에도 많은 사상자의 피로 거리가 물들여졌습니다.
마침내 시민들에 의해 도청에 검거되었습니다.
5. 도청 철수 이후의 광주 상황
시민·학생은 스스로 시내 치안유지를 위한 조직을 구성하였습니다. 질서 있게 시민궐기대회를 가지며 “계엄철폐, 전두환 퇴진, 민주인사 석방, 구속자 석방”의 구호를 외쳤습니다. 종교계·법조계·학생·언론계의 대표로 수습위원회가 구성되었습니다. 수습위원회는 유혈을 막기 위해 계엄군의 ‘시내진입 포기’의 약속을 받고 무기회수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광주에 내려와서 상공을 헬기로 정찰한 박 총리는 일방적인 특별담화문을 발표하여 시민을 경악케 했습니다. 수습위원회 활동으로 상당수 총기와 실탄이 회수되었습니다. 근본적인 수습을 위해 최 대통령이 광주사태의 잘못을 인정, 국민 앞에 사과하고 보상과 추후의 정치보복을 하지 않을 것을 결정했습니다. 이 사이 계엄군이 시내진주를 기도하자 수습위원들은 비폭력의 죽음으로 항거하자고 하여 탱크 앞까지 죽음의 행진을 했습니다. 계엄군이 다시 퇴진, 수습위원과 계엄군이 다시 회동했습니다. 수습 대변인이 대통령 면담을 위해 서울로 떠났습니다.
6. 계엄군에 의한 도청과 시가지 장악
유혈을 우려한 수습위원의 노고는 무시된 채 27일 새벽 2시, 피를 부르면서 계엄군은 섬광탄과 비행기·헬리콥터·탱크 등을 동원, 온 시가지를 공포 분위기로 몰아 넣으며 도청을 장악했습니다. 계엄사는 이 날 진입에 17명의 사망자가 있을 뿐이라고 하나, 섬광탄에 희생되고 총상에 사망한 수는 새벽녘이므로 알 길이 없습니다. 저항하는 무장시민을 가차없이 사살하면서 시가지를 장학한 계엄군은 마치 적진을 탈환한 것 같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고 『아사히 신문』은 전했습니다.(전국사제단, 「광주사태에 대한 진상」참조).
7. 폭도란 과연 누구였는가?
많은 총기가 탈취되었는데도 시내 곳곳의 은행과 새마을금고, 신용금고 등은 한 곳도 털리지 않았고, 남녀 학생은 치안대를 조직, 은행과 쌀창고를 지켰으며, 생필품과 식량이 전연 공급되지 않은 가운데서도 매점매석과 폭리행위가 없었습니다. 헌혈하는 시민들의 수가 너무 많아서 헌혈한 피가 6월까지 남아돌았습니다. 시민 부녀자들은 데모군중에게 음식과 약품을 제공했고, 계엄군에게도 공평하게 미움을 잊은 채 먹을 것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의사·간호원은 총격과 보복의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를 운반, 간호했으며, 세칭 부랑아와 양아치, 접대부 아가씨들은 누구보다 선량하고 궂은 일을 도맡아 하였습니다. 그들은 페인트 칠해진 시체를 거두어 씻고 부상자 간호 등 적극적인 구호활동을 하였습니다.
아아! 어찌 이들을 잊을 수 있으랴! 그러나 군부대로 연행된 시민들은 마치 전쟁터의 포로보다도 더 지독한 대우를 받았으니 개돼지보다 조금도 나을 바가 없었습니다. 공수부대는 심지어 임신 7개월의 임산부(전남고등학교 영어교사 부인)에게도 무차별하게 난사해서 이마를 맞고 24살의 그녀는 죽고 말았습니다. (전국사제단, 「광주사제단, 「광주사태에 대한 진상」참조).
8. 광주사태 이후의 당국의 태도
지난 광주사태 기간 중 광주는 국내여론과 세계여론의 관심의 초점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광주사태 이후의 수사과정과 재판과정에 대해선 정부측의 철저한 보도통제로 말미암아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구속자 가족들은 구속자에 대한 옥바라지와 생활고통으로 온갖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누구도 이런 어려움을 알 수 없고 알아주려고도 하지 않는 상황에서 퍽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또한 당국은 사망자 가족과 광주시민들이 그토록 염원하였던 ‘합동위령제’마저도 못하게 하였습니다.
9. 광주사태 이후의 수사 상황─고문과 억지 조작 수사
수천 명의 연행자들은 인간취급은 그만두고라도 소·개·돼지 취급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수사를 받았으니 수사관들의 악독한 고문으로 기절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였으며, 박남선(시민), 김종배(학생), 박미숙(여대생)등은 갈비뼈가 부러지고 어깨뼈가 부서지고 이빨이 부러졌고, 박용성(전대 국문과)등은 허리를 다쳐 불구가 되고 심지어 정신이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수사 도중에 대침으로 손톱 밑을 쑤시고(박남선), 매달아 놓고, 고추가루를 코와 입에 쏟아 넣는 등 마치 일제시대의 고등계 형사들이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던 방법을 그대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수사관들은 위에서 지시받은 대로 수사내용을 조작하기 위하여 상기한 것과 같은 야만적이고 무모한 수사방법을 최종으로 남은 6백여 명의 전 구속자에게 거의 예외 없이 행하였고, 광주사태의 책임을 소위 몇 사람의 주모자와 학생·시민에게 전가시키기 위해서 어처구니없이 날조된 사실을 강요하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였습니다. 김대중 콤플렉스에 걸린 것처럼 수사관들은 무식하게도 모든 구속자들을 김대중과 연결 지으려고 갖은 노력을 하였으며, 구속자들에게 “김대중씨를 존경하느냐?” “그가 대통령이 되기를 원했느냐?” “그가 대통령이 되면 네게 무엇을 시켜 준다고 하더냐?”등등의 질문을 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조서를 꾸미려고 획책했던 것입니다.
신문지상에 전대와 조대의 시위자금으로 김대중씨로부터 5백만원을 받았다고 발표된 사형수 정동년씨와 경우는 다음과 같습니다. 정씨는 돈 받은 사실이 없음을 주장했으며, 정씨가 그 돈을 받으러 서울에 간 5월 5일과 학생들에게 돈을 전달했다는 시각에 정씨는 학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학원 업무일지가 수사관들의 손에 있었으나 그들은 이것을 고의로 묵살해 버렸습니다. (정동년의 최후진술에서). 정씨의 이러한 주장과 이것을 밑받침하는 분명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는 돈 받은 사실을 인정할 때까지 고문을 당한 끝에 정씨가 “그럼 내가 10만원을 받았다고 하자”고 하니, 수사관은 “그것은 너무 적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정씨가 “그럼 1천만원을 받은 걸로 하자”고 말하니, 수사관은 “그 동안 1천만원을 다 사용할 수는 없으니 5백만원으로 해”라고 하여 받지도 않은 돈의 금액이 결정되어 버렸습니다. 다음에 그 돈 5백만원을 누구에게 전해 주었는가가 다시 문제가 되자, 정씨는 자신으로 인해 억지 조작 수사가 이루어져 또 무고한 사람이 다치게 될 것을 염려한 나머지 스스로 자결을 결심하여 자신의 팔목 동맥을 포크로 끊고 할복을 기도했다가 국군통합병원에 후송되었습니다. 이 5백만원은 수사상에서 처음에는 김운기(조대 복적생), 김상윤(전남대 복적생)에게 분배되어 양 대학의 시위자금에 쓰여졌다고 조작되었다가, 나중에 전남대 학생처장 김태진 교수(2심에서 무죄)에게서 당시 전남대학교 학생회비의 상세한 지출내역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이 돈을 자신들이 의도하던 대로 양 대학생의 시위자금으로 끼워 넣을 수 없게 된 수상당국은, 이 돈 전부가 유흥비(술값)로 사용되었다고 억지 조작을 하였습니다. 이 조작 내용을 부인하지 못하게 가재판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재판이란 원래 방청인과 판사, 그리고 검찰이 참석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정식재판이 있기 전 사전재판의 형식으로 가재판이라는 재판사상 유례가 없는 방법을 사용하여, 구속자들이 고문으로 강요된 진술을 재판정에서 뒤엎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수사관과 검찰, 법무사만 있는 자리에서 정동년, 김상윤, 김운기 등에게 협박하여 억지로 강요된 선서를 하게 하여 녹음까지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김대중의 지시로 광주사태를 일으켰다는 돈 5백만원의 내력입니다. 또한 광주경찰서 정보과 형사 정영채를 비롯한 직원과 당사 부지사였던 정시채, 당시 부시장 정채균 등의 간곡한 부탁으로 광주사태수습대책위원에 관계한 변호사 홍남순(68세, 1심에서 무기, 2심에서 15년)경우를 보면, 홍 변호사는 48일 동안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수사를 받았으며 그의 처와 셋째아들이 인질로 감금되었고, 그의 사무소 사무장 정광진씨까지 구속하여 68일만에 석방하였으며, 그의 큰아들, 처남, 이질녀까지 연행하여 그에게 모진 심적 고문을 가하여서 김대중씨로부터 2천만원을 받아 전대, 조대 양 대학에 자금을 주어 시위를 하게끔 획책하였다는 진술을 강요했습니다.(최후진술에서). 이상의 두 경우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며 구속자가 있는 가족들은 모두 당국으로부터 이런 수모를 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10. 광주사태 이후의 재판과정
재판과정에서는 구속자들이 신청한 명백한 증거들이 거의 채택되지 않았으며, 또한 신청한 증인도 사전에 수사당국에서 불러 온갖 협박을 가하고 조작을 해서 오히려 증인을 신청한 구속자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게끔 둔갑시켜 버렸습니다. 또 재판날짜를 가족에 통보조차 해주지 않아서 재판과정에서 참석치 못한 가족들이 많았으며, 국내·외 기자들은 한 사람도 방청할 수 없었습니다. 변호사마저도 사선변호사를 가족들이 지명을 했으나 변론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서 많은 변호사들이 변론을 거절하였고, 국선변호사에겐 재판 5분 전에야 통보를 해서 변호사가 변호해야 할 사람이 누군지, 변론내용이 무엇인지조차도 모르고 재판정에 서게 했습니다. 이처럼 졸속 처리된 1980년 10월 1심재판을 통해 약 2백여명이 남게 되었고, 이 중에는 사형수 5명, 무기수 7명, 10년 이상이 수십 명이 되었습니다.1980년 12월 2심재판을 통해 약 1백여 명이 남아서 사형수 3명(정동년, 배용주, 박노정), 무기 7명, 10년 이상이 여러명으로 확정되었습니다. 그 중 방위병 몇 사람은 1심에서 형이 확정되어 2심은 구경만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11. 구속자들에 대한 처우와 구금상태
그래서 지금 광주교도소를 비롯한 전남도내 교도소 및 서울 성동구치소 등지에 약 1백명이 구속되어 있습니다. 처음 군부대(상무대)에서는 구속자들에 대해 일체의 면회가 금지되었으며 영치금 사용, 생필품의 차입마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보통군법회의가 끝나고 교도소에 옮겨 와서 구속자들의 수차례의 단식투쟁과 징벌의 과정을 거친 후 겨우 면회가 허가되었고, 영치금 사용, 물품차입이 단계적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수감된 지 물경 6개월 만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교도소에서도 구속자들은 처우개선을 위한 투쟁과정에서 전남 가농 회장 서경원씨와 기독교장로회 청년회 전국회장 안철 등이 보안과에 끌려가 무수히 얻어 맞아 기절을 하기도 했습니다. 모든 구속자들은 식사기간마다 사형수를 위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경건하고 절도 있는 생활로 구속생활의 어려움을 이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12. 구명운동의 전개
광주사태 이후 광주는 학생들의 계속된 연행으로 인한 공포 분위기와 수많은 민주인사들의 손발이 묶임으로써 일체의 구명운동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뜻있는 성직자(목사, 신부)와 가족들이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13. 광주사태 구속자 가족의 입장─광주사태는 끝났는가?
지금 정부는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계엄을 해제했으며, 또한 새 시대를 맞이하여 국민적 화해를 위해 지난해 7월 이전에 징계 처리된 공무원 10만 명에 대해서도 사면조치를 하면서, 광주사태로 인한 구속자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구속자 가족들은 국내와 국외 여론의 관심이 아직도 끊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것은 이 나라의 양심인들에게 퍼부어지는 세계여론과 하나님의 격려라고 믿습니다. 가족들은 어려운 상황이 닥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거나 불안해 하지만은 않습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역사 가운데서 살아 움직이는 민중과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광주사태 구속자들의 재판과정에 임하는 떳떳한 자세를 통해서 온몸으로 배웠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은 단지 가족이라는 입장을 떠나서 광주시민으로서, 더 나아가 하나님 앞에 떳떳이 설 수 있는 수많은 억눌린 이 땅의 백성들 중의 하나로서 지금 구속되어 있는 사람들의 무죄함을 굳게 믿습니다.
광주사태는 결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총으로 쏘고 비행기와 탱크를 동원하는 사태는 끝이 났을지라도 진정한 양심과 정의가 살아 있는 양심의 공화국, 정의의 공화국이 세워지지 않는 한 양심과 정의, 자유와 민주가 제도와 권력의 폭압 밑에서 공공연하게 살해당하고 있는 한 광주사태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억울한 죽음은 그것이 원인이 되어 언젠가는 역사가 뒤바뀌어 지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나타날 것임을 믿으며, 구속자 가족들은 세계여론이 광주사태 구속자들의 구명과 석방운동에 적극 성원해 주길 바랍니다. 광주사태 구속자는 죄가 없습니다.!
1981년 1월
광주사태 구속자 가족 일동
사형수를 비롯한 모든 광주사태 구속자가 당하고 있는 고통과 그들이 지고 있는 십자가는 온 국민이 져야 할 것이며, 그들이 받아야 할 벌도 이 사회 전체의 것입니다. 죽음의 날을 가다리고 있는 사형수들과 고통을 당하고 있는 구속자들은 구원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차 례>
1. 광주사태 이전의 국내 상황
2. 광주사태 직전 광주의 학생시위
3. 5월 18일 시위의 발단과 공수부대의 만행
4. 시민과 학생의 무장 경위`─계엄군의 무차별 사격
5. 도청 철수 이후의 광주 상황
6. 계엄군에 의한 도청과 시가지 장악
7. 폭도란 과연 누구였는가?
8. 광주사태 이후의 당국의 태도
9. 광주사태 이후의 수사 상황`─고문과 억지 조작 수사
10. 광주사태 이후의 재판과정
11. 구속자에 대한 처우와 구금상태
12. 구명운동의 전개
13. 광주사태 구속자 가족의 입장─광주사태는 끝났는가?
1. 광주사태 이전의 국내 상황
60년대와 70년대를 거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민중과 하나님의 뜻을 묵살한 채 온갖 정치·경제·사회적 모순들을 누적시켜 온 유신정권이 급기야 1979년 10월 부·마 시민시위로 그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집권체제 내의 각료인 김재규의 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저격으로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국내·외의 모든 여론이 하루빨리 계엄을 해제하고 진정한 민의에 의거한 헌법제정과 새 공화국의 출범을 요구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최규하 대통령의 과도정부는 이 여론을 수용할 만한 능력이 없는 약체의 정부였습니다. 결국 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해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 선포되면서 양심적인 민주인사와 학생들이 대량으로 검거, 투옥됨으로써, 암울한 유신독재의 엄동설한을 이기고 이제 바야흐로 피어나기 시작하던 민주와 자유의 꽃봉오리는 무참히 짓밟혀져 버렸습니다.
2. 광주사태 직전 광주의 학생시위
1980년 5월 14일부터 광주시내의 도청앞 광장과 금남로를 중심으로 시작된 학생들의 시위는 5월 16일의 ‘횃불행진’에 이르기까지 시내 파출소의 유리창 한 장도 깨진 일 없고, 경찰들과의 사소한 건의 충돌도 일어나지 않은 질서 있고 평화적인 시위였습니다. 대학생 약 3만 명과 시민 약 2만 명이 함께한 가운데 5월 16일 밤에 막을 내린 이 ‘민주민족화 시국성회’를 끝으로 학생들은 그 동안의 시위를 끝내고 정부당국의 성의 있는 답을 기다리며 수업에 전념할 것을 결의했습니다. 이러한 학생시위는, 시위를 지켜본 한 가지의 표현을 빌자면 “광주의 아크로폴리스”라고 불리웠던 도청 앞 분수대의 꽃 이파리 하나 상하지 않았다”는 정도였습니다.
3. 5월 18일 시위의 발단과 공수부대의 만행
이처럼 시민들의 조용한 호응과 성원 가운데 점차 고조되고 있던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이 5?8조치로 좌절되게 되자, 만일의 휴교조치에 대비하여 시내와 학교 앞에 모이기로 사전 합의한 학생들은 대부분의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이 검거되거나 피신해 버린 상태에서 소규모로 이곳저곳에서 시위를 기도하였습니다. 경찰측에서 최루탄과 경찰봉으로 진압이 실패하게 되자, 18일 오후 3시경 공수부대가 투입되었습니다. 착검한 M16에 방망이로 무장한 공수부대원들의 학생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시위하는 남녀 학생은 물론 일반시민까지도 마구 방망이를 휘둘러 난타하였습니다. 백주의 시내 한복판에서 붙잡힌 학생과 젊은 시민들은 군화발에 짓밟히고 몽둥이에 머리가 깨어지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공수부대원의 굴욕적 진압의 피해를 당해야 했습니다. 반항하는 사람은 M16 대검으로 등과 허벅지 등을 찔렸고, 피 흘리는 학생들은 굴비처럼 엮어져 군인트럭에 실려 갔습니다. 통금이 밤 9시로 단축되자 귀가하는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 회사원, 공장 노동자까지 무조건 두들겨 패고 연행했습니다. 이를 만류하는 시민들까지 개머리판으로 얻어 맞았습니다. 19일, 시내의 표정은 무겁고 가라앉은 상태에서 술렁대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금남로 일대에 이루 셀 수 없는 시민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 날 아침 몇 명 되지 않는 공수부대원들이 어제와 달리 모여드는 학생과 시민을 쫓았습니다. 그들은 데모학생들이 몰려들자 옷을 벗기고 꿇어앉혔고 피 흘리며 쓰러지는 학생을 계속 구타하였습니다. 칼로 옆구리가 찔린 학생과 등에 X자가 그어 있는 시체가 추후 확인되었습니다. 오후엔 가택수색을 하여 학생들을 붙잡아 갔고, 얻어 맞아 택시에 실려 가는 학생까지 차에서 끌어내려졌으며 운전사들까지도 두들겨 패고 대검으로 난자하였습니다. 칼에 옆구리가 찔린 학생과 등에 X자가 그어 있는 시체가 추후 확인되었습니다. 이때 체포된 숫자가 9백27명이라고 계엄사는 발표했습니다.(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광주사태에 대한 진상」참조).
4. 시민과 학생의 무장 경위-계엄군이 무차별 사격
18일~19일의 공수부대의 만행을 본 시민들은 각 병원 응급실, 시체실로 가족을 찾아 나서게 되었고 또 시위에 가담하게 되어, 20일 약 20만 명으로 불어난 시민들의 함성과 분노와 슬픔이 온 시가를 뒤덮은 가운데 시내버스·택시 운전사들이 계엄군의 퇴진을 요구하며 차를 몰아 도청을 향해서 돌진했다가 밀려나기도 했습니다. 21일 0시경 신역 부근에서 시민들은 대검에 눈이 찔린 채 잔혹하게 죽어 있는 시체를 발견하고, 당시 까지 계엄사가 발표한 사상자는 없다는 내용이 허구임을 증명하고자 7시경 도청 앞 계엄군 앞에 갖다 놓았습니다. 분노한 시민들의 수는 더욱 늘어갔으나 조용하게 계엄군이 물러가기를 바라면서 기다리고 있는 시민들에게 13시 50분경 연이은 총성과 함께 시민들이 쓰러져 갔습니다. 심지어 계엄군은 대공사격용 기관총을 무차별하게 휘둘러 대서 목이 달아나 버린 시체, 허리가 반으로 잘려져 버린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기막힌 분노와 보상될 수 없는 억울함으로 울부짖던 시민들은 마침내 파출소와 예비군 무기고에서 무기와 총탄을 꺼내고 화순탄광에서 가져온 TNT를 이용하여 대치하였습니다.결국 계엄군은 외곽으로 퇴각했으며 이 때에도 많은 사상자의 피로 거리가 물들여졌습니다.
마침내 시민들에 의해 도청에 검거되었습니다.
5. 도청 철수 이후의 광주 상황
시민·학생은 스스로 시내 치안유지를 위한 조직을 구성하였습니다. 질서 있게 시민궐기대회를 가지며 “계엄철폐, 전두환 퇴진, 민주인사 석방, 구속자 석방”의 구호를 외쳤습니다. 종교계·법조계·학생·언론계의 대표로 수습위원회가 구성되었습니다. 수습위원회는 유혈을 막기 위해 계엄군의 ‘시내진입 포기’의 약속을 받고 무기회수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광주에 내려와서 상공을 헬기로 정찰한 박 총리는 일방적인 특별담화문을 발표하여 시민을 경악케 했습니다. 수습위원회 활동으로 상당수 총기와 실탄이 회수되었습니다. 근본적인 수습을 위해 최 대통령이 광주사태의 잘못을 인정, 국민 앞에 사과하고 보상과 추후의 정치보복을 하지 않을 것을 결정했습니다. 이 사이 계엄군이 시내진주를 기도하자 수습위원들은 비폭력의 죽음으로 항거하자고 하여 탱크 앞까지 죽음의 행진을 했습니다. 계엄군이 다시 퇴진, 수습위원과 계엄군이 다시 회동했습니다. 수습 대변인이 대통령 면담을 위해 서울로 떠났습니다.
6. 계엄군에 의한 도청과 시가지 장악
유혈을 우려한 수습위원의 노고는 무시된 채 27일 새벽 2시, 피를 부르면서 계엄군은 섬광탄과 비행기·헬리콥터·탱크 등을 동원, 온 시가지를 공포 분위기로 몰아 넣으며 도청을 장악했습니다. 계엄사는 이 날 진입에 17명의 사망자가 있을 뿐이라고 하나, 섬광탄에 희생되고 총상에 사망한 수는 새벽녘이므로 알 길이 없습니다. 저항하는 무장시민을 가차없이 사살하면서 시가지를 장학한 계엄군은 마치 적진을 탈환한 것 같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고 『아사히 신문』은 전했습니다.(전국사제단, 「광주사태에 대한 진상」참조).
7. 폭도란 과연 누구였는가?
많은 총기가 탈취되었는데도 시내 곳곳의 은행과 새마을금고, 신용금고 등은 한 곳도 털리지 않았고, 남녀 학생은 치안대를 조직, 은행과 쌀창고를 지켰으며, 생필품과 식량이 전연 공급되지 않은 가운데서도 매점매석과 폭리행위가 없었습니다. 헌혈하는 시민들의 수가 너무 많아서 헌혈한 피가 6월까지 남아돌았습니다. 시민 부녀자들은 데모군중에게 음식과 약품을 제공했고, 계엄군에게도 공평하게 미움을 잊은 채 먹을 것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의사·간호원은 총격과 보복의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를 운반, 간호했으며, 세칭 부랑아와 양아치, 접대부 아가씨들은 누구보다 선량하고 궂은 일을 도맡아 하였습니다. 그들은 페인트 칠해진 시체를 거두어 씻고 부상자 간호 등 적극적인 구호활동을 하였습니다.
아아! 어찌 이들을 잊을 수 있으랴! 그러나 군부대로 연행된 시민들은 마치 전쟁터의 포로보다도 더 지독한 대우를 받았으니 개돼지보다 조금도 나을 바가 없었습니다. 공수부대는 심지어 임신 7개월의 임산부(전남고등학교 영어교사 부인)에게도 무차별하게 난사해서 이마를 맞고 24살의 그녀는 죽고 말았습니다. (전국사제단, 「광주사제단, 「광주사태에 대한 진상」참조).
8. 광주사태 이후의 당국의 태도
지난 광주사태 기간 중 광주는 국내여론과 세계여론의 관심의 초점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광주사태 이후의 수사과정과 재판과정에 대해선 정부측의 철저한 보도통제로 말미암아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구속자 가족들은 구속자에 대한 옥바라지와 생활고통으로 온갖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누구도 이런 어려움을 알 수 없고 알아주려고도 하지 않는 상황에서 퍽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또한 당국은 사망자 가족과 광주시민들이 그토록 염원하였던 ‘합동위령제’마저도 못하게 하였습니다.
9. 광주사태 이후의 수사 상황─고문과 억지 조작 수사
수천 명의 연행자들은 인간취급은 그만두고라도 소·개·돼지 취급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수사를 받았으니 수사관들의 악독한 고문으로 기절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였으며, 박남선(시민), 김종배(학생), 박미숙(여대생)등은 갈비뼈가 부러지고 어깨뼈가 부서지고 이빨이 부러졌고, 박용성(전대 국문과)등은 허리를 다쳐 불구가 되고 심지어 정신이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수사 도중에 대침으로 손톱 밑을 쑤시고(박남선), 매달아 놓고, 고추가루를 코와 입에 쏟아 넣는 등 마치 일제시대의 고등계 형사들이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던 방법을 그대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수사관들은 위에서 지시받은 대로 수사내용을 조작하기 위하여 상기한 것과 같은 야만적이고 무모한 수사방법을 최종으로 남은 6백여 명의 전 구속자에게 거의 예외 없이 행하였고, 광주사태의 책임을 소위 몇 사람의 주모자와 학생·시민에게 전가시키기 위해서 어처구니없이 날조된 사실을 강요하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였습니다. 김대중 콤플렉스에 걸린 것처럼 수사관들은 무식하게도 모든 구속자들을 김대중과 연결 지으려고 갖은 노력을 하였으며, 구속자들에게 “김대중씨를 존경하느냐?” “그가 대통령이 되기를 원했느냐?” “그가 대통령이 되면 네게 무엇을 시켜 준다고 하더냐?”등등의 질문을 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조서를 꾸미려고 획책했던 것입니다.
신문지상에 전대와 조대의 시위자금으로 김대중씨로부터 5백만원을 받았다고 발표된 사형수 정동년씨와 경우는 다음과 같습니다. 정씨는 돈 받은 사실이 없음을 주장했으며, 정씨가 그 돈을 받으러 서울에 간 5월 5일과 학생들에게 돈을 전달했다는 시각에 정씨는 학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학원 업무일지가 수사관들의 손에 있었으나 그들은 이것을 고의로 묵살해 버렸습니다. (정동년의 최후진술에서). 정씨의 이러한 주장과 이것을 밑받침하는 분명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는 돈 받은 사실을 인정할 때까지 고문을 당한 끝에 정씨가 “그럼 내가 10만원을 받았다고 하자”고 하니, 수사관은 “그것은 너무 적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정씨가 “그럼 1천만원을 받은 걸로 하자”고 말하니, 수사관은 “그 동안 1천만원을 다 사용할 수는 없으니 5백만원으로 해”라고 하여 받지도 않은 돈의 금액이 결정되어 버렸습니다. 다음에 그 돈 5백만원을 누구에게 전해 주었는가가 다시 문제가 되자, 정씨는 자신으로 인해 억지 조작 수사가 이루어져 또 무고한 사람이 다치게 될 것을 염려한 나머지 스스로 자결을 결심하여 자신의 팔목 동맥을 포크로 끊고 할복을 기도했다가 국군통합병원에 후송되었습니다. 이 5백만원은 수사상에서 처음에는 김운기(조대 복적생), 김상윤(전남대 복적생)에게 분배되어 양 대학의 시위자금에 쓰여졌다고 조작되었다가, 나중에 전남대 학생처장 김태진 교수(2심에서 무죄)에게서 당시 전남대학교 학생회비의 상세한 지출내역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이 돈을 자신들이 의도하던 대로 양 대학생의 시위자금으로 끼워 넣을 수 없게 된 수상당국은, 이 돈 전부가 유흥비(술값)로 사용되었다고 억지 조작을 하였습니다. 이 조작 내용을 부인하지 못하게 가재판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재판이란 원래 방청인과 판사, 그리고 검찰이 참석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정식재판이 있기 전 사전재판의 형식으로 가재판이라는 재판사상 유례가 없는 방법을 사용하여, 구속자들이 고문으로 강요된 진술을 재판정에서 뒤엎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수사관과 검찰, 법무사만 있는 자리에서 정동년, 김상윤, 김운기 등에게 협박하여 억지로 강요된 선서를 하게 하여 녹음까지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김대중의 지시로 광주사태를 일으켰다는 돈 5백만원의 내력입니다. 또한 광주경찰서 정보과 형사 정영채를 비롯한 직원과 당사 부지사였던 정시채, 당시 부시장 정채균 등의 간곡한 부탁으로 광주사태수습대책위원에 관계한 변호사 홍남순(68세, 1심에서 무기, 2심에서 15년)경우를 보면, 홍 변호사는 48일 동안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수사를 받았으며 그의 처와 셋째아들이 인질로 감금되었고, 그의 사무소 사무장 정광진씨까지 구속하여 68일만에 석방하였으며, 그의 큰아들, 처남, 이질녀까지 연행하여 그에게 모진 심적 고문을 가하여서 김대중씨로부터 2천만원을 받아 전대, 조대 양 대학에 자금을 주어 시위를 하게끔 획책하였다는 진술을 강요했습니다.(최후진술에서). 이상의 두 경우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며 구속자가 있는 가족들은 모두 당국으로부터 이런 수모를 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10. 광주사태 이후의 재판과정
재판과정에서는 구속자들이 신청한 명백한 증거들이 거의 채택되지 않았으며, 또한 신청한 증인도 사전에 수사당국에서 불러 온갖 협박을 가하고 조작을 해서 오히려 증인을 신청한 구속자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게끔 둔갑시켜 버렸습니다. 또 재판날짜를 가족에 통보조차 해주지 않아서 재판과정에서 참석치 못한 가족들이 많았으며, 국내·외 기자들은 한 사람도 방청할 수 없었습니다. 변호사마저도 사선변호사를 가족들이 지명을 했으나 변론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서 많은 변호사들이 변론을 거절하였고, 국선변호사에겐 재판 5분 전에야 통보를 해서 변호사가 변호해야 할 사람이 누군지, 변론내용이 무엇인지조차도 모르고 재판정에 서게 했습니다. 이처럼 졸속 처리된 1980년 10월 1심재판을 통해 약 2백여명이 남게 되었고, 이 중에는 사형수 5명, 무기수 7명, 10년 이상이 수십 명이 되었습니다.1980년 12월 2심재판을 통해 약 1백여 명이 남아서 사형수 3명(정동년, 배용주, 박노정), 무기 7명, 10년 이상이 여러명으로 확정되었습니다. 그 중 방위병 몇 사람은 1심에서 형이 확정되어 2심은 구경만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11. 구속자들에 대한 처우와 구금상태
그래서 지금 광주교도소를 비롯한 전남도내 교도소 및 서울 성동구치소 등지에 약 1백명이 구속되어 있습니다. 처음 군부대(상무대)에서는 구속자들에 대해 일체의 면회가 금지되었으며 영치금 사용, 생필품의 차입마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보통군법회의가 끝나고 교도소에 옮겨 와서 구속자들의 수차례의 단식투쟁과 징벌의 과정을 거친 후 겨우 면회가 허가되었고, 영치금 사용, 물품차입이 단계적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수감된 지 물경 6개월 만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교도소에서도 구속자들은 처우개선을 위한 투쟁과정에서 전남 가농 회장 서경원씨와 기독교장로회 청년회 전국회장 안철 등이 보안과에 끌려가 무수히 얻어 맞아 기절을 하기도 했습니다. 모든 구속자들은 식사기간마다 사형수를 위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경건하고 절도 있는 생활로 구속생활의 어려움을 이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12. 구명운동의 전개
광주사태 이후 광주는 학생들의 계속된 연행으로 인한 공포 분위기와 수많은 민주인사들의 손발이 묶임으로써 일체의 구명운동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뜻있는 성직자(목사, 신부)와 가족들이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13. 광주사태 구속자 가족의 입장─광주사태는 끝났는가?
지금 정부는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계엄을 해제했으며, 또한 새 시대를 맞이하여 국민적 화해를 위해 지난해 7월 이전에 징계 처리된 공무원 10만 명에 대해서도 사면조치를 하면서, 광주사태로 인한 구속자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구속자 가족들은 국내와 국외 여론의 관심이 아직도 끊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것은 이 나라의 양심인들에게 퍼부어지는 세계여론과 하나님의 격려라고 믿습니다. 가족들은 어려운 상황이 닥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거나 불안해 하지만은 않습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역사 가운데서 살아 움직이는 민중과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광주사태 구속자들의 재판과정에 임하는 떳떳한 자세를 통해서 온몸으로 배웠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은 단지 가족이라는 입장을 떠나서 광주시민으로서, 더 나아가 하나님 앞에 떳떳이 설 수 있는 수많은 억눌린 이 땅의 백성들 중의 하나로서 지금 구속되어 있는 사람들의 무죄함을 굳게 믿습니다.
광주사태는 결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총으로 쏘고 비행기와 탱크를 동원하는 사태는 끝이 났을지라도 진정한 양심과 정의가 살아 있는 양심의 공화국, 정의의 공화국이 세워지지 않는 한 양심과 정의, 자유와 민주가 제도와 권력의 폭압 밑에서 공공연하게 살해당하고 있는 한 광주사태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억울한 죽음은 그것이 원인이 되어 언젠가는 역사가 뒤바뀌어 지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나타날 것임을 믿으며, 구속자 가족들은 세계여론이 광주사태 구속자들의 구명과 석방운동에 적극 성원해 주길 바랍니다. 광주사태 구속자는 죄가 없습니다.!
1981년 1월
광주사태 구속자 가족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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