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성명서 및 유인물]국민에게 드리는 글/김영삼 1983.5.2.
본문
국민에게 드리는 글
나는 지금, 서울 상도동에 있는 내집 울타리 안에 연금되어 있습니다. 내가 내집 문밖으로 나가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외부 인사가 나를 방문하는 것도 완벽하게 봉쇄되어 있습니다. 일체의 외부와 차단된 것입니다. 권력당국이 파견한 경찰과 정보원들의 물샐틈 없이 내집을 포위하고 집안에서의 나의 동태까지 감시하고 있습니다. 내 집은 창살이 없을뿐, 나를 가두고 있는 감방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가운데 나는 국민 여러분께 전달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내가 이렇게 연금되어 있다는 사실자체가 이른바 제5공화국에 있어서의 민주주의의 실체가 어떤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권력당국이 나에게 가하고 있는 이러한 박해에는 나를 그리고 미주주의의 실현을 위하여 노력하는 애국적 민주인사를 가두어 놓고서야 비로소 자신들의 반민주적, 반국민적 의도와 음모를 관철할 수 밖에 없는 현 정권의 한계와 기만적이고 폭력적인 현 정권의 성격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나에 대한 이러한 박해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수의 민주인사와 애국청년들이 감옥에 넣어지고 있는 가운데, 나도 그분들이 겪고있는 고통에 동참하고 있다는 민주주의를 향한 동지적 연대감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토록 민주주의를 열망했던 국민 여러분께 대해, 그것을 이루지 못한 자책과 참회의 기회로서 나에 대한 박해와 연금을 받아 드릴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유신독재체제가 강화되고 있던 74년이나, 유신말기, 특히 YH사건이 터졌을 무렵부터 나의 국회의원직 재명, 그리고 야당 총재직 박탈, 부마사태와 10·26사태를 전후한 시기에 신민당 총재로서 민주화투쟁을 벌일 당시 국민여러분이 나에게 보내준 뜨거운 격려와 성원을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지난달 국민 여러분이 나에게 보내준 지지와 성원에 보답하지 못하고, 독재정치의 악순환 속에서 민주주의가 송두리째 부정됨은 물론, 심지어 민주화를 요구하던 수많은 민주시민이 무참히 살상상태에까지 이르게 된 데 대해, 당시 정계 지도층에 있던 한 사람으로써 그것을 막지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나에 대한 권력당국의 불법적 연금을 국민여러분께 속죄의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참회와 자책은 지금도 내 머리와 가슴 속에 가득차 있습니다.
내가 두차례(1980.5.17~1981.4.30과 1982.6.1~현재)에 걸쳐 연금되어 있는 동안 많은 수의 민주애국인사와 청년 학생들을 감옥에 보내거나 소급입법을 통하여 정치규제에 묶어놓은 가운데 일부 군인과 그에 추종하는 세력만으로 이른바 제5공화국이 출범되었지만, 그 이후의 사태, 전개는 조국과 민족의 앞날을 더욱 어두운 파멸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이러한 처지에 당하여 나는 비록 연금된 몸이지만 혼신의 힘을 다하여 국민 여러분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나의 말을 전하고자 합니다. 나는 묶여있는 몸으로 우리 시대의 진실을 말하고자 할 뿐, 달리 사사로운 영예나 욕망에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 모두가 다 함께 피부로 느낄만큼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우리나라와 국민이 처하고 있는 위기의 실상과 그것이 어디에서 오고 있는 것인가, 즉 이른바 제5공화국 정권, 그리고 그것이 국민, 역사와 민족에 끼치고 있는 죄악에 대하여 간단히 고찰해 봅시다. 우리는 10?6이후 정치적 보복이나 과도기적 혼란이 없이 순조로운 민주정치의 발전을 도모해 나가기를 열망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국민의 한결같고 절대적인 열망과는 반대로 민주정치의 신념이 결여되어 있고 이미 독재체제의 하수인으로 진력하였던 일부 군인세력이 군대를 동원하여 군사 쿠데타를 감행하였으니, 이른바 12·12사태와 5·17계엄확대 조치가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날 선진조국이라는 말을 크게 외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이 조국을 20년이상이나 후퇴시켜놓은 장본인이 바로 선진조국을 말하는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선진조국이라는 말이 허구와 기만에 찬 공허한 구호에 불과하지만 선진조국을 가로막는 결정적 장애요인이 바로 그들입니다. 국민의 높은 정치의식과 교육수준, 그리고 경제수준에 비추어 쿠데타, 그 자체가 역사와 조국에 다 같이 후퇴와 더불어 치명적인 치욕을 안겨주고 있는 것입니다. 설사 정권욕에 사로 잡혀 쿠데타를 일으켰다 하더라도 광주사태라는 잔인한 만행을 거침없이 자행하여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였으니, 이러한 만행을 저지른 사람들이 어떻게 감히 민주와 정의, 민족과 복지, 그리고 선진조국을 말할 수 있으며, 그러한 잔인함을 기반으로 탄생한 정권이 어떻게 도덕성과 정당성, 그리고 정통성을 감히 주장할 수 있습니까? 더구나 광주사태 이후 회개는 커녕 그 사태에 대해 책임을 지거나 한 마디의 사죄의 말이 없으니 광주사태는 맺힌 한으로 이 민족의 가슴에 영원한 멍울이 될수밖에 없습니다.
출발이 이러하거니와 권력장악의 과정이 민주적이지 못한 정권은 그 이후에도 반 민족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또한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신독재체제의 정치풍토가 그대로 재연되는 가운데 1인의 절대권력 하에서 국회와 사법부와 언론은 독재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체 국민의 인간으로서의 기본권과 정치적 자유는 극도로 제한되어 있고 소위 국가보위입법회의라는 불법기구로 만들어 낸 반민주적인 국민답습법이 소위 제5공화국의 기틀을 이루고 있어 민주정치의 발전은 전혀 기대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과거의 긴급조치 대신에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과 나아가 국가보안법을 무차별적으로 제정하여 그들에 대하여 비판하고 항의하는 학생들을 처단하고 있습니다. 감옥으로 끌려가는 학생과 근로자의 행렬이 끊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긴 설명이 필요없이 오늘의 이나라 정치를 민주정치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군사독재체제가 더욱 강화되어 가고 있음은 공지의 사실입니다. 현 정권을 두고서 앞으로 민주주의가 실현되리라고 믿는 국민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민주정치와 관련하여 언론의 자유야말로 민주정치의 요체인데 지금 이 나라에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원천적으로 봉쇄당하고 있습니다. 신문과 방송이 국민 여론의 전달로 독재정치에 대한 비판과 견제기능을 하기는 커녕 거짓보도와 사실 왜곡을 일삼고 반정부 운동에 대하여는 사실보도까지 외면한 채 독재권력의 홍보수단 내지는 통치수단으로 전락해 있는 실정입니다. 내가 2년 가까이나 연금되어 있다는 사실이 이나라 언론에만 보도된 적이 없기 때문에 국민 여러분은 그 사실을 모르고 계실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 언론의 현실인 것입니다. 소위 언론 기관 스스로의 자율적 조치라는 허울밑에 강제된 언론통폐합 조치로 말미암아 민간방송은 그 자치마져 감추게 되었으며 통신사는 단일화되고 신문사는 폐쇄되었습니다. 공영이라는 이름밑에 민주사회의 창의와 다양성은 파괴되고 전제적 획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독재권력의 비위에 거슬리는 기자들은 해고되고 언론기관에 대한 무제한한 통제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그 제도적 장치로 이미 언론기본법이라는 것을 만들어 두었거니와 언론인에 대한 수사기관의 연행과 협박은 더 큰 언론탄압이 되고 있습니다.
유신정권의 탄압이 극에 달했던 74년말과 75년초 언론의 사명에 충실코자 하는 언론인들의 자기 각성에 따른 자유언론실천운동이 확대되었던 것은 언론은 언론인 스스로가 지키려고 할때만 자유언론을 쟁취할 수 있다는 커다란 교훈을 남겨주었습니다. 이렇게 볼때 언론인 스스로의 노력이 그 어느때 보다도 절실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언론인 여러분이 자유언론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자유언론 실천에의 의지를 가다듬어 주실 것을 촉구해 마지 않는 바입니다. 또한 억압의 시대 한 가운데서 새로운 홍보수단 창출 등 여러가지 자유언론 실천을 위한 노력이 국민 내부에서도 이루어져야만 하겠습니다.
민주주의와 법의 정의를 실현해야할 사법부가 정권의 자기안보를 위한 하청기구로 전락되어 가고 있습니다. 정치 보복과 탄압을 위하여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개악된 국가보위법을 학생과 민주운동단체 관련자들에게 무차별 적용 처단함으로서 관제 공산주의자의 양산을 방조 내지 보장해 주는 것이 바로 사법부입니다. 학생과 근로자에 대한 정권의 탄압을 사법부가 법의 이름으로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가장 야만적인 행위라할 고문이 이땅에 만연되는 것도,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을 사법부가 증거로 채택하고 있는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일반사건보다 학생사건과 반체계 활동 관련 사건에서 정치범과 양심범에게 가혹하고도 비인간적인 고문을 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이들 사건에서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을 증거로 하여 중형에 처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법부가 고문을 정치보복과 탄압을 추인해 주는 요식기관으로 타락하고 있어 사법부는 필연적으로 부패할 수밖에 없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최근에 있었던 대형 법원부정사건은 비록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것이지만 대법원장의 일개 비서관이 판결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나라 민주주의의 수호와 실현에 있어 사법부의 존재는 기대할 수도, 신뢰할 수도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가슴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양심적인 법관의 자기 헌신적인 노력으로서만이 사법부의 본래의 기능과 권위를 회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치 않을 수 없습니다.
경제적인 면을 보더라도 국민 경제는 불황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국제경기가 호전의 기미를 보이는데도 우리 경제는 구조적 모순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국경제는 400억불이 넘는 외채부담과 자기자본의 5배에 달하는 기업부채로 언제 국가 파산의 위기가 닥쳐 올지 모르는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국민 1인당 해외부채가 1천불을 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책담당자들은 오늘의 경제난을 국제경기침체의 탓에 돌릴뿐 근본적인 대책을 수립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조령모개식의 경제정책남발로 기업인들과 국민으로 하여금 정신을 차릴 수 없게 함은 물론 경제정책에 대한 불신을 스스로 자초하고 있습니다.
서민의 소망인 내집마련이 집값과 전세값의 엄청난 상승으로 점점 요원해지고 있는 판에 저물가정책의 성공이라는 요란한 소리가 떠벌여지고 있습니다. 모든 발표, 모든 정책을 신뢰하고 따르는 사람은 필경 파멸하고야말 수밖에 없습니다.
제 자랑만 하다가 제 집 불타는 줄 모르는 겪으로, 한국의 경제구조는 날로 더욱 취약해지고 국민의 부담은 급속히 증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정부당국은 국민에게 더 심한 중노동과 저소득과 중과세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모든 정책이 그러하듯이 경제문제 역시 어느 경제정책 한 가지가 독립적으로 이해되거나 평가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특히 경제정책은 정치권력의 성격과 절대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실명제 파동은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경제문제의 해결 즉, 경제난의 극복과 자립경제의 달성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치의 민주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제일의 명제가 되는 것입니다. 복지를 말하지만 복지를 요구하는 근로자들은 감옥으로 보내지고 있습니다. 유신시대의 그 가옥한 탄압의 연장선 위에서 노동탄압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최후의 모범적인 민주노조라 할 원풍모방노조원들이 감옥으로 끌려간 것은 반복지의 구체적 실례입니다.
사회적인 면에서 볼때도 살인, 강도, 절도, 사기, 부도 등이 범죄행위와 흉기난동사건이나 대형안전 사고 등이 전례없이 빈발하고 있는 것이나, 생활고나 기타의 이유로 인한 자살사건이 많다거나, 정신질환자가 급격히 늘어나는 것은 가치관의 전도와 함께 삶의 의미와 희망을 잃은 데서부터 일어나는 현상으로 파악되는 바, 이 모든 것이 독재권력의 강화와 무관하지 않음을 우리는 직시해야 합니다. 광주사태는 대량살상의 비극이 있은 후 고문치사, 대량살상 등 인명에 대한 경시풍조와 한탕주의와 폭력적 풍조가 만연되고 있는 사실이 이를 반영합니다.
정부가 권력형 부정부패의 척결과 의식개혁을 한창 외칠 때,소위 장영자사건으로 불리워지는 사상최대의 권력형 부정사건이 저질러진 것이나, 의령에서 경찰관에 의한 양민학살사건이 저질러 진 것은 독재권력의 구축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의를 말하면서 뒤로는 불의를 자행하였고, 정의를 말하는 권력 스스로가 정의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국민에게 보여 준 구체적 실증인 것입니다. 오늘날 정치만능의 풍조를 배격해야 한다고 하면서 정치의 최소화를 부르짓는 소리가 들리곤 하지만 이 땅에 정치부패와 행정만큼은 있었어도 정치만능은 없었을 뿐더러, 독재권력의 촉수로부터 벗어 난 영역이 존재할 수 없는 오늘의 현실에서 볼 때, 각종 범죄와 악습 및 불행한 사건, 사고에 대한 중요한 책임이 정권담당자들에게 있음을 부인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외교적인 면에서도, 5·17 군사 쿠데타 자체와 그후 민주인사에 대한 대량투옥과 탄압, 특히 광주사태 등으로 국제적 고립을 면치 못하고 있는 바, 이는 바로 외교가 내치의 연장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최근 들어 국민화합이란 이름밑에 일부의 정치범을 석방하고 부분적인 정치 해금을 단행하여 다소의 고립을 면하고 있다고 판단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체 정치범의 석방과 언론자유의 회복 등 요컨데 군사독재의 종식에 의한 민주정치의 실현이 없이는 항상 외교적 고립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권의 부도덕성으로 인한 외교적 고립은 국가와 국민의 긍지와 존엄을 실추시키는 엄청난 피해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국민의 지지가 밑받침되지 못하는 독재정부가 벌이는 외교는 대부분 정권의 부도덕한 존속만을 획책하는 나머지 민족의 이익이나 존엄을 뒤로 돌리고, 결과적으로 타국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고 마는 것임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외미도입부정사건이 터진 이후의 외미도입에 있어서도 민족의 이익이 배제되고 부정이 개재되어 있을 것이라는 심증을 갖지 않을수 없습니다.
국가안보의 면에 있어서도 군의 정치적 이용과 일부 군인의 정치개입으로 군사력의 약화를 가져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특히 12·12사태, 광주사태 등으로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에 금이가게 했던 것은 치명적인 안보상의 손실인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볼때 계속되는 군사독재 강화는 안보를 위협하는 제일 큰 요인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 정권은 안보를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안보를 빙자한 독재의 강화만이 있을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군의 정치개입으로 인한 부정과 부패에의 유혹은 더욱 더 큰 안보상의 문제로 될 것입니다.
남북한 간의 문제에 있어서도, 남북대화의 재개는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남북한 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실정이며, 이 남북한 간의 긴장고조는 민족의 자주적 발전의 조건이 되는 민족통일을 더디게 하는 것임은 물론, 현실적으로 국민에게 심리적, 물질적 우압을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이러한 긴장고조와 위기의식을 군사독재권력강화의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한반도 주변에는 우리 민족구성원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강대국의 패권다툼과 국가이익의 추구때문에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높아가고 있으며, 그 전쟁은 곧 한민족 전체의 파멸을 가져오는 핵 전쟁으로 치닫을 가능성마저 있는 점입니다. 이럴때 일수록 국민모두가 더욱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생각을 절실하게 가지게 됩니다. 더욱이 현재의 정권이 비이성적이며, 자신의 계속적 존속을 위해서라면 국가와 민족의 이익이나 장래문제 같은 것은 도외시 할 수도 있다고 보여지고 있어, 국민의 각성이 그 어느때보다 더욱 절실히 요청됩니다.
그리고 나는 이 기회에 평화와 인권문제와 관한 자유우방과 양식있는 평화애호가들에게 호소하고자 합니다. 평화는 전쟁없는 상태만이 아니라 강자가 약자를, 권력이 국민을 억압하고 그 기본적 인권을 유린할 때 이미 평화는 깨어져 있는 것입니다. 자유없이 평화가 있을 수 없고,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평화는 불안한 휴전상태에 불과하기 때문이니다. 세계의 한 구텅이에서 인권의 유린이 있는 속에 세계의 평화는 없습니다. 인권을 외치고, 인권의 유린에 항의하는 것은 동시대를 사는 인간으로서의 도덕적 의무입니다. 인류로서의 사명입니다. 미국을 비롯한 자유우방 세계가 추구하고 있는 이상이 자유의 실현과 인권의 신장을 통한 민주주의,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권유린을 우방이 방조한다면 양국관계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된다는 것을 보여 준 불행한 사건이 바로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사건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우리의 우방인 미국의 문화원에 방화를 하면서까지 미국 정부에 한국민의 의사를 전달한 행동이 잘 된일로는 생각치 않습니다. 나는 피해를 입은 미국측과 특히 목숨을 잃거나 부상당한 청년·학생과 그 가족들에 위로의 말을 전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는가에 대하여는 깊이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 정부가 한국과 미국의 양국 국민이 공동의 이상으로 추구하고 있는 민주주의를 외면하고, 오히려 그것을 유린하고 억압하는 독재권력을 지원하며,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한·미간의 불평등 관계가 시정되지 않는 한, 이러한 불상사는 발생할 수 있는 개연성을 언제나 지니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불행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하여 한국과 미국의 정부와 국민이 불행한 사태의 원인이 되는 일을 만들어 내지 않도록 각기 스스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최근 들어 학생들의 반정부시위에서 반미구호가 적지않게 나오고 있다고 듣고 있거니와 나는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깊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바, 그 주된 원인이 독재권력에 대한 미국정부의 지원에 있다는 점을 미국 정부가 분명히 인식할 것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국민 여러분! 이상에서 나는 지금의 국내 상황과 한반도 정세를 간략히 살펴 보았습니다. 모든 정보가 통제되어 있고, 더욱이 연금되어 있는 나로서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구체적 상황에 대해서 보고 들을 기회가 없습니다. 구태여 나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국민 여러분이 보고 들으며 피부로 느낌으로서 더 많이 더 올바로 우리의 현실을 파악하고 계실줄 압니다. 지금 이 싯점에서 무엇보다 선결되어야 할 것은 민주정치가 이루어지고 민주정부가 수립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정치의 민주화 없이는 정치적 안정도, 자립경제의 달성도, 국방력의 강화도, 민족의 평화적 통일도, 한반도에서의 평화정착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민주주의만이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을 극복하고 통일에 이르는 지름길입니다. 민주주의라는 우리가 지닌 이념과 가치가 파괴되는 속에 어떻게 공산주의에 대해 이념적, 현실적 우월성을 자신있게 국민이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민주주의 실현만이 안보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확실하고도 분명한 기반이요 담보입니다. 요컨데 우리 민족이 가장 크게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원동력은 민주주의 밖에는 없다는 것을 확언할 수 있습니다. 현 정권이 말하는 바 민주니, 정의니, 복지니, 선진조국이니 하는 말들은 그들의 의지나 신념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국민을 속이고 기만하여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해 만들어 낸 말이요 구호일 뿐인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적 정권교체는 단순한 정권담당자의 교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간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정당체제는 집권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이 오직 집권당에 대한 들러리로서 존재할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당제의 논리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평화적 정권교체는 처음부터 이루어질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 체제아래서는 결코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루어 질 수 없다는 사실과 아울러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말이 허구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지 않으면 안됩니다. 단임정신과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말을 듣고 많은 사람들은 그 말에 일말의 신뢰를 걸었을지도 모릅니다. 또는 현 정권의 작태를 보면서 단임정신 운운하는 가운데 사실상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그나마의 민주적 여력과 토양마저도 깡그리 파괴해 버리고 말것이 아닌가에 대하여 우려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화적 정권교체나 단임정신 따위 말은 처음부터 그 모두가 허위요 기만이었던 것이다.
국민 여러분! 내가 연금되어 있는 처지의 몸으로 우리 국민에게 혼심의 힘으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현 독재권력은 장기 집권을 위한 체제구축을 하나하나 구체화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단임정신이나 평화적 정권교체 운운의 말은 그 모두가 국민을 기만하여 시간을 벌자는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때문에 어떠한 일이 있어도 계속적인 집권을 획책하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죄악을 저질은 인간이 빠지기 쉬운 속성입니다. 지금 그들은 서서히 장기집권을 위한 촉수와 야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장기집권을 향한 그들의 본래의 모습이 곧 드러나질 것이라는 것을 나는 예언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2~3년이 장기집권으로 가느냐, 가지 않느냐 하는 길목이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국민은 군사독재권력 아래에서 신음하는 노예로 전락할 것이냐, 아니면 우리 국민의 손과 힘으로 창출한 민주정부아래서 민주시민으로서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실로 조국과 자신의 운명을 결정해야할 중대한 위기의 순간에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국민은 어떠한 술수와 기만에도 독재권력의 진정한 의도를 궤뚫어 볼 수 있는 예지를 가지고, 장기집권을 저지할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한 사람의 고통받는 민중으로서 그리고 이땅의 민주국민으로서 독재의 사슬과 그의 장기집권의 음모를 떨쳐 버리는데 나의 신명을 바치고자 하는 뜻을 분명히 밝혀주는 바입니다. 지금 나의 심경은 정권에의 미련같은 것은 떨쳐 버린지 오래입니다. 오직 한 사람의 이 민족, 이 국민으로써 민주주의를 기구하고 갈망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나라에 참된 민주주의가 이룩되어 인간이 인간다운 자존심과 품위와 기본적 인권을 지니고 살 수 있는 자유와 정의가 깃든 사회가 된다면 나는 그것만으로 만족하고 또 행복할 것입니다. 따라서 나의 말은 정권적 차원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밀한 저 깊은 속에서 우러나오는 한 인간의 진실에 찬 목소리로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땅의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민주애국인사와 어제 우리와 섰던 모든 정치적 동지들에게도 호소하고자 합니다. 지금 각자가 서 있는 위치가 어떠하든 간에, 여러분은 민주주의에의 갈망과 열정을 한 곳으로 모을 수 있도록 각각 노력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서 있는 입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향한 힘과 지혜의 결집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이 같은 한, 우리는 서로 화합하고 단결해야 합니다. 분열과 질시는 독재권력이 노리는 바입니다. 그들의 간계에 빠지지 말고 서로 이해하고 화합하여 장기집권 획책을 분쇄하고 나아가 민주주의를 되찾는 민족사의 소명에 나를 버리고 허심탄회하게 합류하여야 하겠습니다. 기존의 정당에 몸을 담고 있거나, 정치규제에 묶여 있거나 풀려있거나를 막론하고, 민주주의를 향한 우리 모두의 목표아래 각성하고 단결합시다. 민주주의는 우리 모두를 그 안에서 하나되게 할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믿습니다.
국민 여러분! 또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나, 가장 분명한 것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우리의 힘으로서만 이룩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이 또는 우방이 우리의 민주주의를 실현시켜 줄수는 없습니다. 이 나라 민주주의는 그 실현의 주체도, 발전시킬 책임도 우리 민중이요, 우리 국민입니다. 먼저 나 자신을 사심없이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 던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국민의 마음 한 가운데에 있는 민주주의에의 열정, 그것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10·26사태를 전후한 시기에 우리 국민이 보여 주었던 민주주의에의 불타는 눈길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우리 국민의 힘으로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정의와 평화를 마침내 이룩할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희망찬 미래를 국민과 더불어 확신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좌절을 딛고 일어설 것이며, 희망찬 조국을 건설할 것입니다. 희망과 용기를 잃는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은 것입니다.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은 국민은 국민이 원하는 모든것, 자유와 민주주의를 쟁취할 것입니다. 역사와 하나님의 정의가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끝으로 나는 이 기회에 만약 현 정권 당국이 만에 하나라도 민주화를 바라고 있다면,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민주가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고자 한다면 적어도 지금 이순간 민주화를 장애하는 요소들로 즉각 청산되어야 할 최소한의 당면과제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여 현 정권 당국의 진의를 묻고자 하는 바입니다.
① 독재정치를 거부하고, 민주정치의 확립을 위해 투쟁하다가 구속된 학생, 종교인, 지식인, 근로자 등을 민주화 선언과 함께 전원 석방하여야한다.
② 정치활동 규제법에 묶여 있는 모든 정치인과 민주시민의 정치활동을 보장하여야 한다.
③ 정치적인 이유로 학원과 직장으로부터 추방당한 교수, 학생, 근로자 등을 복직시키며, 유신정권 이래의 정치탄압으로 인하여 공민권의 제약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전면적인 복권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④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며 언론통폐합 조치를 백지화하고 유신정권이래 타의로 실직된 언론인들이 언론계에 명예롭게 복귀하며 민간방송국의 설립을 자유화하고 기독교 방송국의 정상적인 기능을 회복시켜야 한다.
⑤ 현재의 헌법은 5·17이전에 이미 국민적 합의로 되었던 대통령직선의 국민적 염원을 배반한 것이며, 국민의 기본권에 대한 유보조항을 두고 있다. 사실상 유신독재체제와 다를 바가 없는 독재헌법인 바, 현행의 헌법은 가차없이 개정되어야 한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것이 확인될 수 있는 방향으로 개정되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또한 유신시대 이래의 반민주 악법의 민주적 정비와 아울러 소위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제정한 각종 반민주 악법, 예컨데 정치풍토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 언론기본법,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국가보안법, 국회법, 대통령선거법, 국회의원 선거법, 노동조합법 등은 폐지내지 원상회복 되어야 하며 아들 법률은 제정 및 개정과 아울러 전부 또는 부분적으로 무효임을 확인하여야 한다.
이상과 같이 당면과제를 밝히면서, 나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국민여러분께 이 글을 드리는 바입니다. 국민 여러분은 좌절보다는 희망을, 체험보다는 용기를 가지고 이 난국을 극복해 주실 것은 믿고 또 바라면서, 나의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우리는 다시 만날 것입니다.
1983년 5월 2일
金泳三
나는 지금, 서울 상도동에 있는 내집 울타리 안에 연금되어 있습니다. 내가 내집 문밖으로 나가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외부 인사가 나를 방문하는 것도 완벽하게 봉쇄되어 있습니다. 일체의 외부와 차단된 것입니다. 권력당국이 파견한 경찰과 정보원들의 물샐틈 없이 내집을 포위하고 집안에서의 나의 동태까지 감시하고 있습니다. 내 집은 창살이 없을뿐, 나를 가두고 있는 감방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가운데 나는 국민 여러분께 전달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내가 이렇게 연금되어 있다는 사실자체가 이른바 제5공화국에 있어서의 민주주의의 실체가 어떤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권력당국이 나에게 가하고 있는 이러한 박해에는 나를 그리고 미주주의의 실현을 위하여 노력하는 애국적 민주인사를 가두어 놓고서야 비로소 자신들의 반민주적, 반국민적 의도와 음모를 관철할 수 밖에 없는 현 정권의 한계와 기만적이고 폭력적인 현 정권의 성격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나에 대한 이러한 박해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수의 민주인사와 애국청년들이 감옥에 넣어지고 있는 가운데, 나도 그분들이 겪고있는 고통에 동참하고 있다는 민주주의를 향한 동지적 연대감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토록 민주주의를 열망했던 국민 여러분께 대해, 그것을 이루지 못한 자책과 참회의 기회로서 나에 대한 박해와 연금을 받아 드릴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유신독재체제가 강화되고 있던 74년이나, 유신말기, 특히 YH사건이 터졌을 무렵부터 나의 국회의원직 재명, 그리고 야당 총재직 박탈, 부마사태와 10·26사태를 전후한 시기에 신민당 총재로서 민주화투쟁을 벌일 당시 국민여러분이 나에게 보내준 뜨거운 격려와 성원을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지난달 국민 여러분이 나에게 보내준 지지와 성원에 보답하지 못하고, 독재정치의 악순환 속에서 민주주의가 송두리째 부정됨은 물론, 심지어 민주화를 요구하던 수많은 민주시민이 무참히 살상상태에까지 이르게 된 데 대해, 당시 정계 지도층에 있던 한 사람으로써 그것을 막지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나에 대한 권력당국의 불법적 연금을 국민여러분께 속죄의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참회와 자책은 지금도 내 머리와 가슴 속에 가득차 있습니다.
내가 두차례(1980.5.17~1981.4.30과 1982.6.1~현재)에 걸쳐 연금되어 있는 동안 많은 수의 민주애국인사와 청년 학생들을 감옥에 보내거나 소급입법을 통하여 정치규제에 묶어놓은 가운데 일부 군인과 그에 추종하는 세력만으로 이른바 제5공화국이 출범되었지만, 그 이후의 사태, 전개는 조국과 민족의 앞날을 더욱 어두운 파멸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이러한 처지에 당하여 나는 비록 연금된 몸이지만 혼신의 힘을 다하여 국민 여러분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나의 말을 전하고자 합니다. 나는 묶여있는 몸으로 우리 시대의 진실을 말하고자 할 뿐, 달리 사사로운 영예나 욕망에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 모두가 다 함께 피부로 느낄만큼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우리나라와 국민이 처하고 있는 위기의 실상과 그것이 어디에서 오고 있는 것인가, 즉 이른바 제5공화국 정권, 그리고 그것이 국민, 역사와 민족에 끼치고 있는 죄악에 대하여 간단히 고찰해 봅시다. 우리는 10?6이후 정치적 보복이나 과도기적 혼란이 없이 순조로운 민주정치의 발전을 도모해 나가기를 열망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국민의 한결같고 절대적인 열망과는 반대로 민주정치의 신념이 결여되어 있고 이미 독재체제의 하수인으로 진력하였던 일부 군인세력이 군대를 동원하여 군사 쿠데타를 감행하였으니, 이른바 12·12사태와 5·17계엄확대 조치가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날 선진조국이라는 말을 크게 외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이 조국을 20년이상이나 후퇴시켜놓은 장본인이 바로 선진조국을 말하는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선진조국이라는 말이 허구와 기만에 찬 공허한 구호에 불과하지만 선진조국을 가로막는 결정적 장애요인이 바로 그들입니다. 국민의 높은 정치의식과 교육수준, 그리고 경제수준에 비추어 쿠데타, 그 자체가 역사와 조국에 다 같이 후퇴와 더불어 치명적인 치욕을 안겨주고 있는 것입니다. 설사 정권욕에 사로 잡혀 쿠데타를 일으켰다 하더라도 광주사태라는 잔인한 만행을 거침없이 자행하여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였으니, 이러한 만행을 저지른 사람들이 어떻게 감히 민주와 정의, 민족과 복지, 그리고 선진조국을 말할 수 있으며, 그러한 잔인함을 기반으로 탄생한 정권이 어떻게 도덕성과 정당성, 그리고 정통성을 감히 주장할 수 있습니까? 더구나 광주사태 이후 회개는 커녕 그 사태에 대해 책임을 지거나 한 마디의 사죄의 말이 없으니 광주사태는 맺힌 한으로 이 민족의 가슴에 영원한 멍울이 될수밖에 없습니다.
출발이 이러하거니와 권력장악의 과정이 민주적이지 못한 정권은 그 이후에도 반 민족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또한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신독재체제의 정치풍토가 그대로 재연되는 가운데 1인의 절대권력 하에서 국회와 사법부와 언론은 독재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체 국민의 인간으로서의 기본권과 정치적 자유는 극도로 제한되어 있고 소위 국가보위입법회의라는 불법기구로 만들어 낸 반민주적인 국민답습법이 소위 제5공화국의 기틀을 이루고 있어 민주정치의 발전은 전혀 기대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과거의 긴급조치 대신에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과 나아가 국가보안법을 무차별적으로 제정하여 그들에 대하여 비판하고 항의하는 학생들을 처단하고 있습니다. 감옥으로 끌려가는 학생과 근로자의 행렬이 끊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긴 설명이 필요없이 오늘의 이나라 정치를 민주정치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군사독재체제가 더욱 강화되어 가고 있음은 공지의 사실입니다. 현 정권을 두고서 앞으로 민주주의가 실현되리라고 믿는 국민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민주정치와 관련하여 언론의 자유야말로 민주정치의 요체인데 지금 이 나라에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원천적으로 봉쇄당하고 있습니다. 신문과 방송이 국민 여론의 전달로 독재정치에 대한 비판과 견제기능을 하기는 커녕 거짓보도와 사실 왜곡을 일삼고 반정부 운동에 대하여는 사실보도까지 외면한 채 독재권력의 홍보수단 내지는 통치수단으로 전락해 있는 실정입니다. 내가 2년 가까이나 연금되어 있다는 사실이 이나라 언론에만 보도된 적이 없기 때문에 국민 여러분은 그 사실을 모르고 계실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 언론의 현실인 것입니다. 소위 언론 기관 스스로의 자율적 조치라는 허울밑에 강제된 언론통폐합 조치로 말미암아 민간방송은 그 자치마져 감추게 되었으며 통신사는 단일화되고 신문사는 폐쇄되었습니다. 공영이라는 이름밑에 민주사회의 창의와 다양성은 파괴되고 전제적 획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독재권력의 비위에 거슬리는 기자들은 해고되고 언론기관에 대한 무제한한 통제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그 제도적 장치로 이미 언론기본법이라는 것을 만들어 두었거니와 언론인에 대한 수사기관의 연행과 협박은 더 큰 언론탄압이 되고 있습니다.
유신정권의 탄압이 극에 달했던 74년말과 75년초 언론의 사명에 충실코자 하는 언론인들의 자기 각성에 따른 자유언론실천운동이 확대되었던 것은 언론은 언론인 스스로가 지키려고 할때만 자유언론을 쟁취할 수 있다는 커다란 교훈을 남겨주었습니다. 이렇게 볼때 언론인 스스로의 노력이 그 어느때 보다도 절실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언론인 여러분이 자유언론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자유언론 실천에의 의지를 가다듬어 주실 것을 촉구해 마지 않는 바입니다. 또한 억압의 시대 한 가운데서 새로운 홍보수단 창출 등 여러가지 자유언론 실천을 위한 노력이 국민 내부에서도 이루어져야만 하겠습니다.
민주주의와 법의 정의를 실현해야할 사법부가 정권의 자기안보를 위한 하청기구로 전락되어 가고 있습니다. 정치 보복과 탄압을 위하여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개악된 국가보위법을 학생과 민주운동단체 관련자들에게 무차별 적용 처단함으로서 관제 공산주의자의 양산을 방조 내지 보장해 주는 것이 바로 사법부입니다. 학생과 근로자에 대한 정권의 탄압을 사법부가 법의 이름으로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가장 야만적인 행위라할 고문이 이땅에 만연되는 것도,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을 사법부가 증거로 채택하고 있는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일반사건보다 학생사건과 반체계 활동 관련 사건에서 정치범과 양심범에게 가혹하고도 비인간적인 고문을 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이들 사건에서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을 증거로 하여 중형에 처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법부가 고문을 정치보복과 탄압을 추인해 주는 요식기관으로 타락하고 있어 사법부는 필연적으로 부패할 수밖에 없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최근에 있었던 대형 법원부정사건은 비록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것이지만 대법원장의 일개 비서관이 판결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나라 민주주의의 수호와 실현에 있어 사법부의 존재는 기대할 수도, 신뢰할 수도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가슴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양심적인 법관의 자기 헌신적인 노력으로서만이 사법부의 본래의 기능과 권위를 회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치 않을 수 없습니다.
경제적인 면을 보더라도 국민 경제는 불황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국제경기가 호전의 기미를 보이는데도 우리 경제는 구조적 모순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국경제는 400억불이 넘는 외채부담과 자기자본의 5배에 달하는 기업부채로 언제 국가 파산의 위기가 닥쳐 올지 모르는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국민 1인당 해외부채가 1천불을 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책담당자들은 오늘의 경제난을 국제경기침체의 탓에 돌릴뿐 근본적인 대책을 수립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조령모개식의 경제정책남발로 기업인들과 국민으로 하여금 정신을 차릴 수 없게 함은 물론 경제정책에 대한 불신을 스스로 자초하고 있습니다.
서민의 소망인 내집마련이 집값과 전세값의 엄청난 상승으로 점점 요원해지고 있는 판에 저물가정책의 성공이라는 요란한 소리가 떠벌여지고 있습니다. 모든 발표, 모든 정책을 신뢰하고 따르는 사람은 필경 파멸하고야말 수밖에 없습니다.
제 자랑만 하다가 제 집 불타는 줄 모르는 겪으로, 한국의 경제구조는 날로 더욱 취약해지고 국민의 부담은 급속히 증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정부당국은 국민에게 더 심한 중노동과 저소득과 중과세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모든 정책이 그러하듯이 경제문제 역시 어느 경제정책 한 가지가 독립적으로 이해되거나 평가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특히 경제정책은 정치권력의 성격과 절대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실명제 파동은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경제문제의 해결 즉, 경제난의 극복과 자립경제의 달성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치의 민주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제일의 명제가 되는 것입니다. 복지를 말하지만 복지를 요구하는 근로자들은 감옥으로 보내지고 있습니다. 유신시대의 그 가옥한 탄압의 연장선 위에서 노동탄압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최후의 모범적인 민주노조라 할 원풍모방노조원들이 감옥으로 끌려간 것은 반복지의 구체적 실례입니다.
사회적인 면에서 볼때도 살인, 강도, 절도, 사기, 부도 등이 범죄행위와 흉기난동사건이나 대형안전 사고 등이 전례없이 빈발하고 있는 것이나, 생활고나 기타의 이유로 인한 자살사건이 많다거나, 정신질환자가 급격히 늘어나는 것은 가치관의 전도와 함께 삶의 의미와 희망을 잃은 데서부터 일어나는 현상으로 파악되는 바, 이 모든 것이 독재권력의 강화와 무관하지 않음을 우리는 직시해야 합니다. 광주사태는 대량살상의 비극이 있은 후 고문치사, 대량살상 등 인명에 대한 경시풍조와 한탕주의와 폭력적 풍조가 만연되고 있는 사실이 이를 반영합니다.
정부가 권력형 부정부패의 척결과 의식개혁을 한창 외칠 때,소위 장영자사건으로 불리워지는 사상최대의 권력형 부정사건이 저질러진 것이나, 의령에서 경찰관에 의한 양민학살사건이 저질러 진 것은 독재권력의 구축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의를 말하면서 뒤로는 불의를 자행하였고, 정의를 말하는 권력 스스로가 정의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국민에게 보여 준 구체적 실증인 것입니다. 오늘날 정치만능의 풍조를 배격해야 한다고 하면서 정치의 최소화를 부르짓는 소리가 들리곤 하지만 이 땅에 정치부패와 행정만큼은 있었어도 정치만능은 없었을 뿐더러, 독재권력의 촉수로부터 벗어 난 영역이 존재할 수 없는 오늘의 현실에서 볼 때, 각종 범죄와 악습 및 불행한 사건, 사고에 대한 중요한 책임이 정권담당자들에게 있음을 부인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외교적인 면에서도, 5·17 군사 쿠데타 자체와 그후 민주인사에 대한 대량투옥과 탄압, 특히 광주사태 등으로 국제적 고립을 면치 못하고 있는 바, 이는 바로 외교가 내치의 연장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최근 들어 국민화합이란 이름밑에 일부의 정치범을 석방하고 부분적인 정치 해금을 단행하여 다소의 고립을 면하고 있다고 판단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체 정치범의 석방과 언론자유의 회복 등 요컨데 군사독재의 종식에 의한 민주정치의 실현이 없이는 항상 외교적 고립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권의 부도덕성으로 인한 외교적 고립은 국가와 국민의 긍지와 존엄을 실추시키는 엄청난 피해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국민의 지지가 밑받침되지 못하는 독재정부가 벌이는 외교는 대부분 정권의 부도덕한 존속만을 획책하는 나머지 민족의 이익이나 존엄을 뒤로 돌리고, 결과적으로 타국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고 마는 것임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외미도입부정사건이 터진 이후의 외미도입에 있어서도 민족의 이익이 배제되고 부정이 개재되어 있을 것이라는 심증을 갖지 않을수 없습니다.
국가안보의 면에 있어서도 군의 정치적 이용과 일부 군인의 정치개입으로 군사력의 약화를 가져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특히 12·12사태, 광주사태 등으로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에 금이가게 했던 것은 치명적인 안보상의 손실인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볼때 계속되는 군사독재 강화는 안보를 위협하는 제일 큰 요인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 정권은 안보를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안보를 빙자한 독재의 강화만이 있을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군의 정치개입으로 인한 부정과 부패에의 유혹은 더욱 더 큰 안보상의 문제로 될 것입니다.
남북한 간의 문제에 있어서도, 남북대화의 재개는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남북한 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실정이며, 이 남북한 간의 긴장고조는 민족의 자주적 발전의 조건이 되는 민족통일을 더디게 하는 것임은 물론, 현실적으로 국민에게 심리적, 물질적 우압을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이러한 긴장고조와 위기의식을 군사독재권력강화의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한반도 주변에는 우리 민족구성원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강대국의 패권다툼과 국가이익의 추구때문에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높아가고 있으며, 그 전쟁은 곧 한민족 전체의 파멸을 가져오는 핵 전쟁으로 치닫을 가능성마저 있는 점입니다. 이럴때 일수록 국민모두가 더욱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생각을 절실하게 가지게 됩니다. 더욱이 현재의 정권이 비이성적이며, 자신의 계속적 존속을 위해서라면 국가와 민족의 이익이나 장래문제 같은 것은 도외시 할 수도 있다고 보여지고 있어, 국민의 각성이 그 어느때보다 더욱 절실히 요청됩니다.
그리고 나는 이 기회에 평화와 인권문제와 관한 자유우방과 양식있는 평화애호가들에게 호소하고자 합니다. 평화는 전쟁없는 상태만이 아니라 강자가 약자를, 권력이 국민을 억압하고 그 기본적 인권을 유린할 때 이미 평화는 깨어져 있는 것입니다. 자유없이 평화가 있을 수 없고,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평화는 불안한 휴전상태에 불과하기 때문이니다. 세계의 한 구텅이에서 인권의 유린이 있는 속에 세계의 평화는 없습니다. 인권을 외치고, 인권의 유린에 항의하는 것은 동시대를 사는 인간으로서의 도덕적 의무입니다. 인류로서의 사명입니다. 미국을 비롯한 자유우방 세계가 추구하고 있는 이상이 자유의 실현과 인권의 신장을 통한 민주주의,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권유린을 우방이 방조한다면 양국관계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된다는 것을 보여 준 불행한 사건이 바로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사건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우리의 우방인 미국의 문화원에 방화를 하면서까지 미국 정부에 한국민의 의사를 전달한 행동이 잘 된일로는 생각치 않습니다. 나는 피해를 입은 미국측과 특히 목숨을 잃거나 부상당한 청년·학생과 그 가족들에 위로의 말을 전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는가에 대하여는 깊이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 정부가 한국과 미국의 양국 국민이 공동의 이상으로 추구하고 있는 민주주의를 외면하고, 오히려 그것을 유린하고 억압하는 독재권력을 지원하며,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한·미간의 불평등 관계가 시정되지 않는 한, 이러한 불상사는 발생할 수 있는 개연성을 언제나 지니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불행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하여 한국과 미국의 정부와 국민이 불행한 사태의 원인이 되는 일을 만들어 내지 않도록 각기 스스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최근 들어 학생들의 반정부시위에서 반미구호가 적지않게 나오고 있다고 듣고 있거니와 나는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깊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바, 그 주된 원인이 독재권력에 대한 미국정부의 지원에 있다는 점을 미국 정부가 분명히 인식할 것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국민 여러분! 이상에서 나는 지금의 국내 상황과 한반도 정세를 간략히 살펴 보았습니다. 모든 정보가 통제되어 있고, 더욱이 연금되어 있는 나로서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구체적 상황에 대해서 보고 들을 기회가 없습니다. 구태여 나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국민 여러분이 보고 들으며 피부로 느낌으로서 더 많이 더 올바로 우리의 현실을 파악하고 계실줄 압니다. 지금 이 싯점에서 무엇보다 선결되어야 할 것은 민주정치가 이루어지고 민주정부가 수립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정치의 민주화 없이는 정치적 안정도, 자립경제의 달성도, 국방력의 강화도, 민족의 평화적 통일도, 한반도에서의 평화정착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민주주의만이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을 극복하고 통일에 이르는 지름길입니다. 민주주의라는 우리가 지닌 이념과 가치가 파괴되는 속에 어떻게 공산주의에 대해 이념적, 현실적 우월성을 자신있게 국민이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민주주의 실현만이 안보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확실하고도 분명한 기반이요 담보입니다. 요컨데 우리 민족이 가장 크게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원동력은 민주주의 밖에는 없다는 것을 확언할 수 있습니다. 현 정권이 말하는 바 민주니, 정의니, 복지니, 선진조국이니 하는 말들은 그들의 의지나 신념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국민을 속이고 기만하여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해 만들어 낸 말이요 구호일 뿐인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적 정권교체는 단순한 정권담당자의 교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간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정당체제는 집권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이 오직 집권당에 대한 들러리로서 존재할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당제의 논리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평화적 정권교체는 처음부터 이루어질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 체제아래서는 결코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루어 질 수 없다는 사실과 아울러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말이 허구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지 않으면 안됩니다. 단임정신과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말을 듣고 많은 사람들은 그 말에 일말의 신뢰를 걸었을지도 모릅니다. 또는 현 정권의 작태를 보면서 단임정신 운운하는 가운데 사실상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그나마의 민주적 여력과 토양마저도 깡그리 파괴해 버리고 말것이 아닌가에 대하여 우려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화적 정권교체나 단임정신 따위 말은 처음부터 그 모두가 허위요 기만이었던 것이다.
국민 여러분! 내가 연금되어 있는 처지의 몸으로 우리 국민에게 혼심의 힘으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현 독재권력은 장기 집권을 위한 체제구축을 하나하나 구체화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단임정신이나 평화적 정권교체 운운의 말은 그 모두가 국민을 기만하여 시간을 벌자는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때문에 어떠한 일이 있어도 계속적인 집권을 획책하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죄악을 저질은 인간이 빠지기 쉬운 속성입니다. 지금 그들은 서서히 장기집권을 위한 촉수와 야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장기집권을 향한 그들의 본래의 모습이 곧 드러나질 것이라는 것을 나는 예언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2~3년이 장기집권으로 가느냐, 가지 않느냐 하는 길목이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국민은 군사독재권력 아래에서 신음하는 노예로 전락할 것이냐, 아니면 우리 국민의 손과 힘으로 창출한 민주정부아래서 민주시민으로서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실로 조국과 자신의 운명을 결정해야할 중대한 위기의 순간에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국민은 어떠한 술수와 기만에도 독재권력의 진정한 의도를 궤뚫어 볼 수 있는 예지를 가지고, 장기집권을 저지할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한 사람의 고통받는 민중으로서 그리고 이땅의 민주국민으로서 독재의 사슬과 그의 장기집권의 음모를 떨쳐 버리는데 나의 신명을 바치고자 하는 뜻을 분명히 밝혀주는 바입니다. 지금 나의 심경은 정권에의 미련같은 것은 떨쳐 버린지 오래입니다. 오직 한 사람의 이 민족, 이 국민으로써 민주주의를 기구하고 갈망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나라에 참된 민주주의가 이룩되어 인간이 인간다운 자존심과 품위와 기본적 인권을 지니고 살 수 있는 자유와 정의가 깃든 사회가 된다면 나는 그것만으로 만족하고 또 행복할 것입니다. 따라서 나의 말은 정권적 차원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밀한 저 깊은 속에서 우러나오는 한 인간의 진실에 찬 목소리로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땅의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민주애국인사와 어제 우리와 섰던 모든 정치적 동지들에게도 호소하고자 합니다. 지금 각자가 서 있는 위치가 어떠하든 간에, 여러분은 민주주의에의 갈망과 열정을 한 곳으로 모을 수 있도록 각각 노력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서 있는 입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향한 힘과 지혜의 결집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이 같은 한, 우리는 서로 화합하고 단결해야 합니다. 분열과 질시는 독재권력이 노리는 바입니다. 그들의 간계에 빠지지 말고 서로 이해하고 화합하여 장기집권 획책을 분쇄하고 나아가 민주주의를 되찾는 민족사의 소명에 나를 버리고 허심탄회하게 합류하여야 하겠습니다. 기존의 정당에 몸을 담고 있거나, 정치규제에 묶여 있거나 풀려있거나를 막론하고, 민주주의를 향한 우리 모두의 목표아래 각성하고 단결합시다. 민주주의는 우리 모두를 그 안에서 하나되게 할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믿습니다.
국민 여러분! 또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나, 가장 분명한 것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우리의 힘으로서만 이룩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이 또는 우방이 우리의 민주주의를 실현시켜 줄수는 없습니다. 이 나라 민주주의는 그 실현의 주체도, 발전시킬 책임도 우리 민중이요, 우리 국민입니다. 먼저 나 자신을 사심없이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 던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국민의 마음 한 가운데에 있는 민주주의에의 열정, 그것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10·26사태를 전후한 시기에 우리 국민이 보여 주었던 민주주의에의 불타는 눈길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우리 국민의 힘으로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정의와 평화를 마침내 이룩할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희망찬 미래를 국민과 더불어 확신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좌절을 딛고 일어설 것이며, 희망찬 조국을 건설할 것입니다. 희망과 용기를 잃는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은 것입니다.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은 국민은 국민이 원하는 모든것, 자유와 민주주의를 쟁취할 것입니다. 역사와 하나님의 정의가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끝으로 나는 이 기회에 만약 현 정권 당국이 만에 하나라도 민주화를 바라고 있다면,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민주가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고자 한다면 적어도 지금 이순간 민주화를 장애하는 요소들로 즉각 청산되어야 할 최소한의 당면과제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여 현 정권 당국의 진의를 묻고자 하는 바입니다.
① 독재정치를 거부하고, 민주정치의 확립을 위해 투쟁하다가 구속된 학생, 종교인, 지식인, 근로자 등을 민주화 선언과 함께 전원 석방하여야한다.
② 정치활동 규제법에 묶여 있는 모든 정치인과 민주시민의 정치활동을 보장하여야 한다.
③ 정치적인 이유로 학원과 직장으로부터 추방당한 교수, 학생, 근로자 등을 복직시키며, 유신정권 이래의 정치탄압으로 인하여 공민권의 제약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전면적인 복권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④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며 언론통폐합 조치를 백지화하고 유신정권이래 타의로 실직된 언론인들이 언론계에 명예롭게 복귀하며 민간방송국의 설립을 자유화하고 기독교 방송국의 정상적인 기능을 회복시켜야 한다.
⑤ 현재의 헌법은 5·17이전에 이미 국민적 합의로 되었던 대통령직선의 국민적 염원을 배반한 것이며, 국민의 기본권에 대한 유보조항을 두고 있다. 사실상 유신독재체제와 다를 바가 없는 독재헌법인 바, 현행의 헌법은 가차없이 개정되어야 한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것이 확인될 수 있는 방향으로 개정되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또한 유신시대 이래의 반민주 악법의 민주적 정비와 아울러 소위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제정한 각종 반민주 악법, 예컨데 정치풍토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 언론기본법,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국가보안법, 국회법, 대통령선거법, 국회의원 선거법, 노동조합법 등은 폐지내지 원상회복 되어야 하며 아들 법률은 제정 및 개정과 아울러 전부 또는 부분적으로 무효임을 확인하여야 한다.
이상과 같이 당면과제를 밝히면서, 나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국민여러분께 이 글을 드리는 바입니다. 국민 여러분은 좌절보다는 희망을, 체험보다는 용기를 가지고 이 난국을 극복해 주실 것은 믿고 또 바라면서, 나의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우리는 다시 만날 것입니다.
1983년 5월 2일
金泳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