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성명서 및 유인물]광주 민중봉기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민주쟁취를 위한 광주시민운동 1982.5.
본문
광주 민중봉기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1. 서 - 광주에서 학살된 이전여 넋들을 기리며
우리는 80년 5월 남도 땅 광주에서 벌어진 일들을 잊을 수 없다. 고사리같은 손을 꼭 쥐고 시위 대열을 따라다니다 캐터필더에 무참히 갈려죽은 국민 학생, 피 흘리며 죽어가는 여학생을 보고 공수대의 멱살을 잡다 대검에 찔려 죽은 70노인, 부상자를 치료해 준다고 곤봉으로 구타당해 즉사한 간호원, 시민을 지키다가 바리게이트 앞에서 적탄에 맞아 조국의 민주화를 기도하며 가신 시민군, 계엄군 진압시 도청에서 태극기를 품에 안고 쓰러져 간 청년, 그 아픈 생채기는 지금 이 시각에도 계속되고 있다. 5월이 되면 망월동 광주공원 묘지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통곡소리, 적탄에 다리를 잃고 세상을 원망하다 스스로 자결한 젊은이, 이 시간에도 민주화의 그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감옥에 갇혀있는 이들, 적들의 상기된 눈초리를 위해 몸숨김을 계속하는 사람들, 이 모든 희생에 우리는 뭐라고 보답해야 될 것인가! 좌절에 빠져 한숨만을 내쉬어야 되는가, 님들은 가셨지만 님들이 부르짖던 그 함성은 이땅이 진정한 민주화가 될 때까지 생생히 살아남아 활활 타오르리라. 광주의 횃불을 올린 지 2년째를 맞는 우리는 가신 님들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우리의 결의를 새롭게 하여 전진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에 광주민중봉기를 다시 새겨보고 전진해야할 지표로서 삼고자 한다.
2. 광주민중봉기는 어떻게 하여 일어났는가?
(1) 배경
광주 민중봉기는 그 시원을 80년 5월의 민주화 학생 대시위에서 상대적으로 의식화되고 조직화되어있는 학생 세력은 ‘계엄 철폐’, ‘전두환 사임’ 등 일련의 민주화 조치를 요구하며 드디어 5월 12일부터 가두 시위에 나섰다. 사북 시위 사태, 동국제강 사건 등 폭발한 민주화 노동운동도 80년 1월 이후 4?5까지 무려 719건이나 발생, 양적·질적으로 확대, 심화되어 민주화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언론도 사회적 요청에 따라 언론 자유 선언을 중앙일보, 비비씨, 한국일보, 동아일보 등 거의 모든 신문사와 방송국에서 연이어 결의했다. 신민당과 재야도 유신잔당에 대한 성명서를 계속 발표하여 민주화 대열에 합세했다. 이리하여 유신잔재세력과 학생을 선봉으로 한 민주세력의 일대 결전이 벌어졌다. 타오른 학생 시위의 불길은 점점 거세져 서울뿐 아니라 모든 지방도시에서 물결쳤다. 서울에서의 시위는 5월 15일 서울역 대집회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전국 학생회 연합회는 정부태도를 관망하자며 5월 15일자로 시위를 중단한다고 결의했다. 이는 타오르는 시위의 물결을 스스로 감당치 못하고 민주화 쟁취의 임무를 포기한 행위였으며 이로써 학생시위의 맥은 끊기게 될 것이다.
전두환 군대세력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5?7쿠테타를 자행했다. 끊긴 학생운동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물론 다른 부문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광주에서는 예외였다. 광주 시내 8개 대학은 15일 서울의 시위 중단 결정에 굴하지 않고 시위의 함성을 한층 드높였다. 많은 시민들이 몰려들어 학생들을 박수로 환호했으며 16일 횃불 대시위에서 시민들은 철시를 하며 성원하였다. 본래 호남지역은 역대 정권에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소외 지역이었다. 집권자가 계속 영남 출신으로 고위직에 호남 출신은 거의 기용되지 않았으며, 그간의 경제개발계획에서도 지역간의 극심한 불균형만 심화시켜왔다. 따라서 사회문화면에서도 후진성을 면치 못했다. 광주 시민들은 이 소외지역으로서의 높은 정치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갈수록 높아가는 학생시위의 물결을 타고 더욱 더 높아진 것이다. 그리고 이지역 출신으로 유신하부터 민주의 상징으로 되었던 김대중씨가 5?7쿠데타와 더불어 체포됨에 따라 시민들의 불만이 더욱 고조되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이 깊어진 연대감 위에서 학생 시위가 민중 봉기로 발전될 수 있었던 것이다.
2) 발단 - 학생시위에서 민중봉기로
5·17쿠데타가 터지자, 광주 시민들을 배신감으로 분노의 극에 이르렀다. 전남 대학생들은 휴교령시 대학 정문에 모인다는 16일 학생회의 결의에 따라, 혹은 간밤 일련의 사태에 대한 궁금증에서 전남대 정문에 모이기 시작했다. 오전 10시쯤 5,600명으로 불어난 학생들은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철폐’를 외치며 교문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했다. 이에 교문을 강점하고 있던 공수대들은 -돌격 앞으로-를 감행, 마구 구타하며 대검으로 난자하는 등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 2명의 학생이 칼에 찔리게까지 되었다. 분노한 학생들은 여기에서 시민들을 동원하려 가두로 진출했다. 순식간에 2, 3천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출동한 전경대와 치열한 격전을 벌이던 중 오전을 넘기면서 차츰 경찰력을 극복하고 아울러 시내전역에 시위가 확산되었다. 이즈음 이미 상무대에 대기해 있던 공수특전단이 출현, 닥치는대로 곤봉으로 구타하고 구둣발로 짖밟고 대검으로 난자했다. 순식간에 광주 시내는 온통 피바다로 화했다. 형언할 수 없는 잔인성에 치를 떤 시민들은 이튼 날 금남로에 무수히 모여들기 시작해 피해상황을 주고 받으며 열기가 타올랐다. 계속 몰려든 시민들은 드디어 공수대와 목숨을 건 일전에 돌입하여 바야흐로 민중봉기로 발전되었다. 광주민중봉기는 79년부터 민중봉기와 더불어 우리나라 운동의 커다란 흐름을 제시했다 할 것이다.
즉, 부산에서는 김영삼씨 제명이라는 정치적 사건 하에 부산대, 동아대 학생들의 가두시위로부터 봉기화했으며, 광주는 5·17과 김대중씨 체포라는 정치적 사건하에 대학생들의 가두시위에서 민중봉기로 발전되었던 것이다.
3) 광주민중봉기에서 왜 승리를 쟁취하지 못했는가?
우선 일부에 퍼져있는 주장을 검토해보고 넘어가자. 즉 대중들의 의식수준이 낮고 그리하여 대중이 운동과 유리되어 필연적으로 실패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러나 30여만 아니 남녀노소없이 80만 광주 시민이 그토록 열렬히 합세한 사실을 두고 운동과 유리되었다고 할 수는 도저히 없다. 대중 합세 문제는 의식이 낮아 유리된다는 그러한 단순한 논리가 아니다. 오히려 계속되는 학생 시위, 성명서 등의 정치 선전전이 사회전반의 분위기를 주도해 나가 민중들의 의식이 제고되고, 이것이 어떤 정치적 사건을 통해 상승작용을 타고 학생시위 등의 계기에 의해 합세하는 것이다. 부마나 광주에서 명백히 보여주었듯이 시민 합세는 시민들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저들의 적나라한 잔인성에 의해 직접적으로 촉발되었다. 그렇다면 승리할 수 없었던 요인은 무엇인가?
우선 첫번째로 들 수 있는 요인으로서 타 도시에서의 연속되는 봉기가 뒤따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고립무원의 고도에서 중무장한 계엄군에게 무참히도 짖밟힌 것이다. 광주 시민들이 꿈에도 듣고 싶은 소식은 서울이나 여타 도시에서 봉기가 폭발했다는 것이었다. 타 도시에서의 봉기가 뒤따르지 못한 가장 큰 직접적 원인은 민중봉기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는 학생 시위가 5월 15일자로 모두 중단되었다는 데 있다할 것이다.
대중 봉기란 정치적, 경제적인 객관적 상황이 성숙되고 그 상황을 이끌어갈 계기를 만들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당시의 객관적 상황은 충분히 성숙되어 있었다할 것이다. 또 객관적 상황이란 그저 존재하는 것일뿐 그것을 이끌어가는 것은 우리의 주체적 투쟁이다. 설령 상황이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그 상황은 우리의 투쟁으로 성숙되는 것이 아닐까?
둘째 요인으로는 지도부의 미비이다. 시민들의 열렬한 투쟁으로 공수대를 퇴각시키고 시내를 완전 장악한 후, 연일 30여만 시민들이 금남로 및 시내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시민들을 효과적으로 동원하지 못했다. 이는 지도부 부재에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수습위조차도 문자 그대로 -수습-에만 급급했다. 실제로 수습위는 투쟁파, 투항파로 나뉘어 투항파는 사태를 빨리 해결짓고 피해를 줄이자!고 주장하는 등 민중의 혁명적 열기를 잠재우는 역할만을 하고 있었다. 25일에야 학생운동 출신들로 투쟁적 지도부를 구성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지도부 미비 문제는 나아가서 조직 문제와 관련지워 생각할 필요가 있다. 평소에 조직이 존재했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봉기를 효과적으로 지도할 수 가 있었을 것이다. 특히 첫째 요인인 타 도시의 연속 봉기도 전국적으로 이어진 조직이 존재한다면 훨씬 가능해지는 문제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조직문제가 난관에 부딪힌 이유는 그간 민주화를 위한 조직을 저들이 무조건 용공이니 좌경으로 몰아 재빨리 극형에 처한 결과 그 기피증이 뿌리박혀있기 때문이다. 이는 극복해야할 실천적 과제이다. 최소한 그룹이 주체역량을 계속 증대 시켜야할 것이다.
셋째 요인으로는 투쟁경력의 미숙이다. 이점은 저들의 정체와 그리고 우리 측의 힘, 동원에 대한 정확한 인식 결여의 문제이며, 따라서 이에 대한 효과적인 대처를 못했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 문제에 있어 대체로 오판하고 있었다. 당시 전 정권을 지원하려온 미국 함정 코럴시호를 광주시민의 학살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음으로해서 부산에 정박케 했다고 한다.(투사회보 및 궐기대회에서) 그리고 저들의 선전 공세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 좀더 궐기대회, 방송국 접수, 가두방송, 신문 등의 선전, 동원활동을 강화했어야 했다. 또 학생들은 20일 저들의 만행이 절정에 달했을때 가망이 없다고 판단 모두 피신해버렸다. 이는 민중의 힘에 대한 과소평가와 저들에 대한 과대평가라는 패배주의에 기인된 것이다. 민중에의 길고도 진정한 신뢰와 책임하에서만 올바른 노선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4. 이제 우리가 싸워야할 대상은 누구인가?
광주 민중 봉기는 우리가 싸워야할 대상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명백히 해줬다. 다름아닌 전두환을 정점으로한 군벌이요, 그리고 이를 노골적으로 지원하는 미국 정권이다.
(1)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군벌
이 땅의 민주화를 부르짖고 일어선 시민들에게 전두환 일당은 공수특전단을 투입, 무참한 살육을 자행했다. 분노한 시민들은 ‘군은 38선으로 복귀하라’, ‘광주 시민을 적으로 취급하는 군과 사생결단을 할테니 경찰은 비켜달라’ ‘군부 정치 결사 반대!’ 등을 부르짖었다.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군벌은 12·12로 정권 쟁탈전을 벌여 권력을 잡고 끓어오르는 민중의 민주화 열기를 무참히 짓밟고는 5·17쿠데타를 자행했다. 저들은 드디어 광주 민중 봉기에서 2천여 시민을 학살하는 씻지 못할 대역죄를 서슴지 않고 저질렀다. 저들은 매판재벌, 기회주의적 정치인과 결탁해 군부라는 물리적 기반위에 존립하고 있다.
이제 저들이 군대라는 최후 수단을 사용, 무자비한 살육전을 벌임으로 저들의 음모를 적나라하게 드러났으며 아울러 그 만큼 저들의 종말이 임박했음을 보여준 것이다.
(2) 전두환 군부 파쇼 정권을 지원하는 미국 정권
미국은 그동안 혈맹이니, 자유와 정의의 사도로 행세해왔다. 그러나 이 허구는 광주 봉기에서 여실히 폭로되었다.
미국방성은 80년 5월 22일 “광주 데모를 진압하기위해 한미연합사 제하의 4개 대대를 파견할 것을 동의했다”고 발표했다. 또 다음날 호밍 카터국무성 대변인은 “남한의 안보와 질서의 회복을 지원하기 위해 정치적 자유화에 대한 압력을 늦추려고 하였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미국은 전두환 살인정권을 노골적으로 지원해 광주대학살극에 공범자로서의 책임을 피할 수 없게된 것이다. 광주시민들의 미국에 대한 배신감은 광주 미국 문화원 방화라는 응징으로 나타났다. 또 레이건 행정부 수립후 전두환 초청, 워커의 망언 등 전두환 정권에 대한 지원을 노골화했으며 쌀 뇌물사건, 비료 석유회사 등 미 독점자본의 경제적 침탈은 이 땅에 반미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맥락하에 이번 부산 미국 문화원도 불살라진 것이다.
5. 결 - 광주민중봉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
진정 광주민중봉기는 갑오 농민 전쟁이래 대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본격적 민중 항쟁의 지평을 여는 신호탄이 되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더 이상 공리공론의 틀 속에서만 안위할 수 없다. 논리를 앞세워 당면의 긴급한 일을 회피하거나, 자신들의 권위만을 고집해서는 안된다.
-.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인 일을 통해 우리의 뜻을 끊임없이 펼쳐나가자.
-. 학생들은 민중항쟁의 기반을 구축한다는 선봉으로서의 그 역할을 명심하고 학원시위에 매진하자.
-. 노동자들은 간단없이 동지를 얻어나가고 노동조합 설립, 임금인상 투쟁, 각종 민주 노동운동을 줄기차게 벌이자.
-. 모든 국민은 저들이 주최하는 모든 행사, 캠페인의 보이코트 등 가능한 최대의 운동을 벌이자.
-. 전두환 군부 파쇼정권의 정체와 광주 대학살극 등 그 죄악상을 폭로하고 민주투쟁을 격려하는 프린트 신문, 팜플렛 등의 선전활동을 강화하자.
-. 미국이 이 땅에서 저지른 반민주, 반통일의 사태를 수집하고 이를 널리 알리자.
1982년 5월
민주쟁취를 위한 광주시민운동
1. 서 - 광주에서 학살된 이전여 넋들을 기리며
우리는 80년 5월 남도 땅 광주에서 벌어진 일들을 잊을 수 없다. 고사리같은 손을 꼭 쥐고 시위 대열을 따라다니다 캐터필더에 무참히 갈려죽은 국민 학생, 피 흘리며 죽어가는 여학생을 보고 공수대의 멱살을 잡다 대검에 찔려 죽은 70노인, 부상자를 치료해 준다고 곤봉으로 구타당해 즉사한 간호원, 시민을 지키다가 바리게이트 앞에서 적탄에 맞아 조국의 민주화를 기도하며 가신 시민군, 계엄군 진압시 도청에서 태극기를 품에 안고 쓰러져 간 청년, 그 아픈 생채기는 지금 이 시각에도 계속되고 있다. 5월이 되면 망월동 광주공원 묘지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통곡소리, 적탄에 다리를 잃고 세상을 원망하다 스스로 자결한 젊은이, 이 시간에도 민주화의 그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감옥에 갇혀있는 이들, 적들의 상기된 눈초리를 위해 몸숨김을 계속하는 사람들, 이 모든 희생에 우리는 뭐라고 보답해야 될 것인가! 좌절에 빠져 한숨만을 내쉬어야 되는가, 님들은 가셨지만 님들이 부르짖던 그 함성은 이땅이 진정한 민주화가 될 때까지 생생히 살아남아 활활 타오르리라. 광주의 횃불을 올린 지 2년째를 맞는 우리는 가신 님들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우리의 결의를 새롭게 하여 전진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에 광주민중봉기를 다시 새겨보고 전진해야할 지표로서 삼고자 한다.
2. 광주민중봉기는 어떻게 하여 일어났는가?
(1) 배경
광주 민중봉기는 그 시원을 80년 5월의 민주화 학생 대시위에서 상대적으로 의식화되고 조직화되어있는 학생 세력은 ‘계엄 철폐’, ‘전두환 사임’ 등 일련의 민주화 조치를 요구하며 드디어 5월 12일부터 가두 시위에 나섰다. 사북 시위 사태, 동국제강 사건 등 폭발한 민주화 노동운동도 80년 1월 이후 4?5까지 무려 719건이나 발생, 양적·질적으로 확대, 심화되어 민주화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언론도 사회적 요청에 따라 언론 자유 선언을 중앙일보, 비비씨, 한국일보, 동아일보 등 거의 모든 신문사와 방송국에서 연이어 결의했다. 신민당과 재야도 유신잔당에 대한 성명서를 계속 발표하여 민주화 대열에 합세했다. 이리하여 유신잔재세력과 학생을 선봉으로 한 민주세력의 일대 결전이 벌어졌다. 타오른 학생 시위의 불길은 점점 거세져 서울뿐 아니라 모든 지방도시에서 물결쳤다. 서울에서의 시위는 5월 15일 서울역 대집회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전국 학생회 연합회는 정부태도를 관망하자며 5월 15일자로 시위를 중단한다고 결의했다. 이는 타오르는 시위의 물결을 스스로 감당치 못하고 민주화 쟁취의 임무를 포기한 행위였으며 이로써 학생시위의 맥은 끊기게 될 것이다.
전두환 군대세력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5?7쿠테타를 자행했다. 끊긴 학생운동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물론 다른 부문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광주에서는 예외였다. 광주 시내 8개 대학은 15일 서울의 시위 중단 결정에 굴하지 않고 시위의 함성을 한층 드높였다. 많은 시민들이 몰려들어 학생들을 박수로 환호했으며 16일 횃불 대시위에서 시민들은 철시를 하며 성원하였다. 본래 호남지역은 역대 정권에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소외 지역이었다. 집권자가 계속 영남 출신으로 고위직에 호남 출신은 거의 기용되지 않았으며, 그간의 경제개발계획에서도 지역간의 극심한 불균형만 심화시켜왔다. 따라서 사회문화면에서도 후진성을 면치 못했다. 광주 시민들은 이 소외지역으로서의 높은 정치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갈수록 높아가는 학생시위의 물결을 타고 더욱 더 높아진 것이다. 그리고 이지역 출신으로 유신하부터 민주의 상징으로 되었던 김대중씨가 5?7쿠데타와 더불어 체포됨에 따라 시민들의 불만이 더욱 고조되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이 깊어진 연대감 위에서 학생 시위가 민중 봉기로 발전될 수 있었던 것이다.
2) 발단 - 학생시위에서 민중봉기로
5·17쿠데타가 터지자, 광주 시민들을 배신감으로 분노의 극에 이르렀다. 전남 대학생들은 휴교령시 대학 정문에 모인다는 16일 학생회의 결의에 따라, 혹은 간밤 일련의 사태에 대한 궁금증에서 전남대 정문에 모이기 시작했다. 오전 10시쯤 5,600명으로 불어난 학생들은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철폐’를 외치며 교문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했다. 이에 교문을 강점하고 있던 공수대들은 -돌격 앞으로-를 감행, 마구 구타하며 대검으로 난자하는 등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 2명의 학생이 칼에 찔리게까지 되었다. 분노한 학생들은 여기에서 시민들을 동원하려 가두로 진출했다. 순식간에 2, 3천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출동한 전경대와 치열한 격전을 벌이던 중 오전을 넘기면서 차츰 경찰력을 극복하고 아울러 시내전역에 시위가 확산되었다. 이즈음 이미 상무대에 대기해 있던 공수특전단이 출현, 닥치는대로 곤봉으로 구타하고 구둣발로 짖밟고 대검으로 난자했다. 순식간에 광주 시내는 온통 피바다로 화했다. 형언할 수 없는 잔인성에 치를 떤 시민들은 이튼 날 금남로에 무수히 모여들기 시작해 피해상황을 주고 받으며 열기가 타올랐다. 계속 몰려든 시민들은 드디어 공수대와 목숨을 건 일전에 돌입하여 바야흐로 민중봉기로 발전되었다. 광주민중봉기는 79년부터 민중봉기와 더불어 우리나라 운동의 커다란 흐름을 제시했다 할 것이다.
즉, 부산에서는 김영삼씨 제명이라는 정치적 사건 하에 부산대, 동아대 학생들의 가두시위로부터 봉기화했으며, 광주는 5·17과 김대중씨 체포라는 정치적 사건하에 대학생들의 가두시위에서 민중봉기로 발전되었던 것이다.
3) 광주민중봉기에서 왜 승리를 쟁취하지 못했는가?
우선 일부에 퍼져있는 주장을 검토해보고 넘어가자. 즉 대중들의 의식수준이 낮고 그리하여 대중이 운동과 유리되어 필연적으로 실패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러나 30여만 아니 남녀노소없이 80만 광주 시민이 그토록 열렬히 합세한 사실을 두고 운동과 유리되었다고 할 수는 도저히 없다. 대중 합세 문제는 의식이 낮아 유리된다는 그러한 단순한 논리가 아니다. 오히려 계속되는 학생 시위, 성명서 등의 정치 선전전이 사회전반의 분위기를 주도해 나가 민중들의 의식이 제고되고, 이것이 어떤 정치적 사건을 통해 상승작용을 타고 학생시위 등의 계기에 의해 합세하는 것이다. 부마나 광주에서 명백히 보여주었듯이 시민 합세는 시민들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저들의 적나라한 잔인성에 의해 직접적으로 촉발되었다. 그렇다면 승리할 수 없었던 요인은 무엇인가?
우선 첫번째로 들 수 있는 요인으로서 타 도시에서의 연속되는 봉기가 뒤따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고립무원의 고도에서 중무장한 계엄군에게 무참히도 짖밟힌 것이다. 광주 시민들이 꿈에도 듣고 싶은 소식은 서울이나 여타 도시에서 봉기가 폭발했다는 것이었다. 타 도시에서의 봉기가 뒤따르지 못한 가장 큰 직접적 원인은 민중봉기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는 학생 시위가 5월 15일자로 모두 중단되었다는 데 있다할 것이다.
대중 봉기란 정치적, 경제적인 객관적 상황이 성숙되고 그 상황을 이끌어갈 계기를 만들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당시의 객관적 상황은 충분히 성숙되어 있었다할 것이다. 또 객관적 상황이란 그저 존재하는 것일뿐 그것을 이끌어가는 것은 우리의 주체적 투쟁이다. 설령 상황이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그 상황은 우리의 투쟁으로 성숙되는 것이 아닐까?
둘째 요인으로는 지도부의 미비이다. 시민들의 열렬한 투쟁으로 공수대를 퇴각시키고 시내를 완전 장악한 후, 연일 30여만 시민들이 금남로 및 시내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시민들을 효과적으로 동원하지 못했다. 이는 지도부 부재에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수습위조차도 문자 그대로 -수습-에만 급급했다. 실제로 수습위는 투쟁파, 투항파로 나뉘어 투항파는 사태를 빨리 해결짓고 피해를 줄이자!고 주장하는 등 민중의 혁명적 열기를 잠재우는 역할만을 하고 있었다. 25일에야 학생운동 출신들로 투쟁적 지도부를 구성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지도부 미비 문제는 나아가서 조직 문제와 관련지워 생각할 필요가 있다. 평소에 조직이 존재했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봉기를 효과적으로 지도할 수 가 있었을 것이다. 특히 첫째 요인인 타 도시의 연속 봉기도 전국적으로 이어진 조직이 존재한다면 훨씬 가능해지는 문제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조직문제가 난관에 부딪힌 이유는 그간 민주화를 위한 조직을 저들이 무조건 용공이니 좌경으로 몰아 재빨리 극형에 처한 결과 그 기피증이 뿌리박혀있기 때문이다. 이는 극복해야할 실천적 과제이다. 최소한 그룹이 주체역량을 계속 증대 시켜야할 것이다.
셋째 요인으로는 투쟁경력의 미숙이다. 이점은 저들의 정체와 그리고 우리 측의 힘, 동원에 대한 정확한 인식 결여의 문제이며, 따라서 이에 대한 효과적인 대처를 못했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 문제에 있어 대체로 오판하고 있었다. 당시 전 정권을 지원하려온 미국 함정 코럴시호를 광주시민의 학살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음으로해서 부산에 정박케 했다고 한다.(투사회보 및 궐기대회에서) 그리고 저들의 선전 공세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 좀더 궐기대회, 방송국 접수, 가두방송, 신문 등의 선전, 동원활동을 강화했어야 했다. 또 학생들은 20일 저들의 만행이 절정에 달했을때 가망이 없다고 판단 모두 피신해버렸다. 이는 민중의 힘에 대한 과소평가와 저들에 대한 과대평가라는 패배주의에 기인된 것이다. 민중에의 길고도 진정한 신뢰와 책임하에서만 올바른 노선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4. 이제 우리가 싸워야할 대상은 누구인가?
광주 민중 봉기는 우리가 싸워야할 대상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명백히 해줬다. 다름아닌 전두환을 정점으로한 군벌이요, 그리고 이를 노골적으로 지원하는 미국 정권이다.
(1)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군벌
이 땅의 민주화를 부르짖고 일어선 시민들에게 전두환 일당은 공수특전단을 투입, 무참한 살육을 자행했다. 분노한 시민들은 ‘군은 38선으로 복귀하라’, ‘광주 시민을 적으로 취급하는 군과 사생결단을 할테니 경찰은 비켜달라’ ‘군부 정치 결사 반대!’ 등을 부르짖었다.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군벌은 12·12로 정권 쟁탈전을 벌여 권력을 잡고 끓어오르는 민중의 민주화 열기를 무참히 짓밟고는 5·17쿠데타를 자행했다. 저들은 드디어 광주 민중 봉기에서 2천여 시민을 학살하는 씻지 못할 대역죄를 서슴지 않고 저질렀다. 저들은 매판재벌, 기회주의적 정치인과 결탁해 군부라는 물리적 기반위에 존립하고 있다.
이제 저들이 군대라는 최후 수단을 사용, 무자비한 살육전을 벌임으로 저들의 음모를 적나라하게 드러났으며 아울러 그 만큼 저들의 종말이 임박했음을 보여준 것이다.
(2) 전두환 군부 파쇼 정권을 지원하는 미국 정권
미국은 그동안 혈맹이니, 자유와 정의의 사도로 행세해왔다. 그러나 이 허구는 광주 봉기에서 여실히 폭로되었다.
미국방성은 80년 5월 22일 “광주 데모를 진압하기위해 한미연합사 제하의 4개 대대를 파견할 것을 동의했다”고 발표했다. 또 다음날 호밍 카터국무성 대변인은 “남한의 안보와 질서의 회복을 지원하기 위해 정치적 자유화에 대한 압력을 늦추려고 하였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미국은 전두환 살인정권을 노골적으로 지원해 광주대학살극에 공범자로서의 책임을 피할 수 없게된 것이다. 광주시민들의 미국에 대한 배신감은 광주 미국 문화원 방화라는 응징으로 나타났다. 또 레이건 행정부 수립후 전두환 초청, 워커의 망언 등 전두환 정권에 대한 지원을 노골화했으며 쌀 뇌물사건, 비료 석유회사 등 미 독점자본의 경제적 침탈은 이 땅에 반미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맥락하에 이번 부산 미국 문화원도 불살라진 것이다.
5. 결 - 광주민중봉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
진정 광주민중봉기는 갑오 농민 전쟁이래 대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본격적 민중 항쟁의 지평을 여는 신호탄이 되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더 이상 공리공론의 틀 속에서만 안위할 수 없다. 논리를 앞세워 당면의 긴급한 일을 회피하거나, 자신들의 권위만을 고집해서는 안된다.
-.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인 일을 통해 우리의 뜻을 끊임없이 펼쳐나가자.
-. 학생들은 민중항쟁의 기반을 구축한다는 선봉으로서의 그 역할을 명심하고 학원시위에 매진하자.
-. 노동자들은 간단없이 동지를 얻어나가고 노동조합 설립, 임금인상 투쟁, 각종 민주 노동운동을 줄기차게 벌이자.
-. 모든 국민은 저들이 주최하는 모든 행사, 캠페인의 보이코트 등 가능한 최대의 운동을 벌이자.
-. 전두환 군부 파쇼정권의 정체와 광주 대학살극 등 그 죄악상을 폭로하고 민주투쟁을 격려하는 프린트 신문, 팜플렛 등의 선전활동을 강화하자.
-. 미국이 이 땅에서 저지른 반민주, 반통일의 사태를 수집하고 이를 널리 알리자.
1982년 5월
민주쟁취를 위한 광주시민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