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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성명서 및 유인물]최기식 신부 구속에 관한 담화문/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상임위원회 1982.4.15

본문

최기식 신부 구속에 관한 담화문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최근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사건에 관한 보도를 접하면서,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이번 사건의 중대성에 비추어 진실이 왜곡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우리는 교형 자매 여러분에게 교회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자 합니다.

모든 언론을 동원한 사건 보도는 국민들로 하여금 가톨릭 교회를 불온 집단의 온상으로 오해하도록 유도하면서, 마치 최기식 신부를 방화의 배후 인물 또는 좌경 의식화 교육의 주관자로 부각시켰습니다. 오늘 이 사회의 언론 자유 실상을 잘 알고 있는 우리는 이러한 일방적인 과정 보도의 저의를 묻지 않을 수 없으며, 국민들 사이에 불신감과 위화감을 조장해 온 일련의 보도 사태를 극히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정부 당국이나 언론이 여론을 오도하여 교회를 비방하더라도, 교형 자매 여러분께서는 순교로 점철된 2백년 교회사에 뿌리박은 우리의 신앙을 의연히 지켜가시리라 믿습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안에서 기도와 일치로써 꿋꿋하게 고난과 시련을 극복해 나갈 것을 호소하는 바입니다.

또한 “모든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이 되어야”하는 사제직의 근본을 올바로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사제는 그가 누구이든 방화를 교사할 수 없으며, 좌경 의식화 교육을 통해 우리 젊은이들을 공산주의자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도움과 보호를 요청하는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증오의 돌을 던지거나 밀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사제의 신원입니다. 이번 방화사건과 관련하여 교회를 찾아와 그 보호를 받고 있던 사람들을 본인들의 뜻에 따라 당국에 자수를 주선해 준 최기식 신부의 행위는 사제로서 최선의 길이었음을 우리 교회는 확신하는 바입니다. 또한 광주사태로 말미암아 쫓기고 있는 사람들을 보호해 준 사제들의 양심을 전적으로 존중하는 바입니다. 공익이나 제3자에게 또 다른 피해가 확실시되지 않는다고 양심적으로 판단되는 경우, 신앙인은 도움을 간청하는 범법 혐의자를 고발할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광주사태는 그 진상과 원인 또는 책임의 소재가 공정하게 밝혀진 바 없으므로, 사제들은 자신의 사제적인 양심에 따라 보호를 요청해 온 혐의자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신앙인은 그 신앙 안에서 양심법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 교회가 어떠한 특권을 주장하거나, 사회의 실정법을 경시한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양심법에 선택이 결과적으로 실정법에 위배되었다면, 그 실정법에 따른 처벌을 각오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양심법을 따르다 보면, 국사범이나 국가 보안사범으로 몰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순교선열들이 모두 국사범으로 처형되었고,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양심법을 따랐던 수 많은 사람들이 국가안보사범으로 처벌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국가의 소중함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부가 곧 국가라거나, 또는 정권이 무너지면 국가도 무너져 공산화되고 만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국가가 있고 종교가 있다”는 말에는 수긍할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가 두려워 모든 국민이 정부에서 시키는 말만 반복하는 사회가 된다면 그 사회는 공산 독재국가와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사회 구석 구석에 까지 밀고자가 침투되어 있는 불신 사회를 원하지 않습니다. 국민 상호 간에 믿음을 조성하지 못하고, 오직 물리적 힘과 공포로써만 외적 질서를 유지하는 그러한 사회는 그 내부로부터 분열되어 붕괴되고 말 것입니다. 요즘의 오도된 여론으로 마치 우리 국민이 그러한 사회를 원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우리는 이번 사건의 근본 원인을 진실하게 성찰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 날 광주사태와 겨레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자세를 견지해 왔습니다. 오직 사랑과 화해의 정신으로, 정의와 관용을 바탕으로, 구시대를 청산할 것을 촉구해 온 것입니다.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사건과 관련하여 우리는 민족화합의 염원이 균열되지 않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정부당국은 뒤늦은 최기식 신부 개인의 범법행위로 문제를 국한시키려 하고 있으나, 사건의 경위나 성격 그리고 사제의 신원에 비추어 볼 때, 이는 어느 특정개인이 아니라 교회와 사제 전체의 문제일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재판을 받는다는 입장에서, 이번 사건에 연루된 최기식 신부와 모든 피의자들이 올바른 법 앞에서 공정하게 재판받는가를 예의 주시할 것입니다. 최기식 신부가 겪고 있는 고통을, 우리는 모든 사제와 수도자 그리고 온 교회가 직면해 있는 이 시대의 고통과 위험으로 겸허하게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또한 모두가 한 형제인 우리는 이번 사건에서 희생된 학생들과 그 가족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뜻을 전합니다. 다시는 이같은 폭력사태의 악순환이 거듭되지 않기를 바라마지 않는 우리 교회는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수호하는 참으로 정의롭고 인간다운 사회가 이룩되어야 한다는 것을 새삼 천명하는 바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하느님의 나라를 향하며, 오늘의 현실이 강요하기 쉬운 권력과 금력의 노예상태에서 해방되어, 자유스러운 인간 본연의 모습을 실현하고자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는 어떠한 희생이 따르더라도 잃어버린 한마리 양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가난하고 힘이 없이 짓눌리고 고통받는 사람들, 특히 산업사회의 그늘에서 인간의 권리를 빼앗긴 채 자신의 목소리마저 잃어가는 노동자 농민들의 편에 서서, 우리는 누구 하나 소외되지 않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 존중받는 사회를 끝가지 지향할 것입니다.

이 기회에 우리는 정부 당국이 참된 국민적 화합을 위해서 광주 사태 및 학원 사태 관련자들의 전면적 사면과 아울러 정치적 이유로 구속된 모든 양심수인들에게도 관용을 베풀어 사회에 복귀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기 바라는 바입니다.

죽음의 암흑 속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신 전능하신 하느님께, 우리 모두 일치된 마음으로 정의와 평화를 간구하여야 하겠습니다.


1982년 4월 15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상임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