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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자료실

작성일2007-05-30

[성명서 및 유인물]어느 동참자의 회고 1981.6.

본문

어느 동참자의 회고



세월은 느끼기 전에 앞서 간다고 하던가.

그 날 그 후 만 일년이 경과하였다. 만 일년이 지난 후 오늘에야 광주 시민봉기에 대한 총정리를 하면서 만감이 교차함을 느낀다. 먼저 가신 열사 제분들께 부끄러움을 가지며 용서와 아울러 채찍으로 함께해 주시길 빈다. 하얀 지면 위에 핏기없는 액체가 뚝뚝 떨어져 포도 위의 핏방울마냥 서서히 번져 가고 있다.

지난 5월 27일 이후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1 27일 새벽 계엄군의 무차별 난사를 피해 끝까지 싸우고자 하는 동료들을 두고 친구집으로 도망을 했다. 친구집은 한창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도청과 상가가 밀집해 있는 중심지와 가까운지라, 끊이지 않고 총격과 폭약 터지는 소리가 세차게 귀청과 대뇌부를 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어인 일인가. 나는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어 버렸다.

오전 열 시경쯤 되었을 때 난데없는 고함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 벌떡 일어났다. 완전무장을 갖춘 계엄군이 나의 가슴팍 바로 앞에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순간 창문을 통해 밖을 둘러보니 거의 일개 소대의 병력이 두 명씩 한 조를 이루어 바삐 돌아다니며 건물 구석구석과 각 방을 수색중이었다.

밖에 나가 있는 친구가 걱정에 차서 겁을 잔뜩 먹은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 가슴팍에 총구를 겨냥한 계엄군이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다.

나는 뒷주머니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 그 병사의 손에 건네주며 말없이 그의 눈을 마주보았다. 긴박한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침착성은 위기의 순간을 행운의 길로 전환시켜 준다고 했던가.1 엄한 표정을 하며 병사가 몇 가지의 질문을 내게 던졌다. 나는 그의 질문에 대하여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었다. 지난 며칠 동안의 시민궐기대회와 간밤의 가두시위로 인해, 금세라도 터져 나와 버릴 것 같은 가슴속에 응어리진 소리를 제외하고는 목구멍의 최소한의 기능마저도 사용할 수 없었다. 지나치게 목이 쉬어 말은 커녕 한 톨의 신음마저도 할 재간이 없었다. 다행히도 병사가 벙어리라고 생각을 해준 것일까.1 병사는 아무 말 없이 자기를 응시하는 나를 방 한쪽 구석에 밀어붙이고 벽장, 선반, 상자, 가방, 그리고 방 장판을 걷어올리고 시멘트 바닥까지 샅샅이 조사를 했다. 운이 좋았을까.1 아무튼 그 순간은 무사히 지나갔다. 이와 같은 세밀한 수색은 27일 하루 동안만 해도 세번이나 있었다. 세번 모두 반항 없이 체념상태에서 묵묵히 그들의 지시에 따르며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든 내버려 두었다. 다행스럽게도 병사들은 무기를 회수하며 수색하는 데 혈안이 되어 다른 일, 즉 주모자를 색출하는 데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수사요원은 오지 않았으며 그들 자신이 수사요원은 물론 아니었다.

밖으로 나오니 햇빛에 눈이 부셨다. 건물내를 제외하고는 시민들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모두 죽어 버린 것일까, 아니면 모두 오랏줄에 묶여 연행되어 간 걸까. 답답증을 참지 못하고 밖으로 잠깐 다녀온 친구가 거리에는 민간인은 거의 구경할 수도 없고 큰 도로든 작은 골목이든 관계없이 도로가 교차되는 곳은 계엄군이 차단하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계엄군 일개 분대는 한 조를 편성하여 각 교차로마다 도로를 차단하고 모든 사람들에 대한 검문검색을 하고 있었다. 5층 이상의 건물 옥상에는 어느 곳이든지 병사들이 진주해 있었다. 근처의 상황을 감시하며 조금이라도 수상쩍은 곳이 있거나 사람이 있으면 가차없이 M16을 연발로 난사했다. 누구도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 수 없었다. 카키색 무전기와 망원경, 햇빛에 반사되어 번뜩이는 총신과 휘장, 찬란한 제복, 이것들은 생동하는 우리 도시를 카키색 일색으로 물을 들였다. 하늘은 푸르렀고 강열한 햇빛은 눈이 부시도록 밝았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우리의 생각이었지 사실은 아니었다. 하늘도 온통 카키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미국의 기술문명은 미군의 소리가 되어 요란하게 모든 공간과 우리들 마음속의 공간을 빼앗아 갔다. 광주시민에게 있어서 헬리콥터의 기동성과 기능, 그리고 그 기체의 엔진소리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1

푸닥타닥, 푸닥타닥!

인도지나 반도, 월남내란에서 미군에 무력으로 개입하여 적의 고지를 분쇄하고 인명을 실상하는 데 위맹을 떨쳤다고 코브라라 명명된 헬기 수십 대가 광주의 온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우리의 사랑스러운 도시를 황폐화시키려는 초토화 작전이 내려진 것일까.1 그들은 확실히 위협적으로 시위를 하고 있었고, 모든 시민에게 공포감과 위축감을 주기에 충분하게 보였다. 네이팜탄이나, 혹은 기물을 파괴하지 않고서도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순식간에 앗아갈 수 있다는 크로즈 미사일을 적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는 오늘과 같은 광주 시민봉기에 유효 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닌지.1 이곳 광주시민 중에도 지난날 맹방 미국의 명령을 받들어 월남에 파병되었던 병사도 많았다. 그리고 그들은 역시 민주화에 열렬하고 긍지 높은 광주시민이었다. 전에 용감했던 병사들은 이웃들과 얘기를 주고받았다. 미국의 성능 좋은 전쟁무기와 어머어마한 파괴력, 살상력을 말했다. “광주시민 절반 이상을 죽여도 좋다고 하였다더라”, “월남내전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운 다양한 무기와 두뇌가 동원되고 또한 새로 개발된 화기도 광주시민의 몰살과정에서 그 성능을 실험해 본다더라.” 어느 곳 어느 하늘을 둘러보아도 카키색이 풍요하게 넘실거리고 있었다. 밥상도 수저도 천정도, 우리들의 마음까지, 그리고 카키색은 증오 그 자체이기도 했다. 호흡하는 공기마저 카키색으로 물들지 않았음을 천만다행으로 여길 일이다. 커다란 군화 발자국은 어느 곳이든 가지 못할 곳이란 없었다.

나는 더이상 도심지에 소재한 친구의 집에 머물 수가 없었다. ‘나를 잡아가 주시도록’하고 기다릴 수는 없어 이튿날 위험을 무릅쓰고 도심지를 벗어나 외곽지역에 있는 친구 집을 향해 문밖을 나섰다. 활발하고 자유스럽고 인정 있고 논리적이었던 도시가 하룻밤 사이에 또다시 철창 없는 감옥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피비린내와 너절하게 찢긴 육체, 절규와 신음소리, 총기와 날이 번뜩이는 대검의 냉기, 이곳에서 탈옥하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거리의 구석구석이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훤했지만 빠져 나갈 구멍은 없었다. 친구집을 나와 오분 정도 경과한 때, 그러니까 골목을 누비며 오륙백여 미터쯤 나아갈 즈음 당연하게도 볼로동 다리에서 일군의 계엄군 병사들에 의해 제지를 받았다. 신분증이 제시되고 그들의 지시에 따라 바지와 소맷자락을 걷어올려 보였다. 또한 그들의 육모방망이의 표적의 대상이 되었던가를 확인받기 위해 머리도 헤쳐졌다. 병사들 중 지휘관으로 여겨지는 자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대뜸 “당신 주동자지.1”하고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리고는 상의를 벗으라며 호주머니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나는 거의 체념상태에 빠져 있었다. 친구집에 남아 있거나 출발하여 외곽지대로 빠져 나가거나 붙들린 가능성은 마찬가지였다. 허나 가만히 앉아 붙잡히는 것과 최소의 희망이나마 의지하고서 행동하다 붙잡히는 것은 심리적으로 보나 또한 여타 면에서 보나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내가 주동자도 아닌 그보다 불순분자로 간주되는 것은 과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로써 그것은 증명되었다. 하얀 운동화의 더러움, 얼굴의 그을음, 전혀 말을 못 할 정도의 쉰 목청, 이 때 내가 취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지휘관의 눈을 정확히 응시하고 있을 뿐 연초의 토정비결이 좋았을까, 위기의 순간, 의외로 그 지휘관은 호의를 베풀어 집에 가거들랑 절대 집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당부를 하고는 그들의 방위선을 무사히 통과시켜 주었다.

그러나 역시 길은 험난하다. 내가 찾아나서는, 곧 조금이나마 안전지대라고 자신이 판단하는 장소까지 가기 위해서는 아직도 십 리 정도의 길이 남아 있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애써 태연한 척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을 때, 마침 전번부터 안면이 두터운 형 한 분이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치는 중이었다. 뒷좌석에 올라타고 얼마를 갔을까, 또다시 삼엄한 임시검문소가 이백 미터 전방에 보였다. 아주머니나 혹은 늙은 분들을 제외한 젊은 사람이 검문을 피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 “예외란 없다”라고 말하는게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도로와 접해 있는 술집에 들어가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검문을 당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제법 줄을 잇고 있다고 판단되어질 때 도박을 해야 성공의 가능성은 높은 것이다. 운과 판단과 아주머니의 바구니와 치맛자락은 어려운 상황을 무사히 넘기도록 배려를 해주었다. 도심지에서 차츰 멀어져 갈수록 병사의 행진과 차단의 횟수도 줄어들었고 토박이라는 이점은 내게 최적의 골목길로 나를 안내했다.

무사히 도착했다. 가장 먼저 취해야 할 일은 고등학생마냥 머리를 짧게 깎는 일이었다. 이것은 또다른 위험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의 판단은 그쪽을 택했다. 상황과 판단(감각)은 생존이다. 위급한 상황, 이에 대처하는 신속하고 정확한 판단과 실천으로의 연결은 운동의 향방과 생사의 문제에까지 영향을 준다. 햇볕을 볼 수 없는 골방, 지극히 미세한 것에 대한 심리적인 불안감, 패배의 아픔과 먼저 가신 열사·동료분들에 대한 죄스러움과 부끄러움, 함께 뛰었던 동료들의 안부, 구석구석에 쌓인 분노로 2개월을 보냈다. 가끔 친구들이 찾아와 시골이나 서울로 은신처를 옮길 것을 권했으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비록 골방에서 감금상태에 있다고는 하나 자신이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한 판단이었다. 후에 이것은 여러 가지로 나의 판단이 옳았던 것이 확실했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무사히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장 위험스러운 것처럼 느껴지면서도 가장 안전한 장소가 되어 줄 수 있는 곳이 서울이라는 묘한 도시였다. 전혀 생소한 사람도 거부감 없이 쉽게 받아주는 곳에 서울인 것이다. 열두시간의 노동, 공장 밖으로의 외출이 자신의 위축감으로 인해 좌절된 상태, 사실과 거의 두절되고 왜곡과 오도에 매몰되어 있는 노동자들과의 만남, 이런 것은 심신을 피로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느덧 서울 유배지의 생활도 4개월이 흘렀다. 정국의 흐름과 동료들의 재판과정은 나를 다시 고향으로 유혹하고 있었다. 1981년 1월, 사랑하는 도시에 다시 돌아왔다. 건강한 모습으로 그리고 그 후 5개월이 지났고 나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붓을 잡고 여러분들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1981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