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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아들아, 네 어깨죽지에 새긴 평화의 비둘기로 훨훨 날아라/김형관 열사(국민신문, 1988. 6)

본문

5뭘인물사

-김형관 열사 어머님의 수기

아들아, 네 어깨죽지에 새긴 평화의 비둘기로 훨훨 날아라



『기독교병원 시체실에 갔을 때 얼굴이 으깨져 알아볼 수 수가 없었습니다.눈에 익은 옷과 어깨의 지둘기 문신을 보고서야 우리 형관이란걸 알았습니다.으스러진 녀석의 얼굴 위에 엎어져 정신을 잃었습니다.몇달 후 형관이의 아버지까지 홧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등졌습니다.문득 서럽고 외로울 때마다 하늘을 보면 우리 형관이가 아버지 손을 잡고 한 마리 비들기로 훨훨 날아다니는 것을 봅니다.』

너무도 놀라 정신이 없었읍니다. ,5월 며칠인가 날짜도 기억에 없읍니다. 어렴풋하지만 초파일이었던 것 같기는 하지만 5월 20일인지 21일인지는 기억이 안납니다. 들어 오지 않는 자식을 찾으러 백방으로 뛰어다닌 것 밖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청천벼락도 유분수지 우리 형관이의 시신을 보듬고 얼마나,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이목구비가 반듯하던 내 자석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읍니다. 아이고 그 광경을 어찌 말로 헐 것이요. 오직 했으면 부모가 자식을 몰라보고 지나쳤을까 말입니다. 얼굴에 총을 맞었는가 눈, 코, 입 할것없이 지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께요.

벌써 8년 세월이 흘러갔읍니다. 맨 처음에는 하루도 못 살것 같드만 사람 목숨이 모질어 속병만 짊어지고‥

8년 전 그 날도 "하지 마라, 나가지 마라" 해도 빼앗긴 우리 나라를 찾아야 한다고 뛰쳐 나가는 자석을 붙잡지 못하고 가슴만 끓어오르는 부모 심정은 당해본 사람 아니고는 모를겁니다. 얼마나 애간장이 녹아내렸는지 도청앞이고 어디고 애기 아버지랑 나랑 우리 형관이를 찾아다녔 읍니다. 20살이 넘은 큰 자식이라 기운으로도 못해 보니 잡아 끌고 들어을 수는 없다하더라도 죽지 않고 살아만 있는 것이라도 지 두눈으로 확인해야 했읍니다

지금도 진저리가 쳐집니다. 도청앞에서는 대빗자루로 피를 쓸어 담아야 했고,어느날 우리 자석 찾으러 나섰다가 식당으로 몰려들어간 여학생들을 옷을 벗긴 채로 트럭에 싣고 갈때 울부짖던 그 여학생의 얼굴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지금 어디에 살아나 있는지. 이렇게 형관이를 헤메고 찾아 다니다 못찾고 돌아와 보니 작은 아들놈이 "어

떤 아주머니가 연락해 줬는 형이 죽었다·.·"하고 말을 끝맺지 못하고 울먹거렸읍니다. 이것이 원일이다냐. 그럴리 없다고 팔팔 뛰다가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다고 애기 아버지랑 나랑 반실성해서 돌아다녔읍니다. 지원동 다리밑에 시체가 쌓였다고 해서 달려갔더니 하루전까지도 있었던 시체를 헬리콥터로 싣고 어디론가 갔다고 합디다. 그래, 병원시체실이라고 생긴데는 다 가봤읍니다. 기독교 병원에서 내 발아래 두고도 얼굴이 알아볼 수 없게 뭉개져 있었으니 어찌 알아볼 수 있었겠소.또 누가 송암동 남선연탄공장이 있는디서도 많이 죽었다고 하길래 부랴부랴 달려가 시체더미를 뒤적이며 찾았지만 우리 형관이는 없었읍니다. 그러다 기독교병원 시체실을 다시 한번 가보자고 즈그 동생이 그래서 가봤더만 얼굴은 일그러겼지만 옷과 어깨의 비둘기 문신을 보고 우리·형관이를 찾아냈지요. 애기 아버지도 형관이가 가고 얼마나 있다 시름시름 홧병을 앓더만 세상을 등지고 말았읍니다. 자식들은 아직 어리고 애기들 아버지가 벌어다 준것 갖고만 살아와서 앞으로 살길이 암담했읍니다. 어떻게 집을 팔고해서 장사라도 해볼 심산이 었지요. 그러나 방안통수로만 있던 저에게 세상은 너무도 쌀쌀했 읍니다.

불과 1년 남짓동안 아들 잃고 남편 잃고 그나마 없는 재산까지 날려버렸읍니다. 그 후부터 지금까지 곤란함을 이루 말할 수는 없었지만 작은 아들이 직장에 다녀 생활을 그나마라도 꾸리고 있읍니다 사람 목숨이 질겨 한숨과 시름의 새월을 보냈지만 인자는 남은 건 恨뿐이고 어떻게라도 질게 살아 두환이, 노태우의 비리를 밝혀 처단되는 것을 이 두 눈으로 꼭 봐야할 것이구만요. 그라고 8년이 지났던 어쨌던 간에 그때 그 징한 일은 꼭 제대로 밝혀야 우리 착하디 착한 큰 아들 형관이가 편하게 두눈을 감을 것이제 .

즈그 형제들 중에서는 제일 건강하고 큰아들답게 듬직했던 우리 형관이는 늘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최고였지요. 학교다닐때도 한번씩 친구들 몰고 오면 쌀이 푹 굴정도로. 오늘은 저 친구들 내일은 이 친구들. 어울리는 친구들이 왜 그렇게도 많은지. 형편이 곤란해 대학을 못보냈읍니다. 그러나 없이 살아도 구김살 없던 우리 착한 자석을 누가. 무엇때문에 이 에미 곁에서 데려 갔읍니까?

그놈들, 그놈들한테 원수를 갚아야한디, 원수를 꼭 갚아야 한디‥‥

김형관

1959년 7월14일 광주 학동에서 태어남

남국민학교,무등중,숭의실고를 졸업.

(80.5월 당시 22세.회사근무)

주을석씨의 5남중 장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