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5월의 절규]가 잠든땅 망원동 제3묘역.김재명(월간중앙, 1988. 5)
본문
「5월의 절규」가 잠든 땅
망월동 제3묘역.
金 在 明(月刊中央 기자)
참배객 줄 잇는 『민주화의 聖地」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5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딜 갔지
望月洞에 부릅뜬 눈. 수천의 핏발 서려 있네'
5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산 者들아 산 者들아 모여서 함께 나가자
욕된 역사 고통 없이 어떻게 헤치고 나아가랴
5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굳이 몇월이라 가릴 것은 없으나 해마다 특히 5월이면 망월동 그대의 묘역에선 오월의 노래가 을려 퍼져 부르는 이나 듣는 이나 눈시을을 적시곤 하오. 이 땅 민주화를 외치다 쓰러져간 1백29基의 님들이 잠들어 있는망웜동 묘소--사람들은 그대를 .~민주화의 聖地"라란 부르길 서슴치 않소, 올해 5월에도 숱한 사람들이 혹은 버스를 타고 혹든 걸어서 그대 있는 곳으로 「성지순례」를 다녀갔다고 들었소.
북에서 내려보낸 공산게릴라도 아니요,대한민국이란 존재를 부인하는 外敵도 아니요,그저 내라는 세금 꼬박꼬박 물어온 양민과 그들의 자식들이 「참민주」실현하자고,「자유」 조금 더 달라고 목청을 높였다 하여「폭도」로 몰아 죽이고 팼던 비극의 5월. 올해도 어김없이 그 5월은 찾아왔건만,망월동 그대의 묘역을 감싸고 도는 숱한 怨魂들은 아직도 제대로 자릴 못잡은 듯하오. 8년이 지난 지금도「진상조사」나 「책임규명」이 제대로·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소리가 높은 현실을 맏월동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오?
기자가 그대를 찾아나선 때는 전국적으로 광주민중항쟁 관련모임이 벌어지던 바로 그 즈음인었소. 괌주 중심부에서 창평, 옥과·곡성 쪽으로 난 국도를 따라 북으로 30분옴 차를 달리면,원쪽으로 망월동 묘소 그대 있는 데로 이어지는 좁은 길이 하나 나옵디다, 버스 두대가 간신히 비켜나가는 그 길은 ,지난 해까지만 해도 비포장도로였소. 러나 지난 3월 盧泰黑.대통령의 광주방문길에 맞춰 2.3일 사이에 아스팔트로 닦여졌다 하오 그동안 숱한 사람들이 망월동 묘소 그대를 찾았건만 5월의 비극이 있은지 8년째를 맞는 해에 비로서 먼지 없는 길이 들어선 거요.
그런 내력을 지닌 길을 3km쯤 가노라니 야트막한 언덕에 무수한 묘석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옵디다. 광주직할시에서 관리하는 이 공원묘지의 1·2·5·6묘역은 일반 묘역이었고 「그해 5월」의 희생자들이 잠들어 있는 그대는 제3묘역이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대를 「5·18묘역」 혹은 그냥 「망월동묘역」이라 일컫지오.
증요한 사실은 아니지만,그대가 자리한 곳은 굳이 따진다면 망월동이 아니라 합디다. 행정구역상 광주시에서 관리하는 공원묘지는 운정동과 수곡동 등 두 지역에 걸쳐 있고,망꿜동은 다만 공원묘지로 들어서는 3hn 길의 입구쪽을 가리킨다는 얘긴요. 말하자면 망월동은 5·18묘멱 그대 있는 곳으로 들어서기 위해 밟고 스쳐가는 땅에 지나지 않는 셈이오. 그런데도 그대를 포함한 「광주시 공원묘지」를 「망월동 묘역」이라 하게 된 까닭은 어디에 있겠소. 아마도 「望月」이란 그대 이름이 묘지 특유의 분위기와 그럴듯하게 맞아 떨어지기 때문일지도 모르오.
「아 ! 형제여 싸우다 죽자」
80년 5월 18일 0시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서울의 봄」은 가고 「接겨울」의 한파가 기습했소.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지고 어떠한 집회·시위·파업도 금지하는 포고령 10호가 발효됨과 아울러 정치인 민주인사·학생들에 대한 검거선풍이 불어 닥쳤소. 이런 사태가 올지도 모른다고 얘기되곤 했으나,10년에 걸친
유신독재에 진저리를 치면서 민주화를 갈망하던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겐 그야말로 충격이었소. 광주에서의 「비극의 5월」은 그렇게 시작되었다오.
5월 18일 오전 10시쯤 전남대 교문 앞에서 계엄군 몇명과 학생들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을 때만 해도「그해 5월의 비극」이 그곳 광주에서 벌어지리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않았을진 모르오, 그러나 계엄군인 특전사병력은 시민 학생은 물론 어린이·노인·부녀자를 가리지 않고 때리고 죽이고 짓밟았소. 오죽하면 그들을 두고 『차마 우리 국민의 군대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는 말이 나돌았을까. 다음날 「아 ! 형제여 싸우다 죽자」는 유인물이 나돈 것도 바로 그런 배경에서요. 계엄군의 무자비한 대응에도 불구,시위군중은 불어만 갔소.
20일엔 20만을 웃돌았다고 합디다. 그만큼 희생자들도 늘어났고‥‥
21일 시민·학생들은 드디어 총을 들었소. 그날 새벽 광주세무서에 불을 지르고 예비군무기고를 습격,소총들을 탈추한 것이오. 그날 오후 8시 전남도청을 시민들이 「접수」한 것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였소. 계엄군은 죽기를 각오한 시민들의 기세에 눌렸는가,모두 후퇴했소.
그때 (21일 )까지 만 해도 광주 바깥 사람들은 그곳에서의 비극을 잘 모르고 있었소. 삼엄한 보도관제 탓이었다오. 도청을 시민·학생들이 접수한 21일에야 계엄사는 처음으로 광주에서 「사태」가 일어났음을 나라 안팎에 고백했소, 그러면서도 그 진상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음은 물론이오. 서울을 벗어난 소요주동학생들과 깡패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려 그런 사태가 벌어졌고 그 와중에 민간인 1명,군경 4명이 죽었다는 발표도 그러하오.
그런 계엄사의 발표가 거짓이라는 것은 전남도청 앞 광장에 태극기로 덮인 채 늘어선 시체들이 실증해 주었소. 그들 가운데 일부는 참혹하게 죽어갔소. 머리가 으깨져 누구인지조차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소.시민들은 도청 앞 상무관에 신원이 확인된 시체 30구를 안치하고 분향소를 설치,그 넋을 달래었을 뿐이오
「가슴에 竹槍을 꽃고 오라」
어떤 이는 19세기 유럽의 파리 코뮌(1871년 3월 18-5월 27일 )에 견주기도 하지만,「불안스런 평화」의 1주일은 빨리도 지나갔소, 5월 27일 새벽 랭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오자,공포와 죽음 그림자가 다시금 온 시가지를 훓고 지나갔다오
광주를 장악한 군은 여기저기 나뒹구는 시체들의 신원을 파악하는 작업에 들어갔소.전남북지부 계엄분소와 광주지검 합동검시반이 .그 일을 맡았다 하오.이틀 동안의 검시작업이 끝난 2?일 연 고자가 있는희생 자들은 소속 동장에게 넘겨져 그의 책임 아래 망월동묘역 그대에게로 운구되었소.
유가족들은 계엄당국에 의해 엄격히 통제되었소, 유가족들이 장위동 동사무소까지 가면 신원확인을 거쳐 시당국에서 그들을 그대에게로 보내주는 절차를 밟았소. 더구나 희생자 1인당 유가족 참석자는 5명으로 제한받았다지요. 한편 너무나 참혹하게 죽어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포함,신원이 확인되지 못한 무연고 사망자들도 5·18묘역 에 가매장되었소. 지금껏 「두명열사」로 남아 있는 11기의 주검이 바로 그들이오, 그런 절차를 거쳐 망월동 그대가 1백26기의 5·IS묘역에 기매장 되었소. 그대가 자리한 곤 바로 앞에는 국민학생 키높이의 작은 입간판이 하나 서 있지요. 「오월에서 통일로」「민족통일」이란 붉은 색 리번이 매달려 있는 그 입간판엔 「5·18광주민중혁명 희생자묘역 안내」란 굵은 글자 아래 그대의 내력이 적혀 있음니다.
洪南淳님(74·변호사)이 위원장으로 있는 "광주 5 · 18민중혁명희생자 위령탑건립 및 기념사업 범국민운동추진위원회j가 지난해 가을에 세운 이 입간판은 한글·영문 두가지로 씌여 있는데,영문안내판 쪽엔 이런 낙서가 눈을 끌었소.
「미국 x은 아무도 오지 마라_
!양키X은 여기가 그대들의 전적지가 아님을 깊이 인식하고 가슴에 죽창을 꽃고 오라」
「脚葬하면 1천만원 주겠다」
80년 5월의 상황으로 미루어 그대 5·18 묘역에 상당수의 희생자들이 함께 묻히기에 이른것은 권력당국으로서도 궁여지책이었을 듯하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당국은 그런 조치가 「커다란 실수」였음을 깨달아야 했소. 해마다 5월이면 유가족은 물론.전국에서 숱한 참배객들이 망월동 그대에게로 몰려들어 한바탕 울음을
쏟아놓고,끝내는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곤 했기 때문이오. 그대가 80년대 「민주화의 聖地」로 떠오른 것은 자연스런 과정이었을 듯하오.
권력당국으로선 「골치텅어리」인 그대를 어떻게든 없앨 수만 있으면 없애버리고 싶었을 것이오. 83년 봄부터 다른 곳으로 이장해가면 1천판원을 주겠다고 유족들에 제의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요. 「전님지역개발협의회가 그런 제의를 했다고 합디다. 82년 5월 18일 당국이 광주시민들을 무등공설운동장으로 강제동원 이른바 시민단합대회를 연다고 바삐 움직일 즈음에 이 단체의 표면적인 설립취지란 낙후된 전남지역을 발전시킨다는 것이었소. 그러나 실제로는 전남지역 기업인들로부터 강제성금을 거두어「위로금」이란 명목으로 유가족들을 회유·분열시키자는게 설립목적 가운데 하나였다고 광주사람들은 믿고 있읍디다.
유가족들에 대한 「현금공세」는 83년 4월부터 시작됐소.. 사망자에겐 1천만원,부상자에겐 그 정도에 따라 4백만원에서 1천만원까지였소. 그런나 유가족들이 1천만원을 받으려면 망월동 묘역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어 있었소.집안의 기둥을 하룽침에 잃어버려 사람이면 지녀야할 최소한의 삶의 조건마져 채울 길 없이 가난에 찌들리던 일부 유가족은 그 현금공세에 넘어가고 말았소.그렇지만 대부분의 유족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견뎌냈소.시인 막몽구님은 "무덤만 파가면"이란 시에서 유족들의 의연한 태도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소.
자네들은 억울한 죽음들까지 도란 도란 누워 있는 게
뭐가 못마땅하다고 뼈마져 흐트러 놓으려는 수작일까l
이제는 세상도 좋아졌고
산 사람이라도 제대로 살아야 될 때이니
望月洞에 묻힌 아들 양짓발로 이장하고
보상금이나 듬뿍 타 집을 늘리라고
지서장은 자전거 타이어가 다 닳도록 충동질이었다
길가에서 말쑥한 청년의 옷깃만 스쳐도 내 아이일까
보름달같은 얼굴만 만나도 내딸일까
앙가슴이 뛰는 어머니는 숫제 말대꾸도 하지 않았다
딴 마음을 먹은 잡배들의 발길이 빈번하고
습기 질펀한 땅에 귀한 아들을 무작정 버려둘 작정이냐고
가르마가 번지르르한 형사는 침을 튀겼지만
무덤만 파가면 큰 아이의 취직도 보장해주고
오막살이 신세도 면하게 해준다지만
밑구멍이 찢어질망정 몇푼의 밀가루로
아들이 품었던 고귀한 깃발을 내리지는 않겠다며
어머니는 돌아앉고 말았다.
5공화국이 막을 내리고 全씨 일가의 非理를 전면수사해야 된다는 소리가 높아지는 등 상황이 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금은 나아졌다고 얘기되는 오늘,1천만원의 유혹에 넘어가 다른 곳으로 묘소를 옮겨간 유가족들은 「한때의 판단 잘못」을 후회과고 있다고 하오. 그들은 다시금 망월동 묘역으로 이장ㅎ길 바라지만 내놓고 얘기할 처지는 못되는 모양이오. 우선 지난 8년 동안 온갖 설움·압박을 견뎌내며 뭉쳐온 「5·18광주의거유족회」가 그네들의 의견을 선뜻 받아 들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오.
「나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닌데·.」
유가족들이 말하듯이,권력당국의 「移羅술책」에 따라 26기가 옮겨가긴 했으나 지금 망월동 땅엔 80년 5월당시보다 오히려 더 많은 숫자의 「5·1영령」들이 잠들어 있소(1백29기). 지난해 6훨항쟁의 큰 불을 당겼던 李韓烈님(당시 21세 ·연세대 경영2)을 비롯,지난 8년동안 이 땅의 민주화를 외치며 분신·투신 자결했던 여러 젊은 넋들이 그대의 품에 들어가 누웠기 때문이오.
80년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서 5 월 16일 전남도청 앞에서 열린 「민족민주화聖會j 횃불 대행진에 앞서 사자후를 토했던 朴寬賢님 (묘지번호 i6) -그는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중 합계 50일이넘는 단식투쟁 끝에 82년 10훨 12일 눈을 감은 「광주의 넋」이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이렇소.
「나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닌데‥‥」
그렇소. 29살의 젊음으론 앞으로 이 땅에서 해야 할 일들이,풀어야 할 매듭들이 너무나 많이 기다리고 있었을 거요. 海東人이란 필명의 시인이 「박관현 鎭魂祭」란 시를 통해 「짐이여,그대 너무나 젊은 나이에 황토산 봉화산을 넘어간 님이여」라고 슬퍼한 것도 그런 까닭에서 일 듯하오.85년 8월의 광복절 날 광주시 금남로에서 휘발유를 온몸에 끼언고 분신,불길에 횝싸인 채 『광주시민이여,침묵에서 깨어나라』고 외치다 숨져 간 洪起日 님 (23·미장공) -그도 5· 18이 낳은 뜨거운 넋이오. 5월항쟁 당시 시민군으로 싸우다 다리에 총상을 입기도 했던 그는 중학 중퇴의 학력을 지닌 노동자로서 시대의 아픔을 몸으로 느쪘던 「되살아난 광주의 불꽃」으로 추모받고 있소,
「시민軍 渼起日」이 지닌 뜻
직업이 미장공이었던 「시민軍 洪起日」 은 사실상 5월 민중항쟁의 主力이었다고 볼 수 있소. 80년 5월 31일 계엄사가 발표한 사망자 명단을 분석하면,직업이 밝혀진 사람(1백15명)의 67%(77명)가 양화공·보일 러 공식당종업원 ·노점행상인 ·운전기사·농민 등 저임금노동자·도시빈민·영세자영업자였소. 이에 비해 대학생을 포함한 지식층 사망자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오. 이 땅엔 방관적 지성이 실천적 지성보다 훨씬 많다는 점을 생각케 하는 지표가 될 듯도 하오,
묘지번호 92번인 최강식 님도 國卒 학력의 건축노동자였지요. 그는 화염방사기의 희생자였소. 천주교 광주교구사제단이 퍼낸 보고서(「광주사태에 대한 진상』엔 80년 5월 20일 광주시 서방 3거리에서 공수부대원들이 화염방사기를 발사,시꺼멓게 불에 그을린 사상자를 내기도 했다는 끔찍한 내용이 담겨 있소. 5훨 21일 시청 앞에서 계엄군이 휘두른 화염방사기에 심한 화상을 입은 최강식님(당시 26살)은 그날의 상처로 고생고생하다 끝내는 87년 7웜 l5일 합병증(화상으로 인한 골수암)으로 눈을 갇고 맡았다오.
「여보 당신든 천사였소.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묘지번호 13i번인 최미애님의 묘비명이오. 학교 선생인 남편이 집에 돌아오지 않던 5월 21일,걱정이 되어 집앞에서 서성이던 그녀에게도 계엄군의 총탄은 비껴가지 않았소. 23살의 꽃다운 신부였던 그녀의 뱃속엔 8개월된 태아가 자라고 있었지요. 시인 김준태님은 「아아,광주여 이나라의 십자가여」를 통해 최미애님의 서글픈 죽음을 아래와 같이 노래하였소.
여보,당신을 기다리다가
문밖에 나아가 당신을 키다리다가
나는 죽었어요‥‥
왜 나의 목숨을 빼앗아 갔을까요.
아니 당신의 전부를 빼앗아 갔을까요
셋방살이 신세였지만
얼마나 우리는 행복했어요/
난 당신에 게 잘 해주고 싶었어요
아아,여보 !
그런페 나는 당신의 아이를 밴 몸으로
이렇게 죽는 거예요,여보 !
흔히 「TS.. 엘리오트」라는 외국 시인의 말을 따라 4월을 「잔인한 달」로 부르지만 이 땅의 4월은 4·19의거가 상징하듯 멋진 역사를 지닌 달이오. 오히려 「잔인한 달」은 5월이라 해야 할 것 같소. 61년 5월엔 군사쿠테타가 일어났고 10·26 嘗井洞의 총소리와 더불어 모처럼 찾아든「서울의 봄i도 80년 5월 때 아니게 찾아든「接겨울」로 피로 물들고 말았다오.
그런 「피의 제겉」이 있은지 겨우 두달도 채 못되는 80년 7월 이 땅에선 화려한「미의 제전」이 벌어졌다는 걸 망월동 그대는 기억하고 있소? 서울에서 열렸던 미스 유니버스대회가 바로 그것이오.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감옥에 끌려가 유족·친지는 물론이고 온 나라가 5월의 후유증을 앓던 그런 시각에 요란스런 잔치를 벌인다는 건 많은 사람들에게 씁쓸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듯하오. 그 뒤 벌어진 國風이니 뭐니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오.
비껴갈 수 없는 「5월」
골해 5월 망월동 묘역엔 3명의 젊은 넋이 잇달아 뉘어졌소. 申榮日님(30·전남민주주의 청년연합부위원장) 趙垓璵님(24·서울대 화학?) ·崔德洙님 (20·단국대법학1휴학」이 바로 그들이오. 5월 11일 전남기독병원에서 폐부전증·장출혈 등으로 사망한 신영일님은 지난 82년 10월 옥중에서 朴寬賢님과 함께 40일이 넘게 단식했던 투쟁기록을 지닌이요.
「분단고착화하는 미국X들 물러가라』「공동을림픽 개최하여 조국통일 앞당기자」는 구호를 외치며 지난 5월 1?일 「광주민중항쟁 계승 5월제」가 열리고 있던 명동성당 구내에서 투신 자결한 趙城晩님-그는 분단시대의 이 땅에 민족통일의 당위성을 새삼 인식시키기 위해 「척박한 팔레스티나에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한 인간」이 걸어간 고행의 길을 좇아 갔다오.
광주민중항쟁 꼭 8년째 되는 날인 5월 18일 교내에서 분신자살한 崔德洙님 -
-8일만에 숨을 거둔 그의 마지막 말은「광주는 아직 살아있다」였소. 그렇소.그의 말대로 8년전 광주에서의 비극은 아직 납득할만한 결말이 난 게 아니요.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니「화해」니 「유감」이니하는 용어들로써 「그해 5월」이 지닌 문제들을 비껴갈 수는 없다는 게 광주쪽에서 들린는 소리요, 지난 5월 27일 5·18광주의거유족회 (회장 圖凌良)를 비롯한 5월 관련단체들이 5·18광주민중항쟁진상조사위원회_!를 구성한 것도 그런 배경에서요. 망월동 제3의 묘역 그대의 견해는 어떻소
망월동 제3묘역.
金 在 明(月刊中央 기자)
참배객 줄 잇는 『민주화의 聖地」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5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딜 갔지
望月洞에 부릅뜬 눈. 수천의 핏발 서려 있네'
5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산 者들아 산 者들아 모여서 함께 나가자
욕된 역사 고통 없이 어떻게 헤치고 나아가랴
5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굳이 몇월이라 가릴 것은 없으나 해마다 특히 5월이면 망월동 그대의 묘역에선 오월의 노래가 을려 퍼져 부르는 이나 듣는 이나 눈시을을 적시곤 하오. 이 땅 민주화를 외치다 쓰러져간 1백29基의 님들이 잠들어 있는망웜동 묘소--사람들은 그대를 .~민주화의 聖地"라란 부르길 서슴치 않소, 올해 5월에도 숱한 사람들이 혹은 버스를 타고 혹든 걸어서 그대 있는 곳으로 「성지순례」를 다녀갔다고 들었소.
북에서 내려보낸 공산게릴라도 아니요,대한민국이란 존재를 부인하는 外敵도 아니요,그저 내라는 세금 꼬박꼬박 물어온 양민과 그들의 자식들이 「참민주」실현하자고,「자유」 조금 더 달라고 목청을 높였다 하여「폭도」로 몰아 죽이고 팼던 비극의 5월. 올해도 어김없이 그 5월은 찾아왔건만,망월동 그대의 묘역을 감싸고 도는 숱한 怨魂들은 아직도 제대로 자릴 못잡은 듯하오. 8년이 지난 지금도「진상조사」나 「책임규명」이 제대로·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소리가 높은 현실을 맏월동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오?
기자가 그대를 찾아나선 때는 전국적으로 광주민중항쟁 관련모임이 벌어지던 바로 그 즈음인었소. 괌주 중심부에서 창평, 옥과·곡성 쪽으로 난 국도를 따라 북으로 30분옴 차를 달리면,원쪽으로 망월동 묘소 그대 있는 데로 이어지는 좁은 길이 하나 나옵디다, 버스 두대가 간신히 비켜나가는 그 길은 ,지난 해까지만 해도 비포장도로였소. 러나 지난 3월 盧泰黑.대통령의 광주방문길에 맞춰 2.3일 사이에 아스팔트로 닦여졌다 하오 그동안 숱한 사람들이 망월동 묘소 그대를 찾았건만 5월의 비극이 있은지 8년째를 맞는 해에 비로서 먼지 없는 길이 들어선 거요.
그런 내력을 지닌 길을 3km쯤 가노라니 야트막한 언덕에 무수한 묘석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옵디다. 광주직할시에서 관리하는 이 공원묘지의 1·2·5·6묘역은 일반 묘역이었고 「그해 5월」의 희생자들이 잠들어 있는 그대는 제3묘역이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대를 「5·18묘역」 혹은 그냥 「망월동묘역」이라 일컫지오.
증요한 사실은 아니지만,그대가 자리한 곳은 굳이 따진다면 망월동이 아니라 합디다. 행정구역상 광주시에서 관리하는 공원묘지는 운정동과 수곡동 등 두 지역에 걸쳐 있고,망꿜동은 다만 공원묘지로 들어서는 3hn 길의 입구쪽을 가리킨다는 얘긴요. 말하자면 망월동은 5·18묘멱 그대 있는 곳으로 들어서기 위해 밟고 스쳐가는 땅에 지나지 않는 셈이오. 그런데도 그대를 포함한 「광주시 공원묘지」를 「망월동 묘역」이라 하게 된 까닭은 어디에 있겠소. 아마도 「望月」이란 그대 이름이 묘지 특유의 분위기와 그럴듯하게 맞아 떨어지기 때문일지도 모르오.
「아 ! 형제여 싸우다 죽자」
80년 5월 18일 0시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서울의 봄」은 가고 「接겨울」의 한파가 기습했소.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지고 어떠한 집회·시위·파업도 금지하는 포고령 10호가 발효됨과 아울러 정치인 민주인사·학생들에 대한 검거선풍이 불어 닥쳤소. 이런 사태가 올지도 모른다고 얘기되곤 했으나,10년에 걸친
유신독재에 진저리를 치면서 민주화를 갈망하던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겐 그야말로 충격이었소. 광주에서의 「비극의 5월」은 그렇게 시작되었다오.
5월 18일 오전 10시쯤 전남대 교문 앞에서 계엄군 몇명과 학생들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을 때만 해도「그해 5월의 비극」이 그곳 광주에서 벌어지리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않았을진 모르오, 그러나 계엄군인 특전사병력은 시민 학생은 물론 어린이·노인·부녀자를 가리지 않고 때리고 죽이고 짓밟았소. 오죽하면 그들을 두고 『차마 우리 국민의 군대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는 말이 나돌았을까. 다음날 「아 ! 형제여 싸우다 죽자」는 유인물이 나돈 것도 바로 그런 배경에서요. 계엄군의 무자비한 대응에도 불구,시위군중은 불어만 갔소.
20일엔 20만을 웃돌았다고 합디다. 그만큼 희생자들도 늘어났고‥‥
21일 시민·학생들은 드디어 총을 들었소. 그날 새벽 광주세무서에 불을 지르고 예비군무기고를 습격,소총들을 탈추한 것이오. 그날 오후 8시 전남도청을 시민들이 「접수」한 것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였소. 계엄군은 죽기를 각오한 시민들의 기세에 눌렸는가,모두 후퇴했소.
그때 (21일 )까지 만 해도 광주 바깥 사람들은 그곳에서의 비극을 잘 모르고 있었소. 삼엄한 보도관제 탓이었다오. 도청을 시민·학생들이 접수한 21일에야 계엄사는 처음으로 광주에서 「사태」가 일어났음을 나라 안팎에 고백했소, 그러면서도 그 진상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음은 물론이오. 서울을 벗어난 소요주동학생들과 깡패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려 그런 사태가 벌어졌고 그 와중에 민간인 1명,군경 4명이 죽었다는 발표도 그러하오.
그런 계엄사의 발표가 거짓이라는 것은 전남도청 앞 광장에 태극기로 덮인 채 늘어선 시체들이 실증해 주었소. 그들 가운데 일부는 참혹하게 죽어갔소. 머리가 으깨져 누구인지조차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소.시민들은 도청 앞 상무관에 신원이 확인된 시체 30구를 안치하고 분향소를 설치,그 넋을 달래었을 뿐이오
「가슴에 竹槍을 꽃고 오라」
어떤 이는 19세기 유럽의 파리 코뮌(1871년 3월 18-5월 27일 )에 견주기도 하지만,「불안스런 평화」의 1주일은 빨리도 지나갔소, 5월 27일 새벽 랭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오자,공포와 죽음 그림자가 다시금 온 시가지를 훓고 지나갔다오
광주를 장악한 군은 여기저기 나뒹구는 시체들의 신원을 파악하는 작업에 들어갔소.전남북지부 계엄분소와 광주지검 합동검시반이 .그 일을 맡았다 하오.이틀 동안의 검시작업이 끝난 2?일 연 고자가 있는희생 자들은 소속 동장에게 넘겨져 그의 책임 아래 망월동묘역 그대에게로 운구되었소.
유가족들은 계엄당국에 의해 엄격히 통제되었소, 유가족들이 장위동 동사무소까지 가면 신원확인을 거쳐 시당국에서 그들을 그대에게로 보내주는 절차를 밟았소. 더구나 희생자 1인당 유가족 참석자는 5명으로 제한받았다지요. 한편 너무나 참혹하게 죽어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포함,신원이 확인되지 못한 무연고 사망자들도 5·18묘역 에 가매장되었소. 지금껏 「두명열사」로 남아 있는 11기의 주검이 바로 그들이오, 그런 절차를 거쳐 망월동 그대가 1백26기의 5·IS묘역에 기매장 되었소. 그대가 자리한 곤 바로 앞에는 국민학생 키높이의 작은 입간판이 하나 서 있지요. 「오월에서 통일로」「민족통일」이란 붉은 색 리번이 매달려 있는 그 입간판엔 「5·18광주민중혁명 희생자묘역 안내」란 굵은 글자 아래 그대의 내력이 적혀 있음니다.
洪南淳님(74·변호사)이 위원장으로 있는 "광주 5 · 18민중혁명희생자 위령탑건립 및 기념사업 범국민운동추진위원회j가 지난해 가을에 세운 이 입간판은 한글·영문 두가지로 씌여 있는데,영문안내판 쪽엔 이런 낙서가 눈을 끌었소.
「미국 x은 아무도 오지 마라_
!양키X은 여기가 그대들의 전적지가 아님을 깊이 인식하고 가슴에 죽창을 꽃고 오라」
「脚葬하면 1천만원 주겠다」
80년 5월의 상황으로 미루어 그대 5·18 묘역에 상당수의 희생자들이 함께 묻히기에 이른것은 권력당국으로서도 궁여지책이었을 듯하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당국은 그런 조치가 「커다란 실수」였음을 깨달아야 했소. 해마다 5월이면 유가족은 물론.전국에서 숱한 참배객들이 망월동 그대에게로 몰려들어 한바탕 울음을
쏟아놓고,끝내는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곤 했기 때문이오. 그대가 80년대 「민주화의 聖地」로 떠오른 것은 자연스런 과정이었을 듯하오.
권력당국으로선 「골치텅어리」인 그대를 어떻게든 없앨 수만 있으면 없애버리고 싶었을 것이오. 83년 봄부터 다른 곳으로 이장해가면 1천판원을 주겠다고 유족들에 제의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요. 「전님지역개발협의회가 그런 제의를 했다고 합디다. 82년 5월 18일 당국이 광주시민들을 무등공설운동장으로 강제동원 이른바 시민단합대회를 연다고 바삐 움직일 즈음에 이 단체의 표면적인 설립취지란 낙후된 전남지역을 발전시킨다는 것이었소. 그러나 실제로는 전남지역 기업인들로부터 강제성금을 거두어「위로금」이란 명목으로 유가족들을 회유·분열시키자는게 설립목적 가운데 하나였다고 광주사람들은 믿고 있읍디다.
유가족들에 대한 「현금공세」는 83년 4월부터 시작됐소.. 사망자에겐 1천만원,부상자에겐 그 정도에 따라 4백만원에서 1천만원까지였소. 그런나 유가족들이 1천만원을 받으려면 망월동 묘역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어 있었소.집안의 기둥을 하룽침에 잃어버려 사람이면 지녀야할 최소한의 삶의 조건마져 채울 길 없이 가난에 찌들리던 일부 유가족은 그 현금공세에 넘어가고 말았소.그렇지만 대부분의 유족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견뎌냈소.시인 막몽구님은 "무덤만 파가면"이란 시에서 유족들의 의연한 태도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소.
자네들은 억울한 죽음들까지 도란 도란 누워 있는 게
뭐가 못마땅하다고 뼈마져 흐트러 놓으려는 수작일까l
이제는 세상도 좋아졌고
산 사람이라도 제대로 살아야 될 때이니
望月洞에 묻힌 아들 양짓발로 이장하고
보상금이나 듬뿍 타 집을 늘리라고
지서장은 자전거 타이어가 다 닳도록 충동질이었다
길가에서 말쑥한 청년의 옷깃만 스쳐도 내 아이일까
보름달같은 얼굴만 만나도 내딸일까
앙가슴이 뛰는 어머니는 숫제 말대꾸도 하지 않았다
딴 마음을 먹은 잡배들의 발길이 빈번하고
습기 질펀한 땅에 귀한 아들을 무작정 버려둘 작정이냐고
가르마가 번지르르한 형사는 침을 튀겼지만
무덤만 파가면 큰 아이의 취직도 보장해주고
오막살이 신세도 면하게 해준다지만
밑구멍이 찢어질망정 몇푼의 밀가루로
아들이 품었던 고귀한 깃발을 내리지는 않겠다며
어머니는 돌아앉고 말았다.
5공화국이 막을 내리고 全씨 일가의 非理를 전면수사해야 된다는 소리가 높아지는 등 상황이 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금은 나아졌다고 얘기되는 오늘,1천만원의 유혹에 넘어가 다른 곳으로 묘소를 옮겨간 유가족들은 「한때의 판단 잘못」을 후회과고 있다고 하오. 그들은 다시금 망월동 묘역으로 이장ㅎ길 바라지만 내놓고 얘기할 처지는 못되는 모양이오. 우선 지난 8년 동안 온갖 설움·압박을 견뎌내며 뭉쳐온 「5·18광주의거유족회」가 그네들의 의견을 선뜻 받아 들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오.
「나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닌데·.」
유가족들이 말하듯이,권력당국의 「移羅술책」에 따라 26기가 옮겨가긴 했으나 지금 망월동 땅엔 80년 5월당시보다 오히려 더 많은 숫자의 「5·1영령」들이 잠들어 있소(1백29기). 지난해 6훨항쟁의 큰 불을 당겼던 李韓烈님(당시 21세 ·연세대 경영2)을 비롯,지난 8년동안 이 땅의 민주화를 외치며 분신·투신 자결했던 여러 젊은 넋들이 그대의 품에 들어가 누웠기 때문이오.
80년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서 5 월 16일 전남도청 앞에서 열린 「민족민주화聖會j 횃불 대행진에 앞서 사자후를 토했던 朴寬賢님 (묘지번호 i6) -그는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중 합계 50일이넘는 단식투쟁 끝에 82년 10훨 12일 눈을 감은 「광주의 넋」이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이렇소.
「나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닌데‥‥」
그렇소. 29살의 젊음으론 앞으로 이 땅에서 해야 할 일들이,풀어야 할 매듭들이 너무나 많이 기다리고 있었을 거요. 海東人이란 필명의 시인이 「박관현 鎭魂祭」란 시를 통해 「짐이여,그대 너무나 젊은 나이에 황토산 봉화산을 넘어간 님이여」라고 슬퍼한 것도 그런 까닭에서 일 듯하오.85년 8월의 광복절 날 광주시 금남로에서 휘발유를 온몸에 끼언고 분신,불길에 횝싸인 채 『광주시민이여,침묵에서 깨어나라』고 외치다 숨져 간 洪起日 님 (23·미장공) -그도 5· 18이 낳은 뜨거운 넋이오. 5월항쟁 당시 시민군으로 싸우다 다리에 총상을 입기도 했던 그는 중학 중퇴의 학력을 지닌 노동자로서 시대의 아픔을 몸으로 느쪘던 「되살아난 광주의 불꽃」으로 추모받고 있소,
「시민軍 渼起日」이 지닌 뜻
직업이 미장공이었던 「시민軍 洪起日」 은 사실상 5월 민중항쟁의 主力이었다고 볼 수 있소. 80년 5월 31일 계엄사가 발표한 사망자 명단을 분석하면,직업이 밝혀진 사람(1백15명)의 67%(77명)가 양화공·보일 러 공식당종업원 ·노점행상인 ·운전기사·농민 등 저임금노동자·도시빈민·영세자영업자였소. 이에 비해 대학생을 포함한 지식층 사망자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오. 이 땅엔 방관적 지성이 실천적 지성보다 훨씬 많다는 점을 생각케 하는 지표가 될 듯도 하오,
묘지번호 92번인 최강식 님도 國卒 학력의 건축노동자였지요. 그는 화염방사기의 희생자였소. 천주교 광주교구사제단이 퍼낸 보고서(「광주사태에 대한 진상』엔 80년 5월 20일 광주시 서방 3거리에서 공수부대원들이 화염방사기를 발사,시꺼멓게 불에 그을린 사상자를 내기도 했다는 끔찍한 내용이 담겨 있소. 5훨 21일 시청 앞에서 계엄군이 휘두른 화염방사기에 심한 화상을 입은 최강식님(당시 26살)은 그날의 상처로 고생고생하다 끝내는 87년 7웜 l5일 합병증(화상으로 인한 골수암)으로 눈을 갇고 맡았다오.
「여보 당신든 천사였소.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묘지번호 13i번인 최미애님의 묘비명이오. 학교 선생인 남편이 집에 돌아오지 않던 5월 21일,걱정이 되어 집앞에서 서성이던 그녀에게도 계엄군의 총탄은 비껴가지 않았소. 23살의 꽃다운 신부였던 그녀의 뱃속엔 8개월된 태아가 자라고 있었지요. 시인 김준태님은 「아아,광주여 이나라의 십자가여」를 통해 최미애님의 서글픈 죽음을 아래와 같이 노래하였소.
여보,당신을 기다리다가
문밖에 나아가 당신을 키다리다가
나는 죽었어요‥‥
왜 나의 목숨을 빼앗아 갔을까요.
아니 당신의 전부를 빼앗아 갔을까요
셋방살이 신세였지만
얼마나 우리는 행복했어요/
난 당신에 게 잘 해주고 싶었어요
아아,여보 !
그런페 나는 당신의 아이를 밴 몸으로
이렇게 죽는 거예요,여보 !
흔히 「TS.. 엘리오트」라는 외국 시인의 말을 따라 4월을 「잔인한 달」로 부르지만 이 땅의 4월은 4·19의거가 상징하듯 멋진 역사를 지닌 달이오. 오히려 「잔인한 달」은 5월이라 해야 할 것 같소. 61년 5월엔 군사쿠테타가 일어났고 10·26 嘗井洞의 총소리와 더불어 모처럼 찾아든「서울의 봄i도 80년 5월 때 아니게 찾아든「接겨울」로 피로 물들고 말았다오.
그런 「피의 제겉」이 있은지 겨우 두달도 채 못되는 80년 7월 이 땅에선 화려한「미의 제전」이 벌어졌다는 걸 망월동 그대는 기억하고 있소? 서울에서 열렸던 미스 유니버스대회가 바로 그것이오.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감옥에 끌려가 유족·친지는 물론이고 온 나라가 5월의 후유증을 앓던 그런 시각에 요란스런 잔치를 벌인다는 건 많은 사람들에게 씁쓸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듯하오. 그 뒤 벌어진 國風이니 뭐니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오.
비껴갈 수 없는 「5월」
골해 5월 망월동 묘역엔 3명의 젊은 넋이 잇달아 뉘어졌소. 申榮日님(30·전남민주주의 청년연합부위원장) 趙垓璵님(24·서울대 화학?) ·崔德洙님 (20·단국대법학1휴학」이 바로 그들이오. 5월 11일 전남기독병원에서 폐부전증·장출혈 등으로 사망한 신영일님은 지난 82년 10월 옥중에서 朴寬賢님과 함께 40일이 넘게 단식했던 투쟁기록을 지닌이요.
「분단고착화하는 미국X들 물러가라』「공동을림픽 개최하여 조국통일 앞당기자」는 구호를 외치며 지난 5월 1?일 「광주민중항쟁 계승 5월제」가 열리고 있던 명동성당 구내에서 투신 자결한 趙城晩님-그는 분단시대의 이 땅에 민족통일의 당위성을 새삼 인식시키기 위해 「척박한 팔레스티나에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한 인간」이 걸어간 고행의 길을 좇아 갔다오.
광주민중항쟁 꼭 8년째 되는 날인 5월 18일 교내에서 분신자살한 崔德洙님 -
-8일만에 숨을 거둔 그의 마지막 말은「광주는 아직 살아있다」였소. 그렇소.그의 말대로 8년전 광주에서의 비극은 아직 납득할만한 결말이 난 게 아니요.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니「화해」니 「유감」이니하는 용어들로써 「그해 5월」이 지닌 문제들을 비껴갈 수는 없다는 게 광주쪽에서 들린는 소리요, 지난 5월 27일 5·18광주의거유족회 (회장 圖凌良)를 비롯한 5월 관련단체들이 5·18광주민중항쟁진상조사위원회_!를 구성한 것도 그런 배경에서요. 망월동 제3의 묘역 그대의 견해는 어떻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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