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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당시 7공수 33대대 최영신 중사의 그날 그기억(생활성서, 1995. 5)

본문

당시 7공수 33대대 당시 7공수 33대대

최영신 중사의 그날, 그 기억



매년 5월이면 광주 망월등을 찾는다는, 경기도 부천에 사는 최영신(42) 씨 광주민준한쟁당시 7공수 33대대 소속 계엄군이었던 그는 15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의 참상을 잊지 못한다. '80년 5월 17일, 전북 금마의 7i공수 33대대에서 근무하던 최 씨는 제대를 10일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출돋 명령이 떨어졌다. "우리부대에서는 그전까지 폭동진압 훈련 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출동할 때는 M16자동소총과 길이 70센티미터 정도의 진압봉으로 완전무장한 상태였습니다. "부대를 출발한 그와 그의 동료들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캄칸한 어둠을 뚫고 달리는 군용트럭에 몸을 실어야 했다. 그래서 도착한 곳이 전남대학교 운동장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24인용 군용텐트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의 동료들은 그 다음 낱부터 작전에 들어갔다. 당시 공수부대원의 경상도 출신 차출설과 환각제 복용설과 관련해 최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부대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단. 함께 출동했던 동료 중에 전남 화순이 고향인 제 동기도 있었으니까요. 환각제는 먹지 않았지만 평소 많은 부대원들이 술을 좋아해 수통에 넣어 가지고 다니기도 했던 것으로 보아 술을 먹고 작전에 투입된 사람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5월 18일, 그는 대대본부에 남아 그곳으로 끌려오는 사람들에게 기합을 주는 일을 맡아했다. 전남대 운동장으로 잡혀 온 시위학생들과 시민들이 예외없이 머리가 터져 유혈이 낭자했다. 그 모습을 보고 어떻게 저렇게 하나같이 머리가 터져 있을까 하고 의아해했었다고 최씨는 회상했다. 그는 단순 가담자로 보이는 몇몇 학생들을 몰래 탈출시키기도 했다.

나머지는 모두 군용트럭으로 어디론가 실려갔다. 상황이 급박해지면서 그의 부대는 인근 조선대 교정으로 이동했고, 거기에서 3공수, 11공수와 합류했다. 최 씨는 도청 앞 집단발포 일이었던 5월 21일, 현장 작전중인 11공수 63대대장 조창구 중령이 조선대 학군단내에 설치 된 여단본부와의 무전교신에서 당시 11공수 여단장 최 웅 준장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실탄을 더 보내달라"고 외치는 소리를 여단장실 옆방 다른 무전기를 통해 들었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중령이 별 두 개 여단장 무전기에다 실탄을 더 지급해달라고 욕설을 퍼부었겠습니까. "시만군들에게 밀려 퇴각하던 조선대 주둔 부대는 그가 속해 있던 7공수와 11공수가 뒤섞여 있었다.장비와 부식 그리고 일부 군인들을 실은 군용트럭은 무차별 사격을 가하며 교정을 빠져나갔고, 나머지는 화순 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지원동 주남마을 근처에서 7공수와 11공수가 양쪽으로 주둔했다.

그곳에서 그는 양민학살을 목격했다. "산 중턱에 자린를 잡고 있는데 산 아래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내려가 보았어요. 교복을 입은 한여학생이 한 손에 총탄에 의한 관통상을 입은 채 리어카에 부상당한 두 사람을 태워 끌고 왔더라구요. "11공수의 한 대대장이 그들을 수색하던 종 칼빈 총탄 두 개가 나왔다.그는 그들이 시민군이라고 여겼던지 한 명의 하사와 두 명의 사병에게 '밑에 내려가 처치해" 하고명령했다. 사병 중 한 사람은 그의 부하였다. "주둔지에 올라오면서 네 발의 총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부하사병이 을라왔어요. 사살했는지 묻지는 않았지만 그의 장황한 얘기를 들으면서 저는 그 젊은이들이 모두 사살되었음을 직감했습니다. " 최 씨가 그곳에서 만났던 세 젊은이는, 공수부대의 무차별 사격으로 15명의 사상자를 낸 '주남마을 양민학살사건' 때 부상당한 이들이었다.제대가 하루밖에 남지 않은 5월27일, 그의 부대는 도청 탈환작전을 위해 헬기로 광주 비행장 격납고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그는 출등 준비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때 저는 작전에서 제외되었었어요. 그러나 진압 작전에 나선 동료부대원 상당수가 수류탄 2발과 실탄 3백60여 발로 무장한 채 출동했습니다. "최영신씨는 비록 직접 시민들을 사살한 적은 없지만 광주에 투입되었던 군인이었단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괴로웠다. 그리고 그는 '90년 1월 '주남마을 양민학살사건' 을 세상에 알렸다. 그후 그와 그의 가족들은 신변에 위협을 느껴 몇 개월 동안 도망다녀야 했다. '학살사건을 증언한 후 하루에도 수십 통씩 '죽여버리겠다'는 내용의 전화가 걸려왔고,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와 행패를 부렸습니다. " 그 행패를 견디다 못해 그는 주소지 변경을 하지 않은 채 이사를 했다.

그런데 현역 공수부 대원들이 이전 거주지에 찾아가 문을 때려부수는 등 행패를 부렸다. 경제적 어려움도 헤쳐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했던 그는 퇴직금으로 장사를 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돈마저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 어려움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한 양심선언을 후회하지 않는다. 자신이 증언한 내용은 진정한 의미에서 양심선언이 될 수 없다고 여기는 최영신 씨 그는 진정한 양심선언은 무고한 양민들을학살하거나 구타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증언 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그들이 가슴 깊이 간직해놓고 살아야만 하는 그 아픔들을 세상에 드러낼 때, 학살을 명령했던 자들이 비로소 역사적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비화/5.18 당시 정보부 전남지부장 정석환 비망록

80년 5월18일 나는 중앙정보부 전남지부장 직무대리였다. 全斗煥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그해 4월에 지부장 이상의 간부를 모두 경질했기 때문에 정보과장이었던 내가 직무 대리를 맡았던 것이다.61년에 중앙정보부에 들어가서 일하기 시작한 지 약 20년만에 지역책임자가 된 셈인데 그 지역에서 엄청난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당시 광주 지역의 동향을 수집 보고하고 군·관 대책회의에 참석했던 나는 틈틈이 메모를 해두었다 5월16일. 5월의 격렬했던 시위가 일단 멈추고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 대학은 崔圭夏대통령이 귀국과 동시에 사태를 원만히 해결 수습하는 민주화 정치일정을 발표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전남대 및 조선대 생들은 윤한봉, 김상윤, 김남주 주동하에 전남지역 구국청년학생회가 주동이 되어 박정희군사독재 및 유신독재 19년을 청산하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분위기였다5월17일. 이날 오후 광주에 위치한 전교사 사령부 연병장에는 공수특전부대 병력이 집결작전 지시를 기다리고 있다는 첩보가 입수됐다. 이같은 첩보를 군부조정 관에게 확인토록 지시하고 있는데 전남대 출입 학원담당 조정관으로부터 보고가 올라왔다.

이화여대에서 회의중인 전국 대학생 대표들이 계엄당국에 의해 전원 연행되어갔다는 긴급연락이 전남대 학생회에 왔는데 이 연락을 받고 학생회간부 전원이 학교를 떠나면서 각자연락망을 통해 학생들에게 피신할 것을 종용하는 전화를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양동회 도경 정보1과장에게 확인해보니 불순세력 일제검거령이 내려졌다는 것이었다 과거 같았으면 경찰이 자진 보고하는게 상례였으나 10·26이후에는 중앙정보부가 대통령 시해 원부라 하여 각 기관 모두 중앙정보부를 배제하려는 경향이어서 왜 통보하지 않았느냐 고 추궁할 수도 없었다. 전화를 끊은 후 전직 원들에게 보다 철저한 첩보수집 활동을 하라고 지시하고 비상근 무체제를 갖추도록 조치하였다.그날 밤 11시경 쏭주 전역에서 운동권에 가담하고 있던 청년 및 재야인사들을 거의 동시에 검거중이라는 소식이 있었다. 검거는 경찰과 보안사요원들이 달았다. 이들은 합동작전을 전개중이었는데 검거대상자 집을 수색할 때 군화를 신은 채 들어가 마구 잡아들인 다는 것이었다.

위기상황을 감지한 대상자들은 그때부터 무등산 등 광주 외곽으로 피신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조직적인 저항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자정 무렵 서을 본부에서 전화가 왔다. '학생들의 데모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데 현 경찰병력으로는 치안유지가 어렵다.비상 계엄을 확대선포하니까 데모가 수그러들 것이다. 정국 방향을 설정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민심을 정확히 파악해서 보고하라』

부친상중인 도지사에게 연설 부탁

5월18일. 계엄사령부는 5월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계엄령이 확대발표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전남대와 조선대 캠퍼스에 3공수단 병력이 투입되었다 당시 전남대와 조선대 구내에는 5.16 규탄 햇불시위를 했던 학생들 중 일부가 남아 있었다. 이들은 학생운동의 방향 및 당면 투쟁전략 등을 논의하며 밤을 새우다가 공수부대의 급습을 받았는데 상당수의 학생들이 검거됐다. 그러나 일부 학생들은 이런 와중에도 옥상과 변소를 이용, 파이프를 타고 탈출했다.날이 밝기 전 거의 모든 주요기관이 군경에 의해 완전 장악되었고 전남 각지에서 차출된 사복경찰들이 짝지어 서 있는 광주 시내 거리는 침묵과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같은 시내 분위기 속에서 오전 9시경 전남대 정문 앞에는 학생들이 집결하고 있었다 학생회가 휴교령이 내릴 경우 오전 10시까지 학교 정문앞에 모이자고 말했기 때문이다. 도서관에 공부하러 온 학생들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전남대 정문에는 이미 공수부대원 10여명이 완전무장한 채 학생들의 출입을 통제했다 교내로 들어가지 못한 학생들이 점점 불어나 5백여명이 되자 학생들은 「계엄 해제 하라」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학생들의 항의가 거세지자 군인들은 병력을 동원, 곤봉으로 학생들을 구타하며 해산시켰다. 흩어진 학생들은 삼삼오오 떼를지어 금남로를 거쳐 도청광장으로 가면서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나는 12시경에 張洞泰 전남지사를 찾아 지사관사로갔다. 그는 부친상중이었다. 나는 장지사에게 『상주이신 지사님에게 어려운 부탁이지만 사태가 너무 심각하여 부탁을 드리지 않을 수 없다」고 전제한 뒤『상복차림으로 군중들 앞에 나서 시위를 자제해줄 것을 호소한다면 그 누간 설득하는 것보다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장지사는 『상중에 있는 죄인이 어찌 군중 앞에 나설 수 있겠느냐」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나는 지부청사로 돌아와서 「상황이 더욱 악화될 것 같다』고 본부에 보고했다.

당시 븐부 상황실 책임자는 송인봉 실장이었다 그는 강직하고 직선적인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내가 올린 보고를 거르지 않고 그대로 전두환 부장서리에게 보고했다 이 보고서는『전두환과 신현확이 군사쿠데타로 정권 탈취를 기도한다」는 등 학생과 시민들의 과격한 주장이나 구호를 생생하게 담고 있었는데 10여부를 복사해 부장 차장 기획정책정보국장 등 관계자들이 돌려보는 것이었다. 보안사나 경찰 등에서는 이런 생생한 정보를 올리지 못한 것으로 안다. 광주사태 초기에 전두환씨의 정위치가 보안사령관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보부장실에 계속 있었던 것은 이런 정보내용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최규하대통령에게 올라가는 보고서는 상황실에서 작성한 보고서를 기정국에서 분석하고 용어를 순화한 것인 만큼 광주 분위기가 정확히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다.5월18일은 우리 직원들이 시내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시각각으로 상당량의 보고가 올라왔다.낮 12시경 가두시위가 격렬해지자 7공수여단 35대대장이 이끄는 군인들이 대검이 꽃힌 총을 등에 멘 채 학생들을 쫓아가 곤봉으로 마구 구타하고 머리가 터져 쓰러진 학생들을 트럭에 실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층장로상가로 피신한 학생들을 뒤쫓아간 군인들이 닫힌 셔터를 열고 가게에 들어가 주인 학생 가릴 것 없이 구타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오후 3시경에는 광주은행 앞 사거리에서 여학생이 도망가다가 계엄군에 붙잡혔는데 그 과정에서 상의가 다 찢겨 유방이 드러난 채 끌려가다가 저항하자 계엄군이 여학생의 머리를 구타,실신하는 바람에 이를 목격한 시민들이 흥분했다고 한다.전남북계엄분소에서는 오후 6시에 전남북계엄분소 공고 제4호를 발표, 광주 일원에 밤 9시부터 통금을 실시했다.

전두환부장의 첫 지시

5월19일.

오후 5신는 지부장을 찾는 전화가 왔다.전화를 받았더니 자신을 許文道 비서실장이라고 소개했는데 당시 나는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그가 누군지 몰랐다 그는 「부장님과 전화를 바꿀테니 기다려라』고 했다.잠시후 전두환부장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홀러나왔다. 나는 정식으로 관등성명을 댔다. 전부장은『수고 많다」고 먼저 격려를 한 후 『광주가 심상찮게 돌아가는 것 같아 특별 민심순화 활동이 필요할 것 같다. 재경 전남 출신 유력인사 8명이 헬기 편으로 오늘 저녁 7시에 광주비행장에 도착할 예정이니 각 기관장들과 협의해서 이들을 민심순화활등에 효과 적으로 활용하라』고 지시했다.전두환 부장은 『나는 이 사람들을 만나지도 못했어 . 이들을 급히 내려보내느라 여비도 못 주었으니 지부가 갖고 있는 예산중에서 활동비를 마련해 이들에게 지급하고 신청하면 바로 조치 해주겠다」고 한 뒤 허문도씨에게 전화를 넘겼다.허문도비서실장은 몇 사람의 이름을 불러준 뒤 비행장에 도착하는 사람은 다를 수도 있다』며 이 일이 급하게 진행됐음을 암시했다.

나는 이같은 지시를 받고 장형태지사 尹興禎전교사사정관 겸 전남북계엄분소장,安炳夏 전남도경국장, 이재우 보안대장과 함께 비행장으로 마중을 나갔다. 헬기에서 내린 사람들은丁來赫(전상공부장관), 申炯植(전건설부장관) , 高在瑞(전보사부장관), 朴敬遠(전내무부장관), 全富一(전병무청장), 金在明(예비역 육군소장), 朴渽(전공화당 국회의원) , 金南中씨 (전전남일보회장) 등이었다.윤흥정사령관은 이들에게 시내에서는 식당도 영업을 못하고 있어 전교사 상황실에 만찬을 준비했으니 사령부로 가 저녁식사를 한 뒤 상황을 설명해드리겠다.며 이들을 비행장에서 멀지않은 사령부로 안내했다. 전교사에서 식사를 마친 뒤 윤사령관이 상황실에서 브리핑을 했다 광주 시내상황에 대한 설명을 들은 이들은 『너무 염려하지 말라, 타지역'분들이 우리 고장에 오셔서 이렇게 고생하게 되어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이날은 학생들과 시민들의 시위가 시 전역으로 확산된 날이다. 분노한 시위대들은 승용차에 불을 지르고 노변 화분과 공증전화박스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친 채 계엄군과 대치하기도 했다. 통금시간인 밤 9시가 되어도 시민들이 귀가하지 않아 계엄군이 확성기로 귀가와 상가 철시를 종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에서 내려온 이들은 브리핑만으로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것 같았다.나는 장형태지사와 안병하도경국장과 함께 전교사에서 지원한 군용 차량으로 헌병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이들 일행을 도지사실로 안내했다. 가는 길에 시내상황을 한번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청으로 가는 큰길은 도로변이 화분 및 공중전화박스 등으로 뒤범벅이 되어 차가 인도로 올라갔다가 다시 골목길로 빠지는 등 몹시 힘들게 도청에 도착했다. 그때서야 서울에서 내려온 일행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는 것 같았다지사실에 도착하자 나는 미리 작성 한 설득 대상자들의 명단을 일행에게 나눠주고 잘 부탁한다고 말한 다음 준비한 금일봉을 전두환부장 명의로 전달했다. 이들은 광주가 연고지이기 때문에 숙소는 각자가 알아서 정하기로 하고 나와 연락망을 정한 뒤 헤어졌다.

그런데 다음날 신형식씨와 고재필씨만 한번씩 활동 결과를 알려왔을 뿐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됐는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아마 사람들 만날 엄두도 못내고 곧바로 광주지역을 빠져나갔던 것 같다

5월20일.

오전에는 공수부대와 시민 사이에 소강 상태가 유지되다가 12시를 전후해서 3공수여단 병력이 대거 투입되면서 시민들과 대격전이 벌어졌다. 이날은 시위대에 중장년층까지 합세했다. 차량시위도 있었다 언론보도에 불만을 품은 일부 시민들은 MBC 건물을 방화하는 등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현재 병력으로는 사태수습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9공수여단과 또 다른 공수여단이 이날 밤 광주에 도착했다.이날 처음으로 군의 발포가 있었는데 브고를 받지는 듯했다. 이때는 우리 직원들이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하고 시내 安家에서 봤거나 주위사람들에게 들은 상황을 주로 보고했다 나도 시내에 있는 집에 들어 가지 못하고 지부청사에서 숙식을 계속했다.

5월21일.

이날 새벽에 3긍수여단은 전남대로, 7여단과 11여단은 조선대로 각각 철수하고 공수부대 일부 병력만이 도청에 낟아 있었다.진압군의 사기는극도로저하되어 있었다

안병하 도경국장, 발포문제로 고민

이날은 소위 시민군이란 이름의 시위대가 도내 일원의 각 경찰서 무기고 및 예비군 무기고를 털어 완전무장하고 진압군과 정면대결함으로써 피해가 극심했다. 이때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 겸 전남지역 계엄분소장은 시민들로부터 잔인한 진압부대란 원성을 듣던 특전사 병력을 철수시키고 이 날 새벽 송정리역에 도착한 박준병씨의 20사단과 교체할 것을 지시했다. 오후 4시경 공수부대가 시외곽으로 철수하자 이를 지켜본 시위대와 시민들은 계엄군이 진압을 포기하고 완전 철수하는 줄 알고 만세를 외치는 등 한때 승리감이 도취하기도 했다. 이날 밤에는 시위대가 도청 및 경찰국을 완전 점거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나는 수시로 서을 상황실에 상황을 보고했다

그중에는 차량시위가 일어나게 된 배경에 대한 것도 있었다. 시내에서 계엄군에 몰린 한 대학생이 택시를 타고 고속버스터미널에 내려 사람들 속으로 사라져버리자 지프를 타고 뒤쫓아온 계엄군이 분풀이로 택시기사를 대검으로 목을 찔러 즉사시켰다고 한다. 이 소문이 확산 되면서 대대적인 차량시위가 일어났다.경찰철수는 안병하 도경국장의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하루 전날인 20일 안병하 도경국장이 내게 고민을 토로했다. 『金鍾娛 내무장관이 강력하게 대응하라고 하는데 시위대의 움직임을 보면 사격이라도 해야 할 판인데 그럴 수야 없지 않으냐』는 것이였다. 나는 3·15부정 선거때 마산경찰서장이 발포명령을 내렸는데 그후 그 집안 사람들이 곤욕을 치렀다는 애기를 하면서 시민을 향해 발포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충고한 바 있었다.내 말에 영향을 받았는지는 몰라도 그는 이날 시민과 정면대결을 피해 경찰을 철수시켜 버렸다. 이 때문에 그는 구속된 것으로 안다.

한편 이날 서울에서는 신현확총리가 물러나고 광주에서는 진압방식을 둘러싸고 정호용특전사령관 등 진압군부대지휘관들과 갈등을 빛은 윤층정증장이 전격 예편됐다. 그는 다음날 朴淡論(박충훈)내각이 들어서자 체신부장관에 임명됐다. 전교사 사령관 겸 계엄분소장 후임에는 전남출신으로 육군행정학교 교장이던 蘇浚烈소장을 임명했다.윤사령관이 경질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5월18일 이후 대책회의라는 것이 있었다. 장형태지사, 裵命仁검사장, 李大淳 교육감, 윤흥정사령관, 鄭摘溶특전사령관,이재우 보안대장, 崔雄 11공수여단장. 崔世昌 3공수여단장 신두식 7공수여단장 그리고 내가 참석했단. 21일부터는 박준병 20사단장도 참석 했다이 대책회의는 기관장들이 광주시민들의 분위기를 전달하고 이를 토의하는 자리 였는데 기관장들은 공수부대의 진압방식에 대해 문제제기를 많이 했다. 윤사령관도 공수부대에 대한 불만이 많아 정호용특전사령관과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정호용 사령관은 대책회의에 참석은 했으나 자신의 의견은 일체 이야기하지 않았다. 가끔 묻기도 했지만 주로 듣는 편이었다.

그러나 군인들만 있을 때는 대응책을 직접 지휘한 것으로 안다. 정호용사령관 등 진압 계엄군의 입장에서는 깐깐한 윤흥정씨보다는 소준열씨가 편했을 것이다.

『최웅장군 소재 파악하라』

5월22일.

이날은 시민들과 학생들이 소위 시민군 이라는 이름 아래 무기고에서 탈취한 무기로 무장한 채 버스와 트럭을 타고 광주시내와 나주 등지를 돌아다니는 등 시위와 봉기가 광주 인근지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이 과정에서 외곽에 있던 계엄군들과 충돌,유혈사태가 일어났다.아침 9시경 허문도 비서실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전두환부장이 통화하기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전부장은 특전사 11여단장인 최웅장군의 소재가 지난밤 이후 파악되지 않으니 전조직을 동원해서라도 신속히 소재를 파악해 부장실로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최장군의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어 있을 터이니 용기를 잃지 말고 분발하라』고 전해달라며 전두환부장 명의로 금일봉(1백만원)을 최장군에게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내 추측으로 최웅씨는 전날밤 시위대 진압작전중 살상자가 많이 난 데 대한 층격 때문에 잠시 은둔한 것으로 생각된다. 전부장이 금일봉을 전달하라고 한 것은 이런 사정을 알고 최웅장군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최웅장군은 내가 수소문한 지 한시간만에 연락이 왔다. 전두환부장이 급히 찾는다고 하자 지부청사에 찾아온 그에게 나는 금일봉을 전해주고 그는 서울의 전부장과 통화를 했다. 최웅씨는 내가 전두환부장의 신임이 두터운 것으로 알았는지 이후 상당한 호의를 가지고 대해주었다. 한편 이날 임명된 박충훈 신임총리는 광주 전교사 사령부에 내려와 대시민담화를 통해 시민들의 진정을 호소하는 한편 기관장 시민대표들과 면담, 수습방안을 협의했으나 아두런 소용이 없었다.밤 10시경 청와대로부터 전화가 왔다.전화를 건 사람은 崔圭夏대통령보좌관인 최장군이었는데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그는 「지금 광주에서 총격이 계속되고 있다는데 사실인가』라고 물었다. 나는 『광주공설은동장 방향에서 시내를 향해 집중사격이 있긴 한데 피해상황은 알 수 없다」고 대답하자 그는 『잠시 기다려라」고 하더니 최규하대통령에게 전화를 넘겼다.최대통령은 「발포하고 있는 군부대와 지휘관을 확인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나는『지금시내상황이 너무 험악하여 직원들을 배치 할 수 없어 확인이 곤란하니 계엄사로 확인 해보는 것이 빠를 것이다」고 대답했다. 그는 「알았다」고 짧게 말한 뒤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는 당시 전두환사령관으로부터 어떤 상황보고도 받지 못한 모양이었다.오죽 답답했으면 군지휘관이 아닌 정보부지부장에게 직접 전화를 했을까.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5월23일.

오전 전교사사령부 회의실에서 열린 대책회의에서 이대순교육감은 계엄군의 진압방식이 너무 잔인하단며 신랄하게 비판했다『계엄근들의 과잉진압으로 시민들의 살상자가 너무 많아 앞으로 국민학교 반공교재를 대폭 개편할 수밖에 없다. 오늘 아침 병원장인 한 학부형으로부터 충격적인 전화를 받았다 국민학교 ,1학년생인 아들이 아침 식사자리에서 아버지에게 「아빠,우리는 공산당이지,국군은 공산당을 쳐부순다고 배웠는데,국군이 광주시민들에게 총을 쏴 죽이고 있으니 우리는 공산당이 아닌가」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계엄군의 진압 방법이 너무 잔인하다」 이교육감의 발언이 있자 여기에 참석했던 기관장들은 일제히 계엄군에 대해 성토 했다.

「반공교재 바꿔야겠다』

이때 박준병 20·사단장이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제발 여기에 참석하신 기관장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사태가 조기수습되어 우리 군도 본연의 임무인 전방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각 기관장들은 더이상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대책을 협의하기 시작했다.한편 이날 오전 12시경 중앙정보부 기획정책정보국 소속 박정희과장이 지부를 찾아왔다 박과장은 광주 시내에 잠입,정확한 진상을 파악 보고하라는 전두환부장의 특명을 받고 광주에 왔다가 이미 시민군이 장악한 시내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광주시 외곽에 있는 지부로 온 것이다. 이때 지부 정문 글에는 무장을 한 시민군 등 시위대 1백여명이 집결,『전두환 앞잡이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를 해체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잠긴 지부 정문을 요란하게 흔들고 있었다. 이런 광경을 목격한 박정희과장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어떤 수단을 강구해서라도 광주를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한 모양 이었다. 지부장 직무대리인 나와는 한마디도 상의하지 않고 당시 현흥주 기정국장에게 지부 직원들을 대피시켜야 한다고 긴급 건의 했던 모양이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오후 8시경 나는 현흥주국장의 전화를 받았다 현국장은지부가 시위대의 직접적인 공격 목표가 되고 있는 만큼 전북지부로 직원들을 대피시키라고 지시했다. 나는 계엄하에서 정보기관 직원이 대피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며 정면으로 반대했다. 나의 반대가 완강하자 현국장은 박정희 과장의 긴급건의를 받고 상부에서 결정한 사항이라며 내 고집 때문에 대피하지 않고 있다가 직원들이 위해를 당하면 모두 책임져야 할지 모르니까 알아서 하라고 강한 어조로 지시했다.그리고 현국장은 박과장에네게서 연락이 오면 서울로 전화를 해달라고 부탁했다.내가 박과장이 낮부터 여기에 와 있다고 이야기하자 바꿔달라고 했다. 박곽장은 현국장과의 통화에서 직원들의 대피가 불가피하다고 다시 강력하게 건의했다 현국장은 나와 다시 통화를 하면서 계엄사에 헬기까지 요청해놓았으니 계엄분소에 확인해 이응하라고 지시했다. 통화가 끝난 후 나는 박정희과장에게 그같은 일을 지부 책임자에게 한마디도 상의도 하지않고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 있느냐며 강하게 항의했다.박과장은 부장 특명 수행중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강변했다. 할 수 없이 계엄분소에 확인했더니 24일 오전 9시에 오산비행장으로부터 헬기 2대가 도착할 예정이니 시간을 엄수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지부의 중요 문건들을 지부 바로 뒤편에 있던 국군통합병원 지하벙커에 대피시켜 놓았다.

전북지부로 직원 일부 피신

5월 24일.

지부에 남아 있던 직원 10명과 나는 박정희과장과 함께 헬기를 타고 오전 10시경 전주에 도착했다. 박과장은 전주 도착 즉시 서울로 올라갔다. 나는 지부 과장들은 서울 본부로 보내 상황을 보고케 하고 직원들은 전북지부에 남겨두고 광주로 돌아왔다. 현국장에게 혼자라도 광주에 가야겠다고 결심을 밝히니까 전주 향토사단장 전용 1인승 비행기인 L-19기편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광주에 도착하니 낮 12시경 이었다. 지부에는 시내에서 잠복근무중이던 趙恩錫 서기관 등 6명의 직원이 돌아와 있었다.나는 직원들을 격려한 후 새로 구성한「협조망(직원들이 시내에서 직접 활동할 수 없어 민간인을 활용)을 통해 괌주시내 상황을 파악하는 한편 전교사 대책회의 자료를 준비했다.

5웜25일

사태가 장기화되고 생필품조차 구입하기 힘들게 되자 신민군수습대책위네에서는 온건파와 강경파가 갈려 의견이 맞섰다『무기를 군에 반납하고 사태를 조기 수습하자』는 온건파와 『계엄군이 자기들의 죄상을 인정하고 보복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고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직과 중앙정보부장직에서 해임, 군에서 축출하고 김대중선생을 석방하기 전에는 무기를 넘겨줘서는 안된다』는 강경파의 주장이 맞서 오후2시부터 6시까지 광주 남동성당에서 논란을 벌였으나 아무런 결론을 얻지 못했다.시민군이 소강상태에 빠진 상황에서 계엄군은 헬기를 이용, 시민군과 시위대들은 무기를버리고 투항할 것을 요구하는 심리전 유인물을 공중살포했다 이날 밤 최규하 대통령은 광주사태 조기수습을 위한 특별담화를 발표했으나 광주시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5월 26일.

이날 오후 계엄분소 회의실에서 개최된 군관지휘관 대책회의에서 안병하 도경국장은 경찰이 무기고를 탈취당하고 경찰국 및 각 경찰서가시위대들에 의해 점거당한 데대한 문책으로 직위해제되고 다음날인 2?일 구속됐다 후임자는 宋東燮 치안본부 경무관으로 이날 처음 대책회의에 참석했다.대책회의 참석자들은 군관을 불문하고 대부분 조기수습에 동의했다.

5월 27일

새벽 , 마침내 계엄군은 치밀한 기습작전에 의해 소위 시민군 및 시위대 지휘본부였던전남도청 건물을 강제진압했다. 이들이 소지했던 무기도 전량 회수했다. 장형태 전남지사가 해임되고 후임으로 金'宗鎬 예비역육군소장이 부임했다. 신임지사 참석하에 대책회의가 열렸는데 진압작전 이후 민심을 수습하는 대책을 논의하기도 했다 헬기를 타고 온 정호용특전사령관도 뒤늦게 참석했다. 이날 계엄군의 진압상황을 보고하고 난뒤 현 국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으니 우선 올라오라』고 말한 뒤 『후임으로 박정희과장을 내려보낸다」는 것이었다. 나와 각 과장들은 6월1일자로 일괄 본부대기 발령을 내렸다. 당시만 하더라도 나는 왜 대기발령이 났는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현국장이 나에게 말한대로 보다 나은 자리로 발령나리라고 기대하고 있던 나와 서울 본부에서 근무할 즐 알았던 과장들에게 얼마후 통보된 것은 낭보가 아니었다. 징계사유도 밝히지 않은 채 나는 의원면직 처리되고 과장들은 직권면직 처분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광주」는 끝났지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불명예.퇴직 처분이었다.정석환씨(61)는 무단근무지 이탈 지휘 혐의로 자신이 의원면직되고 함께 일했던 과장들이 무단근무지 이탈로 직권면직되는 등 징계를 받은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당시 직속상관이었던 현홍주 기정국장이 광주에 특파된 박정희 기정국 과장의 긴급건의를 받고 대피지시를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전두환부장이 이를 문제삼자 그 책임을 자신들에게 전가했다는 것.

-광주사태가 끝나자 대기발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때 징계를 받으리라고 눈치를 채지 못했나 해직될 즐은 돌랐다. 80년 5월29일 서울로 올라갔는데 현홍주국장은 반갑게 맞으며 徐廷和차장에게 안내했다. 서차장은 그동안 고생 많이 했다면서 현국장에게 훈장상신과 상위 보직 상신을 힘주어 지시했다.나는 진심으로 감사한다고 말했다. 서차장 방에서 현국장은 나를 자기 방으로 데리고 간 다음 훈장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겠고 조금 쉬면서 다음 보직을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6궐20일 징계가 통보됐다고 하는데 그전에 징계위원회에 회부될 때 무슨 이유인지 물어봤을 것 아닌가.『집에서 쉬고 있는데 총무국으로부터 6월19일 징계위원회에 출두하라고 통보가 왔다. 현홍주국장에게 전화를해 무슨 일인지 물어보니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당시 상황에 대해 묻는 말에.대답만 하면 된다고 했다 19일 징계위에 참석했더니 전남지부의 박세혁 과장이 광주사태 직전 장모상을 치르기 위해 서울에 올라갔는데 지부장 승인을 받았느냐는 질문만 했다. 아들 없는 장모상을 사위가 치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기 때문에 내가 승인해준 것이었다』

-징계위원회에서 전주로 대피한 사실에 대해서는 물적보지 않았나.『전혀 물어보지 않았다』

-징계를 당한 후 현흥주국장에게 이유를 따져봤을 터인데‥‥『징계위가 열린 다음낱인 20일 인사과에서 연락이 왔다.나는 의원면직되고 과장 3명은 직권면직됐다는 것이었다 나는 현국장을 직접 찾아가 이게 무슨 짓이냐고 항의했다 그리고 징계 사유가 뭔지 따졌다』

-현홍주극장은 뭐라고 대답했나,『징계를 한 특별한 사유는 없다고 했다 다만 중앙정보부에도 신군부의 개혁주도세력이 있는데, 주요 기관장들은 해임되고 구속되는 마당에 정보기관 책임자나 간부만 구제된다면 형평상 문제가 있다고 그들이 강력히 주장하는 바람에 서차장이나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서차장으로부터 취업을 알선해주라는 지시를 받았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퇴직한 감찰실 직원이 알려준 징계사유

-근무지 이탈지휘 혐의 등 징계 사유를 안 것은 언제인가.『그 당시에 징계사유를 확실하게 알아보고 이의를 제기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공무원들이 뚜렷한 사유도 없이 대량 해직되고 중정에서도 7백명이나 쫒겨나는 마당에 우리 문제만 따지고 드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전두환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고 노태우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80년당시 징계를 담당했던 감찰실 직원 중 퇴직한 사람이 징계사유를 이야기해주었다. 그래서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한 결과 80년 5월24일 전북지부로 직원들을 대피시킨 것이 근무지 이탈 지휘라는 것이었다』

-본부의 지시를 받아 대피했다고 했는데‥‥당시 전두환 부장은 정치위가 보안 사령관실이었기 때문에 웬만한 사항은 차장이 전결 처리하는 과도체제였다.대피건도 그런 사항으로 봤는지 박정회과장의 긴급대피 건의를 받은 서정화차장과 현흥주국장은 전두환부장에게 보고도 없이 바로 조치한 모양이었다. 문제는 중정으로부터 어떤 보고도 받지 못하고 있던 전두환부장이 광주 보안대로부터 지부직원들이 대피했다 는 보고를 받은 것이다 전부장은 즉각 서차장에게 대피건을 추궁하자 서차장은 잘못 처리했구나 직감하고 보고받지 못했다고 말한 것으로 안다 당시 전두환부장이 나를 파면 구속시키라고 불호령을 내렸을 것은 뻔한 일이다』

-만일 무단 근무지 이탈 지휘를 했다면 부하직원들은 직권면직이라는 중징계를 받은데 비해 지부장이 의원면직된 것은 너무 가벼운 것이 아닌가.『정말 내가 단독으로 근무지 이탈 지휘를 했다면 파면 구속되는 것이 마땅했을 것이다. 그런데 자깆들이 대피 지시를 해놓고 문제가 되자 나한테 덮어씌우는 것이 미안했던지 이런 모순 된 징계조치를 한 것으로 안다』

-긴급대피를 건의했던 당사자인 박정희과장을 전남지부장에 앉힌 것도 이상한데‥‥『나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시키기 위해서는 박정회과장이 전남지부장을 맡아야 완벽하게 일이 처리되는 것 아닌가. 만약 다른 지부장이 임명되면 지부 직원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것이 뻔한데‥‥』징계사유를 확인한 정석환씨와 강제 해직된 가장들은 지난 88년 청와대 진정을 통해 누명을 벗겨주고 보상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그러나 반응이 없었다,당시 서정화씨는 국회의원으로서 민정당 주요 당직자였고 현흥주씨는 법제처장이었다.정석환씨는 누구의 요청에 의해 헬기와 비행기가 동원됐는지 확인하기 위해 애썼으나 소득을 얻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이미 중앙보부에서 퇴직, 토지개발공사 감사로 재직중이던 박정희씨를 찾아갔다고 한다.『이미 중정에서 나왔으니 우리의 누명을 벗겨달라고 했다 그는 그동안 이문제로 고민을 많이 했다며 자신이 대피를 건의한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징계번복 대신 보상금 줘

-현흥주씨에게는 확인서를 받지 못했나.『박정희씨가 써준 확인서를 갖고 89년 7월14일에 현흥주씨를 찾아가 확인서를 써달라고 부탁했더니 자신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며 거절했다. 할 수 없이 박정희씨의 확인서만 첨부해 서동권 안기부장에게 진정서를 제출했다』

-반응이 있었나.『사실은 인정하나 이제 와서 징계를 번복할 수는 없다며 보상금 1천만원씩을 주겠다고 제의했다. 나는 생활에 어려움이 없으니까 괜찮지만 해직된 과장들은 가정형편이 어려워 곤란하다고 이야기했더니 해직된 과장들에게는 1천5백만원씩 지급했다. 당시 해직된 이용섭 수사과장 부인은 그 충격으로 인해 81년에 사망했고 93년에 사망한 총무과장 김형일씨도 그때 충격받아 얻은 신병으로 앓고 있었다』

-돈을 받았다면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닌가.『그들이 우리에게 돈을 준 것은 징계가 잘못됐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의 불명예가 완전히 벗겨진 것은 아니다. 당시 징계에 대한 재심이 지금은 불가능하겠지만 당시 책임자였던 서정화씨와 현흥주씨는 이제라도 진실을 밝혀야 할 것이다』정석환씨는 현재 의류유통소매업에 종사하고 있다 전북 군산 출신인 그는 연세대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현홍주씨와 서정화씨의 반론

현흥주씨(56)는 정석환씨의 증언 중 자신과 관련된 부분에 대해『기억이 나지 않는다』 『모르는 일이다』며 부인했다. 다만 『정석환씨가 80년 광주사태 당시 자리를 비워 해직됐다는 것은 기억난다』고 말했다.

-정석환씨를 아는지 .『글쎄· .』

-80년 광주사태 때 전남지부장 직무대리를 하다가 해직됐는데‥‥『그랬던가요. 기억이 잘 안나는데· .』그러나 나중에는 기억이 나는지 정석환씨를 안다고 시인했다.

-그러면 박정희씨는 아는지. 전두환부장 특명으로 광주에 내려왔던 기획정책정보국 과장인데-- . 『그때 여러 사람이 왔다 갔다 했다』『헬기 대픽 지시한 적 없다』

-정석환씨 주장에 따르면 박정희씨가 긴급대피 건의를 하자 현국장이.서정화차장과 상의해긴급대피 지시를 내렸다고 하는데‥‥『당시 정황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기정국이란 대피지시를 내리는 곳이 아니다 기정국은 정보를 분석, 정리하는 곳이다 기조실이나 비서실 아니면 차장만이 그런 지시를 내릴 수 있다』

-그러면 정석환씨가 거짓말을 한 것인가.「기억이 없다』

-전남지부 직원들이 헬기로 대피했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나.『모르는 일이다』

-정석환씨와 전남지부 과장들의 징계사유를 모르나.『징계는 감찰실에서 한 것이기 때문에 나는 모른다. 그러나 광주사태 당시 자리를 비워 해직 됐다는 얘기는 들었다』

-자리를 비웠다는 것은 대피했다는 이야기인데· ,「대피했겠지 그러나 어떻게 대피했는지 과정은 모른다』

-박정희과장이 전두환부장 특명으로 내려갔다면 부장에게 직접 건의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글쎄, 박정희씨가 광주로 내려갔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정석환씨는 자신의 징계사유가 무단 근무 이탈 지휘 혐의인 것을 알고누명을 벗기 위해 당신을 찾아갔다는데---.「전혀 기억이 없다』

-80년 6월 당시 중앙정보부에서만도 7백명이 해직당했는데 징계사유는 적당히 붙인 것 아닌가.『징계는 기정국 소관 밖이었다』

-전남지부 직원들의 대피사실이 전두환부장에게 질책당하자 서정화차장과 현국장이 책임을 회피한 것은 아닌가.「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책임을 아랫 사람들에게 전가한 적은 없다』현홍주씨는 검사출신으로 안기부 제 1차장, 법제처장, 주미대사 등을 역임하고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한편 현재 신한국당 국회의원인 서정화씨(63)는 보좌관을 통해 『전혀 모르는 사실이며 정석환씨가 누군지도 모른다고 한마디로 일축했다 서정화씨측의 주장에 따르면 80년 5월초에 중앙정보부 1차장으로 부임했기 때문에 내부 사정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 더구나 차장에게는 인사문제 등 어떤 권한도 부여되지 않았고 특별히 한 일도 없다고 주장했다

최영신 중사의 그날, 그 기억

매년 5월이면 광주 망월등을 찾는다는, 경기도 부천에 사는 최영신(42) 씨. 광주민준한쟁당시 7공수 33대대 소속 계엄군이었던 그는 15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의 참상을 잊지 못한다. '80년 5월 17일, 전북 금마의 7i공수 33대대에서 근무하던 최 씨는 제대를 10일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출돋 명령이 떨어졌다. "우리부대에서는 그전까지 폭동진압 훈련 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출동할 때는 M16자동소총과 길이 70센티미터 정도의 진압봉으로 완전무장한 상태였습니다. "

부대를 출발한 그와 그의 동료들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캄칸한 어둠을 뚫고 달리는 군용트럭에 몸을 실어야 했다. 그래서 도착한 곳이 전남대학교 운동장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24인용 군용텐트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의 동료들은 그 다음 낱부터 작전에 들어갔다. 당시 공수부대원의 경상도 출신 차출설과 환각제 복용설과 관련해 최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부대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단. 함께 출동했던 동료 중에 전남 화순이 고향인 제 동기도 있었으니까요. 환각제는 먹지 않았지만 평소 많은 부대원들이 술을 좋아해 수통에 넣어 가지고 다니기도 했던 것으로 보아 술을 먹고 작전에 투입된 사람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5월 18일, 그는 대대본부에 남아 그곳으로 끌려오는 사람들에게 기합을 주는 일을 맡아했다. 전남대 운동장으로 잡혀 온 시위학생들과 시민들이 예외없이 머리가 터져 유혈이 낭자했다. 그 모습을 보고 어떻게 저렇게 하나같이 머리가 터져 있을까 하고 의아해했었다고 최씨는 회상했다.

그는 단순 가담자로 보이는 몇몇 학생들을 몰래 탈출시키기도 했다. 나머지는 모두 군용트럭으로 어디론가 실려갔다. 상황이 급박해지면서 그의 부대는 인근 조선대 교정으로 이동했고, 거기에서 3공수, 11공수와 합류했다. 최 씨는 도청 앞 집단발포 일이었던 5월 21일, 현장 작전중인 11공수 63대대장 조창구 중령이 조선대 학군단내에 설치 된 여단본부와의 무전교신에서 당시 11공수 여단장 최 웅 준장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실탄을 더 보내달라"고 외치는 소리를 여단장실 옆방 다른 무전기를 통해 들었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중령이 별 두 개 여단장 무전기에다 실탄을 더 지급해달라고 욕설을 퍼부었겠습니까. "시민군들에게 밀려 퇴각하던 조선대 주둔 부대는 그가 속해 있던 7공수와 11공수가 뒤섞여 있었다.장비와 부식 그리고 일부 군인들을 실은 군용트럭은 무차별 사격을 가하며 교정을 빠져나갔고, 나머지는 화순 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지원동 주남마을 근처에서 7공수와 11공수가 양쪽으로 주둔했다. 그곳에서 그는 양민학살을 목격했다. "산 중턱에 자린를 잡고 있는데 산 아래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내려가 보았어요. 교복을 입은 한여학생이 한 손에 총탄에 의한 관통상을 입은 채 리어카에 부상당한 두 사람을 태워 끌고 왔더라구요. "

11공수의 한 대대장이 그들을 수색하던 종 칼빈 총탄 두 개가 나왔다.그는 그들이 시민군이라고 여겼던지 한 명의 하사와 두 명의 사병에게 '밑에 내려가 처치해" 하고명령했다. 사병 중 한 사람은 그의 부하였다. "주둔지에 올라오면서 네 발의 총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부하사병이 을라왔어요. 사살했는지 묻지는 않았지만 그의 장황한 얘기를 들으면서 저는 그 젊은이들이 모두 사살되었음을 직감했습니다. " 최 씨가 그곳에서 만났던 세 젊은이는, 공수부대의 무차별 사격으로 15명의 사상자를 낸 '주남마을 양민학살사건' 때 부상당한 이들이었다.제대가 하루밖에 남지 않은 5월27일, 그의 부대는 도청 탈환작전을 위해 헬기로 광주 비행장 격납고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그는 출등 준비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때 저는 작전에서 제외되었었어요. 그러나 진압 작전에 나선 동료부대원 상당수가 수류탄 2발과 실탄 3백60여 발로 무장한 채 출동했습니다. "

최영신씨는 비록 직접 시민들을 사살한 적은 없지만 광주에 투입되었던 군인이었단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괴로웠다. 그리고 그는 '90년 1월 '주남마을 양민학살사건' 을 세상에 알렸다. 그후 그와 그의 가족들은 신변에 위협을 느껴 몇 개월 동안 도망다녀야 했다. '학살사건을 증언한 후 하루에도 수십 통씩 '죽여버리겠다'는 내용의 전화가 걸려왔고,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와 행패를 부렸습니다. " 그 행패를 견디다 못해 그는 주소지 변경을 하지 않은 채 이사를 했다. 그런데 현역 공수부 대원들이 이전 거주지에 찾아가 문을 때려부수는 등 행패를 부렸다. 경제적 어려움도 헤쳐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했던 그는 퇴직금으로 장사를 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돈마저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 어려움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한 양심선언을 후회하지 않는다. 자신이 증언한 내용은 진정한 의미에서 양심선언이 될 수 없다고 여기는 최영신 씨 그는 진정한 양심선언은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하거나 구타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증언 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그들이 가슴 깊이 간직해놓고 살아야만 하는 그 아픔들을 세상에 드러낼 때, 학살을 명령했던 자들이 비로소 역사적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