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민정당 사무총장 박준병.조용준(주부생활, 1988. 7)
본문
민정당 사무총장 박준병
"어느 경우든 군부의 정치개입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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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국민이 관심이 '광주민주화운동 조사특위'의 활동여부에 쏠려 있는 가운데 과연 80년 광주의 5.17에서부터 5.21까지의 열흘동안 '무슨일이 어떻게 일어났느냐'는 문제가 주목되고 있다. 당시 20사단장으로서 광주진압을 직접 지휘한 한사람인 박준병 민정당 사무총장이 당시의 상황과 군부의 정치개입문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광주에 관계된 군인사증 최초의 공식발언자 박총장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을 '여소야대'의 정치구도에서 '삼면초가 민정당의 실질적 총지위탑인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박준병의원(54)은 그의 경력으로만 본다명 꽤나 '무서운'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다. 광주항쟁 당시 20사단장으로서 진압을 지휘한 이유로 일부에서는 그를 '광주항쟁의 다섯 원흉'의 한사람으로 부르고 있는데다가 소위 '경북궁팀'의 일원으로 '12.12'에 참여했고 보안사령관이라는 직함을 거쳤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따라서 정가 밖에서는 박총장을 강성이미지의 인물로 분류하기도 하나 자연인 박준병을 평할 때 맨 먼전 들먹여지는 덕목은 바로 '온화'라는 것이다. 장장 34년이라는 세월을 철두철미한 무장으로서만 있었으니까 차갑고 거칠 것이란 추측이 지배적이지만 그를 실제로 접해보면 쉽게 그가 소탈하면서도 온화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무장출신인 그에게 문인으로서의 소양과 자질이 있다는 석 또한 여러 의미를 던져준다. 치밀하고 띄어난 기억력 예리한 판단력도 평가자료로 삼아야 될 것같다.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본다면 그가 지난 85년 민정당 국책조정위위원장으로 그 실세를 드러내고 지난 총선에서 민정당이 얻은 선거결과에 따라 심명보 전사무총자의 후임으로 등장한 사실이 자연스럽게 연결되기도 한다. 85년 국책조저우이에 등장할 당시 정계 안팎에서 '마침내 수면에 떠오른 핵잠수함'으로 그를 지칭했듯이 민정당의 '빅 카드'로서 그는 거대야당과의 동반자적 관계로 향후정국을 이끌어 나갈 위치에 선 것만은 확실한 사실이다.사무총장직을 맡아 '말도 많았던' 청와대 4자회담을 성사시키면서 당정간의 핵심역할을 맏게된 그가 더욱 관심을 끄는 이유는 아무래도 8년 광주의 진압군을 지휘한 사단장으로서 '광주민주화 운동'의 정확한 진상을 밝혀내자는 목소리가 점점 드높아지고 있는 당면과제와 밀착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다.
벌써 8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광주에 관계된 군인사중에서 자신의 입으로 직접 80년 광주를 말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최초의 공식발언자'로서 박총장의 '광주문제'증언이 그만큼 중요성을 지니는 동시에 '운동'이냐 '투쟁'이냐는 명칭만으로도 난항을 거듭한 '조사특위'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질 '광주 둔제'에 대한 군의 입장 및 배경을 파악할 수 있는 지렛대도 된다. 아울러 현 시국에 대한 군부의 동향도 알아 볼 수 잇는 것이다. 80년 5월 17일 박준병사단장은 그날 떨어진 계엄확대 조치와 함께 명열에 따라 사령부를 동국대학으로 옮기고 서울시 10여개 대학에 부대를 진주시켰다. 20사단은 유사시 서울의 계엄업무를 담당하는 부대. 그에게 1개 연대를 광주로 보내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은 5월20일. 그때까지 그는 광주에서 무슨 문제가 있는지도 잘 몰랐다고 한다.
그러나 21일 새벽 서울을 떠나 아침에 송정리에 도착하고서야 그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의 짚차를 포함한 10여대의 차량이 광주 톨게이트에서 민간인에게 빼앗겼다는 보고를 받고난 후였다. 특히 그의 차는 별판이 열어젖힌 채 광주 시내를 돌아다녀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의 부대가 광주 진입을 한 것은 5월 27일,21일 밤에 도청에 있던 공수부대가 철수를 하고 광주시내에서는 경찰과 군인이 다 빠져버린 후였다. 당시 계엄군의 광주진입은 20사단,31사단의 일부 병력,CAC(전투교육사령부)의 보병학교 포병학교 병력,공수단이 함께 나누어 맡았는데 박총장의 말에 의하면 20사단이 가장 넓고 중요한 부분을 맡았으나 도청과 YMCA,사직공원에는 상당히 조직화된 시민군이 있다는 전제하에 일단 공수단이 제압한 후 20사단에게 인계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20사단 병력중에는 전라도출신이 25%쯤 됐다
27일 새벽 주둔지를 떠나 책임지역에 도착해 작전종료된 시간이 4시 30분, 그의표현대로라면'약간의 교전이 있었던'YMCA와 도청에서는 오전 6시 반쯤에 '진압'이 거의 끝났다.27일 진압작전이 진행되기 직전 박준병소장은 CAC사령부 연병자에서 부하들에게 두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이에따라 행동할 것을 약속한다는 연설을 했다고 한다. 그 하나는 광주시민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국민의 군대로서 신뢰를 얻는데 역점을 둔다는 내용의 연설이었다. 그는 이 말을 작전명령서의 작전개념 속에도 써넣었는데 언젠가는 그 원본이 나올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당시 20사단에는 전라도 출신이 장교 사병 합쳐서 25%는 됐는데 광주출신 부하들을 어떻게 할 거냐는 생각으로 고민을 하다가 우선 부하들부터 통솔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슬기롭게 문제를 해결해나가자는 요지에서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20사단은 27일 이후 광주에서 한달 가까이 있다가 철수했다. 최근 모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밝힌 '광주사태의 현장을 본 느낌'은 다음과 같다."비극적인 사태에 대해서 굉장히 걱정을 했지요. 지금 와서는 왜 27일날 들어갔는냐, 더 기다릴 수 없었느냐 하는 애기도 나올 수 있겠지만 그것은 나하고 관련된 부분이 아니에요. 그것은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니까요 하여튼 여러가지 아쉬운 게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수습을 한 것을 하느님께 감사하고 또 그렇게 해주도록 도아준 분들에게 고맙다고 생각했읍니다.그리고 나는 육사 생도시절은 물론 각종 교육을 광주에서 받는 등 기본적으로 광주와 인연이 깊어 좋은 인상을 갖고 있는데 광주가 정치문제화되면서 5적도 되었다가 원흉도 되었는데 상당히 안타깝게 생각해요."
진실의 바탕위에 철저히 조사할 터
그는 광주문제 조사에 대해서도 이렇게 설명한다. "민화위 입장이 여당과 정부의 기본입장입니다. 여러가지 정치상황으로 미루어 조사를 위한 특위가 구성되고 또 그 조사특위를 통해 초기진압 관계의 여러가지 상황들이 조사되어야 한다는 주자인데 가급적이면 최대한으로 진실에 가깝게 한번 재조사를 해보자는 입장입니다.그리고 정부측은 비극적인 사태였기에 가급적이면 덮어둘려고 해온데 반해 광주시민이나 국민들은 자꾸 더 조사해야 된다고 하다보니까 한쪽 애기만 굉장히 커져 있어요 그러니까 이번 광주사태의 과정을 재조사할 경우 양쪽 애기가 같이 드러나 진실이 어디에 있던 양쪽은 외 이런 상황으로 갔느냐 하는 것을 진실의 바탕 위에서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는 광주사태가 끝난 뒤 참모총장에게 보고하면서 광주사태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째로 인사에 원인이 있는 것 같다. 앞으로 육군은 10~15년 내에 전라도출신 육균참모총장을 내도록 하자. 인사를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소외의식이 있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왔다.
둘째로 유언비어를 중요한 원인으로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CAC,31사단,공수단등 데모진압에 투입됨으로써 데모 진압의 적시성과 적절성을 놓친 것 같다.물론 80년 광주에 대한 이같은 그의 논평은 아직 공식적인 것도 아니고 조사특위가 결성되기 직전에 나온 그의 입장표명으로 생각할 수 있다. 올바른 판단은 현재 양측 모두가 철저한 조사를 원하고 있으니 그 후에나 내릴 문제이다. 아직 검증의 단계가 남아 있기도 하다.광주문제는 5공화국 출범과도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이의 판단여부에 따라서 군부가 위기의식을 느낄 수도 있다. 군의 정치개입과 관련, 그의 생각을 들어보면"군부의 정치개입은 기본적으로 그 나라의 정치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정치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정치문화가 군부의 정치개입을 수용하는 수준보다 높기 때문에 군의 정치개입은 어느 경우도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단지 북한이 내부의 혼란 교란 분열을 도발의 구실로 삼을 수 있는 가능성은 항상 있을수 있기 때문에 북한이 오판할 기회를 주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그의 말대로 우리나라의 군부가 어느 경우에든 정치개입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에 같이 한다면 그것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런 인식 못지않게 명령과 복종에 철저히 길들여진 군이 개입된 정치로는 이 나라 앞에 산적해 있는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인식 또한 현단계에서 절실한 것이 아닐까.
"어느 경우든 군부의 정치개입 없을 겁니다"
확인인터뷰
온국민이 관심이 '광주민주화운동 조사특위'의 활동여부에 쏠려 있는 가운데 과연 80년 광주의 5.17에서부터 5.21까지의 열흘동안 '무슨일이 어떻게 일어났느냐'는 문제가 주목되고 있다. 당시 20사단장으로서 광주진압을 직접 지휘한 한사람인 박준병 민정당 사무총장이 당시의 상황과 군부의 정치개입문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광주에 관계된 군인사증 최초의 공식발언자 박총장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을 '여소야대'의 정치구도에서 '삼면초가 민정당의 실질적 총지위탑인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박준병의원(54)은 그의 경력으로만 본다명 꽤나 '무서운'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다. 광주항쟁 당시 20사단장으로서 진압을 지휘한 이유로 일부에서는 그를 '광주항쟁의 다섯 원흉'의 한사람으로 부르고 있는데다가 소위 '경북궁팀'의 일원으로 '12.12'에 참여했고 보안사령관이라는 직함을 거쳤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따라서 정가 밖에서는 박총장을 강성이미지의 인물로 분류하기도 하나 자연인 박준병을 평할 때 맨 먼전 들먹여지는 덕목은 바로 '온화'라는 것이다. 장장 34년이라는 세월을 철두철미한 무장으로서만 있었으니까 차갑고 거칠 것이란 추측이 지배적이지만 그를 실제로 접해보면 쉽게 그가 소탈하면서도 온화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무장출신인 그에게 문인으로서의 소양과 자질이 있다는 석 또한 여러 의미를 던져준다. 치밀하고 띄어난 기억력 예리한 판단력도 평가자료로 삼아야 될 것같다.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본다면 그가 지난 85년 민정당 국책조정위위원장으로 그 실세를 드러내고 지난 총선에서 민정당이 얻은 선거결과에 따라 심명보 전사무총자의 후임으로 등장한 사실이 자연스럽게 연결되기도 한다. 85년 국책조저우이에 등장할 당시 정계 안팎에서 '마침내 수면에 떠오른 핵잠수함'으로 그를 지칭했듯이 민정당의 '빅 카드'로서 그는 거대야당과의 동반자적 관계로 향후정국을 이끌어 나갈 위치에 선 것만은 확실한 사실이다.사무총장직을 맡아 '말도 많았던' 청와대 4자회담을 성사시키면서 당정간의 핵심역할을 맏게된 그가 더욱 관심을 끄는 이유는 아무래도 8년 광주의 진압군을 지휘한 사단장으로서 '광주민주화 운동'의 정확한 진상을 밝혀내자는 목소리가 점점 드높아지고 있는 당면과제와 밀착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다.
벌써 8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광주에 관계된 군인사중에서 자신의 입으로 직접 80년 광주를 말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최초의 공식발언자'로서 박총장의 '광주문제'증언이 그만큼 중요성을 지니는 동시에 '운동'이냐 '투쟁'이냐는 명칭만으로도 난항을 거듭한 '조사특위'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질 '광주 둔제'에 대한 군의 입장 및 배경을 파악할 수 있는 지렛대도 된다. 아울러 현 시국에 대한 군부의 동향도 알아 볼 수 잇는 것이다. 80년 5월 17일 박준병사단장은 그날 떨어진 계엄확대 조치와 함께 명열에 따라 사령부를 동국대학으로 옮기고 서울시 10여개 대학에 부대를 진주시켰다. 20사단은 유사시 서울의 계엄업무를 담당하는 부대. 그에게 1개 연대를 광주로 보내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은 5월20일. 그때까지 그는 광주에서 무슨 문제가 있는지도 잘 몰랐다고 한다.
그러나 21일 새벽 서울을 떠나 아침에 송정리에 도착하고서야 그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의 짚차를 포함한 10여대의 차량이 광주 톨게이트에서 민간인에게 빼앗겼다는 보고를 받고난 후였다. 특히 그의 차는 별판이 열어젖힌 채 광주 시내를 돌아다녀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의 부대가 광주 진입을 한 것은 5월 27일,21일 밤에 도청에 있던 공수부대가 철수를 하고 광주시내에서는 경찰과 군인이 다 빠져버린 후였다. 당시 계엄군의 광주진입은 20사단,31사단의 일부 병력,CAC(전투교육사령부)의 보병학교 포병학교 병력,공수단이 함께 나누어 맡았는데 박총장의 말에 의하면 20사단이 가장 넓고 중요한 부분을 맡았으나 도청과 YMCA,사직공원에는 상당히 조직화된 시민군이 있다는 전제하에 일단 공수단이 제압한 후 20사단에게 인계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20사단 병력중에는 전라도출신이 25%쯤 됐다
27일 새벽 주둔지를 떠나 책임지역에 도착해 작전종료된 시간이 4시 30분, 그의표현대로라면'약간의 교전이 있었던'YMCA와 도청에서는 오전 6시 반쯤에 '진압'이 거의 끝났다.27일 진압작전이 진행되기 직전 박준병소장은 CAC사령부 연병자에서 부하들에게 두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이에따라 행동할 것을 약속한다는 연설을 했다고 한다. 그 하나는 광주시민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국민의 군대로서 신뢰를 얻는데 역점을 둔다는 내용의 연설이었다. 그는 이 말을 작전명령서의 작전개념 속에도 써넣었는데 언젠가는 그 원본이 나올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당시 20사단에는 전라도 출신이 장교 사병 합쳐서 25%는 됐는데 광주출신 부하들을 어떻게 할 거냐는 생각으로 고민을 하다가 우선 부하들부터 통솔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슬기롭게 문제를 해결해나가자는 요지에서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20사단은 27일 이후 광주에서 한달 가까이 있다가 철수했다. 최근 모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밝힌 '광주사태의 현장을 본 느낌'은 다음과 같다."비극적인 사태에 대해서 굉장히 걱정을 했지요. 지금 와서는 왜 27일날 들어갔는냐, 더 기다릴 수 없었느냐 하는 애기도 나올 수 있겠지만 그것은 나하고 관련된 부분이 아니에요. 그것은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니까요 하여튼 여러가지 아쉬운 게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수습을 한 것을 하느님께 감사하고 또 그렇게 해주도록 도아준 분들에게 고맙다고 생각했읍니다.그리고 나는 육사 생도시절은 물론 각종 교육을 광주에서 받는 등 기본적으로 광주와 인연이 깊어 좋은 인상을 갖고 있는데 광주가 정치문제화되면서 5적도 되었다가 원흉도 되었는데 상당히 안타깝게 생각해요."
진실의 바탕위에 철저히 조사할 터
그는 광주문제 조사에 대해서도 이렇게 설명한다. "민화위 입장이 여당과 정부의 기본입장입니다. 여러가지 정치상황으로 미루어 조사를 위한 특위가 구성되고 또 그 조사특위를 통해 초기진압 관계의 여러가지 상황들이 조사되어야 한다는 주자인데 가급적이면 최대한으로 진실에 가깝게 한번 재조사를 해보자는 입장입니다.그리고 정부측은 비극적인 사태였기에 가급적이면 덮어둘려고 해온데 반해 광주시민이나 국민들은 자꾸 더 조사해야 된다고 하다보니까 한쪽 애기만 굉장히 커져 있어요 그러니까 이번 광주사태의 과정을 재조사할 경우 양쪽 애기가 같이 드러나 진실이 어디에 있던 양쪽은 외 이런 상황으로 갔느냐 하는 것을 진실의 바탕 위에서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는 광주사태가 끝난 뒤 참모총장에게 보고하면서 광주사태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째로 인사에 원인이 있는 것 같다. 앞으로 육군은 10~15년 내에 전라도출신 육균참모총장을 내도록 하자. 인사를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소외의식이 있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왔다.
둘째로 유언비어를 중요한 원인으로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CAC,31사단,공수단등 데모진압에 투입됨으로써 데모 진압의 적시성과 적절성을 놓친 것 같다.물론 80년 광주에 대한 이같은 그의 논평은 아직 공식적인 것도 아니고 조사특위가 결성되기 직전에 나온 그의 입장표명으로 생각할 수 있다. 올바른 판단은 현재 양측 모두가 철저한 조사를 원하고 있으니 그 후에나 내릴 문제이다. 아직 검증의 단계가 남아 있기도 하다.광주문제는 5공화국 출범과도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이의 판단여부에 따라서 군부가 위기의식을 느낄 수도 있다. 군의 정치개입과 관련, 그의 생각을 들어보면"군부의 정치개입은 기본적으로 그 나라의 정치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정치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정치문화가 군부의 정치개입을 수용하는 수준보다 높기 때문에 군의 정치개입은 어느 경우도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단지 북한이 내부의 혼란 교란 분열을 도발의 구실로 삼을 수 있는 가능성은 항상 있을수 있기 때문에 북한이 오판할 기회를 주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그의 말대로 우리나라의 군부가 어느 경우에든 정치개입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에 같이 한다면 그것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런 인식 못지않게 명령과 복종에 철저히 길들여진 군이 개입된 정치로는 이 나라 앞에 산적해 있는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인식 또한 현단계에서 절실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