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청문회 속기록] 제 144회 국회(페회중)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회의록 제 7 호(11)
본문
ㅇ 위원장 文東煥
회의를 속개하겠읍니다.다음 신문자가 신문하시기 전에 증인에게 한마디 여쭙겠읍니다.하루 저녁내 들어보면 잊어버렸다 사후에야 들었다 이런 얘기로서 너무 시종합니다.모두가 책임이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중대사를 잊어버렸다는 것은 관심이 없었다 하는 말이고 사후에 들었다 하면 그것은 추궁해서 뒷처리 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잊어버리고 말고 뒷처리하지 않아 버리고 말고 한다는 것은 그렇게 무책임해 가지고서는 사실은 계엄사령관에 까지 올라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이 얘기는 성의있게 대답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밖에 들을 수가 없읍니다.증인! 좀 더 성의있게 대답해 주기를 바랍니다.이제 金永鎭위원 신문해 주십시오.
ㅇ 金永鎭위원
평화민주당의 金永鎭위원입니다.본위원은 이 역사적인 광주특위청문회의 증인신문에 임함에 있어서 먼저 광주에서 8년전 계엄군에 의해서 무참하게 학살 당한 우리 광주 영령들의 그 모습들이 떠올라서 참으로 가슴을 에이는 아픔을 안고 이 신문대에 섰읍니다.증인은 12·12사태가 났던 바로 이틀 뒤에 육군참모총장겸 계엄사령관에 보임되었고 5·17비상계엄 전국확대 5·18 광주학살 진압 그리고 국보위 탄생등 역사의 소용돌이가 쳤던 가장 중요한 시대에 중요한 군 최고책임자를 맡았던 사람으로서 진실을 밝히는 의미에서 이 역사의 증언대 앞에서 바르게 모른다 기억에 없다 하는 그런 얘기로 일관하지 말고 책임을 지는 마음으로 정직하게 증언에 임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본위원이 준비한 신문에 앞서 먼저 한가지 확인하겠읍니다.5·18 광주학살에 대해서 책임을 묻는 질문에 全斗煥 전대통령은 말하기를 자신은 당시 보안사령관으로서 광주학살에 대한 책임은 당시 대통령 그리고 장관 계엄사령관 이런 사람들의 책임이라고 분명히 공석에서 말했읍니다.이런 全斗煥씨의 견해에 증인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ㅇ 증인 李熺性
체계상으로 그 얘기는 옳습니다.
ㅇ 金永鎭위원
체계상으로는 옳은데 사실은 어떻습니까?
ㅇ 증인 李熺性
실제도 그러리라고 믿고 있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실제도 그렇습니까?
ㅇ 증인 李熺性
예.
ㅇ 金永鎭위원
분명히 해 둡시다.다음 동료위원들이 질문한 가운데 답변을 회피하고 또 본위원이 보기로는 질문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여러 군데가 있었읍니다. 특히 그 가운데에서도 헌법기관인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를 계엄군을 동원해서 국회 정문앞에서 차단을 하고 무력으로 이제 국회가 열리지 못하도록 했던 그런 만행에 가까운 짓이 벌어졌다고 증인은 시인을 했읍니다. 그런데 그런 현저한 법위반에 대해서 어떻게 처리를 했읍니까? 그리고 현장에 출동했던 부대 이름도 모른다고 그랬읍니다. 본 위원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당시 33사단은 사단장은 안필준 소장입니다. 거기에 출동했던 101연대산하의 중대장은 옥규진대위입니다. 이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처리했읍니까? 지휘관으로서…
ㅇ 증인 李熺性
처리를 못했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처리를 못 했으면 직무유기에 해당되는 것아닙니까? 국헌을 문란케 하고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를 차단하고 마비시킨 지휘관으로서 처벌하지 않았으면 분명히 직무유기에 해당되지요?
ㅇ 증인 李熺性
33사단의 상급기관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전적으로 당시 계엄사령관만이 책임질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ㅇ 金永鎭위원
지휘체계상 물론 위의 상급부대는 있지만 이런 엄청난… 국민을 기만하고 헌법기관을 파괴한 일에 대해서는 당시의 계엄사령관으로서 직무유기에 대한 책임이 있지 않습니까? 있지요?
ㅇ 증인 李熺性
그 말단기관이 명에 의한 것을 잘 못해서 그것을 처리했으면 좋았을텐데 그것을 못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ㅇ 金永鎭위원
위원장님! 다른 어떤 문제보다도 이 문제는 현저하게 헌법위반 사항입니다. 본위원은 지금 증인이 이 문제에 대해서 계속 책임회피성발언을 계속하고 있읍니다. 진상을…
ㅇ 위원장 文東煥
위원장으로 한 가지 여쭤봅시다.
ㅇ 증인 李熺性
예.
ㅇ 위원장 文東煥
아까 모른다고… 늦게 알았다고 그랬지요?
ㅇ 증인 李熺性
예. 늦게 보고받아서 사실은 알았읍니다.
ㅇ 위원장 文東煥
그것을 추궁해 보았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못 했다고 여쭈었읍니다.
ㅇ 위원장 文東煥
왜 추궁하지 않았어요?([위원장이 공정하게 사회만 보세요]하는 이 있음)위원장도 물론 물을수가 있읍니다.위원장도 신문권을 가지고 있어요.
ㅇ 金永鎭위원
위원장님! 발언 계속하겠읍니다.본위원은 지금 증인이 답하고 있는 가운데 위증 내지 직무유기에 대한 시인을 안하고 있읍니다. 명백하게 직무유기임이 확인되었읍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청문회가 끝난 다음에 별도로 조사소위원회를 구성해서 진상을 확인해서 내일 열리는 청문회에서 이 문제를 다시 확인하도록 하겠읍니다. 허락해 주시겠읍니까?
ㅇ 위원장 文東煥
예. 좋습니다.
ㅇ 金永鎭위원
이제 본위원이 준비한 신문을 계속하겠읍니다. 증인은…증인!
ㅇ 증인 李熺性
예.
ㅇ 金永鎭위원
말씀들으세요.증인은 군에서 실시하는 충정훈련을 무슨 훈련으로 알고 계신가요?무엇을 하는 훈련입니까?
ㅇ 증인 李熺性
충정작전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ㅇ 金永鎭위원
충정훈련입니다. 충정작전과 물론 훈련이 있읍니다. 충정훈련은 무엇을 하는 훈련입니까? 구체적으로…
ㅇ 증인 李熺性
각 부대마다 특정한 훈련의 이름을 붙이기 때문에 대개 특전사와 수도경비사령부가 실시하는 작전훈련이 그 이름이 붙지 않는가 생각하고 있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폭동진압훈련이 맞지요? 충정훈련은 폭동진압훈련이라고 여기 육군본부에서 제출한 자료에 분명히 나와 있읍니다. 맞습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까?
ㅇ 金永鎭위원
기억을 잘 더듬으셔서 말씀하세요. 증인은 1980년2월18일 작전명령을 통해서 돌발적인 소요사태에 대비하는 폭동진압훈련 소위 충정훈련을 실시하기로 하고 1군·2군·3군사령관 鄭鎬容 특전사령관 그리고 당시 盧泰愚 수도경비사령관 등에게 이 충정계획을 전군에 걸쳐서 하달한 바 있지요?
ㅇ 증인 李熺性
기억이 분명치 않습니다.
ㅇ 金永鎭위원
증인의 이름으로 직접…… 증인의 지위를 이용해서 문서를 냈는데 기억이 안 난다는 말씀입니까? 증인이 국방부에 제출한 문서에는 분명히 나와 있읍니다.이처럼 80년대초에 들어서 전후방에 있는 전군에 충정훈련을 전면실시하고 특히 이 충정훈련을 ¼분기안에 2월중에 조기실시하도록 명령을 한 것은 무슨 이유가 있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
ㅇ 金永鎭위원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80년대에 계엄사령관인 증인의 계엄포고문발표대로 북한의 남침기도가 긴박한 상황이었다면 전군에 작전지침이 폭동에 대비한 충정훈련이어야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증인은 당시에 북한의 남침기도가 긴박하다고 하는 그런 입장을 계속 공식으로 천명하면서 비정규전에 대비한 폭동진압훈련을 전군에 실시하도록 하달한 것이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가 묻고 있읍니다. 무슨 이유입니까?
ㅇ 증인 李熺性
하달한 기억이 없기는 없지만 만일 하달이 되었다면 이와같은 상황이…
ㅇ 金永鎭위원
하달한 기억이 없으면 추정해서 말씀하지 마세요.
ㅇ 증인 李熺性
알겠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북한의 남침위협으로 위기감을 조성하고 막상 군내부에서는 고도의 폭동진압훈련인 충정계획을 추진한 저의가 어디에 있는가 묻고 있는데 증인은 기억이 안 난다 이렇게 답변하고 있읍니다. 본위원이 증인의 기억을 도와드리겠읍니다. 솔직이 5·17[쿠데타]에 대비한 사전계획이었다고 말을 해야 되지 왜 변명합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ㅇ 金永鎭위원
그렇지 않다는 근거가 어디에 있읍니까? 왜 공산군의 남침위협이 심각하다 하면서 전군에는 폭동진압훈련을 시키느냐 그 말입니다. 그것도 ¼분기 이전에 전부대에 실시하도록 특별지시를 합니다.
ㅇ 증인 李熺性
……
ㅇ 金永鎭위원
그러면 5·17 전국비상계엄조치와 광주항쟁진압후에는 전혀 전부대에 충정훈련을 실시하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또 따로 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때 충정훈련을 실시했다면 ¼분기까지 완료했다고 했다면 제 판단에는 이렇습니다. 대학이 신학기가 시작되면 매년 연례행사모양으로 학생시위가 일어납니다……
ㅇ 金永鎭위원
증인!
ㅇ 증인 李熺性
예.
ㅇ 金永鎭위원
대학에 대한 폭동진압은 공수특전사나 후방부대로 하여금 과거 통상 실시해 왔던 훈련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문제의 5·17 전국비상계엄확대조치 3개월전인 2월중으로 전군에 대해서 전후방 할 것없이 1·2·3군 사령부 전부에 대해서 이 충정훈련을 실시하라고 한 저의에 대해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증인! 당시 충정훈련때 사용하기 위해서 지참하도록 예하부대에 시달한 장비명을 말씀해 보십시오.
ㅇ 증인 李熺性
일일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ㅇ 金永鎭위원
기억나지 않습니까?
ㅇ 증인 李熺性
예.
ㅇ 金永鎭위원
[가스]총 진압봉 화학탄 심지어 화염방사기까지 광주에는 지참을 시켜서 어린 학생과 선량한 시민들에게 이런 무기를 갖고 무차별 진압을 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
ㅇ 金永鎭위원
시민이 타도해야 할 적입니까? 화염방사기 화학탄 무슨 얘기입니까? 여기 보면은 분명히그런 지시를 내리고 있읍니다. 李熺性 육군참모총장겸 계엄사령관명으로 육군본부에 제출한 2급비밀문서에 보면 분명히 이런 장비를 지참하도록 지시하고 있읍니다. 뿐만 아니라 증인은 이런 지시를 통해서 광주시민학살사건발생 초기인 80년5월19일에는 소요진압부대용 특수진압봉 1만개를 긴급구입해서 공수특전사에 5,438개 2군에 1,092개 그리고 3군에 2,660개를 각각 사전에 수행토록 지시한 일이 있지요?
ㅇ 증인 李熺性
기억 납니다.
ㅇ 金永鎭위원
바로 이 문제의 진압봉에 무수한 광주시민이 무차별 머리가 깨지고 다리가 부러지는 그런 중상과 학살을 당했다고 하는 사실을 증인은 똑똑히 인식해야 됩니다.증인의 지시로 80년 상반기에 전군에 걸쳐 실시한 충정작전훈련은 5·17군사 [쿠데타]를 사전계획 준비하기 위한 대국민 무력진압사전연습이었읍니다. 이렇게 해서 잘 훈련된 공수특전단을 자기의 국민을 적이나 폭도로 간주하여 광주항쟁초기부터 잔악한 행동을 하도록 만들었읍니다. 이같은 충정훈련으로 인해서 선량한 학생과 광주시민이 무차별하게 죽어갔고 또한 증인에 의해서 실시되고 또 지시된 폭동진압훈련은 급기야 비극적인 광주대학살을 일으킨 주원인이란 사실이 판명됐는데 증인은 아니라고 말하겠읍니까? 답변해 보세요.
ㅇ 증인 李熺性
유감된 일입니다.
ㅇ 金永鎭위원
어떻게 유감됩니까? 그렇게 고상한 술어를 사용하지 마시고 구체적으로 심경을 말씀해 보세요.
ㅇ 증인 李熺性
……
ㅇ 金永鎭위원
다음 묻겠읍니다.공수특전사령부 설립배경과 그 임무수행에 대해서 확인하겠읍니다.본위원은 증인에게 5·18광주항쟁 당시 광주에 지급 공수부대에게 투입되었던 이 공수특전단에 대해서 확인하려고 합니다.증인은 공수특전단이 언제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고 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 공수특전여단 처음에 창설된 시기를 언제인지 기억 못합니다.
ㅇ 金永鎭위원
1960년6월 車智澈 全斗煥 崔世昌 張基梧 이 네 사람의 대위와 당시 미국의 [포토베닝] 특수전 교육기관에서 6개월간의 특수훈련을 마치고 귀국을 해서 공수단을 창설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지요?
ㅇ 증인 李熺性
그렇게 듣고 있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공수특전사의 설치목적과 그 임무는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당시 계엄사령관으로서 말씀해 보세요.
ㅇ 증인 李熺性
공수특전여단의 임무는 여러가지가 있다고 생각 됩니다만……
ㅇ 金永鎭위원
간단하게 말씀해 보세요. 주요 임무만…
ㅇ 증인 李熺性
전시에는 적후방에 들어가서 여러가지 파괴·납치·첩보수집과 같은 특수임무를 주로 수행합니다.
ㅇ 金永鎭위원
적후방에 침투해서 요인을 암살하고 그리고 주요시설을 점거하는 등 특수작전임무를 수행하지요?
ㅇ 증인 李熺性
주임무가 그렇습니다.
ㅇ 金永鎭위원
그후 1969년 全斗煥의 제1공수여단을 중심으로 盧泰愚씨의 9여단 그리고 鄭鎬容씨의 7여단 등 3개여단을 묶어서 공수특전사령부를 창설했읍니다. 따라서 본위원은 제5공화국을 공수특전단에 의한 독재공화국으로 보는데 이에 대해서 증인은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ㅇ 증인 李熺性
공수특전부대출신이 많이 등용된 것만은 사실입니다.
ㅇ 金永鎭위원
간접적으로 시인하십니까? 이른바 한국군공수부대대부는 70년대 朴正熙씨의 분신인 車智澈인데 그 뒤를 이어 12·12[구테타]와 5·18광주학살을 통해서 집권한 全斗煥씨 그리고 현재 盧泰愚씨 차기를 준비중이라고 하는 鄭鎬容씨 등 이들은 다 車智澈의 공수단에 후예들로서 70년대부터 이 나라를 계속 지배하고 국민을 억압해 온 정치군인들의 실체인 바 정치에 뛰어든 일부 공수특전단에 의한 독재공화국이 틀림 없지 않습니까?증인 어떻습니까?
ㅇ 증인 李熺性
……
ㅇ 金永鎭위원
자 그러면 이렇게 설립된 공수특전단이 5·18광주투쟁 기간 동안에 광주 현지에 내려가서 공수부대의 설립목적에 맞는 군으로서의 사명을 다했는지 어떤 짓을 했는지 한번 구체적으로 확인해 봅시다.증인! 증인은 全斗煥씨의 전기[한강에서 북악까지]라는 책을 읽어 본 적이 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표지만 봤지 내용은 안 읽었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표지는 보셨군요. 그 책의 저자인 千金城씨의 기록에 의하면 증인은 80년5월14일 육군본부에서 全斗煥씨 盧泰愚씨 鄭鎬容씨 黃永時씨와 함께 회의를 한 적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사실인가요?
ㅇ 증인 李熺性
그런 사실이 없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전혀 없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예.
ㅇ 金永鎭위원
그러면 千金城씨와 趙甲濟씨가 허위작성 했다는 얘기인데 증인은 앞으로 이 청문회 기간 동안에 千金城씨와 趙甲濟씨를 대질신문해도 되겠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예. 좋습니다.
ㅇ 金永鎭위원
바로 이 회의에서…… 千金城씨는 말하기를 육군본부 5인회의에서 金大中씨 체포를 사전에 모의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이 아닙니까?
ㅇ 증인 李熺性
사실이 아닙니다.
ㅇ 金永鎭위원
80년5월 공수특전여단이 서울과 광주로 이동한 것이 구체적으로 언제 누구에 의해서 지시됐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특전여단 병력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서 내려갔느냐 하는 말씀입니까?
ㅇ 金永鎭위원
그렇게 묻고 있읍니다.
ㅇ 증인 李熺性
7여단에 있는 2개 대대는 5월17일 저녁부터 행동을 개시해서 광주에 투입되었읍니다.그 다음에 11여단하고 3여단은 5월…… 날짜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5월18일 19일경이 아니겠느냐 생각이 됩니다.
ㅇ 金永鎭위원
증인! 공수특전사의 전투상보에 의하면 5월17일 이전에 공수부대를 이미 서울과 광주에서 미리 이동을 시켰읍니다. 이는 당시 특전사령관인 鄭鎬容씨의 지시에 의한 것입니까?
ㅇ 증인 李熺性
5월17일 이전에 이동 시작했다는 것입니까?
ㅇ 金永鎭위원
5월17일 이전에 공수부대를 서울과 광주에 미리 이동시켰읍니다 누구 지시입니까?
ㅇ 증인 李熺性
믿을 수가 없읍니다. 저는…
ㅇ 金永鎭위원
계엄사령관이 모른다는 말입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ㅇ 金永鎭위원
무슨 얘기입니까? 군 체계상 증인이 결정을 했을텐데요.
ㅇ 증인 李熺性
모든 병력 이동은 광주뿐만 아니라 전군에 걸쳐서……
ㅇ 金永鎭위원
계엄을 확대조치하라는 내용을 5월18일에 하지 않습니까?
ㅇ 증인 李熺性
18일 영시부인데……
ㅇ 金永鎭위원
그런데 17일 공수부대는 현지에 이동한다 말입니다. 이 중대한 조치를 누가 취했느냐 그 말입니다.
ㅇ 증인 李熺性
그 18일에 맞춰서 배치되게끔 17일 저년부터 이동을 개시했을 것입니다.
ㅇ 金永鎭위원
이 결정은 증인의 단독결정이었읍니까? 계엄사령관의……
ㅇ 증인 李熺性
저의 작전명령에 의해서 움직였을 것입니다.
ㅇ 金永鎭위원
당시 군의 실세였던 全斗煥씨 盧泰愚씨 鄭鎬容씨 등과 사전에 협의를 거친 일은 없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없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특히 이 부분은 역사적인 준엄한 책임이 따를테니까 분명히 해두기 바랍니다.그러면 그 당시 학생시위나 교수들의 민주화 요구가 공수특전단을 투입시켜야 할 만큼 심각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처음에 전국비상계엄을 위해서 배치된 것은 예방목적으로 투입된 것입니다.
ㅇ 金永鎭위원
당초에 예방목적으로 갔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전부대를 예방목적으로 보냈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그런데 당초에 파견된 대로 가서 예방만 했읍니까? 어떻게 했다고 보십니까?
ㅇ 증인 李熺性
학교 안에 들어가서 주둔만 하고 청소하고…
ㅇ 金永鎭위원
좋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구체적으로 가서 예방목적만 했는지 그 행위에 대해서 확인을 하겠읍니다.증인이 5월 광주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기위해서 수립한 5·25상무충정작전실시지침에 의하면 계엄해제 학원자율화 언론자유 등을 요구한 시민들을 폭도나 흉악범 또 공산주의자들이라고 증인은 말했는데 지금 이 시간까지도 그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대부분의 광주시민은 선량한 시민입니다.그러나 총기를 탈취하고 총을 쏘고 형무소를 습격하고 있는 분자들은 폭도에 틀림없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그러면 광주에 있는 80만시민이 가령 증인의 말대로 불과 한두 사람의 몇 사람의 그런 일이 있다고 그래서 광주시민을 폭도다 혹은 불순분자의 조종을 받았다고 그렇게 총칭할 수 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렇게 할 수 없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그러면 그렇게 했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지금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증인이 시달한 상무충정작전실시지침이 여기 있읍니다. 여기에 보면 그렇게 분명히 기록하고 있읍니다.시민들을 폭도나 흉악범 공산주의자라고 분명히 서술하고 있읍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ㅇ 증인 李熺性
다시 한번 읽어 주십시오.
ㅇ 金永鎭위원
폭도 흉악범 공산주의자들 이렇게 표현하고 있읍니다.
ㅇ 증인 李熺性
전시민을 그렇게 표현했다는 것입니까?
ㅇ 金永鎭위원
그러면 그런 일에 가담하지 않은 시민들에 대해서 그렇게 표현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 토막만 딱 읽으니까 무엇을 그렇게 지칭했다는 것을 잘 모르겠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광주항쟁기간 동안에 광주에서 민주주의를 위해서 떨쳐 나섰던 사람들에 대해서 그렇게 총칭하고 있다 그 말입니다. 그런 평가에 대해서 당시 계엄사령관을 역임했던 증인은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고 묻고 있읍니다.
ㅇ 증인 李熺性
전 기본 자세가 대부분의 시민은 선량한 시민이다. 그러나 개중에 폭도가 있다 이와같이 하는 것이 기본적인 자세였는데 만일 그와 같은 분류가 되지 않고 광주시민 전체를 폭도라고 규정했다면 그것은 잘못된 문장입니다.
ㅇ 金永鎭위원
잘못되었으면 어떻게 하시겠읍니까?증인은 민주의의를 요구한 400만 전남도민을 폭도로 지금까지 규정을 했읍니다.물론 정부가 주관했던 민화위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하는 그런 매우 어설푼 규명을 했읍니다.지금 그런 민주주의를 요구했던 광주시민을 향해서 폭도 불순분자 이렇게 표현했는데 이거 어떻게 하시겠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전부 다 그렇게 했다면 그것 잘못입니다.
ㅇ 金永鎭위원
분명히 잘못입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그러나 제 기억으로서는 그렇게 전부다 규정을 그렇게 한 일은 없다고 기억하고 있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잘못이라고 분명히 증인은 시인했는데 그런 표현을 한 것에 대해서 광주시민에 대해서 사과를 해야 되지 않습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렇게 표현되었다 하는 것을 찾아 가지고 분명히 되었다면 사과하겠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좋습니다.다음 신문하겠읍니다.증인이 광주항쟁기간중 하달한 발포명령은 정확히 언제 무슨 이유에서 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발포명령입니까?
ㅇ 金永鎭위원
예.
ㅇ 증인 李熺性
발포명령을 하달한 일이 없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그러면 무슨 명령을 하달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자위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경고한 일이 한번 있고 예하부대에서는 자위권을 발동할 때는 이러이러한 여건 하에서 이러이러한 절차에 의해서 실시하라는 교훈적인 공문을 하달한 바가 있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시민을 향해서 총을 쏘고 무고한 시민 양민을 무참하게 학살한 것도 자위권 발동입니까?
ㅇ 증인 李熺性
자위권 발동의 규정에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ㅇ 金永鎭위원
그러면 왜 발포명령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자위권 발동이라고 말합니까?
ㅇ 증인 李熺性
자위권을 규정하고 있는 위수령에 자위를 위해서 하는 행동이 규정되어 있읍니다. 거기에 따른 것입니다.
ㅇ 金永鎭위원
이 발포명령은 국방부가 본 특위에 제출한 자료에 의하면 전남북계엄분소장인 당시 蘇俊烈장군의 발포명령지시는 5월21일 오후 8시30분이었읍니다. 진종채 2군사령관의 발포명령지시는 5월22일 오전 10시30분입니다. 이런 발포명령을 과연 적법한 조치라고 보십니까?
ㅇ 증인 李熺性
金위원께서 발포명령 발포명령하는 것이 자위권을 두고 하는 말씀입니까?
ㅇ 金永鎭위원
무고한 시민에게 총를 쏘아서 양민을 학살한 부분에 대해서 묻고 있읍니다.
ㅇ 증인 李熺性
자위권은 아무 대항도 하지 않고 있는 시민에 대해서 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ㅇ 金永鎭위원
좋습니다.자위권을 발동했는지 양민을 학살했는지 한번 봅시다.증인 80년5월24일 광주 송암동에서 양민을 학살한 사건에 대해서 알고 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잘 모르고 있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모르고 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예.
ㅇ 金永鎭위원
광주 백운동에 있는 효덕국민학교에 진제마을에서 계엄군이 APC 장갑차를 앞세우고 지원동에서 이동하고 있었읍니다. 여기는 평온한 들판입니다. 시내와는 매우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그런데 미 장갑차를 앞세우고 45대의 [트럭]이 장갑차를 뒤따르는데 [트럭]위에서 M16을 가지고 이 원제저수지에서 목욕을 하던 어린 학생들을 무차별 난사를 했읍니다. 여기에서 이 계엄군의 잔학한 난사에 의해서 방광봉군이 현장에서 사망을 했읍니다. 1시20분입니다. 전남중학교 1학년 재학중입니다. 또 이 진제마을에서는 전재수군이 자기의 벗어진 고무신을 줍기 위해서 뒤로 돌아서 엎드린 순간 현장에서 사격을 해서 몸뚱이가 갈라진채 사망했읍니다. 이 계엄군은 계속해서 이동해옵니다. 송학동 마을에서는 칠면조 250마리를 난사해서 사살합니다. 또 한선웅씨의 젖소 세마리를 난사합니다. 이것이 자위권 발동입니까? 이것이 양민학살이 아닙니까?
ㅇ 증인 李熺性
만일 위원께서 얘기한 대로가 사실과 같다면 그것은 자위권이 아닙니다.
ㅇ 金永鎭위원
이것은 반드시 사실입니다. 진실입니다.그 다음에 임암동 마을 도로변에서는 박연홍 여인을 비롯한 네 명의 마을 아주머니들이 계엄군이 난사한 총을 피하기 인해서 하수구로 들어갔읍니다. 하수구에 들어간 이 박연홍여인을 향해서 조준해서 현장에서 사격을 해서 즉사시켰읍니다. 이런 기가 막힌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았던 양민 세 사람이 있읍니다. 권근립씨 임병철씨 김승우씨 이 세사람에 대해서 나중에 후환이 두려워서 근거를 없애기 위해서 권근립씨는 대검으로 현장에서 살해를 하고 임병철씨와 김승우씨는 각각 세발의 M16을 머리에 난사를 해서 사살시킵니다. 이것이 자위권입니까? 이것이 광주시민이 바로 증인이 계엄사령관으로 있던 5월18일부터 27일 항쟁기간 동안에 있었던 비참한 양민 학살의 참사 현장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자위권이라고 말할 수 있읍니까. 이런 광주시민의 비참한 죽음에 대해서도 앞으로 24일과 25일 개최되는 청문회에서 그 실상을 다시 계속 밝혀야 할 것입니다.증인! 이 사진이 보이십니까?
ㅇ 증인 李熺性
보입니다.
ㅇ 金永鎭위원
광주 시민은 당시 군부통치결사반대를 계속 외쳤읍니다. 이런 광주시민을 향해서 여기에 부상 당한 어린이가 있읍니다. 이 어린이가 무슨 죄가 있읍니까? M16을 맞았읍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이 소위 대한민국의 국군이 할 짓입니까?증인은 아까 동료위원들의 질문에 손을 뒤로 묶고 사격을 했다면 책임을 지겠다고 했읍니다.똑똑히 보세요. 광주시민이 이렇게 포승줄에 묶인채 살해당했읍니다. 증인은 보고 계십니까?
ㅇ 증인 李熺性
예. 봤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여기 집단으로 살해 당한 광주시민의 모습을 보십니까? 이것이 자위권 발동입니까? 이렇게 무고한 양민이 학살 당하고 또 전재수군을 비롯한 그 천진난만한 여섯살의 어린아이들이 자기의 검정고무신을 주우려고 하는 아직 솜털도 빠지지 않은 그 어린 생명의 그 손에 사격을 가한 이 계엄군이 누구입니까?증인은 어린 손자들이 있지요?
ㅇ 증인 李熺性
있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증인이 계엄사령관 휘하에서 이런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는데 그러고 유족들의 아픔이 하늘을 치솟는데 증인은 자기의 손자를 사랑한다고 하고 품에 안고 그 손자는 예뻐할 수 있읍니까?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증인! 증인은 80년5월27일 이른바 상무충정작전 즉 전남도청 진압작전을 언제 누구에게 건의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것은 건의하지 않고 실시한 것입니다.
ㅇ 金永鎭위원
그러면 증인이 단독으로 실시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ㅇ 金永鎭위원
좋습니다. 여기 제출된 자료에 보면 한·미양국과 합의사항이라고 분명히 기록이 되어있는데요. 사실하고 다릅니까?
ㅇ 증인 李熺性
다릅니다.
ㅇ 金永鎭위원
당시 계엄사령관인 증인은 한·미양국과 합의를 해서 24일 도청을 진압하겠다고 하는 건의를 27일로 한·미양국과 합의해서 결정하겠다고 하는 그런 지시를 내렸는데요?그러면 여기 있는 이 문서는 어디 문서입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것은 내용이 다릅니다.
ㅇ 金永鎭위원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 내용은 며칠까지 한·미협조를 해가자. 며칠까지 작전보류하라는 내용의 그것입니까?
ㅇ 金永鎭위원
참모총장은 한·미 협의사항으로 충정작전을 24일까지 당초에는 연기했다가 나중에 다시 27일 영시2분부터 실시하도록 예하부대에 실시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ㅇ 金永鎭위원
분명히 여기에 보면 육군본부에서 제출한 자료에 보면 한·미협의사항이라고 분명히 나와있읍니다. 그렇습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ㅇ 金永鎭위원
그런데 지금까지 끈질기게 광주학살에 대해서 미국과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던 내용이 허구인 것이 드러나지 않습니까? 말씀해 보세요.
ㅇ 증인 李熺性
그 협의사항이라고 하는 것은 한·미간에 협의가 광주사건에 대한 시기 결정에 대한 것인데 무엇때문에 그렇게 되었느냐 할 것같으면 미국은 만일의 경우 광주사태가 장기화되어가지고 여러가지 소란이 있고 북괴의 남침이 있을 경우를 고려해가지고 미국의 공군과 해군을 한국 근해에 배치할 때까지 작전개시를 기다려 달라 하는 내용의 협조입니다.협의사항이지 다른 광주에 영향을 미칠 협의사항은 아닙니다.
ㅇ 金永鎭위원
무슨 말씀입니까? 5월26일 16시40분 한·미연합사의 작전참모부장[로버트 세니월드]와 같이 당시의 육군본부의 작전참모부장인 金在明장군과 서로 협의했다고 분명히 문서에 나와있고 지금 참모총장이 지시를 했는데 이 사항은 한·미간의 협의사항이다 이렇게 자구상 표기되어 있읍니다.
ㅇ 증인 李熺性
협의사항이라고 하는 것이…
ㅇ 金永鎭위원
문서로 말해야 됩니다. 증인의 설명으로는 부족합니다.여기에 문서에 의하면 분명히 5·18광주학살사건은 미국이 관련되어 있는 것 이 분명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ㅇ 증인 李熺性
전혀 관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ㅇ 金永鎭위원
그러면 이 문서는 어떻게 된 문서입니까?이 문서도 당초에… 육군본부에서 제출한 것이 아닙니다.이번에 광주민주화운동을 조사하기위한 우리 광주특위의 문서검증반이 현장에 가서 추가로 제출된 자료에 나와 있읍니다. 어제밤에 받아서 확인한 것입니다.증인은 이 문제에 대해서 나중에 확실하게 책임짓는 답변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ㅇ 위원장 文東煥
이제는 그만큼 하시고 나머지 문제는 다른 사람에게…
ㅇ 金永鎭위원
위원장님! 제가 마치겠읍니다.본위원은 이제 증인에 대한 신문을 마치면서 방금 제기된 몇가지의 역사적인 사실들을 마지막으로 정리하고 신문을 마치겠읍니다.충정작전은 5월17일 군사[쿠테타] 실시를 위해 사전계획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규명했읍니다.광주시민의 학살에는 미국이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고 하는 구체적인 정황이 방금 제시한 문서를 통해서 드러났읍니다.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사실입니다.세번재는 광주항쟁의 무력진압을 위한 발포명령자와 5월27일 전남도청의 무력진압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소재가 바로 계엄사령관에게 있다고 하는 사실이 확인되었읍니다.끝으로 공수부대 잔학상이 어떠했느냐 하는 것을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이 어린이의 양민학살… 증인은 계속해서 이것이 자위권발동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심지어 부녀자에 대한 살상행위 이런 모든 진상에 대해서 증인은 분명히 그런 사실이 발견되면 책임지겠다고 말했읍니다.
이상의 사실들에서 확인되었듯이 역사속에서 군의 정치개입은 이 역사에 큰 오점을 남기고 선량한 우리 국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엄청난 결과를 야기시켰읍니다.군은 본연의 사명에 진력해야 합니다. 그런 군에 대해서 우리 국민은 신뢰와 사랑을 보낼 수 있읍니다. 우리는 국방을 지키고 있는 60만 국방군인에 대해서는 큰 감사와 존경을 가지고 있읍니다.
그러나 정치군인의 5·18광주학살 이 관련자 이 진상에 대해서만은 명명백백하게 분명히 역사적인 사실들이 규명되어야 합니다.그리고 그 책임을 국민과 함께 준엄하게 물어야 합니다.그런 의미에서 증인은 계엄사령관과 육군참모총장이라고 하는 군의 최고의 지휘관으로서 역사앞에 저지른 엄청난 과오를 변명하지 말고 준엄하게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증인! 혹시 증인께서 마지막으로 더 하실 말씀이 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지금 金위원께서 말씀하신 중에서 일부는 수긍할 수 있지만 너무나 일방적인 규정으로서 제가 수긍하기 어려운 것이 있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광주특위는 이 청문회 한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앞으로 특위는 계속해서 진상을 규명해갈 것입니다.본위원이 방금 정리한 내용들에 대해서는 당시 계엄사령관 육군참모총장인 증인은 끝까지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이상으로 마치겠읍니다.
ㅇ 위원장 文東煥
수고하셨읍니다.다음은 통일민주당의 朴泰權위원께서 신문해 주십시오.
ㅇ 朴泰權위원
민주당의 朴泰權위원입니다.증인께서 장시간 신문에 응해 주시면서 지금까지 사실 우리 위원들이 이 역사의 회상하기조차 싫은 끔찍한 과거의 역사에 대해서 심도있게 알고자 하는 질문에 대하여 지금껏 증인께서는 기억이 안난다 잘 모르겠다 예하부대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모른다 하는 식의 답변의 회피성을 본위원이 생각할 때 오늘 이 자리에서 증인으로서 너무도 과거에 엄청난 자리에서 육군참모총장으로서 계엄사령관으로서 또 12·12사태와 5·17사태를 묵인해 줌으로써 제5공화국에 와서는 권부속에서 장관과 또 그후에는 국영업체의 이사장까지 지내는 화려한 비호를 받고서 이제 여러 위원들이 지적한 대로 광주민주항쟁의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내려야 할 이 자리에서 양심을 버리고 사심을 가지고 답변한다든지 이 자리에 있는 주변의 인물을 살피고 답변하는 등 정말 불성실하기 이를데 없읍니다.
본위원이 묻는 데에 대해서는 정말 우리 온 국민이 믿고 존경받는 과거의 참모총장자리에서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양심을 바로 세우고 국민을 안전하게 받드는 군인정신에 입각해서 명확하게 분명하게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소위 경복궁 생일집잔치라는 별들의 모임이 사실 후일에 12·12사태라고 지칭되고 대하극상의 모임에 앞으로 본위원이 얘기하는 사람들이 참석했었으면 했다 참석하지 않았으면 안했다 이렇게 간단하게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兪學聖…
ㅇ 증인 李熺性
어느 시기입니까?
ㅇ 朴泰權위원
12·12사태 때 경복궁 모임있지 않습니까?
ㅇ 증인 李熺性
경복궁 모임에…
ㅇ 朴泰權위원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30경비단장실입니다.車圭憲… 당시 수도군단장 참석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거기에 참석한 것은 전혀 누구누구인지 모릅니다.
ㅇ 朴泰權위원
모릅니까? 모르신다면 제가 쭉 알려드리겠읍니다. 黃永時 당시 1군단장 盧泰愚 9사단장 白雲澤 당시 71방위사단장 朴俊炳 당시 20사단장 朴熙道 崔世昌 張基梧등 당시 특전여단장 張世東 당시 30경비단장 수경사예하부대입니다. 金振永 당시 33경비단장도 참석했읍니다.기억이 안나십니까?
ㅇ 증인 李熺性
안납니다.
ㅇ 朴泰權위원
전혀 안납니까?
ㅇ 증인 李熺性
예.
ㅇ 朴泰權위원
당시 그 자리에는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全斗煥씨가 참석을 안했읍니다.답변 안하기 때문에 제가 답변해 드리죠.왜 참석을 안했느냐? 여기에서 엄청난 이미 그 이전부터 모략과 음모가 진행되어 오다 이 당시 보안사령관은 총리공관에 있었읍니다.그 당시 총리공관은 아직 대통령이 청와대로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총리공관에 崔대통령이 있었읍니다.이 자리에서 무엇을 논의했는지 아십니까? 혹시 들어본 일이 있읍니까?답변을 해보세요.못들었으면 못들었다 들었으면 들었다 이렇게 얘기해요.
ㅇ 증인 李熺性
못들었읍니다.
ㅇ 朴泰權위원
들었다고 하면 더 큰일일 것입니다.앞으로 崔圭夏증인이 나오면 이 문제는 반드시 밝혀질 것입니다.그때 장소는 앞에서 얘기한대로 제30경비단장실 張世東단장실이었읍니다.여기에 증인이 참석할 수가 없었겠지요.증인은 그 당시 어디에 무슨 직에 있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중앙정보부장서리직입니다
ㅇ 朴泰權위원
군에서는?
ㅇ 증인 李熺性
직책은 중앙정보부장서리였고요 계급은 중장이었읍니다.
ㅇ 朴泰權위원
그런데 이것을 사전에 전혀 몰랐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몰랐읍니다.
ㅇ 朴泰權위원
중앙정보부장이 뭐하는 것입니까?정말 몰랐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ㅇ 朴泰權위원
이 날밤 그 당시에 이루어진 소위 12·12사태때 전방에 배치되어 있던 9사단이 위치와 임무를 망각하고 육군전력에 있어서 엄청난 국토방위를 맡고 있는 이 부대가 시내로 들어왔지요?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ㅇ 朴泰權위원
이 들어온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조치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 지휘상에 있는 지휘관에 의해서 제지가 되어야 됩니다.
ㅇ 朴泰權위원
제지만 되면 됩니까?어떤 엄벌에 처해야 합니까? 어떤 위법조치에 대해서 문책을 해야 됩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 사안에 따라서 지휘관이 처리할…
ㅇ 朴泰權위원
그 문제에 대해서 거론된 일이 없었죠? 그 간에…
ㅇ 증인 李熺性
저는 그 위치에 있지 않았읍니다.
ㅇ 朴泰權위원
이것도 후일에 알았겠죠?
ㅇ 증인 李熺性
후일에 알았읍니다.
ㅇ 朴泰權위원
후일에 알았다면 이 12·12사태가 일어난 후에 곧바로 육군참모총장이 되었죠?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ㅇ 朴泰權위원
육군참모총장으로서는 이 당시에 이러한 일들을 후일에 보고받고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조치해야 된다고 생각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 당시는 그 이상 손을 쓸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읍니다.
ㅇ 朴泰權위원
그러면 그러한 일을 한 것을 묵인해 주는 것이었읍니까?모든 일은 사건이 난 후에 그 사건의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 법에 저촉을 받는지 안받는지 위법인지 아닌지 군의 여러가지 규정에 위배인가 아닌가 이것을 판단해서 조치를 해야 되는데 그렇게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 말씀이죠?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ㅇ 朴泰權위원
그러면 육군참모총장이 연행된 것도 공관에서 체포되지 않았읍니까? 그렇지요?
ㅇ 증인 李熺性
예.
ㅇ 朴泰權위원
증인은 이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이것도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죠?
ㅇ 증인 李熺性
아까도 말씀을 드렸지만 불행한 사건이라고 했읍니다.
ㅇ 朴泰權위원
그러면 증인께서는 소위 그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 모임에서 이루어졌던 결과에 대해서는 전부 받아들이는 쪽이었군요?그렇지요?
ㅇ 증인 李熺性
그때 상황은 그렇게 되었읍니다.
ㅇ 朴泰權위원
이러한 문제들이 대통령이나 그 당시 총리가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총장이 되기 전에 증인께서는 중앙정보부장이라면 모든 정보를 입수해서 대통령에게 보고해야 되지 않습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ㅇ 朴泰權위원
그러면 그것은 12일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이전부터 이루어져서 행해졌던 일인데 한번도 보고한 일이 없지요?
ㅇ 증인 李熺性
예. 그와같은 첩보를 입수한 일이 없읍니다.
ㅇ 朴泰權위원
그 첩보를 정말로 입수를 못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ㅇ 朴泰權위원
하늘을 두고도 말씀할 수 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예. 저까지 보고가 일체 안되었읍니다.
ㅇ 朴泰權위원
그러면 그 뒤에 알았을 때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은 인정하시지요?
ㅇ 증인 李熺性
그것은 잘못된 겁니다.
ㅇ 朴泰權위원
그러면 사후처리를 왜 안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때는 수습을 하지 않으면 안될 혼란한 시기였읍니다.
ㅇ 朴泰權위원
어떤 혼란한 시기입니까? 그러면 이 나라의 군이 질서가 하급부대장들이 참모총장까지 연행하고 여러가지 그러한 군의 위계질서를 파괴해도 사안에 따라서는 묵인해 준다는 것입니까? 밝혀보세요. 왜 말씀을 안하십니까?
ㅇ 증인 李熺性
저의 역부족이었읍니다.
ㅇ 朴泰權위원
이제 실토를 하시는군요. 그 역부족에서부터 이제 양심에 따른 말씀을 해주세요. 증인은 12·12사태후 정말 역부족의 행위에 따라서 그 주체자들에 의한 승진도 되고 육군 참모총장도 되고 계엄사령관도 되고 그랬읍니다.그래서 귀하는 정말로 모른다고 하시지만 본위원이 생각할 때는 그 당시에 묵인하는 사전에 정보를 듣고도 묵인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그렇기 때문에 귀하는 5공화국에서도 비호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증인께서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지금 잘못된 일이라고 시인을 해주셨읍니다. 이때 모든 일들이 증인과 또 증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또 그러한 일을 저질렀던 사람들이 모두 직무유기이고 이를 알고도 동조했다면 나쁘게 또는 긍정적인 표현에 따라서는 이 주모자들은 엄단에 처하거나 [쿠데타]의 반란자로 보거나 정말로 있어서는 아니될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심판하고 이들을 응징하고 넘어가지 않은 역사에 대해서 이 자리에 대해서 후회스럽게 생각합니다. 증인 맞지요?
ㅇ 증인 李熺性
예.
ㅇ 朴泰權위원
이들 세력들은 해를 바꾸어서 5월로 넘어갑니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생략을 하고 말씀을 드리겠읍니다. 국회 강점이 있었읍니다. 민주인사를 연행했읍니다. 온 국민이 열화와 같은 정말 민주의 시대가 열리는 80년대 봄을 맞이해서 희망과 정치적인 민주화를 갈구하는 모든 국민들에게 정말 송두리째 앗아간 일들이 바로 이러한 일들입니다.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했읍니다. 이런 등 아까 증인께서는 군배치명령에 대해 질문할 때마다 아래 하급부대에서 했다 증인이 즉 본인이 들었다 이전 정도로 답변했읍니다. 증인은 그렇다면 그 당시 계엄사령관이라든지 육군참모총장으로서 좀 심각하게 나쁘게 표현하면 허수아비였읍니까? 그것은 아니지요?
ㅇ 증인 李熺性
말단 부대를 일일이 배치하는 것은 역시 전결권에 관계되는 문제이지 일일이 총장이…
ㅇ 朴泰權위원
좋습니다. 그러면 그 후에 알아들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국회에서 있었던 이러한 구속사건 국회가 열리는 것을 방해한 사건 이러한 것들은 후에 알았다고 그랬습니다.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ㅇ 朴泰權위원
후에 알았을 때에 그 행위를 한 부대는 어느 부대였읍니까? 보고를 받았으니까 알고 계시
지요?
ㅇ 증인 李熺性
그때 당시 어느 부대라는 보고는 명확하게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데요
ㅇ 朴泰權위원
후에 보고를 받았다면 이러한 일을 모르신다고 한다는 것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분이나온 국민들중에서 증인의 말을 믿을 사람이 없읍니다.
ㅇ 증인 李熺性
제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그와같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기억이 없어 그러는 것입니다.
ㅇ 朴泰權위원
정말 증인은 허수아비였읍니까?육군참모총장, 계엄사령관 모두 차단되었었읍니까? 형식적으로 앉아 있었읍니까? 양심에 따라서 한번 말씀해 보세요.
ㅇ 증인 李熺性
제가 할 수 있는 권한은 다 행사했읍니다.그런데 아까 이야기 했듯이 역부족에 따라서 못한 일도 있다는 것을 시인했읍니다.
ㅇ 朴泰權위원
그러면 지금도 역부족이라서 말씀을 못하시는 것이지요?
ㅇ 증인 李熺性
국회를 강점하고 그와같은 문제는…
ㅇ 朴泰權위원
80년 5월 17일 밤 9시 30분에 중앙청에서 긴급국무회의가 열렸읍니다. 당시 총리를 비롯한 모든 장관들이 그 자리에 참석해서 소위 전국비상확대계엄을 가결하도록 되어 있었읍니다. 이때 국무회의장에 올라가는 중앙청계단에는 군이 배치되어 있었읍니다.그 이야기는 들으셨읍니까? 들으신 일도 없읍니까? 그것도 역부족이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잘 모르겠읍니다.
ㅇ 朴泰權위원
모릅니까? 이 당시 본위원이 알기로는 그 당시 문교부장관을 지낸 金玉吉장관이 계단을 올라갈 때 그 계단에 도열되어 있는 지금 증인이 밝히지 않는 부대의 부대원에 의해서 장관이 수모를 겪고 올라 갔읍니다.더불어 그 자리에서 국무회의때 본위원이 알기로는 전국비상확대계엄에 대해서 거부했읍니다.이것은 증인이 알고도 밝히지 않기 때문에 본위원이 조사한 자료에 의해서 얻은 자료에 의해서 밝히고 넘어가겠읍니다.다음에는 지금 계엄사령부에는 계엄사령관산하에는 평상시에는 작전상황일지가 있고 육군본부에 계엄시에는 계엄상황일지가 있지요 있읍니까? 없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있다는 것도 최근에 알았읍니다. 그것도…
ㅇ 朴泰權위원
증인! 정말 제가 질문을 더해야 할지 여기서 중단해야 될지 저도 판단하기 힘듭니다.계엄사령관께서 상황일지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그것을 물으니까 지금에야 있는 것을 알았었다. 너무 답변이 불성실합니다.그런데 이 상황일지가 5월17일19시15분부터 18일 08시10분까지 약13시간의 상황일지가 없읍니다.이건 왜 없느냐 앞에서 많은 위원들이 지적했고 본위원도 지적했듯이 국회의 강점 민주인사의 구금연행 예비 검속등 온갖 못된 것을 다 자행했던 시간입니다.그래서 그것은 아마 지금 증인이 이야기하는 대로 역부족 이었기 때문에 상황일지를 쓰지 않았을 것이고 그것은 특수한 부대의 특수한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 졌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광주특위를 통해서 이 진상을 앞으로 밝혀내겠읍니다. 이러한 이 엄청난 불법 다시 말해 음모된 계략은 비상계엄선포를 전제로 자행된 우리 역사의 최고의 비극입니다. 법적으로 완벽한 위법이요. 증인은 직무유기 직권남용 역사의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읍니다.
이 끔직한 이런 일들은 군에서 모든 일들이 [시나리오]가 있어야되고 작전계획이 있어야 되고 명령이 있어야 되고 그 명령을 하달하는 임무가 있어야 됩니다. 이런 엄청난 국헌을 흔들고 국가의 변화를 가져온 이런 일들에 대해서 밝히지 않는데 대해서 유감이 아닐 수 없읍니다. 정말 이러한 엄청난 일들을 증인 누가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말씀하시기가 곤란하십니까? 이런 일들을 보안사령부에서 했읍니까? 안기부에서 했읍니까?합동수사본부에서 했읍니까 아니면 崔圭夏대통령께서 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와 같은 여러가지 문제를 대개 답변을 요구하니 답변할 길이 없읍니다.
ㅇ 朴泰權위원
다음에 20사단 병력의 이동문제를 앞에서 여러 위원들이 말씀을 했읍니다. 이 문제는 본위원이 조사한 자료에 보면 2군사령부에 이른바 충정작전 지령을 내린 시간은 2군사령부 작전지시는 5월17일 19시40분입니다. 이것은 전교사작전일지 우리가 이번 특위가 받은 자료에 나타나 있읍니다. 알겠지요?
ㅇ 증인 李熺性
5월17일입니까?
ㅇ 朴泰權위원
5월17일 19시40분입니다.
ㅇ 증인 李熺性
20사단에 관계된 문제입니까?
ㅇ 朴泰權위원
아니 지금 충정작전… 20사단을 묻기 위해서 여기서 부터 묻습니다.또 동일 비상국무회의는 21시40분에 시작해서 8분만에 끝났읍니다. 그렇지요 맞지요?
ㅇ 증인 李熺性
대개 맞을 것 같습니다.
ㅇ 朴泰權위원
20사단이 광주로 이동한 시간은 며칠 몇시인지 혹시 기억하십니까?
ㅇ 증인 李熺性
아마 5월20일부터 21일 사이라고 기억합니다.
ㅇ 朴泰權위원
날짜는 맞습니다. 그런데 22일 몇시서 부터 이동을 시작했다고 생각하십니까?
ㅇ 증인 李熺性
정확한 시간까지는 기억하기 어렵습니다.
ㅇ 朴泰權위원
22시30분으로 육본에서 제출한 자료에 나타나 있읍니다.그런데 증인은 민화위에서 참고인서면진술에 20사단 병력은 주한·미연합군사령부의 지휘를 떠나 하시를 막론하고 계엄목적에 사용할 수 있다고 진술했읍니다. 지금도 변함이 없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ㅇ 朴泰權위원
그런데 미국무성 대변인이 1980년 5월22일 발표한 바에 따르면 20사단의 이동을 동의를 했읍니다. 그런데 또 82년 7월12일 [글라이스틴][뉴욕타임즈]에 기고한 글에서도 20사단은 광주이동을 허락했읍니다. 그런데 여기서 뭐가 문제냐 시차가 문제입니다. 5월18일 충정작전시 20사단장이었던 朴俊炳사단장은 월간지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읍니다. 주둔지에서 5월15일 이동을 시작해서 서울에 투입되었다 이랬습니다. 또 연합군사령부의 병력이동 및 지휘권이양은 5월16일 오후6시 이후로 되어 있읍니다라고 그 기고에서 이야기 하고 있읍니다. 증인은 이 시차에 대해서 어떻게 해명하시겠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제가 얘기할 수 있는 것은 그와같은 시차문제가 문제가 아니고요 그 20사단의 부대가 작전지휘권이 육군본부에 있었느냐 한미연합사에 있었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분명히 육군의 지휘하에 있었읍니다.
ㅇ 朴泰權위원
그러면 조금전에 증인이 답변한 24사단의 이동은 20일 22시30분이라는 것을 맞다고 하셨읍니다.
ㅇ 증인 李熺性
주둔지에서 서울에 나오는 것은 그 이전입니다.
ㅇ 朴泰權위원
그렇지요. 그것은 지금 이야기했고 광주로 이동할때의 상황입니다. 또 광주로 이동한 것은 연합군사령부의 승인은 5월22일 받았읍니다. 출동은 이미 지금 앞에서 얘기한 대로 20일 22시30분이라면 시차가 엄청나게 나는 것이지요? 그렇지요?
ㅇ 증인 李熺性
거기에는 무슨 착오가 있거나 문제가 있읍니다.
ㅇ 朴泰權위원
그렇습니까? 이런 문제는 비춰 볼 때 이미 광주에 투입되기 시작한 것은 그 얼마전에 오래전부터 모든 계획이 서있다고 증명할 수 있다고 보는데 증인 어떠십니까?
ㅇ 증인 李熺性
너무나 지나친 판단입니다.
ㅇ 朴泰權위원
지금 근거자료에서 나왔지않습니까. 군의 작전명령의 생명은 작전임무가 있어야 되고 작전명령시간이 있어야 되고 이동한 규모가 있어야 되고 모든 것이 나타나게 되어 있읍니다. 더구나 계엄시입니다. 아무리 능력이 없고 힘이 없다고 해서 그렇게 이 자리에서까지 변명하지 마십시오.다음에는 지금 발포명령에 대해서 또는 그 여러가지 문제들을 앞에서 여러 위원들이 지적했읍니다마는 저는 그 각도를 달리하겠읍니다.광주에 투입되는 시위진압 소위 5·18광주항쟁의 그 선량한 시민들에게 시위진압으로 투입된 병력에게 실탄을 지급한 것이 맞습니까. 잘못된 일입니까?
ㅇ 증인 李熺性
사실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을 제가 확인하라는 말씀입니까?
ㅇ 朴泰權위원
제가 다시한번 말씀드리겠읍니다.광주에 투입된 병력들이 투입될 때 실탄을 지급했읍니까 안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ㅇ 朴泰權위원
안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아니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모든 부대가 이동할 때 아무 상황이 없이 평시에 이동할 때에도 지휘관 재량에 의해서 실탄을 가져 갈 경우도 있고 안 가져갈 경우도 있읍니다. 그때 당시 그 지휘관이 어떻게 판단했는지 하는 것은 육군총장으로서는 모를 일입니다.
ㅇ 朴泰權위원
시위진압시에 총을 발사를 할 수 있읍니까 없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상황에 따라서는 자위권을 발동할 수 있읍니다.
ㅇ 朴泰權위원
자위권을 묻지 않았읍니다. 제가 다시 한번 묻겠읍니다.시위진압하러 들어갈 때 실탄을 지급합니까 안합니까?
ㅇ 증인 李熺性
시위를 진압할 때 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ㅇ 朴泰權위원
시위진압때 할 수도 있다?
ㅇ 증인 李熺性
예.
ㅇ 朴泰權위원
그러면 시위진압하러 가는 군인들이 그 무장한 것을 보면 또 작전임무에서도 보면 거의 표현이 폭도진압 소탕작전 사살 등 정말 우리 선량한 국민들로서는 듣기 거북한 용어들이 작전명령에 나타나 있읍니다. 더불어 광주에 투입된 공수여단의 병력들에게 최초에는 중대장까지만 10발씩 실탄을 지급했읍니다 그 후 소위 지금 증인이 이야기하는대로 시위민주항쟁군중이 많아지고 여러 가지 유언비어에 의해서 상황이 급박해지니까 투입되어 있던 공수여단의 사병들까지도 실탄을 지급해 달라고 아우성을 쳤읍니다. 그런데 이당시… 오늘 이 자리에서 밝히지는 않습니다마는 양식있는 지휘자들은 실탄지급을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특수한 사람은 이 실탄을 지급했읍니다. 이것은 증인하고 따지지는 않겠읍니다. 앞으로 우리 특위가 열리면서 그 대상자하고 따지겠읍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정말 이 사실을 하나 밝히고자 합니다.증인! 광주에 투입된 어느 여단 한 여단이 광주에 27일 소위 소탕작전 도청 주요건물들 시위진압을 하고 거기에 끝까지 항쟁하는 민주시민들을 소탕하기 위해서 무차별난사하면서 들어 갔읍니다.이것은 자위권이 아닙니다. 또 교육도 시키지를 않았읍니다. 들어보십시오. M16 9,646발 M2O3 19발 수류탄 12발 TNT25[파운드] 권총 667발 M6O 925발 66LCW 260발 연막탄 18발 최루탄 150발 오색신호탄 70발 화염방사기 7대 통합계 1만1,792발을 쏘아댔읍니다. 여기에서 살아 남은 분들은 정말 영웅입니다.
그런데 이 전투상황보고가 양민 사살 1명으로 보고되었읍니다. 총알이 사람을 다 비켜 갔겠지요?증인! 우리 한번 잠시 숙연한 마음으로 이 엄청난 역사의 비극을 증인과 우리 다함께 한번 회개 합시다. 이제 다시는 이 땅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서도 안되고 우리는 오직 이 진실을 밝혀서 온 국민들이 이 당시에 피해보신분들을 어루만져 주고 사랑으로 대해주고 온 국민이 함께 기쁨을 나눌수 있는 새로운 역사창출과……이 당시에 피해를 보았던 광주민중항쟁의 그 위대한 시민들에게 명예를 회복시켜 주고 우리는 다 함께 이들을 뜨거운 손으로 안아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진실이 없이는 안됩니다. 진실을 밝힙시다. 앞으로 증인께서도 정말 진실을 밝히고 사심을 버리고 양심을 세워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비록 과거에 무능하고 능력이 없고 힘이 없어서 그러한 권좌에 있었다치지만 이제 앞으로 증인께서도 홀연히 진실을 밝히고 이 시대의 새로운 장을 열어 나가시도록 합시다. 증인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읍니다. 증인은 이러한 일들을 다 경험하고 후에 들었든 몰랐든 또는 오늘 이 자리에 와서 알았든 결과적으로 다 알았읍니다. 증인께서 이러한 일들을 오늘 이 자리에서 간단하게 증인의 심정을 역사와 국민앞에 짤막하게 말씀해 주시기 부탁합니다.
ㅇ 증인 李熺性
참 어려운 주문입니다. 당시 계엄사령관으로서 엄청난 일을 당하고 또 오늘 이와 같이 나와서 증언을 하게 된 것으로서 생각하는 것이 앞으로 이 땅에 계엄령이라 하는 것이 하달되지 않도록 되어야 되겠다 하는 것을 절실히 느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온 국민이 법질서를 지키고 혼란한 사회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겠느냐 그런 생각을 합니다.
ㅇ 朴泰權위원
이상입니다.
ㅇ 위원장 文東煥
예. 수고하셨읍니다.([위원장!]하는 이 있음)예.
ㅇ 吳景義위원
한 말씀만 의사진행발언을 하겠읍니다. 지금 밤늦도록 우리 동료위원 여러분들께서 많은 수고들을 하시고 또한 증인 李熺性씨도 늦은 밤까지 이렇게 고생을 하시는데 도저히 본위원이 이런 사황으로 청문회가 계속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이 들어서 위원장님께 좀더 의사진행을 청문회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증인에게 성실하지 못한 답변이나 또는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그런 저의가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좀더 성실한 답변을 할 수 있도록 촉구를 해 주십사 하는 말씀을 드리면서 지금까지 증인께서는 대부분 모르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리고 본위원이 생각하기로는 좀 결례의 얘기일지는 모르나 책임을 져야 될 부분은 모르는 것이고 책임과 전혀 관계가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적당히 넘어가시는 것으로 이해가 되는데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 모든 국민은 이 자리를 지켜 보시고 계십니다. 이런 청문회를 하려면은 아예 때려치우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는 생각이 본위원은 듭니다. 물론 견해차이는 있겠읍니다마는 지금까지 광주시민은 죽었고 또 청문회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잘 해서 국민들앞에 우리는 밝혀 드려야 될 임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으로서 밤늦도록 내일까지 청문회를 계속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10명이 죽었든 193명이 죽었든 1,000명이 죽었든 사람은 죽어서 이미 그 선량한 백성들이 흙이 된 지가 오래인데 총한방도 쏜 사람이 없읍니다. 죽인 사람은 없어! 아까 증인이 말씀하시기를 타박상입은 사람까지 뭐한 280명정도를 아신다고 그랬는데 우리는 이 청문회를 하는 목적이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것입니다.
시종 저런 상태로써 답변을 하신다면은 이 청문회의 의의가 어디에 있겠느냐 국회를 능멸하던 그런 타성을 버리지 못하고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동료위원 우리를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겠느냐 국회를 어떻게 알고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을 어떻게 알기에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모른다 기억이 안 난다 이런 식으로는 안 됩니다. 겨우 군인들이 오판을 해서 자기네끼리 쏴 가지고 열두사람 죽인 것은 밝혀졌읍니다. 계속해서 증인을 이런 상황으로 이끌어 가지 말아 주시기를 위원장님께 부탁을 드리고 좀더 성실한 답변을 들을 수 있도록 촉구해 주시기를 부탁말씀을 드리면서 마칩니다.
ㅇ 위원장 文東煥
吳위원의 심정을 충분히 알겠으면서도 똑같은 심정이었읍니다.그래서 아까 얘기 시작되기 전에 제가 증
회의를 속개하겠읍니다.다음 신문자가 신문하시기 전에 증인에게 한마디 여쭙겠읍니다.하루 저녁내 들어보면 잊어버렸다 사후에야 들었다 이런 얘기로서 너무 시종합니다.모두가 책임이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중대사를 잊어버렸다는 것은 관심이 없었다 하는 말이고 사후에 들었다 하면 그것은 추궁해서 뒷처리 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잊어버리고 말고 뒷처리하지 않아 버리고 말고 한다는 것은 그렇게 무책임해 가지고서는 사실은 계엄사령관에 까지 올라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이 얘기는 성의있게 대답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밖에 들을 수가 없읍니다.증인! 좀 더 성의있게 대답해 주기를 바랍니다.이제 金永鎭위원 신문해 주십시오.
ㅇ 金永鎭위원
평화민주당의 金永鎭위원입니다.본위원은 이 역사적인 광주특위청문회의 증인신문에 임함에 있어서 먼저 광주에서 8년전 계엄군에 의해서 무참하게 학살 당한 우리 광주 영령들의 그 모습들이 떠올라서 참으로 가슴을 에이는 아픔을 안고 이 신문대에 섰읍니다.증인은 12·12사태가 났던 바로 이틀 뒤에 육군참모총장겸 계엄사령관에 보임되었고 5·17비상계엄 전국확대 5·18 광주학살 진압 그리고 국보위 탄생등 역사의 소용돌이가 쳤던 가장 중요한 시대에 중요한 군 최고책임자를 맡았던 사람으로서 진실을 밝히는 의미에서 이 역사의 증언대 앞에서 바르게 모른다 기억에 없다 하는 그런 얘기로 일관하지 말고 책임을 지는 마음으로 정직하게 증언에 임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본위원이 준비한 신문에 앞서 먼저 한가지 확인하겠읍니다.5·18 광주학살에 대해서 책임을 묻는 질문에 全斗煥 전대통령은 말하기를 자신은 당시 보안사령관으로서 광주학살에 대한 책임은 당시 대통령 그리고 장관 계엄사령관 이런 사람들의 책임이라고 분명히 공석에서 말했읍니다.이런 全斗煥씨의 견해에 증인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ㅇ 증인 李熺性
체계상으로 그 얘기는 옳습니다.
ㅇ 金永鎭위원
체계상으로는 옳은데 사실은 어떻습니까?
ㅇ 증인 李熺性
실제도 그러리라고 믿고 있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실제도 그렇습니까?
ㅇ 증인 李熺性
예.
ㅇ 金永鎭위원
분명히 해 둡시다.다음 동료위원들이 질문한 가운데 답변을 회피하고 또 본위원이 보기로는 질문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여러 군데가 있었읍니다. 특히 그 가운데에서도 헌법기관인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를 계엄군을 동원해서 국회 정문앞에서 차단을 하고 무력으로 이제 국회가 열리지 못하도록 했던 그런 만행에 가까운 짓이 벌어졌다고 증인은 시인을 했읍니다. 그런데 그런 현저한 법위반에 대해서 어떻게 처리를 했읍니까? 그리고 현장에 출동했던 부대 이름도 모른다고 그랬읍니다. 본 위원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당시 33사단은 사단장은 안필준 소장입니다. 거기에 출동했던 101연대산하의 중대장은 옥규진대위입니다. 이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처리했읍니까? 지휘관으로서…
ㅇ 증인 李熺性
처리를 못했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처리를 못 했으면 직무유기에 해당되는 것아닙니까? 국헌을 문란케 하고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를 차단하고 마비시킨 지휘관으로서 처벌하지 않았으면 분명히 직무유기에 해당되지요?
ㅇ 증인 李熺性
33사단의 상급기관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전적으로 당시 계엄사령관만이 책임질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ㅇ 金永鎭위원
지휘체계상 물론 위의 상급부대는 있지만 이런 엄청난… 국민을 기만하고 헌법기관을 파괴한 일에 대해서는 당시의 계엄사령관으로서 직무유기에 대한 책임이 있지 않습니까? 있지요?
ㅇ 증인 李熺性
그 말단기관이 명에 의한 것을 잘 못해서 그것을 처리했으면 좋았을텐데 그것을 못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ㅇ 金永鎭위원
위원장님! 다른 어떤 문제보다도 이 문제는 현저하게 헌법위반 사항입니다. 본위원은 지금 증인이 이 문제에 대해서 계속 책임회피성발언을 계속하고 있읍니다. 진상을…
ㅇ 위원장 文東煥
위원장으로 한 가지 여쭤봅시다.
ㅇ 증인 李熺性
예.
ㅇ 위원장 文東煥
아까 모른다고… 늦게 알았다고 그랬지요?
ㅇ 증인 李熺性
예. 늦게 보고받아서 사실은 알았읍니다.
ㅇ 위원장 文東煥
그것을 추궁해 보았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못 했다고 여쭈었읍니다.
ㅇ 위원장 文東煥
왜 추궁하지 않았어요?([위원장이 공정하게 사회만 보세요]하는 이 있음)위원장도 물론 물을수가 있읍니다.위원장도 신문권을 가지고 있어요.
ㅇ 金永鎭위원
위원장님! 발언 계속하겠읍니다.본위원은 지금 증인이 답하고 있는 가운데 위증 내지 직무유기에 대한 시인을 안하고 있읍니다. 명백하게 직무유기임이 확인되었읍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청문회가 끝난 다음에 별도로 조사소위원회를 구성해서 진상을 확인해서 내일 열리는 청문회에서 이 문제를 다시 확인하도록 하겠읍니다. 허락해 주시겠읍니까?
ㅇ 위원장 文東煥
예. 좋습니다.
ㅇ 金永鎭위원
이제 본위원이 준비한 신문을 계속하겠읍니다. 증인은…증인!
ㅇ 증인 李熺性
예.
ㅇ 金永鎭위원
말씀들으세요.증인은 군에서 실시하는 충정훈련을 무슨 훈련으로 알고 계신가요?무엇을 하는 훈련입니까?
ㅇ 증인 李熺性
충정작전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ㅇ 金永鎭위원
충정훈련입니다. 충정작전과 물론 훈련이 있읍니다. 충정훈련은 무엇을 하는 훈련입니까? 구체적으로…
ㅇ 증인 李熺性
각 부대마다 특정한 훈련의 이름을 붙이기 때문에 대개 특전사와 수도경비사령부가 실시하는 작전훈련이 그 이름이 붙지 않는가 생각하고 있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폭동진압훈련이 맞지요? 충정훈련은 폭동진압훈련이라고 여기 육군본부에서 제출한 자료에 분명히 나와 있읍니다. 맞습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까?
ㅇ 金永鎭위원
기억을 잘 더듬으셔서 말씀하세요. 증인은 1980년2월18일 작전명령을 통해서 돌발적인 소요사태에 대비하는 폭동진압훈련 소위 충정훈련을 실시하기로 하고 1군·2군·3군사령관 鄭鎬容 특전사령관 그리고 당시 盧泰愚 수도경비사령관 등에게 이 충정계획을 전군에 걸쳐서 하달한 바 있지요?
ㅇ 증인 李熺性
기억이 분명치 않습니다.
ㅇ 金永鎭위원
증인의 이름으로 직접…… 증인의 지위를 이용해서 문서를 냈는데 기억이 안 난다는 말씀입니까? 증인이 국방부에 제출한 문서에는 분명히 나와 있읍니다.이처럼 80년대초에 들어서 전후방에 있는 전군에 충정훈련을 전면실시하고 특히 이 충정훈련을 ¼분기안에 2월중에 조기실시하도록 명령을 한 것은 무슨 이유가 있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
ㅇ 金永鎭위원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80년대에 계엄사령관인 증인의 계엄포고문발표대로 북한의 남침기도가 긴박한 상황이었다면 전군에 작전지침이 폭동에 대비한 충정훈련이어야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증인은 당시에 북한의 남침기도가 긴박하다고 하는 그런 입장을 계속 공식으로 천명하면서 비정규전에 대비한 폭동진압훈련을 전군에 실시하도록 하달한 것이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가 묻고 있읍니다. 무슨 이유입니까?
ㅇ 증인 李熺性
하달한 기억이 없기는 없지만 만일 하달이 되었다면 이와같은 상황이…
ㅇ 金永鎭위원
하달한 기억이 없으면 추정해서 말씀하지 마세요.
ㅇ 증인 李熺性
알겠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북한의 남침위협으로 위기감을 조성하고 막상 군내부에서는 고도의 폭동진압훈련인 충정계획을 추진한 저의가 어디에 있는가 묻고 있는데 증인은 기억이 안 난다 이렇게 답변하고 있읍니다. 본위원이 증인의 기억을 도와드리겠읍니다. 솔직이 5·17[쿠데타]에 대비한 사전계획이었다고 말을 해야 되지 왜 변명합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ㅇ 金永鎭위원
그렇지 않다는 근거가 어디에 있읍니까? 왜 공산군의 남침위협이 심각하다 하면서 전군에는 폭동진압훈련을 시키느냐 그 말입니다. 그것도 ¼분기 이전에 전부대에 실시하도록 특별지시를 합니다.
ㅇ 증인 李熺性
……
ㅇ 金永鎭위원
그러면 5·17 전국비상계엄조치와 광주항쟁진압후에는 전혀 전부대에 충정훈련을 실시하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또 따로 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때 충정훈련을 실시했다면 ¼분기까지 완료했다고 했다면 제 판단에는 이렇습니다. 대학이 신학기가 시작되면 매년 연례행사모양으로 학생시위가 일어납니다……
ㅇ 金永鎭위원
증인!
ㅇ 증인 李熺性
예.
ㅇ 金永鎭위원
대학에 대한 폭동진압은 공수특전사나 후방부대로 하여금 과거 통상 실시해 왔던 훈련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문제의 5·17 전국비상계엄확대조치 3개월전인 2월중으로 전군에 대해서 전후방 할 것없이 1·2·3군 사령부 전부에 대해서 이 충정훈련을 실시하라고 한 저의에 대해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증인! 당시 충정훈련때 사용하기 위해서 지참하도록 예하부대에 시달한 장비명을 말씀해 보십시오.
ㅇ 증인 李熺性
일일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ㅇ 金永鎭위원
기억나지 않습니까?
ㅇ 증인 李熺性
예.
ㅇ 金永鎭위원
[가스]총 진압봉 화학탄 심지어 화염방사기까지 광주에는 지참을 시켜서 어린 학생과 선량한 시민들에게 이런 무기를 갖고 무차별 진압을 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
ㅇ 金永鎭위원
시민이 타도해야 할 적입니까? 화염방사기 화학탄 무슨 얘기입니까? 여기 보면은 분명히그런 지시를 내리고 있읍니다. 李熺性 육군참모총장겸 계엄사령관명으로 육군본부에 제출한 2급비밀문서에 보면 분명히 이런 장비를 지참하도록 지시하고 있읍니다. 뿐만 아니라 증인은 이런 지시를 통해서 광주시민학살사건발생 초기인 80년5월19일에는 소요진압부대용 특수진압봉 1만개를 긴급구입해서 공수특전사에 5,438개 2군에 1,092개 그리고 3군에 2,660개를 각각 사전에 수행토록 지시한 일이 있지요?
ㅇ 증인 李熺性
기억 납니다.
ㅇ 金永鎭위원
바로 이 문제의 진압봉에 무수한 광주시민이 무차별 머리가 깨지고 다리가 부러지는 그런 중상과 학살을 당했다고 하는 사실을 증인은 똑똑히 인식해야 됩니다.증인의 지시로 80년 상반기에 전군에 걸쳐 실시한 충정작전훈련은 5·17군사 [쿠데타]를 사전계획 준비하기 위한 대국민 무력진압사전연습이었읍니다. 이렇게 해서 잘 훈련된 공수특전단을 자기의 국민을 적이나 폭도로 간주하여 광주항쟁초기부터 잔악한 행동을 하도록 만들었읍니다. 이같은 충정훈련으로 인해서 선량한 학생과 광주시민이 무차별하게 죽어갔고 또한 증인에 의해서 실시되고 또 지시된 폭동진압훈련은 급기야 비극적인 광주대학살을 일으킨 주원인이란 사실이 판명됐는데 증인은 아니라고 말하겠읍니까? 답변해 보세요.
ㅇ 증인 李熺性
유감된 일입니다.
ㅇ 金永鎭위원
어떻게 유감됩니까? 그렇게 고상한 술어를 사용하지 마시고 구체적으로 심경을 말씀해 보세요.
ㅇ 증인 李熺性
……
ㅇ 金永鎭위원
다음 묻겠읍니다.공수특전사령부 설립배경과 그 임무수행에 대해서 확인하겠읍니다.본위원은 증인에게 5·18광주항쟁 당시 광주에 지급 공수부대에게 투입되었던 이 공수특전단에 대해서 확인하려고 합니다.증인은 공수특전단이 언제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고 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 공수특전여단 처음에 창설된 시기를 언제인지 기억 못합니다.
ㅇ 金永鎭위원
1960년6월 車智澈 全斗煥 崔世昌 張基梧 이 네 사람의 대위와 당시 미국의 [포토베닝] 특수전 교육기관에서 6개월간의 특수훈련을 마치고 귀국을 해서 공수단을 창설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지요?
ㅇ 증인 李熺性
그렇게 듣고 있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공수특전사의 설치목적과 그 임무는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당시 계엄사령관으로서 말씀해 보세요.
ㅇ 증인 李熺性
공수특전여단의 임무는 여러가지가 있다고 생각 됩니다만……
ㅇ 金永鎭위원
간단하게 말씀해 보세요. 주요 임무만…
ㅇ 증인 李熺性
전시에는 적후방에 들어가서 여러가지 파괴·납치·첩보수집과 같은 특수임무를 주로 수행합니다.
ㅇ 金永鎭위원
적후방에 침투해서 요인을 암살하고 그리고 주요시설을 점거하는 등 특수작전임무를 수행하지요?
ㅇ 증인 李熺性
주임무가 그렇습니다.
ㅇ 金永鎭위원
그후 1969년 全斗煥의 제1공수여단을 중심으로 盧泰愚씨의 9여단 그리고 鄭鎬容씨의 7여단 등 3개여단을 묶어서 공수특전사령부를 창설했읍니다. 따라서 본위원은 제5공화국을 공수특전단에 의한 독재공화국으로 보는데 이에 대해서 증인은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ㅇ 증인 李熺性
공수특전부대출신이 많이 등용된 것만은 사실입니다.
ㅇ 金永鎭위원
간접적으로 시인하십니까? 이른바 한국군공수부대대부는 70년대 朴正熙씨의 분신인 車智澈인데 그 뒤를 이어 12·12[구테타]와 5·18광주학살을 통해서 집권한 全斗煥씨 그리고 현재 盧泰愚씨 차기를 준비중이라고 하는 鄭鎬容씨 등 이들은 다 車智澈의 공수단에 후예들로서 70년대부터 이 나라를 계속 지배하고 국민을 억압해 온 정치군인들의 실체인 바 정치에 뛰어든 일부 공수특전단에 의한 독재공화국이 틀림 없지 않습니까?증인 어떻습니까?
ㅇ 증인 李熺性
……
ㅇ 金永鎭위원
자 그러면 이렇게 설립된 공수특전단이 5·18광주투쟁 기간 동안에 광주 현지에 내려가서 공수부대의 설립목적에 맞는 군으로서의 사명을 다했는지 어떤 짓을 했는지 한번 구체적으로 확인해 봅시다.증인! 증인은 全斗煥씨의 전기[한강에서 북악까지]라는 책을 읽어 본 적이 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표지만 봤지 내용은 안 읽었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표지는 보셨군요. 그 책의 저자인 千金城씨의 기록에 의하면 증인은 80년5월14일 육군본부에서 全斗煥씨 盧泰愚씨 鄭鎬容씨 黃永時씨와 함께 회의를 한 적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사실인가요?
ㅇ 증인 李熺性
그런 사실이 없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전혀 없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예.
ㅇ 金永鎭위원
그러면 千金城씨와 趙甲濟씨가 허위작성 했다는 얘기인데 증인은 앞으로 이 청문회 기간 동안에 千金城씨와 趙甲濟씨를 대질신문해도 되겠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예. 좋습니다.
ㅇ 金永鎭위원
바로 이 회의에서…… 千金城씨는 말하기를 육군본부 5인회의에서 金大中씨 체포를 사전에 모의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이 아닙니까?
ㅇ 증인 李熺性
사실이 아닙니다.
ㅇ 金永鎭위원
80년5월 공수특전여단이 서울과 광주로 이동한 것이 구체적으로 언제 누구에 의해서 지시됐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특전여단 병력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서 내려갔느냐 하는 말씀입니까?
ㅇ 金永鎭위원
그렇게 묻고 있읍니다.
ㅇ 증인 李熺性
7여단에 있는 2개 대대는 5월17일 저녁부터 행동을 개시해서 광주에 투입되었읍니다.그 다음에 11여단하고 3여단은 5월…… 날짜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5월18일 19일경이 아니겠느냐 생각이 됩니다.
ㅇ 金永鎭위원
증인! 공수특전사의 전투상보에 의하면 5월17일 이전에 공수부대를 이미 서울과 광주에서 미리 이동을 시켰읍니다. 이는 당시 특전사령관인 鄭鎬容씨의 지시에 의한 것입니까?
ㅇ 증인 李熺性
5월17일 이전에 이동 시작했다는 것입니까?
ㅇ 金永鎭위원
5월17일 이전에 공수부대를 서울과 광주에 미리 이동시켰읍니다 누구 지시입니까?
ㅇ 증인 李熺性
믿을 수가 없읍니다. 저는…
ㅇ 金永鎭위원
계엄사령관이 모른다는 말입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ㅇ 金永鎭위원
무슨 얘기입니까? 군 체계상 증인이 결정을 했을텐데요.
ㅇ 증인 李熺性
모든 병력 이동은 광주뿐만 아니라 전군에 걸쳐서……
ㅇ 金永鎭위원
계엄을 확대조치하라는 내용을 5월18일에 하지 않습니까?
ㅇ 증인 李熺性
18일 영시부인데……
ㅇ 金永鎭위원
그런데 17일 공수부대는 현지에 이동한다 말입니다. 이 중대한 조치를 누가 취했느냐 그 말입니다.
ㅇ 증인 李熺性
그 18일에 맞춰서 배치되게끔 17일 저년부터 이동을 개시했을 것입니다.
ㅇ 金永鎭위원
이 결정은 증인의 단독결정이었읍니까? 계엄사령관의……
ㅇ 증인 李熺性
저의 작전명령에 의해서 움직였을 것입니다.
ㅇ 金永鎭위원
당시 군의 실세였던 全斗煥씨 盧泰愚씨 鄭鎬容씨 등과 사전에 협의를 거친 일은 없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없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특히 이 부분은 역사적인 준엄한 책임이 따를테니까 분명히 해두기 바랍니다.그러면 그 당시 학생시위나 교수들의 민주화 요구가 공수특전단을 투입시켜야 할 만큼 심각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처음에 전국비상계엄을 위해서 배치된 것은 예방목적으로 투입된 것입니다.
ㅇ 金永鎭위원
당초에 예방목적으로 갔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전부대를 예방목적으로 보냈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그런데 당초에 파견된 대로 가서 예방만 했읍니까? 어떻게 했다고 보십니까?
ㅇ 증인 李熺性
학교 안에 들어가서 주둔만 하고 청소하고…
ㅇ 金永鎭위원
좋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구체적으로 가서 예방목적만 했는지 그 행위에 대해서 확인을 하겠읍니다.증인이 5월 광주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기위해서 수립한 5·25상무충정작전실시지침에 의하면 계엄해제 학원자율화 언론자유 등을 요구한 시민들을 폭도나 흉악범 또 공산주의자들이라고 증인은 말했는데 지금 이 시간까지도 그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대부분의 광주시민은 선량한 시민입니다.그러나 총기를 탈취하고 총을 쏘고 형무소를 습격하고 있는 분자들은 폭도에 틀림없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그러면 광주에 있는 80만시민이 가령 증인의 말대로 불과 한두 사람의 몇 사람의 그런 일이 있다고 그래서 광주시민을 폭도다 혹은 불순분자의 조종을 받았다고 그렇게 총칭할 수 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렇게 할 수 없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그러면 그렇게 했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지금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증인이 시달한 상무충정작전실시지침이 여기 있읍니다. 여기에 보면 그렇게 분명히 기록하고 있읍니다.시민들을 폭도나 흉악범 공산주의자라고 분명히 서술하고 있읍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ㅇ 증인 李熺性
다시 한번 읽어 주십시오.
ㅇ 金永鎭위원
폭도 흉악범 공산주의자들 이렇게 표현하고 있읍니다.
ㅇ 증인 李熺性
전시민을 그렇게 표현했다는 것입니까?
ㅇ 金永鎭위원
그러면 그런 일에 가담하지 않은 시민들에 대해서 그렇게 표현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 토막만 딱 읽으니까 무엇을 그렇게 지칭했다는 것을 잘 모르겠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광주항쟁기간 동안에 광주에서 민주주의를 위해서 떨쳐 나섰던 사람들에 대해서 그렇게 총칭하고 있다 그 말입니다. 그런 평가에 대해서 당시 계엄사령관을 역임했던 증인은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고 묻고 있읍니다.
ㅇ 증인 李熺性
전 기본 자세가 대부분의 시민은 선량한 시민이다. 그러나 개중에 폭도가 있다 이와같이 하는 것이 기본적인 자세였는데 만일 그와 같은 분류가 되지 않고 광주시민 전체를 폭도라고 규정했다면 그것은 잘못된 문장입니다.
ㅇ 金永鎭위원
잘못되었으면 어떻게 하시겠읍니까?증인은 민주의의를 요구한 400만 전남도민을 폭도로 지금까지 규정을 했읍니다.물론 정부가 주관했던 민화위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하는 그런 매우 어설푼 규명을 했읍니다.지금 그런 민주주의를 요구했던 광주시민을 향해서 폭도 불순분자 이렇게 표현했는데 이거 어떻게 하시겠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전부 다 그렇게 했다면 그것 잘못입니다.
ㅇ 金永鎭위원
분명히 잘못입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그러나 제 기억으로서는 그렇게 전부다 규정을 그렇게 한 일은 없다고 기억하고 있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잘못이라고 분명히 증인은 시인했는데 그런 표현을 한 것에 대해서 광주시민에 대해서 사과를 해야 되지 않습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렇게 표현되었다 하는 것을 찾아 가지고 분명히 되었다면 사과하겠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좋습니다.다음 신문하겠읍니다.증인이 광주항쟁기간중 하달한 발포명령은 정확히 언제 무슨 이유에서 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발포명령입니까?
ㅇ 金永鎭위원
예.
ㅇ 증인 李熺性
발포명령을 하달한 일이 없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그러면 무슨 명령을 하달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자위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경고한 일이 한번 있고 예하부대에서는 자위권을 발동할 때는 이러이러한 여건 하에서 이러이러한 절차에 의해서 실시하라는 교훈적인 공문을 하달한 바가 있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시민을 향해서 총을 쏘고 무고한 시민 양민을 무참하게 학살한 것도 자위권 발동입니까?
ㅇ 증인 李熺性
자위권 발동의 규정에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ㅇ 金永鎭위원
그러면 왜 발포명령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자위권 발동이라고 말합니까?
ㅇ 증인 李熺性
자위권을 규정하고 있는 위수령에 자위를 위해서 하는 행동이 규정되어 있읍니다. 거기에 따른 것입니다.
ㅇ 金永鎭위원
이 발포명령은 국방부가 본 특위에 제출한 자료에 의하면 전남북계엄분소장인 당시 蘇俊烈장군의 발포명령지시는 5월21일 오후 8시30분이었읍니다. 진종채 2군사령관의 발포명령지시는 5월22일 오전 10시30분입니다. 이런 발포명령을 과연 적법한 조치라고 보십니까?
ㅇ 증인 李熺性
金위원께서 발포명령 발포명령하는 것이 자위권을 두고 하는 말씀입니까?
ㅇ 金永鎭위원
무고한 시민에게 총를 쏘아서 양민을 학살한 부분에 대해서 묻고 있읍니다.
ㅇ 증인 李熺性
자위권은 아무 대항도 하지 않고 있는 시민에 대해서 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ㅇ 金永鎭위원
좋습니다.자위권을 발동했는지 양민을 학살했는지 한번 봅시다.증인 80년5월24일 광주 송암동에서 양민을 학살한 사건에 대해서 알고 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잘 모르고 있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모르고 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예.
ㅇ 金永鎭위원
광주 백운동에 있는 효덕국민학교에 진제마을에서 계엄군이 APC 장갑차를 앞세우고 지원동에서 이동하고 있었읍니다. 여기는 평온한 들판입니다. 시내와는 매우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그런데 미 장갑차를 앞세우고 45대의 [트럭]이 장갑차를 뒤따르는데 [트럭]위에서 M16을 가지고 이 원제저수지에서 목욕을 하던 어린 학생들을 무차별 난사를 했읍니다. 여기에서 이 계엄군의 잔학한 난사에 의해서 방광봉군이 현장에서 사망을 했읍니다. 1시20분입니다. 전남중학교 1학년 재학중입니다. 또 이 진제마을에서는 전재수군이 자기의 벗어진 고무신을 줍기 위해서 뒤로 돌아서 엎드린 순간 현장에서 사격을 해서 몸뚱이가 갈라진채 사망했읍니다. 이 계엄군은 계속해서 이동해옵니다. 송학동 마을에서는 칠면조 250마리를 난사해서 사살합니다. 또 한선웅씨의 젖소 세마리를 난사합니다. 이것이 자위권 발동입니까? 이것이 양민학살이 아닙니까?
ㅇ 증인 李熺性
만일 위원께서 얘기한 대로가 사실과 같다면 그것은 자위권이 아닙니다.
ㅇ 金永鎭위원
이것은 반드시 사실입니다. 진실입니다.그 다음에 임암동 마을 도로변에서는 박연홍 여인을 비롯한 네 명의 마을 아주머니들이 계엄군이 난사한 총을 피하기 인해서 하수구로 들어갔읍니다. 하수구에 들어간 이 박연홍여인을 향해서 조준해서 현장에서 사격을 해서 즉사시켰읍니다. 이런 기가 막힌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았던 양민 세 사람이 있읍니다. 권근립씨 임병철씨 김승우씨 이 세사람에 대해서 나중에 후환이 두려워서 근거를 없애기 위해서 권근립씨는 대검으로 현장에서 살해를 하고 임병철씨와 김승우씨는 각각 세발의 M16을 머리에 난사를 해서 사살시킵니다. 이것이 자위권입니까? 이것이 광주시민이 바로 증인이 계엄사령관으로 있던 5월18일부터 27일 항쟁기간 동안에 있었던 비참한 양민 학살의 참사 현장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자위권이라고 말할 수 있읍니까. 이런 광주시민의 비참한 죽음에 대해서도 앞으로 24일과 25일 개최되는 청문회에서 그 실상을 다시 계속 밝혀야 할 것입니다.증인! 이 사진이 보이십니까?
ㅇ 증인 李熺性
보입니다.
ㅇ 金永鎭위원
광주 시민은 당시 군부통치결사반대를 계속 외쳤읍니다. 이런 광주시민을 향해서 여기에 부상 당한 어린이가 있읍니다. 이 어린이가 무슨 죄가 있읍니까? M16을 맞았읍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이 소위 대한민국의 국군이 할 짓입니까?증인은 아까 동료위원들의 질문에 손을 뒤로 묶고 사격을 했다면 책임을 지겠다고 했읍니다.똑똑히 보세요. 광주시민이 이렇게 포승줄에 묶인채 살해당했읍니다. 증인은 보고 계십니까?
ㅇ 증인 李熺性
예. 봤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여기 집단으로 살해 당한 광주시민의 모습을 보십니까? 이것이 자위권 발동입니까? 이렇게 무고한 양민이 학살 당하고 또 전재수군을 비롯한 그 천진난만한 여섯살의 어린아이들이 자기의 검정고무신을 주우려고 하는 아직 솜털도 빠지지 않은 그 어린 생명의 그 손에 사격을 가한 이 계엄군이 누구입니까?증인은 어린 손자들이 있지요?
ㅇ 증인 李熺性
있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증인이 계엄사령관 휘하에서 이런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는데 그러고 유족들의 아픔이 하늘을 치솟는데 증인은 자기의 손자를 사랑한다고 하고 품에 안고 그 손자는 예뻐할 수 있읍니까?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증인! 증인은 80년5월27일 이른바 상무충정작전 즉 전남도청 진압작전을 언제 누구에게 건의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것은 건의하지 않고 실시한 것입니다.
ㅇ 金永鎭위원
그러면 증인이 단독으로 실시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ㅇ 金永鎭위원
좋습니다. 여기 제출된 자료에 보면 한·미양국과 합의사항이라고 분명히 기록이 되어있는데요. 사실하고 다릅니까?
ㅇ 증인 李熺性
다릅니다.
ㅇ 金永鎭위원
당시 계엄사령관인 증인은 한·미양국과 합의를 해서 24일 도청을 진압하겠다고 하는 건의를 27일로 한·미양국과 합의해서 결정하겠다고 하는 그런 지시를 내렸는데요?그러면 여기 있는 이 문서는 어디 문서입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것은 내용이 다릅니다.
ㅇ 金永鎭위원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 내용은 며칠까지 한·미협조를 해가자. 며칠까지 작전보류하라는 내용의 그것입니까?
ㅇ 金永鎭위원
참모총장은 한·미 협의사항으로 충정작전을 24일까지 당초에는 연기했다가 나중에 다시 27일 영시2분부터 실시하도록 예하부대에 실시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ㅇ 金永鎭위원
분명히 여기에 보면 육군본부에서 제출한 자료에 보면 한·미협의사항이라고 분명히 나와있읍니다. 그렇습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ㅇ 金永鎭위원
그런데 지금까지 끈질기게 광주학살에 대해서 미국과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던 내용이 허구인 것이 드러나지 않습니까? 말씀해 보세요.
ㅇ 증인 李熺性
그 협의사항이라고 하는 것은 한·미간에 협의가 광주사건에 대한 시기 결정에 대한 것인데 무엇때문에 그렇게 되었느냐 할 것같으면 미국은 만일의 경우 광주사태가 장기화되어가지고 여러가지 소란이 있고 북괴의 남침이 있을 경우를 고려해가지고 미국의 공군과 해군을 한국 근해에 배치할 때까지 작전개시를 기다려 달라 하는 내용의 협조입니다.협의사항이지 다른 광주에 영향을 미칠 협의사항은 아닙니다.
ㅇ 金永鎭위원
무슨 말씀입니까? 5월26일 16시40분 한·미연합사의 작전참모부장[로버트 세니월드]와 같이 당시의 육군본부의 작전참모부장인 金在明장군과 서로 협의했다고 분명히 문서에 나와있고 지금 참모총장이 지시를 했는데 이 사항은 한·미간의 협의사항이다 이렇게 자구상 표기되어 있읍니다.
ㅇ 증인 李熺性
협의사항이라고 하는 것이…
ㅇ 金永鎭위원
문서로 말해야 됩니다. 증인의 설명으로는 부족합니다.여기에 문서에 의하면 분명히 5·18광주학살사건은 미국이 관련되어 있는 것 이 분명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ㅇ 증인 李熺性
전혀 관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ㅇ 金永鎭위원
그러면 이 문서는 어떻게 된 문서입니까?이 문서도 당초에… 육군본부에서 제출한 것이 아닙니다.이번에 광주민주화운동을 조사하기위한 우리 광주특위의 문서검증반이 현장에 가서 추가로 제출된 자료에 나와 있읍니다. 어제밤에 받아서 확인한 것입니다.증인은 이 문제에 대해서 나중에 확실하게 책임짓는 답변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ㅇ 위원장 文東煥
이제는 그만큼 하시고 나머지 문제는 다른 사람에게…
ㅇ 金永鎭위원
위원장님! 제가 마치겠읍니다.본위원은 이제 증인에 대한 신문을 마치면서 방금 제기된 몇가지의 역사적인 사실들을 마지막으로 정리하고 신문을 마치겠읍니다.충정작전은 5월17일 군사[쿠테타] 실시를 위해 사전계획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규명했읍니다.광주시민의 학살에는 미국이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고 하는 구체적인 정황이 방금 제시한 문서를 통해서 드러났읍니다.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사실입니다.세번재는 광주항쟁의 무력진압을 위한 발포명령자와 5월27일 전남도청의 무력진압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소재가 바로 계엄사령관에게 있다고 하는 사실이 확인되었읍니다.끝으로 공수부대 잔학상이 어떠했느냐 하는 것을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이 어린이의 양민학살… 증인은 계속해서 이것이 자위권발동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심지어 부녀자에 대한 살상행위 이런 모든 진상에 대해서 증인은 분명히 그런 사실이 발견되면 책임지겠다고 말했읍니다.
이상의 사실들에서 확인되었듯이 역사속에서 군의 정치개입은 이 역사에 큰 오점을 남기고 선량한 우리 국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엄청난 결과를 야기시켰읍니다.군은 본연의 사명에 진력해야 합니다. 그런 군에 대해서 우리 국민은 신뢰와 사랑을 보낼 수 있읍니다. 우리는 국방을 지키고 있는 60만 국방군인에 대해서는 큰 감사와 존경을 가지고 있읍니다.
그러나 정치군인의 5·18광주학살 이 관련자 이 진상에 대해서만은 명명백백하게 분명히 역사적인 사실들이 규명되어야 합니다.그리고 그 책임을 국민과 함께 준엄하게 물어야 합니다.그런 의미에서 증인은 계엄사령관과 육군참모총장이라고 하는 군의 최고의 지휘관으로서 역사앞에 저지른 엄청난 과오를 변명하지 말고 준엄하게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증인! 혹시 증인께서 마지막으로 더 하실 말씀이 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지금 金위원께서 말씀하신 중에서 일부는 수긍할 수 있지만 너무나 일방적인 규정으로서 제가 수긍하기 어려운 것이 있읍니다.
ㅇ 金永鎭위원
광주특위는 이 청문회 한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앞으로 특위는 계속해서 진상을 규명해갈 것입니다.본위원이 방금 정리한 내용들에 대해서는 당시 계엄사령관 육군참모총장인 증인은 끝까지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이상으로 마치겠읍니다.
ㅇ 위원장 文東煥
수고하셨읍니다.다음은 통일민주당의 朴泰權위원께서 신문해 주십시오.
ㅇ 朴泰權위원
민주당의 朴泰權위원입니다.증인께서 장시간 신문에 응해 주시면서 지금까지 사실 우리 위원들이 이 역사의 회상하기조차 싫은 끔찍한 과거의 역사에 대해서 심도있게 알고자 하는 질문에 대하여 지금껏 증인께서는 기억이 안난다 잘 모르겠다 예하부대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모른다 하는 식의 답변의 회피성을 본위원이 생각할 때 오늘 이 자리에서 증인으로서 너무도 과거에 엄청난 자리에서 육군참모총장으로서 계엄사령관으로서 또 12·12사태와 5·17사태를 묵인해 줌으로써 제5공화국에 와서는 권부속에서 장관과 또 그후에는 국영업체의 이사장까지 지내는 화려한 비호를 받고서 이제 여러 위원들이 지적한 대로 광주민주항쟁의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내려야 할 이 자리에서 양심을 버리고 사심을 가지고 답변한다든지 이 자리에 있는 주변의 인물을 살피고 답변하는 등 정말 불성실하기 이를데 없읍니다.
본위원이 묻는 데에 대해서는 정말 우리 온 국민이 믿고 존경받는 과거의 참모총장자리에서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양심을 바로 세우고 국민을 안전하게 받드는 군인정신에 입각해서 명확하게 분명하게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소위 경복궁 생일집잔치라는 별들의 모임이 사실 후일에 12·12사태라고 지칭되고 대하극상의 모임에 앞으로 본위원이 얘기하는 사람들이 참석했었으면 했다 참석하지 않았으면 안했다 이렇게 간단하게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兪學聖…
ㅇ 증인 李熺性
어느 시기입니까?
ㅇ 朴泰權위원
12·12사태 때 경복궁 모임있지 않습니까?
ㅇ 증인 李熺性
경복궁 모임에…
ㅇ 朴泰權위원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30경비단장실입니다.車圭憲… 당시 수도군단장 참석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거기에 참석한 것은 전혀 누구누구인지 모릅니다.
ㅇ 朴泰權위원
모릅니까? 모르신다면 제가 쭉 알려드리겠읍니다. 黃永時 당시 1군단장 盧泰愚 9사단장 白雲澤 당시 71방위사단장 朴俊炳 당시 20사단장 朴熙道 崔世昌 張基梧등 당시 특전여단장 張世東 당시 30경비단장 수경사예하부대입니다. 金振永 당시 33경비단장도 참석했읍니다.기억이 안나십니까?
ㅇ 증인 李熺性
안납니다.
ㅇ 朴泰權위원
전혀 안납니까?
ㅇ 증인 李熺性
예.
ㅇ 朴泰權위원
당시 그 자리에는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全斗煥씨가 참석을 안했읍니다.답변 안하기 때문에 제가 답변해 드리죠.왜 참석을 안했느냐? 여기에서 엄청난 이미 그 이전부터 모략과 음모가 진행되어 오다 이 당시 보안사령관은 총리공관에 있었읍니다.그 당시 총리공관은 아직 대통령이 청와대로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총리공관에 崔대통령이 있었읍니다.이 자리에서 무엇을 논의했는지 아십니까? 혹시 들어본 일이 있읍니까?답변을 해보세요.못들었으면 못들었다 들었으면 들었다 이렇게 얘기해요.
ㅇ 증인 李熺性
못들었읍니다.
ㅇ 朴泰權위원
들었다고 하면 더 큰일일 것입니다.앞으로 崔圭夏증인이 나오면 이 문제는 반드시 밝혀질 것입니다.그때 장소는 앞에서 얘기한대로 제30경비단장실 張世東단장실이었읍니다.여기에 증인이 참석할 수가 없었겠지요.증인은 그 당시 어디에 무슨 직에 있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중앙정보부장서리직입니다
ㅇ 朴泰權위원
군에서는?
ㅇ 증인 李熺性
직책은 중앙정보부장서리였고요 계급은 중장이었읍니다.
ㅇ 朴泰權위원
그런데 이것을 사전에 전혀 몰랐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몰랐읍니다.
ㅇ 朴泰權위원
중앙정보부장이 뭐하는 것입니까?정말 몰랐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ㅇ 朴泰權위원
이 날밤 그 당시에 이루어진 소위 12·12사태때 전방에 배치되어 있던 9사단이 위치와 임무를 망각하고 육군전력에 있어서 엄청난 국토방위를 맡고 있는 이 부대가 시내로 들어왔지요?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ㅇ 朴泰權위원
이 들어온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조치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 지휘상에 있는 지휘관에 의해서 제지가 되어야 됩니다.
ㅇ 朴泰權위원
제지만 되면 됩니까?어떤 엄벌에 처해야 합니까? 어떤 위법조치에 대해서 문책을 해야 됩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 사안에 따라서 지휘관이 처리할…
ㅇ 朴泰權위원
그 문제에 대해서 거론된 일이 없었죠? 그 간에…
ㅇ 증인 李熺性
저는 그 위치에 있지 않았읍니다.
ㅇ 朴泰權위원
이것도 후일에 알았겠죠?
ㅇ 증인 李熺性
후일에 알았읍니다.
ㅇ 朴泰權위원
후일에 알았다면 이 12·12사태가 일어난 후에 곧바로 육군참모총장이 되었죠?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ㅇ 朴泰權위원
육군참모총장으로서는 이 당시에 이러한 일들을 후일에 보고받고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조치해야 된다고 생각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 당시는 그 이상 손을 쓸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읍니다.
ㅇ 朴泰權위원
그러면 그러한 일을 한 것을 묵인해 주는 것이었읍니까?모든 일은 사건이 난 후에 그 사건의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 법에 저촉을 받는지 안받는지 위법인지 아닌지 군의 여러가지 규정에 위배인가 아닌가 이것을 판단해서 조치를 해야 되는데 그렇게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 말씀이죠?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ㅇ 朴泰權위원
그러면 육군참모총장이 연행된 것도 공관에서 체포되지 않았읍니까? 그렇지요?
ㅇ 증인 李熺性
예.
ㅇ 朴泰權위원
증인은 이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이것도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죠?
ㅇ 증인 李熺性
아까도 말씀을 드렸지만 불행한 사건이라고 했읍니다.
ㅇ 朴泰權위원
그러면 증인께서는 소위 그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 모임에서 이루어졌던 결과에 대해서는 전부 받아들이는 쪽이었군요?그렇지요?
ㅇ 증인 李熺性
그때 상황은 그렇게 되었읍니다.
ㅇ 朴泰權위원
이러한 문제들이 대통령이나 그 당시 총리가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총장이 되기 전에 증인께서는 중앙정보부장이라면 모든 정보를 입수해서 대통령에게 보고해야 되지 않습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ㅇ 朴泰權위원
그러면 그것은 12일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이전부터 이루어져서 행해졌던 일인데 한번도 보고한 일이 없지요?
ㅇ 증인 李熺性
예. 그와같은 첩보를 입수한 일이 없읍니다.
ㅇ 朴泰權위원
그 첩보를 정말로 입수를 못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ㅇ 朴泰權위원
하늘을 두고도 말씀할 수 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예. 저까지 보고가 일체 안되었읍니다.
ㅇ 朴泰權위원
그러면 그 뒤에 알았을 때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은 인정하시지요?
ㅇ 증인 李熺性
그것은 잘못된 겁니다.
ㅇ 朴泰權위원
그러면 사후처리를 왜 안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때는 수습을 하지 않으면 안될 혼란한 시기였읍니다.
ㅇ 朴泰權위원
어떤 혼란한 시기입니까? 그러면 이 나라의 군이 질서가 하급부대장들이 참모총장까지 연행하고 여러가지 그러한 군의 위계질서를 파괴해도 사안에 따라서는 묵인해 준다는 것입니까? 밝혀보세요. 왜 말씀을 안하십니까?
ㅇ 증인 李熺性
저의 역부족이었읍니다.
ㅇ 朴泰權위원
이제 실토를 하시는군요. 그 역부족에서부터 이제 양심에 따른 말씀을 해주세요. 증인은 12·12사태후 정말 역부족의 행위에 따라서 그 주체자들에 의한 승진도 되고 육군 참모총장도 되고 계엄사령관도 되고 그랬읍니다.그래서 귀하는 정말로 모른다고 하시지만 본위원이 생각할 때는 그 당시에 묵인하는 사전에 정보를 듣고도 묵인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그렇기 때문에 귀하는 5공화국에서도 비호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증인께서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지금 잘못된 일이라고 시인을 해주셨읍니다. 이때 모든 일들이 증인과 또 증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또 그러한 일을 저질렀던 사람들이 모두 직무유기이고 이를 알고도 동조했다면 나쁘게 또는 긍정적인 표현에 따라서는 이 주모자들은 엄단에 처하거나 [쿠데타]의 반란자로 보거나 정말로 있어서는 아니될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심판하고 이들을 응징하고 넘어가지 않은 역사에 대해서 이 자리에 대해서 후회스럽게 생각합니다. 증인 맞지요?
ㅇ 증인 李熺性
예.
ㅇ 朴泰權위원
이들 세력들은 해를 바꾸어서 5월로 넘어갑니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생략을 하고 말씀을 드리겠읍니다. 국회 강점이 있었읍니다. 민주인사를 연행했읍니다. 온 국민이 열화와 같은 정말 민주의 시대가 열리는 80년대 봄을 맞이해서 희망과 정치적인 민주화를 갈구하는 모든 국민들에게 정말 송두리째 앗아간 일들이 바로 이러한 일들입니다.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했읍니다. 이런 등 아까 증인께서는 군배치명령에 대해 질문할 때마다 아래 하급부대에서 했다 증인이 즉 본인이 들었다 이전 정도로 답변했읍니다. 증인은 그렇다면 그 당시 계엄사령관이라든지 육군참모총장으로서 좀 심각하게 나쁘게 표현하면 허수아비였읍니까? 그것은 아니지요?
ㅇ 증인 李熺性
말단 부대를 일일이 배치하는 것은 역시 전결권에 관계되는 문제이지 일일이 총장이…
ㅇ 朴泰權위원
좋습니다. 그러면 그 후에 알아들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국회에서 있었던 이러한 구속사건 국회가 열리는 것을 방해한 사건 이러한 것들은 후에 알았다고 그랬습니다.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ㅇ 朴泰權위원
후에 알았을 때에 그 행위를 한 부대는 어느 부대였읍니까? 보고를 받았으니까 알고 계시
지요?
ㅇ 증인 李熺性
그때 당시 어느 부대라는 보고는 명확하게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데요
ㅇ 朴泰權위원
후에 보고를 받았다면 이러한 일을 모르신다고 한다는 것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분이나온 국민들중에서 증인의 말을 믿을 사람이 없읍니다.
ㅇ 증인 李熺性
제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그와같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기억이 없어 그러는 것입니다.
ㅇ 朴泰權위원
정말 증인은 허수아비였읍니까?육군참모총장, 계엄사령관 모두 차단되었었읍니까? 형식적으로 앉아 있었읍니까? 양심에 따라서 한번 말씀해 보세요.
ㅇ 증인 李熺性
제가 할 수 있는 권한은 다 행사했읍니다.그런데 아까 이야기 했듯이 역부족에 따라서 못한 일도 있다는 것을 시인했읍니다.
ㅇ 朴泰權위원
그러면 지금도 역부족이라서 말씀을 못하시는 것이지요?
ㅇ 증인 李熺性
국회를 강점하고 그와같은 문제는…
ㅇ 朴泰權위원
80년 5월 17일 밤 9시 30분에 중앙청에서 긴급국무회의가 열렸읍니다. 당시 총리를 비롯한 모든 장관들이 그 자리에 참석해서 소위 전국비상확대계엄을 가결하도록 되어 있었읍니다. 이때 국무회의장에 올라가는 중앙청계단에는 군이 배치되어 있었읍니다.그 이야기는 들으셨읍니까? 들으신 일도 없읍니까? 그것도 역부족이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잘 모르겠읍니다.
ㅇ 朴泰權위원
모릅니까? 이 당시 본위원이 알기로는 그 당시 문교부장관을 지낸 金玉吉장관이 계단을 올라갈 때 그 계단에 도열되어 있는 지금 증인이 밝히지 않는 부대의 부대원에 의해서 장관이 수모를 겪고 올라 갔읍니다.더불어 그 자리에서 국무회의때 본위원이 알기로는 전국비상확대계엄에 대해서 거부했읍니다.이것은 증인이 알고도 밝히지 않기 때문에 본위원이 조사한 자료에 의해서 얻은 자료에 의해서 밝히고 넘어가겠읍니다.다음에는 지금 계엄사령부에는 계엄사령관산하에는 평상시에는 작전상황일지가 있고 육군본부에 계엄시에는 계엄상황일지가 있지요 있읍니까? 없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있다는 것도 최근에 알았읍니다. 그것도…
ㅇ 朴泰權위원
증인! 정말 제가 질문을 더해야 할지 여기서 중단해야 될지 저도 판단하기 힘듭니다.계엄사령관께서 상황일지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그것을 물으니까 지금에야 있는 것을 알았었다. 너무 답변이 불성실합니다.그런데 이 상황일지가 5월17일19시15분부터 18일 08시10분까지 약13시간의 상황일지가 없읍니다.이건 왜 없느냐 앞에서 많은 위원들이 지적했고 본위원도 지적했듯이 국회의 강점 민주인사의 구금연행 예비 검속등 온갖 못된 것을 다 자행했던 시간입니다.그래서 그것은 아마 지금 증인이 이야기하는 대로 역부족 이었기 때문에 상황일지를 쓰지 않았을 것이고 그것은 특수한 부대의 특수한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 졌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광주특위를 통해서 이 진상을 앞으로 밝혀내겠읍니다. 이러한 이 엄청난 불법 다시 말해 음모된 계략은 비상계엄선포를 전제로 자행된 우리 역사의 최고의 비극입니다. 법적으로 완벽한 위법이요. 증인은 직무유기 직권남용 역사의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읍니다.
이 끔직한 이런 일들은 군에서 모든 일들이 [시나리오]가 있어야되고 작전계획이 있어야 되고 명령이 있어야 되고 그 명령을 하달하는 임무가 있어야 됩니다. 이런 엄청난 국헌을 흔들고 국가의 변화를 가져온 이런 일들에 대해서 밝히지 않는데 대해서 유감이 아닐 수 없읍니다. 정말 이러한 엄청난 일들을 증인 누가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말씀하시기가 곤란하십니까? 이런 일들을 보안사령부에서 했읍니까? 안기부에서 했읍니까?합동수사본부에서 했읍니까 아니면 崔圭夏대통령께서 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와 같은 여러가지 문제를 대개 답변을 요구하니 답변할 길이 없읍니다.
ㅇ 朴泰權위원
다음에 20사단 병력의 이동문제를 앞에서 여러 위원들이 말씀을 했읍니다. 이 문제는 본위원이 조사한 자료에 보면 2군사령부에 이른바 충정작전 지령을 내린 시간은 2군사령부 작전지시는 5월17일 19시40분입니다. 이것은 전교사작전일지 우리가 이번 특위가 받은 자료에 나타나 있읍니다. 알겠지요?
ㅇ 증인 李熺性
5월17일입니까?
ㅇ 朴泰權위원
5월17일 19시40분입니다.
ㅇ 증인 李熺性
20사단에 관계된 문제입니까?
ㅇ 朴泰權위원
아니 지금 충정작전… 20사단을 묻기 위해서 여기서 부터 묻습니다.또 동일 비상국무회의는 21시40분에 시작해서 8분만에 끝났읍니다. 그렇지요 맞지요?
ㅇ 증인 李熺性
대개 맞을 것 같습니다.
ㅇ 朴泰權위원
20사단이 광주로 이동한 시간은 며칠 몇시인지 혹시 기억하십니까?
ㅇ 증인 李熺性
아마 5월20일부터 21일 사이라고 기억합니다.
ㅇ 朴泰權위원
날짜는 맞습니다. 그런데 22일 몇시서 부터 이동을 시작했다고 생각하십니까?
ㅇ 증인 李熺性
정확한 시간까지는 기억하기 어렵습니다.
ㅇ 朴泰權위원
22시30분으로 육본에서 제출한 자료에 나타나 있읍니다.그런데 증인은 민화위에서 참고인서면진술에 20사단 병력은 주한·미연합군사령부의 지휘를 떠나 하시를 막론하고 계엄목적에 사용할 수 있다고 진술했읍니다. 지금도 변함이 없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ㅇ 朴泰權위원
그런데 미국무성 대변인이 1980년 5월22일 발표한 바에 따르면 20사단의 이동을 동의를 했읍니다. 그런데 또 82년 7월12일 [글라이스틴][뉴욕타임즈]에 기고한 글에서도 20사단은 광주이동을 허락했읍니다. 그런데 여기서 뭐가 문제냐 시차가 문제입니다. 5월18일 충정작전시 20사단장이었던 朴俊炳사단장은 월간지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읍니다. 주둔지에서 5월15일 이동을 시작해서 서울에 투입되었다 이랬습니다. 또 연합군사령부의 병력이동 및 지휘권이양은 5월16일 오후6시 이후로 되어 있읍니다라고 그 기고에서 이야기 하고 있읍니다. 증인은 이 시차에 대해서 어떻게 해명하시겠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제가 얘기할 수 있는 것은 그와같은 시차문제가 문제가 아니고요 그 20사단의 부대가 작전지휘권이 육군본부에 있었느냐 한미연합사에 있었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분명히 육군의 지휘하에 있었읍니다.
ㅇ 朴泰權위원
그러면 조금전에 증인이 답변한 24사단의 이동은 20일 22시30분이라는 것을 맞다고 하셨읍니다.
ㅇ 증인 李熺性
주둔지에서 서울에 나오는 것은 그 이전입니다.
ㅇ 朴泰權위원
그렇지요. 그것은 지금 이야기했고 광주로 이동할때의 상황입니다. 또 광주로 이동한 것은 연합군사령부의 승인은 5월22일 받았읍니다. 출동은 이미 지금 앞에서 얘기한 대로 20일 22시30분이라면 시차가 엄청나게 나는 것이지요? 그렇지요?
ㅇ 증인 李熺性
거기에는 무슨 착오가 있거나 문제가 있읍니다.
ㅇ 朴泰權위원
그렇습니까? 이런 문제는 비춰 볼 때 이미 광주에 투입되기 시작한 것은 그 얼마전에 오래전부터 모든 계획이 서있다고 증명할 수 있다고 보는데 증인 어떠십니까?
ㅇ 증인 李熺性
너무나 지나친 판단입니다.
ㅇ 朴泰權위원
지금 근거자료에서 나왔지않습니까. 군의 작전명령의 생명은 작전임무가 있어야 되고 작전명령시간이 있어야 되고 이동한 규모가 있어야 되고 모든 것이 나타나게 되어 있읍니다. 더구나 계엄시입니다. 아무리 능력이 없고 힘이 없다고 해서 그렇게 이 자리에서까지 변명하지 마십시오.다음에는 지금 발포명령에 대해서 또는 그 여러가지 문제들을 앞에서 여러 위원들이 지적했읍니다마는 저는 그 각도를 달리하겠읍니다.광주에 투입되는 시위진압 소위 5·18광주항쟁의 그 선량한 시민들에게 시위진압으로 투입된 병력에게 실탄을 지급한 것이 맞습니까. 잘못된 일입니까?
ㅇ 증인 李熺性
사실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을 제가 확인하라는 말씀입니까?
ㅇ 朴泰權위원
제가 다시한번 말씀드리겠읍니다.광주에 투입된 병력들이 투입될 때 실탄을 지급했읍니까 안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ㅇ 朴泰權위원
안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아니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모든 부대가 이동할 때 아무 상황이 없이 평시에 이동할 때에도 지휘관 재량에 의해서 실탄을 가져 갈 경우도 있고 안 가져갈 경우도 있읍니다. 그때 당시 그 지휘관이 어떻게 판단했는지 하는 것은 육군총장으로서는 모를 일입니다.
ㅇ 朴泰權위원
시위진압시에 총을 발사를 할 수 있읍니까 없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상황에 따라서는 자위권을 발동할 수 있읍니다.
ㅇ 朴泰權위원
자위권을 묻지 않았읍니다. 제가 다시 한번 묻겠읍니다.시위진압하러 들어갈 때 실탄을 지급합니까 안합니까?
ㅇ 증인 李熺性
시위를 진압할 때 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ㅇ 朴泰權위원
시위진압때 할 수도 있다?
ㅇ 증인 李熺性
예.
ㅇ 朴泰權위원
그러면 시위진압하러 가는 군인들이 그 무장한 것을 보면 또 작전임무에서도 보면 거의 표현이 폭도진압 소탕작전 사살 등 정말 우리 선량한 국민들로서는 듣기 거북한 용어들이 작전명령에 나타나 있읍니다. 더불어 광주에 투입된 공수여단의 병력들에게 최초에는 중대장까지만 10발씩 실탄을 지급했읍니다 그 후 소위 지금 증인이 이야기하는대로 시위민주항쟁군중이 많아지고 여러 가지 유언비어에 의해서 상황이 급박해지니까 투입되어 있던 공수여단의 사병들까지도 실탄을 지급해 달라고 아우성을 쳤읍니다. 그런데 이당시… 오늘 이 자리에서 밝히지는 않습니다마는 양식있는 지휘자들은 실탄지급을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특수한 사람은 이 실탄을 지급했읍니다. 이것은 증인하고 따지지는 않겠읍니다. 앞으로 우리 특위가 열리면서 그 대상자하고 따지겠읍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정말 이 사실을 하나 밝히고자 합니다.증인! 광주에 투입된 어느 여단 한 여단이 광주에 27일 소위 소탕작전 도청 주요건물들 시위진압을 하고 거기에 끝까지 항쟁하는 민주시민들을 소탕하기 위해서 무차별난사하면서 들어 갔읍니다.이것은 자위권이 아닙니다. 또 교육도 시키지를 않았읍니다. 들어보십시오. M16 9,646발 M2O3 19발 수류탄 12발 TNT25[파운드] 권총 667발 M6O 925발 66LCW 260발 연막탄 18발 최루탄 150발 오색신호탄 70발 화염방사기 7대 통합계 1만1,792발을 쏘아댔읍니다. 여기에서 살아 남은 분들은 정말 영웅입니다.
그런데 이 전투상황보고가 양민 사살 1명으로 보고되었읍니다. 총알이 사람을 다 비켜 갔겠지요?증인! 우리 한번 잠시 숙연한 마음으로 이 엄청난 역사의 비극을 증인과 우리 다함께 한번 회개 합시다. 이제 다시는 이 땅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서도 안되고 우리는 오직 이 진실을 밝혀서 온 국민들이 이 당시에 피해보신분들을 어루만져 주고 사랑으로 대해주고 온 국민이 함께 기쁨을 나눌수 있는 새로운 역사창출과……이 당시에 피해를 보았던 광주민중항쟁의 그 위대한 시민들에게 명예를 회복시켜 주고 우리는 다 함께 이들을 뜨거운 손으로 안아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진실이 없이는 안됩니다. 진실을 밝힙시다. 앞으로 증인께서도 정말 진실을 밝히고 사심을 버리고 양심을 세워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비록 과거에 무능하고 능력이 없고 힘이 없어서 그러한 권좌에 있었다치지만 이제 앞으로 증인께서도 홀연히 진실을 밝히고 이 시대의 새로운 장을 열어 나가시도록 합시다. 증인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읍니다. 증인은 이러한 일들을 다 경험하고 후에 들었든 몰랐든 또는 오늘 이 자리에 와서 알았든 결과적으로 다 알았읍니다. 증인께서 이러한 일들을 오늘 이 자리에서 간단하게 증인의 심정을 역사와 국민앞에 짤막하게 말씀해 주시기 부탁합니다.
ㅇ 증인 李熺性
참 어려운 주문입니다. 당시 계엄사령관으로서 엄청난 일을 당하고 또 오늘 이와 같이 나와서 증언을 하게 된 것으로서 생각하는 것이 앞으로 이 땅에 계엄령이라 하는 것이 하달되지 않도록 되어야 되겠다 하는 것을 절실히 느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온 국민이 법질서를 지키고 혼란한 사회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겠느냐 그런 생각을 합니다.
ㅇ 朴泰權위원
이상입니다.
ㅇ 위원장 文東煥
예. 수고하셨읍니다.([위원장!]하는 이 있음)예.
ㅇ 吳景義위원
한 말씀만 의사진행발언을 하겠읍니다. 지금 밤늦도록 우리 동료위원 여러분들께서 많은 수고들을 하시고 또한 증인 李熺性씨도 늦은 밤까지 이렇게 고생을 하시는데 도저히 본위원이 이런 사황으로 청문회가 계속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이 들어서 위원장님께 좀더 의사진행을 청문회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증인에게 성실하지 못한 답변이나 또는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그런 저의가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좀더 성실한 답변을 할 수 있도록 촉구를 해 주십사 하는 말씀을 드리면서 지금까지 증인께서는 대부분 모르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리고 본위원이 생각하기로는 좀 결례의 얘기일지는 모르나 책임을 져야 될 부분은 모르는 것이고 책임과 전혀 관계가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적당히 넘어가시는 것으로 이해가 되는데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 모든 국민은 이 자리를 지켜 보시고 계십니다. 이런 청문회를 하려면은 아예 때려치우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는 생각이 본위원은 듭니다. 물론 견해차이는 있겠읍니다마는 지금까지 광주시민은 죽었고 또 청문회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잘 해서 국민들앞에 우리는 밝혀 드려야 될 임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으로서 밤늦도록 내일까지 청문회를 계속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10명이 죽었든 193명이 죽었든 1,000명이 죽었든 사람은 죽어서 이미 그 선량한 백성들이 흙이 된 지가 오래인데 총한방도 쏜 사람이 없읍니다. 죽인 사람은 없어! 아까 증인이 말씀하시기를 타박상입은 사람까지 뭐한 280명정도를 아신다고 그랬는데 우리는 이 청문회를 하는 목적이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것입니다.
시종 저런 상태로써 답변을 하신다면은 이 청문회의 의의가 어디에 있겠느냐 국회를 능멸하던 그런 타성을 버리지 못하고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동료위원 우리를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겠느냐 국회를 어떻게 알고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을 어떻게 알기에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모른다 기억이 안 난다 이런 식으로는 안 됩니다. 겨우 군인들이 오판을 해서 자기네끼리 쏴 가지고 열두사람 죽인 것은 밝혀졌읍니다. 계속해서 증인을 이런 상황으로 이끌어 가지 말아 주시기를 위원장님께 부탁을 드리고 좀더 성실한 답변을 들을 수 있도록 촉구해 주시기를 부탁말씀을 드리면서 마칩니다.
ㅇ 위원장 文東煥
吳위원의 심정을 충분히 알겠으면서도 똑같은 심정이었읍니다.그래서 아까 얘기 시작되기 전에 제가 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