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15
[군 투입 일지]5월 18일
본문
5월 18일
- 전북 금마에 주둔하던 특전사 제7여단(여단장 준장 신우식, 2군 배속) 제 33, 35대대 82/604(장교/사병 이하 생략), 전남대 도착. 도서관, 총학생회실 등에서 철야를 하던 학생들을 급습, 곤봉과 군화발로 구타 후 체포.
02:00
- 제33대대(대대장 권승만 중령) 45/321, 전남대와 광주교대 점령 완료. 교내에 있던 학생 69명 체포.
- 제35대대(대대장 김일옥 중령)39/283, 조선대와 전남대 점령 완료. 학생 43명 체포.
02:26
- 제33,35대대, 31사단 96연대에 배속. (31사단 전투상황보고(이하 31사단 전투상보라 약칭)
02:29
- 31사단 96연대, 사단 잠정부대 배속받아 전남대.조선대를 제외한 각 대학 점령.
호남신학대 3/42
서원보건전문대 3/35
동신전문대 3/27
대건신학대 3/29
서강전문대 3/32
성인경상전문대 2/47
기독간호전문대 3/35
송원전문대 2/47
- 31사단 96연대, 광주시내 방송국 점령. KBS 2/40, MBC 1/20, CBS 1/10, VOC 1/10(전일방송). (31사단 전투상보)
02:20 계엄포고문의 접수
- 포고문 접수 및 하달 / 전국 계엄령 확대 실시에 따른 조치사항 학교 병력배치
전북 14개 학교 52/ 660(01:29)
전남 20개 학교 114/1132(02:29)
주모자 검거: 전북 46명 중 6명 전남 22명 중 8명
학교에서 체포인원 : 전남대 69명, 조선대 43명, 전북대 34명, 원광대 23명.
(전투병과 교육사령부(이하 전교사 작전일지라 약칭, 광주 치평동 소재, 흔히 상무대라 부름)
12:45
- 7공수 33대대, 31사 96연대로부터 가톨릭센터 앞 데모대 진압 명령 수령. (특전사 전투상보)
시간미상
- 공수특전사령관(정호용 소장)은 광주일원의 사태가 격렬해져 심각하다는, 제7여단장 신우식 준장으로부터 현지보고를 듣고, 제3공수 특전여단(여단장 최세창 준장)에게 광주지역에 계엄군을 출동시킬지 모르는 형편이니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기하라는 지시를 하고 C-54 특별기를 타고 광주로 향했다.(특전사령관 정호용 소장은 육사동기인 노태우 장군과 함께 각각 제7공수, 제9공수 특전여단의 창설여단장으로 2년 반 동안 재임하고, 그리고 그다음에 특전사령부 참모장으로 약 1년여 간 근무함. 정호용 사령관이 제7여단의 여단장으로 있을 때, 같은 육사동기인 전두환 장군은 최전방의 수도 방어부대인 제1사단의 사단장이었다.) 광주에 도착한 정호용 사령관은 제7여단장 신준장으로부터 지금까지의 광주 일원의 사태에 관한 보고를 받은 다음 곧장 육군 전투병과 교육사령관(전교사) 윤흥정 장군과 부사령관 김기석 장군을 만나 대책을 논의했다. (윤흥정 장군은 정호용 장군의 육사 선배로 평소 친분이 두터운 사이) 윤흥정 장군이 정호용 장군에게, "이거 양상이 대단히 틀리게 돌아가는군."
정호용 장군이 윤흥정 장군에게, "중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계엄확대 조치에도 이렇게 소요가 계속된다면 가만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차라리 계엄군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초기에 군중들의 심리를 가라앉혀야 옳지 않겠읍니까?"
정호용 장군이 다시 진언, "그런데 광주시내의 기관장들이 대책을 협의하는데 그걸 보니까 이번 광주시민 이나 학생들의 데모가 오히려 정당한 것인 양 분위기가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호용 사령관은 광주 현지의 모든 상황을 점검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갔 다. (말, 1988.5)
시간미상
- 서울 : 이때 주영복 국방장관, 이희성 계엄사령관,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중 정부장 서리 등 군수뇌부가 모여 광주사태에 관한 대책회의를 열었다. 여기에서 정호용 사령관이 광주상황에 대한 자세한 브리핑을 하면서 제3공수여단과 제7공수여단을 동시에 증파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전두환 장군은, "20사단도 함께 진입시키는 게 좋겠어. 계엄군이 집중적으로 나서면 그만큼 이 쪽의 시위가 위력적일 테니까."
이때 제9사단장인 백운택 소장이 전두환 장군에게 '제가 광주에서 희생하겠다'고 자기도 보내줄 것을 진언했으나 보류됐음. (제11공수여단(여단장 최웅 준장)은 정호용 사령관의 특별명령으로 이미 광주에 진주해, 제11여단의 4개 대대가 2개 대대씩 나뉘어 각각 전남대, 조선대에 배치되어 있었다.) (말, 1988.5)
15:50
- 7공수 35대대 26/196, 충장로 출동. (특전사 충정작전 보고)
* "오후 4시경 충장로 1가에 있는 당구장에서 친구들과 당구를 치고 있는데 공수 2명이 곤봉을 들고 험악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손에 초크가 묻지 않은 사람을 분류하여 곤봉으로 후려치기 시작했다. 그런 후 광주우체국 앞으로 끌고 갔다. 우체국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잡혀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잠시 후 공수들은 그들을 트럭에 싣고 갔다." (구술 : 조훈철, 현사연 조사)
- 충장로 입구, 전남대생 1백여 명 경찰과 투석전. 공원에서 분산된 6백여 명 도청 쪽으로 이동중 경찰 분쇄, 주모자 검거중. (계엄사 상황일지)
13:10
- 군사령부에 군사령관 작전지도차 내방.(말, 1988. 8)
- 7공수 35대대, 31사 96연대로부터 도청 앞 데모대 진압 명령 수행. (특전사 전투상보)
15:00
- 계엄군 38/294명 투입, 시내 진압작전 실시(7공수).
가톨릭센타:33대대(35/367)
충 장 로:33대대(26/172)
16:00
- 시위군중 해산(체포 337명). (말, 1988. 8)
- 이때 제35대대는 금남로 좌우측, 충장로 등을 차단, 군중을 해산시키고 데모 군중 2백73명을 체포, 연행. (말 1988.5)
- 7공수 33대대 38/294, 가톨릭센터 투입. 가두 데모대 강력저지 및 분산.(31사 전투상보, 특전사 전투상보)
15:40
- 7공수 33대대 38/294, 가톨릭센터 투입. 가두 데모대 강력저지 및 분산.(31사 전투상보, 특전사 전투상보)
15:50
- 7공수 35대대 26/196, 충장로 출동. (특전사 충정작전 보고) * "오후 4시경 충장로 1가에 있는 당구장에서 친구들과 당구를 치고 있는데 공 수 2명이 곤봉을 들고 험악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손에 초크가 묻지 않은 사람을 분류하여 곤봉으로 후려치기 시작했다. 그런 후 광주우체국 앞으로 끌고 갔다. 우체국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잡혀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잠시 후 공 수들은 그들을 트럭에 싣고 갔다." (구술 : 조훈철, 현사연 조사) - 충장로 입구, 전남대생 1백여 명 경찰과 투석전. 공원에서 분산된 6백여 명 도청 쪽으로 이동중 경찰 분쇄, 주모자 검거중. (계엄사 상황일지)
- 33대대 금남로 이동. 35대대 충장로 이동. (특전사 충정작전 보고) - 광주일고 입구 금남로상 횡단보도, 진압봉과 총검으로 무장한 공수부대, 해산 방송과 함께 무자비한 진압 개시. 체포명령과 함께 도망가는 행인까지 무차별 구 타 체포. (김영택, 10일간의 취재수첩, 사계절(1988). 이하 10일간의 취재수첩이 라 약칭)
- 33대대 금남로 이동. 35대대 충장로 이동. (특전사 충정작전 보고) - 광주일고 입구 금남로상 횡단보도, 진압봉과 총검으로 무장한 공수부대, 해산 방송과 함께 무자비한 진압 개시. 체포명령과 함께 도망가는 행인까지 무차별 구 타 체포. (김영택, 10일간의 취재수첩, 사계절(1988). 이하 10일간의 취재수첩이 라 약칭)
16:20
- 3백여 명의 시위대 동명파출소 습격, 유리창 50여 장 파손, 시장관사 투석, 지산파출소 쪽으로 이동중(연행32명). (계엄사 상황일지)
16:25 수경사 계엄협의회의 결과보고
일시:1980. 5. 18 16:00 - 17:00
장소:수경사 계엄분소
대상:계엄사무소장, 참모장, 서울시장, 중앙정보부 서울지부장, 서울시 교육감, 서울시경국장, 지방병무청장, 서울체신청장, 합동수사단장, 문교부 대학교육국장, 서울지방 국세청장, 서울세관장, 보안사령부 정보처장, 보안사령부 치안처장
내용:전국 비상계엄 및 계엄업무 시행지침 하달
계엄분소장 훈시 요지
1. 비상계엄 선포의 배경(정치, 사회, 안보)
2. 비상계엄하의 과업
가. 정의로운 사회 구현
권력형 부조리의 척결
부정 정치인 및 범법자 처벌
나. 새로운 정치질서 확립
참신한 정치풍토 조성
용공주의 철저히 분쇄
다. 학원 정상화
면학 저해요소 과감히 제거
제도적 모순 개혁 단행
라. 안보태세 강화
안보논쟁 불가
3. 부처별 요망사항
가. 시청:부조리 척결, 공무원 기강 확립
나. 시경:사회기강 확립, 폭력 경제사범 적극 검거
다. 교육:학원 정상화 방안 연구
라. 합수단 및 검찰:포고령 위반자 즉각 구속, 부조리 척결 및 기강 확립에 수사력 동원
마. 당부사항:군민 일체감으로 국가의 난국 타개 대국민 선도의 선봉 사회기풍 진작(계엄사 상황일지)
16:30.
- 33대대 작전종료(금남로 시위진압- 편집자주). 103명 체포, 31사 헌병대에 인 계. (특전사 충정작전 보고)
- 특전사 11여단 (여단장 준장 최웅) 여단본부 260명 광주로 이동. C-123 수송 기 5대에 분승, K-16기지 출발. 도착과 동시에 2군 작전통제하에. (계엄사 상황 일지)
19:00
- 한.미 연합군사령관, 18일 오후 7시 급거 귀임.
위컴사령관은 이날 오산 공군기지에 도착, 헬기편으로 유엔군 사령부로 돌아왔 다. 주한유엔군 사령부는 위컴 사령관의 조기 귀임에 대해 '한국사태와 관련이 있다'고 밝혔다. 위컴 사령관은 최근 한반도 주변정세 및 한국내의 사태 등에 대 해 워싱턴 당국과 협의하기 위해 귀국, 오는 27일에 귀임할 예정이었다. (조선일보, 5.20)
- 35대대 작전종료(충장로 일대 시위진압- 편집자주). 173명 체포, 31사 헌병대 에 인계. (특전사 충정작전 보고)
- 31사단 작전회의, 5.18 04:00부로 7공수 33대대는 31사단에, 35대대는 공수여 단에 배속, 중요지점에 거점 병력 배치. (특전사전투상보, 시청 상황일지)
23:00
- 군사령부가 제11여단 작전통제 지시. (말, 1988. 8)
23:20
- 야간배치 완료
-경찰서 파출소 및 도로 교차지점:36개 지점
-계엄군 1개 지대(1/10)와 경찰 2개 분대(24명)로 합동배치(30명 규모) (말 ,1988. 8)
23:40
- 31사단 작전회의 재개최, 33대대 광주역 점령 임무부여. (특전사 전투상보)
시간미상
- 광주시내 전역과 직장예비군 무기 및 탄약 회수, 군부대에 보관 : 무기 4,717정, 탄약 115만 발.
- 분산 무기고 탄약, 군부대 및 경찰서에 보관 : 55만 발 - 무기고 접근자 발포 승인 건의. (31사 지시 80-1)
- 복무규율에 의거 지휘관 재량 실시토록 지시. (말 1988. 8)
- 전북 금마에 주둔하던 특전사 제7여단(여단장 준장 신우식, 2군 배속) 제 33, 35대대 82/604(장교/사병 이하 생략), 전남대 도착. 도서관, 총학생회실 등에서 철야를 하던 학생들을 급습, 곤봉과 군화발로 구타 후 체포.
02:00
- 제33대대(대대장 권승만 중령) 45/321, 전남대와 광주교대 점령 완료. 교내에 있던 학생 69명 체포.
- 제35대대(대대장 김일옥 중령)39/283, 조선대와 전남대 점령 완료. 학생 43명 체포.
02:26
- 제33,35대대, 31사단 96연대에 배속. (31사단 전투상황보고(이하 31사단 전투상보라 약칭)
02:29
- 31사단 96연대, 사단 잠정부대 배속받아 전남대.조선대를 제외한 각 대학 점령.
호남신학대 3/42
서원보건전문대 3/35
동신전문대 3/27
대건신학대 3/29
서강전문대 3/32
성인경상전문대 2/47
기독간호전문대 3/35
송원전문대 2/47
- 31사단 96연대, 광주시내 방송국 점령. KBS 2/40, MBC 1/20, CBS 1/10, VOC 1/10(전일방송). (31사단 전투상보)
02:20 계엄포고문의 접수
- 포고문 접수 및 하달 / 전국 계엄령 확대 실시에 따른 조치사항 학교 병력배치
전북 14개 학교 52/ 660(01:29)
전남 20개 학교 114/1132(02:29)
주모자 검거: 전북 46명 중 6명 전남 22명 중 8명
학교에서 체포인원 : 전남대 69명, 조선대 43명, 전북대 34명, 원광대 23명.
(전투병과 교육사령부(이하 전교사 작전일지라 약칭, 광주 치평동 소재, 흔히 상무대라 부름)
12:45
- 7공수 33대대, 31사 96연대로부터 가톨릭센터 앞 데모대 진압 명령 수령. (특전사 전투상보)
시간미상
- 공수특전사령관(정호용 소장)은 광주일원의 사태가 격렬해져 심각하다는, 제7여단장 신우식 준장으로부터 현지보고를 듣고, 제3공수 특전여단(여단장 최세창 준장)에게 광주지역에 계엄군을 출동시킬지 모르는 형편이니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기하라는 지시를 하고 C-54 특별기를 타고 광주로 향했다.(특전사령관 정호용 소장은 육사동기인 노태우 장군과 함께 각각 제7공수, 제9공수 특전여단의 창설여단장으로 2년 반 동안 재임하고, 그리고 그다음에 특전사령부 참모장으로 약 1년여 간 근무함. 정호용 사령관이 제7여단의 여단장으로 있을 때, 같은 육사동기인 전두환 장군은 최전방의 수도 방어부대인 제1사단의 사단장이었다.) 광주에 도착한 정호용 사령관은 제7여단장 신준장으로부터 지금까지의 광주 일원의 사태에 관한 보고를 받은 다음 곧장 육군 전투병과 교육사령관(전교사) 윤흥정 장군과 부사령관 김기석 장군을 만나 대책을 논의했다. (윤흥정 장군은 정호용 장군의 육사 선배로 평소 친분이 두터운 사이) 윤흥정 장군이 정호용 장군에게, "이거 양상이 대단히 틀리게 돌아가는군."
정호용 장군이 윤흥정 장군에게, "중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계엄확대 조치에도 이렇게 소요가 계속된다면 가만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차라리 계엄군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초기에 군중들의 심리를 가라앉혀야 옳지 않겠읍니까?"
정호용 장군이 다시 진언, "그런데 광주시내의 기관장들이 대책을 협의하는데 그걸 보니까 이번 광주시민 이나 학생들의 데모가 오히려 정당한 것인 양 분위기가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호용 사령관은 광주 현지의 모든 상황을 점검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갔 다. (말, 1988.5)
시간미상
- 서울 : 이때 주영복 국방장관, 이희성 계엄사령관,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중 정부장 서리 등 군수뇌부가 모여 광주사태에 관한 대책회의를 열었다. 여기에서 정호용 사령관이 광주상황에 대한 자세한 브리핑을 하면서 제3공수여단과 제7공수여단을 동시에 증파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전두환 장군은, "20사단도 함께 진입시키는 게 좋겠어. 계엄군이 집중적으로 나서면 그만큼 이 쪽의 시위가 위력적일 테니까."
이때 제9사단장인 백운택 소장이 전두환 장군에게 '제가 광주에서 희생하겠다'고 자기도 보내줄 것을 진언했으나 보류됐음. (제11공수여단(여단장 최웅 준장)은 정호용 사령관의 특별명령으로 이미 광주에 진주해, 제11여단의 4개 대대가 2개 대대씩 나뉘어 각각 전남대, 조선대에 배치되어 있었다.) (말, 1988.5)
15:50
- 7공수 35대대 26/196, 충장로 출동. (특전사 충정작전 보고)
* "오후 4시경 충장로 1가에 있는 당구장에서 친구들과 당구를 치고 있는데 공수 2명이 곤봉을 들고 험악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손에 초크가 묻지 않은 사람을 분류하여 곤봉으로 후려치기 시작했다. 그런 후 광주우체국 앞으로 끌고 갔다. 우체국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잡혀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잠시 후 공수들은 그들을 트럭에 싣고 갔다." (구술 : 조훈철, 현사연 조사)
- 충장로 입구, 전남대생 1백여 명 경찰과 투석전. 공원에서 분산된 6백여 명 도청 쪽으로 이동중 경찰 분쇄, 주모자 검거중. (계엄사 상황일지)
13:10
- 군사령부에 군사령관 작전지도차 내방.(말, 1988. 8)
- 7공수 35대대, 31사 96연대로부터 도청 앞 데모대 진압 명령 수행. (특전사 전투상보)
15:00
- 계엄군 38/294명 투입, 시내 진압작전 실시(7공수).
가톨릭센타:33대대(35/367)
충 장 로:33대대(26/172)
16:00
- 시위군중 해산(체포 337명). (말, 1988. 8)
- 이때 제35대대는 금남로 좌우측, 충장로 등을 차단, 군중을 해산시키고 데모 군중 2백73명을 체포, 연행. (말 1988.5)
- 7공수 33대대 38/294, 가톨릭센터 투입. 가두 데모대 강력저지 및 분산.(31사 전투상보, 특전사 전투상보)
15:40
- 7공수 33대대 38/294, 가톨릭센터 투입. 가두 데모대 강력저지 및 분산.(31사 전투상보, 특전사 전투상보)
15:50
- 7공수 35대대 26/196, 충장로 출동. (특전사 충정작전 보고) * "오후 4시경 충장로 1가에 있는 당구장에서 친구들과 당구를 치고 있는데 공 수 2명이 곤봉을 들고 험악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손에 초크가 묻지 않은 사람을 분류하여 곤봉으로 후려치기 시작했다. 그런 후 광주우체국 앞으로 끌고 갔다. 우체국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잡혀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잠시 후 공 수들은 그들을 트럭에 싣고 갔다." (구술 : 조훈철, 현사연 조사) - 충장로 입구, 전남대생 1백여 명 경찰과 투석전. 공원에서 분산된 6백여 명 도청 쪽으로 이동중 경찰 분쇄, 주모자 검거중. (계엄사 상황일지)
- 33대대 금남로 이동. 35대대 충장로 이동. (특전사 충정작전 보고) - 광주일고 입구 금남로상 횡단보도, 진압봉과 총검으로 무장한 공수부대, 해산 방송과 함께 무자비한 진압 개시. 체포명령과 함께 도망가는 행인까지 무차별 구 타 체포. (김영택, 10일간의 취재수첩, 사계절(1988). 이하 10일간의 취재수첩이 라 약칭)
- 33대대 금남로 이동. 35대대 충장로 이동. (특전사 충정작전 보고) - 광주일고 입구 금남로상 횡단보도, 진압봉과 총검으로 무장한 공수부대, 해산 방송과 함께 무자비한 진압 개시. 체포명령과 함께 도망가는 행인까지 무차별 구 타 체포. (김영택, 10일간의 취재수첩, 사계절(1988). 이하 10일간의 취재수첩이 라 약칭)
16:20
- 3백여 명의 시위대 동명파출소 습격, 유리창 50여 장 파손, 시장관사 투석, 지산파출소 쪽으로 이동중(연행32명). (계엄사 상황일지)
16:25 수경사 계엄협의회의 결과보고
일시:1980. 5. 18 16:00 - 17:00
장소:수경사 계엄분소
대상:계엄사무소장, 참모장, 서울시장, 중앙정보부 서울지부장, 서울시 교육감, 서울시경국장, 지방병무청장, 서울체신청장, 합동수사단장, 문교부 대학교육국장, 서울지방 국세청장, 서울세관장, 보안사령부 정보처장, 보안사령부 치안처장
내용:전국 비상계엄 및 계엄업무 시행지침 하달
계엄분소장 훈시 요지
1. 비상계엄 선포의 배경(정치, 사회, 안보)
2. 비상계엄하의 과업
가. 정의로운 사회 구현
권력형 부조리의 척결
부정 정치인 및 범법자 처벌
나. 새로운 정치질서 확립
참신한 정치풍토 조성
용공주의 철저히 분쇄
다. 학원 정상화
면학 저해요소 과감히 제거
제도적 모순 개혁 단행
라. 안보태세 강화
안보논쟁 불가
3. 부처별 요망사항
가. 시청:부조리 척결, 공무원 기강 확립
나. 시경:사회기강 확립, 폭력 경제사범 적극 검거
다. 교육:학원 정상화 방안 연구
라. 합수단 및 검찰:포고령 위반자 즉각 구속, 부조리 척결 및 기강 확립에 수사력 동원
마. 당부사항:군민 일체감으로 국가의 난국 타개 대국민 선도의 선봉 사회기풍 진작(계엄사 상황일지)
16:30.
- 33대대 작전종료(금남로 시위진압- 편집자주). 103명 체포, 31사 헌병대에 인 계. (특전사 충정작전 보고)
- 특전사 11여단 (여단장 준장 최웅) 여단본부 260명 광주로 이동. C-123 수송 기 5대에 분승, K-16기지 출발. 도착과 동시에 2군 작전통제하에. (계엄사 상황 일지)
19:00
- 한.미 연합군사령관, 18일 오후 7시 급거 귀임.
위컴사령관은 이날 오산 공군기지에 도착, 헬기편으로 유엔군 사령부로 돌아왔 다. 주한유엔군 사령부는 위컴 사령관의 조기 귀임에 대해 '한국사태와 관련이 있다'고 밝혔다. 위컴 사령관은 최근 한반도 주변정세 및 한국내의 사태 등에 대 해 워싱턴 당국과 협의하기 위해 귀국, 오는 27일에 귀임할 예정이었다. (조선일보, 5.20)
- 35대대 작전종료(충장로 일대 시위진압- 편집자주). 173명 체포, 31사 헌병대 에 인계. (특전사 충정작전 보고)
- 31사단 작전회의, 5.18 04:00부로 7공수 33대대는 31사단에, 35대대는 공수여 단에 배속, 중요지점에 거점 병력 배치. (특전사전투상보, 시청 상황일지)
23:00
- 군사령부가 제11여단 작전통제 지시. (말, 1988. 8)
23:20
- 야간배치 완료
-경찰서 파출소 및 도로 교차지점:36개 지점
-계엄군 1개 지대(1/10)와 경찰 2개 분대(24명)로 합동배치(30명 규모) (말 ,1988. 8)
23:40
- 31사단 작전회의 재개최, 33대대 광주역 점령 임무부여. (특전사 전투상보)
시간미상
- 광주시내 전역과 직장예비군 무기 및 탄약 회수, 군부대에 보관 : 무기 4,717정, 탄약 115만 발.
- 분산 무기고 탄약, 군부대 및 경찰서에 보관 : 55만 발 - 무기고 접근자 발포 승인 건의. (31사 지시 80-1)
- 복무규율에 의거 지휘관 재량 실시토록 지시. (말 198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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