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특집Ⅱ12주년 맞는 5·18항쟁의 현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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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Ⅱ12주년 맞는 5·18항쟁의 현주소
고통의 세월 속'잊혀져 가는 진실'지켜가
강요된 화해의 그늘 아래 후유증 앓기도
12주년 째를 맞는'광주 문제'는 어느덧 '역사의 장'으로 밀려난 듯한 느낌이다. 13대 국회에서 뜨거운 관심을 모았던 '광주 청문회' 지난해 관련 당사자 일부에게 지급된 '광주 보상금'으로 광주 문제가 '해결' 됐다는 것이 당국의 입장이다. 그 동안 광주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해 왔던 '5월 관련 단체들'도 광주 보상금 수령 이후 그 운동 폭이 눈에 띄게 약화됐다. 이러한 변화는 그 동안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졌던 관련 단체들이 최근 '5월 민중 항쟁 연합'이라는 단일 조직으로 통합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80년 5월 광주는 용광로였다. 뜨겁게 달아오르던 '5월 광주'에서 분노의 목소리로 사자후를 토하던 사람들, 무장을 한 채 직접 계엄군과 격전을 벌였던 사람들‥‥ 이들은 12 년이 지난 지금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그들의 현주소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과연 '광주는 끝났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
광주 민중 항쟁의 '주역'은 말할 것도 없이 그때 항쟁에 참여했던 '대다수 광주 시민들' 이다, 황금동의 술집 아가씨들로부터 대학생, 운전기사, 구두닦이,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이름마저 알려지지 않은 숱한 '민중'이다. 이미 잘 알려진 바대로 광주 항쟁은 계획된 조직 집단이 주도한 '봉기'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계엄군의 잔혹한 학살을 목격하고 의분을 참지 못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졌던 용감한 광주 시민들이 바로 그 주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항쟁의 주역은 '광주 시민들'
그러나 광주 항쟁은 끝까지 '무정부적'이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비록 계엄군의 폭력에 저항하는 자연발생적인 동기에서 촉발됐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방향성을 가진 '지도 집단' 이 형성되고 차차 조직력을 갖춰 가기 시작했다. 비록 산발적이기는 하지만 여러 분야에서 전체적인 사태의 흐름을 잡아가려는 노력들이 진행됐다. 도청 안에서 최후의 항쟁을 이끌었던 투쟁 위원회, 조직적인 무장 부대를 형성했던 기동 타격대와 지역 방위 조직, 항쟁의 열기를 모으면서 시민들의 여론을 주도해 나간 선전 홍보 조직, 그리고 계엄 당국과 첨예하게 대치하면서 협상을 벌여 나갔던 시민 수습 위원회등이 바로 그런 부류에 속한다. 따라서 '항쟁의 주역'을 이야기할 때 우선 이들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아침 7시, 전화 신호음이 한참이나 울린 다음에야 가까스로 수화기를 든 정해직씨의 목소리에는 아직도 깊은 잠이 묻어 있었다.
"전교조 해직 교사들의 복직 문제로 오늘 새벽 4시에야 겨우 집에 들어왔습니다. 서울에서 회의가 있어서 밤늦게 끝나고 조금 전에 내려와 잠들었습니다. 요즘 생활이 마냥 그래요. "
아침 일찍 걸러 온 전화 속에서 '5월 주역들의 근황'을 묻는 질문에 다소 어리 둥절해 한다. 벌써 5월이 다가왔느냐는 투다. 아직도 50만원 짜리 사글세 단칸방을 면치 못하고 있
으면서도 지난번 광주보상금 수령을 '거부' 했던 정해직씨(42)는 요즘 자신을 포함, 해직 교사들의 복직을 위해 여기 저기 뛰어다니느라 여념이 없다.
정씨는 광주 항쟁 달시 최후의 항전을 주장했던 도청 항쟁 지도부의 일원으로 민원 실장을 맡았다. 그 무렵 초등학교 교사 였던 그는 사태가 발생하자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레 항쟁에 가담했다. 5월 25일 새벽, 계엄군이 도청을 점령했을 때 체포돼 '내란 주요임무 종사자'로 분류됐다. 온갖 고초를 겪은 다음 1981년 4월 3일, 항쟁 관련자 입부에 대한 사면 조가 취해지면서 석방됐다. 그후83 년9월 복권과 동시에 초등 학교 교사로 복직됐다가 89년 5월 전교조 사태로 다시 해직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는 광주·전남 교사 협의회 부회장을 거쳐 전교조 초등 위원회 전국 위원장(1991)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전교조 광주 지부서 활동하면서 동료 교사들이 다달이 모아주는 25만원으로 매월 활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다. 정씨는 지난해 치러진 광주 시의회 의원 선거 때 전교조의 지지를 기반으로 광주 서구에서 출마했으나 재야 운동권 인사들의 난립으로 낙선의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윤상원 상'으로 부활
정해직씨와 함께 도청에서 최후의 항전 지도부를 구성했던 주요 인물들은 윤상원(대변인), 정상용(외무 위원장), 김영철(기획 실장), 이양현(기획 위원), 윤강옥(기획 위원), 김종배, 허규정 등 당시 30세 전후의 학생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청년들이다.
항쟁 전기간을 통해 핵심적으로 상황을 주도해 나간 것으로 알려진 윤상원은5월 28일 새벽 도청이 함락 당할 때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피살돼 망월 묘역에 안장됐다. 1982년 2월 20일, 아직 5공 정권의 서슬이 퍼렇게 살아 있을 때 망월동 5월 묘역에서는 눈길을 끄는 행사가 벌어졌다. 생전에 윤상원과 친밀하게 지냈던 광주 지역 재야 인사들이 모여 그와 원혼을 달래기 위한 '영혼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신부는 그와 함께 '들불 야학'을 통해 노동운동에 헌신하다 먼저 사망, 망월동 일반 묘역에 안장됐던 전남대 후배 고 박기순 이었다. 그들은 죽어서 나마 서로 묘역을 마주한 채 오늘도 망월동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정작 윤상원 열사의 현주소는 망월 묘역만이 아니다. 80년대 중반 이후 광주 항쟁의 진상이 밝혀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재야 노동 운동권에서 폭발적인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특히 57년 이후 노동운동이 활성화되면서 그는 전국적으로 광주 항쟁의 주역 가운데 간장 화려한 스톳라이트이트를 받았다. 전국 노동자 신문에서는 윤상원 문학상을 제정, 매년 포상하고 있는가 하면 전국 각지의 노동조합에서도 그가 묻혀 있는 묘역을 둘러보기 위해 단체로 일부러 망월동엘 들르는 일이 빈번했다. 광주에서도 그의 선배이자 그를 운동권으로 이끌었던 김상윤씨(45·하심 의료기 상사 대표) 등이 주도해 지난90년 '윤상원 상'을 만들어 금년에 2회째를 맞고 있다.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이 상은 사회 운동과 학술 분야에 공적이 뛰어난 인물을 선정, 매년 3백 만원의 상금을 수여한다.
아직도 정신병원 신세
김영철씨(44·당시 YWCA신협 근무)는 가장 불우한 경우에 속한다. 그는 도청에서 체포돼 상무대 계엄사 영창에 수감, 수사 과정에서 입은 상처로 아직까지 '정신 착란 질환'을 심하게 앓고 있다. 항쟁 직전까지만 해도 그는Y 신협에 근무하면서 광주 광천동 빈민가에서 가난한 지역 주인과 함께 생활하며 빈민 운동을 벌였다. 또한 노동자들을 위해 '들불 야학' 을 개설, 윤상원 등과 함께 자신의 젊음을 바쳤다. 그리나 지금은 '폐인'이 되다시피 한 상태다. 매년 몇 차례씩 나주 국립 정신 병원을 들락날락 하는 생활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정상인으로서 생활이 완전히 망가져 버린 채 생애의 절반을 고통스럽게 맞아 가고 있는 셈이다.
김씨의 동료이자 당시 서울 청계천 둥지에서 노동운동에 투신했던 이양현씨(42)는 지금을 광주 신역 부근에 사무실을 둔 '정우 환경'이라는 공해 설비 업체의 '대표'로 변모 했다. 그는 현재 한겨레신문 광주 지사장도 겸하면서 광주 노동 연구소(소장 민동곤) 이사를 맡아 활동하고 있다.
윤강옥씬(41)는 70년대 중반 민청학련사건에 관련된 이래 계속 재야 활동을 해 왔던 인물로 당시 전남대에 복적 했다가 항쟁에 참여했다. 이번 14대 총선에서 광주 북구에 출사표를 던졌으나 공천을 따내지 못해 의회 진출이 좌절됐다. 그는 80년대 중반 이후 줄곧 광주 민중 항쟁 동지 회 회장직을 맡으면서 광주 지역 재야와 동교동을 긴밀히 접맥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말에는 광주 민중 항쟁 연구소(이사장 이광우·전남대 교수)를 설립, 자신이 소장 직을 맡아 운영중 이다.
그런가 하면 정상용씨는 지난 13대 총선에서 광주 지역 재야 인사 영입 케이스인 광주 항쟁의 대표자 격으로 당시 평민당 공천을 받아 국회에 진출했다. 이번 14대 총선 에서도 지역구인 광주 서구 갑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 무난히 금배지를 달았다. 그는 13대 국회 회기 중에 열린 '광주 청문회'에서 각종 현장 자료를 입수, 정치하여 야당 의원들에게 제공하는 등 막후 실무 사령탑 역할을 톡톡히 수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민들의 오해 괴롭다'
김종배씨(당시 조선대 법대 4년)는 그때 도청에서 학생 수습 대책 의원 가운데 무기 반납을 반대한 강경파로 최후 항전 때는 투쟁 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았었다. 그는 출감 후 광주 충장로에서 약국을 경영하다 지난 13대 총선 때 김영삼 대표가 이끌던 민주당에 영입됐다. 영입과 동시에 전국구 예비 후보로 지명됐으나 지역구 의석수 미달로 의회 진출에는 실패했다. 그의 민주당 입당은 대통령 선거 직후 지역감 정이 예민한 문제로 부각되던 때 이뤄져 한동안 광주 지역 재야 인사들 사이에 큰 파문을 던지기도 했다. 그후 그는 서울로 거주지를 옳기는 등 광주지 역 인사들과 불편한 관계 때문에 거의 연락을 끊다시피 지냈다. 당시 그가 민주당에 입당한 데는 김상현씨의 권유가 주효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번 14대 총선에서도 서울 서대문에서 출마한 민주당 김상현 후보 선거 대책 본부 사무국장을 맡아 활동했다. 김종배씨와 조선대 동창이자 항쟁 당시 끝까지 함께 행동했던 허규정씨(당시 조선대 학생)는 현재 충장로 1가 조선대 동창 회관 빌딩 내에 있는 충장 소비자 협동 조합을 운영하고 있다.
그밖에도 당시 도청에서 활동했던 주요 인물로는 골재 차량 운전사이면서 상황 실장을 맡았던 박남선씨 (39) , 전남대 농대 생으로 학생 수습 위원장을 맡아 계엄군과 협상을 벌여
나갔던 김창길씨(37) 등을 들 수 있다. 박씨는 5· 18광주 민중 항쟁 구속자 동지회 회장직을 맡아 활동하면서 지난해 통합된 '5·18광주 민중 항쟁 연합'(상임 의장 정동년·이하 '오민연')에, 참여 공동 의장직을 맡고 있다. 현재는 사업을 하면서 생계를 꾸리고 있다.
김창길씨는 현재 서울에서 평범한 회사원으로 생활하고 있다. 항쟁 당시 '무조건적인 무기 회수와 계엄사 협상'을 주장하는 '온건파' 입장을 취해 관련자들로부터 '광주 시민의 피를 팔아먹을 투항 주의자'로 몰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난 90년 5월 현대사 사료 연구소(소장 송기숙)가 발간한 '광주 5월 민중 항쟁 사료 전집'에서 구술을 통해 자신의 순수한 생각이 '오해'를 받았다면서 최근 심정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따지고 보면 나는 광주 항쟁의 이중 피해자다‥‥ 나는 계엄군의 스파이도 아니고 첫날 결정된 수습 안을 바탕으로 활동했을 뿐인데, 내가 마치 광주 시민의 피즐 팔아먹은 역적으로 치부되는 것은 도저히 납득이 안 된다. 나는 당시 상황에서 광주 시민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고자 그런 입장을 취했을 따름이다‥‥ 지난 십여 년간 오해와 비난을 받았지만 나는 아무말없이 내 생활에만 충실해 왔다. 함께 고생하고 피해 본 사람들끼리 포용해 주고 이해하려는 태도가 아쉽다. '
이문옥 후보 추대 운동 참여
김창길씨와 비슷한 처지에 처했던 인물로는 당시 장휴등씨(52)다. 광주 서중과 서울대를 졸업한 장비는 항쟁 당시 광주에서 전자 대리점을 경영하면서 정치가로서의 꿈을 키우던 중 항쟁 초기에 구성된 시민 수습 위원회에 참가한다. 그는 '광주 시민의 피해를 줄여야 한다'는 생각에서 계엄사와 지속적인 협상을 벌이면서 '무기 회수'를 주장했다. 그러나 남동성당을 중심으로 한 김성용 신부, 조아라 YWCA회장 등재야 인사들로 구성된 수습 위원회가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어용'으로 몰렸다. 그는 항쟁이 끝난 후 당국으로부터 5· 18수습에 공로가 컸다면서 표창장을 주겠 다거나 민정당에서 공천을 주겠다는 제의가 있었으나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고 한다. 한때는 항쟁에 대한 후유증으로 정신적인 방황을 겪으며 기도원에 들어가기도 했으며 이런저런 이유로 자신이 인생의 목표로 삼았던 '정치인의 길'마저 포기 한 채 요즘은 광주를 떠나 사업에만 열중하고 있다. 그 역시 김창길씨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생각하는 옳은 길'을 택해 행동했을 뿐인데 많은 광주 시민들로부터 오해와 비난을 받았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다'고 한다.
이들과는 다르게 '계엄사의 사과와 학생·시민을 처벌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선행되지 않고는 수습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 계엄사와 끝까지 대립했던 시민 수습 위원회는 대개 종교인, 교수. 변호사, 교사 등 광주 지역 재야 인사들로 구성됐다. 이 가운데 홍남순 변호사(80)는 지금도 역시 본업에 매진하고 있으며 1985년 5·18기념 사업 추진 위원회(광주 궁동 소재) 발족 당시 초대 위원장을 역임했다. 조아라 여사(80)는 지금도 역시 YWCA명예 회장직을 맡고 있으면서 이번 14대 총선에서 '광주 시민 후보 추대 위원회'를 결성, '이문옥 돌풍'으 일으키는 데 주역을 담당했다.
항쟁 사료집 펴낸 수습 위원
송기숙 전남대 교수는 한국 현대사 사료 연구소를 설립, 그 첫 사업으로 지난 1990년 5월 '광주 민중 항쟁 사료 전집'을 펴냈다. 이 책은 항쟁에 참여했던 광주 시민 5백명의 체험 험담을 구술 형태로 채록한 1천6백52쪽의 커다란 분량으로 5월 항쟁의 실상을 밝히는 데 기념비적인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는 갑오 동학 농민 전쟁을 작품화 한 장편소설 '녹
두 장군'을 집필 중이며 언젠가는 자신이 직접 체험했던 광주 항쟁도 소설화하겠다는 원대한 구상을 조심스레 이야기한다. 명노근 전남대 교수는 광주 항쟁 이후 한동안 턱수염을 길게 길러 주목을 받기도 했다. 5·18기념 사업 추진 위원회 전 위원장을 맡았으며 전남대 차기 총장 후보로도 물망에 오르고 있다.
수습위 대변인으로 맹활약을 했던 김성용 신부와 조철현신부(순천 저전동 천주교)는 여전히 성직에 있다. 특히 조철현 신부는 지난 광주 청문회 때 국회에서 증인으로 나서 '성직자가 겪은 광주 체험'으로 많은 주목을 끌기도 했다.
민주당 박석무 의원은 이번에 치러진 14대 총선 에서도 13대에 이어 무안 지역에서 무난히 당선됐다. 수습 위원 가운데 이기홍 변호사는 지난해 광역 선거 때 민주당 공천을 받고 해남 지역에서 출마, 도의원으로 당선돼 의정 활동을 벌이고 있다. 야당 활동을 하던 정태성씨 역시 민주당 공천을 받아 광주시 의회에 진출했다. 그런가 하면 윤영규씨(58·당시 광주상고 교사)는 복직 후 다시 해직돼 전교조 전국 위원장(1-3대)직을 맡아 교육 민주화 운동의 선봉아 섰다. 지금은 작년 국민연합 공동 의장 당시부터 장기간 수배 상태로 당국에 쫓기는 몸이다. 윤광장씨(58·광주 항쟁 직후 미국으로 망명한 윤한봉씨의 친형) 역시 전교조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그는 이번 14대 총선 때 당시 수습 위 활동에 참가했던 서명원씨(현 빛고을 신문 전무, 전남대 보건소 근무)와 더불어 '광주 시민 후보 추대 위원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연극 통해 '광주 진실' 알리기도
항쟁 기간 중 도청 앞 분수대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연일 장사진을 이뤘다. 매일 시민 궐기대회가 열렸다.
이 궐기 대회를 주도하고 준비했던 이들은 당시 전남대 출신으로 이 지역 민중 문화 운동을 이끌었던 극단 '광대'였다. 이때 궐기대회를 책임지고 준비해 나갔던 박효선씨(39)는 현재 광주 지역에서 '극단 토박이'를 이끌고 있다. 그는 학원 강사로 생계를 꾸려 가면서 '민족극 운동'에 앞장 서고 있다. 박씨는 지난 88년 5월 광주를 형상화한 '금희의 5월' 89년에는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을 다룬 '부미방' , 90년에는 여성 노동자 해고 사건을 다룬 노동극 '딸들아 일어나라' 등을 공연, 주목을 끌기도 했다. 특히 그의 작품 '금희의 5월'은 전국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켜 전국 연극 협회가 뽑은 한국 신극80년사 40개 작품 가운데 하나로 선정될 만큼 이미 '고전적' 위치를 획득했다.
그때 궐기 대회에서 거의 매일 사회를 보아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던 두 명의 남녀 주인공 학생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김태종씨(36)는 극단 광대 멤버이자 전남대 국문과 학생으로 도청 분수대에서 사회를 보았는데 현재 광주 양영 학원에서 국어과 강사를 맡고 있으며, 이현주씨(34)는 학교를 졸업한 후 전남 도내 모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기동 타격대 대장으로 당시 무장 부대의 핵심이었던 윤석루씨(36)는 한동안 김대중 민주당 대표의 경호원을 지내다 현재는 광주 증심사 입구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등 사업에 열중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김태찬, 나일성씨 등 기동 타격 대원들의 상당수는 대개 5월 관련 단체에서 끊임없이 활동 해 오고 있다. 당시 학운동 지역에서 1백 여명의 자체 무장 부대를 편성, 시민군 으로 지역 방위를 펼쳤던 예비군 소대장 문장우씨(42)는 광주 민중 항쟁 동지회 부 회장직을 역임하고 현재는 광주 동구 기초 의회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당시 '투사 회보'를 통해 고립된 광주 시민들에게 발빠른 소식을 전했던 그룹은 노동 야학 '들불'팀이다. 야학 교사였던 전용호씨는 지난해 빛고을 신문 창간 작업에 참여했다가 지금은 선물 판촉이나 선거 이벤트를 겸한 개인 사업에 전념하고 있으며, 김경옥·고희숙씨 등은 해직 교사로 전교조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임낙평씨는 지난해 2년간의 노력 끝에 '윤상원 전기'를 펴냈으며 현재는 광주·전남 환경 공해 연구회에서 활동한다. 야학 노동자였던 윤순호씨는 지금도 여전히 하남공단의 중소 제조업 현장 근로자로 생활하고 있고 그의 동료 박용준은 항쟁 마지막날 밤 YMCA에서 항전하다 계엄군의 총탄에 사망, 지금은 망월묘역에 묻혀있다.
월북한 5·18부상자
항쟁 기간 동안 여성들의 활동 또한 두드러졌다. 밥을 짓는 일부터 부상자 치료, 플래카드 제작, 가두 방송, 모금 운동 등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여성 활동은 당시 '송백회' 라는, 70년대 구속 자들의 옥바라지를 위해 만들어진 여성 조직의 멤버들이 상당수 참여했다. 정현애씨(김상윤씨 부인)는 현재 해직 교사로 전교조 광주 지부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이윤정씨는 지난 광역 선거 때 광주 시의회 의원에 당선됐고, 정향자씨는 가톨릭 노동 상담소에서 활동하면서 광주 지역 노동 조합 협의회, 광주 여성 노동자회 등에 관여, 노동 운동에 헌신하고 있다.
또한 당시 무용 학원 강사였다가 우연히 광주 항쟁에 참여해 차량을 타고 광주 시내 전역을 돌아다니며 애절한 목소리로 심금을 울렸던 전옥주씨(43)는 지난 88년 2월에 열린 '광주민화위'와 89년 '광주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했으며, 지난 대통령 선거 때는 김대중 후보 선거 운동을 하다 괴한3명에게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그녀는 이번 14대 총선 에서도 민주당 후보의 지원 유세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밖에도 당시 고등학생 신분으로 두려움 없이 투쟁에 참여했던 대동 고교 출신 고 전영진 열사의 친구 윤기권씨(29)는 5·18부상자 동지 회원으로 활동하던 중 지난해 초 광주 보상금 수령 직후 홀연히 월북을 한 것으로 알려져 큰 충격을 안겨 주기도 했다. 그의 대동고 동창이자 항쟁 당시 YMCA에서 마지막 밤을 함께 보내다 체포됐던 이덕준씨(29)는 그후 전남대에 진학하였으나 노동 현장에 투신, 현재는 광주 노동 청년회에서 활동 중이다. 이씨는 윤기권씨의 월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 친구는 평소에 약간 정신이 이상했습니다. 물론 그와 썩 가깝게 지내지는 않았지만 제가 알기로는 통일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좀 엉뚱한 면이 있었지요. 광주 항쟁의 충격으로 정신이상 증세가 있다고 해서 보상금도 남달리 더 많은 금액을 받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
부상자 회원끼리 결혼도
항쟁 당시에는 주도적 역할을 하지는 않았을 지라도 광주 항쟁과 깊게 관련된 인물들도 적지 않다. 가령 정동년씨(52)는 80년 5월 17일 자정에 사전 예비 검속돼 '광주 사태 수괴'로 몰린 경우다.
그는 현재 통합된 '5월 민중 항쟁 연합' 상임 의장과 지난해 말 전국적으로 조직 통합을 이루었던 재야 단체 '민주주의민족통일 광주·전남 연합' 공동 의장을 맡고 있다. 정씨와 마찬가지로 사전 예비 검속의 대상이었으나 항쟁이 끝나자 수배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 현재까지 귀국하지 못하고 있는 윤한봉씨 같은 이들도 그런 경우에 속한다. 그리고 당시 전남대 총 학생회장이었던 고 박관현 열사도 수배 생활 중 체포돼 지난 83년 광주 교도소에서 복역하다 옥사하고 말았다.
수사 과정에서 '학원 내란 팀'으로 주목받았던 전남대 학생회 기획실 멤버들인 한상석씨(37·롯데 백화점 광주 지사 경영,) 노준현씨(37· 출판업), 송서태씨(37· 정상용 의원 보좌관), 김양래씨(37· 건설 회사 이사), 박재성씨(37· 전교조 광주 지부 사무국장) 등도 각 분야에서 사회적 위치를 다져 가고 있다.
'광주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말이 실감나는데는 '부상자 회'다. 그들은 특히 '광주의 오늘 '이 있기까지 항쟁 이후 '온몸으로 투쟁' 해 왔다. 5·18광주 민중 항쟁 부상자 동지회를 이끌었던 '애꾸눈' 이지현 전 회장은 이번에 통합된 '5·18광주 민중 항쟁 연합'의 사무 처장을 맡았다. 그는 생계를 농협에 근무하는 아내에게 맡긴 채 온통 '5월 운동'에만 전념하고 있다. 운전 기사였던 양치홍씨 (38·부상자 동지회 조직 부장)당시 오른쪽 어깨에 박힌 총탄을 제거하지 못한 채 오늘까지 살아가고 있다. 그는 시내버스 운전을 하다 얼마전 자진 퇴사를 해 버렸다.
그때 입은 상처로 팔이 저려 사고의 위험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직장을 바꿔 보기 위해 늦은 나이에 올해 광주 대학 법학과에 입학했으나 4식구의 생계가 막연한 실정이다. 심영의씨(35 부상자 동지회 사무국장)도 후유증으로 마땅한 직업을 갖지못한 채 5월 관련 단체 일에만 전념하고 있다.
부상자 회원들 가운데 서채원 씨 (32), 김선문씨(32)등은 기초 의원 선거에 당선, 현재 광주 서구 의회에서 둘 다 활동 중이다.
그런가 하면 홍금숙씨(30 항쟁 당시 지원동에서 공수부대의 습격으로 차량에 탄 사람들이 몰살당했으나 유일하게 생존해 청문회 때 증언했던 인물)와 손석기씨(31)는 부상자 회 활동 중 지난 90년 서로 뜻이 맞아 결혼까지 골인했다.
서슬이 퍼렇던 80년대 초반 '유족회 '를 결성, 온몸으로 탄압 상황을 돌파하면서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투쟁했던 전 유족 회장 전계량씨는 현재 광주 시의회 의원 신분이다.
단일 조직으로 통합한 '5월 단체'
5월 관련 단체 역시 광주 항쟁 12주년 째를 맞는 오늘 많은 변모를 겪었다. 지난해 광주 보상금 지급 이후 10여개에 이르던 단체들 가운데 일부는 회원들의 활동이 미비하거나 거의 정지된 곳도 있다.
이런 사정을 반영 올 1월15일 유족 회를 비롯 10개의 관련 단체들이 '5·18 광주 민중 항쟁 연합'(상임 의장 정동년)으로 통합, 새롭게 조직을 정비했다. 여기에 참여한 단체는 다음과 같다. 5·18광주 민중 항쟁 유족회(회장 윤석동), 부상자 동지회 (심인식), 민주 기사 동지회(이행기), 항쟁 동지회 (이윤정), 교도소 생존자 동지회(김재언), 행 불자회(김상학), 청년 동지 회 (문명호), 상이 유족회(정춘식) 등이다.
여기에 박찬봉씨가 회장으로 있는 5·18민주화 운동 유족회, 박옥재 씨가 이끌었던 5·18광주 의거 부상자 회 (회장 박영순)등 2개 단체는 빠졌다. 항쟁 당시에도 그랬듯이 현재도 여전히 '5월 광주'문제를 바라보는 견해 차이 때문이다. 특히 이들 단체는 지난 83년 당국이 망월동에서 5월 묘역을 강제로 분산시키려 기도했을 때 1천만원의 위로금을 받고 묘지 이전에 자진 협조했거나, 지난 88년 정부에서 광주 문제를 논의하고자 관변 인사 중심으로 구성했던 '민주화합추진위원회'에 박옥재씨(당시 부상자회 회장)가 5월 관련 단체로서는 유일하게 참가했다.(바로 이 문제 때문에 부상자 회가 양분됐다)는 전력 때문에 아직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불신을 받고 있다. 박옥재씨는 이번 14대 총선에서 민자당 전국구 후보 물망에 오른 것으로 신문지상에 거론 됐으나 결국 공천을 받지는 못했다.
광주 항쟁의 주역들, 물론 여기에 언급되어야 할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빠져 있다. 그들은 불과 10여년 만에'폭도'에서 '민주 투사'로 변모됐다. 그러나 자신들이 당시에 목숨을 걸고 싸웠던 '민주화'가 이룩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 보인다. 때문에 상당수의 사람들은 '철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한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광주 보상금'의 수령을 '거부' 했다.
그리고 항쟁 관련 당사자들은 지금도 대부분 육체적 혹은 정신적 고통 속에서 세월을 보내고 있다. 어떤 이들은 몸 속 에다 아직도 실탄 파편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으며 상당수의 사람들은 지금도 그때 입은 충격으로 정신병원을 들락거리고, 그들의 단란했던 가정은 파괴되어 버렸다. 민주당 내 '광주 특위'는 아직 해체되지 않았고, 광주 시의에서도 '광주 특위'가 구성됐다.
그런가 하면 광주 시민을 학살했던 발포 책임자는 '처벌'은커녕 '규명'마저도 아직 오리무중 상태다. 더구나 '광주문제 해결'을 공언하는 현 집권 세력의 수장은 아직도 망월동 5월 묘역에는 발길도 들여놓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광주 청문회'와 '보상금 지급'으로 광주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이 억지로'종결'을 강요당하고 있는 '광주 문제의 현주소', 아니 '광주항쟁 주역들의 현주소'인지도 모른다.
고통의 세월 속'잊혀져 가는 진실'지켜가
강요된 화해의 그늘 아래 후유증 앓기도
12주년 째를 맞는'광주 문제'는 어느덧 '역사의 장'으로 밀려난 듯한 느낌이다. 13대 국회에서 뜨거운 관심을 모았던 '광주 청문회' 지난해 관련 당사자 일부에게 지급된 '광주 보상금'으로 광주 문제가 '해결' 됐다는 것이 당국의 입장이다. 그 동안 광주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해 왔던 '5월 관련 단체들'도 광주 보상금 수령 이후 그 운동 폭이 눈에 띄게 약화됐다. 이러한 변화는 그 동안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졌던 관련 단체들이 최근 '5월 민중 항쟁 연합'이라는 단일 조직으로 통합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80년 5월 광주는 용광로였다. 뜨겁게 달아오르던 '5월 광주'에서 분노의 목소리로 사자후를 토하던 사람들, 무장을 한 채 직접 계엄군과 격전을 벌였던 사람들‥‥ 이들은 12 년이 지난 지금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그들의 현주소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과연 '광주는 끝났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
광주 민중 항쟁의 '주역'은 말할 것도 없이 그때 항쟁에 참여했던 '대다수 광주 시민들' 이다, 황금동의 술집 아가씨들로부터 대학생, 운전기사, 구두닦이,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이름마저 알려지지 않은 숱한 '민중'이다. 이미 잘 알려진 바대로 광주 항쟁은 계획된 조직 집단이 주도한 '봉기'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계엄군의 잔혹한 학살을 목격하고 의분을 참지 못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졌던 용감한 광주 시민들이 바로 그 주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항쟁의 주역은 '광주 시민들'
그러나 광주 항쟁은 끝까지 '무정부적'이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비록 계엄군의 폭력에 저항하는 자연발생적인 동기에서 촉발됐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방향성을 가진 '지도 집단' 이 형성되고 차차 조직력을 갖춰 가기 시작했다. 비록 산발적이기는 하지만 여러 분야에서 전체적인 사태의 흐름을 잡아가려는 노력들이 진행됐다. 도청 안에서 최후의 항쟁을 이끌었던 투쟁 위원회, 조직적인 무장 부대를 형성했던 기동 타격대와 지역 방위 조직, 항쟁의 열기를 모으면서 시민들의 여론을 주도해 나간 선전 홍보 조직, 그리고 계엄 당국과 첨예하게 대치하면서 협상을 벌여 나갔던 시민 수습 위원회등이 바로 그런 부류에 속한다. 따라서 '항쟁의 주역'을 이야기할 때 우선 이들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아침 7시, 전화 신호음이 한참이나 울린 다음에야 가까스로 수화기를 든 정해직씨의 목소리에는 아직도 깊은 잠이 묻어 있었다.
"전교조 해직 교사들의 복직 문제로 오늘 새벽 4시에야 겨우 집에 들어왔습니다. 서울에서 회의가 있어서 밤늦게 끝나고 조금 전에 내려와 잠들었습니다. 요즘 생활이 마냥 그래요. "
아침 일찍 걸러 온 전화 속에서 '5월 주역들의 근황'을 묻는 질문에 다소 어리 둥절해 한다. 벌써 5월이 다가왔느냐는 투다. 아직도 50만원 짜리 사글세 단칸방을 면치 못하고 있
으면서도 지난번 광주보상금 수령을 '거부' 했던 정해직씨(42)는 요즘 자신을 포함, 해직 교사들의 복직을 위해 여기 저기 뛰어다니느라 여념이 없다.
정씨는 광주 항쟁 달시 최후의 항전을 주장했던 도청 항쟁 지도부의 일원으로 민원 실장을 맡았다. 그 무렵 초등학교 교사 였던 그는 사태가 발생하자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레 항쟁에 가담했다. 5월 25일 새벽, 계엄군이 도청을 점령했을 때 체포돼 '내란 주요임무 종사자'로 분류됐다. 온갖 고초를 겪은 다음 1981년 4월 3일, 항쟁 관련자 입부에 대한 사면 조가 취해지면서 석방됐다. 그후83 년9월 복권과 동시에 초등 학교 교사로 복직됐다가 89년 5월 전교조 사태로 다시 해직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는 광주·전남 교사 협의회 부회장을 거쳐 전교조 초등 위원회 전국 위원장(1991)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전교조 광주 지부서 활동하면서 동료 교사들이 다달이 모아주는 25만원으로 매월 활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다. 정씨는 지난해 치러진 광주 시의회 의원 선거 때 전교조의 지지를 기반으로 광주 서구에서 출마했으나 재야 운동권 인사들의 난립으로 낙선의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윤상원 상'으로 부활
정해직씨와 함께 도청에서 최후의 항전 지도부를 구성했던 주요 인물들은 윤상원(대변인), 정상용(외무 위원장), 김영철(기획 실장), 이양현(기획 위원), 윤강옥(기획 위원), 김종배, 허규정 등 당시 30세 전후의 학생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청년들이다.
항쟁 전기간을 통해 핵심적으로 상황을 주도해 나간 것으로 알려진 윤상원은5월 28일 새벽 도청이 함락 당할 때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피살돼 망월 묘역에 안장됐다. 1982년 2월 20일, 아직 5공 정권의 서슬이 퍼렇게 살아 있을 때 망월동 5월 묘역에서는 눈길을 끄는 행사가 벌어졌다. 생전에 윤상원과 친밀하게 지냈던 광주 지역 재야 인사들이 모여 그와 원혼을 달래기 위한 '영혼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신부는 그와 함께 '들불 야학'을 통해 노동운동에 헌신하다 먼저 사망, 망월동 일반 묘역에 안장됐던 전남대 후배 고 박기순 이었다. 그들은 죽어서 나마 서로 묘역을 마주한 채 오늘도 망월동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정작 윤상원 열사의 현주소는 망월 묘역만이 아니다. 80년대 중반 이후 광주 항쟁의 진상이 밝혀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재야 노동 운동권에서 폭발적인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특히 57년 이후 노동운동이 활성화되면서 그는 전국적으로 광주 항쟁의 주역 가운데 간장 화려한 스톳라이트이트를 받았다. 전국 노동자 신문에서는 윤상원 문학상을 제정, 매년 포상하고 있는가 하면 전국 각지의 노동조합에서도 그가 묻혀 있는 묘역을 둘러보기 위해 단체로 일부러 망월동엘 들르는 일이 빈번했다. 광주에서도 그의 선배이자 그를 운동권으로 이끌었던 김상윤씨(45·하심 의료기 상사 대표) 등이 주도해 지난90년 '윤상원 상'을 만들어 금년에 2회째를 맞고 있다.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이 상은 사회 운동과 학술 분야에 공적이 뛰어난 인물을 선정, 매년 3백 만원의 상금을 수여한다.
아직도 정신병원 신세
김영철씨(44·당시 YWCA신협 근무)는 가장 불우한 경우에 속한다. 그는 도청에서 체포돼 상무대 계엄사 영창에 수감, 수사 과정에서 입은 상처로 아직까지 '정신 착란 질환'을 심하게 앓고 있다. 항쟁 직전까지만 해도 그는Y 신협에 근무하면서 광주 광천동 빈민가에서 가난한 지역 주인과 함께 생활하며 빈민 운동을 벌였다. 또한 노동자들을 위해 '들불 야학' 을 개설, 윤상원 등과 함께 자신의 젊음을 바쳤다. 그리나 지금은 '폐인'이 되다시피 한 상태다. 매년 몇 차례씩 나주 국립 정신 병원을 들락날락 하는 생활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정상인으로서 생활이 완전히 망가져 버린 채 생애의 절반을 고통스럽게 맞아 가고 있는 셈이다.
김씨의 동료이자 당시 서울 청계천 둥지에서 노동운동에 투신했던 이양현씨(42)는 지금을 광주 신역 부근에 사무실을 둔 '정우 환경'이라는 공해 설비 업체의 '대표'로 변모 했다. 그는 현재 한겨레신문 광주 지사장도 겸하면서 광주 노동 연구소(소장 민동곤) 이사를 맡아 활동하고 있다.
윤강옥씬(41)는 70년대 중반 민청학련사건에 관련된 이래 계속 재야 활동을 해 왔던 인물로 당시 전남대에 복적 했다가 항쟁에 참여했다. 이번 14대 총선에서 광주 북구에 출사표를 던졌으나 공천을 따내지 못해 의회 진출이 좌절됐다. 그는 80년대 중반 이후 줄곧 광주 민중 항쟁 동지 회 회장직을 맡으면서 광주 지역 재야와 동교동을 긴밀히 접맥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말에는 광주 민중 항쟁 연구소(이사장 이광우·전남대 교수)를 설립, 자신이 소장 직을 맡아 운영중 이다.
그런가 하면 정상용씨는 지난 13대 총선에서 광주 지역 재야 인사 영입 케이스인 광주 항쟁의 대표자 격으로 당시 평민당 공천을 받아 국회에 진출했다. 이번 14대 총선 에서도 지역구인 광주 서구 갑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 무난히 금배지를 달았다. 그는 13대 국회 회기 중에 열린 '광주 청문회'에서 각종 현장 자료를 입수, 정치하여 야당 의원들에게 제공하는 등 막후 실무 사령탑 역할을 톡톡히 수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민들의 오해 괴롭다'
김종배씨(당시 조선대 법대 4년)는 그때 도청에서 학생 수습 대책 의원 가운데 무기 반납을 반대한 강경파로 최후 항전 때는 투쟁 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았었다. 그는 출감 후 광주 충장로에서 약국을 경영하다 지난 13대 총선 때 김영삼 대표가 이끌던 민주당에 영입됐다. 영입과 동시에 전국구 예비 후보로 지명됐으나 지역구 의석수 미달로 의회 진출에는 실패했다. 그의 민주당 입당은 대통령 선거 직후 지역감 정이 예민한 문제로 부각되던 때 이뤄져 한동안 광주 지역 재야 인사들 사이에 큰 파문을 던지기도 했다. 그후 그는 서울로 거주지를 옳기는 등 광주지 역 인사들과 불편한 관계 때문에 거의 연락을 끊다시피 지냈다. 당시 그가 민주당에 입당한 데는 김상현씨의 권유가 주효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번 14대 총선에서도 서울 서대문에서 출마한 민주당 김상현 후보 선거 대책 본부 사무국장을 맡아 활동했다. 김종배씨와 조선대 동창이자 항쟁 당시 끝까지 함께 행동했던 허규정씨(당시 조선대 학생)는 현재 충장로 1가 조선대 동창 회관 빌딩 내에 있는 충장 소비자 협동 조합을 운영하고 있다.
그밖에도 당시 도청에서 활동했던 주요 인물로는 골재 차량 운전사이면서 상황 실장을 맡았던 박남선씨 (39) , 전남대 농대 생으로 학생 수습 위원장을 맡아 계엄군과 협상을 벌여
나갔던 김창길씨(37) 등을 들 수 있다. 박씨는 5· 18광주 민중 항쟁 구속자 동지회 회장직을 맡아 활동하면서 지난해 통합된 '5·18광주 민중 항쟁 연합'(상임 의장 정동년·이하 '오민연')에, 참여 공동 의장직을 맡고 있다. 현재는 사업을 하면서 생계를 꾸리고 있다.
김창길씨는 현재 서울에서 평범한 회사원으로 생활하고 있다. 항쟁 당시 '무조건적인 무기 회수와 계엄사 협상'을 주장하는 '온건파' 입장을 취해 관련자들로부터 '광주 시민의 피를 팔아먹을 투항 주의자'로 몰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난 90년 5월 현대사 사료 연구소(소장 송기숙)가 발간한 '광주 5월 민중 항쟁 사료 전집'에서 구술을 통해 자신의 순수한 생각이 '오해'를 받았다면서 최근 심정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따지고 보면 나는 광주 항쟁의 이중 피해자다‥‥ 나는 계엄군의 스파이도 아니고 첫날 결정된 수습 안을 바탕으로 활동했을 뿐인데, 내가 마치 광주 시민의 피즐 팔아먹은 역적으로 치부되는 것은 도저히 납득이 안 된다. 나는 당시 상황에서 광주 시민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고자 그런 입장을 취했을 따름이다‥‥ 지난 십여 년간 오해와 비난을 받았지만 나는 아무말없이 내 생활에만 충실해 왔다. 함께 고생하고 피해 본 사람들끼리 포용해 주고 이해하려는 태도가 아쉽다. '
이문옥 후보 추대 운동 참여
김창길씨와 비슷한 처지에 처했던 인물로는 당시 장휴등씨(52)다. 광주 서중과 서울대를 졸업한 장비는 항쟁 당시 광주에서 전자 대리점을 경영하면서 정치가로서의 꿈을 키우던 중 항쟁 초기에 구성된 시민 수습 위원회에 참가한다. 그는 '광주 시민의 피해를 줄여야 한다'는 생각에서 계엄사와 지속적인 협상을 벌이면서 '무기 회수'를 주장했다. 그러나 남동성당을 중심으로 한 김성용 신부, 조아라 YWCA회장 등재야 인사들로 구성된 수습 위원회가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어용'으로 몰렸다. 그는 항쟁이 끝난 후 당국으로부터 5· 18수습에 공로가 컸다면서 표창장을 주겠 다거나 민정당에서 공천을 주겠다는 제의가 있었으나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고 한다. 한때는 항쟁에 대한 후유증으로 정신적인 방황을 겪으며 기도원에 들어가기도 했으며 이런저런 이유로 자신이 인생의 목표로 삼았던 '정치인의 길'마저 포기 한 채 요즘은 광주를 떠나 사업에만 열중하고 있다. 그 역시 김창길씨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생각하는 옳은 길'을 택해 행동했을 뿐인데 많은 광주 시민들로부터 오해와 비난을 받았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다'고 한다.
이들과는 다르게 '계엄사의 사과와 학생·시민을 처벌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선행되지 않고는 수습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 계엄사와 끝까지 대립했던 시민 수습 위원회는 대개 종교인, 교수. 변호사, 교사 등 광주 지역 재야 인사들로 구성됐다. 이 가운데 홍남순 변호사(80)는 지금도 역시 본업에 매진하고 있으며 1985년 5·18기념 사업 추진 위원회(광주 궁동 소재) 발족 당시 초대 위원장을 역임했다. 조아라 여사(80)는 지금도 역시 YWCA명예 회장직을 맡고 있으면서 이번 14대 총선에서 '광주 시민 후보 추대 위원회'를 결성, '이문옥 돌풍'으 일으키는 데 주역을 담당했다.
항쟁 사료집 펴낸 수습 위원
송기숙 전남대 교수는 한국 현대사 사료 연구소를 설립, 그 첫 사업으로 지난 1990년 5월 '광주 민중 항쟁 사료 전집'을 펴냈다. 이 책은 항쟁에 참여했던 광주 시민 5백명의 체험 험담을 구술 형태로 채록한 1천6백52쪽의 커다란 분량으로 5월 항쟁의 실상을 밝히는 데 기념비적인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는 갑오 동학 농민 전쟁을 작품화 한 장편소설 '녹
두 장군'을 집필 중이며 언젠가는 자신이 직접 체험했던 광주 항쟁도 소설화하겠다는 원대한 구상을 조심스레 이야기한다. 명노근 전남대 교수는 광주 항쟁 이후 한동안 턱수염을 길게 길러 주목을 받기도 했다. 5·18기념 사업 추진 위원회 전 위원장을 맡았으며 전남대 차기 총장 후보로도 물망에 오르고 있다.
수습위 대변인으로 맹활약을 했던 김성용 신부와 조철현신부(순천 저전동 천주교)는 여전히 성직에 있다. 특히 조철현 신부는 지난 광주 청문회 때 국회에서 증인으로 나서 '성직자가 겪은 광주 체험'으로 많은 주목을 끌기도 했다.
민주당 박석무 의원은 이번에 치러진 14대 총선 에서도 13대에 이어 무안 지역에서 무난히 당선됐다. 수습 위원 가운데 이기홍 변호사는 지난해 광역 선거 때 민주당 공천을 받고 해남 지역에서 출마, 도의원으로 당선돼 의정 활동을 벌이고 있다. 야당 활동을 하던 정태성씨 역시 민주당 공천을 받아 광주시 의회에 진출했다. 그런가 하면 윤영규씨(58·당시 광주상고 교사)는 복직 후 다시 해직돼 전교조 전국 위원장(1-3대)직을 맡아 교육 민주화 운동의 선봉아 섰다. 지금은 작년 국민연합 공동 의장 당시부터 장기간 수배 상태로 당국에 쫓기는 몸이다. 윤광장씨(58·광주 항쟁 직후 미국으로 망명한 윤한봉씨의 친형) 역시 전교조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그는 이번 14대 총선 때 당시 수습 위 활동에 참가했던 서명원씨(현 빛고을 신문 전무, 전남대 보건소 근무)와 더불어 '광주 시민 후보 추대 위원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연극 통해 '광주 진실' 알리기도
항쟁 기간 중 도청 앞 분수대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연일 장사진을 이뤘다. 매일 시민 궐기대회가 열렸다.
이 궐기 대회를 주도하고 준비했던 이들은 당시 전남대 출신으로 이 지역 민중 문화 운동을 이끌었던 극단 '광대'였다. 이때 궐기대회를 책임지고 준비해 나갔던 박효선씨(39)는 현재 광주 지역에서 '극단 토박이'를 이끌고 있다. 그는 학원 강사로 생계를 꾸려 가면서 '민족극 운동'에 앞장 서고 있다. 박씨는 지난 88년 5월 광주를 형상화한 '금희의 5월' 89년에는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을 다룬 '부미방' , 90년에는 여성 노동자 해고 사건을 다룬 노동극 '딸들아 일어나라' 등을 공연, 주목을 끌기도 했다. 특히 그의 작품 '금희의 5월'은 전국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켜 전국 연극 협회가 뽑은 한국 신극80년사 40개 작품 가운데 하나로 선정될 만큼 이미 '고전적' 위치를 획득했다.
그때 궐기 대회에서 거의 매일 사회를 보아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던 두 명의 남녀 주인공 학생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김태종씨(36)는 극단 광대 멤버이자 전남대 국문과 학생으로 도청 분수대에서 사회를 보았는데 현재 광주 양영 학원에서 국어과 강사를 맡고 있으며, 이현주씨(34)는 학교를 졸업한 후 전남 도내 모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기동 타격대 대장으로 당시 무장 부대의 핵심이었던 윤석루씨(36)는 한동안 김대중 민주당 대표의 경호원을 지내다 현재는 광주 증심사 입구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등 사업에 열중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김태찬, 나일성씨 등 기동 타격 대원들의 상당수는 대개 5월 관련 단체에서 끊임없이 활동 해 오고 있다. 당시 학운동 지역에서 1백 여명의 자체 무장 부대를 편성, 시민군 으로 지역 방위를 펼쳤던 예비군 소대장 문장우씨(42)는 광주 민중 항쟁 동지회 부 회장직을 역임하고 현재는 광주 동구 기초 의회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당시 '투사 회보'를 통해 고립된 광주 시민들에게 발빠른 소식을 전했던 그룹은 노동 야학 '들불'팀이다. 야학 교사였던 전용호씨는 지난해 빛고을 신문 창간 작업에 참여했다가 지금은 선물 판촉이나 선거 이벤트를 겸한 개인 사업에 전념하고 있으며, 김경옥·고희숙씨 등은 해직 교사로 전교조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임낙평씨는 지난해 2년간의 노력 끝에 '윤상원 전기'를 펴냈으며 현재는 광주·전남 환경 공해 연구회에서 활동한다. 야학 노동자였던 윤순호씨는 지금도 여전히 하남공단의 중소 제조업 현장 근로자로 생활하고 있고 그의 동료 박용준은 항쟁 마지막날 밤 YMCA에서 항전하다 계엄군의 총탄에 사망, 지금은 망월묘역에 묻혀있다.
월북한 5·18부상자
항쟁 기간 동안 여성들의 활동 또한 두드러졌다. 밥을 짓는 일부터 부상자 치료, 플래카드 제작, 가두 방송, 모금 운동 등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여성 활동은 당시 '송백회' 라는, 70년대 구속 자들의 옥바라지를 위해 만들어진 여성 조직의 멤버들이 상당수 참여했다. 정현애씨(김상윤씨 부인)는 현재 해직 교사로 전교조 광주 지부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이윤정씨는 지난 광역 선거 때 광주 시의회 의원에 당선됐고, 정향자씨는 가톨릭 노동 상담소에서 활동하면서 광주 지역 노동 조합 협의회, 광주 여성 노동자회 등에 관여, 노동 운동에 헌신하고 있다.
또한 당시 무용 학원 강사였다가 우연히 광주 항쟁에 참여해 차량을 타고 광주 시내 전역을 돌아다니며 애절한 목소리로 심금을 울렸던 전옥주씨(43)는 지난 88년 2월에 열린 '광주민화위'와 89년 '광주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했으며, 지난 대통령 선거 때는 김대중 후보 선거 운동을 하다 괴한3명에게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그녀는 이번 14대 총선 에서도 민주당 후보의 지원 유세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밖에도 당시 고등학생 신분으로 두려움 없이 투쟁에 참여했던 대동 고교 출신 고 전영진 열사의 친구 윤기권씨(29)는 5·18부상자 동지 회원으로 활동하던 중 지난해 초 광주 보상금 수령 직후 홀연히 월북을 한 것으로 알려져 큰 충격을 안겨 주기도 했다. 그의 대동고 동창이자 항쟁 당시 YMCA에서 마지막 밤을 함께 보내다 체포됐던 이덕준씨(29)는 그후 전남대에 진학하였으나 노동 현장에 투신, 현재는 광주 노동 청년회에서 활동 중이다. 이씨는 윤기권씨의 월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 친구는 평소에 약간 정신이 이상했습니다. 물론 그와 썩 가깝게 지내지는 않았지만 제가 알기로는 통일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좀 엉뚱한 면이 있었지요. 광주 항쟁의 충격으로 정신이상 증세가 있다고 해서 보상금도 남달리 더 많은 금액을 받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
부상자 회원끼리 결혼도
항쟁 당시에는 주도적 역할을 하지는 않았을 지라도 광주 항쟁과 깊게 관련된 인물들도 적지 않다. 가령 정동년씨(52)는 80년 5월 17일 자정에 사전 예비 검속돼 '광주 사태 수괴'로 몰린 경우다.
그는 현재 통합된 '5월 민중 항쟁 연합' 상임 의장과 지난해 말 전국적으로 조직 통합을 이루었던 재야 단체 '민주주의민족통일 광주·전남 연합' 공동 의장을 맡고 있다. 정씨와 마찬가지로 사전 예비 검속의 대상이었으나 항쟁이 끝나자 수배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 현재까지 귀국하지 못하고 있는 윤한봉씨 같은 이들도 그런 경우에 속한다. 그리고 당시 전남대 총 학생회장이었던 고 박관현 열사도 수배 생활 중 체포돼 지난 83년 광주 교도소에서 복역하다 옥사하고 말았다.
수사 과정에서 '학원 내란 팀'으로 주목받았던 전남대 학생회 기획실 멤버들인 한상석씨(37·롯데 백화점 광주 지사 경영,) 노준현씨(37· 출판업), 송서태씨(37· 정상용 의원 보좌관), 김양래씨(37· 건설 회사 이사), 박재성씨(37· 전교조 광주 지부 사무국장) 등도 각 분야에서 사회적 위치를 다져 가고 있다.
'광주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말이 실감나는데는 '부상자 회'다. 그들은 특히 '광주의 오늘 '이 있기까지 항쟁 이후 '온몸으로 투쟁' 해 왔다. 5·18광주 민중 항쟁 부상자 동지회를 이끌었던 '애꾸눈' 이지현 전 회장은 이번에 통합된 '5·18광주 민중 항쟁 연합'의 사무 처장을 맡았다. 그는 생계를 농협에 근무하는 아내에게 맡긴 채 온통 '5월 운동'에만 전념하고 있다. 운전 기사였던 양치홍씨 (38·부상자 동지회 조직 부장)당시 오른쪽 어깨에 박힌 총탄을 제거하지 못한 채 오늘까지 살아가고 있다. 그는 시내버스 운전을 하다 얼마전 자진 퇴사를 해 버렸다.
그때 입은 상처로 팔이 저려 사고의 위험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직장을 바꿔 보기 위해 늦은 나이에 올해 광주 대학 법학과에 입학했으나 4식구의 생계가 막연한 실정이다. 심영의씨(35 부상자 동지회 사무국장)도 후유증으로 마땅한 직업을 갖지못한 채 5월 관련 단체 일에만 전념하고 있다.
부상자 회원들 가운데 서채원 씨 (32), 김선문씨(32)등은 기초 의원 선거에 당선, 현재 광주 서구 의회에서 둘 다 활동 중이다.
그런가 하면 홍금숙씨(30 항쟁 당시 지원동에서 공수부대의 습격으로 차량에 탄 사람들이 몰살당했으나 유일하게 생존해 청문회 때 증언했던 인물)와 손석기씨(31)는 부상자 회 활동 중 지난 90년 서로 뜻이 맞아 결혼까지 골인했다.
서슬이 퍼렇던 80년대 초반 '유족회 '를 결성, 온몸으로 탄압 상황을 돌파하면서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투쟁했던 전 유족 회장 전계량씨는 현재 광주 시의회 의원 신분이다.
단일 조직으로 통합한 '5월 단체'
5월 관련 단체 역시 광주 항쟁 12주년 째를 맞는 오늘 많은 변모를 겪었다. 지난해 광주 보상금 지급 이후 10여개에 이르던 단체들 가운데 일부는 회원들의 활동이 미비하거나 거의 정지된 곳도 있다.
이런 사정을 반영 올 1월15일 유족 회를 비롯 10개의 관련 단체들이 '5·18 광주 민중 항쟁 연합'(상임 의장 정동년)으로 통합, 새롭게 조직을 정비했다. 여기에 참여한 단체는 다음과 같다. 5·18광주 민중 항쟁 유족회(회장 윤석동), 부상자 동지회 (심인식), 민주 기사 동지회(이행기), 항쟁 동지회 (이윤정), 교도소 생존자 동지회(김재언), 행 불자회(김상학), 청년 동지 회 (문명호), 상이 유족회(정춘식) 등이다.
여기에 박찬봉씨가 회장으로 있는 5·18민주화 운동 유족회, 박옥재 씨가 이끌었던 5·18광주 의거 부상자 회 (회장 박영순)등 2개 단체는 빠졌다. 항쟁 당시에도 그랬듯이 현재도 여전히 '5월 광주'문제를 바라보는 견해 차이 때문이다. 특히 이들 단체는 지난 83년 당국이 망월동에서 5월 묘역을 강제로 분산시키려 기도했을 때 1천만원의 위로금을 받고 묘지 이전에 자진 협조했거나, 지난 88년 정부에서 광주 문제를 논의하고자 관변 인사 중심으로 구성했던 '민주화합추진위원회'에 박옥재씨(당시 부상자회 회장)가 5월 관련 단체로서는 유일하게 참가했다.(바로 이 문제 때문에 부상자 회가 양분됐다)는 전력 때문에 아직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불신을 받고 있다. 박옥재씨는 이번 14대 총선에서 민자당 전국구 후보 물망에 오른 것으로 신문지상에 거론 됐으나 결국 공천을 받지는 못했다.
광주 항쟁의 주역들, 물론 여기에 언급되어야 할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빠져 있다. 그들은 불과 10여년 만에'폭도'에서 '민주 투사'로 변모됐다. 그러나 자신들이 당시에 목숨을 걸고 싸웠던 '민주화'가 이룩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 보인다. 때문에 상당수의 사람들은 '철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한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광주 보상금'의 수령을 '거부' 했다.
그리고 항쟁 관련 당사자들은 지금도 대부분 육체적 혹은 정신적 고통 속에서 세월을 보내고 있다. 어떤 이들은 몸 속 에다 아직도 실탄 파편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으며 상당수의 사람들은 지금도 그때 입은 충격으로 정신병원을 들락거리고, 그들의 단란했던 가정은 파괴되어 버렸다. 민주당 내 '광주 특위'는 아직 해체되지 않았고, 광주 시의에서도 '광주 특위'가 구성됐다.
그런가 하면 광주 시민을 학살했던 발포 책임자는 '처벌'은커녕 '규명'마저도 아직 오리무중 상태다. 더구나 '광주문제 해결'을 공언하는 현 집권 세력의 수장은 아직도 망월동 5월 묘역에는 발길도 들여놓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광주 청문회'와 '보상금 지급'으로 광주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이 억지로'종결'을 강요당하고 있는 '광주 문제의 현주소', 아니 '광주항쟁 주역들의 현주소'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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