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망월동에 묻힌 생존자 이금영씨 - "망월동에 내 묘비가 세워질 때 몸은 광주 교도소에 있었다…
본문
망월동에 묻힌 생존자 이금영씨
"망월동에 내 묘비가 세워질 때 몸은 광주 교도소에 있었다"
사람이 땅속에 묻히고 동시에 살아 있을 수도 있는 것일까? 이 믿기 지 않는 ‘사실’ 비극이었다. 이씨의 어머니 윤춘한씨(57, 화순군 동면 대포리 1구) 가 아들의 시신을 찾은 건 항쟁 기간 중이었다.
"우리 금영이 시체를 찾은 때는 아직 그 사건 이 안 끝날 때 였지라 우리 식구들이 광주에 갔을 때는 공수부댄가 뭔가는 쫓겨가고 없었고 시민들이 었응께 .
광주에 난리가 나서 군인들이 사람들 다 죽여 분다고 흉흉한 소문이 났는디 우리 금영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수가 있어야제, 맘만 졸이다가 죽기로 하고 광주로 찾어 나섰지요, 광주에 있는 작은집 식구들하고 함께 시체가 있다는 도청으로 가서 봤는디 워메 피범벅이 된 우리 금영이가 죽어 있습디다. 키도 똑 같고 몸뚱이도 비슷해 처음에는 이마의 흉터를 찾았지요. 얼굴은 퉁퉁 부어 있는디 이마에 흉터는 그대로고 오른손 엄지 손구락 손톱이 툭 불거진 것도 똑 같습디다. 워메 내 불쌍한 자슥 그냥 보듬고는 목놓아 울었지요."
윤씨는 아들의 시신을 거두어 그해 5월 31일, 다른 수많은 피투성이의 주검들과 함에 망월묘역 에 안장했다. 이씨 의 묘앞엔『열사 이금영 지묘」란 묘비까지 세워졌고 결국 이씨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 넋으로 가족의 곁을 떠난 것이었다.
그러나 가족들이 망월동에 이씨를 묻고 눈물로 돌아서던 그날 진짜 이금영씨는 광주교도소에 있었다. 광주 교도소 여사(女舍) 옆 창고 속에서 공수 대원들의 무자비한 폭행으로 죽음과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세의 역사의식을 깨우친 공수대원의 방망이
80년 5월, 이씨는 가난한 노동자의 신분이었다. ‘그저 먹고 살기에 바쁜’ 나날이었다. 국민학교 졸업장 하나가 ‘빽’과 ‘밑천’의 전부인 이씨는 당시 광주에 있는 구백 정기 화물의 화물차 조수로 일하고 있었다. 박정희가 죽고 민주화의 열기가 거세게 타오르던 그때의 현실이 이씨에겐 큰 의미로 다가올 수 없었다. 세상에 대해서 깊이 생각지도 못한 열 일곱살의 어린 나이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의 격랑은 이씨를 피해 가지 않았다. 비극의 오월, 그 오월 광주의 울타리에서 이씨는 벗어날 수 없었다.
이 씨 의 ‘역사’는 18일 오후부터 시작됐다.
오후 갈아입을 옷을 가지러 고향인 화순 가기 위해 대인동 공용 터미널에 나갔던 이씨는 그 악명 높은 공수부대와 처음 만났다. 개찰구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무리의 군인들이 방망이를 휘두르며 터미널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눈에 띄는 사람이면 방망이로 머리와 어깨를 내리치며 악마와 같이 날뛰고 있었다. 덜컥 겁이 났지만 이씨 그대로 서 있었다. 죄 지은게 없어서 도망갈 이유도 없다는 게 이씨의 생각이었다.
그때 공수 대원 한 명이 이씨에게로 달려들었다. 갑자기 눈에 번개가 치는 것 같은 충격이 가해졌다. 이씨는 그 자리에 쓰러져 잠깐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아직 날뛰고 있는 공수 대원들이 보였다. 비틀거리며 일어나 무조건 터미널 밖으로 뛰었다. 무엇 때문에 자신이 도망가는 건지도 생각지도 않고 대인동 으슥한 골목길을 돌아 회사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죄도 없이 맞고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 때 처음 깨달 았습니다. 독재 권력이란 것이 그렇게 힘없고 가난한 사람만 골라 억압하고 못살게 구는 나쁜 집단이란 것은 그날 이후 시민들과 시위를 하면서 배우고 터득한 것입니다."
사무실로 돌아온 이씨는 분에 못 이겨 씩씩거리며 동료들에게 퉁퉁 부은 머리의 상처를 내보였다. 그것을 본 동료들이 혀를 찼다. 그리고 수많은 시민 · 학생들이 공수 대원의 방망이 이와 칼로 죽어 가고 잇다는 사실도 말해 주었다. 이씨 자신이 보고 겪은 것만으로도 그것은 사실이었다.
이씨는 집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거리로 나섰다. 그대로 앉아서 분노를 삭일 수 없었다. 시민들과 함께 거리의 싸움을 계속하면서 이씨의 분노는 단순한 복수심에 머물지 않았다. 이씨의 상처는 ‘광주 시민 전체와 함께 하는 자랑스러움 ’으로 변해 갔다. 터미널에서 공수 대원이 휘두른 한 대의 방망이로 이씨는 항쟁의 거대한 물결에 동참했다. 이씨의 머리를 내려친 공수 대원의 방망이 -그것은 이 땅의 어느 한 사람도 역사 옆에 비켜 설 수 없다는 위대한 가르침 (?) 이었다.
"아무도 이 역사를 비켜갈 수 없다
‘독재 타도’ ‘계엄 철폐’ 를 외치며 밤낮없이 공수부대에 맞서 싸우던 이씨는 누구보다 생생하게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다. 방망이를 휘두르고 칼로 찌른 장면은 부지기수였다. 노인네가 공수 대원의 방망이에 머리를 맞고 쓰러지던 그 참혹한 광경도 이씨에 겐 차라리 ‘견딜만한 장면’ 이었다.
19일 낮 금남로
“점심 먹기 전이니까 오전 열 한시에서 열 두 시 사이쯤 됐을 거예요 공수 대원에 쫓겨 충장로에 있는 쇼핑 옆에 숨어 있다가 끔찍스런 광경을 보고 말았습니다. 젊은 사람만 보이면 치고 찌르고 하던 공수 대원 들 한데 도망가던 한 청년이 붙잡혔어요. 붙잡자마자 방망이로 머리를 내려 쳤어요 그 청년은 무릎을 꿇으며 푹 쓰러지고 말았는데 이번엔 대검으로 장단지 부근을 찔러 버리는 거였어요 그렇게 쓰러진 젊은이를 공수 대원은 밧줄로 두 손을 묶어 군용 트럭 꽁무니에 매달았습니다. 그리 고 차는 출발했습니다. 줄에 묶인 청년은 처음 얼마간은 트럭을 따라 절뚝거리며 달렸습니다. 그러나 트럭이 도청 쪽으로 쏜살같이 달리다 엎어져 아스팔트 위로 질질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공수 대가 시체를 차에 매단 채 끌고 다녔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바로 그 사람일지 모릅니다. 아스팔트 위로 끌려 다니며 살갗까지 벗겨져 참 흑 하게 죽어 갔을 그 청년을 생각하면 온몸의 털이 곤두섭니다. "
이씨는 그후 살가죽이 벗겨진 시뻘건 시체가 꿈속에 나타나 소스라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공수 대원들은 저항하는 시민들에게 이 끔찍한 광경을 보여 주어 저항 의지를 꺾으려 했을지 모르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시민들은 잔인한 공수 부대의 만행에 맞서기 위해 맨주먹으로 싸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결국 무장 투쟁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씨도 겁나기는커녕 싸움의 의지만 굳어져 갔다. 시내의 격렬한 전투에서부터 거짓 방송을 일삼는 MBC방송국의 방화까지 이씨는 누구보다 앞장섰다. 다만 앞뒤를 가리지 않고 나선 것이 불찰이었다. 20일 오후 이씨는 트럭을 타고 전남대 쪽으로 갔다. 전남대에 주둔하고 있는 공수 대원들에게 시민 · 학생들이 붙잡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구출해 오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트럭에 탄 사람은 운전수와 이씨 둘 뿐 이었다. 신 역을 돌아 신안 4거리에서 굴다리를 돌면서 과속으로 차가 전복됐고 그 자리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애석하게도 이씨는 그날의 ‘붙잡힘’으로 항쟁 전기간 동안 광주 시민들과 함께 하지 못한 외톨이가 됐다.
죽음같은 감옥 생활
이씨가 처음 끌려간 곳은 전남대학교 자연대 건물이었다. 그곳을 공수부대가 막사로 이용하고 있었다.
붙잡혀 가자마자 한 공수 대원이 다가와 대검으로 이씨의 머리를 그었다. 단번에 머리가 찢어 졌고 피가 얼굴을 덮었다. 비린내 나는 피가 입술까지 적셨다.
장교인 듯한 공수 대원 한 명이 권총을 이씨의 머리에 대고 말했다.
"너는 우리 동료를 죽였다. 트럭을 몰고 치어 죽인 범인이 바로 너다. "
그러면서 그는 갑자기 "총 한방으로 죽이기엔 아깝다. 서서히 말려 죽이겠다"며 권총을 거둬들였다. 이어서 바로 구타와 기합이 시작됐다.
지친 공수 대원들이 돌아가며 치고 밟았다. 그곳에 미리 잡혀 와 있던 60-70명의 사람들도 구타와 기합 으로 밤을 세웠다.
이튿날 이씨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광주 교도소로 이동했다. 공수 대원들은 붙잡혀 있던 그 많은 사람들을 밀폐된 군용 부식 차 속에 밀어 넣었다. 교도소에 갈 때까지 최루가스를 계속 내부에 쏘아 대면서였다. 눈물 콧물에 게우기까지 하면서 교도소에 도착했을 때는 어둑어둑해질 무렵이었다.
차 뒷문이 열리자 갇혀 있던 사람들이 뛰어 내렸다. 이씨도 뛰어 내렸다. 갑자기 콩을 볶는 총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이씨는 땅바닥에 엎드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최루가스 때문에 눈도 뜰 수 없었다. 공수 대원이 군화 발로 머리를 툭툭 건드릴 때야 이 씨는 부시시 일어났다. 옆에 아직 쓰러져 누운 사람들이 보였다. 그 자리에서 건빵 봉지를 나눠 받고 이씨는 교도소 여사(女舍)옆 창고로 남은 사람들과 함께 수용됐다.
그곳에서부터는 죽음과도 같은 시간의 연속이었다. 경계를 서는 공수 대원들이 교대로 구타를 계속했다. 머리고 얼굴이고 가리지 않았다. 피를 보고 시체를 보기 전에는 그칠 줄 모르는 폭력이었다. 폭행의 방법도 여러 가지였다. 반드시 몸의 한 부분을 절단 내려는 모습이었다. 한번은 공수 대원들이 이씨를 무릎 꿇게 하고 양 오금 사이에 방망이를 끼워 넣었다. 그리고 두 명의 공수 대원이 양쪽에서 밟고 올라서서 굴러 댔다. 이 때의 충격 때문에 이씨는 지금도 무릎 관절이 시리고 아프다. 흐리고 비만 오면 온몸의 관절이 시리고 신경이 곤두선다. 양손의 반쪽은 신경이 죽었는지 감각이 없다. 어느 날 아침 이씨는 시체를 보았다. 벽에 기대 말뚝잠을 자던 한 사내가 입에서 피를 흘린 채 죽어 있었다. 전날 "죽는 게 더 편하겠다"고 말로 중얼거리던 사내였다. 그 생각은 이씨도 마찬가지였다. 망월동에 묻힌게 훨씬 더 편했을 거라는 생각은 출소 후 삶과 죽음이 뒤바뀐 망월동 현장을 돌아보면서도 마찬가지였다.
피의 항쟁이 끝나고 조사를 받으면서 이시는 ‘중과실 치사’란 죄목을 뒤집어쓰게 된다. 공수 대원을 차로 치어 죽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씨는 당시 화물차 조수였을 뿐 운전은 못한 상태였다. 얼토당토 않는 덮어씌우기였다. 운전 못한 다는 사실 증명을 위해 고향 친구를 증인으로 요청했다. 그 친구(28, 백기호 화순군 동면 대포리) 가 증인으로 채택되면서 고향의 가족에게 생존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6월 중순경 고향의 어머니와 형 그리고 광주의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가 광주 교도소로 면회를 왔다. 놀라면서도 반신반의하고 올라온 가족 · 친지들이었다. 면허 실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어머니는 이씨에게 이름과 주소, 생일까지 물었다. 그리고 앞이마의 흉터와 오른손 엄지손가락의 불거진 손톱까지 확인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미심쩍은 표정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면서 이씨는 어머니의 마지막 말을 들었다.
"틀림없이 내 아들은 죽었어. 지금 망월동에 묻혀 있단 말이 여"
이씨는 기가 막히고 서러워 울었다. 아들이 감옥에 들어가니 어머니마저도 모른 체한다는 것이 열 일곱 살 어린 이씨의 생각이었다. 그 뒤 출소할 때까지 몇 차례 면회를 왔지만 한번도 "내 아들이다"고 말하지 않았다.
육신은 찢기고 어머니와 가족마저 빼앗긴 이씨는 단기 3년 장기 4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가난한 살림 때문에 영치금도 자주 들어오지는 않았다. 교도소에 함께 수감된 다른 동지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항소 이유서도 포기하고 있는데 양승씨와 한상석씨가 도와주었다. 특히 전남대생이었던 한상석씨는 친동생처럼 돌봐주었다. 영치금을 이씨 앞으로 돌려주기도 했다. 한씨가 조사 받으러 나갔다 들어올 때마다 온몸에 피멍이 들어 있는 걸 이씨는 보았다. 5방에 함께 있던 사람 중엔 현재 전남대 총장인 오병문 교수가 기억에 새롭다. 오병문 교수는 고혈압과 신경통으로 자주 괴로워했는데 이씨가 자주 주물러 주곤 했다.
석방되던 날 성기의 특징까지 확인하고 믿어
이씨는 81년 4월 7일 석방했다. 출소하던 날 화순에서 어머니와 둘째형이 마중을 나왔다. 아직도 믿기 지 않는 듯 서먹서먹한 표정이었다.
그 날밤 고향인 화순에 도착하니 온 가족은 물론 동네 사람들까지 몰려들어 ‘이금영’의 진짜 여부를 확인하기에 바빴다. 서로 자기를 아느냐고 묻는 와중에 둘째형이 옆방으로 이씨를 데리고 그 방에서 둘째형은 형제간만이 아는 이씨의 남다른 성기의 특징을 확인했다. 다시 큰방으로 돌아와 어머니는 이씨의 발바닥 흉터를 확인했다. 초등 학교 때 퇴비 증산에 동원돼 일하다 낫으로 발바닥을 베어 열 세 바늘이나 꿰멘 흔적이 있었다.
"틀림 없지야 ?"
어머니는 둘째형 의 끄덕거림을 받고 그제 서야 내 자슥아!' 하면서 울음을 놓았다.
석방된 지 이틀만에 이씨는 옛날 있던 구백 정기 화물에 조수로 다시 취직해 지금까지 여러 직장을 진전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시체로 오인되어 누군가 대신 묻힌 망월동 묘역을 바로 찾아보지 못했다. 아직 경찰의 감시와 소재 확인이 한달 에도 몇 번씩 진행되던 폭압의 시절이었다.
이씨가 망월동을 처음 찾은 것은 86년 여름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 찾아간 것이었다. 어머니가 일러준 묘지 번호 47번을 찾았을 때 그곳엔 어느새 무명 열사의 묘비가 세워져 있었다. 그 묘비 앞에 서서 이씨는 처음으로 자신의 고통이 한낱 부끄러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금영’ 자신의 이름으로 묘비는 계속 서 있어야 했고 자신의 육체가 땅속에 민주화의 거름으로 썩어 있어야 옳았다는 생각이 문득 이씨의 부끄러움을 추켜 올렸다.
그 후로 이씨는 시간만 나면 한 때 자신(? ) 이 누워 있었던 무명 열사의 묘를 찾는다. 찾아봐야 소주 한 잔과 담배를 건네는 게 고작이지만 이씨는 그것이 이 세상의 가장 큰 보람이요 의무라고 생각한다.
"이제 살아 남은 저 같은 사람들이 죽도록 싸우는 것만이 죽은 자를 살리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그냥 이런 세상이 계속되라고 그 분들이 아까운 목숨을 바쳤겠습니까?"
이씨는 산 자의 고통과 임무를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5월 18일 이씨의 머리를 내려친 방망이 한 대의 위력이 이제 이씨의 투철한 역사 의식으로 변해 있는 모습이다. 그 방망이의 위력이 부메랑처럼 되돌려져야 할 대상도 이씨는 확실하게 알고 있다.
‘망월동에 묻히기 위해 살아가겠다’는 이씨는 출소 후 여러 직장을 전전하다 현재 쉬고 있다.
배운 것 없으니 무슨‘쫑’과 ‘책’도 없고 더구나 ‘5월’의 후유증으로 웬만한 육체 노동도 견디기 어렵다. 85년 결혼해 부인(27, 김경회), 다섯 살 된 딸(경선)과 함께 백운동 셋방에서 살고 있지만 자신의 어려운 생활을 드러내 보이기엔 아직 부끄러운 눈치다.
하긴 부끄러움이야 어디 이씨뿐이랴? 취재 수첩을 덮는 기자에게 이씨는 살아 남은 모든 사람이 풀지 못한 가장 부끄러운 숙제를 들춰냈다.
"나 같은 놈에게 관심 갖지 마십시오. 무명 열사의 이름을 찾아 줘야 합니다 우린"
선대원 (편집장)
"망월동에 내 묘비가 세워질 때 몸은 광주 교도소에 있었다"
사람이 땅속에 묻히고 동시에 살아 있을 수도 있는 것일까? 이 믿기 지 않는 ‘사실’ 비극이었다. 이씨의 어머니 윤춘한씨(57, 화순군 동면 대포리 1구) 가 아들의 시신을 찾은 건 항쟁 기간 중이었다.
"우리 금영이 시체를 찾은 때는 아직 그 사건 이 안 끝날 때 였지라 우리 식구들이 광주에 갔을 때는 공수부댄가 뭔가는 쫓겨가고 없었고 시민들이 었응께 .
광주에 난리가 나서 군인들이 사람들 다 죽여 분다고 흉흉한 소문이 났는디 우리 금영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수가 있어야제, 맘만 졸이다가 죽기로 하고 광주로 찾어 나섰지요, 광주에 있는 작은집 식구들하고 함께 시체가 있다는 도청으로 가서 봤는디 워메 피범벅이 된 우리 금영이가 죽어 있습디다. 키도 똑 같고 몸뚱이도 비슷해 처음에는 이마의 흉터를 찾았지요. 얼굴은 퉁퉁 부어 있는디 이마에 흉터는 그대로고 오른손 엄지 손구락 손톱이 툭 불거진 것도 똑 같습디다. 워메 내 불쌍한 자슥 그냥 보듬고는 목놓아 울었지요."
윤씨는 아들의 시신을 거두어 그해 5월 31일, 다른 수많은 피투성이의 주검들과 함에 망월묘역 에 안장했다. 이씨 의 묘앞엔『열사 이금영 지묘」란 묘비까지 세워졌고 결국 이씨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 넋으로 가족의 곁을 떠난 것이었다.
그러나 가족들이 망월동에 이씨를 묻고 눈물로 돌아서던 그날 진짜 이금영씨는 광주교도소에 있었다. 광주 교도소 여사(女舍) 옆 창고 속에서 공수 대원들의 무자비한 폭행으로 죽음과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세의 역사의식을 깨우친 공수대원의 방망이
80년 5월, 이씨는 가난한 노동자의 신분이었다. ‘그저 먹고 살기에 바쁜’ 나날이었다. 국민학교 졸업장 하나가 ‘빽’과 ‘밑천’의 전부인 이씨는 당시 광주에 있는 구백 정기 화물의 화물차 조수로 일하고 있었다. 박정희가 죽고 민주화의 열기가 거세게 타오르던 그때의 현실이 이씨에겐 큰 의미로 다가올 수 없었다. 세상에 대해서 깊이 생각지도 못한 열 일곱살의 어린 나이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의 격랑은 이씨를 피해 가지 않았다. 비극의 오월, 그 오월 광주의 울타리에서 이씨는 벗어날 수 없었다.
이 씨 의 ‘역사’는 18일 오후부터 시작됐다.
오후 갈아입을 옷을 가지러 고향인 화순 가기 위해 대인동 공용 터미널에 나갔던 이씨는 그 악명 높은 공수부대와 처음 만났다. 개찰구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무리의 군인들이 방망이를 휘두르며 터미널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눈에 띄는 사람이면 방망이로 머리와 어깨를 내리치며 악마와 같이 날뛰고 있었다. 덜컥 겁이 났지만 이씨 그대로 서 있었다. 죄 지은게 없어서 도망갈 이유도 없다는 게 이씨의 생각이었다.
그때 공수 대원 한 명이 이씨에게로 달려들었다. 갑자기 눈에 번개가 치는 것 같은 충격이 가해졌다. 이씨는 그 자리에 쓰러져 잠깐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아직 날뛰고 있는 공수 대원들이 보였다. 비틀거리며 일어나 무조건 터미널 밖으로 뛰었다. 무엇 때문에 자신이 도망가는 건지도 생각지도 않고 대인동 으슥한 골목길을 돌아 회사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죄도 없이 맞고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 때 처음 깨달 았습니다. 독재 권력이란 것이 그렇게 힘없고 가난한 사람만 골라 억압하고 못살게 구는 나쁜 집단이란 것은 그날 이후 시민들과 시위를 하면서 배우고 터득한 것입니다."
사무실로 돌아온 이씨는 분에 못 이겨 씩씩거리며 동료들에게 퉁퉁 부은 머리의 상처를 내보였다. 그것을 본 동료들이 혀를 찼다. 그리고 수많은 시민 · 학생들이 공수 대원의 방망이 이와 칼로 죽어 가고 잇다는 사실도 말해 주었다. 이씨 자신이 보고 겪은 것만으로도 그것은 사실이었다.
이씨는 집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거리로 나섰다. 그대로 앉아서 분노를 삭일 수 없었다. 시민들과 함께 거리의 싸움을 계속하면서 이씨의 분노는 단순한 복수심에 머물지 않았다. 이씨의 상처는 ‘광주 시민 전체와 함께 하는 자랑스러움 ’으로 변해 갔다. 터미널에서 공수 대원이 휘두른 한 대의 방망이로 이씨는 항쟁의 거대한 물결에 동참했다. 이씨의 머리를 내려친 공수 대원의 방망이 -그것은 이 땅의 어느 한 사람도 역사 옆에 비켜 설 수 없다는 위대한 가르침 (?) 이었다.
"아무도 이 역사를 비켜갈 수 없다
‘독재 타도’ ‘계엄 철폐’ 를 외치며 밤낮없이 공수부대에 맞서 싸우던 이씨는 누구보다 생생하게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다. 방망이를 휘두르고 칼로 찌른 장면은 부지기수였다. 노인네가 공수 대원의 방망이에 머리를 맞고 쓰러지던 그 참혹한 광경도 이씨에 겐 차라리 ‘견딜만한 장면’ 이었다.
19일 낮 금남로
“점심 먹기 전이니까 오전 열 한시에서 열 두 시 사이쯤 됐을 거예요 공수 대원에 쫓겨 충장로에 있는 쇼핑 옆에 숨어 있다가 끔찍스런 광경을 보고 말았습니다. 젊은 사람만 보이면 치고 찌르고 하던 공수 대원 들 한데 도망가던 한 청년이 붙잡혔어요. 붙잡자마자 방망이로 머리를 내려 쳤어요 그 청년은 무릎을 꿇으며 푹 쓰러지고 말았는데 이번엔 대검으로 장단지 부근을 찔러 버리는 거였어요 그렇게 쓰러진 젊은이를 공수 대원은 밧줄로 두 손을 묶어 군용 트럭 꽁무니에 매달았습니다. 그리 고 차는 출발했습니다. 줄에 묶인 청년은 처음 얼마간은 트럭을 따라 절뚝거리며 달렸습니다. 그러나 트럭이 도청 쪽으로 쏜살같이 달리다 엎어져 아스팔트 위로 질질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공수 대가 시체를 차에 매단 채 끌고 다녔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바로 그 사람일지 모릅니다. 아스팔트 위로 끌려 다니며 살갗까지 벗겨져 참 흑 하게 죽어 갔을 그 청년을 생각하면 온몸의 털이 곤두섭니다. "
이씨는 그후 살가죽이 벗겨진 시뻘건 시체가 꿈속에 나타나 소스라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공수 대원들은 저항하는 시민들에게 이 끔찍한 광경을 보여 주어 저항 의지를 꺾으려 했을지 모르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시민들은 잔인한 공수 부대의 만행에 맞서기 위해 맨주먹으로 싸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결국 무장 투쟁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씨도 겁나기는커녕 싸움의 의지만 굳어져 갔다. 시내의 격렬한 전투에서부터 거짓 방송을 일삼는 MBC방송국의 방화까지 이씨는 누구보다 앞장섰다. 다만 앞뒤를 가리지 않고 나선 것이 불찰이었다. 20일 오후 이씨는 트럭을 타고 전남대 쪽으로 갔다. 전남대에 주둔하고 있는 공수 대원들에게 시민 · 학생들이 붙잡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구출해 오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트럭에 탄 사람은 운전수와 이씨 둘 뿐 이었다. 신 역을 돌아 신안 4거리에서 굴다리를 돌면서 과속으로 차가 전복됐고 그 자리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애석하게도 이씨는 그날의 ‘붙잡힘’으로 항쟁 전기간 동안 광주 시민들과 함께 하지 못한 외톨이가 됐다.
죽음같은 감옥 생활
이씨가 처음 끌려간 곳은 전남대학교 자연대 건물이었다. 그곳을 공수부대가 막사로 이용하고 있었다.
붙잡혀 가자마자 한 공수 대원이 다가와 대검으로 이씨의 머리를 그었다. 단번에 머리가 찢어 졌고 피가 얼굴을 덮었다. 비린내 나는 피가 입술까지 적셨다.
장교인 듯한 공수 대원 한 명이 권총을 이씨의 머리에 대고 말했다.
"너는 우리 동료를 죽였다. 트럭을 몰고 치어 죽인 범인이 바로 너다. "
그러면서 그는 갑자기 "총 한방으로 죽이기엔 아깝다. 서서히 말려 죽이겠다"며 권총을 거둬들였다. 이어서 바로 구타와 기합이 시작됐다.
지친 공수 대원들이 돌아가며 치고 밟았다. 그곳에 미리 잡혀 와 있던 60-70명의 사람들도 구타와 기합 으로 밤을 세웠다.
이튿날 이씨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광주 교도소로 이동했다. 공수 대원들은 붙잡혀 있던 그 많은 사람들을 밀폐된 군용 부식 차 속에 밀어 넣었다. 교도소에 갈 때까지 최루가스를 계속 내부에 쏘아 대면서였다. 눈물 콧물에 게우기까지 하면서 교도소에 도착했을 때는 어둑어둑해질 무렵이었다.
차 뒷문이 열리자 갇혀 있던 사람들이 뛰어 내렸다. 이씨도 뛰어 내렸다. 갑자기 콩을 볶는 총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이씨는 땅바닥에 엎드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최루가스 때문에 눈도 뜰 수 없었다. 공수 대원이 군화 발로 머리를 툭툭 건드릴 때야 이 씨는 부시시 일어났다. 옆에 아직 쓰러져 누운 사람들이 보였다. 그 자리에서 건빵 봉지를 나눠 받고 이씨는 교도소 여사(女舍)옆 창고로 남은 사람들과 함께 수용됐다.
그곳에서부터는 죽음과도 같은 시간의 연속이었다. 경계를 서는 공수 대원들이 교대로 구타를 계속했다. 머리고 얼굴이고 가리지 않았다. 피를 보고 시체를 보기 전에는 그칠 줄 모르는 폭력이었다. 폭행의 방법도 여러 가지였다. 반드시 몸의 한 부분을 절단 내려는 모습이었다. 한번은 공수 대원들이 이씨를 무릎 꿇게 하고 양 오금 사이에 방망이를 끼워 넣었다. 그리고 두 명의 공수 대원이 양쪽에서 밟고 올라서서 굴러 댔다. 이 때의 충격 때문에 이씨는 지금도 무릎 관절이 시리고 아프다. 흐리고 비만 오면 온몸의 관절이 시리고 신경이 곤두선다. 양손의 반쪽은 신경이 죽었는지 감각이 없다. 어느 날 아침 이씨는 시체를 보았다. 벽에 기대 말뚝잠을 자던 한 사내가 입에서 피를 흘린 채 죽어 있었다. 전날 "죽는 게 더 편하겠다"고 말로 중얼거리던 사내였다. 그 생각은 이씨도 마찬가지였다. 망월동에 묻힌게 훨씬 더 편했을 거라는 생각은 출소 후 삶과 죽음이 뒤바뀐 망월동 현장을 돌아보면서도 마찬가지였다.
피의 항쟁이 끝나고 조사를 받으면서 이시는 ‘중과실 치사’란 죄목을 뒤집어쓰게 된다. 공수 대원을 차로 치어 죽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씨는 당시 화물차 조수였을 뿐 운전은 못한 상태였다. 얼토당토 않는 덮어씌우기였다. 운전 못한 다는 사실 증명을 위해 고향 친구를 증인으로 요청했다. 그 친구(28, 백기호 화순군 동면 대포리) 가 증인으로 채택되면서 고향의 가족에게 생존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6월 중순경 고향의 어머니와 형 그리고 광주의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가 광주 교도소로 면회를 왔다. 놀라면서도 반신반의하고 올라온 가족 · 친지들이었다. 면허 실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어머니는 이씨에게 이름과 주소, 생일까지 물었다. 그리고 앞이마의 흉터와 오른손 엄지손가락의 불거진 손톱까지 확인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미심쩍은 표정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면서 이씨는 어머니의 마지막 말을 들었다.
"틀림없이 내 아들은 죽었어. 지금 망월동에 묻혀 있단 말이 여"
이씨는 기가 막히고 서러워 울었다. 아들이 감옥에 들어가니 어머니마저도 모른 체한다는 것이 열 일곱 살 어린 이씨의 생각이었다. 그 뒤 출소할 때까지 몇 차례 면회를 왔지만 한번도 "내 아들이다"고 말하지 않았다.
육신은 찢기고 어머니와 가족마저 빼앗긴 이씨는 단기 3년 장기 4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가난한 살림 때문에 영치금도 자주 들어오지는 않았다. 교도소에 함께 수감된 다른 동지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항소 이유서도 포기하고 있는데 양승씨와 한상석씨가 도와주었다. 특히 전남대생이었던 한상석씨는 친동생처럼 돌봐주었다. 영치금을 이씨 앞으로 돌려주기도 했다. 한씨가 조사 받으러 나갔다 들어올 때마다 온몸에 피멍이 들어 있는 걸 이씨는 보았다. 5방에 함께 있던 사람 중엔 현재 전남대 총장인 오병문 교수가 기억에 새롭다. 오병문 교수는 고혈압과 신경통으로 자주 괴로워했는데 이씨가 자주 주물러 주곤 했다.
석방되던 날 성기의 특징까지 확인하고 믿어
이씨는 81년 4월 7일 석방했다. 출소하던 날 화순에서 어머니와 둘째형이 마중을 나왔다. 아직도 믿기 지 않는 듯 서먹서먹한 표정이었다.
그 날밤 고향인 화순에 도착하니 온 가족은 물론 동네 사람들까지 몰려들어 ‘이금영’의 진짜 여부를 확인하기에 바빴다. 서로 자기를 아느냐고 묻는 와중에 둘째형이 옆방으로 이씨를 데리고 그 방에서 둘째형은 형제간만이 아는 이씨의 남다른 성기의 특징을 확인했다. 다시 큰방으로 돌아와 어머니는 이씨의 발바닥 흉터를 확인했다. 초등 학교 때 퇴비 증산에 동원돼 일하다 낫으로 발바닥을 베어 열 세 바늘이나 꿰멘 흔적이 있었다.
"틀림 없지야 ?"
어머니는 둘째형 의 끄덕거림을 받고 그제 서야 내 자슥아!' 하면서 울음을 놓았다.
석방된 지 이틀만에 이씨는 옛날 있던 구백 정기 화물에 조수로 다시 취직해 지금까지 여러 직장을 진전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시체로 오인되어 누군가 대신 묻힌 망월동 묘역을 바로 찾아보지 못했다. 아직 경찰의 감시와 소재 확인이 한달 에도 몇 번씩 진행되던 폭압의 시절이었다.
이씨가 망월동을 처음 찾은 것은 86년 여름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 찾아간 것이었다. 어머니가 일러준 묘지 번호 47번을 찾았을 때 그곳엔 어느새 무명 열사의 묘비가 세워져 있었다. 그 묘비 앞에 서서 이씨는 처음으로 자신의 고통이 한낱 부끄러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금영’ 자신의 이름으로 묘비는 계속 서 있어야 했고 자신의 육체가 땅속에 민주화의 거름으로 썩어 있어야 옳았다는 생각이 문득 이씨의 부끄러움을 추켜 올렸다.
그 후로 이씨는 시간만 나면 한 때 자신(? ) 이 누워 있었던 무명 열사의 묘를 찾는다. 찾아봐야 소주 한 잔과 담배를 건네는 게 고작이지만 이씨는 그것이 이 세상의 가장 큰 보람이요 의무라고 생각한다.
"이제 살아 남은 저 같은 사람들이 죽도록 싸우는 것만이 죽은 자를 살리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그냥 이런 세상이 계속되라고 그 분들이 아까운 목숨을 바쳤겠습니까?"
이씨는 산 자의 고통과 임무를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5월 18일 이씨의 머리를 내려친 방망이 한 대의 위력이 이제 이씨의 투철한 역사 의식으로 변해 있는 모습이다. 그 방망이의 위력이 부메랑처럼 되돌려져야 할 대상도 이씨는 확실하게 알고 있다.
‘망월동에 묻히기 위해 살아가겠다’는 이씨는 출소 후 여러 직장을 전전하다 현재 쉬고 있다.
배운 것 없으니 무슨‘쫑’과 ‘책’도 없고 더구나 ‘5월’의 후유증으로 웬만한 육체 노동도 견디기 어렵다. 85년 결혼해 부인(27, 김경회), 다섯 살 된 딸(경선)과 함께 백운동 셋방에서 살고 있지만 자신의 어려운 생활을 드러내 보이기엔 아직 부끄러운 눈치다.
하긴 부끄러움이야 어디 이씨뿐이랴? 취재 수첩을 덮는 기자에게 이씨는 살아 남은 모든 사람이 풀지 못한 가장 부끄러운 숙제를 들춰냈다.
"나 같은 놈에게 관심 갖지 마십시오. 무명 열사의 이름을 찾아 줘야 합니다 우린"
선대원 (편집장)
- 이전글[월간지 관련기사] 이불 홑청으로 만든 플래카드-중학생 외아들 잃은 홀어머니의 8년 투쟁기- 07.05.30
- 다음글[월간지 관련기사] 낙서로 보는 산 자와 죽은 자의 대화(국민신문, 1989. 1) 07.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