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고 있는 키워드를 검색해보세요.

DRAG
CLICK
VIEW

아카이브

온라인 자료실

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이불 홑청으로 만든 플래카드-중학생 외아들 잃은 홀어머니의 8년 투쟁기-

본문

이불 홑청으로 만든 플래카드

-중학생 외아들 잃은 홀어머니의 8년 투쟁기-

80년 5월 20일 화요일

완봉이가 평소에 자전거를 하나 사 달라고 졸랐다. 시내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녔는데 그것이 지겨워 그랬던 것 같다. 그때마다 '너가 공부 잘하면 사 줄께!'하고 미뤄 왔다. 그러던 중에, 80년 4월 월말시험을 보고 나서 성적표를 가져 와서는 "엄마 나 12등 했어"하며 동복에 금 뺏지를 달고 왔다. 성적표를 보니 정말로 전교 12등을 했다. 하도 대견스러워서 "그래 엄마가 자전거 사줄게. 새 것은 못 사줘도 중고라도 사주마, 다음 달에 꼭 사주마" 하고 약속을 했었다. 한 달만 참으면 된다고 했는데 결국 자전거는 못 사주고 말았다. 완봉이는 어려서부터 차분하고 사려가 깊었다.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자랐기 때문에 항상 안쓰러워 했다.

80년 5월 20일 , 화요일인데도 학교에서 일찍 돌아왔다. 당시 나는 데모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장사해서 먹고사는데 바빴었다. 그래서 밖의 상황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었다. 완봉이 집으로 돌아와서는 "다른 아이들은 부모들이 다 데리고 갔는디. 엄마는 왜 안 왔는가?" 하며 물었다.

"그래 어떻게 왔니?"

"오는 애기들 틈새에 끼어서 왔어"

그런데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왜 그러냐! 어디 아프냐?"

"엄마! 어제 먹었던 것이 체했나봐, 낮에 오버이트하고 점심도 못 먹었어" 하며 도시락을 내밀었다.

"그래 누워 있어라!"

저녁도 안 먹고 누워 있었다.

그러다가 20일 저녁, 구 시청 옆에서 나무를 모아 놓고 불을 지피는 시위대가 있었다. 완봉이와 함께 구경 삼아 나갔다가 경찰들이 최루탄을 쏘기 시작하자 무서워서

"어서 가자"

하며 집으로 들어와 버렸다. 완봉이를 집에 데려다 놓고 저녁 10시쯤 이웃집 아주머니와 함께

"우리는 나이 먹었는디 어쩔랍디요"하며 다시 나갔다. 걸어서 황금동 골목 쪽에 왔을 때 한 남자가 등에 사람을 업고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피를 질질 흘리고 있었다.

"어디로 왜 업고 가요?"

"계엄군 칼에 찔려서 병원에 가요"

하며 뛰어갔다.

'무서워서 더 이상 못 가것소!'

하며 돌아와서 잠을 잤다.

"우리 아들 어디 갔소?"

5월 21일, 부처님 오신 날이어서 절에 가려고 했다. 아침에 완봉이 에게 '밥 먹어라'하니 '안 먹는다'고 해서 죽을 써 주니 한 그릇을 먹었다. 그리고 "아무 곳도 가지 말고 집에 있어라. 잠깐 다녀오겠다"고 하니 "그러라"고 했다. 구 시청 사거리 갔을 때 였다. 메가폰을 잡은 한 남자가 돈을 걷고 있었다.

"시민 여러분! 지금 학생들이 배가 고프고 청년들도 모두 배가 고픕니다…" 하며 헌금을 요구했다.

당시 살림도 무척 가난했지만 돈 1천 원을 꺼내서 헌금하고 가려고 하는 중에 그 사람이 뒤에서 불렀다.

애! 아주머니 이 돈 좀 세어 주시오"

그래서 세어 보니 10만원하고 잔돈이 얼마 있었다.

아주머니 안 바쁘면 이 돈으로 가계에 가서 빵, 치약, 우유, 담배도 사서 도청 앞에 있는 학생들과 청년들 좀 가져다 줄라요?"하며 10만원을 주었다. '그러마! '하고 돈을 받고 시키는 대로 10만원 어치를 사니 그것도 엄청나게 많았다. 혼자서 들고 갈 수가 없어서 난처해 있는데 주위에 있는 술집 아가씨들이 와서 물었다.

"아줌마! 우리가 도와줘도 돼요?"

"그래! 도청으로 가서 나눠주소"

하더니 그 아가씨들이 물건을 들고 도청으로 가기 시작했다. 아가씨들을 모두 보내 놓고 제일 나중에 생계란 5판을 머리에 이고 광주 우체국 앞으로 해서 도청으로 갔다. 군인들은 분수대 앞의 전남 일보(YMCA)앞에 앉아 있었고 시민들은 조금 떨어진 거리에 앉아 있었다. 계란을 이고 가서 이거 먹으라고 주니, 시민군 중 한사람이

"아주머니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많이 가져다 줘서 먹었으니까 저 군인들 좀 가져다주시오. 저 군인들도 배가 고플 것인디, 먹은가 안 먹은가 한번 가져다 줘 보시오"

했다. 계란을 가져다주러 가면서도 겁이 났다. '혹시 날 죽이지는 않을까?'해서 조심스럽게 군인들에게 가서

"이거! 먹을 라요?"

하니 서로 먹으려고 했다.

계란 5판을 군인들에게 주고 나서 집으로 와서 보니 완봉이가 없었다. 그때가 오후 1시쯤이었다. 겁이 더럭 나서 옆집 아줌마에게

"우리 아들 어디 갔소?"

"금방 여기 집 앞에 앉아 있었는데, 도청 앞에 갔는가 모르것네"

하였다. 계란 가져다 준 길로 해서 뛰어서 도청으로 갔다. 다시 가니 도청 앞 시민, 군인들이 다 없어지고 난리 범벅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줌마! 가지 마시오!"

하며 못 가게 했다. 경계망이 하도 삼엄해서 도청으로 못가고 다시 구 시청으로 왔다.

'어디로 갔을까?'

'우리 아들이 안들어 왔소"

하며 울고 오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허겁지겁 정신없이 뛰어 왔다.

"워매! 도청에 날리 났소 . 세상에 남학생 둘이 총에 맞고 쓰러진 것 봤소! 내 눈으로 보고 왔소!"

하였다. 겁이 나서

"뭘 입었 습디까?"

"밑에는 해작 쓰봉에다 우에는 퍼렁거 입었습디다."

기가 막혀서

"앞에 까망 줄쳐졌습디까?"

"그것까지는 못 봤소" 했다. 틀림없이 완봉이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 사람들이 나가기만 하면 모두 쏴 죽인다고 했다.

시체실에 완봉이의 해작 바지가 눈에……

누구든지 눈에 뛰기만 하면 쏴 죽인다고 해서 변두리로만 찾으러 다녔다. 21일 오후 4시경, 혼자서는 도저히 나갈 수가 없어서 옆집에 사는 젊은 각시와 함께 찾으러 나섰다. 적십자병원에 갔다. 병원에서는 사람들이 난리를 치며 못 들어가게 했다. 적십자 병원을 나와서 전대 병원으로 갔다. 시체실에 가서

"머리 빡빡 깍은 중학생 없소?"

하니 없다고 했다. 응급실에 가보니 피 비린내가 말 할 수 없이 났다. 복도고 뭐고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피를 질질 흘리는 사람도 많았다. 그 많은 사람을 다 뒤적이며 완봉이를 찾았으나 거기에는 없었다. 그곳에 나와 적십자병원으로 다시 갔다. 수위에게 사정을 하니

"당신들이 수선을 떠니까 부상자들이 치료도 못 받고 죽어 간단 말이요"

하며 몽둥이를 들고 못들어가게 했다. 하도 서러워서 적십자병원 안에 있는 나무를 잡고 대성통곡을 했다. 한참을 그러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져 기독 병원에 가 보려고 했으나 통행금지가 8시여서 돌아다니면 총 쏜다고 하여 그냥 집으로 들어왔다. 나는 고향이 이북이라 친척이라곤 아무도 없어 자식 4명만 믿고 살아왔다.

1980년 5월 22일 , 새벽 4시 30분 경 한집에 사는 청년을 데리고 나섰다. 그 청년이 하는 말이

"학생들을 많이 데리고 가서 화순에서 못 오는 애들도 있대요. 오고 싶어도 차가 없어서 못 들어오는 애들도 있을 겁니다"

고 했다. 제발 거기에라도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적십자병원으로 갔다. 새벽 5시쯤 적십자병원 간호원이 부상자 명단을 주었다. 그 명단에는 완봉이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 아이는 바지에 아무 것도 가져가지 않았으니 살아서 저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는 증명할 것이 하나도 없다. 여기 시체들이 많이 들어 왔나?"

고 물으니 많이 들어 왔다며 시체실을 가르켜 주었다. 함께 간 청년과 시체실로 갔다. 나는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어서

"자네가 한번 들어가서 있는가 찾아보소!"

"그럼 여기 계시시오!"

문을 "탕!"열고 들어갔다. 들어가더니 한참 있어도 안 나왔다.

"빨리 나오지 왜 안나 와, 설마, 죽기야 했을 라고" 기다려도 안 나오더니 한참 후에 그 청년이 고개를 내밀고

"아짐! 아짐!"

하고 불렀다. 그 소리에 얼마나 놀랬던지

"뭘 하러 나를 부른가?"

하고 나서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멍하니 한참을 앉아 있다가

"뭣 하러 나를 오라고 한가. 빨리 나와. 어서 가게" 했더니 나무라며

"아짐! 이리와 보시오"

하며 또 불렀다. 그때 주위의 사람들이 "빨리 가보 시오. 무슨 일이 있는 갑소. 그래도 본인이 가서 확인을 해야지 남이 어떻게 안 다요? 어서 가보 시오" 하였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가 볼려고 발을 떼도 도저히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기어서 그 문 앞에 가지, 시체가 시멘트 바닥과 나무 선반 위로 온 방안에 가득차 있었다. 문을 다시 젖히고 속을 보니 완봉이의 해작 바지가 눈에 띄었고 발바닥이 보였다. 그 자리에서 기절을 해 버렸는지 사람들이 떼밀고 집으로 데려다 놨다. 새벽 5시에 시체를 찾고 나서 무조건

"내 아들 치료를 받게 해서 살려 내야 헌디"

하는 말밖에 안 나왔다.

"우리 아들이 죽었는디 태극기가 없소"

22일 오후 4시경, 적십자병원 근처에 사는 아는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금 적십자병원에서 시체를 다 꺼내서 후문으로 내다 놨는데 다른 것은 다 태극기가 덮어져 있는데 완봉이만 태극기가 안 덮어졌소. 빨리 태극기 하나 얻어서 덮어 주시오!"

하였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구 시청에서 적십자병원 후문까지 걸을 수가 없어서 기어가면서 "나 태극기 하나 주시오. 우리 아들이 죽었 는디 태극기가 없소"

하며 울며 갔다. 적십자병원 후문까지 가서 처음으로 관 뚜껑을 열어 보니 이마가 하나도 없었고 거죽만 덜렁덜렁 했다. 22일 새벽에 보았던 그 시체들이 모두 나왔는데 18구였다. 완봉이 제일 먼저 들어갔는지 안쪽에 있었고 순서대로 차근차근 밖으로 운반하다 보니 18번으로 나왔다. 처음부터 태극기를 덮다가 맨 나중에는 태극기가 없어서 덮지 못했던 것 같다. 시체를 열고 보니 관도 작아서 몸을 오그려 두었다.

23일 새벽 4시 30분, 옷이라도 갈아 입혀 주려고 옷을 찾았다. 생활이 어려워서 겨울에 내복 한 벌도 못 사 입혔고 츄리닝 바지만 입히곤 했다. 남들은 친척들이 많아서 입힐 옷도 사다 주고 일도 봐주는데 그럴 사람도 없고, 그때 정신으로 옷을 사다 입힌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 옷을 찾아도 마땅히 입힐 만한 옷이 없었다. 할 수없이, 속 런닝 샤츠, 팬티, 양말과 하복 바지, 상의는 반소매를 입히면 안 된다고 해서 겨울 동복을 가져갔다. 하복을 5월 27일부터 입는다고 해서 그때도 동복을 입고 다녔다. 1학년 때 마춘 것이라서 살아 있었을 때도 작았다. 제일 먼저 옷을 갈아 입히고 싶어서 4월 달에 받은 금 뺏지가 달린 동복 상의를 들고 새벽에 집을 나섰다. 도청으로 가니 시민 군들로부터 총기를 회수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 아들 옷 갈아 입히게 문 좀 열어 주라."

고 해도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도청 큰 대문을 닫고 안쪽에서 무기 회수를 하고 있었는데 무기가 산더미만큼 쌓여 있었다.

"왜 ! 못 들어가게 하느냐?"

"아줌마 지금 자식 죽고 무슨 정신 있것소! 지금 우리가 수류탄이고 뭐고 다 걷어들여 놨는데 만약에 이런 것들을 손대면 어쩔 것이요! 가만히 있으시오. 조금만 기다리시오"

하는 것이 오후 1시가 돼도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오후 2시가 되자, 도청 앞으로 옷갈아 입히려고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놈 새끼들 차라리 날 죽여 부러라. 내 몸뚱이 머스매 새끼 하나 밖에 없었는디 날 죽여라" 하고 떼를 써도 열어 주지 않았다. 그래서 대문을 타고

"내가 이 총 있는 데로 떨어져 죽어 불란다"

하며 철문을 막 기어올라가니

"가만히 있으시오. 안에 가서 타협 좀 하고 올 테니까."

하며 들어가더니

"아줌마만 들어오시오"

하였다. 그래서

"옷 입힐 사람이 줄줄이 있는데 나만 혼자 입힐 것이요?"

하고 먼저 들어가니 다른 사람들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디 가서 입힐 것이요?"

"저기 저 복도에 아무 데나 놓고 입히시오!"

하였다. 관을 들고 가서 시체를 바닥에 뉘여 놓고 보니 관에 피가 반쯤 고여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집안 남자들이 와서 일을 모두 해 주었는데, 친척도 없고, 일을 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나와 회사 다니던 둘째 딸 옥선, 막내딸 문희, 이웃집 새댁과 내 친구, 이렇게 가서 옷을 입히려고 하니 일을 해본 경험도 없었고, 몸이 떨려서 도저히 나는 할 수가 없어 애들 보고

"애야! 어서 수건으로 닦고 빨리 해라!"고 말만 했을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벌써 입히고 다 관을 들고 나가는데, 일해 본 경험도 없고 다 어린애들인지라, 옷도 못 입히고 있었다. 그러다가 거기서 일보는 청년이 하도 딱했던지

"아주머니! 못 하것소? 저리 비키시오. 내가 도와줄께요!

하며 도와주었다.

"학생 고맙소!"하니 "난 학생 아니예요"

하였다. "아뭏튼 고맙소"

하고 청년이 시체를 뒤척이는 것을 보니 , 오른쪽 귀 뒤에 담배 구멍 만한 총구멍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이마를 뚫고 나왔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마가 거죽만 있고 속은 비어 있었다. 그 작은 구멍으로 피가 나왔던지 관은 반쯤 피가 고여 있었다. 바지는 겨우 입혔으나 상의 동복은 입힐 수가 없었다. 살아서도 작았는데 죽어서 뻣뻣하니 들어가질 않았다. 그래서 팔은 뜯어버리고 위에 걸쳐만 놓았다. 어떻게 그렇게 해서 옷을 갈아 입히고 밖으로 내다 놓았다. 그것을 보고 난 후 집으로 돌아왔다.

망월동에 아들을 묻다.

24일 새벽 5시에 도청으로 갔다. 시체를 상무관으로 옮겨 놓았는데 완봉이 6번으로 들어와 있었다. 어제 관 뚜껑에 써 놓은

"무등 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

이란 것은 없어져 버리고

"18세"

라고 써져 있었다. 중학생이었지만 무척 키가 컸다. 24일부터 26일까지 계속 상무관을 다니면서 관을 지켰는데 하루하루 다르게 관 뚜껑이 열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손을 넣어 보면 처음에는 15cm정도 들어가다가 다음날인 10cm, 오후에는 5cm정도로 자꾸만 시체에 변화가 있었다. 그러면서 관뚜껑이 위로 열어졌다. 그래서 다른 생각은 전혀 못하고 못을 잘못 박아서 이런다고 나무 래기만 했다. 그럴 때마다 돌멩이를 집어다가 관 뚜껑에 못을 또 박곤 했었다. 돌멩이를 집어다가 관 뚜껑에 못을 또 박곤 했었다. 후에 알고 보니 시체가 부패되어 가면서 부풀어올랐던 것인데 몰랐던 것이다. 그러다가 5월 27일 새벽, 탱크 소리가 들리고 또 총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방송을 했다. 시민을 나오지 말라고 그러다가 날은 밝았는데 그때도 가끔씩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5월 27일 오전 10시쯤, 도청으로 가 보려고 했으나 통행을 금지시켜 갈 수가 없어 돌아왔다.

5월 28일 , 오전 10시 30분 경, 도청 앞으로 가보니, 군인들이 널찍한 비닐 봉지를 들고, 도청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들고 나오는 것을 보니 시체를 아무렇게나 넣어서 들고 나오더라는 것이다. 후에 알고 보니 27일 모두 시체 검안을 다시 했다고 했다. 총상이었는지 타박상이었는지를 알기 위해서 그랬다고 했다.

5월 29일 동사무소에서 연락이 왔다. 시체를 망월동으로 옮기니까 서방 삼거리로 나오라고 했다. 서방 삼거리로 가니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눠서 시청 차 2대가 운행을 하고 있었다. 시청 차를 타고 망월동으로 가니 도청에 있던 시체를 쓰레기차로 운반해 두었다. 관들이 확인된 것은 순서대로 묻었으나 신원 확인이 안된 것은 한군데로 쌓아 두었다. 관속에서도 10여일 정도 썩은 것들이 여름철이라 따듯한 야산에 버려 두니 얼마나 부패가 되었겠는가? 냄새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신원이 확인 안된 것은 유리관에 넣어 두고 있었다. 시계나, 바지 등이 있었다.

당시에 망월동 묘지 아래에 물구덩이가 있었는데 처음엔 그곳에다 묻으라고 했다 한다. 그런데 유족 몇몇 사람이 그것은 안 된다고 하여 현재 묘역으로 정한 것이라 했다. 상무관에서는 6번이었으나 망월동 묘지 번호는 33번이었다. 관을 찾아서 묶어진 끈을 풀어헤치니, 관이 '펑!'하고 열려 버렸다. 위, 아래 부분만 남고 양옆의 '뚝!' 터져 버린 것이다. 관이 열리고 바닥에 시체만 덜렁 나왔다. 보니까, 동복의 팔을 뜯어서 걸치기만 했는데 얼마나 부패를 했는지 팔뚝 하나가 건장한 남자의 허벅지 하나만큼 했다. 관이 부서지고 난 후, 시체만 들어서 현재 묘지 번호 33번 자리에 묻었다. 관이 터지고 나서 시체가 굴러 갈려고 해서 큰사위더러 아래쪽에 가서 잡으라고 하고 땅속으로 넣는데 큰사위가 잡은 머리 부분에서 눈알이 '퐁!' 빠지더라는 것이었다.

"전두환이 이놈 살인마야"

80년 5월 자식을 묻고 난 후 유족 회 모임이 있는 것도 몰랐을 뿐더러 앞으로 어떻게 투쟁해 나가야 할지도 전혀 모르고 입에 풀칠하고 살 생각뿐이었고 홧병 때문에 고생을 했었다. 그런데 81년쯤인가 우연히 피정을 다녀오는 유족들과 만남을 통해서 약간의 의식을 배웠었다. 그들과의 대화를 하면서 모임을 나가게 되었고, 그 이전까지 자식 죽여 놓고 이렇게 멍청하게만 살았던가 하고 후회했었다. 피정 모임에 참가하고 난 후, 그곳에 있는 사람들끼리 박찬봉 회장의 불신을 얘기하고 , 그러면 우리가 사회적으로 덜 탄압하는 여자들도 임원 진을 바꿔 보자고 결의한 뒤, 당시 전계량씨가 근무라는 계림 신용 협동 조합으로 찾아가서 대화를 한 후, 다음 월례회 때 그 의견을 다시 결정짓자고 헤어졋다. 그렇게 해서 다음 모임 때 부족한 몸이지만(?)회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 회장직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 명색이 회장 이라지만, 막내딸 김문회와 둘이 있어도 당장 일하지 않으면 굶어 죽을 판이었다. 그러다가 시청에서 알선해 주는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그 동안 모아 두었던 돈도 아들을 잃고 난 후, 약값에 쓰느라 소비만 하고 보니 생활이 너무 곤란했다. 82년 10월 ,광주 공원에 있는 동물원의 매표 일을 하게 되었다. 성질이 괄괄하여 남의 밑에서 일을 한다는 일어 더러웠지만 당장 할 일이 없어 참고 참고하여 일을 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공무원이라고 티오도 없었고 , 3년 동안 일을 했지만 10여 만원 받고는 생활할 수가 없어 85년 사표를 내게 되었다. 그래서 82년 11월 전계량씨가 회장을 맡게 되어 지금까지 하고 있다.

전두환이가 광주에 온다고만 하면 3일 전에서 일주일 전부터 집 주위를 지키기 시작했다. 83년쯤, 전두환이가 온다고 해서 공단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유족 회원인 김길자, 박순례, 구선악, 정동순, 송영도 다섯이서 송영도씨 집에 모여서 프랑 카드를 써서 나가기로 결정했다. 마땅한 천이 없어, 이불 홑청을 뜯어서 매직으로 썼다. "내 자식 내놔라"하고 쓴 다음 몰래 빠져나가 공단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3시5분전이었다. 앞에서 오토바이 한 대가 달려왔다. 그때 프랑 카드를 펼쳐 들고 다섯 명이 도로로 나갔다. 당시 동에서 3천 원 에서 5천 원씩을 주고 손 흔드는 사람을 샀다는 것이다. 그때 그 군중 속에서 이름은 생각이 안나 지만, 부상자 동지 회의 한 청년이 나오더니, 그 오토바이를 발로 걷어 찼다. 그래서 차는 꼼짝도 안했다. 그러고 있는데 검은 차 3대가 보이고 전두환이가 손을 흔들며 왔다. 차가 쏜살같이 달려오다가 바로 앞에서 '끼익!'하며 멈췄다. 그때 전두환이를 보고

"네 이놈 살인마야! 너가 여기서 어디라고 손 흔들고 오냐! 내 자식 내놔라"

하고 있는데 경찰들이 와서는 서부 경찰서로 연행 해 갔다. 당시 서부 경찰서는 전두환의 경호 때문에 모든 경찰들이 출동해 버린 상태여서 경찰 5-6명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경찰서에 있는데, 부상자 동지 회 청년 십여 명이 와서는

"엄마들 여기서 뭐 하요? 엄마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여기 있소? 갑시다! "

하길래

"그래! 가자! "

하며 나오는데 그때 경찰들이 못 나가게 했다. 그러나 부상자 동지 회 청년들이 자기네들이 싸울 때 빨리 도망가라고 해서 넵다 도망쳐서 집으로 왔다. 다른 사람들은 집으로 안간 사람도 있었지만, 딸 하나 있는 것이 걱정돼서 집으로 안갈 수가 없었다. 집으로 갔지만 그래도 분통이 안 풀려 통장에게 쫓아 갔다.

"어째! 다른 사람들은 전두환이 온다고 3천 원 5천 원씩 주고 왜? 나한테는 말도 안 했소? 당신이 앞으로 세금을 받아 갈려고 그런 것이요? 안 받아 가려고 그런 것이요! 다른 사람들처럼 돈도 주고 차도 태워다 줘 봐? 나는 돈 안주고 차도 안태워다 줬지만 전두환이 만나고 온 사람이여?"

하고 육박 지르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경찰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하루 동안 서부 경찰서에서 살고 나왔다.

"누가? 누가? 발포 명령을 내렸나"

87년에는 노태우가 광주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실내 체육관으로 온다고 해서 매직을 사서 종이에 '내 자식을 돌려 달라'고 써 가지고는 실내 체육관 앞에서 기다렸다. 기다리고 있으니 노태우 차가 왔다. 준비해 간 계란을 마구 던지기 시작했다. 하나 둘씩 계란 세례를 받는 모습이 통쾌했다. 그때 써 간 프랑 카드를 고 방광범의 어머니와 함께 들고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노태우 경호원이 먼저 나와 유족들을 붙잡았고 구 뒤 경찰들에 의해 서부 경찰소 소속 기동대가 아니라 어린이 대공원 쪽에 있는 기동대로 끌려갔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니 서부 경찰서 식당으로 다시 옮겼다. 식당 마루에서 70여 시간을 지냈는데 당시 10명의 유족들과 구속되었던 적도 있었다.

87년 6월 16일, 태평 극장 앞에서 유족들과 시위를 하다가 전경들에게 구타를 당한 적도 있다. 얼굴을 얼마나 맞았는지 콧대가 나가고 눈이 빠지는 줄 알았다. 주위 사람들이

"음매! 저 아줌마 죽것네"

하며 적십자병원으로 옮겼다. 정신을 차리고 난 후, 적십자병원이란 것을 알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내 몸 아픈 것은 둘째 치더라도 내 아들 시체를 찾아 온 곳에 나까지 와야?' 하는 생각에 서러웠다. 그리고 올해 7월 11일에는 서울에서 고위 관리가 광주에 온다고 해서 양 이틀 동안 집 주위를 형사들이 지켰다.

그때 당시는 아무 것도 몰랐고, 내 자식 잃은 슬픔만 컸지만, 지금은 전국이 온 국민이, 민주화를 위해서 투쟁하고 죽어 가고 있다. 8년이 지난 지금에도 꼭 하나 알고 싶은 게 있다면, '왜? 아무런 죄도 없고 시위도 안한 사람들까지 누가? 누가? 죽이라고 발포 명령을 내렸는지, 난 그것을 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