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죽을 사람은 내가 아닌데…"
본문
"죽을 사람은 내가 아닌데…"
그해 5월의 태양은 유난히 뜨거웠다. 그리고, 그리고 우리들의 피와 살덩이를 삼키고 불어오는 바람은 계속되고 있었다.
효천 부락쪽으로 접어드는 백운동의 골목마다에서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는 구호가 터져 나왔고 '도청으로'라는 구호 소리에 따라 큰 도로로 사람들은 운집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계엄군의 M16의 총구에서는 무자비한 화염이 불을 뿜었고 사람들은 하나, 둘 맥없이 쓰러져 갔다. 운집해 있던 사람들은 쏟아지는 총탄을 피해 사력을 다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처절한 절규는 계속되었고 피비린내 나는 역겨움만이 후각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 갔다.
'죽음과 죽음을 뚫고 나아가 백의의 웃 자락을 펄럭이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 '광주를 가르고 질주하는 한 청년이었다.
김재흥! 80년 당시 숭일고 3학년에 재학 중인 그는 21세의 피 꿇는 청년이었다. 불의를 보면 굽힐 줄 몰랐고 정의를 사랑하는 정의파였다. 한 목숨 기꺼이 바쳐서 까지도……,
그는 백운동 외곽 도로 부근에서 계엄군의 유탄에 맞아 쓰러졌다. 후미진 골목에서 신음하던 김재흥 열사를 누군가 연탄 차에 싣고 남평 병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중상을 입어 '치료 불가능 '진단이 내려져 다시 나주시 영상동에 있는 조 외과로 옮겨졌다. 그 곳에서 왼쪽 다리와 오른쪽 발가락을 절단하는 대수술을 했는데 그 엄청난 고통을 소리 한번 지르지 않고 참아 냈던 김재흥 열사! 수술 후 왼쪽 다리로부터 전해지는 통증을 참아 내며 이를 악물고 참으려 했으나 육신을 잘라 내야 했던 기억을 더듬으며 그는 몸서리 쳐야 했다.
김재흥 열사의 집에서는 5월21일 친구 집에 잠시 다녀온다고 나간 자식의 행방이 묘연하자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혀 있을 무렵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나주에 사는 사람인데 열사의 딱한 사정을 듣고 광주까지 걸어나와 전화하는 것이라며 나주 조 외과로 가면 김재흥 열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란 내용이었다.
김재흥 열사의 어머니는 만날 래야 만날 수 없는 아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시울을 적시며 8년 전 그때를 회상했다.
어머니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조심히 입을 떼었다. 마치 감정의 굴곡을 완강히 배제하려는 듯이……
"전화를 받고 나주까지 걸어갔습니다. 자식이 뭔지 평소에 거기까지 걸어가라면 못갔을 겁니다. 계엄군이 지키고 있는 검문소를 지나 나주 조외과 가지 갔습니다. 아들이 있다는 병실에 들어서니 침대에 누워 '엄마'하고 애서 웃음을 띠며 반기는 재흥이를 보니 눈물이 앞을 가려 한 발짝도 띨 수도 없었습니다.
「제발 살아만 있어 다오」하며 가슴 조이며 달려 왔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은근히 욕심이 생기더군요 얼마나 다쳤을까? 상한 데는 없을까? 「아이고 내 새끼 어디 얼굴 좀 보세」하고 어루만지는 재흥이 눈에도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어머니는 말을 끝맺고 조용히 고개를 떨군 채 눈시울을 적셨다. 어린 나이에 혼자 감당해야 했을 고통이 얼마나 컸겠는가!
5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김 열사는 소문난 효자였고, 전교 1,2등을 다투는 수재였다. 항상 너그럽고 정이 많아 친구들 사이에서 사나이 중에 사나이로 통했고 특히 수학을 잘해 선생님들도 놀라는 '수학 박사'였다. 어머니는 김재흥 열사의 자랑을 하면서 못내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돌아 간지 8년이 가까워 오는 지금도 그의 기일에 묘소를 찾는 친구들이 있어 어머니의 가슴을 애태우고 있다.
김재흥 열사는 그후 나주 조 외과 병원에서 5월 30일까지 있다 적십자 병원으로 옮겼다. 7월 22일까지 치료를 받는 동안에 또 한차례 절단 수술을 받고 의족을 했다. 그 동안 학교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해 걱정은 되었지만 일단 예비고사를 치뤘다. "내 생명의 은인들께 은혜를 갚는 일은, 억울하게 폭도 누명을 쓰고 돌아가신 형님들의 누명을 벗기 위해서라도 꿋꿋히 살아가는 것일 겁니다"며 기어코 서울대 의대를 가서 이 땅에서 버림받은 이들을 돕겠다는 각오가 대단했다. 그러나 상처의 후유증이 심해 점차 썩어만 가는 육신을 바라보며 김재흥 열사 그는 말로 형언하기 힘든 좌절과 고통을 참아야 했으리라.
부모님의 한숨 소리를 의식하며 꿋꿋 하려 했을 것이고 '요주의 인물'로 낙인 찍혀 따가운 감시의 눈초리와 씨름을 했으리라 열사 혼자 집에 있을 때 가만히 있으라며 공갈 협박하기 일쑤였고, 열사만이 아닌 집안 식구들까지도 수모를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혼자 견디기 힘든 고통과의 싸움을 벌이면서 부모님 앞에 눈물 한번 보이지 않은 열사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매형을 붙잡고 "힘들어 죽겠어요 차라리 그때 죽었다면, 그러나 지금은 살고 싶습니다. 살이 썩는 고통, 병신으로 받는 수모 다 견딜 수 있어요 하지만 나의 행동을 죄인 취급하는 저들을 용서할 수는 없어요. 매형 살고 싶어요 살려주세요" 라며 대성 통곡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열사는 그렇게 살고 싶었음에도 상처 부위의 후유증으로 81년 3월 3일 전대 병원에서 짧은 생을 마쳤다.
열사에게 가장 큰 고통은 아마도 정의를 꺽어 버리려는 자들을 그대로 두고 떠나야 함이었으리라!
그해 5월의 태양은 유난히 뜨거웠다. 그리고, 그리고 우리들의 피와 살덩이를 삼키고 불어오는 바람은 계속되고 있었다.
효천 부락쪽으로 접어드는 백운동의 골목마다에서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는 구호가 터져 나왔고 '도청으로'라는 구호 소리에 따라 큰 도로로 사람들은 운집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계엄군의 M16의 총구에서는 무자비한 화염이 불을 뿜었고 사람들은 하나, 둘 맥없이 쓰러져 갔다. 운집해 있던 사람들은 쏟아지는 총탄을 피해 사력을 다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처절한 절규는 계속되었고 피비린내 나는 역겨움만이 후각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 갔다.
'죽음과 죽음을 뚫고 나아가 백의의 웃 자락을 펄럭이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 '광주를 가르고 질주하는 한 청년이었다.
김재흥! 80년 당시 숭일고 3학년에 재학 중인 그는 21세의 피 꿇는 청년이었다. 불의를 보면 굽힐 줄 몰랐고 정의를 사랑하는 정의파였다. 한 목숨 기꺼이 바쳐서 까지도……,
그는 백운동 외곽 도로 부근에서 계엄군의 유탄에 맞아 쓰러졌다. 후미진 골목에서 신음하던 김재흥 열사를 누군가 연탄 차에 싣고 남평 병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중상을 입어 '치료 불가능 '진단이 내려져 다시 나주시 영상동에 있는 조 외과로 옮겨졌다. 그 곳에서 왼쪽 다리와 오른쪽 발가락을 절단하는 대수술을 했는데 그 엄청난 고통을 소리 한번 지르지 않고 참아 냈던 김재흥 열사! 수술 후 왼쪽 다리로부터 전해지는 통증을 참아 내며 이를 악물고 참으려 했으나 육신을 잘라 내야 했던 기억을 더듬으며 그는 몸서리 쳐야 했다.
김재흥 열사의 집에서는 5월21일 친구 집에 잠시 다녀온다고 나간 자식의 행방이 묘연하자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혀 있을 무렵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나주에 사는 사람인데 열사의 딱한 사정을 듣고 광주까지 걸어나와 전화하는 것이라며 나주 조 외과로 가면 김재흥 열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란 내용이었다.
김재흥 열사의 어머니는 만날 래야 만날 수 없는 아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시울을 적시며 8년 전 그때를 회상했다.
어머니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조심히 입을 떼었다. 마치 감정의 굴곡을 완강히 배제하려는 듯이……
"전화를 받고 나주까지 걸어갔습니다. 자식이 뭔지 평소에 거기까지 걸어가라면 못갔을 겁니다. 계엄군이 지키고 있는 검문소를 지나 나주 조외과 가지 갔습니다. 아들이 있다는 병실에 들어서니 침대에 누워 '엄마'하고 애서 웃음을 띠며 반기는 재흥이를 보니 눈물이 앞을 가려 한 발짝도 띨 수도 없었습니다.
「제발 살아만 있어 다오」하며 가슴 조이며 달려 왔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은근히 욕심이 생기더군요 얼마나 다쳤을까? 상한 데는 없을까? 「아이고 내 새끼 어디 얼굴 좀 보세」하고 어루만지는 재흥이 눈에도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어머니는 말을 끝맺고 조용히 고개를 떨군 채 눈시울을 적셨다. 어린 나이에 혼자 감당해야 했을 고통이 얼마나 컸겠는가!
5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김 열사는 소문난 효자였고, 전교 1,2등을 다투는 수재였다. 항상 너그럽고 정이 많아 친구들 사이에서 사나이 중에 사나이로 통했고 특히 수학을 잘해 선생님들도 놀라는 '수학 박사'였다. 어머니는 김재흥 열사의 자랑을 하면서 못내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돌아 간지 8년이 가까워 오는 지금도 그의 기일에 묘소를 찾는 친구들이 있어 어머니의 가슴을 애태우고 있다.
김재흥 열사는 그후 나주 조 외과 병원에서 5월 30일까지 있다 적십자 병원으로 옮겼다. 7월 22일까지 치료를 받는 동안에 또 한차례 절단 수술을 받고 의족을 했다. 그 동안 학교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해 걱정은 되었지만 일단 예비고사를 치뤘다. "내 생명의 은인들께 은혜를 갚는 일은, 억울하게 폭도 누명을 쓰고 돌아가신 형님들의 누명을 벗기 위해서라도 꿋꿋히 살아가는 것일 겁니다"며 기어코 서울대 의대를 가서 이 땅에서 버림받은 이들을 돕겠다는 각오가 대단했다. 그러나 상처의 후유증이 심해 점차 썩어만 가는 육신을 바라보며 김재흥 열사 그는 말로 형언하기 힘든 좌절과 고통을 참아야 했으리라.
부모님의 한숨 소리를 의식하며 꿋꿋 하려 했을 것이고 '요주의 인물'로 낙인 찍혀 따가운 감시의 눈초리와 씨름을 했으리라 열사 혼자 집에 있을 때 가만히 있으라며 공갈 협박하기 일쑤였고, 열사만이 아닌 집안 식구들까지도 수모를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혼자 견디기 힘든 고통과의 싸움을 벌이면서 부모님 앞에 눈물 한번 보이지 않은 열사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매형을 붙잡고 "힘들어 죽겠어요 차라리 그때 죽었다면, 그러나 지금은 살고 싶습니다. 살이 썩는 고통, 병신으로 받는 수모 다 견딜 수 있어요 하지만 나의 행동을 죄인 취급하는 저들을 용서할 수는 없어요. 매형 살고 싶어요 살려주세요" 라며 대성 통곡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열사는 그렇게 살고 싶었음에도 상처 부위의 후유증으로 81년 3월 3일 전대 병원에서 짧은 생을 마쳤다.
열사에게 가장 큰 고통은 아마도 정의를 꺽어 버리려는 자들을 그대로 두고 떠나야 함이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