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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새로 밝혀진 광주항쟁 희생자들/사상자 신고 접수창구에 비친 실태.임낙평(월간중앙, 1988. 7)

본문

새로 밝혀진 광주 항쟁 희생자들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

광주 민중 항쟁으로부터 8년. 그 동안 이 땅의 현대사에 내란 폭동을 야기한 폭도로 오인되어 강요된 침묵 속에 압박을 받으며 살아온 지난 8년은 5.18사망자를 포함한 모든 당사자 시민들에게 치욕의 나날이었다.

이제 8주기를 맞아 진압의 총성이 멎은 순간부터 계속 되어 왔던 투쟁의 결과 아무런 제지 없이 망월동 묘역을 참배할 수 있게 되었다. 13대 국회 계원에 이은 이번 임시국회에서도 5공화국 비리 등과 아울러 광주 항쟁 진상 규명 대한 논의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해질 전망이다.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상황 변화들이다.

이 땅의 모든 국민은 5.18 항쟁의 정확한 진상을 알고 싶어한다. 왜 계엄령을 발동했고, 왜 광주 시민들을 살상했으며 누가 발포 명령을 내렸는지 그리고 얼마나 죽었고 어떻게 죽었는지 … 이러한 진실이 낱낱이 밝혀져 책임자들이 마땅히 역사 앞에 단죄되기를 국민 대중이 원하고 있다.

노태우 대통령은 6공화국의 출범과 동시에 광주 사태의 치유책을 발표했다. 그것은 「폭도들의 난동」으로 규정했던 광주 항쟁을 「학생. 시민의 민주화 운동의 일환」으로 재 규정하고 국민 화합의 차원에서 국민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피해를 보상하겠다는 것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재야 민주 단체들은 체제 유지를 위한 합법성과 정통성을 인정받고 도덕성을 확인하기 위한 호도책이라 비난했으며, 진정 국민 화합을 기하자면 진상 규명부터 해야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쨌든 노태우 정부는 이와 같은 일련의 치유책을 현실화해, 광주직할시에「광주 사태 치유 지원 대책 협의회」를 설치하고 우선 사상자의 추가 접수를 받기 시작했다. 5월 18일,「지원 대책 협의회」는 시청과 도청에 사상자 접수 창구를 개설하고, 각 언론사에도 협조를 구하는 등 과거와는 다른 전진적 자세를 취하며 접수를 시작했다. 「지원 대책 협의회」는 1개월간의 접수를 토대로 사망자. 행방 불명자. 부상자의 적격 여부를 심사한 다음 정부와 적절한 보상책을 강구한다고 밝혔다.

그 동안 정부 당국은 항쟁의 인명 피해를 사망 1백91명(군인 포함), 부상 8백 52명으로 최종 발표했으며 더도 덜도 없다고 없었다. 특히 5월 관련 단체들과 항쟁 현장을 살아온 광주 시민들은 수긍할 수 없었다. 오히려 외신 보도에 의한 「2천명 사망 설」을 믿으며 정부의 발표를 무시했다.

과연 어느 정도의 사상자가 났느냐는 문제는 정확한 진상 규명을 해야 알 수 있다. 이 글은 각 사상자 접수창구에 나타난 사상자들의 사연을 통해 새롭게 밝혀진 진실들을 소개하고자 한 것이다.

하루아침에 사라진 네 가족

전남 도청 항쟁 사상자 접수처와 평민당 광주 서구갑 지구 당사에 설치된 사상자 신고소 (88년 6월2일 개소)에 김금희부인 (35. 농업. 무안군 몽탄면 다산리)은 지난 80년 5월 20일, 몽탄역에서 의정부의 집(큰딸과 함께 살았음)으로 가기 위해 열차를 타고 광주로 떠났던 어머니 박소예 씨(당시 57세)를 비롯하여 남동생 김병권(당시 23세). 병태(당시 14세)그리고 자신의 아들 박관진(당시 5세)등 4명의 가족이 실종되었다고 호소해 왔다. 이들은 이날 오전 10시30분 열차를 타고 광주로 가서 고속버스 편으로 갈아타고 서울을 걸쳐 의정부로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10여일 후 김 부인은 의정부의 언니로부터 『어머니가 왜 안 올라오시냐』는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다. 김 부인은 엄청난 사상자를 냈던 광주 사태를 연상했다. 광주 역에 내려 고속버스터미널로 가던 중 사고를 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섬뜩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으나 차마 일가족이 함께 당할 수가 있겠느냐고 자위했다.

그러면서 갈 만 한 곳은 찾아다녔고, 혹시나 하는 곳에 연락을 취해 봤으나 허사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찾을 길이 막연했다. 이웃 사람들은 필경 광주에서 무슨 일을 당했을 거라는 눈치였고 , 김 부인도 마침내 그런 쪽으로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김 부인의 가족이 고속버스를 타기 위해 광주로 떠났던 5월20일 계엄군이 시민을 체포하고 살상했던 때였다. 특히 4명의 가족이 광주 역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광주 역 부근 및 시가지 전역에서 시민들과 계엄군 사이에 대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지금도 김 부인은 3년 후 적금을 타고 고향 몽탄에서 함께 살자던 어머니의 말이 생각나고, 당시 만 5살이었던 아들 광진 이의 재롱이 눈앞에 아른거린다고 했다. 85년 6월 정부에서 광주 사태 피해자 신고를 받았을 때 김 부인은 이웃 사람들의 권유로 행방 불명자 신고를 했으나 물증이 없다는 이유로 접수조차 해주지 않았다고 밝혔다. 보상금 타려는 속셈이 아니냐는 의혹의 눈초리를 받으며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8년 동안 소식이 없으니 돌아가신 것만은 확실한데, 유골이라도 있다면 제사라도 모실텐데…』라며 김 부인은 울먹이며 말끝을 맺지 못했다. 이번 도청 사상자 접수처에 접수할 때는 부락 이웃들과 이장, 면장 그리고 몽탄 교회 목사가 모두 증인으로 나서 주었다.

우리는 여기서 지난 2월 민주화합추진위원회에 증언을 하기 위해 휠체어를 타고 참석했던 김래향 양 일가족 부상 경위를 살펴봄으로써 김부인 가족들의 생사 여부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신문에 자세히 보도된 바와 같이 김래향양 가족들은 아무런 잘못도 없이 계엄군으로부터 무차별 총격을 받고 부상했던 것이다.

5.18당시 송원고 2학년이었던 김기운군 (당시 18세)도 행불자의 한사람, 김군은 학동에서 뒷바라지를 해주는 할머니와 함께 자취 생활을 하고 있었다. 5월20일 저녁 집으로 돌아온 그는 할머니에게 시내의 처절한 상황을 화제로 삼으면서 『대학생 선배님들의 고생이 말이 아니더라』고 했다. 할머니는 『무서우니 절대 밖에 나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이튿날인 21일 김군은 친구와 함께 『잠깐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갔다. 그리고 소식이 두절되었다.

21일은 항쟁 전 기간 동안을 통해 가장 치열한 상황이 빚어진 날이었다. 사상자의 숫자도 가장 많은 날이며 계엄군이 정식 발포한 날이며 또한 시민들이 무장한 날이었다. 바로 이날 김 군은 시내에 나간 것이며 혈기왕성한 고교생으로 싸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김기운 군이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없어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항쟁이 진압된 뒤 소식을 듣고 달려온 가족들은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죽었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시신만이라도 거두기 위해 시청과 도청과 망월동을 뒤졌다. 항간의 암매장 소문을 쫓아 변두리 외곽지역의 야산을 뒤지기도 했다.

시신을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살아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살아온 그의 부모는 지난 8년 동안 대문을 열어 두고 기다려 왔다. 김군 부모는 85년 5.18관련 희생자 접수 당시 행불자로 확인해 달라고 했으나 『증거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행방 불명자 가족의 아픔

『시신 있는 사람은 장사라도 지내고 묘지라도 있고 제사라도 지내지만 우리는 확실히 죽었다고 믿으면서도 증거가 없어 미칠 지경』이라고 말하는 김기운군 가족의 말처럼 행불자 가족이 겪는 슬픔은 형언할 수 없다.

80년 6월과 85년 6월 정부는 5.18관련 피해자의 신고를 받았다. 이에다라 일부 행불자 가족들은 신고 처에 접수했으나, 접수마저 받아 주지 않을 경우가 태반이었고 설령 받아들였더라도 「광주 사태와 무관」이란 딱지를 붙여 반려했다.

행방 불명자 (혹은 실종자)는 당시 계엄 당국이 취한 철저한 사실 은폐와 관련이 있다. 암매장했거나 이와 유사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어째서 「산사람」이 일시에 사라졌는지 해명할 길이 없을 것이다.

6월 9일 현재 광주 시청(전남 도청 포함)에 행 불자로 접수된 사람이 47명, 평민당 신고소와 유족회에 접수된 사람이 각각 5명으로 전체 57명이다. 여기에다 5.18 광주 민중 항쟁 행불자 가족 회(회장 박준배.54)에서 접수한 80-1백 명과 합하면 다소 2중으로 신고했다 할지라도 1백 여명이 훨씬 넘는 숫자다. 정부 당국이 발표한 5.18민간인 사망자 1백 64명과 거의 맞먹는 엄청난 숫자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실종자의 접수를 정부 당국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주목된다. 지난 5월 10일 행 불자 가족들은 동병상련의 자세로 앞으로 전개될 상황에 공동 대처하기 위해 행불자 가족 회를 창립해 지금까지 활동해 오고 있다.

행불자 가족 회 총무인 허청씨는 『아들딸이 뻔히 희생된 줄 알면서도 지금까지 신고조차 못해왔다. 또한 물증이 없다고 포기 해 버리거나 또 다른 피해를 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경우도 있다』며 『당국이 보유한 자료를 공개해 유골이라도 찾을 수 있도록 해주면 여한이 없겠다』고 말하고 있다.

현장의 죽음보다 더 비통한 죽음

박종화씨(당시 20세, 나주군 반납면 덕산리)는 5.18 당시 집안일을 돌보며 군 입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광주 항쟁의 무서운 소식이 시골까지 들려와 온 시골이 야단이었다. 특히 한 명의 가족이라도 광주에 둔 사람들은 더했다. 그래서 그는 사이드 카를 타고 동생 박종효군(당시 전남 고3년)이 있는 광주 임동 하숙집으로 달려갔다. 동생은 아무일 없이 하숙집에 있었다. 동생의 안부를 확인한 그는 동생에게 몸조심하도록 당부하고 다시 사이드카에 몸을 싣고 나주로 향했다.

사건은 공설 운동장 부근에서 벌어졌다.

사건은 공설운동장 부근에서 벌어졌다. 검문을 받은 그는 계엄군들에게 죽도록 얻어맞고 군용 트럭에 실려졌다. 상무대 계엄 분소로 끌려간 그는 잡혀 온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다시 얻어맞았다. 그리고 40여일 만에 훈방되었다. 그러나 그의 육체와 정신은 망가져 있었다. 오른발이 마비되고 손이 뒤틀린 채 눈빛까지 변한 상태로 세상에 나온 것이다. 치료를 통해 외상은 치유됐으나 정신은 맑지를 못했다. 그래도 박씨는 입대했다. 그렇지만 그 얼마 후 정신 질환로 불명예 제대하고 가족들 앞에 나타났다.

가족들은 박씨의 치료를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허사였고 증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박씨는 호전과 악화를 몇 차례 반복하다 83년 6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광주는 광주 항쟁 당시 연행 자가 2천5백 22명이며 6백 16명만을 군법 재판에 회부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훈방했다고 밝혔다.

여하튼 계엄군에 끌려간 학생. 시민들은 박씨처럼 구타를 당해야 했다. 그래서 지금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실정이다. 재판에 회부된 「폭도」6백 16명의 고난은 휠씬 더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정종월씨 (당시 19세. 함평군 나산면 이문리)는 직장을 퇴근하고 가다가 난데없이 나타난 군인들에 의해 M16개머리판과 곤봉으로 구타당하고 화학탄에 의해 화상을 입은 채 교도소 (당시 계엄군이 임시로 사용)에 수감되었다. 이미 중환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기서 또 당했다. 풀려 나왔을 때 내 몸이 아니었다. 갖은 약을 다 써 봤으나 효용이 없었고 병원치료는 엄두도 못 낸 채 후유증으로 시달리고 85년에 결국 숨졌다. 그의 나이 24세때였다.

슬하에 3자녀를 두고 있던 김영임 부인(당시 31세. 광주시 서구 서 3동 131번지)은 21일 치열한 금남로의 시위를 멀리서 바라보고 있다가 한국 은행 광주 지점 옥상에서 줄타고 내려온 계엄군들에게 순식간에 난타 당했다. 그리고 실신했다 깨어 집에 돌아온 김 부인은 머리와 얼굴에 30바늘을 꽤매는 상처를 입고 입원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완치가 되지 않았고 뇌손상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82년 9월 사망했다. 그동안 남편은 무조건 「폭도가 족」운운하는 바람에 하소연도 못하고 있다가 사정을 다 아는 이웃 사람들의 권고로 이번에 부인의 죽음을 신고한 것이다.

항쟁 당시 부상당해 그후 후유증으로 이와 같이 숨진 사람은 6월 9일 현재 27명으로 파악되었다. 여기에 부상자 회(회장 박지현 )가 파악한 인원을 합산하면 대략 40여명이 될 것이다.

새로운 사망자들

엄영주양(당시 조대 여중 2년. 광주 고속 안내원)은 연탄 가게를 운영하는 부모님과 가난하지만 단란한 가정 속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처님 오신 날인 5월 22일 저녁 11시 연탄 배달을 나갔던 엄 양의 어머니 신서운씨(당시 47세. 광주시 광산구 월곡동 496-15)가 계엄군이 쏜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엄 양의 아버지는 피투성이가 된 시신을 거두었고, 그와 중에도 관을 구해와 장례를 치렸다. 엄 양은 25일 어머니의 시신을 실은 리어카를 끌고 가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 서방 사거리에서 화순까지 걸어야 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어머니의 장례식이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충격을 술로 세월을 보냈다. 엄양의 아버지는 그 참혹했던 일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산기가 있어 병원에 가야 하는 조오남 부인(당시 34. 광주시 동구 소태동 292)은 뒷산에 매복한 군인들이 계속 사격을 가해와 집을 나설 수가 없었던 케이스, 조 부인은 병원에 가기를 포기한 채 죽음과 같은 고통 속에 출산하다가 아기와 함께 숨을 거두었다.

이번에 파악된 새로운 사망자는 유족 회의 확인 분과 시청의 접수 분을 합하여 6월 9일 현재 10명(표3 참조)이다. 광주에 둔 자식을 찾으러 오다가 죽은 경우도 있고, 대검에 찔리고, 총탄에 사망한 경우도 있다.

부상 후유증으로 시달리는 사람들

항쟁 당시 무등 중 3년 생인 나병남 군(66년생, 광주시 풍향동 427-3) 초파일 하루 전날 시내에 나갔던 나 군이 밤 이 되었는데도 귀가하지 않자 부모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요란한 총소리가 전쟁처럼 들리고 시가지가 시민들의 분노로 가득차 있다는 소문이 나 군의 부모를 시내로 나가게 했다. 시내를 한바퀴 돌며 계엄군의 만행을 목격한 나 군의 부모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시가지를 헤맸으나 찾을 길이 묘연했다. 나 군은 다음날 낮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부모는 반가와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런데 나 군의 눈빛이 풀려 있었고 온몸은 상처 투성 이었다. 게다가 얼굴과 머리의 상처는 대수롭게 여겨서는 안될 것 같았다. 그렇지만 죽은 사람도 있는 판에 이 정도는 다행이라고 나 군의 부모는 자위했다.

그런데 멀지않아 이상한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비실비실 혼자 웃거나 ,정신없이 혼자 쏘다니며 공부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말귀까지 못 알아 듣는 것이었다.

나 군의 부모는 학교를 휴학시키고 지압과 침을 한방약으로 치료를 했으나 허사였다. 할 수 없이 나주 정신 병원에 입원시켰다가 입원비 등의 문제로 무등산 어느 기도원 에 나 군을 맡겼다. 그 뒤 나 군의 아버지는 홧 병으로 별세했으며, 지금 나 군은 사회 복지 법인 인성 원에 수용되어 있다. 나 군의 어머니는 나 군의 정신병이 5월 때문에 생겼다고 믿고 있지만 화실한 증거가 없이 머뭇거리다가 이웃 사람들의 권고로 이번에 신고했다.

임동복씨(30. 광주시 북구 두암동 180-1)는 양림교 부근에서 계엄군에게 무차별 구타를 당해 머리를 다쳤다. 그후 집을 포함한 모든 재산을 병원 비로 탕진하는 바람에 셋방살이로 전락한 그의 부모는 오늘도 「기도원」에 가 있는 아들이 어서 빨리 완쾌되기만을 기도하고 있다.

이경규씨(30. 광주시 북구 용봉동 31-1)는 가사 일을 돌보다 5.18을 만났다. 21일 전남대 정문 부근에서 시민들 사이에 있다 계엄군에게 체포되었다. 그리고 역시 난타 당했다. 계엄군은 그를 질질 끌고 그들이 진주한 전남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그의 부친은 죽었다고 아예 포기했다. 그리고 정신나간 사람처럼 각, 병원의 시체실을 뒤졌다.

진압이 끝나고 한참 후에 동사무소로부터 『상무대에 가서 아들을 데려가라』는 전화를 받았다. 아들 경규는 옛날의 그가 아니었다. 눈의 초점이 흐렸고 전신이 구타당해 눈뜨고 볼 수 없었으며, 「멍청이」가 되어 있었다.

집안 형편상 병원에 갈 수 없어 단방 약이나 침으로 치료했다. 그러나 증세는 약화되었고 오늘에 이르렀다. 사람을 무서워하고 말이 없으며 의복을 갈아입을 줄 모른다. 밥만 먹으면 나갔다가 저녁때 들어오기가 일쑤이고 심지어 세수도 안 한다.

이번에 파악된 부상자들 중, 위와 같은 정신 질환 자가 26명으로 새로 파악된 부상자 중 거의 10%에 가깝다. 정신 질환자는 머리를 다쳐 발생한 케이스가 대부분 이다.

희생양이 되 정은철씨

『「저놈 잡아라」 「저기 간다」는 고함소리와 동시에 거리는 삽시간에 지옥으로 변했다. D일보 광주 지국(당시 북동 소재)도 예외는 아니었다. 계엄군들이 사무실에 처들어 왔다…무조건 젊은이를 난타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기자 경력 15년 쨰인 필자도 무섭기는 마찬가지였다. 실신 상태에까지 이른 젊은이를 끌고 나갔다…또다시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이날 출근한 정은철 총무는 자기 책상에 앉아 있었다. 두 군인은 정총무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그리고 마구 밟고 개머리판으로 때렸다. 우리 직원이라는 얘기도 안 통했다. 그리고 잠시 후 죽은 짐승을 끌고 가듯 내려갔다 …』(『10일간의 취재 수첩』<김영택저 사계절 출판사간>에서 인용).

이렇게 끌려간 정은철씨(본명 정영희 .30. 광주시 금곡동 198-1)는 덤프트럭에 던져져 상무대로 끌려갔다. 그리고 말할 수 없이 구타를 당했다. 살아 있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당했다는 것이다. 3-4일 후 훈방되었으나 하반신 마비 증세가 왔다. 가난한 부모님은 병원에 입원시킬 돈이 없어 침이나 단방 약을 구해 치료했다. 그러나 증세는 더욱 악화되어 갈 뿐이었다.

이렇게 해서 정은철씨는 하반신 마비에다 오른손을 못쓰는 불구의 몸이 되었다. 대소변을 할머니와 어머니가 교대로 받아 내고 있으며 수발하는 사람이 한 명 딸려야 하는 상태다. 정씨의 부모는 『빈곤한 생계라 병원 한번 가보지 못하고 약 한번 제대로 써 보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라고 아픈 심정을 토로했다.

그 동안 고통 속에 살아온 정씨는 악몽의 며칠간을 떠올리기 싫은 나머지 자신이 5월의 피해자란 사실을 애써 망각하려고 했다는 것.

지난 5월부터 새로 밝혀진 부상자는 시청 등 접수한 2백 70여명에 기존 부상자 동지 회에 접수한 2백 여명을 포함, 약 5백 여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중증 환자도 상당하며 즉시 치료를 요하는 환자도 있다.

5공화국 체제에서 공식 발표한 「사망자 1백91명 부상자 8백 52명」이라는 숫자는 이번 시청의 접수를 통해서 완전히 허구임이 증명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