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죽은 자식, 부모 가슴에 묻는 게여/황호걸 열사(국민신문, 1988. 7)
본문
묘지번호 58, 황호걸 열사
"죽은 자식, 부모 가슴에 묻는 게여"
강희주 기자
본지 오월 인물사 취재를 위해 기자가 찾아간 곳은 지산2동 712-50번지에 자리잡은 낡았지만 아담한 황호걸 열사의 집이었다. 초행인데도 집을 쉽게 찾을 수 있어 안도의 숨을 내쉬며 벨을 눌렀다. 황호걸열사 어머님이 반갑게 맞아 주어 집안으로 들어섰다. 그때 마당 귀퉁이에 묶여져 있던 세퍼드 한 마리가 곧 물어 뜯을 듯 짖어대기 시작했다. 겁이 나서 주춤거리는데 황열사 어머님께선 개를 잡아 붙들며 "가만 있어라. 이분은 귀한 손님이시다"며 개의 머리를 쓰다듬자 아까까지 기세 좋게 짖어대던 개는 이내 잠잠해졌다.
황호걸열사의 아버님 황길현(59)씨와 어머님 최순자(55)씨의 안내로 마루에 자리를 잡았다. 마루 여기 저기에 열사의 사진과 봉투들이 흐트러져 있는 것을 보아 기자가 오기 직전까지도 열사의 애기를 하시다 눈물지었음이 분명하리라.
미리 연락드리고 찾아뵌 탓으로 간단히 인사드리고 애기를 나누었다. 황열사는 복덕방을 하시는 아버님 슬하의 3남3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열사의 튼형이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 신체가 불편한 탓으로 황호걸열사는 어려서부터 4대 장손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자랐다. 부모님에게는 더없는 희망이고 기둥이었으며 나이 어린 동생들에게는 항상 자상하고 우애가 두터운 오빠요, 형이었다. 열사는 집안형편이 어려윘기 때문에 학업을 중도에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어린나이에도 가슴의 상처를 묻어버리고 몸이 불편한 형을 대학에 진학시켜야 한다고 했단다. 동신중학교를 졸업한 후 노동직업훈련소에서 2급 자격증을 따 화천기공사에 입사했다.1년여동안 근무하면서 새벽에 출근하여 저녘 늦게까지 야근하는 고달픈 노동자의 생활에도 아랑곳하지 안하고 얼굴에는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았던 열사! 그는 매월 15만원(그 당시 액수)씩을 집에 들여 놓으면서도 푼푼히 쪼개어 "어머니 여름에 김치 시어진다고 걱정하셨지요?냉장고 월부로 샀읍니다"하며 냉장고를 집에 들여 놓았단다. 열사의 어머님은 지금도 그 냉장고를 나루에 고이 간직하고 행여나 흠이라도 생길새라 날마다 수건으로 열사의 얼굴을 씻겨주듯 닦아 낸다는 것이다. 어머님은 황열사에게 "아가 인제 그만하고 고등학교에 가야지 친구들은 고등학교에 다닌다고 하는데 너만 이럴 수 있냐, 내가 뭣을 하더라도 너 고등하교 못보내것냐?"하시면 열사는 "어머니 그런 건 개의치 마세요. 그리고 조금만 기다리세요. 열심히 돈벌어서 군대 가기 전에 부모님 생신때에는 여행도 보내 드리고 근사하게 해드릴께요"하며 어머님의 거치른 두 손을 기름때 묻은 손으로 감싸 쥐었던 황호걸열사! 그는 부모님 마음 편하게 해드리려고 어린나이에 감당키 어려운 가슴앓이를 얼마나 했을까!
그후 1년동안의 공장생활을 마치고 열사는 78년 광주제일고등하교에 입학했다. 진학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항상 마음에 걸리는게 많았으리라.
열사는 학교에서는 사교성이 좋아 친구들 사이에서 "괜찮은 놈"으로 통했다고 한다. 친구가 돈이 없어 걸어갈라치면 자신은 걸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친구를 꼭 버스에 태워 보냈다는 착한 심성은 듣는이로 하여금 마음을 숙연하게 했다. 말하고 있는 어머님의 눈가엔 언제부터인가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8년전 그해는 열사가 고3의 수험생이었다. 그러나 5월 21일! 열사의 중학교 동창이었던 막역지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열사는 밥도 먹지 않고 책상머리에 앉아 공부한다며 무언가 골똘히 생각했다고 아버님은 회상한다. 그 다음날(22일) 아무말 없이 방안에만 앉아 있기에 부모님은 "다른 생각말고 공부나 해라"고 당부하고 외출하고 들어오셨는데 그 사이 열사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하루가 지난 23일까지도 열사가 들어오지 않자 전대,조대,기독교 병원, 도청, 상무대 할 것 없이 찾아 헤매도 열사의 모습은 찾을 길 없었다고 한다.
가슴 조이며 살아 있기만을 간절히 바라던 닷새의 시간이 흐른 29일 저녁 동네 통장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열사의 시신이 전대병원 영안실에 있다는것이었다. 주민증록증이 있어 시신확인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 소리를 듣고 가슴이 떨리고 몸에 기운이 빠져 어떻게 겨우 가보니 시체 9구가 거적으로 덮혀 있었어요. 거적을 걷고 아들의 시신을 보니 얼굴은 알아볼 수 없게 일그러져 있고 배에 총을 맞았는지 온통 피범벅인데 군데군데 멍자욱이 선연했습니다. 죽은지 며칠이 지난후라 옷은 썩어 없어졌고 얼굴에 구데기가 들끊고 있었는데 우리 호걸이의 그때 모습은 죽어도 잊지 못할 것입,..." 어머님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남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는지 안방으로 들어가 소리 죽여 울기 시작했다. 한동안 무거운 분위기에 눌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무도 감히 그 정적을 깨뜨리기 어려윘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뒤에 아버님이 입을 열었다. "저 사람은 호걸이를 일은 충격으로 한쪽눈이 실명되고 심장병까지 앓았읍니 . 큰 놈이 소아마비로 제대로 걷지 못해 그놈이 아장아장 걷게되자 우리는 얼마나 오지고 기뻤는지..." 아버님도 눈가에 흘러 내리는 눈물을 훔쳤다. 황열사는 의병장이셨던 할아버님의 모습을 그대로 빼닮았다고 한다. 아버님께서는 "그래서 그놈 이름도 할아버지의 큰 뜻 이어 받으라고 '호걸'이로 지었습니다. 피는 못속이는 겁니다."라고 하며 아들의 죽음을 대견해 한는게 역력히 드러나 보였다. 현재 정부에서 광주문제에 대한 진상규명 운운하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아버님께서는정부차원의 해결이 아니라 국민의 힘에 의해 처벌받을 놈들은 처벌을 마땅히 받아야 하는데 현 정권이 유지되는 한 올바른 진상규명은 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 또한 아직도 호걸이를 폭도로 매도하고 있는데 어째서 우리 아들이 폭도냐고 반문하였다.
아버님께서는 감저으이 격분을 참지 못하고 이 말만은 꼭 해야 한다며 오열을 터트렸다. "전두환이 노태우 코를 꿰어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다 죽어도 내 원이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치를 떨었다.
그날 이후 8년이란 긴 세월이 지나도 그 분노의 각인을 지우지 못했을까! 방관자, 제3자의 위치에 선 우리에겐 그날의 비극이 잊혀져 가는 상혼일 따름인가?
나설 때 개가 다시 짖어대기 시작했다. 어쩌면 내 살아 있음의 질타일까? 8년이란 세월도 결국 부모와 자식, 산자와 죽은자의 거리를 멀게까지는 못하는가 보다 "안녕히 계십시오" 부끄러운 인사치레로 대문을 나서는 기자의 등뒤로 황열사 어머님의 목메인 중얼거림이 들렸다. "부모는 죽은 자싯을 가슴에 묻는게여".
"죽은 자식, 부모 가슴에 묻는 게여"
강희주 기자
본지 오월 인물사 취재를 위해 기자가 찾아간 곳은 지산2동 712-50번지에 자리잡은 낡았지만 아담한 황호걸 열사의 집이었다. 초행인데도 집을 쉽게 찾을 수 있어 안도의 숨을 내쉬며 벨을 눌렀다. 황호걸열사 어머님이 반갑게 맞아 주어 집안으로 들어섰다. 그때 마당 귀퉁이에 묶여져 있던 세퍼드 한 마리가 곧 물어 뜯을 듯 짖어대기 시작했다. 겁이 나서 주춤거리는데 황열사 어머님께선 개를 잡아 붙들며 "가만 있어라. 이분은 귀한 손님이시다"며 개의 머리를 쓰다듬자 아까까지 기세 좋게 짖어대던 개는 이내 잠잠해졌다.
황호걸열사의 아버님 황길현(59)씨와 어머님 최순자(55)씨의 안내로 마루에 자리를 잡았다. 마루 여기 저기에 열사의 사진과 봉투들이 흐트러져 있는 것을 보아 기자가 오기 직전까지도 열사의 애기를 하시다 눈물지었음이 분명하리라.
미리 연락드리고 찾아뵌 탓으로 간단히 인사드리고 애기를 나누었다. 황열사는 복덕방을 하시는 아버님 슬하의 3남3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열사의 튼형이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 신체가 불편한 탓으로 황호걸열사는 어려서부터 4대 장손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자랐다. 부모님에게는 더없는 희망이고 기둥이었으며 나이 어린 동생들에게는 항상 자상하고 우애가 두터운 오빠요, 형이었다. 열사는 집안형편이 어려윘기 때문에 학업을 중도에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어린나이에도 가슴의 상처를 묻어버리고 몸이 불편한 형을 대학에 진학시켜야 한다고 했단다. 동신중학교를 졸업한 후 노동직업훈련소에서 2급 자격증을 따 화천기공사에 입사했다.1년여동안 근무하면서 새벽에 출근하여 저녘 늦게까지 야근하는 고달픈 노동자의 생활에도 아랑곳하지 안하고 얼굴에는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았던 열사! 그는 매월 15만원(그 당시 액수)씩을 집에 들여 놓으면서도 푼푼히 쪼개어 "어머니 여름에 김치 시어진다고 걱정하셨지요?냉장고 월부로 샀읍니다"하며 냉장고를 집에 들여 놓았단다. 열사의 어머님은 지금도 그 냉장고를 나루에 고이 간직하고 행여나 흠이라도 생길새라 날마다 수건으로 열사의 얼굴을 씻겨주듯 닦아 낸다는 것이다. 어머님은 황열사에게 "아가 인제 그만하고 고등학교에 가야지 친구들은 고등학교에 다닌다고 하는데 너만 이럴 수 있냐, 내가 뭣을 하더라도 너 고등하교 못보내것냐?"하시면 열사는 "어머니 그런 건 개의치 마세요. 그리고 조금만 기다리세요. 열심히 돈벌어서 군대 가기 전에 부모님 생신때에는 여행도 보내 드리고 근사하게 해드릴께요"하며 어머님의 거치른 두 손을 기름때 묻은 손으로 감싸 쥐었던 황호걸열사! 그는 부모님 마음 편하게 해드리려고 어린나이에 감당키 어려운 가슴앓이를 얼마나 했을까!
그후 1년동안의 공장생활을 마치고 열사는 78년 광주제일고등하교에 입학했다. 진학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항상 마음에 걸리는게 많았으리라.
열사는 학교에서는 사교성이 좋아 친구들 사이에서 "괜찮은 놈"으로 통했다고 한다. 친구가 돈이 없어 걸어갈라치면 자신은 걸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친구를 꼭 버스에 태워 보냈다는 착한 심성은 듣는이로 하여금 마음을 숙연하게 했다. 말하고 있는 어머님의 눈가엔 언제부터인가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8년전 그해는 열사가 고3의 수험생이었다. 그러나 5월 21일! 열사의 중학교 동창이었던 막역지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열사는 밥도 먹지 않고 책상머리에 앉아 공부한다며 무언가 골똘히 생각했다고 아버님은 회상한다. 그 다음날(22일) 아무말 없이 방안에만 앉아 있기에 부모님은 "다른 생각말고 공부나 해라"고 당부하고 외출하고 들어오셨는데 그 사이 열사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하루가 지난 23일까지도 열사가 들어오지 않자 전대,조대,기독교 병원, 도청, 상무대 할 것 없이 찾아 헤매도 열사의 모습은 찾을 길 없었다고 한다.
가슴 조이며 살아 있기만을 간절히 바라던 닷새의 시간이 흐른 29일 저녁 동네 통장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열사의 시신이 전대병원 영안실에 있다는것이었다. 주민증록증이 있어 시신확인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 소리를 듣고 가슴이 떨리고 몸에 기운이 빠져 어떻게 겨우 가보니 시체 9구가 거적으로 덮혀 있었어요. 거적을 걷고 아들의 시신을 보니 얼굴은 알아볼 수 없게 일그러져 있고 배에 총을 맞았는지 온통 피범벅인데 군데군데 멍자욱이 선연했습니다. 죽은지 며칠이 지난후라 옷은 썩어 없어졌고 얼굴에 구데기가 들끊고 있었는데 우리 호걸이의 그때 모습은 죽어도 잊지 못할 것입,..." 어머님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남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는지 안방으로 들어가 소리 죽여 울기 시작했다. 한동안 무거운 분위기에 눌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무도 감히 그 정적을 깨뜨리기 어려윘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뒤에 아버님이 입을 열었다. "저 사람은 호걸이를 일은 충격으로 한쪽눈이 실명되고 심장병까지 앓았읍니 . 큰 놈이 소아마비로 제대로 걷지 못해 그놈이 아장아장 걷게되자 우리는 얼마나 오지고 기뻤는지..." 아버님도 눈가에 흘러 내리는 눈물을 훔쳤다. 황열사는 의병장이셨던 할아버님의 모습을 그대로 빼닮았다고 한다. 아버님께서는 "그래서 그놈 이름도 할아버지의 큰 뜻 이어 받으라고 '호걸'이로 지었습니다. 피는 못속이는 겁니다."라고 하며 아들의 죽음을 대견해 한는게 역력히 드러나 보였다. 현재 정부에서 광주문제에 대한 진상규명 운운하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아버님께서는정부차원의 해결이 아니라 국민의 힘에 의해 처벌받을 놈들은 처벌을 마땅히 받아야 하는데 현 정권이 유지되는 한 올바른 진상규명은 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 또한 아직도 호걸이를 폭도로 매도하고 있는데 어째서 우리 아들이 폭도냐고 반문하였다.
아버님께서는 감저으이 격분을 참지 못하고 이 말만은 꼭 해야 한다며 오열을 터트렸다. "전두환이 노태우 코를 꿰어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다 죽어도 내 원이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치를 떨었다.
그날 이후 8년이란 긴 세월이 지나도 그 분노의 각인을 지우지 못했을까! 방관자, 제3자의 위치에 선 우리에겐 그날의 비극이 잊혀져 가는 상혼일 따름인가?
나설 때 개가 다시 짖어대기 시작했다. 어쩌면 내 살아 있음의 질타일까? 8년이란 세월도 결국 부모와 자식, 산자와 죽은자의 거리를 멀게까지는 못하는가 보다 "안녕히 계십시오" 부끄러운 인사치레로 대문을 나서는 기자의 등뒤로 황열사 어머님의 목메인 중얼거림이 들렸다. "부모는 죽은 자싯을 가슴에 묻는게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