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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마지막 새벽을 지킨 샛별/윤상원 열사(국민신문, 1988. 5)

본문

국민신문 1988년 5월 27일 발행

마지막 새벽을 지킨 샛별.

5.18광주민중항쟁의 주역 윤상원 열사



망월동 시립 5 18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묘역. 금년으로 8주기를 맞아 광주 뿐만 아니라 경향각지의 참배객 들이 줄을 잇고 있는 '민주화와 민족통일의 성지'

작년 7월, 전국민적 애도 속에 이 묘역에 묻힌 이한열열사, 작년 11월, '오월의 아들로 죽어간 박관현열사가 이장을 했고 농민권익을 옹호하며 투쟁하다 군부독재의 공권력에 죽어간 김기호 열사, 금년 5월 전남광주지역 학생청년운동을 주도하다 숨져간 신영일 투사, 또는 이번 5 18 주간에 미제국축출, 군부독재타도, 올림픽공동개최,구속자석방을 외치면서 자기 몸을 불사른 조성만열사 등이 최근 국민적 추도 속에 목숨을 민주민족통일 재단에 바쳐 이곳 5월영령들 곁에 누워있다.

그러나 항쟁현장에서 군부독재의 총칼 아래 무참히 짓밟혔던 5월영령들. 폭도의 누명을 쓰고 폭도로 죽어갔던 영령들이 쓰레기차에 실려 이곳에 묻힌지 8년여 5 · 18묘역은 곧 이땅의 민주화의 기름대가 되어왔다.

우리는 저렇게 누워있는 영령들 가운데 참으로 고결한 한 죽음을 본다.그의 묘 앞에는 참배객이 많아 잔디가 죽어있고 항상 추모의 꽃다발이 끊기지 않아 5 I8영령의 상징이 되어있다.

파평 윤공개원지묘( 臺坪尹公開源之墓)

윤상원 (尹褙源)으로 알려져 있는 그 비명은 윤개원. 50년 전남 광산군 임곡면 신룡리 태생이며 78년 전남대

정치외친학과를 졸업하고, 5월항쟁현장에서 싸우다 5월 27일 사망이라는 경력이 묘비옆면에 새겨져 있다.

윤개원 아니 그를 본격적으로 아는 사람들에게 윤상원으로 알려져 있는 그는 누구인가.

5. 18 광주민중항쟁이 시작될 무렵 윤상원은 팡주지역 청년운동의 핵심으로 활발히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당시 5일. 재야단체 민족회복국민회의(의장: 김대중, 윤보선. 함석 헌) 전남지부의 실무를 맡아 뛰었으며 민주청년운동협의회 전남지부(윤한봉 김상윤 등 광주지역 민청세대가 주축)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노동운동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누구보다 높아, 광주지역 노동의 조직적 체계적 그리고 실천적 전개를 위해서 당시로서는 비합법 단체로 비밀리에 결성되었던 '민주노동연땡(위원장: 이태복,'81년 이조직이 발각되어 현재까지 복역중)의 이 지역 대표로 '중앙위원'에 가입했다.

또한 전남대학교 학생운동과의 보이지 않는 단결을 맺으면서 5월 중순 광주민중항쟁의 시발점이 되었던 14,15,16일 도청 앞 '민족민주화성회'를 측면 지원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광천동지역의 '들불야학'을 지도하고 있었다. 5월항쟁 무렵 윤상원은 광주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

5 · 17 계엄확대조치가 내렸다. 동시에 학생운동지도부와 청년운동 지도부,재야인사는 거의 사전에 연행되었고.기존의 운동조직은 파괴되었다. 5월 18일, 분노한 학생들이 들고 일어섰으며,시가지에 진출, 시민과 함께 계엄군부의 퇴진을 요구하며 치열한 시위를 전개했다. 계엄군부는 공수부대를 투입,시위 초반부터 시민 살육작전을 감행 했다. 전두환-노태우 계엄군부는 형언할 수 없는 반민족적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온 광주시민이 시가지로 몰려나왔다.치열한 백병전이 벌아진 것이다. 윤상원은 첫날부터 시민의 일원이 되어 시위에 가담했다. 이미 운동조직은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는 가능한 사람들만으로 화염병을 만들어 시위투쟁현장에 전달했다. 그는 또한 이 시위투쟁 소식을 정리해서 시민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믿고'투사회보'를 불야학의 후배들에게 만들도록 했다. 22일 '광주'가 시민들의 수중에 떨어지기 이전 그는 낮이면 시내에 나와 투생현장을 돌며 투사회보를 살포하고 화염병을 제조해 보급했으며, 밤이면 정리한 내용을 담은 '투사회보'를밤새도록 제작하여 왔다. 수동식 등사기를 가지고, 촛불로 주위를 경계하면서 그는 밤새도록 등사에 열중하는 들불야학의 후배들을 격려했다.그리고 완성된 그것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배포토록 했으며 그도 직접 배포 했다. 자전거를 타고, 21일 시민들의 찦차를 타고 유인물을 뿌렸다.

광주항쟁이후인 22일 이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항쟁을 이끌기 위해, 그가 소속한 극단 '광대'의 소속원들과 들불야학의 후배들을 중심으로 광범한 홍보를 전개했다. 또한 시민항쟁이 열기를 지속시키기 위해 도청 앞 시민궐기대 회를 주도했다.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장악된 도청은 확실한 지도력이 없었다. 지역내 유지를 자처하는 명망가들, 그리고 재야 운동을 주도해왔던 재야인사들이 '수습 위원회'를 조직했으나 시민투쟁을 계속 이끌만한 합의나 역량이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계엄군부의 위협은 가중되고 일반시민이나 시민군들은 위험을 감지해 이탈자가 (속출했다. 이런 가운데 윤상원은 25일, 이날도 두차례의 궐기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그 결과를 가지고 그동안 활발히 청년운동을 해왔던 사람들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민학생투쟁위원회'를 조직,청년 · 학생들과 합께 도청으로 입성했다. 그리하여 도청을 강력한 '투쟁위'의 조직으로 장악한 것이다.

그의 '투쟁위'에서의 역할은 대변인,즉 항쟁의 진실과 계엄군부의 죄악상,그리고 시민투쟁의 정당성, 투쟁 목표 등을 내외에 천명하는 광주항쟁의 '입'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수차례에 걸쳐 내외신기자회견을 했다.

27일, 새벽 계엄공수부대는 무력진압작전을 감행했고, 윤상원은 여기에 대항 끝까지 도청을 사수하며 싸우다 계엄군의 총탄이 그의 복부를 관통해 최후를 맞았다.

광주항쟁 8주기. 우리는 이제 광주항쟁에서 산화한 모든 영령들, 특히 그 가운데 윤상원의 일관성 있는 애국애족정신, 민주수호의 정신을 이어받아야 할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자리 마저 박차고 민중들과 민주화민족통일의 새역사의 길로 함께 가고자 했던 윤상원 열사.

망월동 5 · 18묘역. 거기 윤상원 열사와 함께 '들불야학'을 운영하며 함께 고락을 같이했던 윤열사의 가장 아끼는 후배들 박관현열사, 신영일투사, 그리고 박용준열사를 함께 기억하며 5월 항쟁의 그날, 그리고 그날의 정신을 잊지 말아야할 것이 다.

(편 집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