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우리도 차례를 지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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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동 5.18묘역 무명 열사의 묘 찾은 행방 불 명자 가족들
"우리도 차례를 지내고 싶다"
무명 열사라고 불리 워져 망월동 5.18묘역에 누운지 9년, 동안 묘비를 붙잡고 어루만져 줄 손길 하나 없이 외로 왔던 5.18무명 열사에게 바치는 차례 상이 5.18행방 불 명자 가족 들의 정성으로 1세기만에 되찾은 설날 아침에 올려졌다. 이날 60여명의 행방 불 명자 가족들은 하얀 소복을 입어 예를 다한 후 정성 들여 준비해 온 제수를 5.18묘역 상석에 차려 놓고 이름마저 미처 남기지 못하고 가셔야 했던 슬픈 영혼들을 위한 차례를 지냈다. 민중 의례와 재배 및 헌화 그리고 추도사 낭독으로 진행된 이날 의식은 많은 참배 객들의 호곡 소리에 더욱 엄숙하게 진행되었고 5.18유족 회 전계량 회장의 인사말과 함께 11기의 무명 열사 묘 앞에 국화 송이를 바치는 의식을 가지기도 했다.
5.18행방 불 명자 가족 회 회장 (허청,51세)은 추도사를 통하여 "어느 죽음이 슬프지 않으리요 마는 같은 뜻으로 죽어 이름마저 남기지 못하고 가신 무명 열사의 유업이야말로 살아 남은 우리들이 받들어야 할 위대한 철학이며 특히 행 불자 회 가족들에게는 바로 이 묘가 나의 부모. 형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더욱 피어오르는 슬픔을 억누를 수 없다"고 흐느끼면서 "지난 9년 동안 오늘과 같은 명절이면 다른 가족들은 모두들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우리 행 불자 가족들이 기다리는 내 혈육은 끝내 나타나지 않고 오늘도 석양에 해는 지는가! 진정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면 뼈라도 한 줌 쥐어 마른땅에 묻어 줄 것을 …"이라고 한탄하면서도 계속되는 추도사를 통해"현정권은 수많은 양민들을 학살한 그 만행도 용서받을 수 없거늘 행 불자로 신고된 102명중 겨우 17명만을 인정하고 나머지는 갖은 협박과 은페. 조작으로 불인정 처리하는 제2의 광주 학살의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고 경고하면서 신고된 행 불자 전원을 5.18관련자로 인정하고 암매장 장소를 공개하여 광주의 진상이 하루 빨리 밝혀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을 때만이 진정한 민족 화합이 이루어 질 수 있으며 행불자 가족들은 광주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단을 위해 다른 어느 단체보다도 앞장서서 투쟁할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80년 5월 광주 민중 항쟁 과정에서 자식을 잃고 눈물로 살아 왔던 정수일 노인(73세, 강진군 도암면)은 무명 열사의 묘비를 붙잡고 "경채야 나오너라 집에 가서 조부님께 성묘 가자!"고 통곡을 해 보는 이로 하여금 행 불자 가족들이 겪어 왔던 고통의 세월들을 짐작하게 했다.
또한 행방 불명자 가족 중의 한사람인 한덕수(53세, 광주시 광산구 금호동)씨는 80년 5월22일 아들과 함께 쌍촌동 운천 저수지 근처를 지나다가 말리는 것을 뿌리치고 시위대 차량에 탑승한 후 행방불명된 아들의 이름을 무르며 "상록아! 니가 차를 타려고 할 때 이 애비가 억지로라도 붙잡았으면 너도 살았고 니 애비도 이렇게 한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상록아 모든 것이 이 애비의 못난 죄다"고 무명 열사의 묘비를 부둥켜안고 흐느끼기도 했다. 특히 한덕수씨는 지난 1월 31일에 광주 교도소에서 시체를 암매장했다고 증언한 이상래씨의 말 가운데 시체 5구중 1구가 팔이 굳은 채 구부려져 군화 발로 차서 편 후 묻었다는 증언 내용을 보고 까무라 치게 놀랬다고 한다. 왜냐하면 행 불된 상록씨는 어렸을 때 팔이 부러진 채 굳어 버려 커서도 팔이 펴지지 않는 불구자였기 때문에 당시의 시신이 틀림없이 자기 아들이며 그 시체를 망월동으로 이장했다면 11구의 무명 열사중 1구는 바로 아들일 가능성이 크다고 더욱 안타까와한다.
순천에서 설날 아침에 새벽 차로 올라 왔다는 이옥순 (56세, 순천시 남정동)씨는 며칠 전에 자기집과 이웃집으로 조사를 나온 공무원들이 "행방불명된 혜연(당시24세)이가 예뻤다는데 혹시 일본 유흥가로 빠진 것이 아니냐"라고 유도 질문을 해서 이제 겨우 가라앉은 마음을 뒤집어 놓았다고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옛말이 있기도 하지만 땅에 묻을 부모의 시신도 가슴에 묻을 자식의 주검마저도 보지 못한 채 무명 열사의 묘 앞에 흐느껴야 하는 행 불자 가족들에게는 5.18묘역 건너편 일반 묘역의 참배객들이 차라리 행복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우리도 차례를 지내고 싶다"
무명 열사라고 불리 워져 망월동 5.18묘역에 누운지 9년, 동안 묘비를 붙잡고 어루만져 줄 손길 하나 없이 외로 왔던 5.18무명 열사에게 바치는 차례 상이 5.18행방 불 명자 가족 들의 정성으로 1세기만에 되찾은 설날 아침에 올려졌다. 이날 60여명의 행방 불 명자 가족들은 하얀 소복을 입어 예를 다한 후 정성 들여 준비해 온 제수를 5.18묘역 상석에 차려 놓고 이름마저 미처 남기지 못하고 가셔야 했던 슬픈 영혼들을 위한 차례를 지냈다. 민중 의례와 재배 및 헌화 그리고 추도사 낭독으로 진행된 이날 의식은 많은 참배 객들의 호곡 소리에 더욱 엄숙하게 진행되었고 5.18유족 회 전계량 회장의 인사말과 함께 11기의 무명 열사 묘 앞에 국화 송이를 바치는 의식을 가지기도 했다.
5.18행방 불 명자 가족 회 회장 (허청,51세)은 추도사를 통하여 "어느 죽음이 슬프지 않으리요 마는 같은 뜻으로 죽어 이름마저 남기지 못하고 가신 무명 열사의 유업이야말로 살아 남은 우리들이 받들어야 할 위대한 철학이며 특히 행 불자 회 가족들에게는 바로 이 묘가 나의 부모. 형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더욱 피어오르는 슬픔을 억누를 수 없다"고 흐느끼면서 "지난 9년 동안 오늘과 같은 명절이면 다른 가족들은 모두들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우리 행 불자 가족들이 기다리는 내 혈육은 끝내 나타나지 않고 오늘도 석양에 해는 지는가! 진정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면 뼈라도 한 줌 쥐어 마른땅에 묻어 줄 것을 …"이라고 한탄하면서도 계속되는 추도사를 통해"현정권은 수많은 양민들을 학살한 그 만행도 용서받을 수 없거늘 행 불자로 신고된 102명중 겨우 17명만을 인정하고 나머지는 갖은 협박과 은페. 조작으로 불인정 처리하는 제2의 광주 학살의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고 경고하면서 신고된 행 불자 전원을 5.18관련자로 인정하고 암매장 장소를 공개하여 광주의 진상이 하루 빨리 밝혀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을 때만이 진정한 민족 화합이 이루어 질 수 있으며 행불자 가족들은 광주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단을 위해 다른 어느 단체보다도 앞장서서 투쟁할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80년 5월 광주 민중 항쟁 과정에서 자식을 잃고 눈물로 살아 왔던 정수일 노인(73세, 강진군 도암면)은 무명 열사의 묘비를 붙잡고 "경채야 나오너라 집에 가서 조부님께 성묘 가자!"고 통곡을 해 보는 이로 하여금 행 불자 가족들이 겪어 왔던 고통의 세월들을 짐작하게 했다.
또한 행방 불명자 가족 중의 한사람인 한덕수(53세, 광주시 광산구 금호동)씨는 80년 5월22일 아들과 함께 쌍촌동 운천 저수지 근처를 지나다가 말리는 것을 뿌리치고 시위대 차량에 탑승한 후 행방불명된 아들의 이름을 무르며 "상록아! 니가 차를 타려고 할 때 이 애비가 억지로라도 붙잡았으면 너도 살았고 니 애비도 이렇게 한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상록아 모든 것이 이 애비의 못난 죄다"고 무명 열사의 묘비를 부둥켜안고 흐느끼기도 했다. 특히 한덕수씨는 지난 1월 31일에 광주 교도소에서 시체를 암매장했다고 증언한 이상래씨의 말 가운데 시체 5구중 1구가 팔이 굳은 채 구부려져 군화 발로 차서 편 후 묻었다는 증언 내용을 보고 까무라 치게 놀랬다고 한다. 왜냐하면 행 불된 상록씨는 어렸을 때 팔이 부러진 채 굳어 버려 커서도 팔이 펴지지 않는 불구자였기 때문에 당시의 시신이 틀림없이 자기 아들이며 그 시체를 망월동으로 이장했다면 11구의 무명 열사중 1구는 바로 아들일 가능성이 크다고 더욱 안타까와한다.
순천에서 설날 아침에 새벽 차로 올라 왔다는 이옥순 (56세, 순천시 남정동)씨는 며칠 전에 자기집과 이웃집으로 조사를 나온 공무원들이 "행방불명된 혜연(당시24세)이가 예뻤다는데 혹시 일본 유흥가로 빠진 것이 아니냐"라고 유도 질문을 해서 이제 겨우 가라앉은 마음을 뒤집어 놓았다고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옛말이 있기도 하지만 땅에 묻을 부모의 시신도 가슴에 묻을 자식의 주검마저도 보지 못한 채 무명 열사의 묘 앞에 흐느껴야 하는 행 불자 가족들에게는 5.18묘역 건너편 일반 묘역의 참배객들이 차라리 행복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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