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암매장 유골 검시 반의 이정빈 박사 - 그는 5.18을 묻으러 광주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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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매장 유골 검시 반의 이정빈 박사
그는 5.18을 묻으러 광주에 왔다
빨간 우비를 걸쳐 입은 중년 신사, 지난 1월11일 주남마을 뒤 산 암매장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비를 맞으며 유골 하나 하나를 정성스럽게 골라내던 빨간 우비의 중년 신사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법의학 전공의 서울 의대 이정빈 박사가 그 주인공이다.
암매장 현장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의 눈길은 이 교수의 손끝을 따르며 초조해 하고 있었다. 특히 행방 불 명자 가족들은 발굴된 유골이 행여 내 자식이 아닐까 하는 초조와 긴장 속에 두 손을 움켜쥔 채 차라리 눈을 감아 버리기도 했다. 완전히 육탈된 앙상한 다리와 팔, 갈비뼈가 나오고 해골이 나오자 여기 저기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암매장의 첫 증거가 만인의 눈앞에 드러 나느 순간이었다.
80년5월 7공수 11공수가 주둔하고 있었던 주남마을 뒷산, 당시 18명이 탄 미니 버스를 벌집으로 만들어 15명의 시민을 즉사시키고 2명의 생존자까지 총살한 만행이 드디어 한 꺼풀씩 벗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연이어 14일에도 근처 녹동 부락 앞 부엉산 에서도 80년 5월 아무렇게나 버려진 시신 1구가 발굴돼 보는 이를 경악케 했다.
그러나 비극의 유골을 발굴하는 현장 두 곳에서 보인 이 박사의 언행은 그가 진실을 밝히려는 지 은폐하려는지 분간하기 어려운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 과연 이 박사의 가슴속에는 과학이 들어 있을까 정치가 들어 있을까. 여기저기서 '그는 5.18을 은폐하기 위해 광주에 왔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 가고 있다. 그 의혹의 줄기를 간추려 보자.
그는 11일의 주남마을 현장에서부터 유골의 5.18관련 심증을 굳히게 하는 증거는 하나도 강조하지 않았다. 유골을 보며 4년 이상이 되었다면서 잠시 생각하더니 4년에서 약 30년까지의 기간으로 사체 매장 시기를 추정했다. 좀 더 좁혀 얘기할 수 없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시신의 부패 정도는 기온, 풍속, 물 빠짐, 토질 등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하기 때문에 몇 년 전후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더니 14일 부엉산의 유골 발굴 현장에서는 유골을 보자마자 5년 이내의 것으로 단정했다. 부엉산의 풍속, 기온, 토질, 물 빠짐 정도를 언제 갑자기 분석했는지 유골을 처음 보는 현장에서 확실히 5년 이내의 시신으로 단언한 것이다.
부엉산의 시신은 80년 6월과 9월 그리고 87년 등 세 번이나 목격한 증인이 있는데도 이 박사에게 그것은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측두 부의 손상된 뼈가 총탄 자국이 아니라고도 단언했다.
그 자리에서 이 박사는 '시신의 사망 시기는 5년 이내 이며 손상된 측두부는 총상이 아니니 KBS는 이것을 보도하라고 자상하게 지침까지 내렸고 KBS, MBC등의 텔레비전과 라디오 등에서는 중앙 방송을 통해 일제히 '시신이 5.18과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열을 올렸다.
이러한 과정은 뭔가 수순이 착착 들어맞는 각본 인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쉽게 불러 일으켰다. 그 의혹은 바로 이 박사가 서울에서부터 결론을 갖고 내려 왔을지 모른다는 추측으로 이어졌다.
이 박사의 경륜과 권위로 볼 때 학살한 과학적 검증 과정을 거치지도 않고 육안 관찰만으로 결론적 예단을 내린 것은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다. 목격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도외시하고 뼈만 관찰한 소견으로 핵심적인 내용을 말한 것은 정황 증거를 중요시하는 법의학의 초보 지식마저 간과한 언행이었다.
더구나 이번에 발굴된 유골은 고도의 정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도 결론적 내용을 성급하게 흘린 것은 상식적으로 그의 법 의학자로서의 권위와 경륜에 어울리지 받기에 족한 것이었다.
지난 15일 낮 다섯 시간 이상 광주 컨트리클럽에서 골프를 치고 그날 밤 비행기로 광주를 떠나려던 그는 광주 비행장에서 행방 불 명자 가족들에게 붙들려 한동안 실랑이를 벌였다. 5.18과 무관한 것처럼 결론적 예단을 내린 데 대한 행 불자 가족들의 강력한 항의를 받고 이 박사는 결국 비행기에 오르지 못했다.
광주 시내 어느 호텔에서 행 불자 가족들에게 해명의 기회를 가진 이 박사는 끝내 자신의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는 억지 소신론을 폈다. 제보자의 목격담이나 시신에서 혁띠 등이 발견되지 않는 것 등으로 미루어 법의학적 관찰이 결여된 성급한 판단이 아니냐는 질문이나 발굴 현장에서 곧바로 5년 이내 사망이라고 단정한 것 등의 의혹을 제기해도 끝내 소신을 방패막이로 얼버무렸다.
여기저기서 '당신의 소신은 양심이 아니다'는 강력한 항의가 빗발치자 그는 '과학은 정치가 아니다. 절대로 소신을 어떤 힘 앞에 굽힐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의 소신이 양심이 아니라는 것도 그의 과학이 온전한 과학이 아니라는 것도 금방 드러났다.
황적준 박사의 공개된 일기에 드러난 이정빈 박사의 언행을 들춰내자 그는 상기된 얼굴로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일기가 잘못 적혀 있다는 것이었다. 남의 일기를 두고 잘못 적혀 있다는 것은 바로 황박사의 일기마저 자신이 써야 옳았다는 판단과도 같았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때 검시를 맡았던 황적준 박사는 '심장 쇼크사'를 발표하라는 권력의 압력을 받고 고민하다 여러 동지. 선후배를 만나 조언을 구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학자적 양심으로 대응하라고 조언했다. 이에 용기를 얻은 황적준 박사의 양심적 소견으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은 백일하에 그 정체를 드러내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황 박사가 고민하는 과정에서 이정빈 박사를 만나 조언을 구했을 때 유일하게 이 박사만이 "타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양심의 포기를 종용했다.
하나를 보고 전체를 얘기하는 것은 속단이지만 이번 유골 사건과 관련해 볼 때 당시 이 박사의 발언은 그의 비과학적 양심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의 과학은 과학이 아니라 정치였다. 9년 전 공수부대의 잔인한 총칼에 목숨을 앗기고 어딘가에 암매장된 어떤 시체가 발견되더라도 이 박사의 육안에는 결코 5.18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란 결론이 이박사를 본 우리들의 '소신'이다.
전문가를 빙자한 재 살인
지난 14일 녹동 마을 암매장 사체 발굴 작업에 참가한 전홍준(조선대 의과대학)박사는 18일 기자 회견을 통해 이정빈 박사의 경솔한 처사를 비판하면서, 발굴된 유골은 5.18과 관련돼 사망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밝혔다.
이 박사는 주남마을에서 발굴된 사체의 사망 시기는 유골 주변의 조건까지도 과학적으로 추적해야 하므로 4-30년으로 사망 년도를 추정했음에도 불구하고 14일 녹동 마을에서 발굴된 유골의 사망 시기는 과학적 검증을 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5년 이내 라고 단정한 검증을 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5년 이내 라고 단정한 점은 사람들에게 의심을 갖게 할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전 박사는 대퇴골의 골절. 파자마에 뚫린 구멍으로 보아 총상의 가능성이 높고, 팔뼈와 다리뼈가 뒤죽박죽이 되어 있는 등 유골이 해체되어 있고 관절. 힘줄이 없는 것으로 볼 때 사망 시기도 상당한 시간이 경과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상과 같은 견해를 발표한 전 박사는 유골과 유품 등에 대한 전문적인 검사도 없이 되어진 즉흥적 발표는 신뢰가 가지 않기 때문에 5.18관련 제 단체가 추천하는 의사나 인류학 전공자 3-5명과 검찰 측이 추천하는 3-5명으로 『합동 조사반』을 구성하여 정밀하고도 광범위한 조사외 감정을 통해 의혹을 풀고 진상을 규명 신원을 확인해 유족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오랫동안 군정으로 수많은 국민을 죽여 암매장했던 아르헨티나. 칠레에서 실레를 찾았다.
전홍준 박사에 따르면, "크리스티안 오레고"가 개발한 유전 정보 비교법은 사체의 사망 시기 및 신원 확인의 방법으로 치아에 초점을 둔다고 하였다.
치아만큼 세월의 흐름에 오래 견디는 것도 없고 치아는 생체의 어떤 부분보다도 견고하기 때문에 마치 사람의 지문과 같이 생체마다 다르기 때문에 식별 작업에 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그는 5.18을 묻으러 광주에 왔다
빨간 우비를 걸쳐 입은 중년 신사, 지난 1월11일 주남마을 뒤 산 암매장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비를 맞으며 유골 하나 하나를 정성스럽게 골라내던 빨간 우비의 중년 신사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법의학 전공의 서울 의대 이정빈 박사가 그 주인공이다.
암매장 현장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의 눈길은 이 교수의 손끝을 따르며 초조해 하고 있었다. 특히 행방 불 명자 가족들은 발굴된 유골이 행여 내 자식이 아닐까 하는 초조와 긴장 속에 두 손을 움켜쥔 채 차라리 눈을 감아 버리기도 했다. 완전히 육탈된 앙상한 다리와 팔, 갈비뼈가 나오고 해골이 나오자 여기 저기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암매장의 첫 증거가 만인의 눈앞에 드러 나느 순간이었다.
80년5월 7공수 11공수가 주둔하고 있었던 주남마을 뒷산, 당시 18명이 탄 미니 버스를 벌집으로 만들어 15명의 시민을 즉사시키고 2명의 생존자까지 총살한 만행이 드디어 한 꺼풀씩 벗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연이어 14일에도 근처 녹동 부락 앞 부엉산 에서도 80년 5월 아무렇게나 버려진 시신 1구가 발굴돼 보는 이를 경악케 했다.
그러나 비극의 유골을 발굴하는 현장 두 곳에서 보인 이 박사의 언행은 그가 진실을 밝히려는 지 은폐하려는지 분간하기 어려운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 과연 이 박사의 가슴속에는 과학이 들어 있을까 정치가 들어 있을까. 여기저기서 '그는 5.18을 은폐하기 위해 광주에 왔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 가고 있다. 그 의혹의 줄기를 간추려 보자.
그는 11일의 주남마을 현장에서부터 유골의 5.18관련 심증을 굳히게 하는 증거는 하나도 강조하지 않았다. 유골을 보며 4년 이상이 되었다면서 잠시 생각하더니 4년에서 약 30년까지의 기간으로 사체 매장 시기를 추정했다. 좀 더 좁혀 얘기할 수 없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시신의 부패 정도는 기온, 풍속, 물 빠짐, 토질 등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하기 때문에 몇 년 전후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더니 14일 부엉산의 유골 발굴 현장에서는 유골을 보자마자 5년 이내의 것으로 단정했다. 부엉산의 풍속, 기온, 토질, 물 빠짐 정도를 언제 갑자기 분석했는지 유골을 처음 보는 현장에서 확실히 5년 이내의 시신으로 단언한 것이다.
부엉산의 시신은 80년 6월과 9월 그리고 87년 등 세 번이나 목격한 증인이 있는데도 이 박사에게 그것은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측두 부의 손상된 뼈가 총탄 자국이 아니라고도 단언했다.
그 자리에서 이 박사는 '시신의 사망 시기는 5년 이내 이며 손상된 측두부는 총상이 아니니 KBS는 이것을 보도하라고 자상하게 지침까지 내렸고 KBS, MBC등의 텔레비전과 라디오 등에서는 중앙 방송을 통해 일제히 '시신이 5.18과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열을 올렸다.
이러한 과정은 뭔가 수순이 착착 들어맞는 각본 인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쉽게 불러 일으켰다. 그 의혹은 바로 이 박사가 서울에서부터 결론을 갖고 내려 왔을지 모른다는 추측으로 이어졌다.
이 박사의 경륜과 권위로 볼 때 학살한 과학적 검증 과정을 거치지도 않고 육안 관찰만으로 결론적 예단을 내린 것은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다. 목격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도외시하고 뼈만 관찰한 소견으로 핵심적인 내용을 말한 것은 정황 증거를 중요시하는 법의학의 초보 지식마저 간과한 언행이었다.
더구나 이번에 발굴된 유골은 고도의 정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도 결론적 내용을 성급하게 흘린 것은 상식적으로 그의 법 의학자로서의 권위와 경륜에 어울리지 받기에 족한 것이었다.
지난 15일 낮 다섯 시간 이상 광주 컨트리클럽에서 골프를 치고 그날 밤 비행기로 광주를 떠나려던 그는 광주 비행장에서 행방 불 명자 가족들에게 붙들려 한동안 실랑이를 벌였다. 5.18과 무관한 것처럼 결론적 예단을 내린 데 대한 행 불자 가족들의 강력한 항의를 받고 이 박사는 결국 비행기에 오르지 못했다.
광주 시내 어느 호텔에서 행 불자 가족들에게 해명의 기회를 가진 이 박사는 끝내 자신의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는 억지 소신론을 폈다. 제보자의 목격담이나 시신에서 혁띠 등이 발견되지 않는 것 등으로 미루어 법의학적 관찰이 결여된 성급한 판단이 아니냐는 질문이나 발굴 현장에서 곧바로 5년 이내 사망이라고 단정한 것 등의 의혹을 제기해도 끝내 소신을 방패막이로 얼버무렸다.
여기저기서 '당신의 소신은 양심이 아니다'는 강력한 항의가 빗발치자 그는 '과학은 정치가 아니다. 절대로 소신을 어떤 힘 앞에 굽힐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의 소신이 양심이 아니라는 것도 그의 과학이 온전한 과학이 아니라는 것도 금방 드러났다.
황적준 박사의 공개된 일기에 드러난 이정빈 박사의 언행을 들춰내자 그는 상기된 얼굴로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일기가 잘못 적혀 있다는 것이었다. 남의 일기를 두고 잘못 적혀 있다는 것은 바로 황박사의 일기마저 자신이 써야 옳았다는 판단과도 같았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때 검시를 맡았던 황적준 박사는 '심장 쇼크사'를 발표하라는 권력의 압력을 받고 고민하다 여러 동지. 선후배를 만나 조언을 구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학자적 양심으로 대응하라고 조언했다. 이에 용기를 얻은 황적준 박사의 양심적 소견으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은 백일하에 그 정체를 드러내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황 박사가 고민하는 과정에서 이정빈 박사를 만나 조언을 구했을 때 유일하게 이 박사만이 "타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양심의 포기를 종용했다.
하나를 보고 전체를 얘기하는 것은 속단이지만 이번 유골 사건과 관련해 볼 때 당시 이 박사의 발언은 그의 비과학적 양심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의 과학은 과학이 아니라 정치였다. 9년 전 공수부대의 잔인한 총칼에 목숨을 앗기고 어딘가에 암매장된 어떤 시체가 발견되더라도 이 박사의 육안에는 결코 5.18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란 결론이 이박사를 본 우리들의 '소신'이다.
전문가를 빙자한 재 살인
지난 14일 녹동 마을 암매장 사체 발굴 작업에 참가한 전홍준(조선대 의과대학)박사는 18일 기자 회견을 통해 이정빈 박사의 경솔한 처사를 비판하면서, 발굴된 유골은 5.18과 관련돼 사망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밝혔다.
이 박사는 주남마을에서 발굴된 사체의 사망 시기는 유골 주변의 조건까지도 과학적으로 추적해야 하므로 4-30년으로 사망 년도를 추정했음에도 불구하고 14일 녹동 마을에서 발굴된 유골의 사망 시기는 과학적 검증을 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5년 이내 라고 단정한 검증을 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5년 이내 라고 단정한 점은 사람들에게 의심을 갖게 할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전 박사는 대퇴골의 골절. 파자마에 뚫린 구멍으로 보아 총상의 가능성이 높고, 팔뼈와 다리뼈가 뒤죽박죽이 되어 있는 등 유골이 해체되어 있고 관절. 힘줄이 없는 것으로 볼 때 사망 시기도 상당한 시간이 경과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상과 같은 견해를 발표한 전 박사는 유골과 유품 등에 대한 전문적인 검사도 없이 되어진 즉흥적 발표는 신뢰가 가지 않기 때문에 5.18관련 제 단체가 추천하는 의사나 인류학 전공자 3-5명과 검찰 측이 추천하는 3-5명으로 『합동 조사반』을 구성하여 정밀하고도 광범위한 조사외 감정을 통해 의혹을 풀고 진상을 규명 신원을 확인해 유족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오랫동안 군정으로 수많은 국민을 죽여 암매장했던 아르헨티나. 칠레에서 실레를 찾았다.
전홍준 박사에 따르면, "크리스티안 오레고"가 개발한 유전 정보 비교법은 사체의 사망 시기 및 신원 확인의 방법으로 치아에 초점을 둔다고 하였다.
치아만큼 세월의 흐름에 오래 견디는 것도 없고 치아는 생체의 어떤 부분보다도 견고하기 때문에 마치 사람의 지문과 같이 생체마다 다르기 때문에 식별 작업에 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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