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추적! 암매장 장소를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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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 암매장 장소를 찾아라!
2백명이냐, 2천명이냐? 5.18 행방 불 명자 가족들은 그렇게 묻지 않는다. 단 한 명의 내 아들 내 딸이 어디에 묻혀 있는가 그것이 중요하다. 아니, 왜 죽였고 왜 암매장했고 왜 아직까지 시신마저 돌려주지 않느냐, 그런 질문에 대한 확답이 더 중요하다. 이제 기다림도 지친 행방 불 명자 가족들은 어딘가 묻혀 있을 아들, 딸, 남편, 아내의 시신을 찾기 위해 산과 들로 나선다. 그러나 불러도불러도 돌아오는 것은 자신의 목소리뿐이다. 도대체 어디에 묻혀 있을까 내 아들딸은…… 이 대답을 가로막는 학살자의 음모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 음모의 형태는 어떠한가 그리고 어디에 어떻게 얼마나 묻혀 있나 그 암매장의 소문과 진상을 추적한다.
치밀한 암매장 - 공수 대원의 고백
암매장과 관련해 지금까지 드러난 증거로 볼 때 80년 당시의 학살 만행보다 오히려 가증스런 것은 이 학살 정권의 증거 인멸을 은폐 과정이다.
저들의 음모 과정을 보면 학살할 시점부터 치밀하고 정교하기 짝이 없다. 당시 광주에 진압군으로 참가했던 한 공수 대원(당시 나이 22세 하사)이 밝힌 바에 따르면 학살한 시체 매장에서부터 치밀한 적전 술을 방불케 한다. 시체 매장의 수법을 보자.
시체 한 구를 묻을 때 두 장의 판초 우의가 필요하다. 완전 군장시 필수 휴대품으로 필요시 사용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리고 야전삽만 있으면 된다. 이것 또한 군장에 딸려 있으므로 쉽게 사용할 수 있다. 우선 사람의 눈에 덜 띄는 곳에 시체 묻을 곳을 설정한다. 그리고 나서 선정한 장소 양쪽에 각각 1장씩의 판초 우의를 펼쳐 놓는다. 야전삽으로는 꼭 시체 크기 만한 구덩이를 판다. 이 때 주의할 점은 다시 땟장을 맞출 때 틈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땟장을 떠내야 한다는 것이다. 떠낸 땟장은 힌쪽 판초 우의에 놓여 놓고 구덩이에서 파낸 흙은 다른 쪽 판초 우의에 따로 놓는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풀밭 위에 흙덩어리 같은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다. 다음은 야전삽 길이 정도의 구덩이를 만든 후 그곳에 시체를 넣는다. 그 위에 다시 흙을 덮고 때를 입힌다. 때를 밟아 평평하게 다진 후 남은 흙을 밭이나 논 등 흙만 있는 곳에다 버려 감쪽같이 흔적을 없애고 작업이 완료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영원히 무덤도 없이 구천을 헤매는 원귀로 남는다.
결국 이렇게 묻힌 주검은 영원히 드러나지 않는 것일까?
그러나 이런 완벽한 작업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은폐를 드러나고 말았다. 바로 교도소 옆 야산에서 찾아낸 서만오씨의 시신이 그것이었다.
교도소 옆 야산에서 찾아낸 시체
교도소 옆 야산에서 발견된 서만오씨의 시신을 찾기까지는 참으로 아슬아슬한 우여곡절이 있다. 또한 주위의 정성어린 도움과 제보가 얼마난 귀중한 것인가에 대한 인식도 새로이 하게 된다.
서만오씨(55년생 광주시 북구 운암동)는 지극히 동생을 아끼고 보살피는 착한 사람이었다. 서씨가 80년 5월21일 바깥으로 나간 것도 동생을 찾기 위해서였다. 항쟁 기간 중이어서 시민 군의 차량이 유일한 교통 수단이었다.
서씨가 영일 식품 앞에서 시민 군의 차량에 탑승 한 것도 동생을 찾기 위해서였다. 서씨가 나간 그날 저녁 동생 만재씨는 돌아왔다. 그러나 동생을 찾으러 나간 서만오씨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22일부터는 어머니와 가족들이 서씨를 찾아 나섰다. 시내 곳곳을 찾아다니고 시체가 안치된 모든 병원을 뒤졌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24일 문화동 사무소에서 집으로 연락이 왔다. 서씨의 주민등록증을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서씨의 어머니가 혹시나 하고 부랴부랴 찾아갔지만 주민등록증만 건네줄 뿐 행방은 모른다는 것이었다.
동사무소 직원이 살짝 귀뜀 해 준 것은 신진 자동차 옆 폐차로 만든 술집 주인 할머니가 주민등록증을 갖다 주었다는 소식이었다. 서씨의 어머니가 그 할머니를 찾아 들은 소식은 너무나 처참했다.
5월21일 오후 3-4시경 창평 쪽으로 빵을 사러 가던 시민 군의 차량이 교도소에 있던 공수부대 총격을 받아 벌집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무서워서 안에 숨어 있었는데 누가 문을 두드리 길래 나가 보니 한 청년이 피로 범벅이 된 배를 움켜쥔 채 주민등록증을 건네며 연락해 달라고 말했다 한다. 주민등록증만 건네주고 젋은 이는 곧 쓰러졌고 내처 공수 대원들이 달려들어 쓰러진 그의 두 다리를 질질 끌고 갈 때까지 할머니는 무서워서 말 한마디 못하고 숨어서 엿보았다.
이러한 사실을 안 서씨의 어머니는 아들의 시체라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다녔다. 이러던 중 교도소 부근에 사는 한 시민이, 공수 대원들이 술 마시면서 하는 애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교도소 바로 옆 창평 쪽으로 빠지는 야산에 시체를 묻어 두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5월26일 서씨의 어머니는 4-5백평 넓이의 산등성이를 뒤지며 아들의 시신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혼자 힘으로는 어림없었다. 이튿날은 인부 10명을 사서 온 산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러다 막 파묻은 듯한 시체 1구를 발견했다. 아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부근에 또 다른 시체가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갖고 다시 파 내려가기 시작했다. 두 번째 구덩이에서 아들의 시체가 나왔다. 시계는 벗겨 가고 없었다. 손가락에 금반지만은 남아 있었다. 아들 서씨는 오른쪽 검지 손가락이 잘려 나가 항상 장갑을 끼고 다녔는데 그 장갑 속에 숨은 때문인지 반지는 남아 있었던 것이다.
아들의 시체를 확인한 어머니는 차라리 산을 뒤져 시체 찾은 일을 후회했다. 살아 있기를 바란 마지막 희망마저 산산조각이 나 버린 것이다.
암매장에 동원된 안기선씨의 행방
항쟁 8년이 지난 지금도 희생자들의 신고 상황에서 알 수 있듯 많은 사람들이 아직 피해 의식이나 두려움에 묻혀 있다. 그 단적인 예가 안기선씨의 행방에 관한 사연이다.
88년1월 어느 개인을 통해 안기선씨 행방불명의 의혹을 제기한 김유준(29, 가명)씨는 끝내 이름 밝히기를 거부하면서 암매장에 관련한 사건 전말을 폭로했다.
80년 8월 김씨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안기선씨와 광주에서 오랜만에 만나 술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다.(안기선씨의 당시 나이는 21세였으며 나주군 산포면 매성리에 살고 있었음)
그 날 술집에서 안씨는 주기가 오르지 혼잣말처럼' 나는 안다. 나는 안다' 라는 말을 중얼 거렸다. 같이 있던 김씨가 무엇을 아느냐고 묻자 머리를 싸쥔 채 '나는 그 많은 광주 사람이 어디 묻혀 있는지 안다. 그러나 무서워서 말못하겠다. 누군가 항상 나를 감시하고 있다.'라면서 좀 채 말하려 들지 않았다. 이에 김씨가 안씨를 안심시키며 다그치자 다음과 같은 사실을 털어놓았다.
포크 레인 운전 기사였던 안씨는 80년 5월 당시 경북 울산의 간척지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정확한 날자는 기억나지 않고 다만 5월 27일이 지나지 않은 항쟁 기간 중의 어느 날 저녁 사장이 안씨를 불렀다. 가보니 사장은 안씨에게 '광주에 일이 있다 '면서 당장 갔다 오라고 지시했다.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른 채 안씨는 낯선 사람 2명과 함께 포니 승용차를 타고 광주 외곽 지역에 도착했다.(도시의 불빛이 멀리 보이는 외곽 지역이라고 표현했는데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던 것은 안씨가 원래 충청도 출신이고 몇 년 전 가족만이 나주로 이주한 후 주로 객지의 사업장을 전전하는 생활이었기 때문에 광주의 지리는 잘 모르는 상태였다.)
도착한 즉시 안씨에게는 포크 레인을 이용해 커다란 구덩이를 파게 하는 일이 주어졌다. 동원된 장비는 포크 레인 2대와 불도저 5대였다.(불도저 숫자는 확실치 않음) 구덩이를 파 놓은 후에 8t 트럭에 쓰레기 같은 것이 가득 실려 왔었고 안씨는 그 내용물을 긁어내리는 일을 하게 되었다(덤프트럭이 아니었기 때문에 포크 레인을 이용해 긁어 내렸음)
트럭 안에는 내용물이 모두 곡식 넣는 포대로 싸여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포크 레인으로 긁어내리는 도중 찌어져 안의 것이 불거져 나왔고 작업 불빛에 확인된 그것은 피투성이의 시체였다. 심한 악취 때문에 마스크까지 쓰고 일하던 안씨와 그 밖의 민간인들은 새벽에 군 병력과 교대해 작업장을 빠져 나왔다. 안씨의 기억에는 확실하지 않지만 군 병력과 교대하기 전까지 약 20대 가량 그 의혹의 쓰레기(?)를 매장했다고 한다. 물론 안씨는 그것이 모두 시체였는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작업 시간 내내 트럭에서 풍겨 나오는 악취로 보아 시체 한 두 구의 냄새가 아님은 틀림없다고 말했다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을 밝힌 안씨는 친구인 김씨에게 일주일 후 다시 만나 맑은 정신으로 애기 해 주겠으며 가능하다면 매장 장소를 함께 찾아보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일주일 후 안씨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궁금하게 여긴 김씨가 안씨의 집을 찾았지만 집안엔 아무도 없었다. 이웃집에 물어 보아도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져 알 수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백방으로 수소문해 보았지만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김씨는 문득'누군가 나를 감시하고 있다'고 겁을 먹던 술자리에서의 말을 기억하고 몸서리 쳤다. 김씨마저 겁이 나 더 이상 안씨의 행방을 찾지 않았다.
그러던 중 6개월 후 안씨에게서 편지 한 통이 날아들었다. 미국에서 온 편지였다. 사연인즉 이민 가서 잘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날아든 친구의 편지를 김씨는 믿을 수 없었다. 오히려 두려움만 더해 갔다. 동네 가서 확인해 보았지만 사전에 누구에게도 이민 간다는 얘기는 없었다. 일주일 후 만날 약속을 하고 이민 갈 친구는 아니었다. 정말 이민을 가 보낸 편지인지 죽었는 지도 알 수 없었다. 살았는 지 죽었는지는 아직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김씨는 친구 안씨의 행방불명 때문에 아직 엄청난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다. 친구 안씨의 의문의 행방이 주는 두려움이 김씨의 진실 규명 노력마저 봉쇄하고 있는 것이다.
드러나는 광주 학살의 진상
안기선씨의 행방불명과 관련한 김유준씨의 경우처럼 아직 많은 사람들이 학살 당시부터 지금까지 자행해 온 잔인성 때문에 두려워하면서도 직 간접으로 암매장 현장에 대한 제보는 끊이지 않고 있다. 5월 항쟁 직후부터 당시 학살당한 시체들이 곳곳에 암매장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그것은 나름의 근거를 가진 채 유포되어 그 때마다 광주 시민들은 또다시 항쟁 당시의 학살 장면을 떠올리는 아픔을 맛보아야 했다.
다음은 운암도 주공 아파트 신축 현장에서 시체와 책가방이 발견됐다는 소문에 대해 당시 공사장 인부였던 이○○씨가 증언한 내용이다(오월 청년 동 지회에 접수된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저는 당시에 운암동 주공 아파트 신축 현장에서 작업을 했던 사람입니다.
제가 운암동 주공 아파트 경지 정리 작업을 하는 일을 하고 있을 때 그당시 6개회사가 부근 현장에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1개회사는 광주 회사고 5개회사는 서울등 타 지역에서 와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일하는 회사는 홍○건설이었는데 제가 일하는 현장을 그때 당시 버스 종점 우측 야산이었는데 산을 깎아 내리기 시작하자 시체와 책가방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현장 소장이 부근에서 일하고 있던 사람들을 시체가 발견된 현장에서 다른 곳으로 보내 버렸습니다. 그때 현장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일을 하던 사람까지 남·녀 주민 30여명입니다. 목격자를 보낸 후 청소차가 오더니 포크 레인으로 퍼내어 3트럭이 실려 갔습니다.
그때 사진기가 없어 현장을 찍어 놓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그때 현장에서 일하던 청소부들이 코와 입을 틀어막고 일을 했었고 많은 양의 술과 안주가 지급되었는데 홍○건설에서 지급된 것이 아니라고 나중에 현장 소장이 나에게 이야기하더군요. 그후에 현장 소장이 부근에서 현장을 목격했던 사람들에게 술을 사주어 가면서 목격한 사람들만 알고 있어 라고 했고 홍○건설에서 일을 하던 사람들에게는 발설할 경우 모가지를 시키겠다고 협박 절반 부탁 절반 식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때 당시 우리가 받았던 임금은 여자 4천원, 남자 7천원 정도를 받고 일하고 있었지만 모가지가 떨어질 경우 생계가 막연하여 말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어제 1985년6월19일 당시에 시체를 치웠던 청소부와 만날 수 있었기에 당시 시체를 어떻게 처리했느냐고 물었더니 물어 보지도 말라고 손을 흔들면서 시체를 치우고 나서 3일 동안 밥도 못 먹고 일도 못했다고 하더군요. 데모를 하다가 죽었다면 무슨 놈의 책가방이냐고 말하며 말입니다.
제가 이제야 이렇게 찾아온 것은 그때의 시체가 어떻게 처리되었는가도 모르는 청소부를 다시 만나게 되어 충격을 받았고 또 내 자신이 홍○건설에서 발설할 경우 모가지를 시킨다는 소리에 여지 껏 숨겨 왔는데 원통하게 죽어 간 학생들의 시체가 이제는 그때 보았던 진상을 밝혀야 된다고 나에게 소리치는 것 같아 견딜 수 없어 이렇게 늦게나마 온 것이니 욕하지 마십시오.」
부끄럽습니다.
1985년 6월20일
이 ○○
행방 불 명자들 어디에 묻혀 있나
시신마저 찾지 못한 행방 불 명자 가족들은 망월동 에라도 안치된 영령들이 부럽다. 이제 살아 있으리라는 희망 마저 버리고 차라리 시체라도 어서 찾아 제사라도 차리는 게 남아 있는 가족들의 서글픈 소원이다. 시간만 나면 가족들은 게엄 군이 있었던 조선대 뒷산이나 너릿재 터널 부근의 야산을 뒤집고 다니지만 남는 긴 부르튼 발바닥의 물집 뿐 었다. 운암동 주공 아파트 건설 현장의 암매장 소문과 같이 건물 밑을 파 볼 수 없는 게 가족들에겐 가장 막막한 안타까움이다.
80년 5.18이후 야산 주변에 세워진 거의 모든 공공 건물의 현장에서 암매장의 소문들은 끊임없이 나돌았다. 어린이 대공원과 무등 도서관에서도 운암동 주공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와 똑 같은 형태의 목겨자가 있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실제적인 목격자의 예도 있었지만 5.18이후 광주 지방에 건설된 공공 건물 은 바로 '암매장 현장의 영원한 은폐'라는 학살 자들의 음모와 맞물려 있다는 심증도 광주 시민에겐 억지가 아니다. 학살 은폐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권 찬탈 자들의 만행과 학살을 정당화하는 망언이 뭇 사람들의 심증을 오히려 강화시키고 있다. 이른바 진상 조사를 하겠다고 특위까지 만들어 놓은 국회에서 '광주 사태는 그 자체가 국가적 위기였으며 이 위기로부터 국가를 보위하는데 군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거나 '광주 사태는 사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는 정부 당국자의 망언까지 서슴없이 뇌까 것을 보면서 아직도 국민들은 이 잔악한 학살 자들에게 진상 규명의 의지를 기대하지 않는다.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인가.
이제 진상 규명의 주체는 바로 이 땅의 주인인 애국 민중일 수밖에 없다는 믿음이 가슴 가슴마다 더욱 확실하게 각인 되고 있다. 그것은 진실을 감추려는 음모에 대한 치열한 투쟁에 다름 아니다. 아직 묻혀 있는 진실, 그 진실에 외피를 들러 씌우는 거짓 더께에 대한 분노의 칼질이기도 하다.
이제 암매장된 시체를 찾는 일은 오로지 살아 남은 자 들의 몫이다. 묻혀 있는 것은 시체가 아니라 광주이고 진실이며 바로 우리들의 양심이고 용기이기 때문이다.
2백명이냐, 2천명이냐? 5.18 행방 불 명자 가족들은 그렇게 묻지 않는다. 단 한 명의 내 아들 내 딸이 어디에 묻혀 있는가 그것이 중요하다. 아니, 왜 죽였고 왜 암매장했고 왜 아직까지 시신마저 돌려주지 않느냐, 그런 질문에 대한 확답이 더 중요하다. 이제 기다림도 지친 행방 불 명자 가족들은 어딘가 묻혀 있을 아들, 딸, 남편, 아내의 시신을 찾기 위해 산과 들로 나선다. 그러나 불러도불러도 돌아오는 것은 자신의 목소리뿐이다. 도대체 어디에 묻혀 있을까 내 아들딸은…… 이 대답을 가로막는 학살자의 음모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 음모의 형태는 어떠한가 그리고 어디에 어떻게 얼마나 묻혀 있나 그 암매장의 소문과 진상을 추적한다.
치밀한 암매장 - 공수 대원의 고백
암매장과 관련해 지금까지 드러난 증거로 볼 때 80년 당시의 학살 만행보다 오히려 가증스런 것은 이 학살 정권의 증거 인멸을 은폐 과정이다.
저들의 음모 과정을 보면 학살할 시점부터 치밀하고 정교하기 짝이 없다. 당시 광주에 진압군으로 참가했던 한 공수 대원(당시 나이 22세 하사)이 밝힌 바에 따르면 학살한 시체 매장에서부터 치밀한 적전 술을 방불케 한다. 시체 매장의 수법을 보자.
시체 한 구를 묻을 때 두 장의 판초 우의가 필요하다. 완전 군장시 필수 휴대품으로 필요시 사용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리고 야전삽만 있으면 된다. 이것 또한 군장에 딸려 있으므로 쉽게 사용할 수 있다. 우선 사람의 눈에 덜 띄는 곳에 시체 묻을 곳을 설정한다. 그리고 나서 선정한 장소 양쪽에 각각 1장씩의 판초 우의를 펼쳐 놓는다. 야전삽으로는 꼭 시체 크기 만한 구덩이를 판다. 이 때 주의할 점은 다시 땟장을 맞출 때 틈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땟장을 떠내야 한다는 것이다. 떠낸 땟장은 힌쪽 판초 우의에 놓여 놓고 구덩이에서 파낸 흙은 다른 쪽 판초 우의에 따로 놓는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풀밭 위에 흙덩어리 같은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다. 다음은 야전삽 길이 정도의 구덩이를 만든 후 그곳에 시체를 넣는다. 그 위에 다시 흙을 덮고 때를 입힌다. 때를 밟아 평평하게 다진 후 남은 흙을 밭이나 논 등 흙만 있는 곳에다 버려 감쪽같이 흔적을 없애고 작업이 완료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영원히 무덤도 없이 구천을 헤매는 원귀로 남는다.
결국 이렇게 묻힌 주검은 영원히 드러나지 않는 것일까?
그러나 이런 완벽한 작업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은폐를 드러나고 말았다. 바로 교도소 옆 야산에서 찾아낸 서만오씨의 시신이 그것이었다.
교도소 옆 야산에서 찾아낸 시체
교도소 옆 야산에서 발견된 서만오씨의 시신을 찾기까지는 참으로 아슬아슬한 우여곡절이 있다. 또한 주위의 정성어린 도움과 제보가 얼마난 귀중한 것인가에 대한 인식도 새로이 하게 된다.
서만오씨(55년생 광주시 북구 운암동)는 지극히 동생을 아끼고 보살피는 착한 사람이었다. 서씨가 80년 5월21일 바깥으로 나간 것도 동생을 찾기 위해서였다. 항쟁 기간 중이어서 시민 군의 차량이 유일한 교통 수단이었다.
서씨가 영일 식품 앞에서 시민 군의 차량에 탑승 한 것도 동생을 찾기 위해서였다. 서씨가 나간 그날 저녁 동생 만재씨는 돌아왔다. 그러나 동생을 찾으러 나간 서만오씨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22일부터는 어머니와 가족들이 서씨를 찾아 나섰다. 시내 곳곳을 찾아다니고 시체가 안치된 모든 병원을 뒤졌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24일 문화동 사무소에서 집으로 연락이 왔다. 서씨의 주민등록증을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서씨의 어머니가 혹시나 하고 부랴부랴 찾아갔지만 주민등록증만 건네줄 뿐 행방은 모른다는 것이었다.
동사무소 직원이 살짝 귀뜀 해 준 것은 신진 자동차 옆 폐차로 만든 술집 주인 할머니가 주민등록증을 갖다 주었다는 소식이었다. 서씨의 어머니가 그 할머니를 찾아 들은 소식은 너무나 처참했다.
5월21일 오후 3-4시경 창평 쪽으로 빵을 사러 가던 시민 군의 차량이 교도소에 있던 공수부대 총격을 받아 벌집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무서워서 안에 숨어 있었는데 누가 문을 두드리 길래 나가 보니 한 청년이 피로 범벅이 된 배를 움켜쥔 채 주민등록증을 건네며 연락해 달라고 말했다 한다. 주민등록증만 건네주고 젋은 이는 곧 쓰러졌고 내처 공수 대원들이 달려들어 쓰러진 그의 두 다리를 질질 끌고 갈 때까지 할머니는 무서워서 말 한마디 못하고 숨어서 엿보았다.
이러한 사실을 안 서씨의 어머니는 아들의 시체라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다녔다. 이러던 중 교도소 부근에 사는 한 시민이, 공수 대원들이 술 마시면서 하는 애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교도소 바로 옆 창평 쪽으로 빠지는 야산에 시체를 묻어 두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5월26일 서씨의 어머니는 4-5백평 넓이의 산등성이를 뒤지며 아들의 시신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혼자 힘으로는 어림없었다. 이튿날은 인부 10명을 사서 온 산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러다 막 파묻은 듯한 시체 1구를 발견했다. 아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부근에 또 다른 시체가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갖고 다시 파 내려가기 시작했다. 두 번째 구덩이에서 아들의 시체가 나왔다. 시계는 벗겨 가고 없었다. 손가락에 금반지만은 남아 있었다. 아들 서씨는 오른쪽 검지 손가락이 잘려 나가 항상 장갑을 끼고 다녔는데 그 장갑 속에 숨은 때문인지 반지는 남아 있었던 것이다.
아들의 시체를 확인한 어머니는 차라리 산을 뒤져 시체 찾은 일을 후회했다. 살아 있기를 바란 마지막 희망마저 산산조각이 나 버린 것이다.
암매장에 동원된 안기선씨의 행방
항쟁 8년이 지난 지금도 희생자들의 신고 상황에서 알 수 있듯 많은 사람들이 아직 피해 의식이나 두려움에 묻혀 있다. 그 단적인 예가 안기선씨의 행방에 관한 사연이다.
88년1월 어느 개인을 통해 안기선씨 행방불명의 의혹을 제기한 김유준(29, 가명)씨는 끝내 이름 밝히기를 거부하면서 암매장에 관련한 사건 전말을 폭로했다.
80년 8월 김씨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안기선씨와 광주에서 오랜만에 만나 술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다.(안기선씨의 당시 나이는 21세였으며 나주군 산포면 매성리에 살고 있었음)
그 날 술집에서 안씨는 주기가 오르지 혼잣말처럼' 나는 안다. 나는 안다' 라는 말을 중얼 거렸다. 같이 있던 김씨가 무엇을 아느냐고 묻자 머리를 싸쥔 채 '나는 그 많은 광주 사람이 어디 묻혀 있는지 안다. 그러나 무서워서 말못하겠다. 누군가 항상 나를 감시하고 있다.'라면서 좀 채 말하려 들지 않았다. 이에 김씨가 안씨를 안심시키며 다그치자 다음과 같은 사실을 털어놓았다.
포크 레인 운전 기사였던 안씨는 80년 5월 당시 경북 울산의 간척지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정확한 날자는 기억나지 않고 다만 5월 27일이 지나지 않은 항쟁 기간 중의 어느 날 저녁 사장이 안씨를 불렀다. 가보니 사장은 안씨에게 '광주에 일이 있다 '면서 당장 갔다 오라고 지시했다.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른 채 안씨는 낯선 사람 2명과 함께 포니 승용차를 타고 광주 외곽 지역에 도착했다.(도시의 불빛이 멀리 보이는 외곽 지역이라고 표현했는데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던 것은 안씨가 원래 충청도 출신이고 몇 년 전 가족만이 나주로 이주한 후 주로 객지의 사업장을 전전하는 생활이었기 때문에 광주의 지리는 잘 모르는 상태였다.)
도착한 즉시 안씨에게는 포크 레인을 이용해 커다란 구덩이를 파게 하는 일이 주어졌다. 동원된 장비는 포크 레인 2대와 불도저 5대였다.(불도저 숫자는 확실치 않음) 구덩이를 파 놓은 후에 8t 트럭에 쓰레기 같은 것이 가득 실려 왔었고 안씨는 그 내용물을 긁어내리는 일을 하게 되었다(덤프트럭이 아니었기 때문에 포크 레인을 이용해 긁어 내렸음)
트럭 안에는 내용물이 모두 곡식 넣는 포대로 싸여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포크 레인으로 긁어내리는 도중 찌어져 안의 것이 불거져 나왔고 작업 불빛에 확인된 그것은 피투성이의 시체였다. 심한 악취 때문에 마스크까지 쓰고 일하던 안씨와 그 밖의 민간인들은 새벽에 군 병력과 교대해 작업장을 빠져 나왔다. 안씨의 기억에는 확실하지 않지만 군 병력과 교대하기 전까지 약 20대 가량 그 의혹의 쓰레기(?)를 매장했다고 한다. 물론 안씨는 그것이 모두 시체였는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작업 시간 내내 트럭에서 풍겨 나오는 악취로 보아 시체 한 두 구의 냄새가 아님은 틀림없다고 말했다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을 밝힌 안씨는 친구인 김씨에게 일주일 후 다시 만나 맑은 정신으로 애기 해 주겠으며 가능하다면 매장 장소를 함께 찾아보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일주일 후 안씨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궁금하게 여긴 김씨가 안씨의 집을 찾았지만 집안엔 아무도 없었다. 이웃집에 물어 보아도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져 알 수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백방으로 수소문해 보았지만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김씨는 문득'누군가 나를 감시하고 있다'고 겁을 먹던 술자리에서의 말을 기억하고 몸서리 쳤다. 김씨마저 겁이 나 더 이상 안씨의 행방을 찾지 않았다.
그러던 중 6개월 후 안씨에게서 편지 한 통이 날아들었다. 미국에서 온 편지였다. 사연인즉 이민 가서 잘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날아든 친구의 편지를 김씨는 믿을 수 없었다. 오히려 두려움만 더해 갔다. 동네 가서 확인해 보았지만 사전에 누구에게도 이민 간다는 얘기는 없었다. 일주일 후 만날 약속을 하고 이민 갈 친구는 아니었다. 정말 이민을 가 보낸 편지인지 죽었는 지도 알 수 없었다. 살았는 지 죽었는지는 아직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김씨는 친구 안씨의 행방불명 때문에 아직 엄청난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다. 친구 안씨의 의문의 행방이 주는 두려움이 김씨의 진실 규명 노력마저 봉쇄하고 있는 것이다.
드러나는 광주 학살의 진상
안기선씨의 행방불명과 관련한 김유준씨의 경우처럼 아직 많은 사람들이 학살 당시부터 지금까지 자행해 온 잔인성 때문에 두려워하면서도 직 간접으로 암매장 현장에 대한 제보는 끊이지 않고 있다. 5월 항쟁 직후부터 당시 학살당한 시체들이 곳곳에 암매장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그것은 나름의 근거를 가진 채 유포되어 그 때마다 광주 시민들은 또다시 항쟁 당시의 학살 장면을 떠올리는 아픔을 맛보아야 했다.
다음은 운암도 주공 아파트 신축 현장에서 시체와 책가방이 발견됐다는 소문에 대해 당시 공사장 인부였던 이○○씨가 증언한 내용이다(오월 청년 동 지회에 접수된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저는 당시에 운암동 주공 아파트 신축 현장에서 작업을 했던 사람입니다.
제가 운암동 주공 아파트 경지 정리 작업을 하는 일을 하고 있을 때 그당시 6개회사가 부근 현장에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1개회사는 광주 회사고 5개회사는 서울등 타 지역에서 와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일하는 회사는 홍○건설이었는데 제가 일하는 현장을 그때 당시 버스 종점 우측 야산이었는데 산을 깎아 내리기 시작하자 시체와 책가방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현장 소장이 부근에서 일하고 있던 사람들을 시체가 발견된 현장에서 다른 곳으로 보내 버렸습니다. 그때 현장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일을 하던 사람까지 남·녀 주민 30여명입니다. 목격자를 보낸 후 청소차가 오더니 포크 레인으로 퍼내어 3트럭이 실려 갔습니다.
그때 사진기가 없어 현장을 찍어 놓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그때 현장에서 일하던 청소부들이 코와 입을 틀어막고 일을 했었고 많은 양의 술과 안주가 지급되었는데 홍○건설에서 지급된 것이 아니라고 나중에 현장 소장이 나에게 이야기하더군요. 그후에 현장 소장이 부근에서 현장을 목격했던 사람들에게 술을 사주어 가면서 목격한 사람들만 알고 있어 라고 했고 홍○건설에서 일을 하던 사람들에게는 발설할 경우 모가지를 시키겠다고 협박 절반 부탁 절반 식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때 당시 우리가 받았던 임금은 여자 4천원, 남자 7천원 정도를 받고 일하고 있었지만 모가지가 떨어질 경우 생계가 막연하여 말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어제 1985년6월19일 당시에 시체를 치웠던 청소부와 만날 수 있었기에 당시 시체를 어떻게 처리했느냐고 물었더니 물어 보지도 말라고 손을 흔들면서 시체를 치우고 나서 3일 동안 밥도 못 먹고 일도 못했다고 하더군요. 데모를 하다가 죽었다면 무슨 놈의 책가방이냐고 말하며 말입니다.
제가 이제야 이렇게 찾아온 것은 그때의 시체가 어떻게 처리되었는가도 모르는 청소부를 다시 만나게 되어 충격을 받았고 또 내 자신이 홍○건설에서 발설할 경우 모가지를 시킨다는 소리에 여지 껏 숨겨 왔는데 원통하게 죽어 간 학생들의 시체가 이제는 그때 보았던 진상을 밝혀야 된다고 나에게 소리치는 것 같아 견딜 수 없어 이렇게 늦게나마 온 것이니 욕하지 마십시오.」
부끄럽습니다.
1985년 6월20일
이 ○○
행방 불 명자들 어디에 묻혀 있나
시신마저 찾지 못한 행방 불 명자 가족들은 망월동 에라도 안치된 영령들이 부럽다. 이제 살아 있으리라는 희망 마저 버리고 차라리 시체라도 어서 찾아 제사라도 차리는 게 남아 있는 가족들의 서글픈 소원이다. 시간만 나면 가족들은 게엄 군이 있었던 조선대 뒷산이나 너릿재 터널 부근의 야산을 뒤집고 다니지만 남는 긴 부르튼 발바닥의 물집 뿐 었다. 운암동 주공 아파트 건설 현장의 암매장 소문과 같이 건물 밑을 파 볼 수 없는 게 가족들에겐 가장 막막한 안타까움이다.
80년 5.18이후 야산 주변에 세워진 거의 모든 공공 건물의 현장에서 암매장의 소문들은 끊임없이 나돌았다. 어린이 대공원과 무등 도서관에서도 운암동 주공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와 똑 같은 형태의 목겨자가 있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실제적인 목격자의 예도 있었지만 5.18이후 광주 지방에 건설된 공공 건물 은 바로 '암매장 현장의 영원한 은폐'라는 학살 자들의 음모와 맞물려 있다는 심증도 광주 시민에겐 억지가 아니다. 학살 은폐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권 찬탈 자들의 만행과 학살을 정당화하는 망언이 뭇 사람들의 심증을 오히려 강화시키고 있다. 이른바 진상 조사를 하겠다고 특위까지 만들어 놓은 국회에서 '광주 사태는 그 자체가 국가적 위기였으며 이 위기로부터 국가를 보위하는데 군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거나 '광주 사태는 사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는 정부 당국자의 망언까지 서슴없이 뇌까 것을 보면서 아직도 국민들은 이 잔악한 학살 자들에게 진상 규명의 의지를 기대하지 않는다.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인가.
이제 진상 규명의 주체는 바로 이 땅의 주인인 애국 민중일 수밖에 없다는 믿음이 가슴 가슴마다 더욱 확실하게 각인 되고 있다. 그것은 진실을 감추려는 음모에 대한 치열한 투쟁에 다름 아니다. 아직 묻혀 있는 진실, 그 진실에 외피를 들러 씌우는 거짓 더께에 대한 분노의 칼질이기도 하다.
이제 암매장된 시체를 찾는 일은 오로지 살아 남은 자 들의 몫이다. 묻혀 있는 것은 시체가 아니라 광주이고 진실이며 바로 우리들의 양심이고 용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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