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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8년 동안 기다려도 소식은 없고…"일가족 4명 행방불명의 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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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동안 기다려도 소식은 없고…

일가족 4명 행방불명의 진상



"도대체 죽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아요. 지금 제가 찾아 온 것도 행방불명 신고이고 수색 신청을 하는 겁니다."

6월8일 오전 평민당 서구갑 지구당의 5.18피해자 신고소를 찾아온 김금희씨(35.무안군 몽탄면 다산리 282번지)는 자신의 신고소 방문이 가족의 죽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지금까지 5.18당시 행방불명된 사람의 신고는 많았지만 일가족 4명이 한 꺼분에 실종 되 사건 접수는 처음이었다. "5월 초순에 여동생이 죽었어요. 80년 당시에 큰오빠. 어머니 동생들 모두 경기도 서울 등에서 살고 있었는데 동생의 죽음으로 내려 왔어요. 저는 결혼해서 남편과 함께 농사짓고 있었고요. 동생 장례를 치르고 나서도 한참 바쁠 때라 우리집 일을 어머니와 동생들이 도왔어요. 그러다가 5월 20일 서울로 모두 떠났어요. 저희 큰아들인 광진이까지 데리 구요."

김씨에 의하면 80년5월 20일 무안군 몽탄면 다산리에서 광주를 경유 서울로가기 위해 어머니(임소례, 당시 57세)와 두 남동생(김병균-당시 23세, 김병대-당시14세) 그리고 김씨의 큰아들(박광진-당시 5세)등 4명이 출발했으나 전원 행방불명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이들은 거주지인 의정부시로 가기 위해 광주에서 서울 가는 고속버스는 탈 예정이었다. 무안에서는 오전 10시 30분발 여수행 완행열차(광주 경유)를 탔으나 그후 지금 까지 8년 동안 소식이 없었다.

"6월 초순경에야 의정부 오빠한테서 전화가 와서 알았지요 왜 아직 안 올라오시냐는 거였어요. 한 달을 기다려도 두 달을 기다려도 소식은 없었어요. 8년이 지난 지금 까지 도요. 행방불명된 직후에 무안 경찰서에 신고를 했지만 아무 연락도 없었고, 오히려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무안을 떠나 광주를 향한 날짜가 5월 20일이니까. 경찰들도 스스로 짐작하는 눈치였습니다. 뒤에 알고 보니까 당시 광주시 외곽 동지에서 수많은 양민들이 학살당했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실제로 망월동 묘지에는 초등학생까지 묻혀 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잔인하게 살인 행위를 했는가 짐작이 가요. 그래도, 그래도. 우리 광진 이는 다섯 살인데… 설마 그랬을 리가 없어요. 절대 죽었을 리가 없어요. 그래서 아직 제사를 안지 내요.

김씨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다짐하듯 말하고 있었지만 힘이 없었다. 김씨가 가져온 세대별 주민등록표에는 행방불명되 4명 모두가 '무단 전출 직권말소' 되어 있었다.

"가난 때문에 흩어져 산 게 죄였어요. 그렇지 않으면 서울로 떠날 필요도 없었을 텐데… 아니, 노상 광주를 거쳐야만 어디를 갈 수 있게 된 곳에 산 게 더 큰 죄인지 모르죠."

처음의 단호한 말투와는 달리 김씨는 말끝을 흐렸다.

최루탄 가스 후유증 시민 숨져

최루탄 가스의 후유증으로 무고한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지난 5월25일 저녁 7시경 일을 마치고 귀가하던 이복기씨(51.방림동23-1)가 구 원호청 앞길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 분말을 뒤집어쓴 후 시름시름 앓다. 6월 5일 끝내 숨지고 말았다. 가족에 따르면 25일 밤 이씨가 밀가루 같은 허연 최루탄 분말을 맞은 직후부터 두통과 구토 증세를 보였고, 하루하루 품팔이로 살아가는 형편인데 사망할 때까지 일을 나가지도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가족들은 이씨는 평소 건강한 몸으로 병원이나 약국에 한번 가보지 않았고 실제로 강도 높은 일고 노동자로 일해 왔다고 밝혔다.

이번 이씨의 죽음은 그 동안 그 동안 최루탄의 파편에 의한 사상을 넘어 분말. 가스의 독성이 치사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첫 증거로서 심각한 국민적 저항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검찰은 9일 이씨의 사체를 부검해 국립 과학 수사 연구소에 감정을 의뢰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