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원로 작가 천승세씨가 가슴으로 부른 고 김남주 시인을 위한 추모의 노래 - '제발 이제 고통없는 나라에서 …
본문
원로 작가 천승세씨가 가슴으로 부른 고 김남주 시인을 위한 추모의 노래
'제발 이제 고통없는 나라에서 편히 쉬거라'
산하금대(山溥襟帶) 의구해서 이 봄은 다시 왔고, 만물 소생하는 기운 귀가 저린데, 둘러봐도 찾아봐도 남주만 없구나. 대체 어느 곳으로 살 냄새까지 거둬 갖는가. 잠종비적(潛 秘跡)도 낯설고 삭연 하다.
물어 보고 다시 삭혀 봐도 대답은 한가지였다. "선생님, 남주 형님 참말로 죽었습니다!"
그런갑다 하고 궐련 한 개비 태워 문다. 순리(順理)가 정연하되, 한가지 못 깨달은 매욱함에 놀란다.
작년 늦가을까지 팔팔하던 깨 죽나무 젖꼭지 같은 새움 틔울 만한데 기어코 죽어 버렸다. 그렇구나, 한 목숨이 제 삶을 마감할 때는 그 중 먼저 제 생명의 수액을 버리게 돼 있다. 나무의 피가 수액이라던 사람의 수액은 붉은 피 일지라.
기껏 여덟 해 산 깨죽 나무였다. 새삼스러운 엄절함을 이제사 삭힌다.
나주도 '살기 싫으면' 새 봄이 오기 전에 스스로 목숨의 불꽃을 끄는구나.
오만 잡 벌레들 산천 스럽게 목숨 부지하는 봄·여름·가을이 싫으면 차라리 광막풍이 살을 도려내는 엄동설한 때맞춰 얼어죽고 봤을 것이다.
까닭 없이 소망만 벙글어 지는 '봄' 에 새움 장만하는 것도 무담시 저어 스럽고, 천종만양(千種萬樣)서로 질세라 다투며 악도리 삶 채비하는 '여름'도 버겁고. '새 싹' 틔운 '죄(罪)' 그늘 한번 대탐스럽게 늘인 '벌(罰)'로 독살스럽게 가지마다 겹살이 사는 벌레들도 키우기 싫은 어느 가을날∼ 그래서 '이만큼 절실하고' '아플 때'를 골라 하찮은 깨죽 나무도 제 살을 얼려 고개를 꺾었을 것이라는 생각.
참말 그랬는갑다 생각하며 남북천공(南北天空)올려다 본다. 참말로 남주는 멀다. 시꺼멓게 닫은 눈자위로 꿈만 깊겠구나.
죽은 사람을 못 잊어 제 살 도려내고 뼈를 깍음은 부질없다. 잊어야 할 일 밖인 장만 할 게 없다.
알고 있다.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왜 이렇게도 찜찜한가, 남주는 참말로 죽었는가. 우리 남주는 죽은게 아니라 임의로 '내다 버린 것'만 같다. 사람의 포식성 잔칫상 위에다. 그리고 '써먹다가 쓸모 없어' 허섭 쓰레기 치우듯 치워 버린 것만 같다.
한창 살 나이에 세상을 버린 방지(芳志)의 후배들도 많았다.
그때마다 절애 단장 식은땀을 흘리면서 꿈인가 생시인가 소습 뛰며 지원 극통(至霧極痛) 했었거니와, 몇 달 흐르고 나면 '제발 고통 없는 나라에서 편히 쉬거라' 하는 기도로 상심의 분잡 함을 거르곤 했었다.
새 봄은 저리 왔건만…
그러나 남주는 다르다. 제아무리 죽었다 체념해도 정신이 따라주지 않고 그야말로 음회세위 (款灰決胃) 본새로 독한 마음을 다잡아 봐야 말짱 헛고생이다.
죽어 누워 있는 남주의 모습은 뵈지 않는다. 한없이, 한없이 걷고 있다. 도대체 어딜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무슨 역사적 절망고(絶望顧)가 또 있어 저렇듯 걷고만 있는 것일까.
남주에 대한 객관적 인식은 대강 다음의 몇 가지로 추려 묶을 수 있다. 지식인에 앞서 입립신고(粒粒辛苦)의 과정을 산 농자(農者)라는 것. 한창 물오른 젊음을 의기와 절의로써 불사른 전사(戰士)라는 것.
궂은 일 성가신 일 마다 않고 일일이 건사하는 삼덕신학(三德神學)의 선비라는 것. 천성 이 부드럽고 온 화하기만 하여 어지간한 악덕쯤 치지도의 (置之度外) 해 버리는 돈후한 사람이 라는 것.
10년 세월을 함분축원(含憤蓄怨) 몸살 앓으며 견뎌낸 옥방 고초며, 순리의 정성(走省)하므로 땅을 갈고 씨를 岺쳤던 토골흑풍(土骨黑風)의 질고를 모를리 없기에, 남주를 두고 '전사' '농자'하는 찬탄에 는 달리 껴들 담이 없다.
그리나 한없이 무르고 지선 하기만 해서 웬만한 악폐쯤 간섭 안고 내버려뒀다 던가, 보람된 일과 허상된 일을 가림 않고 선비 체모 살려 매욱 하리 만치 관여했었다는 공론에 이르러는 슬며시 부아가 치민다.
'궂은 일, 성가신 일 마다하지 않았는데'
대저 들은 대로, 제 나름껏 보고 느낀 대로, 제 가량에 맞춰 남을 평설함을 빗대어 솔구이발(率ㅁ而發)이란 책망이 있거니와, '체수 보고 옷 짓고 형상보고 이름 짓는다' 하는 속담 본새로 여틈한 식견 앞세워 주절거리다 보면 이런 허문(虛文)들도 심상찮게 기세 재는 모양이다.
남주는 매사를 제 편할 대로 치지 도외 해 본 적이 없었다. 살과 허를 분별 않고 막무가내 남선 북마(南船北馬) 갈아타며 가래톳 돋도록 쏴 다니 지도 않았다.
남주가 누구인가. 비록 50평생을 마감했으되 세상의 온갖 고초를 샅샅이 겪고 치러 내는 비상 간고(鑛嘗艱古)의 삶을 꾸렸음이려니, 어느 짬인들 허실 수로 견뎌 냈겠으며 품성의 돈후함을 억지로 만들어 삿된 일에 줏대 없이 섞였겠는가.
남주는 입으로 말하지 않는다. 눈으로 말한다. 살거리 안부쯤 서로 데면데면 주고받는 사이라면 모를까, 심노(心勞)의 찰진 정리로 맺은 연분 앞에서는 늘상 눈으로 말했었다.
귀찮으면 입으로 말해 버리고 심심하면 입으로 맞 장단도 쪘다. 이런 모습의 남주만 갸륵하다. 삭힌 사람들이 남주를 그쯤 언불진의(言不盡意)로 도매값 매기리라 믿는다.
'더는 못 버티 겠당께요'
지난해 한 여름쯤 됐들 때였다. 밤늦은 시간에 불쑥 내 집을 찾았다. 거진 육탈골립(肉脫骨立) 돼 가는 행색으로 기진 해서 한동안 말이 없는데, 낌새로 미루어 그 늦은 밤까지 '강화도 조광리'의 들판을 허비적 거렸음직 했다.
남주가 명치께를 쓸어 대며 내뱉았다.
"더 럽끄 징한 세상 인자 더는 못 버티 겠당 게요!"
"‥‥‥‥언제는 살맛나는 세상만 살았었더냐."
"‥‥‥‥그래 번징께 드릴 말씀 없네요."
선배랍시고 이 말 저 말 어리 반죽 치며 남주를 달래는 동안, 남주는 단 한번도 입으로 대답 해본 적이 없었다. 불심지 이글거리는 두 눈을 지릅 뜨고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거렸을 뿐이다. 그 눈빛 속에다 '그라제라잉, 그라제라잉!'하는 절감의 대답을 심은 채 말이다.
남주가 그중 서럽게 느껴야 했던 세상사는, 바로 때맞춰 기민하게 편벽하는 지성(知性)들의 '형질변경'이었다. 한갓 부운 같은 인생사이기로서니, 횐옷처럼 부풀다가 그 새 '개새끼' 모양으로 뒤바뀌는 백의창구(白衣 蒼拘)의 모지락 스러운 세월이며, 살만한 세상이 왔다 싶으면 기어나와 지식의 흰소리를 짱알대고 공안(公安)의 쌍날칼이 버드친다 싶으면 몸뚱이 숨겨 제 처신만 간수하는, 이른바 용사 행장(用捨行藏)의 추저분한 지식의 작태가 죽음보다 깊고 처절했던 것이다.
남주는 시대적 변화에 상식적으로 '체감'(體感)되는 것과 역사적 변혁에 목숨 바쳐 일떠 서는 '감동적 동참'을 엄혹 하게 분별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시대적 변화에 무작위로 체감하는 짓거리이며, 또 어떤 것이 역사적 변혁에 감동 적으로 동참하는 정신이 될 것인가.
아무리 새로운 현상이라 할지라도 종속적 관행을 사주하는 일반론적 변화는 가치가 없다. 이런 현상에 목표도 없이 업히고 순응하는 의지의 무기력이 바로 시대적 변화에 상징적으로 체감되는 것이라 할 것이며, 본질 악의 종속적 관행을 진보적 정신으로 거부하는 실천적 지성의 적극적 정신이 바로 역사적 변혁에 감동적으로 동참하는 뜻이 될 성싶다.
'죽을병을 얻을 만도 했다'
이런 남주가 '맑은 날에는 외출용 신발로 쓰고 궃은 날에는 너겁이나 진배없는 나막신 삼는 ' 이극구당(履 俱當)격 지성들의 '재주'와 '잔꾀'에 그 얼마나 실의와 설움을 느꼈겠는가.
죽을병을 얻을 만도 했다.
그래서 이태 도록 '내다 버려 버린 듯 '싶고 '쓸대로 써먹다가 치워 버린 듯'도 싶은 것이다.
남주의 죽음을 알리는 신문 잡기 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썼던가. '어린 아들 토일이의 장래를 걱정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고―
어디 될 성부를 말이냐. 남주가 언제 무육지도(撫育之道)만 보람 삼는 유림(儒林)으로 살았었기에 그만한 간맞춤으로 그의 생애를 갈무리 짓는가 말이다.
남주는 숨줄을 끄면서도 의분(義憤)했다. '개 같은 세상!……개새끼들!……좋은 일 할라고 애썼 는디, 개 같은 세상, 개새끼처럼 헐떡거리다가, 이렇게 죽는구나!'
남주다운 유언이다. 남주는 우연(偶然)에 맡길 '일'과 참보람의 미지(未知)를 위한 처절한 '숙고(熟考)'를 혼동 해 본 적이 없었다. 그 가혹했을 죽음이 그처럼 편안만 했으리.
온갖 진구 덥도 마다 않고 가랑이 찢어지도록 통방 행보 했으되 참 보람의 식별(識別)을 앞세워 분주했을 뿐이요, 웬만한 폐행을 눈웃음으로 용서했으되, 속으로는 추상같은 지청구를 품고 있었을 것이었다.
산자들의 민감한 애도로써 남주를 평기허심(平氣虛心)잊는 짓은 그만 거뒀으며 좋겠다.
아, 구국난전의 전선에서 일호백낙(一呼百諾)의 기개를 떨쳐도 모자랄 우리들의 남주는, 참말로 죽었는가, 참말로 죽어 버렸는가.
남주가 죽던 날 새벽― 이승철, 김영현, 강형철, 김사인, 오우열, 김남일, 강태형, 박선욱, 오철수등 열한 사람을 창황망조(蒼黃罔措) '고려병원'으로 떠보내고 나서, 나는 빈 방에 홀로 앉아 억장이 무너지는 통곡을 낮 될 때까지 쏟아봤다.
울다 지쳐 눈을 떴었다. 참으로 별난 일이었다.
'죽는 데만 삼년 걸린다'는 말대로 세 해 넘도록 바슬바슬 앓던 춘란이 청징 개결한 꽃을 피운 것이었다.
남주의 병을 알고 나서부터는 불철주야 술로만 나날을 보낸 탓에 어느 짬 꽃대를 올렸었는지도 가늠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춘란 한 송이 같은 너를 보니'
그날 나는 이렇게 일기를 썼다. 만취 상태의 정신을 유행(유행)하며,
'춘란 한 송이 너를 보니, 몸 속에 시뻘건 핏줄 흘리며 사는 내 목숨이 죄스럽다.
너는 한 방울 이슬 올려 무량 겁을 버틸지니, 내 어찌 벌끈 벌끈 끓는 피로 온 몸을 적시면서, 오늘 하루살이도 버거워 살다 죽다 하는가.
대체 네 살고자 떠난 세상 어떤 곳이냐, 애송아지 힘살처럼 네 뿌리 뻗어 살 세상, 가고 싶다 오늘은 네 사는 나라로.
없구나, 대답 소리 한마디도 이슬 한 방울 속에 다 싸담아 버렸구나, 임종날 만큼은 서럽게 눈을 덮어야 드디어 보이리, 찬이슬 모아모아 네 강을 만들어, 그 제사 모가지 푸욱 떨궈 흩뿌리는 네 향기와, 새하얀 혓바닥 위에 이빨 앙 물어 꾸욱 찢은 새빨간새빨간 네 손도장 세 개는 ,
남주 네가 피웠구나 이 춘란 시린 꽃을 눈부신 혓바닥 세 글자핏물 말씀 알 길 없다. 너는 한 방울 이슬 올려 무량겁을 살겠으되, 내 어찌 붉은 피로 온 몸을 적시면서 오늘도 버거워 버거워 살다 죽다 하는가.'
이 서툴고 열졸한 일기문을 한 자 고침 없이 다시 새기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따른다. 문장의 운용은 미천하되 이 일기문 속에는 내가 죽음에 이르러서야 겨우 밝힐 수 있는 '남주와 나만 ' 의 혈맹지신(血盟之信)이 담겨져 있는 탓이다.
세상은 오늘도 편히 살거라 부추긴다.
사실과 행동의 우선권을 긍정하는 간결한 '현실주의 '를 사랑하라 독장 친다. 그러나 나는 남주의 사자후를 기억하며 그를 따르다 죽을 수 밖에 없다.
'현실 과의 난투에서 진리 얻어야'
"선생님, 진리에 대한 지식에 개념 설정이 으짜먼 그렇게도 편협 하까 요잉. 지 생각은 전혀 틀리제라 잉. 만약에 말입니다.
세상에 유일한 진리가 있다면 선행된 관찰에 의해서가 아니고, 오로지 현실과의 직접적인 접촉과 그 접촉의 치열한 난투에 의해서만 생성된다고 믿고 있당께요! 지 말이 틀립니까?"
그렇다. '진실 '과 '정의'는 유용한 이론이나 적실한 처신의 안이(安易)함을 떠날 때, 비로서 활명(活命)의 '피'를 갖는 때문이다.
혼돈의 사회, 그리고 기만의 역사 속에서는 유일한 '정신'과 유일한'뜻'을 만날 수 없다. 토끼가 백년을 산들 제 두 귀 아래다 뿔을 키울 것인가, 거북이가 만년을 산들 제 몸뚱이에다 털을 세울 것인가.
어찌하여 지금도 '한없이 걷고만 있는' 남주는 토각구모(兎角龜毛)의 경이로운 실감을 빛살처럼 흩뿌리는 것일까.
남주를 땅에 묻던 밤엔 찬달이 덩두렷이 떴었다.
나는 망월(望月)하며 '토마스 만'의 금언(金言)만 외웠다.
"역사의 전진은 목표를 유일한 자양으로 삼는다.
역사의 진보를 위한 유일한 목표! 그것은 빛나는 도취(陶醉)이다. 일반적인 관행으로 강요되는 유용한 도덕과 윤리와 이성과도 철저히 무관한 , 자아적 진실과 정의감에의 순수한 도취 말이다!
순연한 '도취'에다 천분의 피값을 몽땅 쏟아 붓다 기진한 우리들의 김남주는, 참말로참말로 죽었는가!
'제발 이제 고통없는 나라에서 편히 쉬거라'
산하금대(山溥襟帶) 의구해서 이 봄은 다시 왔고, 만물 소생하는 기운 귀가 저린데, 둘러봐도 찾아봐도 남주만 없구나. 대체 어느 곳으로 살 냄새까지 거둬 갖는가. 잠종비적(潛 秘跡)도 낯설고 삭연 하다.
물어 보고 다시 삭혀 봐도 대답은 한가지였다. "선생님, 남주 형님 참말로 죽었습니다!"
그런갑다 하고 궐련 한 개비 태워 문다. 순리(順理)가 정연하되, 한가지 못 깨달은 매욱함에 놀란다.
작년 늦가을까지 팔팔하던 깨 죽나무 젖꼭지 같은 새움 틔울 만한데 기어코 죽어 버렸다. 그렇구나, 한 목숨이 제 삶을 마감할 때는 그 중 먼저 제 생명의 수액을 버리게 돼 있다. 나무의 피가 수액이라던 사람의 수액은 붉은 피 일지라.
기껏 여덟 해 산 깨죽 나무였다. 새삼스러운 엄절함을 이제사 삭힌다.
나주도 '살기 싫으면' 새 봄이 오기 전에 스스로 목숨의 불꽃을 끄는구나.
오만 잡 벌레들 산천 스럽게 목숨 부지하는 봄·여름·가을이 싫으면 차라리 광막풍이 살을 도려내는 엄동설한 때맞춰 얼어죽고 봤을 것이다.
까닭 없이 소망만 벙글어 지는 '봄' 에 새움 장만하는 것도 무담시 저어 스럽고, 천종만양(千種萬樣)서로 질세라 다투며 악도리 삶 채비하는 '여름'도 버겁고. '새 싹' 틔운 '죄(罪)' 그늘 한번 대탐스럽게 늘인 '벌(罰)'로 독살스럽게 가지마다 겹살이 사는 벌레들도 키우기 싫은 어느 가을날∼ 그래서 '이만큼 절실하고' '아플 때'를 골라 하찮은 깨죽 나무도 제 살을 얼려 고개를 꺾었을 것이라는 생각.
참말 그랬는갑다 생각하며 남북천공(南北天空)올려다 본다. 참말로 남주는 멀다. 시꺼멓게 닫은 눈자위로 꿈만 깊겠구나.
죽은 사람을 못 잊어 제 살 도려내고 뼈를 깍음은 부질없다. 잊어야 할 일 밖인 장만 할 게 없다.
알고 있다.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왜 이렇게도 찜찜한가, 남주는 참말로 죽었는가. 우리 남주는 죽은게 아니라 임의로 '내다 버린 것'만 같다. 사람의 포식성 잔칫상 위에다. 그리고 '써먹다가 쓸모 없어' 허섭 쓰레기 치우듯 치워 버린 것만 같다.
한창 살 나이에 세상을 버린 방지(芳志)의 후배들도 많았다.
그때마다 절애 단장 식은땀을 흘리면서 꿈인가 생시인가 소습 뛰며 지원 극통(至霧極痛) 했었거니와, 몇 달 흐르고 나면 '제발 고통 없는 나라에서 편히 쉬거라' 하는 기도로 상심의 분잡 함을 거르곤 했었다.
새 봄은 저리 왔건만…
그러나 남주는 다르다. 제아무리 죽었다 체념해도 정신이 따라주지 않고 그야말로 음회세위 (款灰決胃) 본새로 독한 마음을 다잡아 봐야 말짱 헛고생이다.
죽어 누워 있는 남주의 모습은 뵈지 않는다. 한없이, 한없이 걷고 있다. 도대체 어딜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무슨 역사적 절망고(絶望顧)가 또 있어 저렇듯 걷고만 있는 것일까.
남주에 대한 객관적 인식은 대강 다음의 몇 가지로 추려 묶을 수 있다. 지식인에 앞서 입립신고(粒粒辛苦)의 과정을 산 농자(農者)라는 것. 한창 물오른 젊음을 의기와 절의로써 불사른 전사(戰士)라는 것.
궂은 일 성가신 일 마다 않고 일일이 건사하는 삼덕신학(三德神學)의 선비라는 것. 천성 이 부드럽고 온 화하기만 하여 어지간한 악덕쯤 치지도의 (置之度外) 해 버리는 돈후한 사람이 라는 것.
10년 세월을 함분축원(含憤蓄怨) 몸살 앓으며 견뎌낸 옥방 고초며, 순리의 정성(走省)하므로 땅을 갈고 씨를 岺쳤던 토골흑풍(土骨黑風)의 질고를 모를리 없기에, 남주를 두고 '전사' '농자'하는 찬탄에 는 달리 껴들 담이 없다.
그리나 한없이 무르고 지선 하기만 해서 웬만한 악폐쯤 간섭 안고 내버려뒀다 던가, 보람된 일과 허상된 일을 가림 않고 선비 체모 살려 매욱 하리 만치 관여했었다는 공론에 이르러는 슬며시 부아가 치민다.
'궂은 일, 성가신 일 마다하지 않았는데'
대저 들은 대로, 제 나름껏 보고 느낀 대로, 제 가량에 맞춰 남을 평설함을 빗대어 솔구이발(率ㅁ而發)이란 책망이 있거니와, '체수 보고 옷 짓고 형상보고 이름 짓는다' 하는 속담 본새로 여틈한 식견 앞세워 주절거리다 보면 이런 허문(虛文)들도 심상찮게 기세 재는 모양이다.
남주는 매사를 제 편할 대로 치지 도외 해 본 적이 없었다. 살과 허를 분별 않고 막무가내 남선 북마(南船北馬) 갈아타며 가래톳 돋도록 쏴 다니 지도 않았다.
남주가 누구인가. 비록 50평생을 마감했으되 세상의 온갖 고초를 샅샅이 겪고 치러 내는 비상 간고(鑛嘗艱古)의 삶을 꾸렸음이려니, 어느 짬인들 허실 수로 견뎌 냈겠으며 품성의 돈후함을 억지로 만들어 삿된 일에 줏대 없이 섞였겠는가.
남주는 입으로 말하지 않는다. 눈으로 말한다. 살거리 안부쯤 서로 데면데면 주고받는 사이라면 모를까, 심노(心勞)의 찰진 정리로 맺은 연분 앞에서는 늘상 눈으로 말했었다.
귀찮으면 입으로 말해 버리고 심심하면 입으로 맞 장단도 쪘다. 이런 모습의 남주만 갸륵하다. 삭힌 사람들이 남주를 그쯤 언불진의(言不盡意)로 도매값 매기리라 믿는다.
'더는 못 버티 겠당께요'
지난해 한 여름쯤 됐들 때였다. 밤늦은 시간에 불쑥 내 집을 찾았다. 거진 육탈골립(肉脫骨立) 돼 가는 행색으로 기진 해서 한동안 말이 없는데, 낌새로 미루어 그 늦은 밤까지 '강화도 조광리'의 들판을 허비적 거렸음직 했다.
남주가 명치께를 쓸어 대며 내뱉았다.
"더 럽끄 징한 세상 인자 더는 못 버티 겠당 게요!"
"‥‥‥‥언제는 살맛나는 세상만 살았었더냐."
"‥‥‥‥그래 번징께 드릴 말씀 없네요."
선배랍시고 이 말 저 말 어리 반죽 치며 남주를 달래는 동안, 남주는 단 한번도 입으로 대답 해본 적이 없었다. 불심지 이글거리는 두 눈을 지릅 뜨고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거렸을 뿐이다. 그 눈빛 속에다 '그라제라잉, 그라제라잉!'하는 절감의 대답을 심은 채 말이다.
남주가 그중 서럽게 느껴야 했던 세상사는, 바로 때맞춰 기민하게 편벽하는 지성(知性)들의 '형질변경'이었다. 한갓 부운 같은 인생사이기로서니, 횐옷처럼 부풀다가 그 새 '개새끼' 모양으로 뒤바뀌는 백의창구(白衣 蒼拘)의 모지락 스러운 세월이며, 살만한 세상이 왔다 싶으면 기어나와 지식의 흰소리를 짱알대고 공안(公安)의 쌍날칼이 버드친다 싶으면 몸뚱이 숨겨 제 처신만 간수하는, 이른바 용사 행장(用捨行藏)의 추저분한 지식의 작태가 죽음보다 깊고 처절했던 것이다.
남주는 시대적 변화에 상식적으로 '체감'(體感)되는 것과 역사적 변혁에 목숨 바쳐 일떠 서는 '감동적 동참'을 엄혹 하게 분별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시대적 변화에 무작위로 체감하는 짓거리이며, 또 어떤 것이 역사적 변혁에 감동 적으로 동참하는 정신이 될 것인가.
아무리 새로운 현상이라 할지라도 종속적 관행을 사주하는 일반론적 변화는 가치가 없다. 이런 현상에 목표도 없이 업히고 순응하는 의지의 무기력이 바로 시대적 변화에 상징적으로 체감되는 것이라 할 것이며, 본질 악의 종속적 관행을 진보적 정신으로 거부하는 실천적 지성의 적극적 정신이 바로 역사적 변혁에 감동적으로 동참하는 뜻이 될 성싶다.
'죽을병을 얻을 만도 했다'
이런 남주가 '맑은 날에는 외출용 신발로 쓰고 궃은 날에는 너겁이나 진배없는 나막신 삼는 ' 이극구당(履 俱當)격 지성들의 '재주'와 '잔꾀'에 그 얼마나 실의와 설움을 느꼈겠는가.
죽을병을 얻을 만도 했다.
그래서 이태 도록 '내다 버려 버린 듯 '싶고 '쓸대로 써먹다가 치워 버린 듯'도 싶은 것이다.
남주의 죽음을 알리는 신문 잡기 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썼던가. '어린 아들 토일이의 장래를 걱정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고―
어디 될 성부를 말이냐. 남주가 언제 무육지도(撫育之道)만 보람 삼는 유림(儒林)으로 살았었기에 그만한 간맞춤으로 그의 생애를 갈무리 짓는가 말이다.
남주는 숨줄을 끄면서도 의분(義憤)했다. '개 같은 세상!……개새끼들!……좋은 일 할라고 애썼 는디, 개 같은 세상, 개새끼처럼 헐떡거리다가, 이렇게 죽는구나!'
남주다운 유언이다. 남주는 우연(偶然)에 맡길 '일'과 참보람의 미지(未知)를 위한 처절한 '숙고(熟考)'를 혼동 해 본 적이 없었다. 그 가혹했을 죽음이 그처럼 편안만 했으리.
온갖 진구 덥도 마다 않고 가랑이 찢어지도록 통방 행보 했으되 참 보람의 식별(識別)을 앞세워 분주했을 뿐이요, 웬만한 폐행을 눈웃음으로 용서했으되, 속으로는 추상같은 지청구를 품고 있었을 것이었다.
산자들의 민감한 애도로써 남주를 평기허심(平氣虛心)잊는 짓은 그만 거뒀으며 좋겠다.
아, 구국난전의 전선에서 일호백낙(一呼百諾)의 기개를 떨쳐도 모자랄 우리들의 남주는, 참말로 죽었는가, 참말로 죽어 버렸는가.
남주가 죽던 날 새벽― 이승철, 김영현, 강형철, 김사인, 오우열, 김남일, 강태형, 박선욱, 오철수등 열한 사람을 창황망조(蒼黃罔措) '고려병원'으로 떠보내고 나서, 나는 빈 방에 홀로 앉아 억장이 무너지는 통곡을 낮 될 때까지 쏟아봤다.
울다 지쳐 눈을 떴었다. 참으로 별난 일이었다.
'죽는 데만 삼년 걸린다'는 말대로 세 해 넘도록 바슬바슬 앓던 춘란이 청징 개결한 꽃을 피운 것이었다.
남주의 병을 알고 나서부터는 불철주야 술로만 나날을 보낸 탓에 어느 짬 꽃대를 올렸었는지도 가늠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춘란 한 송이 같은 너를 보니'
그날 나는 이렇게 일기를 썼다. 만취 상태의 정신을 유행(유행)하며,
'춘란 한 송이 너를 보니, 몸 속에 시뻘건 핏줄 흘리며 사는 내 목숨이 죄스럽다.
너는 한 방울 이슬 올려 무량 겁을 버틸지니, 내 어찌 벌끈 벌끈 끓는 피로 온 몸을 적시면서, 오늘 하루살이도 버거워 살다 죽다 하는가.
대체 네 살고자 떠난 세상 어떤 곳이냐, 애송아지 힘살처럼 네 뿌리 뻗어 살 세상, 가고 싶다 오늘은 네 사는 나라로.
없구나, 대답 소리 한마디도 이슬 한 방울 속에 다 싸담아 버렸구나, 임종날 만큼은 서럽게 눈을 덮어야 드디어 보이리, 찬이슬 모아모아 네 강을 만들어, 그 제사 모가지 푸욱 떨궈 흩뿌리는 네 향기와, 새하얀 혓바닥 위에 이빨 앙 물어 꾸욱 찢은 새빨간새빨간 네 손도장 세 개는 ,
남주 네가 피웠구나 이 춘란 시린 꽃을 눈부신 혓바닥 세 글자핏물 말씀 알 길 없다. 너는 한 방울 이슬 올려 무량겁을 살겠으되, 내 어찌 붉은 피로 온 몸을 적시면서 오늘도 버거워 버거워 살다 죽다 하는가.'
이 서툴고 열졸한 일기문을 한 자 고침 없이 다시 새기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따른다. 문장의 운용은 미천하되 이 일기문 속에는 내가 죽음에 이르러서야 겨우 밝힐 수 있는 '남주와 나만 ' 의 혈맹지신(血盟之信)이 담겨져 있는 탓이다.
세상은 오늘도 편히 살거라 부추긴다.
사실과 행동의 우선권을 긍정하는 간결한 '현실주의 '를 사랑하라 독장 친다. 그러나 나는 남주의 사자후를 기억하며 그를 따르다 죽을 수 밖에 없다.
'현실 과의 난투에서 진리 얻어야'
"선생님, 진리에 대한 지식에 개념 설정이 으짜먼 그렇게도 편협 하까 요잉. 지 생각은 전혀 틀리제라 잉. 만약에 말입니다.
세상에 유일한 진리가 있다면 선행된 관찰에 의해서가 아니고, 오로지 현실과의 직접적인 접촉과 그 접촉의 치열한 난투에 의해서만 생성된다고 믿고 있당께요! 지 말이 틀립니까?"
그렇다. '진실 '과 '정의'는 유용한 이론이나 적실한 처신의 안이(安易)함을 떠날 때, 비로서 활명(活命)의 '피'를 갖는 때문이다.
혼돈의 사회, 그리고 기만의 역사 속에서는 유일한 '정신'과 유일한'뜻'을 만날 수 없다. 토끼가 백년을 산들 제 두 귀 아래다 뿔을 키울 것인가, 거북이가 만년을 산들 제 몸뚱이에다 털을 세울 것인가.
어찌하여 지금도 '한없이 걷고만 있는' 남주는 토각구모(兎角龜毛)의 경이로운 실감을 빛살처럼 흩뿌리는 것일까.
남주를 땅에 묻던 밤엔 찬달이 덩두렷이 떴었다.
나는 망월(望月)하며 '토마스 만'의 금언(金言)만 외웠다.
"역사의 전진은 목표를 유일한 자양으로 삼는다.
역사의 진보를 위한 유일한 목표! 그것은 빛나는 도취(陶醉)이다. 일반적인 관행으로 강요되는 유용한 도덕과 윤리와 이성과도 철저히 무관한 , 자아적 진실과 정의감에의 순수한 도취 말이다!
순연한 '도취'에다 천분의 피값을 몽땅 쏟아 붓다 기진한 우리들의 김남주는, 참말로참말로 죽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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