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발굴취재② 5·18희생자 유가족을 찾아서
본문
발굴취재② 5·18희생자 유가족을 찾아서
열 여덟 살의 꽃다운 나이에 자신을 잃은 광주직할시 의원 전계량
"영진아, 애비는 너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다"
열 여덟 살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등진 영진아
1980년 ,5월의 그날이 어김없이 또 다가왔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가슴에 통한의 아픔을 솟구치게 하는 그 날이, 그 5월의 광주가 눈 부릅뜨며 다시금 찾아온 것이다.
내 아들 영진이 열여 덟의 꽃다운 나이에 애비 곁을 떠났던 그 잔인한 5월이.
"아빠 공수 부대들의 무자비한 학살 행위를 더 이상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요 저도 형 ·누나들과 함께 민주화를 위해 싸우겠습니다:'
당신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내 아들은(전영진 당시 18세 광주 대동고 재학)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학살 행위를 보곤 며칠씩 식음을 전폐하다 끝내는 거리의 군중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민주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왜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눈앞에서 피흘 리며 쓰러져 간 형·누나들의 비참한 죽음을 목격한 젊은 혈기는 민주주의를 외치며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80년 5월21일 형체도 알아 볼 수 없는 형상을 한 싸늘한 시체로 우리들의 품에 돌아왔다.
"정말 이 몸서리치게 소름 끼치는 이 피투성이의 시체가 내 아들 영진 이란 말인가, 밝고 생기 있게 웃곤 하던 내 아들은 어딜 가고"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가 않았다. 내 아들은 이제 고등학교 2학년. 철모르는 어린아이에 불과한데 누구 이 아이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단 말인가.
어른이 되면 춥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할 거라던
그러나 세월은 야속하게도 흐르고 흘러 내 아들이 이 세상을 떠난 지12년을 맞이했다. 그 엄청난 시간 동안 단 한번도 잊을 수 없었던 눈물의 세월이,
"아빠. 난 이다음에 어른이 되면 춥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 할거예요 "
한쪽에서 소외되고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며 쉴새없이 다정하던 그 당찬 모습을 어찌 한 순간인들 잊을 수 있으리요.
어쩌다 옆집의 개가 밤새 짖는 날이면 혹시라도 영진이가 돌아오지 않을까 싶은 허망한 생각으로 대문 한번 잠그지 못했던 그 12년의 세월.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 채 깨닫지도 못할 나이에 어처구니없이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던 내 아들 영진이.
군인이었던 애비의 직업을 누구보다도 자랑스럽게 여겼던 내 아들이 군인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도저히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건 어김없는 사실이었던걸 어이하랴. 말로만 들었던 동족상잔의 비극이 나에게 일어나고 있었다니, 배신감과 억울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무상한 세월 앞에 울창해진 수목과 한껏 새파랗게 돋아난 잔디가 눈물겨운 망월동 5 · 18묘역, 아들의 싸늘한 시신을 묻고 돌아섰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이 가슴에 남았지만, 총탄에 맞아 신음 한번 하지 못한 채 싸늘하게 죽어 간 아들의 영전 앞에 '조국의 민주를 위해 싸웠던 너의 숭고한 정신이 온 누리에 꽃피울 수 있을 때 까진 애비는 투쟁하리라'고 맹세했던 기억. 그러나 폭군의 아들을 둔 애비라는 누명을 쓰며 살아야 했던 현실에 피 같은 눈물은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흘려야 했다.
폭군이라니. 곁에서 피를 홀리며 죽어 가는 형제들을 그냥 볼 수 없어 함께 투쟁하다 죽어 간 그 숭고한 죽 음을 폭군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말 한마디로 매도해 버린 그 현실이 억울해서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날이면 날마다 5·18유가족 협회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협박과 회유를 받아야 했고, 심지어는 탄압과 가택 연금마저도 수시로 행해졌으니, 뿐만 아니라 해마다 5월이 돌아오면 제주도 여행이라는 미명하에 강제 귀양을 가야 했고 어쩌다 운 좋게 그 강제 귀양을 피했을 땐 알지도 못한 야릇한 차에 실려 이역탕의 어둠 속에 팽겨 쳐질 때면 속옷 바람으로 밤을 지새며 집을 향해 걸어야 했다. 5·18에 대한 아픈 흔적을 지우기 위해 정신적인, 육체적인 고통을 끊임없이 가해 올 때우리 유가족들은 더욱 더 하나 된 마음으로 톨톨 뭉쳐 생업마저도 포기한 채 내 아들·딸들의 자랑스런 죽음을 지키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야 했다.
누가 언제 영웅으로 추대해 달랬단 말인가, 다만 폭군이라는 불명예만 씻어 달라는 것이었는데, 그래서 우리 가족은 끊임없이 투쟁을 할뿐인데.
그러나 그 투쟁의 과정에서 우리에겐 또 하나의 불운이 겹쳐 왔다. 하나뿐인 딸자식마저 최루탄에 한쪽 눈이 실명 당하는 설움이 뒤따랐으니, 아들 잃은 서러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불법 시위라는 미명하에 수 차례 교도소 생활을 해야 했고
하지만 우리들의 끊임없는 투쟁이 기쁨으로 다가오는 계기가 있었다. 지난 88년폭도·불순 세력으로만 규정되어 왔던 광주 사태가 광주 민주화운동이라는 작은 이름으로 불리워 졌을 때우리 가족 모두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억울하게 자식을 잃은 지 8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야 그나마 조금이라도 자식의 영정에 떳떳하게 찾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눈물나게 고마웠다.
"영진아 이제 이 애비는 너의 영정 앞에 고개를 들 수 있게 되었구나. 너를 보내고 8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야 폭군이라는 누명을 벗을 수 있었으니, 하지만 애비는 자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너를 위해 8년 동안 끊임없이 투쟁을 해 왔다는 사실을 너는 믿어야 한다. 수 없이 찾아왔던 고통을 감수하며 너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다."
당하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다. 자랑스럽게 죽은 아들이 폭군으로 매도 됐을 때 애비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를.
민주화를 위해 꽃다운 나이에 삶을 저버리고도 폭군이었다는 이유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던 암흑 속의 생활이 얼마나 큰 고통이었는지를.
자신의 자랑스런 죽음을 합법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투쟁했던 순간 순간마다 불법 시위하는 미명하에 수 차례 교도소를 끌려가야 했던 많은 세월…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을 일방적으로 날치기 의결하고 무슨 호의나 베푼 것처럼 단순 보상비에 불과한 위로금과 치료비를 건너 받았던 날은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식의 죽음을 어찌 몇 푼의 돈으로 해결될 수 있단 말인가. 12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이 순간에도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잃은 그들을 위해 위령탑 하나 기념탑 하나 세울 수 없는 이 현실에서 우리의 바람은 그 몇 푼의 돈이 아닌 숭고한 죽음을 인정해 달라는 외침뿐이었는데.
"영진아 이 애비는 다시 한번 너의 영정 앞에서 맹세한다. 너의 죽음이 결코 헛된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끝까지 투쟁하며 밝혀 내리라고."
열 여덟 살의 꽃다운 나이에 자신을 잃은 광주직할시 의원 전계량
"영진아, 애비는 너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다"
열 여덟 살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등진 영진아
1980년 ,5월의 그날이 어김없이 또 다가왔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가슴에 통한의 아픔을 솟구치게 하는 그 날이, 그 5월의 광주가 눈 부릅뜨며 다시금 찾아온 것이다.
내 아들 영진이 열여 덟의 꽃다운 나이에 애비 곁을 떠났던 그 잔인한 5월이.
"아빠 공수 부대들의 무자비한 학살 행위를 더 이상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요 저도 형 ·누나들과 함께 민주화를 위해 싸우겠습니다:'
당신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내 아들은(전영진 당시 18세 광주 대동고 재학)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학살 행위를 보곤 며칠씩 식음을 전폐하다 끝내는 거리의 군중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민주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왜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눈앞에서 피흘 리며 쓰러져 간 형·누나들의 비참한 죽음을 목격한 젊은 혈기는 민주주의를 외치며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80년 5월21일 형체도 알아 볼 수 없는 형상을 한 싸늘한 시체로 우리들의 품에 돌아왔다.
"정말 이 몸서리치게 소름 끼치는 이 피투성이의 시체가 내 아들 영진 이란 말인가, 밝고 생기 있게 웃곤 하던 내 아들은 어딜 가고"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가 않았다. 내 아들은 이제 고등학교 2학년. 철모르는 어린아이에 불과한데 누구 이 아이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단 말인가.
어른이 되면 춥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할 거라던
그러나 세월은 야속하게도 흐르고 흘러 내 아들이 이 세상을 떠난 지12년을 맞이했다. 그 엄청난 시간 동안 단 한번도 잊을 수 없었던 눈물의 세월이,
"아빠. 난 이다음에 어른이 되면 춥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 할거예요 "
한쪽에서 소외되고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며 쉴새없이 다정하던 그 당찬 모습을 어찌 한 순간인들 잊을 수 있으리요.
어쩌다 옆집의 개가 밤새 짖는 날이면 혹시라도 영진이가 돌아오지 않을까 싶은 허망한 생각으로 대문 한번 잠그지 못했던 그 12년의 세월.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 채 깨닫지도 못할 나이에 어처구니없이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던 내 아들 영진이.
군인이었던 애비의 직업을 누구보다도 자랑스럽게 여겼던 내 아들이 군인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도저히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건 어김없는 사실이었던걸 어이하랴. 말로만 들었던 동족상잔의 비극이 나에게 일어나고 있었다니, 배신감과 억울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무상한 세월 앞에 울창해진 수목과 한껏 새파랗게 돋아난 잔디가 눈물겨운 망월동 5 · 18묘역, 아들의 싸늘한 시신을 묻고 돌아섰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이 가슴에 남았지만, 총탄에 맞아 신음 한번 하지 못한 채 싸늘하게 죽어 간 아들의 영전 앞에 '조국의 민주를 위해 싸웠던 너의 숭고한 정신이 온 누리에 꽃피울 수 있을 때 까진 애비는 투쟁하리라'고 맹세했던 기억. 그러나 폭군의 아들을 둔 애비라는 누명을 쓰며 살아야 했던 현실에 피 같은 눈물은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흘려야 했다.
폭군이라니. 곁에서 피를 홀리며 죽어 가는 형제들을 그냥 볼 수 없어 함께 투쟁하다 죽어 간 그 숭고한 죽 음을 폭군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말 한마디로 매도해 버린 그 현실이 억울해서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날이면 날마다 5·18유가족 협회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협박과 회유를 받아야 했고, 심지어는 탄압과 가택 연금마저도 수시로 행해졌으니, 뿐만 아니라 해마다 5월이 돌아오면 제주도 여행이라는 미명하에 강제 귀양을 가야 했고 어쩌다 운 좋게 그 강제 귀양을 피했을 땐 알지도 못한 야릇한 차에 실려 이역탕의 어둠 속에 팽겨 쳐질 때면 속옷 바람으로 밤을 지새며 집을 향해 걸어야 했다. 5·18에 대한 아픈 흔적을 지우기 위해 정신적인, 육체적인 고통을 끊임없이 가해 올 때우리 유가족들은 더욱 더 하나 된 마음으로 톨톨 뭉쳐 생업마저도 포기한 채 내 아들·딸들의 자랑스런 죽음을 지키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야 했다.
누가 언제 영웅으로 추대해 달랬단 말인가, 다만 폭군이라는 불명예만 씻어 달라는 것이었는데, 그래서 우리 가족은 끊임없이 투쟁을 할뿐인데.
그러나 그 투쟁의 과정에서 우리에겐 또 하나의 불운이 겹쳐 왔다. 하나뿐인 딸자식마저 최루탄에 한쪽 눈이 실명 당하는 설움이 뒤따랐으니, 아들 잃은 서러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불법 시위라는 미명하에 수 차례 교도소 생활을 해야 했고
하지만 우리들의 끊임없는 투쟁이 기쁨으로 다가오는 계기가 있었다. 지난 88년폭도·불순 세력으로만 규정되어 왔던 광주 사태가 광주 민주화운동이라는 작은 이름으로 불리워 졌을 때우리 가족 모두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억울하게 자식을 잃은 지 8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야 그나마 조금이라도 자식의 영정에 떳떳하게 찾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눈물나게 고마웠다.
"영진아 이제 이 애비는 너의 영정 앞에 고개를 들 수 있게 되었구나. 너를 보내고 8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야 폭군이라는 누명을 벗을 수 있었으니, 하지만 애비는 자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너를 위해 8년 동안 끊임없이 투쟁을 해 왔다는 사실을 너는 믿어야 한다. 수 없이 찾아왔던 고통을 감수하며 너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다."
당하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다. 자랑스럽게 죽은 아들이 폭군으로 매도 됐을 때 애비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를.
민주화를 위해 꽃다운 나이에 삶을 저버리고도 폭군이었다는 이유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던 암흑 속의 생활이 얼마나 큰 고통이었는지를.
자신의 자랑스런 죽음을 합법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투쟁했던 순간 순간마다 불법 시위하는 미명하에 수 차례 교도소를 끌려가야 했던 많은 세월…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을 일방적으로 날치기 의결하고 무슨 호의나 베푼 것처럼 단순 보상비에 불과한 위로금과 치료비를 건너 받았던 날은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식의 죽음을 어찌 몇 푼의 돈으로 해결될 수 있단 말인가. 12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이 순간에도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잃은 그들을 위해 위령탑 하나 기념탑 하나 세울 수 없는 이 현실에서 우리의 바람은 그 몇 푼의 돈이 아닌 숭고한 죽음을 인정해 달라는 외침뿐이었는데.
"영진아 이 애비는 다시 한번 너의 영정 앞에서 맹세한다. 너의 죽음이 결코 헛된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끝까지 투쟁하며 밝혀 내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