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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특집/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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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윤상원 열사 친구들의 오늘

이재의 (광주 일보 기자)

살아 남은 자들의 살아가는 모습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한다. 우리 현대사에 큰 분수령이 되었던 5월 광주 항쟁이 일어난 지도 어언 11년째다.

80년 5월 광주는 용광로 였다. 용광로에서 산화하지 않고 요행히 살아 남았거나 혹은 비껴 갔던 사람들, 동지들을 보내고 단지 살아남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부끄러워했던 이들 그들은 오늘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그들은 대체 어떤 식으로 자신의 삶 속에서 '5월 광주'를 접목시켜 왔을까?

'들불 야학' '투사 회보' '시민 군 투쟁의 대변인' 등의 수식어와 함께 떠올려지는 윤상원 열사와 80년 5월 21일 계엄군이 최초 발포할 때 금남로에서 산화 해간 전영진 열사(당시 대동고 3년, 5.18광주 민중 항쟁 유족회 전 계량 회장의 아들)의 친구들, 그들을 통해 들여다본 11년이 지난 '5월 광주'의 현주소는 어디일까? 중 소업체 사장에서부터 문화 운동가. 전교조 교사·노동 운동가 심지어는 월북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살아가는 오늘의 모습은 실로 다종다양하다.

의료기 상사 사장된 윤 열사의 선배

광주시 동구 서석동 54-3번지 소정 빌딩 2층. 지난해 결성된 윤상원 상 위원회 사무실이 있는 곳이다. 80년 5월 27일 새벽 도청이 계엄군의 수중에 떨어질 때까지 투쟁 전반에 걸쳐 시민 군의 핵심적 지도 인물이었던 윤상원. 그를 기리기 위한 상이 제정돼 금년 5월부터 수상을 하게 된다.

윤상원 상 위원회가 있는 소정 빌딩의 3층에는 '하심 의료기 상사'가 들어서 있다. 전남 도청 바로 뒤에 위치한 소정 빌딩이 윤상원 상 위원회 사무실로 쓰일 수 있게 된 까닭은 같은 빌딩에 들어 있는 하심 의료기 상사 사장 김상윤씨(44)와 관련이 깊다.

건물에 비해 약간 넓어 보이는 통로 계단을 올라 3층 의료기 상사에 들어서면 넓은 사무실에 각종 의료기가 잘 정돈돼 있다. 사무실을 가로질러 또 하나의 문을 밀고 들어서면 김상윤 사장이 있는 방이다. 책상 위엔 컴퓨터와 프린터. 디스켓 따위가 널려 있고 그 곁에 팩시밀리가 보인다.

"비록 작은 규모의 회사지만 앞으로 모든 업무가 전산화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우선 제가 먼저 컴퓨터를 배우는 중입니다."

이렇게 말을 꺼내는 김상윤씨는 지난 84년 5월 어렵게 시작한 회사가 이젠 자본금 1억 7천만원으로 자리를 잡아, 비록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사업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다.

김씨는 5.18당시 윤 열사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면서 그때를 이렇게 회고한다.

"상무대 영창에서 조사받는 과정에서 상원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조사관이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보여준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총에 맞아 창자가 뛰어 나온데다 얼굴마저 검게 그을린 모습이 처음엔 도저히 상원이라고 믿기질 않았어요."

김씨는 윤상원 열사를 맨 처음 운동권으로 끌어들인 장본인이었다. 윤 열사는 70년대 후반 김씨를 통해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첫발을 디뎠다.

그러다 막상 5 · 18이 일어나자 김씨는 예비 검속 으로 먼저 붙잡히고 밖에 남았던 후배 윤상원이 계엄군에게 처참하게 희생당한 것이다. 그때만 해도 '녹두 서점'이라는, 광주 전역에서는 유일한 사회 과학 서점을 운영하면서 학생운동의 배후 지도자 역할을 했던 김씨는 자신의 두 동생들은 물론 부인까지도 모두 수감되는 비운을 맛보아야 했다.

1981년 12월 김씨는 석방됐다. 다른 광주 항쟁 관련자들이 그랬듯이 김씨에게의 석방은 별다른 의미로 다가오지 못했다. 깊은 좌절의 시간이 흘렀다.

"이래선 안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죠. 모든 주위 사람들이 체념의 수렁에 빠져 있는데 나만이라도 뭔가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 줘야겠다는 생각 속에서 일을 시작한 겁니다."

그것이 82년도에 의료기 판매 회사에 판매 사원으로 취직하게 된 동기였다. 그때의 경험이 바탕이 돼 2년 뒤에 독자적인 사업을 벌인 것이다.

"애당초 사업을 시작할 때는 이렇게 오래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요. 정상 궤도에 들어서면 운동권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나는 다른 일을 할 생각이었죠."

"운동을 떠났다"는 생각 해본 적 없다

그런 의도에서 처음부터 출자금도 공동으로 마련했다. 그런데 규모가 커지다 보니까 다른 사람이 섣불리 달라붙기도 힘들게 돼 '빼도 박도' 못한 채 이 사업에 매달리게 됐고, 결국 이런 상태로 오늘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나이가 40대 중반에 들어서니까 이제 다른 일로 나서기도 쉽지 않게 돼 스스로도 예전과 달리, 현실에 안주하려는 경

향이 있는 것 같다고 솔직히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는다.

김씨는 지금 이 사업을 더 키워 보겠다는 생각이 별로 없다. 다만 현재 상태에서나마 차라리 직원 복지 문제에 힘을 쏟겠다는 방침이다. 예를 들면 직원들을 위해 3년전 부터 매주 1회씩 실시해 오던 외부 강사 초빙 교양 강좌를 앞으로도 계속 하며, 내년부터는 직원들의 해외 견학도 실시하고, 복지 기금을 만들어 혜택도 늘려 갈 계획이다. 지금 추진 중인 업무의 전산화도 일의 효율성을 위해서 라기 보다는 직원들의 노고를 조금이라도 덜어 보자는 복지 차원의 사업이라고 한다.

"제가 책임지고 있는 분야에서나마 잘못한다는 소릴 듣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비록 15명에 불과한 직원이지만 그들은 이 직장에다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은 내가 무슨 일을 거창하게 하기보다는 할 수 있는 일이라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한 번도 '운동에서 떠났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고 덧붙인다. 다만 '자신이 참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운동에 참여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6월 항쟁 이후 소위 '민청 세대'를 중심으로 광주 지역에 만들어진 '전남 사회 문제 연구소' 초대 소장 직을 맡은 적도 있었다. 그 무렵부터 자신이 아끼고 사랑했던 후배 윤상원 열사의 뜻을 기리고자 윤 열사의 모교 사례지오 고등학교 동창생들 중 뜻이 맞는 몇몇과 함께 『윤상원 전기」 발간을 추진 해왔다. 김석균(농협), 양승연(무역 협회), 이현우(보험회사), 황철홍(보험 개발원), 고 홍(사업)씨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이 개인 당 매월5만원씩 기금을 모아 1동안 준비했던 『윤상원 전기』(임낙평 지음)는 2년간의 준비 끝에 금년 4월에 빛을 보게 됐다.

전기 발간 사업이 마무리되자 이들은 윤 열사의 뜻을 더욱 기리기 위해 '윤상원 상'을 만들자고 의견을 모았다. 금년 5월부터 광주 · 전남 지역을 대상으로 '학술 운동'과 '사회 운동' 부문 등 두 분야에 공적이 많은 사람(단체)을 선정, 각각 1백50만원씩의 상금을 매년 1회씩 지급키로 한 '윤상원 상'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도청 분수대에서 민들레 소극장 무대로

윤 열사는 활동 폭이 넓고 정열적 이었던 만큼 친구도 많았다. 그가 대학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매력을 느껐던 분야는 연극이었다. 노동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부터 그 자신

이 연극에 몰두할 수는 없었지만 끊임없이 그 분야에 애착을 가졌다고 한다.

현재 '극단 토박이'의 대표를 맡고 있는 박효선씨(38)는 윤 열사와 문화 운동 측면에서 인연을 맺었던 인물이다.

박효선 씨는 요즘 매우 바쁘다. 아침 일찍 학원에 나가 오전 동안은 재수생을 대상으로 국어 과목 강의를 한다. 생계를 위한 방편으로 몇 년 전부터 학원 강의를 택한 것이다. 풍족하지는 앉지만 근근이 생활을 꾸려 간다. 강의를 마치면 곧장 전남대 정문 앞 '민들레 소극장'으르 달려간다. 지난 89년 가까스로 마련할 수 있었던 이 소극장은 박씨가 이끌고 있는 '극단 토박이'(1983년 창단)의 보금자리다.

박씨는 밤늦도록 여기서 연극에 몰두하기 일쑤다.

민들레 소극장에서 공개 모집한 단원 10여명과 함께 대본도 짜고, 연출도 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이렇게 연극에 집착하다 보니 작년에는 건강이 나빠져 한동안 일을 쉬기도 했다.

그는 80년 5월 무렵에도 그랬다. 윤상원과 함께 들불 야학에서 자신이 쓴 대본으로 노동연극(「누가 모르는가」1975)을 공연한다거나 놀이패 '광대 '에 참여해 「돼지 풀이」 「함평 고구마」마당 굿 따위를 공연했다.

"상원이 형은 자신이 가지 못하게 된 '연극에의 길'을 저를 통해 실현해 보고 싶은 듯 그때도 저에게 깊은 관심을 쏟았습니다. "

박씨는 80년 5월 해방 광주에서 윤열사가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레 항쟁의 중심부로 빨려 들어갔다. 도청 앞 분수대 위에 올라 시민 궐기 대회를 주도해 나갔던 것이다.

박씨는 최근 주목할 만한 작품들을 몇 편 공연했다. 지난88년에는 5월 광주를 형상화시킨 「금희의 오월」.89년엔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을 다룬 「부미방」,90년엔 전방 여성 노동자 해고 사건을 다룬 노동 극 「딸들아 일어나라」 등등.

이러한 연속적인 세 작품은 제 의식의 주요한 흐름을 대변합니다. 「금회의 오월」을 통해서 좌절됐지만 결코 꺾이지 않고 다시 살아날 오월을 다뤘고,「부미방」은 5월을 경유하면서 드러난 미국의 실체, 그리고 「딸들아 일어나라」는 변혁 주체를 노동계급의 주도성 속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는 거지요."

「금희의 오월」은 전국적인 반항을 불러일으켜 전국 연극 협회가 뽑은 한국 신극80년사 40개 작품 가운데 하나로 선정될 만큼 극 자체로서도 이미 '고전적' 위치를 획득했다.

박씨는 "80년 5월에 풀지 못했던 과제를 푸는 것"이 앞으로 자신이 추구할 방향이라면서 그것은 사회변혁을 위해 자신의 연극 운동을 "변혁 주체인 노동자 · 농민의 교육 선전의 무기로 삼는 것"이라고 못박는다. 이런 생각에서 5월에는 '거리극'을 시도 한적도 있다. 대 중 시위 가 한창 벌어지는 금남로의 시위 현장 뒤쪽에서 봉고차를 이용, 간단한 무대를 설치한 뒤 15분쯤 걸리는 짧은 극을 공연한 다음 훌쩍 다른 장소로 이 동한다. 물론 극의 주제는 그날의 시위 의미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일종의 '게릴라 극'이다.

어떻게든 살아 움직이는 대중과 자신의 연극 운동을 통일시켜 '변혁의 무기'로 삼고자 하는 박씨의 치열한 의식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들불 야학 출신 윤순호 씨의 오늘

윤순호씨(33)는 광주 하남공단 자동차 부품을 납품하는 중소 기업체인 금성 기계에서 8년째 근무하고 있다. 현재 생산직에서 금형 반장직을 맡고 있으면서 노동조합에서는 5년째 계속 회계 감사다 며칠 전 두 번째 아이를 갖게 됐지만 아직도 광주 주월동의 6백 만원 짜리 단칸 전세방에서 산다. 현재 월급이 40만원 남짓 야근·특근 수당까지 합쳐야 겨우 50만원 넘어 선다. 그 가운데 30만원을 적금 붓고 10-20만원으로 한 달 생활을 꾸려 간다

"어렵긴 하지만 돈만 보고 직장 생활합니까. 물론 다른 곳으로 옮기면 좀더 나은 급료를 받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저임에도 불구하고 8년간이나 꾸준히 한 직장에 근무하고 있다.

"어려울 때면 80년 5월을 생각하고 참아 나갑니다. 들불 야학 시절과 5월27일 새벽 「투사 회보」를 제작하다 YMCA에서 계엄군에 붙잡히던 상황을 생각하면 못 견딜 일이 없지요."

윤씨는 윤상원 열사가 관여했던 '들불 야학' 출신 노동자다. 그는 해방 광주에서 윤 열사의 권유로 「투사 회보」를 제작했고 마지막날 밤에 총을 들었다. 동료였던 박용준은 그 자리에서 총탄에 맞아 쓰러지고 야학 친구 나명관(31)과 함께 현장에서 체포됐다.

집이 가난해 석방 후에도 곧바로 공장에 취직할 수밖에 없었으며, 학생 출신 노동 운동가들과 달리 해고되면 생활 자체가 불가능해, 끈질기게(?) 자신의 현장을 지키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대부분의 들불 야학 출신 동료들이 그러하듯이 '노동 운동가'로서 보다는 '노동자'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윤씨는 그때 수사 과정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오랫동안 고통을 받고 있다.

이번에 '광주 보상금'으로 4천여 만원을 수령했는데 그로서는 처음으로 쥐어 본 거액이었다. 그 돈은 그 동안 거처가 불편해 고생하시던 부모님의 처소를 마련해 드리는 데 몽땅 지출해 한푼도 손에 남은 게 없다고 한다.

들불 야학 시절 강학(교사)으로 참여했던 당시 대학생들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김경옥 · 고희숙씨 등은 해직 교사로 전교조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전용호씨는 현재 광주 지역 재야 인사들이 중심이 돼 만들려고 하는 『빛고을 신문』 창간 준비 실무를 맡고 있다. 임낙평씨는 2년간에 걸친 윤상원 전기』의 집필을 막 끝내고 앞으로 광주 · 전남 환경 공해 연구회에서 활동할 계획이다. 그런가 하면 박관현(전 전남대 총 학생회장), 신영일(전

남 민주주의 청년 연합 활동) 등은 감옥에서 혹은 운동 과정에서 각각 숨져 가기도 하였다.

윤 열사의 동료들 가운데 80년 5월 도청에서 결사 항전을 주장하며 투쟁 위원회를 구성 했던 김영철씨 (43, 당시 기획 실장)는 지금도 나주 정신 병원과 자신의 집을 오락가락하면서 정신 질환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 밖에도 정강용(41, 평민당 국회의원), 이양현(41, 한겨레신문 광주 지사장), 정해직(41, 전교조 해직 교사 · 광역 의회 출마 예정), 윤강옥(40, 전 5 · 18 광주 민중 항쟁 동지회 회장)씨 등이 나름대로 각 분야에서 중견으로서 위치를 굳혀 가고 있다.

북으로 간 그날의 고등학생

5월 광주 항쟁은 윤상원 열사 또래의, 이미 성년이 돼 항쟁에 자각적으로 참여했던 사람들에게보다는 감수성이 예민한 고등 학생 시절 항쟁에 참여했거나 비껴 갔던 사람들의 삶에 훨씬 크고 깊숙한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전영진 열사(전계량 유족 회장의 아들, 사망 당시 대동고 3년생 )와 친하게 지냈던, 같은 학교 몇몇 친구들의 현재 모습은 그런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지난 3월 4일 북한 평양방송은 "5·18 부상자인 윤기권씨(29, 광주 두암동)가 최근 월북했다."는 충격적인 보도를 했다. 이런 사실은 3월 8일자 광주 지방 신문에 1단 기사로 짤막하게 실렸다. 월북한 윤씨는 지난 1월 상순 영국 등 유럽지역을 여행한다며 2백여만원을 가지고 집을 나간 뒤 소식이 없는 상태이며, 해외여행을 떠나기 전에 2억여원 상당의 광주보상금을 수령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5·18부상자회의 어느 회원은 윤씨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5월 항쟁 당시 계엄군의 총탄에 부상을 입었지요. 그때 고등학생이었어요. 요즘에는 광주 시내 모 극장 간판 그리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매년 5월이 돌아오면 본업을 잠시 그만둔 채 5월 행사 그림 제작에 몰두하곤 했어요."

이러한 윤씨는 80년도에 어느 학교학생이었을까? 그는 바로 전영진 열사와 같은 대동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학년도 3학년으로 같았다. 지난해 '한국 현대사 사료 연구소'(광주 소재. 소장 송기숙)에서 펴낸 『광주 5월 민중 항쟁 사료 전집』(1990)에는 그가 5·18때 곁었던 일이 증언 형식으로 채록돼 있다.



…우리는 (해방 기간 동안)YMCA에서 저녁이면 모여 앉아 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직접 일어나서 질문도 하였다. '사람들은 보통 우리 나라를 말할 때 남한만을 말하는데 실질적으로 삼천리 강토 전부 우리나라가 아닙니까?…



당시 그의 소박하고 예리한 이런 질문이 11년이 지난 오늘 "왜 그가 갑자기 월북을 했는가?"하는 의문을 조금이나마 풀어 줄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 광주 항쟁을 한 가운데서 겪으면서 비극의 궁극적 원인이 '분단'에 있다는 인식에 이르자 '병적일 만큼'(실제로 그는 정신 질환 치료비 조로 그렇게 많은 보상금을 수령했다는 것이다.) 통일 문제엔 강한 집착을 보여 왔다고 한다. 결국 5월 항쟁의 큰 충격은 감수성이 예민한 한 고등학생에게 11년이 지난 오늘 '월북'이라는 '돌연한 결과'를 가져오게 했을 것이라는 게 그를 알고 있는 주위 사람들의 얘기다.

광주보상금 거부한 전영진 열사의 친구

이덕준씨(29)는 전영진 열사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줄곧 같은 반에서 친하게 지낸 사이였다. 이씨는 전열사와 5·18직전 과외공부를 함께 하기로 약속하기도 했었다. 그는 5월 18일, 전 열사와 함께 시위대를 쫓아 시내를 돌아다니다 공수부대의 잔학상을 목격했다. 5월 23일 집에서 친구로부터 전 열사의 죽음을 전해 듣고 용수철처럼 거리로 뛰어 나갔다. 항쟁기간 YMCA에서 같은 학교 친구인 윤기권, 김효석 등이랑 함께 활동하다 마지막 날 밤 도청에서 체포됐다.

이씨는 요즘 지게차를 운전하고 있다. 이씨는 지난 3월 26일 기초 의원 선거 때 투표소까지 갔다가 투표를 못하고 되돌아왔다.

"마침 우리 지역에서 출마한 전교조 교사를 찍고 싶었는데 투표인 명부를 보니까 붉은 줄이 그어져 있더군요 알고 보니 지난해 전방 여성 노동자 부당 해고에 항의 시위를 하다 구속돼 집행 유예를 선고받은 사실 때문에 투표권이 박탈된 겁니다. "

그는 5·18이듬해 전남대 중문과에 입학했다. 83년 8월 학생운동에 연루돼 강제 징집으로 억지로 군에 입대학 됐다. 그도 역시 자신의 삶을 '민중 속에서 실현하기 위해 ' 86년 제대후 학교생활을 포기하고 용접 기술을 배워 노동 현장에 투신했다. 87년 3월 하남 공단내 아시아 자동차 하청 업체에 취업. 그해 8월 그 회사 노동조합 결성을 주도하면서 교육 선전 부장과 위원장직을 차례로 맡았다. 그러다 88년 12월 노조 활동과 관련. 부당 해고를 당한다. 노동위원회에서 그의 해고가 무효임을 판결했으나 결국 복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직장을 구하기 위해 중장비인 지게차 운전 기술을 배워 최근 일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는 자신이 노조 위원장직에 있을 때 7개 민주 노조가 참여한 '광주 지역 민주 노조 협의회'에 적극 참여해서 활동하였는데 이 조직이 모태가 돼 현재의 '광주 지역 노동 조합 협의회'(약칭 광노협)로 발전됐다고 말한다.

그는 이번에 '광주 보상금'신청 자체를 거부했다.

"솔직히 생활 형편이 어렵다 보니 그 돈이라도 받아서 우선 쓰면 좋겠다는 유혹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편 절대 그래선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진이의 죽음을 비롯해 숱한 5월 영령들이 11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학살자를 처단하지 못한 우릴 원망하고 있다는 생각이 미쳤죠."

부끄러움이 추동한 노동 운동가의 길

승영길씨(29, 전국 택시노련 인천시 지부 사무국장)도 전영진 열사와 대동고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나는 5 · 18이 일어나자 시골집으로 피신했습니다 나중에 항쟁이 다 끝난 후 친구 영진이가 시민군에 참가했다가 죽은 사실을 알게 되었고 평소 앞에 나서지 않고 조용하던 이덕준 · 김용필 · 김효석 · 김향득 등이 도청을 사수하다 계엄군에 끌려간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

이때 느낀 부끄러움은 대학 시절 내내 강박관념으로 그를 몰아 세웠다.

이듬해 연세대에 입학한 그는 결코 '광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84년 학도 호국 단체제를 와해시키고 등장한 총학생회 초대 회장으로 뽑혔다.

곧 이어 수배,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85년 4월 그는 고등학교 친구 이덕준과 마찬가지로 '삶을 민중 속에서 재구성'해야 한다는 취지로 부평의 노동 현장에 투신, 건축 공사장 노가다부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요즘 매우 바쁘다. 임투철을 맞아 밤낮없이 전국 각 지방의 택시노련 지부를 쫓아다니며 임투 교육에 여념이 없다. 광주에도 벌써 몇 차례 내려와 교육을 한 적이 있다.

윤상원 열사와 당시 고교생이었던 전영진 열사의 친구들이 보여주는 11년이 지난 오늘의 모습은 확실히 약간 차이가 존재한다. 그들 모두 '80년5월'이 라는 공통의 프리즘을 통과했다. 누구나를 막론하고 그들의 삶이 '5월 광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프리즘을 통과한 빛은 굴절각에 따라 저마다 다른 색깔을 띤다.

'5월 광주'의 프리즘을 통과한 그들의 오늘 모습도 사람마다 각기 다르다. 특히 당시 고등학생 신분이었던 사람 변모는 주목할 만하다. 조직적이고 전투적이다. 윤열사의 친구들이 항쟁 직후 엄청난 '패배감'에 젖어 들었던 데 반해 이들은 거의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차이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