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느닷없이 계엄군에게 뭇매맞아 백일된 딸 두고 온몸부스러져 숨진 농아가족 김경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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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이 계엄군에게 뭇매맞아 백일된 딸 두고 온몸부스러져 숨진 농아가족 김경훈씨
딸은 할머니를 '엄마'라 부르며 자라고, 아들 제사 지내려는 어메는 번번이 내던져지고…
여남은 명의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편을 갈라 축구 시합을 벌이고 있다. 봄볕은 따사로운 빛으로 아이들의 발랄한 몸짓을 운동장 모래 위에 선명한 그림자로 그려낸다. 축구공이 골문으로 굴러 들어갔다. 제법 날랜 몸짓의 한 아이가 두 손을 높이 치켜들고 부지런히 흔들어 댄다. 한 패인 듯한 몇 몇 아이들도 손뼉을 치거나 팔짝거리면서 뛰어 오른다.
"어! 어!"
목젖을 겨우 타고 넘은 듯한 외마디 소리, 그 아이 들에게 환희의 소리는 그것뿐이었다.
광주 시내 봉선동 산자락에 자리잡은 전남 농아 학교 광주 민중 항쟁 초기에 희생된 김경철씨(당시24세) 그도 이 학교를 나온 농아였다.
'경철이가 뒤통수를 맞았어요'
1980년 5월 19일 그는 죽었다.
"경철이와 함께 점심을 먹고 나왔어요. 시내에는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어요 우리는 여기 저기 돌아다녔지요 오후 3시나 4시쯤 되었어요 제일 극장 들어가는 골목, 그 앞에 큰 길이 있지요? 화니백화점도 있고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어요. 군인들이 쫓아오면 도망가고, 그때 나와 경찰이 또 황종호라는 친구가 같이 있었어요, 공수부대가 달려들었어요 경철이가 뒤통수를 맞았어요 우리는 재빨리 도망갔어요 그런데 경철이는 그 자리에 쓰러져 있었어요."
목포에 살고 있는 박인갑씨(35). 그도 역시 농아이다. 그는 김씨가 살해당했던 현장에 있었다. 그날의 참상을 '손으로 말하는'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수화하는 손짓도 점점 격렬해진다.
통역하는 이경례씨(32) 목소리도 차쯤 끝이 벌려 왔다.
"몽둥이가 순경들 차고 다니는 것이 아닌데요 훨씬 크고 넓적해요 그걸로 경철이를 마구 두들겼어요 경철이가 일어나서 농아 신분증을 보여주면서 악을 썼어요."
그 당시 김경철씨는 '전남 청각 장애자 복지 회' 감찰 부장이었다. 그는 저고리 윗 주머니에 항상 그 신분증을 갖고 다녔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어요 양어깨며 등이며 머리를 내리치고 쓰러지면 발로 밟았어요 경철이가 의식을 잃은 것 같았어요 피는 흘리지 않았는데 군인들이 경철이를 앞뒤에서 들고 군트럭에다 획 던져 실었어요 트럭에는 다치거나 의식을 잃은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마구 실려 있었어요. 트럭은 광주 천 쪽으로 사라져 가버 렸어요."
겨우 첫딸은 백일 지났는데…
그날은 김씨가 첫딸 백일을 지낸 지 스무날이 지난날이었다. 농아인 김경철씨가 역시 농아인 동갑 나기 김미경씨(33)를 부인으로 맞아 얻은 첫딸 혜정이. 온가족이 모여 백일 잔치를 벌였다. 김씨와 그 부인의 얼굴에는 소리 없는 함박 웃음이 가득했다. 그 기쁨을 소리로 웃지 못하였듯이 머리가 터지는 고통 속에서도 비명다운 비명 한마디 없이 그는 그렇게 죽어 갔다.
그가 마지막 보았던 음성이 끊긴 활동사진처럼 소리는 들리지 않은 채 몽둥이를 휘두르며 달겨드는 공수부대, 얼기설기 얼굴을 덮은 철망 너머 충혈된 눈빛, 그리고 보도 블록의 싸늘한 잿빛 그것이었을 것이다.
'후두부찰과상 및 열상, 좌안상검부열상, 우측상지전박부타박상, 좌견갑부관절부타박상, 전경 골부, 둔부 및 대퇴부 타박상'
광주 지방 검찰청과 군 당국이 합동으로 작성한 '5·18 관련 사망자 검시 내용'에 그의 사인이 그렇게 적혀 있다. 뒤통수가 깨지고 왼쪽 눈알이 터지고 오른쪽 팔과 왼쪽 어깨가 부서졌으며 엉덩이와 허벅지가 으깨졌다는 말이다.
"차라리 총에 맞아 죽었 으믄 편히 라도 갈 것인디. 온몸이 터질 때 꺼정 맞어 죽다니, 불쌍한 내 새끼 듣도 못허고 말도 못헌 것도 불쌍한디 맞어 죽다니―."
9년이 다 되어 가는 오늘까지도 김경철씨의 어머니 임근단 여사(54)의 한은 풀리지 않는다. 어머니의 절규는 통곡으로 변한다.
'설마 말 못하는 애까지야'
김씨가 죽은 날, 어머니는 광주 시내 충장로 학생 회관 옆에서 경영하던 음식점에 있었다. 시내는 온통 최루가스로 뒤덮여 어머니는 일찌감치 가게문을 닫아 버린 터였다.
"내 새끼가 그렇게 당한 줄을 어치께 생각이나 했겄소. 하도 시상이 시끄러운께 우체국 있는 디로 나가봤지라우."
거기서 어머니는 만행을 처음 목격했다. 서너명의 군인들이 대학생인 듯한 젊은이를 가운데 두고 무차별로 두들겨 패고 있었다.
"눈뜨고는 못 보겄 습디다. 그냥 놔뒸다가는 죽게 생겨서 내가 맘을 고쳐먹었어요. 군인이나 학생이나 다 똑같은 젊은 사람들인디 이것이 먼 일이 다요 허고 달라 들었지라. 그래도 안 되겄길래 '야가 내가 데리고 있는 종업원이요'하고 나섰어요. 그 학생을 데리고 우체국 옆에 금남 식당이라고 그리로 들어갔어요. 군인들이 거까지 따라옴서 참말이냐고 헙디다. 그렇다고 우겼 지라. 옆에 있던 아줌마들이 다 나섭디다. '맞다'고, 그 아짐 집 종업원이 맞다고들 나서니께 그제 서야 군인들이나가 대요."
그렇게 한 학생을 숨겨 뒸다고 바깥이 좀 잠잠해진 틈을 타 '데모하지 말고 빨리 집으로 가거라 목숨은 살어 야제' 하는 당부와 함께 내보냈다. 비상 계엄 확대에 따라 그날 저녁 7시를 기해 통행금지가 내렸다. 어머니는 가게로 돌아와 문을 걸어 잠그고 종업원들을 단속했다. 큰아들 경철씨가 걱정이 되기도 했으나 '설마…말 못하는 애니까…하고 마음을 놔버렸다.
'먹을 것 먹이고 하니 안심하라'더니
밤이 늦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팔의 목소리였다. 그때 경철씨는 결혼 후 백운동에 따로 살림을 내고 있었다. 그 집에는 첫아이 혜정이를 낳은 후 당분가 경철씨의 누이동생이 함께 살고 있었다. 경철씨의 부인도 소리를 듣지 못하고 말을 못하는 농아였기 때문에 아기에게 제 때 젖을 먹이려면 옆에 성한 사람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밤중에라도 아기가 배가 고파 울어 젖힐 때면 옆방에서 자고 있던 누이가 건너와 애 엄마를 흔들어 깨워야 했다. 그렇지 않고는 아기는 밤새 배를 곯고 목이 째져라 울기만 할 뿐 애 엄마는 소리를 듣지도 못하고 잠에 빠져 있을 터였다.
딸은 자못 걱정스런 말투로 오빠가 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아마 통금 시간이 당겨진 줄을 모르고 밖에 있다가 친구 집이나 일하던 양화점에서 자는 것이겠지. 어머니는 그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성한 사람이라면 전화라도 하겠지 만 말을 못하는 벙어리이고 보니 다른 사람이 대신 해주지 않고는 전화 연락을 할 수도 없었다.
날이 밝았다. 딸한테서 또 전화가 왔다. 경철씨가 날이 밝아도 집에 돌아오지를 않고, 있을 만한 곳을 다 수소문해 봤지만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한 가닥 불안감이 스쳤다. 어머니는 광주 경찰서로 전화를 걸었다. 경찰서에서는 사람들이 군인들에게 잡혀서 상무대로 많이 끌려갔으니 그리 가서 알아보라고 했다. 아침밥이 넘어갈 것 같지가 않았다. 택시를 잡아타고 상무대로 내달렸다. 총을 든 군인이 정문을 지키고 있었다. 다짜고짜 군인에게 달려가 아들의 소재를 물었다. '어제 하루 잡혀 온 사람이 8백 명이 넘느데 다인 아들을 어디서 찾겠소? 이리 잡혀 왔어도 먹을 것 먹이고 하니까 안심하고 집에 가서 기다리시오'하는 것이 대답의 전부였다. 어머니는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머리 뒤채를 움켜잡힌 듯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겨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병원 도착 직후 사망한 듯
그날, 그러니까 80년 5월 20일 오전 10시께 전남 청각 장애자 복지 회'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광주 적십자 병원 에세 그곳으로 '김형렬'이란 농아가 입원해 있다는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내 아들 이름은 '김경철'인데…반신반의, 아니 의심이 훨씬 많았다. 며느리도 따라 나섰다. '김형렬'이란 환자를 찾았다. 병원 복도며 벽에 얼룩져 있는 핏자국, 코를 찌르는 약품 냄새, 여기저기서 새어나오는 신음 소리, 병원은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젊은 의사의 손등이며 얼굴에는 피가 절반쯤이나 섞인 땀방울이 선명한 자국을 남기며 흘러내렸다.
"김형렬씨 ? 아주머니 저리로 돌아서 '영안실로 가 보셔요."
'영안실이라니. 턱도 없는 이름 갖고 괜히 멀쩡한 우리 아들 죽은 사람 맹그네―' 어머니는 일부러 라도 믿지 않으려 했다. 그렇지만 마음 속 한구석에는 숨길 수 없는 불안감이 불쑥 불쑥 자라났다.
"영안실이 어딘지도 모르고 물어서 찾어 갔지요. 근디 김형렬이란 사람이 어제 저녁에 죽어서 시체로 있다가 밤9시쯤 국군 통합병원으로 실려 갔다고 그럽 디다. 근디 이름은 틀린디 거기 사람들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생김생김이 우리 아들하고 비슷 하드란 말이오."
김경철, 그는 광주 시내 충장로 파출소와 제일 극장 입구 사이에서 계엄군에 무수히 두들겨 맞은 뒤 군 트럭에 실려 적십자병원으로 왔다. 그의 진료 기록을 보면 그에게 처방되었던 약은 '500cc.200cc,10%포도당, 삐콤, 타치온' 그것뿐이다. 이 처방을 본 한 외과 전문의는 '긴급한 환자가 들어오면 일단 링겔을 꽂고 혈액검사를 합니다. 그런데 다른 처치 기록이 없이 링겔에 포도당, 삐콤 , 타치온을 섞어 주사했을 뿐이었다면 환자가 충격에 깨어나기를 기다려 혈액 채취를 하기도 전에 절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라고 소견을 말한다. DOA.도착 직후 사망했다는 말이다.
국군 병원 냉동실에 누워 있는 아들
어머니는 며느리와 함께 국군통합병원으로 달렸다. 차츰 내 아들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실감으로 다가왔다. '김형렬'의 시신을 보여 달라는 어머니를 군인들은 면회소에 앉혀 놓고 기다 려라고만 했다. 며느리는 바싹바싹 타 들어가는 속마음에도 말 한마디 내뱉지 못하고 '윽! 윽!' 하는 신음 소리와 함께 쿨쩍 쿨쩍 흐느끼기만 했다. 그렇게 한시간이 가고 두 시간. 세시간이 지났다. 어머니는 종이 조각 팔락거리는 소리에도 불침이라도 맞은 듯 화들짝 놀랄 만큼 숨막히는 긴장으로 온몸이 굳어 있었다. 흐느끼던 며느리의 눈시울은 언새 퉁퉁 부어 올랐다.
"따라 오세요."
면회소에서 3시간 여를 기다리던 끝이었다. 헉하고 숨이 막혔다. 어떻게 걸어갔는지도 몰랐다. 온통 회색으로 분칠된 건물 사이로 구비 구비 돌아갔다. 앞서 가던 군인이 멈칫 멈칫 잿빛 철문을 열었다. 순간 한기가 엄습해 왔다. 냉동실이었다. 하얗게 칠한 한 쪽 벽에는 3층으로 포개진 작은 문들이 여남은 개 켜켜이 붙어 있었다.
드르르륵.
그것은 커다란 서랍이었다. 아니 관이었다. 군인이 그중 한 개를 빼내면서 보라고 했다. 시신은 하얀 천으로 덮여 있었다. 그 위에, 하얀 천으로 덮힌 머리맡에 '세상에! 경철이의 윗 저고리가 놓여 있었다.
"경철아!"
군인은 횐 천을 들춰내었다. 경철의 얼굴이. 아들의 얼굴이 두 눈을 무겁게 내리 감은 채 눈물 속으로 잠겨 들어왔다. 입에는 횐 솜을 물고 있었다. 며느리는 이미 "어, 어!"하며 넋을 놓고 말았다. 설마 했던 한 가닥의 희망은 여지없이 깨져 버리고 어머니는 중치가 턱 막히는 절망에 악에 바친 통곡을 터뜨렸다. 군인들은 산 사람이라도 살려야 한다며 실신한 며느리를 들쳐업고 뛰어 나갔다.
'군인들이 이럴수가'…
그 당시 국군 광주 통합 병원장이었던 김연균 대령(현재 광주 시내에서 병원 개업)은, 김경철씨 시신은 광주 항쟁과 관련해서는 처음 본 것이었다고 한다.
"적십자병원 영안실에서 옮겨왔는데 시체의 상태가 너무 처참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시내에서 충정 작전이 벌어진지도 모르고 그저 극렬 시위가 계속되고 있는 줄로만 생각 했었죠. 그런데 민간인이 그토록 참혹하게 살해되다니… 도저히 군인으로서는 할 수 없는 분명한 잘못이었다고 판단했습니다. 치명상은 두개골 함몰이었고 전신에 타박상을 입었는데, 최초의 희생자로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앞으로의 사태가 매우 심각해질 우려가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저는 곧CAC사령관에게 지휘 보고를 하고 심각한 우려의 뜻을 전했습니다."
어머니는 그때 바로 병원장도 만났다. 어머니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했다.
"누가 누군지 눈에나 보이겠소. 높은 놈인지 낮은 쫄병인지 아무나 틀어잡고 '내 새끼 살려내라'고 악을 썼지요."
"그때 어머니라는 분이 내 아들은 데모할 놈도 아니다. 말도 못하는 벙어리가 무슨 죄가 있다고 때려 죽였느냐 하면서 우리한테 달려들더군요. 그 절규에 우리도 눈물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죽은 사람은 무슨 농아 협회 규율 부장인가 그랬다고 하드 만요. 무척 성실하고 모범적인 농아 젊은이라고 들었어요. 저는 뭔가 잘못되고 있다. 이래서는 안 된다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
벙어리 며느리 '같이 죽겠다' 발버둥
어머니는 군인의 등에 업혀 간 며느리를 찾아 응급실로 갔다. 그곳에도 오전에 적십자병원에서 봤던 아비규환이 벌어져 있었다. 며느리가 의식을 잃고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불현 듯 혜정이 생각이 났다. 오늘 아침부터 해질녘이 다 된 그때까지 젖 한 방울 먹지 못하고 울어대고 있을 혜정이. 울어도울어도 듣지 못하고 울어대고 있을 혜정이는 한번 울음이 터지면 웬만해서는 그치지 않고 목이 갈라져 나가는 듯한 메마른 소리로 방안의 밀폐된 공간을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 놓곤 했다.
군인들은 더 이상아들의 시체를 보지 못하게 했다. 어머니는 며느리를 데리고 경철씨네 백운동 집으로 갔다. 혜정이의 울음소리는 골목 어귀에까지 날아와 어머니의 가슴속을 사정없이 골목어귀에까지 날아와 어머니의 가슴속을 사정없이 할퀴어 댔다. 며느리는 아기에게 젖을 물리지 않았다. 오히려 기저귀를 펴서 젖가슴을 꽁꽁 동여매고는 젖을 먹이지 않겠 다고했다. 셋이 같이 죽겠다는 것이었다. 애 아빠가 그토록 무참하게 죽었으니 자신도 아기도 따라서 죽겠다는 것이었다. 며느리는 울다가울다가 목이 쉬어 버린 혜정이의 자지러지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젖가슴을 싸맨 채 방구석에 팍 앉아 '윽. 윽. 윽'흐느끼고 만 있었다.
"기가 맥힙 디다. 며느리를 달래고 달랬지요. 이웃 사람들도 다 모여들어서 며느리를 달랩디다. 어찌 말이 통하 겄소마는 그래도 며느리가 젖을 풀드 만요."
4살 때 베란다에서 떨어져 청각 잃어
아들은 갔다. 아들 경철은 어머니에게 두 번의 커다란 절망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을 때.
아들 경철은 손이 귀한 집에서 큰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경찰직에 있었다. 영광 법성포에서 살던, 경철이가 4살쯤 되었을 때였다. 하루는 아버지의 직장 동료 부인이 경철을 데리고 나갔다. 그 부인을 따라 놀다가 그만 경철이가 2층 베란다에서 마당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애가 눈을 뒤집어 뜨고 맥을 딱 풀어 부렸대요. 오른쪽 이마가 주먹만하게 부어 올랐어요. 경찰에서 애 아빠가 차를 내서 달려와 광주 '신 외과'에 입원시켰어요. 병원 앞에 여관을 잡고 3개월 동안 치료를 했어요."
처음에는 사지를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다가 한 달쯤 지나자 고개를 약간 움직이더니 경철은 걸음마부터 발육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었다.
"다치기 전만 해도 못한 말이 없었 지라. 얼굴도 곱게 생긴 것이 얼마나 이쁜 짓만 골라서 했는지 아시오?"
병원 치료가 한없이 길어지자 의사는 두고두고 먹일 약을 처방 해주고 주사 놓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안 한쪽 벽에 대나무 하나를 길게 질러 놓고 경철에게 걸음마 연습을 시켰다.
"의사 선생님이 마이신 주사를 하루에 반병씩 한차례만 맞추라고 합디다. 근디 이 무식한 년이 많이 맞추면 빨리 나올 줄 알고 한번에 한 병씩 하루에 두 차례를 맞췄단 말이요."
집으로 돌아온 후 처음에는 대나무를 타고 걷는 아이에게 '경철아! ' 하고 부르면 뒤를 돌아보곤 했다.
"근디 이상합디다. 차근차근 뒤에서 불러도 돌아 보들 안 해요. 옆에서 큰소리다 나도 놀래지도 않고요 의사 선생님이 다시 정상이 될라믄 한 10년 걸릴 거라고 해서 그래서 그런갑다 했지라 근디 그것이 아니어요. 암만해도 귀가 먹은 것 같습디다."
서울. 대전. 광주 용하다는 병원은 다 찾아 다녔다. 항생제 과용으로 청신경이 마비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경철은 농아가 되고 말았다. 경철은 어머니에게 억장이 무너지는 절망을 안겨 주었다.
양화점에서 일하며 농아 돕는 일 앞장
경철은 전남 농아 학교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1965년 2월25일 , 졸업증서 번호 제26호. 동급생6명과 함께 전남 농아학교 제2회 졸업생이 되었다. 그후 중학 과정을 독학으로 마치고 서울에 있는 농아학교 고등 과정의 진학을 원했다.
"그때 형편으로는 도저히 보낼 수가 없습디다. 학비가 얼마나 비싼지. 학교 공부를 할 것이 아니라 기술을 배우라고 했지요. 서울로 데리고 가서 그때 '계명 양화점'이라고 굉장히 큰 구두 공장이었어라. 거기다 넣어서 구두 기술을 배우게 했어요.
그후 7년 동안 경철은 그곳에서 제화 기술을 익혀 다시 광주로 내려왔다. 그당시 광주에서 유명했던 충장로 2가의 '국제 양화점'에 취직했다. 그러면서 그는 전남 청각 장애자 복지회 일을 거들었다. 1977년경이었다. 진홍장씨(42. 광주 농아 복지회 광주. 전남 지부장)는 그때부터 경철씨와 함께 일했다.
"참 착실하고 똑똑하고 모범적인 청년이었어요. 그래서 감찰 부장을 맡겼어요. 불쌍하고 방황하는 농아들을 데려다 선도하는 일을 맡아 했지요. 지금 살아 있으면 지부장 자리를 물려주었을 텐데. 그만한 아이가 없어요. 너무나 아깝고 가슴 아픕니다.
농아 복지회의 송민옥씨(32)가 통역 해주는 수화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죽음 알려지자 농아들 시위 참가
김경철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농아들도 거리에 나섰다. 말을 못해 소리는 칠 수 없지만 격렬한 몸짓으로 시위대에 가담했다. 목포에서 만난 박인갑씨는 그 친구 황종호씨(32)와 함께 공수부대에 잡혀갔던 이야기를 수화로 전했다.
"시외버스 공용 정류장 부근에서 종호와 함께 잡혔어요. 우리는 장갑차 속으로 끌려 들어갔어요. 내 머리 뒤통수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어요. 군인들은 우리를 장갑차 속에 밀어 넣고 위해서 밟았어요. 고개만 들면 사정없이 내리 밟았어요. 내 등에는 군화 발 자국이 선명히 찍혔지요. 그 장갑차 안은 온통 피로 얼룩져 있었어요. 우리도 이제 죽었구나 했지요. 종화와 나는 소리를 질러 댔어요. 그 소리가 이상하게 들렸던가 봐요. 어깨에 무궁화 하나를 단 군인이 쌍안경을 들고 진두 지휘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 군인이 우리를 보고 진짜 말을 못하느냐고 손짓으로 묻더군요. 저는 이때다 싶어 농아 신분증을 들이밀었어요. 우리를 ㅣ내 네거리에서 내려 주었어요. 빨리 도망가라는 듯 손을 내 짓더군요. 다섯 시간 동안 죽을 고비를 넘겼어요. 우리는 내리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병원으로 달려들어갔지요."
공교롭게도 그 병원 자리는 그 뒤 당시 군 통합 병원장이 예편 후 외과 병원을 개입한 곳이다. 황종호씨는 그때 맞은 후유증으로 지금도 양어깨의 수평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호스로 물 뿌려 시체 씻는 사람들
국군 통합병원 영안실에서 아들의 시신을 보고 나온 어머니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 추운 디다 내 아들을 옷을 다 벗겨 놓고 놔뒀습디다. 얼마나 추울 것이요 아무리 죽은 사람 아 라고 해도 몸뚱이가 땡땡 일 것 아니요."
어머니는 무명 천을 떠다 고의 적삼을 짓고 행전 이며 버선, 멱모, 악수를 밤새워 마련했다. 경철이 살던 집앞 뜰에서 흙으 떠다 무명 주머니에 담아서 베개를 만들었다.
23일 경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시신을 습하기 위한 수의들을 챙겨 들고 다시 국군 통합병원으로 갔다. 병원을 두르고 있는 담벼락 앞에는 아름드리 통나무들이 쌓여 있었다. 정문은 모래주머니며 철골 구조물로 가로막은 채 군인들이 기관총을 세워 놓고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다. 어머니는 사정도 하고 포악도 부리다가 기어이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병원 안에 아는 이가 있기도 했다. 그를 따라 영안실 쪽으로 찾아 들어갔다. 영안실에 거의 다 달았을 때 눈앞에 끔찍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체 두 구를 놓고 씻고 있습디다. 한 사람은 호스를 들고 시체에 물을 뿌리고 있고 한 사람은 바닥 청소할 때나 손잡이 달린 솔로 시체를 북북 문질러 닦고 있었어요 옆에서는 사진을 찍고 어떤 군인은 뭣을 한참 적고 있습디다. 그 군인이나를 보드만 깜짝 놀램서 이 아주머니가 큰일날 아주머니네 함서 나를 내쫓습디다."
어머니는 그 거칠은 솔이 자신의 가슴속을 북북 긁어 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내 아들도 그렇게 씻었을 것 아니요. 저절로 통곡이 나옵디다. 불쌍한 내새끼―"
한참을 기다렸다. 처음 아들의 시신을 확인하러 왔을 때 기다렸던 만큼, 그때도 아들 시신을 확인하러 왔을 때 기다렸던 만큼. 그때도 아들 시신을 저렇게 닦느라고 자기를 기다리게 했던가 보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어머니는 죽은 아들의 모습을 다시 보았다.
"머리는 뒤통수에서 이마 위까지 퍼런 멍이 앉었 습디다. 등짝이고 어깨고 온몸에 피멍이 들었어요. 군화 발로 얼마나 짓이겨 버렸는지 발가락 두 개가 뭉개져서 곧 떨어져 나갈 판이었어라."
어머니는 경철의 시신에 옷을 입혔다. 흙을 담아 만든 베개를 베어 주고 악수로 손을 감쌌다. 버선을 신기고 행전을 친 뒤 바람 들 틈이 없도록 대님을 다단히 맸다. 그리고 얼굴 위에 멱모를 덮었다.
"그러고 나니께 인자 잠이 옵디다. 그 뒤로는 아들 얼굴을 영영 못보고 말았어요."
광주 시내가 온통 총소리로 뒤덮였던 그날. 쫓겨갔던 계엄군들이 총부리를 앞세우고 쳐들어와 날이 밝자 철모에 횐 천을 두르고 돌아다녔다.
6월 중순쯤이었다. 그때서야 연락이 왔다. 국군통합병원에서 시체를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경철씨의 시신은 통합 병원 뒤편 사격장에 가매장되어 있었다.
"포크 레인으로 죽죽 긁어 팠는 갑대요. 거기다 시체를 베니아판 같은 것으로 만든 관에 담아 묻어 뒸습디다. 그 앞에다 하나 하나 누구다누구다 팻말을 박아 뒀어요. 관을 파내서 나는 그것좀 뜯어보자. 내 아들 얼굴 한번이라도 더 보자. 안 그러믄 내가 미칠 것 같다고 천길 만길 뛰었어라."
어머니는 주위 사람들의 만류로 끝내 관을 열어 보지 못했다.
이장 때 관 안 열어 본 것이 한
당시 국군 광주 통합 병원장 김연균씨의 말에 따르면 군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병참 물자로 취급되어 군수 쪽에서 처리한다고 한다. 아마 영안실의 냉동 시설이 부족해서 병원 행정부의 결정으로 시체 일부를 가매장 했는 모양이라고 했다.
경철씨의 시신은 망월동 5.18묘역으로 옮겨졌다.
묘지 번호 66번. 그는 그곳에 잠들었다.
"아들 관을 뜯어보지 못한 것이 지금도 한이 돼요. 한번은 검찰청에서 5.18희생자 확인을 한다고 나를 부릅디다. 거기서 서류를 보니까 경철이 이름이 써 있고 뭐라고 복잡하게 죽은 이유를 써 놨다고 해요. 근디 그 밑에 붙은 사진을 보니까 말이 아닙디다. 내가 베어준 베개를 저만치 치워놓고 얼굴 덮었던 것도 거둬 버리고 저고리 앞섶도 다 풀어헤쳐 놓고 사진을 찍었습디다. 아이고 저놈들이 내 아들 옷을 다시 좋게 입혀 놨을 리가 없는디 싶어서 그때 관을 못 열어 본 것이 이렇게 가슴에 못이 돼 부렀어요."
엄마, 새 언니가 간대요"
아들이 죽고 해가 바뀌었다. 혜정이가 막 젖을 때 엇을 무렵이었다.
"엄마 , 새 언니가 간대요."
어느 날 딸에게서 가게로 전화가 왔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어머니는 가게 일을 맡기고 안집으로 들어갔다. 아들이 죽은 후로 며느리와 혜정이를 한집에 데리고 살고 있었다. 며느리는 자기가 기거하던 방을 깨끗이 정리한 뒤 보퉁이 하나를 보듬은 채 마루에 나앉아 훌쩍이고 있었다. 어머니의 만류에도 며느리는 굳이 떠나겠다고 했다.
"혜정이는 어쩔꼬 이 어린 것 불쌍해서 어쩔고. 며느리가 택시를 잡아타고 떠난 것을 보고 나서 어린것을 업고 집으로 걸어오는디,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지요. 아들이 죽었을 때도 그렇게 울지는 않았어요. 애비도 죽고 에미도 없이 이 어린것을 어쩔꼬. 저고리 앞이 척척하게 젖어 버리 대요."
그때부터 혜정이는 할머니를 엄마로 알고 자랐다. 지금은 광주 장산 초등학교 4학년에 다니고 있는 혜정이. 80년 1월에 태어나 지금은 할머니를 엄마라고 부른다. 할머니를 찾는 전화를 걸면서 혜정이는 이렇게 말한다.
"여보세요. 거기 혜정이 할머니 있지요?… 엄마, 손님 왔어."
혜정이는 담임선생도 그 애가 엄마 아빠 없이 할머니 손아래 크고 있다는 낌새를 모를 만큼 티없이 맑게 지낸다. 혜정이는 작년 5월 18일 망월동 아빠 산소에 제사 모시러 가느라고 하루 학교를 결석한 것을 못내 안타까워한다.
제사도 못지내다가 작년에야
"혜정이도 울고 나도 많이 울었소 해마다 5월18일날 제사지내러 가느 라면 망월동 입구에서 우리를 '망차'에다 실어 부러요. 머리 잡고 팔다리 잡고 찻속 에다 내 팽개쳐 부러요. 혜정이는 엄마, 엄마 함서 나를 꽉 붙들고 울어요. 혜정이 못할 일 많이 시켰소."
어머니는 어디론가 가고 있는 '망차'속에서 울부짖었다.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가냐 . 오늘 저녁이 울 아들 제산디 밥이라도 차려놔야 쓸 것 아니냐 . 불쌍하게 죽은놈, 밥이라도 차려 줘야제 왜 나를 잡아다 뭔 일했다고 잡아 가냐 이놈들아 !"
어머니는 5월 18일날 제사를 지내러 갔다가 나주 경찰서에만 세 번을 갇혀 있었고 한번은 영암부근 큰길가에 버려지기도 했다.
"그놈들이 어찌나 옴짝달싹 못 허게 양팔을 비끌어 매던지 팔하고 어깨에 신경통을 얻었소. 아이고 징허요, 징해.
'니가 벌떡 일어날 것 같은디…'
경철씨의 제사는 작년 1988년 5월 18일에야 처음으로 제대로 한번 지낼 수 있었다. 그날은 혜정이도 혜정이의 진짜 엄마도 모두 함께 갔다. 그래서 혜정이는 그날 학교를 결석했고 학교에서도 그때서야 혜정이가 5.18유가족임을 알았다.
"경철아―올 때마다 니가 벌떡 일어날 것 같은디, 경철아― 불쌍헌 내 새끼야, 해가 떠도 못 잊겄고 비가 와도 못 잊겄다. 내 자석아―"
지난 3월 어느날이었다. 어머니의 호곡소리는 긴긴 여운을 끌며 망월동 묘역을 휘감았다. 마침 시골 한 마을에서 망월동 한번 가보자고 어울려 왔다는 아낙네들이 주위에 모여들었다.
"이 사램이 당신 아들이요? 아들이여? 워매 어찌야쓰까. 워메 워메 어찌야쓰까―"
아낙네들은 어머니를 끌어안고 함께 울음을 터뜨렸다. 아빠의 사진을 내려다 보던 혜정이의 눈망울에도 눈물이 맺혔다.
"경철아―"
아들이 한마디 내뱉지 못했던 고통의 절규는 어머니의 단말마적인 호곡으로 터져 나왔다.
딸은 할머니를 '엄마'라 부르며 자라고, 아들 제사 지내려는 어메는 번번이 내던져지고…
여남은 명의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편을 갈라 축구 시합을 벌이고 있다. 봄볕은 따사로운 빛으로 아이들의 발랄한 몸짓을 운동장 모래 위에 선명한 그림자로 그려낸다. 축구공이 골문으로 굴러 들어갔다. 제법 날랜 몸짓의 한 아이가 두 손을 높이 치켜들고 부지런히 흔들어 댄다. 한 패인 듯한 몇 몇 아이들도 손뼉을 치거나 팔짝거리면서 뛰어 오른다.
"어! 어!"
목젖을 겨우 타고 넘은 듯한 외마디 소리, 그 아이 들에게 환희의 소리는 그것뿐이었다.
광주 시내 봉선동 산자락에 자리잡은 전남 농아 학교 광주 민중 항쟁 초기에 희생된 김경철씨(당시24세) 그도 이 학교를 나온 농아였다.
'경철이가 뒤통수를 맞았어요'
1980년 5월 19일 그는 죽었다.
"경철이와 함께 점심을 먹고 나왔어요. 시내에는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어요 우리는 여기 저기 돌아다녔지요 오후 3시나 4시쯤 되었어요 제일 극장 들어가는 골목, 그 앞에 큰 길이 있지요? 화니백화점도 있고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어요. 군인들이 쫓아오면 도망가고, 그때 나와 경찰이 또 황종호라는 친구가 같이 있었어요, 공수부대가 달려들었어요 경철이가 뒤통수를 맞았어요 우리는 재빨리 도망갔어요 그런데 경철이는 그 자리에 쓰러져 있었어요."
목포에 살고 있는 박인갑씨(35). 그도 역시 농아이다. 그는 김씨가 살해당했던 현장에 있었다. 그날의 참상을 '손으로 말하는'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수화하는 손짓도 점점 격렬해진다.
통역하는 이경례씨(32) 목소리도 차쯤 끝이 벌려 왔다.
"몽둥이가 순경들 차고 다니는 것이 아닌데요 훨씬 크고 넓적해요 그걸로 경철이를 마구 두들겼어요 경철이가 일어나서 농아 신분증을 보여주면서 악을 썼어요."
그 당시 김경철씨는 '전남 청각 장애자 복지 회' 감찰 부장이었다. 그는 저고리 윗 주머니에 항상 그 신분증을 갖고 다녔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어요 양어깨며 등이며 머리를 내리치고 쓰러지면 발로 밟았어요 경철이가 의식을 잃은 것 같았어요 피는 흘리지 않았는데 군인들이 경철이를 앞뒤에서 들고 군트럭에다 획 던져 실었어요 트럭에는 다치거나 의식을 잃은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마구 실려 있었어요. 트럭은 광주 천 쪽으로 사라져 가버 렸어요."
겨우 첫딸은 백일 지났는데…
그날은 김씨가 첫딸 백일을 지낸 지 스무날이 지난날이었다. 농아인 김경철씨가 역시 농아인 동갑 나기 김미경씨(33)를 부인으로 맞아 얻은 첫딸 혜정이. 온가족이 모여 백일 잔치를 벌였다. 김씨와 그 부인의 얼굴에는 소리 없는 함박 웃음이 가득했다. 그 기쁨을 소리로 웃지 못하였듯이 머리가 터지는 고통 속에서도 비명다운 비명 한마디 없이 그는 그렇게 죽어 갔다.
그가 마지막 보았던 음성이 끊긴 활동사진처럼 소리는 들리지 않은 채 몽둥이를 휘두르며 달겨드는 공수부대, 얼기설기 얼굴을 덮은 철망 너머 충혈된 눈빛, 그리고 보도 블록의 싸늘한 잿빛 그것이었을 것이다.
'후두부찰과상 및 열상, 좌안상검부열상, 우측상지전박부타박상, 좌견갑부관절부타박상, 전경 골부, 둔부 및 대퇴부 타박상'
광주 지방 검찰청과 군 당국이 합동으로 작성한 '5·18 관련 사망자 검시 내용'에 그의 사인이 그렇게 적혀 있다. 뒤통수가 깨지고 왼쪽 눈알이 터지고 오른쪽 팔과 왼쪽 어깨가 부서졌으며 엉덩이와 허벅지가 으깨졌다는 말이다.
"차라리 총에 맞아 죽었 으믄 편히 라도 갈 것인디. 온몸이 터질 때 꺼정 맞어 죽다니, 불쌍한 내 새끼 듣도 못허고 말도 못헌 것도 불쌍한디 맞어 죽다니―."
9년이 다 되어 가는 오늘까지도 김경철씨의 어머니 임근단 여사(54)의 한은 풀리지 않는다. 어머니의 절규는 통곡으로 변한다.
'설마 말 못하는 애까지야'
김씨가 죽은 날, 어머니는 광주 시내 충장로 학생 회관 옆에서 경영하던 음식점에 있었다. 시내는 온통 최루가스로 뒤덮여 어머니는 일찌감치 가게문을 닫아 버린 터였다.
"내 새끼가 그렇게 당한 줄을 어치께 생각이나 했겄소. 하도 시상이 시끄러운께 우체국 있는 디로 나가봤지라우."
거기서 어머니는 만행을 처음 목격했다. 서너명의 군인들이 대학생인 듯한 젊은이를 가운데 두고 무차별로 두들겨 패고 있었다.
"눈뜨고는 못 보겄 습디다. 그냥 놔뒸다가는 죽게 생겨서 내가 맘을 고쳐먹었어요. 군인이나 학생이나 다 똑같은 젊은 사람들인디 이것이 먼 일이 다요 허고 달라 들었지라. 그래도 안 되겄길래 '야가 내가 데리고 있는 종업원이요'하고 나섰어요. 그 학생을 데리고 우체국 옆에 금남 식당이라고 그리로 들어갔어요. 군인들이 거까지 따라옴서 참말이냐고 헙디다. 그렇다고 우겼 지라. 옆에 있던 아줌마들이 다 나섭디다. '맞다'고, 그 아짐 집 종업원이 맞다고들 나서니께 그제 서야 군인들이나가 대요."
그렇게 한 학생을 숨겨 뒸다고 바깥이 좀 잠잠해진 틈을 타 '데모하지 말고 빨리 집으로 가거라 목숨은 살어 야제' 하는 당부와 함께 내보냈다. 비상 계엄 확대에 따라 그날 저녁 7시를 기해 통행금지가 내렸다. 어머니는 가게로 돌아와 문을 걸어 잠그고 종업원들을 단속했다. 큰아들 경철씨가 걱정이 되기도 했으나 '설마…말 못하는 애니까…하고 마음을 놔버렸다.
'먹을 것 먹이고 하니 안심하라'더니
밤이 늦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팔의 목소리였다. 그때 경철씨는 결혼 후 백운동에 따로 살림을 내고 있었다. 그 집에는 첫아이 혜정이를 낳은 후 당분가 경철씨의 누이동생이 함께 살고 있었다. 경철씨의 부인도 소리를 듣지 못하고 말을 못하는 농아였기 때문에 아기에게 제 때 젖을 먹이려면 옆에 성한 사람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밤중에라도 아기가 배가 고파 울어 젖힐 때면 옆방에서 자고 있던 누이가 건너와 애 엄마를 흔들어 깨워야 했다. 그렇지 않고는 아기는 밤새 배를 곯고 목이 째져라 울기만 할 뿐 애 엄마는 소리를 듣지도 못하고 잠에 빠져 있을 터였다.
딸은 자못 걱정스런 말투로 오빠가 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아마 통금 시간이 당겨진 줄을 모르고 밖에 있다가 친구 집이나 일하던 양화점에서 자는 것이겠지. 어머니는 그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성한 사람이라면 전화라도 하겠지 만 말을 못하는 벙어리이고 보니 다른 사람이 대신 해주지 않고는 전화 연락을 할 수도 없었다.
날이 밝았다. 딸한테서 또 전화가 왔다. 경철씨가 날이 밝아도 집에 돌아오지를 않고, 있을 만한 곳을 다 수소문해 봤지만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한 가닥 불안감이 스쳤다. 어머니는 광주 경찰서로 전화를 걸었다. 경찰서에서는 사람들이 군인들에게 잡혀서 상무대로 많이 끌려갔으니 그리 가서 알아보라고 했다. 아침밥이 넘어갈 것 같지가 않았다. 택시를 잡아타고 상무대로 내달렸다. 총을 든 군인이 정문을 지키고 있었다. 다짜고짜 군인에게 달려가 아들의 소재를 물었다. '어제 하루 잡혀 온 사람이 8백 명이 넘느데 다인 아들을 어디서 찾겠소? 이리 잡혀 왔어도 먹을 것 먹이고 하니까 안심하고 집에 가서 기다리시오'하는 것이 대답의 전부였다. 어머니는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머리 뒤채를 움켜잡힌 듯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겨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병원 도착 직후 사망한 듯
그날, 그러니까 80년 5월 20일 오전 10시께 전남 청각 장애자 복지 회'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광주 적십자 병원 에세 그곳으로 '김형렬'이란 농아가 입원해 있다는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내 아들 이름은 '김경철'인데…반신반의, 아니 의심이 훨씬 많았다. 며느리도 따라 나섰다. '김형렬'이란 환자를 찾았다. 병원 복도며 벽에 얼룩져 있는 핏자국, 코를 찌르는 약품 냄새, 여기저기서 새어나오는 신음 소리, 병원은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젊은 의사의 손등이며 얼굴에는 피가 절반쯤이나 섞인 땀방울이 선명한 자국을 남기며 흘러내렸다.
"김형렬씨 ? 아주머니 저리로 돌아서 '영안실로 가 보셔요."
'영안실이라니. 턱도 없는 이름 갖고 괜히 멀쩡한 우리 아들 죽은 사람 맹그네―' 어머니는 일부러 라도 믿지 않으려 했다. 그렇지만 마음 속 한구석에는 숨길 수 없는 불안감이 불쑥 불쑥 자라났다.
"영안실이 어딘지도 모르고 물어서 찾어 갔지요. 근디 김형렬이란 사람이 어제 저녁에 죽어서 시체로 있다가 밤9시쯤 국군 통합병원으로 실려 갔다고 그럽 디다. 근디 이름은 틀린디 거기 사람들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생김생김이 우리 아들하고 비슷 하드란 말이오."
김경철, 그는 광주 시내 충장로 파출소와 제일 극장 입구 사이에서 계엄군에 무수히 두들겨 맞은 뒤 군 트럭에 실려 적십자병원으로 왔다. 그의 진료 기록을 보면 그에게 처방되었던 약은 '500cc.200cc,10%포도당, 삐콤, 타치온' 그것뿐이다. 이 처방을 본 한 외과 전문의는 '긴급한 환자가 들어오면 일단 링겔을 꽂고 혈액검사를 합니다. 그런데 다른 처치 기록이 없이 링겔에 포도당, 삐콤 , 타치온을 섞어 주사했을 뿐이었다면 환자가 충격에 깨어나기를 기다려 혈액 채취를 하기도 전에 절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라고 소견을 말한다. DOA.도착 직후 사망했다는 말이다.
국군 병원 냉동실에 누워 있는 아들
어머니는 며느리와 함께 국군통합병원으로 달렸다. 차츰 내 아들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실감으로 다가왔다. '김형렬'의 시신을 보여 달라는 어머니를 군인들은 면회소에 앉혀 놓고 기다 려라고만 했다. 며느리는 바싹바싹 타 들어가는 속마음에도 말 한마디 내뱉지 못하고 '윽! 윽!' 하는 신음 소리와 함께 쿨쩍 쿨쩍 흐느끼기만 했다. 그렇게 한시간이 가고 두 시간. 세시간이 지났다. 어머니는 종이 조각 팔락거리는 소리에도 불침이라도 맞은 듯 화들짝 놀랄 만큼 숨막히는 긴장으로 온몸이 굳어 있었다. 흐느끼던 며느리의 눈시울은 언새 퉁퉁 부어 올랐다.
"따라 오세요."
면회소에서 3시간 여를 기다리던 끝이었다. 헉하고 숨이 막혔다. 어떻게 걸어갔는지도 몰랐다. 온통 회색으로 분칠된 건물 사이로 구비 구비 돌아갔다. 앞서 가던 군인이 멈칫 멈칫 잿빛 철문을 열었다. 순간 한기가 엄습해 왔다. 냉동실이었다. 하얗게 칠한 한 쪽 벽에는 3층으로 포개진 작은 문들이 여남은 개 켜켜이 붙어 있었다.
드르르륵.
그것은 커다란 서랍이었다. 아니 관이었다. 군인이 그중 한 개를 빼내면서 보라고 했다. 시신은 하얀 천으로 덮여 있었다. 그 위에, 하얀 천으로 덮힌 머리맡에 '세상에! 경철이의 윗 저고리가 놓여 있었다.
"경철아!"
군인은 횐 천을 들춰내었다. 경철의 얼굴이. 아들의 얼굴이 두 눈을 무겁게 내리 감은 채 눈물 속으로 잠겨 들어왔다. 입에는 횐 솜을 물고 있었다. 며느리는 이미 "어, 어!"하며 넋을 놓고 말았다. 설마 했던 한 가닥의 희망은 여지없이 깨져 버리고 어머니는 중치가 턱 막히는 절망에 악에 바친 통곡을 터뜨렸다. 군인들은 산 사람이라도 살려야 한다며 실신한 며느리를 들쳐업고 뛰어 나갔다.
'군인들이 이럴수가'…
그 당시 국군 광주 통합 병원장이었던 김연균 대령(현재 광주 시내에서 병원 개업)은, 김경철씨 시신은 광주 항쟁과 관련해서는 처음 본 것이었다고 한다.
"적십자병원 영안실에서 옮겨왔는데 시체의 상태가 너무 처참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시내에서 충정 작전이 벌어진지도 모르고 그저 극렬 시위가 계속되고 있는 줄로만 생각 했었죠. 그런데 민간인이 그토록 참혹하게 살해되다니… 도저히 군인으로서는 할 수 없는 분명한 잘못이었다고 판단했습니다. 치명상은 두개골 함몰이었고 전신에 타박상을 입었는데, 최초의 희생자로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앞으로의 사태가 매우 심각해질 우려가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저는 곧CAC사령관에게 지휘 보고를 하고 심각한 우려의 뜻을 전했습니다."
어머니는 그때 바로 병원장도 만났다. 어머니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했다.
"누가 누군지 눈에나 보이겠소. 높은 놈인지 낮은 쫄병인지 아무나 틀어잡고 '내 새끼 살려내라'고 악을 썼지요."
"그때 어머니라는 분이 내 아들은 데모할 놈도 아니다. 말도 못하는 벙어리가 무슨 죄가 있다고 때려 죽였느냐 하면서 우리한테 달려들더군요. 그 절규에 우리도 눈물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죽은 사람은 무슨 농아 협회 규율 부장인가 그랬다고 하드 만요. 무척 성실하고 모범적인 농아 젊은이라고 들었어요. 저는 뭔가 잘못되고 있다. 이래서는 안 된다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
벙어리 며느리 '같이 죽겠다' 발버둥
어머니는 군인의 등에 업혀 간 며느리를 찾아 응급실로 갔다. 그곳에도 오전에 적십자병원에서 봤던 아비규환이 벌어져 있었다. 며느리가 의식을 잃고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불현 듯 혜정이 생각이 났다. 오늘 아침부터 해질녘이 다 된 그때까지 젖 한 방울 먹지 못하고 울어대고 있을 혜정이. 울어도울어도 듣지 못하고 울어대고 있을 혜정이는 한번 울음이 터지면 웬만해서는 그치지 않고 목이 갈라져 나가는 듯한 메마른 소리로 방안의 밀폐된 공간을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 놓곤 했다.
군인들은 더 이상아들의 시체를 보지 못하게 했다. 어머니는 며느리를 데리고 경철씨네 백운동 집으로 갔다. 혜정이의 울음소리는 골목 어귀에까지 날아와 어머니의 가슴속을 사정없이 골목어귀에까지 날아와 어머니의 가슴속을 사정없이 할퀴어 댔다. 며느리는 아기에게 젖을 물리지 않았다. 오히려 기저귀를 펴서 젖가슴을 꽁꽁 동여매고는 젖을 먹이지 않겠 다고했다. 셋이 같이 죽겠다는 것이었다. 애 아빠가 그토록 무참하게 죽었으니 자신도 아기도 따라서 죽겠다는 것이었다. 며느리는 울다가울다가 목이 쉬어 버린 혜정이의 자지러지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젖가슴을 싸맨 채 방구석에 팍 앉아 '윽. 윽. 윽'흐느끼고 만 있었다.
"기가 맥힙 디다. 며느리를 달래고 달랬지요. 이웃 사람들도 다 모여들어서 며느리를 달랩디다. 어찌 말이 통하 겄소마는 그래도 며느리가 젖을 풀드 만요."
4살 때 베란다에서 떨어져 청각 잃어
아들은 갔다. 아들 경철은 어머니에게 두 번의 커다란 절망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을 때.
아들 경철은 손이 귀한 집에서 큰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경찰직에 있었다. 영광 법성포에서 살던, 경철이가 4살쯤 되었을 때였다. 하루는 아버지의 직장 동료 부인이 경철을 데리고 나갔다. 그 부인을 따라 놀다가 그만 경철이가 2층 베란다에서 마당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애가 눈을 뒤집어 뜨고 맥을 딱 풀어 부렸대요. 오른쪽 이마가 주먹만하게 부어 올랐어요. 경찰에서 애 아빠가 차를 내서 달려와 광주 '신 외과'에 입원시켰어요. 병원 앞에 여관을 잡고 3개월 동안 치료를 했어요."
처음에는 사지를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다가 한 달쯤 지나자 고개를 약간 움직이더니 경철은 걸음마부터 발육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었다.
"다치기 전만 해도 못한 말이 없었 지라. 얼굴도 곱게 생긴 것이 얼마나 이쁜 짓만 골라서 했는지 아시오?"
병원 치료가 한없이 길어지자 의사는 두고두고 먹일 약을 처방 해주고 주사 놓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안 한쪽 벽에 대나무 하나를 길게 질러 놓고 경철에게 걸음마 연습을 시켰다.
"의사 선생님이 마이신 주사를 하루에 반병씩 한차례만 맞추라고 합디다. 근디 이 무식한 년이 많이 맞추면 빨리 나올 줄 알고 한번에 한 병씩 하루에 두 차례를 맞췄단 말이요."
집으로 돌아온 후 처음에는 대나무를 타고 걷는 아이에게 '경철아! ' 하고 부르면 뒤를 돌아보곤 했다.
"근디 이상합디다. 차근차근 뒤에서 불러도 돌아 보들 안 해요. 옆에서 큰소리다 나도 놀래지도 않고요 의사 선생님이 다시 정상이 될라믄 한 10년 걸릴 거라고 해서 그래서 그런갑다 했지라 근디 그것이 아니어요. 암만해도 귀가 먹은 것 같습디다."
서울. 대전. 광주 용하다는 병원은 다 찾아 다녔다. 항생제 과용으로 청신경이 마비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경철은 농아가 되고 말았다. 경철은 어머니에게 억장이 무너지는 절망을 안겨 주었다.
양화점에서 일하며 농아 돕는 일 앞장
경철은 전남 농아 학교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1965년 2월25일 , 졸업증서 번호 제26호. 동급생6명과 함께 전남 농아학교 제2회 졸업생이 되었다. 그후 중학 과정을 독학으로 마치고 서울에 있는 농아학교 고등 과정의 진학을 원했다.
"그때 형편으로는 도저히 보낼 수가 없습디다. 학비가 얼마나 비싼지. 학교 공부를 할 것이 아니라 기술을 배우라고 했지요. 서울로 데리고 가서 그때 '계명 양화점'이라고 굉장히 큰 구두 공장이었어라. 거기다 넣어서 구두 기술을 배우게 했어요.
그후 7년 동안 경철은 그곳에서 제화 기술을 익혀 다시 광주로 내려왔다. 그당시 광주에서 유명했던 충장로 2가의 '국제 양화점'에 취직했다. 그러면서 그는 전남 청각 장애자 복지회 일을 거들었다. 1977년경이었다. 진홍장씨(42. 광주 농아 복지회 광주. 전남 지부장)는 그때부터 경철씨와 함께 일했다.
"참 착실하고 똑똑하고 모범적인 청년이었어요. 그래서 감찰 부장을 맡겼어요. 불쌍하고 방황하는 농아들을 데려다 선도하는 일을 맡아 했지요. 지금 살아 있으면 지부장 자리를 물려주었을 텐데. 그만한 아이가 없어요. 너무나 아깝고 가슴 아픕니다.
농아 복지회의 송민옥씨(32)가 통역 해주는 수화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죽음 알려지자 농아들 시위 참가
김경철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농아들도 거리에 나섰다. 말을 못해 소리는 칠 수 없지만 격렬한 몸짓으로 시위대에 가담했다. 목포에서 만난 박인갑씨는 그 친구 황종호씨(32)와 함께 공수부대에 잡혀갔던 이야기를 수화로 전했다.
"시외버스 공용 정류장 부근에서 종호와 함께 잡혔어요. 우리는 장갑차 속으로 끌려 들어갔어요. 내 머리 뒤통수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어요. 군인들은 우리를 장갑차 속에 밀어 넣고 위해서 밟았어요. 고개만 들면 사정없이 내리 밟았어요. 내 등에는 군화 발 자국이 선명히 찍혔지요. 그 장갑차 안은 온통 피로 얼룩져 있었어요. 우리도 이제 죽었구나 했지요. 종화와 나는 소리를 질러 댔어요. 그 소리가 이상하게 들렸던가 봐요. 어깨에 무궁화 하나를 단 군인이 쌍안경을 들고 진두 지휘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 군인이 우리를 보고 진짜 말을 못하느냐고 손짓으로 묻더군요. 저는 이때다 싶어 농아 신분증을 들이밀었어요. 우리를 ㅣ내 네거리에서 내려 주었어요. 빨리 도망가라는 듯 손을 내 짓더군요. 다섯 시간 동안 죽을 고비를 넘겼어요. 우리는 내리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병원으로 달려들어갔지요."
공교롭게도 그 병원 자리는 그 뒤 당시 군 통합 병원장이 예편 후 외과 병원을 개입한 곳이다. 황종호씨는 그때 맞은 후유증으로 지금도 양어깨의 수평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호스로 물 뿌려 시체 씻는 사람들
국군 통합병원 영안실에서 아들의 시신을 보고 나온 어머니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 추운 디다 내 아들을 옷을 다 벗겨 놓고 놔뒀습디다. 얼마나 추울 것이요 아무리 죽은 사람 아 라고 해도 몸뚱이가 땡땡 일 것 아니요."
어머니는 무명 천을 떠다 고의 적삼을 짓고 행전 이며 버선, 멱모, 악수를 밤새워 마련했다. 경철이 살던 집앞 뜰에서 흙으 떠다 무명 주머니에 담아서 베개를 만들었다.
23일 경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시신을 습하기 위한 수의들을 챙겨 들고 다시 국군 통합병원으로 갔다. 병원을 두르고 있는 담벼락 앞에는 아름드리 통나무들이 쌓여 있었다. 정문은 모래주머니며 철골 구조물로 가로막은 채 군인들이 기관총을 세워 놓고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다. 어머니는 사정도 하고 포악도 부리다가 기어이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병원 안에 아는 이가 있기도 했다. 그를 따라 영안실 쪽으로 찾아 들어갔다. 영안실에 거의 다 달았을 때 눈앞에 끔찍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체 두 구를 놓고 씻고 있습디다. 한 사람은 호스를 들고 시체에 물을 뿌리고 있고 한 사람은 바닥 청소할 때나 손잡이 달린 솔로 시체를 북북 문질러 닦고 있었어요 옆에서는 사진을 찍고 어떤 군인은 뭣을 한참 적고 있습디다. 그 군인이나를 보드만 깜짝 놀램서 이 아주머니가 큰일날 아주머니네 함서 나를 내쫓습디다."
어머니는 그 거칠은 솔이 자신의 가슴속을 북북 긁어 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내 아들도 그렇게 씻었을 것 아니요. 저절로 통곡이 나옵디다. 불쌍한 내새끼―"
한참을 기다렸다. 처음 아들의 시신을 확인하러 왔을 때 기다렸던 만큼, 그때도 아들 시신을 확인하러 왔을 때 기다렸던 만큼. 그때도 아들 시신을 저렇게 닦느라고 자기를 기다리게 했던가 보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어머니는 죽은 아들의 모습을 다시 보았다.
"머리는 뒤통수에서 이마 위까지 퍼런 멍이 앉었 습디다. 등짝이고 어깨고 온몸에 피멍이 들었어요. 군화 발로 얼마나 짓이겨 버렸는지 발가락 두 개가 뭉개져서 곧 떨어져 나갈 판이었어라."
어머니는 경철의 시신에 옷을 입혔다. 흙을 담아 만든 베개를 베어 주고 악수로 손을 감쌌다. 버선을 신기고 행전을 친 뒤 바람 들 틈이 없도록 대님을 다단히 맸다. 그리고 얼굴 위에 멱모를 덮었다.
"그러고 나니께 인자 잠이 옵디다. 그 뒤로는 아들 얼굴을 영영 못보고 말았어요."
광주 시내가 온통 총소리로 뒤덮였던 그날. 쫓겨갔던 계엄군들이 총부리를 앞세우고 쳐들어와 날이 밝자 철모에 횐 천을 두르고 돌아다녔다.
6월 중순쯤이었다. 그때서야 연락이 왔다. 국군통합병원에서 시체를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경철씨의 시신은 통합 병원 뒤편 사격장에 가매장되어 있었다.
"포크 레인으로 죽죽 긁어 팠는 갑대요. 거기다 시체를 베니아판 같은 것으로 만든 관에 담아 묻어 뒸습디다. 그 앞에다 하나 하나 누구다누구다 팻말을 박아 뒀어요. 관을 파내서 나는 그것좀 뜯어보자. 내 아들 얼굴 한번이라도 더 보자. 안 그러믄 내가 미칠 것 같다고 천길 만길 뛰었어라."
어머니는 주위 사람들의 만류로 끝내 관을 열어 보지 못했다.
이장 때 관 안 열어 본 것이 한
당시 국군 광주 통합 병원장 김연균씨의 말에 따르면 군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병참 물자로 취급되어 군수 쪽에서 처리한다고 한다. 아마 영안실의 냉동 시설이 부족해서 병원 행정부의 결정으로 시체 일부를 가매장 했는 모양이라고 했다.
경철씨의 시신은 망월동 5.18묘역으로 옮겨졌다.
묘지 번호 66번. 그는 그곳에 잠들었다.
"아들 관을 뜯어보지 못한 것이 지금도 한이 돼요. 한번은 검찰청에서 5.18희생자 확인을 한다고 나를 부릅디다. 거기서 서류를 보니까 경철이 이름이 써 있고 뭐라고 복잡하게 죽은 이유를 써 놨다고 해요. 근디 그 밑에 붙은 사진을 보니까 말이 아닙디다. 내가 베어준 베개를 저만치 치워놓고 얼굴 덮었던 것도 거둬 버리고 저고리 앞섶도 다 풀어헤쳐 놓고 사진을 찍었습디다. 아이고 저놈들이 내 아들 옷을 다시 좋게 입혀 놨을 리가 없는디 싶어서 그때 관을 못 열어 본 것이 이렇게 가슴에 못이 돼 부렀어요."
엄마, 새 언니가 간대요"
아들이 죽고 해가 바뀌었다. 혜정이가 막 젖을 때 엇을 무렵이었다.
"엄마 , 새 언니가 간대요."
어느 날 딸에게서 가게로 전화가 왔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어머니는 가게 일을 맡기고 안집으로 들어갔다. 아들이 죽은 후로 며느리와 혜정이를 한집에 데리고 살고 있었다. 며느리는 자기가 기거하던 방을 깨끗이 정리한 뒤 보퉁이 하나를 보듬은 채 마루에 나앉아 훌쩍이고 있었다. 어머니의 만류에도 며느리는 굳이 떠나겠다고 했다.
"혜정이는 어쩔꼬 이 어린 것 불쌍해서 어쩔고. 며느리가 택시를 잡아타고 떠난 것을 보고 나서 어린것을 업고 집으로 걸어오는디,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지요. 아들이 죽었을 때도 그렇게 울지는 않았어요. 애비도 죽고 에미도 없이 이 어린것을 어쩔꼬. 저고리 앞이 척척하게 젖어 버리 대요."
그때부터 혜정이는 할머니를 엄마로 알고 자랐다. 지금은 광주 장산 초등학교 4학년에 다니고 있는 혜정이. 80년 1월에 태어나 지금은 할머니를 엄마라고 부른다. 할머니를 찾는 전화를 걸면서 혜정이는 이렇게 말한다.
"여보세요. 거기 혜정이 할머니 있지요?… 엄마, 손님 왔어."
혜정이는 담임선생도 그 애가 엄마 아빠 없이 할머니 손아래 크고 있다는 낌새를 모를 만큼 티없이 맑게 지낸다. 혜정이는 작년 5월 18일 망월동 아빠 산소에 제사 모시러 가느라고 하루 학교를 결석한 것을 못내 안타까워한다.
제사도 못지내다가 작년에야
"혜정이도 울고 나도 많이 울었소 해마다 5월18일날 제사지내러 가느 라면 망월동 입구에서 우리를 '망차'에다 실어 부러요. 머리 잡고 팔다리 잡고 찻속 에다 내 팽개쳐 부러요. 혜정이는 엄마, 엄마 함서 나를 꽉 붙들고 울어요. 혜정이 못할 일 많이 시켰소."
어머니는 어디론가 가고 있는 '망차'속에서 울부짖었다.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가냐 . 오늘 저녁이 울 아들 제산디 밥이라도 차려놔야 쓸 것 아니냐 . 불쌍하게 죽은놈, 밥이라도 차려 줘야제 왜 나를 잡아다 뭔 일했다고 잡아 가냐 이놈들아 !"
어머니는 5월 18일날 제사를 지내러 갔다가 나주 경찰서에만 세 번을 갇혀 있었고 한번은 영암부근 큰길가에 버려지기도 했다.
"그놈들이 어찌나 옴짝달싹 못 허게 양팔을 비끌어 매던지 팔하고 어깨에 신경통을 얻었소. 아이고 징허요, 징해.
'니가 벌떡 일어날 것 같은디…'
경철씨의 제사는 작년 1988년 5월 18일에야 처음으로 제대로 한번 지낼 수 있었다. 그날은 혜정이도 혜정이의 진짜 엄마도 모두 함께 갔다. 그래서 혜정이는 그날 학교를 결석했고 학교에서도 그때서야 혜정이가 5.18유가족임을 알았다.
"경철아―올 때마다 니가 벌떡 일어날 것 같은디, 경철아― 불쌍헌 내 새끼야, 해가 떠도 못 잊겄고 비가 와도 못 잊겄다. 내 자석아―"
지난 3월 어느날이었다. 어머니의 호곡소리는 긴긴 여운을 끌며 망월동 묘역을 휘감았다. 마침 시골 한 마을에서 망월동 한번 가보자고 어울려 왔다는 아낙네들이 주위에 모여들었다.
"이 사램이 당신 아들이요? 아들이여? 워매 어찌야쓰까. 워메 워메 어찌야쓰까―"
아낙네들은 어머니를 끌어안고 함께 울음을 터뜨렸다. 아빠의 사진을 내려다 보던 혜정이의 눈망울에도 눈물이 맺혔다.
"경철아―"
아들이 한마디 내뱉지 못했던 고통의 절규는 어머니의 단말마적인 호곡으로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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