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특집‘광주 무장봉기의 지도자’윤상원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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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광주 무장봉기의 지도자’윤상원 평전
만9년동안 썩어 묻혀진 80년대의 새벽별
윤상원 열사의 혁명적 복권!
박 노 해
피에 젖은 새벽 별
무거운 정적으로 횝싸인 오월의 한밤중, 분노와 공포에 불타는 수 백 개의 눈동자가 어두운 광장 저편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은 카빈 소총을 움켜쥐고 동지의 피로 물든 거리에 울려퍼질 계엄군의 탱크와 군화 발소리에 귀를 세우고 있었다.
전일 빌딩 옥상과 민원실 옥상에 설치된 캐리버 50과 LMC도 총구를 어둠 속으로 향한 채 결전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람도 시간도 심장마저도 멈춰 버릴 것 갈았다.
무기고가 있는 민원실 2층에서는 50여명이 창가마다 유리를 깨버린 창턱에 총구를 받치고 벽에 밀착해 있었다.
상원은 건너편에 서 있는 고등학생에게로 다가가 어깨를 꼈다. 떨고 있지는 않았다. 어둠 속에서도 녀석이 씩 웃는 게 보였다. 하긴 떨 리가 만무한 녀석이었다. 지난 21일 도청 탈환 때도 우박처럼 쏟아져 내리는 총탄을 겁내지 않고 뛰어다니던 녀석, 집에 가서 좀 쉬라고 하면 "놈들이 언제 쳐들러 올 지 모르는 판인디 잠이 오것소" 라며 신들린 듯 뛰어다니던 그런 녀석이었다.
상원은 주욱 한 바퀴를 돌면서 너무 창으로 노출이 된 사람은 벽으로 당겨 세우고 사격 자세를 고쳐 주기도 했다. 어디서 뭐하던 사람들인지도 서로 모르고 만난 지 비록 일주일 밖이 안되지만 혈육처럼 하나가 되어 버린 사람들 ! 하나가 되떠 함께 죽음의 항전을 기다리는 사람들 !
" 앗 ! 탱크다. 여기는 8조 ! 상황실 ! 탱크가 몰려온다 ! 저지는 무리다.
퇴각한다! ″
"여기는 유동 3거리 5조 ! 중과부적이다. 병력 지원을 바란다 ! "
" 본부 ! 여기는 서방이다 ! 화염 방사기다 ! 퇴각한다 ! "
무전기로 여기저기서 급박하고 처절한 부르짖음이 들려 왔다.
외곽에서는 간간이 포성이 울리고 가끔 조명탄이 벌겋게 피어오르다 하얀 연기를 뿜으면서 피시 시식 사그라져 갔다. 유령처럼 어둠에 감싸인 포가 와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가라앉곤 했다.
"드륵- 드륵 -드르륵 -"
M 16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외곽지역을 방어하던 혁명군과 기동 타격 대가 도청 안으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돌아온 병력은 나갈 때의 반도 되지 않았다 동지의 시체를 넘어 퇴각해 온 혁명군과 기동 타격 대는 차량과 화단 대를 은폐물로 삼아 도청 주위에 배치되었다.
"투다다닥‥‥‥‥
하늘에서 헬기 소리가 들리더니 조명탄이 터지기 시작했다.
조명탄의 창백한 불빛이 꽃으로 뒤덮였어야 할 5월의 텅 빈 화단과 엉성한 은폐물 뒤에 몸을 숨긴 혁명군의 초라한 뒷모습을 비추었다.
화단을 지나 도청 담을 넘어 상원의 눈길은 금남로로 향했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도 도로 군데군데 배인 핏물이 눈앞에 환히 보이는 듯했다. 아스팔트 위에 흥건한 그 피가 누구의 피던가 !
"죽을 사람만 따라 나오시오 ! "라고 외치며 차를 몰고 공수 대원 앞으로 돌격하다 한여름의 분수처럼 피를 뿜으며 쓰러지던 이름 모를 그 사내, 모든 것을 빼앗기고 살아가다 마침내는 목마저 떨어져 나간 채 금남로에 뒹굴던 작업복 차림의 몸뚱아리. 그렇게 되찾은 저 거리에 넘실대던 수십만 민중의 물결, 물결들.
상원의 머리 속으로 지난 열흘이 꿈결처럼 스쳐 갔다.
상원은 이를 악물었다. 그래, 지금은 다시 돌려주마.
그러나 그냥 주지는 않는다. 우리들의 피를 남겨 주겠다. 파쇼 권력이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을, 봉기한 민중들의 피를 이 도청에 남겨 주겠다.
상원은 손바닥에 난 땅을 바지 자락에 쓱 문지르고 다신 총을 쥐었다.
‘우리 운동권이 조금만 더 빨리 준비하고 대처했더라면 이렇게 무수한 죽음으로 끝내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온갖 아쉬움 들이 밀려왔다.
이제 내 나이 서른, 못다 한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았다. 들불의 형제들, 공장에서 만난 친구들, 그리고 비로소 전국적인 전망을 얻고 조직에 발을 디뎠는데 ……
그러나 상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열심히 싸워야 한다.
죽어서 살자 ! 이 전선에서 도망친다면 또 어디에 무슨 전선이 있단 말인가 !
상원은 총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금남로 쪽에서 꿈틀거리는 얼룩 무뉘 군복이 언뜻 눈에 보인 듯했다.
헬기가 고도를 낮췄다. 동시에 도청 바로 건너편까지 다가온 계엄군의 일제 사격이 시작됐다.
"드르륵 - 드르륵 - 드르륵·"
"탕탕 타앙 ! "
"꽝 ! 아악 ! "
총성과 비명, 수류탄이 터지는 파열음과 분홍빛 직선을 그으며 날아드는 예광 탄, 상원은 어둠 속의 적을 향해 카빈총을 그어 대기 시작했다. 이제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로지 적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적의 심장을 겨눠 방아쇠를 당길 뿐이었다.
죽여야 산다. 죽여야만 이길 수 있다.
저 파쇼 권력의 살인마들을 죽여야만 민중이 산다 !
한 놈이라도 한 놈이라도 더 죽여야만 한다. 우리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들의 목숨을 끊어 놓기 위해 죽이리라 ! 죽여야 한다.
상원은 미친 듯이 방아쇠를 당겨 댔다.
분수대와 정문 앞에는 갈수록 시체들이 즐비하게 늘어났다. 오늘 저녁만 해도 얼굴을 맞댔던 사람들이었다. 거리에는 노란 섬광이 반딧불처럼 반짝이며 떠다니며 비명소리, 총소리가 범벅이 되어 거리를 뒤흔들었다.
상원은 계속 적들을 향해 총을 긁어 댔다. 총의 약실 에서 탄피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빨갛게 달구어진 총신은 불 속의 쇠처럼 쉬쉭 거렸다. 적개심에 불타는 상원의 마음인 양 총신은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때 였다.
꽝- 하고 민원실 건물 바로 앞에서 수류탄이 터졌다.
폭음이 가시고 연기가 걷히자 피범벅이 된 젊은이의 시체와, 어깨가 날아가고 온몸이 갈가리 찢겨진 여자의 시체가 드러났다. 울컥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우리들의 동지를 걸레 조각으로 만든 놈들, 죽이리라 ! 죽이리라! 죽이리라 !
갑자기 총소리간 뜸해지더니 쩌렁 쩌렁한 스피커 소리가 들렸다.
"폭도들은 들어라 ! 너의 들은 완전히 포위됐다. 총을 버리고 투항하라 !
건너편 혁명군 쪽에서 분노한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 폭도오? 우리보고 폭도라고? 네놈들이야말로 폭도다!"
상원은 그 순간 통쾌한 웃음이 솟아올랐다. 그렇다. 너희들이야말로 폭도다 ! 우리 민중은 그걸 알고 있다.
"개새끼들 ! 지랄하고 있네. 어디 와서 죽어 봐라 ! "
어느 혁명군이 마이크 소리가 났던 쪽을 향해 악을 쓰며 M16을 자동으로 긁었다.
"죽일 테면 죽여 봐라 이놈들아 ! 네놈들한테는 죽어도 항복 못한다.″
상원은 한창을 바꿔 끼면서 사격을 계속했다. 잠시 식었던 총구가 다시 달아올랐다.
"빨리 날이 새야 쓸 것인디."
"그래야 사람들이 싸우러 몰려올 것인디……″
새벽까지만, 새벽이 올 패까지만 버티자.
그러나 새벽은 애가 타게 오지 않았다. 새벽은 처절하게도 오지 않았다.
광주 민중의 새벽, 민중 해방의 새벽, 새로운 긍지와 희망으로 둥실 떠오르는 민중 권력의 새벽은 아직 먼 것이다 아니 그들이 그렇게 기다리던 새벽은 그들의 피를 빨아 마시며 비로소 뒤척이고 있었다.
"아악 ! "
고등학생이 비명을 내지르며 털썩 쓰러졌다.
2층 난간에 나가 엎드린 채 사격 중이던 상원은 높은 포복으로 그에겐 다가갔다. 머리를 안아 올리자 벌써 힘없이 축 늘어졌다. 죽어서도 적을 노려보듯 일그러뜨린 얼굴로 감지 못한 두 눈을 상원은 손으로 쓸어 내렸다.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만들려고 노력했던 세상을 그래도 너는 면 칠이나마 느끼고 갔으니, 어린 넋이여, 슬퍼 말아라. 도청 바닥을 물들인 너의 피는 민중의 권력을 탈취하는 낱, 다시 살아나리라. 미쳐 춤추며 민중의 나라에서 살아나리라.
상원은 다시 빠른 포복으로 제자리에 돌아와 사격 자세를 취했다.
아 그때였다 !
적의 총탄이 퍼부어지기 시작했다.
"어이쿠! "
상원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저졌다. 옆구리였다. 본능적으로 옆구리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M16 총탄인 관통하여 뻥 뚫린 구멍으로 창자가 뭉클뭉클 쏟아져 나왔다.
"아 앗 ! 윤형 ! 윤형 ! "
근처에 있던 김영철과 이양현이 달려왔다. 상원은 이미 숨이 멎어 있었다. 김영철과 이양현은 상원의 시체를 근처에 있던 이불 위에 누이면서 그날 밤 함께 나누었던 말을 떠올렸다.
"우리 다시 태어나도 이렇게 삽시다. 지금 광주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10일 간 오로지 민중 봉기를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신들려 뛰던 사람 !
자발적인 민중의 봉기를 혁명적으로 이끌어 가고자 혼신의 힘을 다 짜내던 사람 ! '죽기 위해 살자' 며 뒤돌아보지 않고 철저하게, 철저하게 전진하던 사람! 해파(海跛) 윤상원은 적들의 총탄에 창자 하나 하나까지 다 쏟아진 채 이빨을 앙 다물고 그렇게 죽어 갔다.
그날 밤 광주 사람들은 아무도 잠들지 못했다. 부끄러움 때문에, 혹은 슬픔 때문에, 분노 때문에 ‥‥‥
이불깃을 눈물로 적시며 사람들은 새벽만 기다렸다. 새벽이 오면 나도 나가서 싸우리라. 바지 자락을 붙드는 어머니의 손길도 뿌리치고 아내의 눈물도 뿌리치고 나도 나가서 싸우리라 ! 싸워서 쟁취하리라 !
그러나 새벽은 좀처럼 오지 않았고, 피빛으로 밝아온 새벽은 이미 적의 것이었다.
어슴프레 밝아 오는 항전의 새벽 위로 '피에 젖은 새벽 별'이 빛나고 있었다.
혁명 투사 윤상원 !
남한 혁명 운동사에 빛나는 80년대의 새벽 별 !
그는 민중 봉기의 한가운데 서 이렇게 죽어 갔다.
이빨을 악물고
창자를 드러 내놓은 채
시커멓게 온몸이 탄 채로
다 쏘지 못한 탄창을 품고서
그렇게그렇게 봉기의 한가운데서
상원은 장렬하게 죽어 갔다.
광주 무장봉기를 이끌며
민중 권력 탈취의 신들린 화신으로
80년대 남한 혁명운동의 찬란한 새벽 별이 되어
민중의 가슴속에 타오르는 혁명의 불꽃으로
민중 봉기의 한가운데서
서른 살의 장엄한 목숨을 거두다.
1980년 5월 27일 4시 40분 경.
그리고 만9년이 지났다.
만 9년 세월 동안 윤상원은 망각 속에 썩어 묻혀져 왔다.
산 자들의 비겁 때문에,
피의 봉기를 두려워하는 자들 때문에,
우리들의 무능과 불철저함 때문에.
9년 동안 통곡하며 썩어 가던 상원은, 자신의 몸에 쌓인 망각의 흙을 털고 일어서고 있다.
이빨을 앙다물구 한 손으로 터져 나온 창자를 거머쥔 채, 한 손엔 죽는 순간까지 꽉 움켜쥐고 있던 총을 치켜들고서.
상원은 그렇게 우리 앞에 다시 서고 있다 !
어린시절
잔치에 바쳐질 돼지꿈
"요상도 혀라. 무슨 꿈이 이럴까이."
"먼 꿈인디 그랴"
"아 글씨 돼지가 방에 네 마리, 마당에 세 마리나 우글거리는 꿈을 꿨단 말이요
말이요."
건넌방 문이 벌컥 열리면서 중녀의 여인네가 활짝 웃는 얼굴을 내밀었다.
"아가. 그거 태풍꿈 히다 ! 아들 셋이 딸을 넷이나 둘란 갑다. 첫 애긴께 아들이나 쑥 뽑아야 쓸 것인디."
새댁은 빨갛게 얼굴을 붉혔다.
"근디 니가 큰자식 날란 모냥 이다. 돼지야 원래 잘 키워서 잔치 상에 올리는 거 아니냐. 그려 이왕 고생해서 낳는 거 나랏일에 바칠 큰 인물이나 하나 낳그라.
빨간 얼굴을 더 빨갛게 물들이며 새댁은 총총 부엌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로부터 열 달 뒤 아이가 때어 났다. 웬일인지 아이는 울지 않았다. 숨도 쉬지 않는 것 같아 엉덩이를 두드리고 별 짓을 다해도 허사였다. 3시간쯤 지나서야 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그 집 담장을 넘어 골목길을 울렸다. 예쁜 고추를 단 사내 녀석이었다. 호적에는 이름을 윤개원으로 올려놓고 집에서는 상원이라 불렀다.
상원은 광산군 임곡면 신룡리 천동 에서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화순에서 탄광을 경영하는 탓에 여느 시골집처럼 궁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상원이 어러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작은댁들을 분가시키고 나자 손에 쥔 차조처럼 재산이 솔솔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상원은 그러거나 말거나 곱슬머리를 휘날리며 아이들과 어울려 산으로 들로 쏘다녔다. 넘어져서 무릎이 깨져도 상원은 잘 울지 않았다. 툭툭 털고 일어나 씩 웃으면 그뿐이었다. 상원은 부모님과 할머니의 끔찍한 사랑 속에 무럭무럭 자라났다. 언젠가 차려질 허기진 민중의 큰 잔치에 바쳐질 한 마리 돼지가 되고자‥‥‥‥
비례의 법칙이 안 지켜지는 나라
우리 민족의 현대사가 그렇듯 언제나 상원의 앞에는 놀라운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4·19가 그랬고 5·16이 그랬다, 그런 날이면 상원은 일기장의 하루 칸이 넘쳐나도록 흥분해서 일기를 썼다.
"형과 언니들이 독재정치와 싸워서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군인들인 혁명을 일으켰다. 군사들이 차지한 나라는 군사들이 정치를 한다. "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를 더 좋아하는 밝고 쾌활한 소년이었지만,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을 만큼 대단히 성실했기 때문에 공부도 잘했다. 할아버지의 둘째 부인으로 자식이 없었던 '큰방 할머니는 친자식보다 더 상원이를 아껴 주었다. 다른 아이들이 꼴을 벤다, 쇠죽을 쑨다 하며 농사일 거들기에 바쁠 때에도 부모님과 할머니는 상원이가 흙을 묻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어린 상원은 일하지 않는 자신이 부끄럽고 미안했다. 어린 상원은 '나도 일을 해야 하는데, 왜 나는 일을 안 시킬까?''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부모님의 뜻인데 일하는 대신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하고 일기를 적어 미안함을 달랬다.
상원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일기를 써왔다. 그가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보위상 기록을 남기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전까지는 줄곧 일기를 써왔다. 상원은 일기를 쓰며 자기 생활을 뒤돌아보고 반성과 성찰을 통해 전진적인 삶으로 자신을 추동해 나갔다. 어련서 부터 써온 일기 버릇을 통하여 상원은 훗날 혁명 운동과 조직 생활 속에서도 엄격한 자기비판과 사상 투쟁을 게을리 하지 않으며 성실한 자기 발전을 거듭해 나가는 특성을 보이게 된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상원은 장손으로선 가문 부흥의 일대 사명을 안고 도시로 나왔다. 처음엔 하숙을 했다. 아무리 돈이 없어도 자식 하나는 기죽이지 않고 가르치겠다는 아버지의 눈물겨운 배려였다. 그러나 애정도 돈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논을 팔아 배우는 처지라 상원은 자취방으로 옮겼다.
삼류라는 사레지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상원의 고민은 시작되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잘 알기 위해 아무리 바빠도 신문을 촘촘히 읽던 상원은 사춘기 소년답게 모든 일에 궁금중을 느끼고 불의 앞에 흥분했다. 상원은 날마다 일기를 적었다.
삼성 재벌의 사카린 밀수 사건을 보고 분노한 마음, 시장 아주머니나 신문팔이 소년에 대한 끈끈한 정, 농번기에 시골을 가지 않으면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느꼈던 죄책감 등을 썼다. 어느 날 그는 또 이렇게 썼다.
"수학엔 비레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우리 세상엔 왜 비례의 법칙이 지켜지지 않는가. 부자는 손가락 하나 안 놀리고도 떼돈을 벌고 시장 사람들같이 없는 사람들은 하루종일 몸 뚱일를 굴려도 없이 산다. 움직인 만큼 벌면 안 되는가. 이 세상이 환멸 스럽다."
게다가 광주는 도시였다. 다같이 그럭저럭 못살던 시골과는 달랐다. 돈 쓰는 데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는 부잣집 아이들, 화려한 집들, 그는 열등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듯한 도시에 정이 가지 않았다. 가난한 농촌 출신 학생, 그것도 광주 제일 고 같은 일류가 아니고 삼류 학생이라는 열등감이 그에게 그늘을 드리웠다. 상원은 이 풀리지 않는 그늘을 벗어나고자 자꾸 밖으로 나돌았다. 자기와 비슷한 고민에 바진 친구들과 격렬한 입 씨름을 하기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 하고 무전여행을 하기도 했다. 담배를 피우고 잘 먹지도 못하는 술도 마셨다. 부정한 세상에 반항하고 도전하고 싶은 욕망에 상원은 입시 공부에만 처박히긴 싫었다.
상원은 고교 시절의 마지막 무렵에 대통령 선거를 겪었다. 상원은 박정희가 부정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을 분노로 지켜보았다. 대학생들의 격렬한 부정선거 규탄 대회에 끼어들어서 시위를 하고 난 상원은 소주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한 잔에 시뻘겋게 올랐다. 상원은 작은 거울을 불꽃튀는 눈동자로 들여다보며 자신만은 부정하게 살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했다.
대학시절
'끝없는 아리아'
71년에서야 상원은 전남대 정치 외교 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삼수를 거친 제법 늙은 학생이었지만 고향 사람들의 부러움 속에서 상원의 대학 시절은 시작되었다.
상원은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연극만에 가입했다. 수업은 둘째치고 상원은 연극 반에만 매달렸다. '끝없는 아리아'나 '멕베드' 같은 것들을 무대에 올릴 때면 상원은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다. 끝장을 보지 않으면 직성이 안 풀리는 성미였다. 온몸에 팜을 뚝뚝 흘리며 일하는 그를 보면 누구라도 함께 일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연극이 끝나면 흥건한 술판이 벌어졌다. 막을 내린 허탈감과 해냈다는 뿌듯함 속에서 젊은이들은 새벽이 오도록 술잔을 기울였다. 상원은 소주 몇 잔에 얼큰히 취기가 올라서 노래를 불렀다.
"바람 부는 언덕을 넘어서 가자. 비 내리는 벌판을 뛰어서 가자. 구름보다 더 높은 하늘 위에는 마음보다 더 고운 무지개 핀다. "
그가 연극에 미쳐 있는 동안에도 세상은 숨가쁘게 굴러갔다. 10월 전태일 열사의 분신을 계기로 전국이 달아 오르구, 학내에서 는 박정희 군사독재에 항의하는 시위가 잇달았다. 상원도 시위 때면 열심히 참가했다.
상원은 아직 민중들의 고통의 근원이 무엇인지, 이 사회의 모순과 박정희 군사파쇼와의 관계가 무엇인지, 평등과 민주주의가 실현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이 부재하였다. 아직 그는 시위의 주동자로 나설 준비가 안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위자들이 외치는 주장이 정의와 진리라고 생각하였기에 상원은 시위에 열심히 참가하였다. 상원은 시위가 발생하면 '문리 대생 모여라'고 외치며 대열의 맨 앞에서 스크럼을 짜고 주동자의 선창에 따라 구호를 외치고 힘차게 노래를 불렀다.
자신은 아직 시위의 주동자로 나설 만큼 논리적 인식과 확신은 없지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정도의 실천과 아는 만큼의 행동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완벽하게 논리적인 정리와 이론 체계가 갖추어지기 전까지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관적으로나마 느끼는 진리일지라도 지금 할 수 있는 것만큼은 회피하지 않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를 행동으로 옮겼다 상원은 자신보다 먼저 진리와 세계관을 확보하고 선구적으로 시위에 나서는 주동자들을 진심으로 존경했다. 연극 반일에 미친 상원의 학과 성적은 엉망이었고 학내 시위에 참가하기는 했지만 점차 혼란에 빠져 들어갔다. 왜 대학에 온 것인지, 왜 사는지, 왜 이렇게 정치와 세상이 엉망인지 알 수 없었다. 연꽃으로 뒤덮인 교내 호숫가를 거닐면서, 최루가스가 자욱한 학교를 오가면서 상원의 고민은 날로 커졌다. 2학년 여름 상원은 결국 휴학계를 내고, 말았다. 햇볕에 새까맣게 찌들며 농사를 짓고 논까지 팔아 가며 공부를 시켜 준 부모님을, 바빠서 품을 사더라도 자기에게는 공부하라며 일을 말리던 부모님을 그는 잊을 수 가없었다. 군대를 갔다 와서 고시 공부를 하기로 결정하고 그는 육군 하사관으로 입대하고 말았다.
김상윤을 만나다
75년, 상원은 학교로 돌아왔다. 경북 상주에서 하. 사관으로 근무했던 3년은 상원을 조급한 젊은이에서 풍부한 경험을 지닌 사회인으로 단련시켰다. 곱슬 거리는 짧은 머리, 군사 훈련으로 단단해진 체격, 부끄러워하던 하얀 피부가 건강한 갈색으로 변해서 그가 캠퍼스로 돌아왔을 때, 학교는 자기다 훨씬 더 많이 변해 있었다. 학교를 몇 시간인고 걸어도 아는 얼굴을 만나기가 힘들었다. 74년의 민청학련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학교를 떠났거나 유신체제의 폭압을 견디지 못한 젊은이들이 상원처럼 자포자기 속에서 군대로 떠난 까닭이었다. 연극 반 시절의 자유와 낭만조차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상원은 광주에 올러와 직장을 다니며 야간 학교에 다니고 있던 두 동생과 자취를 하며 썰렁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오로지 공부하는 것밖에는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상원은 외교관이 되기 위한 고시 준비로 코리아 헤럴드를 수복이 쌓아 높고 영어를 공부하거나, 외교관이 되려면 테니스 정도는 칠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테니스를 배우기도 하며 학교에 적응해 갔다. 가끔씩 연극반에 들러 후배나 친구들이 연극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연극에 대한 열정을 달래는 정도였다.
어느 날 연극 반 친구 석균이와 철황이가 사람을 데리고 상원의 자취방을 찾아왔다. 상원은 조금 마르고 진지한 얼굴의 그가 누군지 담 박에 알아차렸다. 석균이가 늘 얘기하던 김상윤 이었다. 상원은 눈을 빛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감옥에 갔다 온 사람 같지가 않았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그런 고초를 격으 면서 남을 위한 삶에 뛰어든 건지 궁금했다. 네 사랑은 좁은 자취방에 머리를 맞대고 앉았다. 상원은 상윤에게 무엇 때문에 민청련에 참가했는지 물었다. 소주잔을 앞에 놓고 상원은 귀찮으리 만치 질문을 해댔다. 대졸 자의 기득권과 노동자의 생활, 전태일의 분신과 노동운동, 또 이 땅의 분단에 대해서, 상원의 호기심은 지칠 줄을 몰랐다. 그 많고. 다양한 질문에 대해서 김상윤은 하나하나 성실하게 대답했다.
눈을 빛내며 이것저것 캐물어 오는 상원에게 김상윤은 호감이 갔다. 진지하고 시골 태생답게 순박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솜처럼 유연하게 사람을 빨아들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외무 고시를 위한 책으로 묵직한 가방과 테니스 라켓을 들고 다니던 상원은 김상윤과 만나면서 다시 자기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몇 푼 안 되는 봉급을 받으려고 새벽부터 공장으로 줄달음치는 어린 동생들, 해가 뜨자마자 논에 나가 뼈빠지게 일하고도 아픈 몸에 약 한첩 못쓰는 부모님, 가난하고 무권리한 무수한 이웃들, 상원은 결국 코리아 헤럴드와 테니스 라켓을 집어 던졌다.
상원은 김상윤이 이끌어 가는 소모임에서 집중적인 학습을 받기 시작했다.
김현준(현 전교협 서울 사무국장), 김영종(헌 사계절 대표), 박몽구(시인)등이 모임의 멤버였다. 삼수 까지 한데다 군대를 갔다 와서 뒤늦게 운동에 뛰어든 상원이었지만 어려움을 내색 않고 학습에 열중했다. 6개월간 집중적인 학습이 이루어졌다. 매일매일 책을 읽고 세미나를 가졌다. 6개월 내 내 상원은 방안에 틀어박혀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도 모르고 공부만 해댔다. 기본적인 한국 현대사부터 농업 문제, 노동 운동사, 정치경제학, 제3세계의 이해, 페다고지에 이르기까지 당시 구할 수 있는 책은 모두 읽었다.
학습할 장소가 마땅치 않아서 주로 상원의 집에서 학습이 이루어졌다.
공장 일이 끝나면 야간 학교에 갔다가 파김치가 되어 들어오는 동생들에게 미안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동생들은 날마다 변해 가는 형이 조금은 짜증스러웠다. 형과 친구들이 토론하는 얘기를 들으면서 어렴풋이 형이하는 일이 옳은 것임은 알 수 있었다. 그런나 집에 돌아오면 누을 자리도 없게 자리를 차지 하구 더구나 장남인 형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따른 일만 하는 게 야속하기도 했다. 당장 자신들은 고등학교도 변변히 못 다니고 야간 학교를 다니는 형편 아닌가. 형이 어서 졸업해서 훌륭한 사람되기만 손꼽아 기다리던 동생들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동생들은 저러다 형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하나 가슴을 졸였다. 딴 공부를 해서 그렇지 언제나 자상한 형이었다. 겉으로 말은 안 해도 자기만 대학이 다니는 것을 굉장히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일에 지친 동생들이 웬만한 짜증을 부려도 형은 다 받아 주었고 자전거 배달을 하던 둘째 정원 이가 다리가 퉁퉁 부어 들어오면 밤새 다리를 주물러 주기도 하는 형이었다.
실천하지 않는 학습은 싫소
당시 전남대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운동 조직이 거의 박살난 상태였다. 전남대 운동권의 리더였던 김상윤은 소모임을 통해서 운동 조직을 확산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써클 위주의 조직이었으나 써클 형태는 위험부담이 크고 조직 확산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김상윤은 소모임을 통한 세포 분열식 확산을 택하기로 한 것이다. 김상윤은 학습을 위한 사회 과학서의 보급과 운동권의 연결을 위해 녹두 서점이라는 사회 과학 서점을 열었다.
이 당시 광주 지역은 농민운동과 학생운동, 문화 운동, 재야 운동 등의 쁘띠 부르주아적인 운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노동운동 역시 태동하고 있는 중이었다.
따라서 당시 광주 운동권의 중심적인 과제는 여기저기 분산되어 떠도는 활동가들을 혁명적 노동운동의 방향으로 조직화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하여 우선 우리 사회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파악하고 향후 활동의 방침을 결정하기 위한 과학적 인식의 무장이 시급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광주 지역 최초의 사회 과학 서점인 녹두 서점의 개설은, 사회 과학 서적을 보급하고 학습과 토론을 활성화시키는 근거지가 되었다. 또한 광주 지역 활동가들의 사랑방이자 '조직 자' 역할을 수행하였다.
곧 녹두 서점은 상원과 소모임 1기 출신들이 중심이 되어 운동권의 활동 인자를 배출하는 양성소가 되었다.
6개월간의 학습을 끝낸 후 상원은 이미 전남대 운동권의 핵심 인자로 떠오르고 있었다.
상원은 학습을 계속하면서 연극 반을 이끌었던 경험으로 문화패 '광대'를 만들었다. 멋에 들떠 있었던 예전과 달리 상원은 민중극에 심취했다. 문화패 광대는 광주 지역의 문화 운동을 활성화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상원이 부르는 '소리의 내력'은 일품이었다. 흥만 나면 그는 어디서나 연극 쟁이답게 온몸으로 구수한 노랫가락을 뽑아 올렸다.
시간이 흐르자 상원과 그의 스승인 김상윤 사이에는 점차 이견이 생기고 논쟁이 시작 되 었다.
김상윤이 조직 확대를 위해 우선 학습만을 강조한 반면 상원은 당면한 투쟁 전선에서 고립된 학습이란 오히려 투쟁력을 약화시킬 뿐이라고 생각했다.
상원에게 김상윤은 여전히 존경하는 선배였지만 그렇다고 이견이 있는 것까지 덮어두고 따라갈 수는 없었다. 상원은 독자적으로 유인물을 만들어 뿌리곤 했다. 77년 봄, 상원은 실천하지 않는 학습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시위를 주도할 계획을 세웠다. 오히려 싸움을 통해 조직도 확산시킬 수 있다고 그는 믿었다. 그러나 한께 주도하기로 했던 학생들이 도중에 이탈하는 바람에 시위는 무산되고 말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놓고 훗날 그가 광주 봉기의 샛별로 떠오를 수 있었던 조건이었다고 달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광주 봉기를 혁명적으로 지도할 수 있었던 것은 '얼굴이 안 팔려서' 예비 검속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언제나 투쟁 전선의 정면에 서 있으려고 하는 기본적인 자세 때문이었다.
상원의 운동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이처럼 '이론과 실천'에 대한 변증법적인 관계를 계급적 직관에 의해 체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원은 누구보다도 학습에 열심이었고 혁명 이론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면한 실천을 방기한 채 막연히 해 두어야 할 필수적 무기로서의 이론 학습에 대해서는 분명히 반대한 것이다.
이론 학습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혁명가의 학습은 구체적 목적성에 기초하여 당면 실천과의 정확한 역량 배분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혁명 운동가의 목적은 기존의 지배계급을 타도하고 노동자 계급을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재조직 화함으로써 진정한 인간 해방을 이룩하는 데 있다. 따라서 그의 모든 관심과 노력과 행동은 '투쟁'에 있다. 투쟁을 잘하기 위한 조직화, 투쟁을 잘하기 위한 사상 투쟁으로 그의 구체적 실천 행위는 조직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혁명 운동가는 단 한시도 당면한 '투쟁 전선'에서 눈을 떼어서는 안 된다. 설사 그 시대가 혁명운동의 '선전 단계' 일지라도, 그가 설정한 긴급한 과제가 '이론 준비' 일지라도, 그가 맡은 임무가 '조직 재건' 일지라도 그의 시선은 당면한 투쟁 전선으로 모두 어 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론 학습은 그 이론의 출발점이자 귀결점인, 생생한 현실 계급투쟁으로부터 무게중심을 제공받지 않으면 안 된다. 객관 현실에서 진행 중인 계급투쟁을 막연히 밀쳐둔 채 '단계적으로' 우선 학습부터 하고 보자고 할 때, 그 학습은 무게중심을 상실하고 동력이 끊어진 채 캄캄한 불가지론과 관념의 안개 바다 속을 떠돌다 좌초하는 무력한 배가되고 말 것이다. 혁명 운동가는 현실 투쟁 속에서 부딪치는 난관을 이론적인 문제의식으로 끌어올리고 과학적 이론으로 해명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선 안 된다. 그리하여 그의 시선은 항상 투쟁 전선에 못박혀 있고, 그의 촉각은 계급투쟁의 한 중심부에 뻗쳐 있기에, 그의 이론 학습과 연구 작업은 살아 펄떡이는 현실성과 긴장감을 유지하는 '동일한 전선 위의 또 하나의 투쟁으로 되는 것이다.
마지막 효도입니다
마지막 효도
상원은 농사 짓는 부모님이나 노동을 하는 동생들을 볼 때마다 미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다고 고생하는 가족만을 위해 자신이 돈을 버는 기계로 나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기엔 상원의 걸음이 너무 튼튼하게 내디뎌져 있었다. 상원은 자기를 위해 희생한 가족에게 최소한의 갚음이 뭘 까를 생각했다. 열심히 운동을 하는 것이 가장 큰 효도일 테지만 부모님이 당장 그걸 이해하실 수는 없을 터였다. 그는 자기 일을 몇 달 뒤로 미루고 취직을 결정했다. 대학을 졸업한 아들이 첫 월급 받는 모습만이라도 보여 드리자고 생각했다. 상원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마지막 효도라고 생각하고 취직시험을 보았다. 주택은행 서울 봉천동 지점으로 발령 난 상원은 직장 생활을 보았다. 주택은행 서울 봉천동 지점으로 발령 난 상원은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서울 봉천동 지점으로 발령 난 상원은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봉천동은 그의 부모와 같은 시골 사람들이 피폐해진 농촌을 떠나 이주한 인민 지역이었다. 좌판장사, 껌팔이, 지게꾼들이 태반인 빈민촌에 살면서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다시 한번 다짐할 수 있었다. 은행이란 묘한 곳이었다. 하루에도 어마 어마한 돈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모습을 보면서 상원은 자본주의 체제가 얼마나 불합리한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근무가 끝나면 상원은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당시 서울대 75학번들이 주축으로 활동하던 겨레터 야학 등을 찾아다니며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구체화시켰다. 그는 앞으로 본격적인 노동운동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가난한 민중의 집안에서는 한 명의 선택 자가 전 가족의 집중 후원을 받게 된다.
그는 집안 식구들의 고달픈 노동과 희생 위에서 집안의 희망을 걸머진 기둥으로, 대를 이은 가난과 천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사' 떠오르게 된다. 상원 역시 그러했다.
그러나 집안 식구들의 고달픈 노동과 피눈물 위에서 대학을 다닌 그가 마침내 성공하여 가족을 위하여 일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커다란 배신행위이다.
그는 자신을 뒷받침해 준 서너 명의 가족들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있을지 모르나 수만, 수천만의 민중 형제들을 고통과 몰락으로 몰아넣는 신 식민지 국가 독점 자본주의 체제의 재생산에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원은 자기 가족을 눈물로 배신하고, 격노와 원망으로 가득 찬 가족을 포함한 전 민중의 진정한 희망의 기둥으로 나서기 위한 예비를 해 나갔다.
후배들의 발길에 채여
78년 7월, 서울의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광주 후배들 몇 명이 그를 찾아왔다.
송기숙 교수 등이 국민 교육 현장의 군국주의적이고 비민주적인 점을 비판했다가 연행된 뒤 이에 동조하는 싸움을 주도하여 수배를 당한 후배들이었다. 후배들은 감칠 맛 나는 전라도 사투리로 지금까지의 상황을 침을 튀겨 가며 일일이 얘기해 주었다. 갈 것도 없이 선배 하나만 믿고 서울로 찾아온 후배들에게 상원은 지낼 곳을 마련해 주고 월급을 다 털어 성심성의껏 챙겨 주었다.
그러나 어쩐지 상원은 그들 앞에서 당당해질 수가 없었다. 새까맣게 그을린 후배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도 없었따. 그들이 땡볕 더위 속에서 최루가스를 맞아가며 시위를 주도할 때 나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나, 어떤 핑계라도 비겁하다. 마지막 효도라는 것도 이제 더 이상은 비겁하기 짝이 없는 도피가 되고 만다.
상원은 투쟁하는 후배들이 자신을 걷어차는 발길질을 온 가슴으로 받았다. 그 발길질은 민중의 발길질이었다.
장강의 앞 물결이 뒷 물결에 밀리는 것처럼, 새롭게 진보하는 투쟁의 물결과 후배들의 비판을 정직하게 가슴으로 맞이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이 부정과 비판을 회피하고 자기 합리화하려는 순간부터 그는 반동의 대오로 기울기 시작하는 것이다.
상원은 후배들을 통한 민중의 발길질을 무릎꿇고 받으며 결단하였다.
그에게는 당장의 생계 보장도 없었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뚜렷한 대안도 없었다 그럼에도 상원은 그 따뜻한 자리를 박차고 나서기로 하였다.
자신이 처한 그 자리가 안주와 부끄러움의 자리라면, 나날이 살아 전진하는 발걸음을 무겁게 가라앉히는 침몰의 자리라면, 그의 혁명 성과 투쟁의 의욕을 꺾어 나가는 굴절의 자리라면 지금 당장 과감히 박차고 나서라!
그 자리가 그대의 사고와 혁명 성을 제약하고 있기에, 날이 갈수록 혼란과 번뇌의 안개 바다 속으로 빠져들게 하기에, 그대의 건강성과 모험심을 좀먹어 소심한 생활인으로 주저앉히기에, 그 절망의 뿌리인 생활의 토대를 과감히 깨뜨려라 !
한시라도 빨리 그 자리를 일떠나서라 !
그것이 너의 혁명, 너의 생명의 새순이다 !
상원은 부질없는 고뇌를 끊어 버리고 훌훌 털고 호남선 열차에 몸을 싣고자 했다.
다음날 상원은 사표를 제출했다. 벙긋 웃음까지 흘리고 있어서 직장 동료들은 그가 더 좋은 회사로 옮기는 줄 알고 반은 선망으로, 반은 진정으로 축하해 주었다. 어디로 옮기냐고 물어도 상원은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다시는 전설에서 비켜나지 않으리라 ! 사표를 던지고 나오면서 그는 하도 푸르러서 눈이 시린 하늘을 보며 가슴에 새겨 넣었다. 잠시 부모님의 주름진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부모님께 온 정성을 기울여 편지를 썼다.
" ‥‥‥‥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부모님께서 저를 이토록 길러 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평생을 다 바쳐 노력하여도 부족하겠지만, 유신 독재가 판치는 우리 나라 상황은 저를 평범한 월급쟁이로 살아가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이에 굴하지 않고 민족이 처한 현실에 뛰어들어가 민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조그마한 힘이라도 보태려는 볼초소생의 마음을 용서하셔서 차라리 참된 효도의 길이라 여겨주소서,"
한 혁명가가 거쳐온 생의 역정에 대한 최종적 평가는 그가 그 속에서 혁명 운동에 필요한 자양분과 경험들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흡수하여 활용할 수 있는가 이다. 상원은 7개월의 직장 생활을 통하여 자본주의히의 부르주아지와 소시민들의 생활과 대중적 정서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폭넓은 사회성과 실무적 능력을 부분적으로나마 훈련받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다시 서자 프롤레타리아트로 !
오매 피곤허다
"국수를 먹고 나니 나른하고 조금은 졸립고 하는 일이 더없이 짜증스러웠다. 1시간 1백 20원, 이걸 생각할 때마다 기계를 부숴뜨리고 싶었다. 이건 아마 나의 감정이리라. 더 고된 일을 다른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해내고 있지 않은가."
시골에 살았어도 손에 흙 한번 묻혀 본 적이 없던 상원에게 공장 일은 너무 힘들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때려 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그는 하루 열 시간 노동에 1천2백 원을 받고도 묵묵히 일하는 다른 노동자들을 보며 자신을 '공장 체질'로 개조시켜 나갔다.
상원은 78곁 7월 말 광주에 내려와서 잠깐 녹두 서점에서 일했다. 노동 운동을 하겠 다고는 했지만 어떤 일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방향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상원은 일단 현장 생활을 경험하기로 하고 광천 공단의 한남 프라스틱이라 회사에 일용직 으로 들어갔다. 상원은 노동자들의 감정, 생활, 근로조건들을 온몸으로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일이 끝나면 하도 피곤해서 술 먹을 생각은커녕 쓰러져 자고 싶었으나 동료들과 술자리를 같이 했다. 하루에 2백50만원씩이나 순수익이 남는데도 임금으로는 6만원도 안 쓰는 사장 놈을 함께 욕하기도 하고 스물이 넘은 나이에 공부가 하고 싶어서 검정고시를 하는 노동자의 인생살이에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일이 힘들면 힘들 수록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오기가 솟았다. 상원은 날마다 일기장에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적어 나갔다.
한남 프라스틱뿐만 아니라 다른 사업장에 대해서 노동자가 얼마인지, 노동조건이 어떤지, 임금 수준은 어떤지 조사해 나갔다. 드러눕기가 무섭게 곯아떨어지는 고된 노동 속에서 상원은 프롤레타리아로 다시 서서 힘찬 전진의 걸음을 시작하였다.
광천 시민 아파트
광천 공단에 위치한 광천 시민 아파트는 말이 아파트지 좁은 복도를 사이로 작은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빈민을 위한 집단 수용소와 같은 곳이다.
당시에는 나무를 땠을 정도였고 일용 노동자나 도시 빈민들이 주로 거주했다.
1978년 10월 말 상원은 이 아파트로 이사를 하였다. 무슨 일에든 전부를 쏟아 부처 야만 시원한 그의 기질 탓이었다.
한남에 입사한 얼마 후 상원은 후배인 박기순을 만나게 되었다. 박기순은 여러 사람의 우려를 무릅쓰고 광주에서는 최초로 노동 야학인 들불 야학의 문을 연 사람이었다. 상원은 함께 일을 하기로 하고 들불 야학이 위치한 광천동으로 아예 방을 옮긴 것이다. 상원은 자기의 방을 강학이나 야학생들의 모임 장소로 공개했다.
상원은 방을 옮긴 후 곧장 같은 아파트에 사는 김영철을 찾아갔다. 5급 공무원을 하다 때려치고 아주 헌신적으로 빈민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김상윤의 소개가 있기도 했지만 어떤 사람인지 상원은 몹시 궁금했다. 김상윤의 소개로 찾아온 야학 사람이라고 하지 김영철은 상원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박용준이라는 사람이 방안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서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은 함께 광천 시민 아파트 사람들을 대상으르 하는 광천 삼화 신용 협동 조합에 근무하면서 친형제처럼 지내고 있었다.
박용준은 삼화 신협에 근무하던 중 김영철을 만나게 되었다. 어린 시절에 고아들과 함께 자란 김영철이, 혼자서 외롭게 사무실에서 자취 생활하고 의로운 김영철과 의형제를 맺고 광천동 시민 아파트 김영철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용준은 자신이 외롭고 가난하게 자라났기 때문에 자신과 같은 처지의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가만있지 못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다 털어서 베풀고 도우려 했다. 낮에는 직장 일을 하고 밤이면 집에 와서 광천동 시민들을 위한 시민 헙동 조합 일과 반장 활동과 야학 일에 밤을 지새웠다. 용준은 어찌나 열심이었던지 아침이면 세수 대야에 벌건 코피를 쏟곤 하였다.
용준은 가끔 집에 안 들어 올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그는 평소에 찍어둔 탐욕스런 사장 놈들이나 부자 놈들 집에 칼을 품고 들어가려다 붙들려 광주 경찰서 유치장에서 잡혀 있곤 했던 것이다.
박용준은 광주 무장 봉기 기간 내내 상원과 함께 영웅적으로 투쟁하다 함께 죽어 간다. 박용준은 고아로서 영아원인 영신 원과 고아원인 무등 육아원에서 서럽게 자라났다. 그러나 굳세게 성장하여 숭의 실업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 신용 협동조합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박용준은 부모의 사랑조차 받지 못하고 가난과 어둔 속에서 자라났지만 정의롭고 활달하였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끔찍히도 사랑하였다. 재능도 많아서 못하는 것이 없는 팔방 미인이었고, 글씨도 잘 썼고 나무도장도 잘 팠고 조합 간판이나 썬팅도 전문가 못지 않았다.
노래도 잘 불러 가곡을 부를 때면 테너 가수 뺨치게 불렀다.
광주 봉기에 중대한 역할을 한 「투사 회보」와 「민주 시민 회보」는 그의 힘찬 필경 솜씨로 제작되었다.
김영철과 용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야학의 운영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광천동 사람들에게 우리 반장 소리를 들으며 착실히 빈민 운동을 해 나가던 김영철은 박용준과 함께 열심히 야학 일을 도왔다. 입학식 땐 주인 대표로 격려사를 해주고 레크레이션과 세계사를 가르치는 강학 으로 뛰기도 하며 김영철은 야학이 주민들과 함께 할 수 있도록 많은 애를 썼다.
아파트 앞 조그만 공터는 때로 마당극을 하는 놀이판이 되기도 하고 야학 사람들과 광천동 청년들이 공을 차는 운동장이 되기도 했다. 어쩌다 상원이 관계하는 전남 연극반 친구들이 와서 한바탕 놀이판을 벌이면 온 아파트가 떠들썩했다. 고통받는 노동자의 푸념으로 극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그래, 맞아맞아' 박수를 치면서, 한숨을 쉬면서 하나가 되어 열심히 극을 보았다. 청년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면 소주 몇 잔에 얼큰히 취한 아주머니들도 어깨를 들썩이며 따라 나섰다. 테너 가수 못지 않은 박용준 더러 노래를 부르라는 성화가 빗발쳤고 상원의 소리 내력에 맞춰 검정 고무신의 박관현이 엉성한 춤이라도 추게 되면 아파트가 떠나가라 웃음이 터져 나왔다.
광주 혁명은 광천동 에서 많은 것을 빼앗 아갔다. 80년 5월 이후로 광천동엔 이전과 같은 웃음이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상원의 소리 내력도 , 박용준의 노래도, 반장 김영철의 넉넉한 웃음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하자 상원과 박용준이 계엄군의 총탄에 쓰러졌고 관현도 선배들의 뒤를 따라 단식투쟁으로 죽었으며 모진 고문으로 불구간 된 김영철은 정신이상이 되어 버렸다. 광천동 사람들은 그러나 아직도 그들을 사랑하고 쓰라린 마음으로 그 시절을 기억한다. 아파트 아주머니들은 혀를 차며 김영철을 이렇게 얘기한다.
"얼매나 두들겨 맞고 병신이 됐다 더니만 몇 년만엔가 여기를 찾아왔습디다.
아이고 동명이 아버지 아니요, 그랬더니만 멍청하게 나를 보면서 '아지매, 나 아파. 아파 죽것소, 그래서 본게 눈이 확 풀렸습디다. 시상에 고문을 얼매나 모질게 했으믄 지가 죽을라고 벽에 머리를 박다가 그렇게 됐다고 누가 글대요 차비를 줘서 보내면 여기가 머가 좋다고 또 오고오고 합디다. 아파트 앞에 쭈그리고 앉았는 걸 보면 하도 짠해서 차라리 안 왔으면 싶더니만, 요 몆 년은 통 얼굴을 못 봤소 시상에 법 없이도 살 사람을 먼 빨갱이 다고 …… 또 오고오고 합디다. 아파트 앞에 쭈그리고 앉았는 걸 보면 하도 짠해서 차라리 안 왔으면 싶더니만 요 몇 년은 통 얼굴을 못봤소 시상에 법 없이도 살 사람을 먼 빨갱이다고‥‥‥
우리 같은 사람들을 그 사람이 얼매나 끔찍이 생각했다 고라. 그런 사람 다시없소 죽은 사람들도 그라고"
'나도 상원이, 용준이 따라 가야제' 김영철이 헛소리처럼 늘 그렇게 중얼거렸다고 아주머니는 덧붙인다.
민중과의 약속이야 !
78년 12월 중순 경 새학기 준비 관계로 들불은 강한 전체 회의를 소집했다. 중요한 회의라 미리 철저하게 연락을 했는데도 약속 시간까지 나타난 사람은 몇 명이 안됐다. 약속 시간인 11시가지나 시간이 흐를수록 상원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갔다. 참석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 ! 형 어디 가요?"
상원은 급하게 뛰어 나가면서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라이."
나가자마자 상원은 택시를 집어타고 불참한 강학들의 집으로 달려갔다.
이 집 저 집을 돌아 상원은 집에 있는 강학 들을 데리고 아파트로 돌아왔다.
올 때까지 상원은 한마디도 말이 없었다. 방으로 들어서자 미리 와 있던 강학 들이 늦게 나타난 강학 들을 향해 여지없이 주먹을 날렸다.
"나쁜 놈들 ! 느그 들이 이러고도 민중을 위한다는 놈들이냐?"
한바탕 주먹과 욕설이 난무했다. 한참 이 모습을 지켜보던 상원이 자리를 정리했다. 때린 사함도 맞은 사람도 말없이 고개만 푹 수그리고 있었다.
한참 만에야 상원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놀러 왔는지 아니면 진정으로 역사 발전을 위해 뛰러 왔는지 차제에 분명히 해 두자. 사전 연락이 충분히 되었는데도 이런 식으로 지각하고 불참하는 일이 발생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민중과의 약속을 전제로 한 만남인데 이럴 수가 있는가‥‥‥ 철저하게 자기비판에 들어갔다.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누군가 이럴 게 아니라 오늘의 맹세를 글로 남기자고 제안했다. 상원도 가장 진실한 말을 남기 자며 고개를 끄덕 거렸다. 모두 찬물로 머리를 감은 후 자세와 마음을 정돈하여 각자의 각오를 적었다. 상원의 차례가 오자 상원은 잠시 눈을 갚고 생각한 뒤 또박또박 정성 들여 써나 갔다.
"죽기 위해 살자 ! "
상원은 운동에 관한 것이라면 사소한 것 하나일지라도 대충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혁명 사업과 조직적 규율을 운동가들끼리 하고 싶으면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대충 용납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혁명운동은 개인의 감정 상태나 조건의 변화에 따라 도중에 쉴 수도 있고 포기할 수 있는 '개인 사업'이 아니다. 혁명운동은 계급 사회의 인간이 살아 숨쉬는 한 객관 현실로부터 주어지는 역사의 강제이다. 혁명 운동가라면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노동과 피눈물과 근육의 땀방울로 찍혀진 민중의 명령서다.
혁명운동의 규율이란 상호간에 지키면 좋은 약속어음이 아니다. 그것은 해방의 열망으로 이글거리는 민중의 부릅뜬 눈동자 위에서 맺어진 엄중한 서약이자, 개인을 부숴 가며 준수해야 할 공동의 철칙이다.
상원이 분노한 것은 불철저한 동지들 개인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그의 분노는 민중과의 약속을 배신한 임무 유기 행위에 대한 분노이자 진실한 계급적 감정의 표출이었다.
등지의 오류에 대하여 대충 넘어 가구 예민한 문제는 무비판적인 '긍정 체계'로 말하여, 대립된 견해들을 부분적 장점들만 뽑아 절충하고 동지애와 '대동단결'을 강조하는 '좋은 품성'을 상원은 갖지 못했다. 아니, 철저히 배격했다.
상원은 자신부터 먼저 철저히 수양하여 모범을 보인 다음에야 타인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쁘띠부르주아적 도덕관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혁명 운동가 상호간에 잘못된 오류를 철저하게 비판함으로써 자기 자신도 부지불식간에 범해 왔던 오류를 동시에 비판하고, 서로가 용납하는 데서 열려지는 기회주의적 도피구를 민중의 이름으로 봉쇄시킨 것이다. 이를 통하여 그 조직은 더욱더 철저한 계급적 조직으로 발전하고 이러한 조직의 발전을 통하여 개인들은 점차 수준 높은 혁명 투사로 집단적으로 단련되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상원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일을 잘하기 위한 비판'으로, 동지적 결속을 고양시키는 비판으로 조직해 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상원이 머리를 감고 가슴팍을 모두어 쓴 '죽기 위해서 살자'라는 비장한 서약은, 향후 죽음인 줄 뻔히 알면서도 무장봉기의 한복판으로 서슴없이 나서는 그의 장엄한 출사표가 되었던 것이다.
연탄가스에 죽은 '노동자의 누나'
거리에 징글벨 소리가 울려 퍼지던 크리스마스 다음날, 박기순이 죽었다.
'노동자의 누나'가 죽어 버렸다.
야학 활동이 학생운동을 위축시킬지도 모른다며 우려를 표하는 선배들에게 '야학은 침체에 빠진 학생운동의 활성화와 과학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당차게 주장하며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심지어는 리어카 장사를 하면서 돈을 모아 들불을 탄생시켰던 박기순이, 몸바쳐 싸워 왔던 노동 해방의 그 날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뜬것이다. 후배이자 뛰어난 동지였던 박기순을 언 땅 속에 묻고 돌아오면서 그러나 상원은 울지 않았다. 울며 비탄에 빠지기에는 기순의 삶이 너무도 굵직했고 자신 앞에 남겨진 일이 너무도 엄중했기 때문이다. 같이 일했던 강학 들의 가슴속에, 수업을 받았던 노동자의 가슴속에 기순의 그 넉넉한 모습은 언제까지나 살아 있을 것임을 믿었기 때문이다.
기순이 떠나자 상원은 더욱 바빠졌다. 함께 준비했던 광주 공단 실태 조사 기획을 이제는 영일이와 다 해내야 했다. 광주 공단 실태 조사는 학생 운동권의 선진 학생들이 겨울방학 동안 노동자와 함께 생활하면서 꼭 역사 발전의 주체로서의 노동자계급을 과학적으로 인식하도록 상원이 기획한 것이었다.
이를 통하여 학생운동의 민중 지향성을 강화하고 확대시키려는 계획의 일환이었다.
들불의 아파트에 기거하면서 실태 조사를 했던 조사팀에게 노동자 문제야말로 우리 사회의 근본 모순임을 인식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게다가 상원은 이 작업을 통해 놀랍게 성장한 후배 박관현 과도 만나게 된다. 고무신을 끌고 아니며 말없이, 그러나 가장 열심히 일하는 박관현을 상원은 눈여겨보고 있었다. 삼 수를 하고 군대까지 갔다 온 가난한 늙다리 대학생, 고시 준비를 하는 고가 실태 조사를 거치면서 느끼는 갈등과 고통까지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당신들 빨갱이 아니요 ?
어느날 수업이 끝나고 상원은 학생들에게 자신의 방으로 올 사람이 없냐고 물었다. 학생들은 '뜬금없이 먼 소리다냐' 하는 표정으로 그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돈도 안 받고 자기들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긴 해도 자기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방을 같이 쓰자니 ?
다들 책을 챙겨든 채 엉거주춤 서 있는데 누군가 불쑥 앞으로 나섰다.
상원은 싱긋 웃음이 나왔다. 왜 야학에 나왔 느냐고 물었더니 머리를 긁적이면서 여기 오면 여자 애들과 놀 수 있을 것 같아서 왔다던 2기생 성섭 이였다.
"나가 같이 있어도 괜찮것소?"
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광주에 집이 있던 성섭이는 어머니를 떠나서 다음날 상원의 광천시민 아파트로 옮겨 왔다. 상원의 동생들도 노동자였지만 혈육과 달리 상원은 성섭이를 통해서 노동자들의 하루하루를, 순간 순간 감정을 세밀하게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가끔씩 반발하는 학생들도 생겨났다. 조금만 성급한 말이 튀어 나가면 꼭 그랬다 성당 교리리 실에서 옮겨와 교실로 쓰는 아파트 방에서 욕설이 들려 왔다. 상원은 교실로 갔다. 무엇 때문인지 명관 이가 열이 받쳐서 책상을 집어던지려고 하는 중이었다. 명관이는 1기생으로 가장 착실하게 나오는 놈이었다. 명관 이는 밝고 명랑해서 늘 웃음을 몰고 다녔다. 녀석이 몰고 다니는 건 웃음뿐만 아니었다. 싸움과 소란도 몰고 다녔다. 성질이 급한 탓이었다. 게다가 오기도 대단해서 한번 삐딱선을 탔다 하면 걷잡을 수가 없었다.
시뻘개진 얼굴로 명관 이가, 왜 그러느냐고 묻는 상원에게 대들었다
"당신들, 다 빨갱이 아니야?"
상원은 계속 그를 달랬다. 명관 이의 화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씨팔, 권리 ? 권리 좋아하네. 니네들이 가서 한 번 일해 봐라. 편한 밥 먹고 대학 다니는 놈들이 알긴 뭘 안다고 지랄이야."
상원은 버럭 소리를 질렸다.
"야 이 새끼야, 아가리 닥쳐 ! "
평소 상원의 화내는 모습을 보지 못했던 명관이 찔끔해서 뒤로 물러났다.
"너 이리 따라아왓! "
시끄럽던 교실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둘은 포장마차에 앉았다.
"술 할 줄 알제 ?"
명관 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원은 별 말이 없었다. 명관이는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상원은 지금 명관에게 가장 필요 한게 시간이 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명관 이는 지금 혼돈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지금까지 운명으로 받아들였던 노동자의 비참한 생활과 미래의 희망이 사실은 자본가의 착취 체제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았을 때, 어쩌면 명관이의 반발은 당연한 것일 터였다. 둘은 포장마차에서 한껏 기분을 내며 신나게 노래를 불러댔다. 나명관씨는 그날 밤을 이렇게 얘기한다.
"원래 형은 별로 말이 없는 사람이었어라. 말을 해도 다른 강학허고는 다르게 쉬운 말로 했어요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 멀라고 공장 꺼정 다님서 그 고생을 허는지 요상 시럽 기는 했어도 아무튼 친 형님 같았 제라. 그날도 영 말을 안하고. 내가 멀 잘못 허긴 헌 거 같은디 영 깝깝 헙디다. 허긴 먼 말을 했으면 속만 더 뒤집 혔것지만‥‥‥술을 꽤 먹고 어깨동무하고 노래부르고 그랬 구만이라."
관현 이는 반드시 들불로 온다
79년 새 학기가 되자 야학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지도 교수, 학생과, 상담 지도 관실, 학원 출입 형사, 부모 등을 통해 들어오는 삼증 사중의 압력은 들불을 위기로 몰아 넣었다. 압력에 못 이겨 그만두는 강학들이 생겨났다.
들불의 재정비가 요구되고 있었다.
상원은 관현을 생각했다. 실태 조산 때 말없이 묵묵하게 누구보다 앞서 일하던 모습, 진지하게 고민하던 모습, 그런 관현을 생각하는 것은 상원만이 아니었다. 들불은 관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관현은 쉽게 자신의 껍질을 깨뜨리지 못했다. 관현의 태도에 사람들이 초조해 하자 상원은 말했다.
"관현이는 반드시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그는 지금 자신과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다. 그가 아픔과 고통을 이기고 긴 터널을 지나올 수 있도록 우리는 최선을 다해 도와주던 기 다쳐야 한다. 그가 지금 당장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그를 위해서 삼고 초려가 아니라 십고 초려라도 할 것이다."
상원의 말대로 관현은 아픈 자기 확인을 거쳐 들불에 참여했다.
상원이 박관현이 결국은 들불 강학 으로 참여하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 데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그것은 관현이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더 이상 빼앗길 것 없는 빈농의 자식이자, 동생들이 노동자라는 계급적 토대의 일치에 대한 신뢰였다. 그것은 한편으로 자신만을 유일한 희망으로 쳐다보고 있는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기까지는 처절한 자기 투쟁이 필요하지만, 결국은 혁명적 삶의 길로 결단할 수밖에 없는 민중의 아들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리고 공단 실태 조사 과정과 그간의 실천 과정 속에서 확인한 그의 정직성과 성실성, 엄중한 책임감과 우직함, 관념성이 파고들 여지조차 없이 현실 상황과 밀착된 문제의식과 강한 실천성, 고통받는 민중을 결코 외면 할 수 없는 형제 애 적 동정심을 소지하고 있음을 정확히 파악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관현 이와 똑같은 조건 속에서 치열한 고뇌의 과정을 먼저 거쳐 나온, 풍부한 사회성과 경험을 체득한 선 험자 로서의 날카로운 안목으로 그를 꿰뚫어 보고 있었기 때문 때문이었다
박관현에 대하여 '십고 초려 하겠다'는 결의와 같이, 상원은 탁월한 일꾼이 될 수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확고한 믿음과 끈질긴 집념으로 달라붙어 운동 대열에 서게 하였다.
상원은 계속되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관현과 더불어 들불을 노동 야학으로 키워 내고 김영철이 주도하는 시민 아파트 주민 조직과 연대하여 들불을 노동 운동가 배출 소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강학과 학생들은 수업이 끝나면 자주 술자리를 가졌다. 그즈음 상원의 일기에는 소주 값이며 안주 값 몇백 원이 촘촘히 적혀 있다. 술을 마시면 흥건한 놀이판이 벌어졌다. 강학과 학생과 지역 주민이 하나가 되어 서툰 솜씨로 탈춤을 추기도 하고, 상원의 구성진 판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하고 즉석 마당극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들불은 하나로 단단히 뭉쳐지고 있었다.
내가 독선적인 것은 당연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학생들의 대부분이 정말 자기들이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 갔다. 많은 강학 들이 빠져나가면서 수업이 진행되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학생들은「노동의 역사」나 상원이 직접 만든 일반 사회 책을 교재로 자기들끼리 수업을 진행시켰다.
10·26이 터지자 상원은 유화 정세를 틈타 들불을 확대했다. 노동법을 정규 과목으로 채택하고 소그룹 형태고 야학 졸업생 모임을 묶어 낼 준비를 했다.
들불 야학은 침체된 학생운동에도 활기를 가져왔다.
전남대 운동권의 핵심 그룹은 들불의
만9년동안 썩어 묻혀진 80년대의 새벽별
윤상원 열사의 혁명적 복권!
박 노 해
피에 젖은 새벽 별
무거운 정적으로 횝싸인 오월의 한밤중, 분노와 공포에 불타는 수 백 개의 눈동자가 어두운 광장 저편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은 카빈 소총을 움켜쥐고 동지의 피로 물든 거리에 울려퍼질 계엄군의 탱크와 군화 발소리에 귀를 세우고 있었다.
전일 빌딩 옥상과 민원실 옥상에 설치된 캐리버 50과 LMC도 총구를 어둠 속으로 향한 채 결전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람도 시간도 심장마저도 멈춰 버릴 것 갈았다.
무기고가 있는 민원실 2층에서는 50여명이 창가마다 유리를 깨버린 창턱에 총구를 받치고 벽에 밀착해 있었다.
상원은 건너편에 서 있는 고등학생에게로 다가가 어깨를 꼈다. 떨고 있지는 않았다. 어둠 속에서도 녀석이 씩 웃는 게 보였다. 하긴 떨 리가 만무한 녀석이었다. 지난 21일 도청 탈환 때도 우박처럼 쏟아져 내리는 총탄을 겁내지 않고 뛰어다니던 녀석, 집에 가서 좀 쉬라고 하면 "놈들이 언제 쳐들러 올 지 모르는 판인디 잠이 오것소" 라며 신들린 듯 뛰어다니던 그런 녀석이었다.
상원은 주욱 한 바퀴를 돌면서 너무 창으로 노출이 된 사람은 벽으로 당겨 세우고 사격 자세를 고쳐 주기도 했다. 어디서 뭐하던 사람들인지도 서로 모르고 만난 지 비록 일주일 밖이 안되지만 혈육처럼 하나가 되어 버린 사람들 ! 하나가 되떠 함께 죽음의 항전을 기다리는 사람들 !
" 앗 ! 탱크다. 여기는 8조 ! 상황실 ! 탱크가 몰려온다 ! 저지는 무리다.
퇴각한다! ″
"여기는 유동 3거리 5조 ! 중과부적이다. 병력 지원을 바란다 ! "
" 본부 ! 여기는 서방이다 ! 화염 방사기다 ! 퇴각한다 ! "
무전기로 여기저기서 급박하고 처절한 부르짖음이 들려 왔다.
외곽에서는 간간이 포성이 울리고 가끔 조명탄이 벌겋게 피어오르다 하얀 연기를 뿜으면서 피시 시식 사그라져 갔다. 유령처럼 어둠에 감싸인 포가 와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가라앉곤 했다.
"드륵- 드륵 -드르륵 -"
M 16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외곽지역을 방어하던 혁명군과 기동 타격 대가 도청 안으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돌아온 병력은 나갈 때의 반도 되지 않았다 동지의 시체를 넘어 퇴각해 온 혁명군과 기동 타격 대는 차량과 화단 대를 은폐물로 삼아 도청 주위에 배치되었다.
"투다다닥‥‥‥‥
하늘에서 헬기 소리가 들리더니 조명탄이 터지기 시작했다.
조명탄의 창백한 불빛이 꽃으로 뒤덮였어야 할 5월의 텅 빈 화단과 엉성한 은폐물 뒤에 몸을 숨긴 혁명군의 초라한 뒷모습을 비추었다.
화단을 지나 도청 담을 넘어 상원의 눈길은 금남로로 향했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도 도로 군데군데 배인 핏물이 눈앞에 환히 보이는 듯했다. 아스팔트 위에 흥건한 그 피가 누구의 피던가 !
"죽을 사람만 따라 나오시오 ! "라고 외치며 차를 몰고 공수 대원 앞으로 돌격하다 한여름의 분수처럼 피를 뿜으며 쓰러지던 이름 모를 그 사내, 모든 것을 빼앗기고 살아가다 마침내는 목마저 떨어져 나간 채 금남로에 뒹굴던 작업복 차림의 몸뚱아리. 그렇게 되찾은 저 거리에 넘실대던 수십만 민중의 물결, 물결들.
상원의 머리 속으로 지난 열흘이 꿈결처럼 스쳐 갔다.
상원은 이를 악물었다. 그래, 지금은 다시 돌려주마.
그러나 그냥 주지는 않는다. 우리들의 피를 남겨 주겠다. 파쇼 권력이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을, 봉기한 민중들의 피를 이 도청에 남겨 주겠다.
상원은 손바닥에 난 땅을 바지 자락에 쓱 문지르고 다신 총을 쥐었다.
‘우리 운동권이 조금만 더 빨리 준비하고 대처했더라면 이렇게 무수한 죽음으로 끝내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온갖 아쉬움 들이 밀려왔다.
이제 내 나이 서른, 못다 한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았다. 들불의 형제들, 공장에서 만난 친구들, 그리고 비로소 전국적인 전망을 얻고 조직에 발을 디뎠는데 ……
그러나 상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열심히 싸워야 한다.
죽어서 살자 ! 이 전선에서 도망친다면 또 어디에 무슨 전선이 있단 말인가 !
상원은 총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금남로 쪽에서 꿈틀거리는 얼룩 무뉘 군복이 언뜻 눈에 보인 듯했다.
헬기가 고도를 낮췄다. 동시에 도청 바로 건너편까지 다가온 계엄군의 일제 사격이 시작됐다.
"드르륵 - 드르륵 - 드르륵·"
"탕탕 타앙 ! "
"꽝 ! 아악 ! "
총성과 비명, 수류탄이 터지는 파열음과 분홍빛 직선을 그으며 날아드는 예광 탄, 상원은 어둠 속의 적을 향해 카빈총을 그어 대기 시작했다. 이제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로지 적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적의 심장을 겨눠 방아쇠를 당길 뿐이었다.
죽여야 산다. 죽여야만 이길 수 있다.
저 파쇼 권력의 살인마들을 죽여야만 민중이 산다 !
한 놈이라도 한 놈이라도 더 죽여야만 한다. 우리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들의 목숨을 끊어 놓기 위해 죽이리라 ! 죽여야 한다.
상원은 미친 듯이 방아쇠를 당겨 댔다.
분수대와 정문 앞에는 갈수록 시체들이 즐비하게 늘어났다. 오늘 저녁만 해도 얼굴을 맞댔던 사람들이었다. 거리에는 노란 섬광이 반딧불처럼 반짝이며 떠다니며 비명소리, 총소리가 범벅이 되어 거리를 뒤흔들었다.
상원은 계속 적들을 향해 총을 긁어 댔다. 총의 약실 에서 탄피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빨갛게 달구어진 총신은 불 속의 쇠처럼 쉬쉭 거렸다. 적개심에 불타는 상원의 마음인 양 총신은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때 였다.
꽝- 하고 민원실 건물 바로 앞에서 수류탄이 터졌다.
폭음이 가시고 연기가 걷히자 피범벅이 된 젊은이의 시체와, 어깨가 날아가고 온몸이 갈가리 찢겨진 여자의 시체가 드러났다. 울컥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우리들의 동지를 걸레 조각으로 만든 놈들, 죽이리라 ! 죽이리라! 죽이리라 !
갑자기 총소리간 뜸해지더니 쩌렁 쩌렁한 스피커 소리가 들렸다.
"폭도들은 들어라 ! 너의 들은 완전히 포위됐다. 총을 버리고 투항하라 !
건너편 혁명군 쪽에서 분노한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 폭도오? 우리보고 폭도라고? 네놈들이야말로 폭도다!"
상원은 그 순간 통쾌한 웃음이 솟아올랐다. 그렇다. 너희들이야말로 폭도다 ! 우리 민중은 그걸 알고 있다.
"개새끼들 ! 지랄하고 있네. 어디 와서 죽어 봐라 ! "
어느 혁명군이 마이크 소리가 났던 쪽을 향해 악을 쓰며 M16을 자동으로 긁었다.
"죽일 테면 죽여 봐라 이놈들아 ! 네놈들한테는 죽어도 항복 못한다.″
상원은 한창을 바꿔 끼면서 사격을 계속했다. 잠시 식었던 총구가 다시 달아올랐다.
"빨리 날이 새야 쓸 것인디."
"그래야 사람들이 싸우러 몰려올 것인디……″
새벽까지만, 새벽이 올 패까지만 버티자.
그러나 새벽은 애가 타게 오지 않았다. 새벽은 처절하게도 오지 않았다.
광주 민중의 새벽, 민중 해방의 새벽, 새로운 긍지와 희망으로 둥실 떠오르는 민중 권력의 새벽은 아직 먼 것이다 아니 그들이 그렇게 기다리던 새벽은 그들의 피를 빨아 마시며 비로소 뒤척이고 있었다.
"아악 ! "
고등학생이 비명을 내지르며 털썩 쓰러졌다.
2층 난간에 나가 엎드린 채 사격 중이던 상원은 높은 포복으로 그에겐 다가갔다. 머리를 안아 올리자 벌써 힘없이 축 늘어졌다. 죽어서도 적을 노려보듯 일그러뜨린 얼굴로 감지 못한 두 눈을 상원은 손으로 쓸어 내렸다.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만들려고 노력했던 세상을 그래도 너는 면 칠이나마 느끼고 갔으니, 어린 넋이여, 슬퍼 말아라. 도청 바닥을 물들인 너의 피는 민중의 권력을 탈취하는 낱, 다시 살아나리라. 미쳐 춤추며 민중의 나라에서 살아나리라.
상원은 다시 빠른 포복으로 제자리에 돌아와 사격 자세를 취했다.
아 그때였다 !
적의 총탄이 퍼부어지기 시작했다.
"어이쿠! "
상원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저졌다. 옆구리였다. 본능적으로 옆구리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M16 총탄인 관통하여 뻥 뚫린 구멍으로 창자가 뭉클뭉클 쏟아져 나왔다.
"아 앗 ! 윤형 ! 윤형 ! "
근처에 있던 김영철과 이양현이 달려왔다. 상원은 이미 숨이 멎어 있었다. 김영철과 이양현은 상원의 시체를 근처에 있던 이불 위에 누이면서 그날 밤 함께 나누었던 말을 떠올렸다.
"우리 다시 태어나도 이렇게 삽시다. 지금 광주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10일 간 오로지 민중 봉기를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신들려 뛰던 사람 !
자발적인 민중의 봉기를 혁명적으로 이끌어 가고자 혼신의 힘을 다 짜내던 사람 ! '죽기 위해 살자' 며 뒤돌아보지 않고 철저하게, 철저하게 전진하던 사람! 해파(海跛) 윤상원은 적들의 총탄에 창자 하나 하나까지 다 쏟아진 채 이빨을 앙 다물고 그렇게 죽어 갔다.
그날 밤 광주 사람들은 아무도 잠들지 못했다. 부끄러움 때문에, 혹은 슬픔 때문에, 분노 때문에 ‥‥‥
이불깃을 눈물로 적시며 사람들은 새벽만 기다렸다. 새벽이 오면 나도 나가서 싸우리라. 바지 자락을 붙드는 어머니의 손길도 뿌리치고 아내의 눈물도 뿌리치고 나도 나가서 싸우리라 ! 싸워서 쟁취하리라 !
그러나 새벽은 좀처럼 오지 않았고, 피빛으로 밝아온 새벽은 이미 적의 것이었다.
어슴프레 밝아 오는 항전의 새벽 위로 '피에 젖은 새벽 별'이 빛나고 있었다.
혁명 투사 윤상원 !
남한 혁명 운동사에 빛나는 80년대의 새벽 별 !
그는 민중 봉기의 한가운데 서 이렇게 죽어 갔다.
이빨을 악물고
창자를 드러 내놓은 채
시커멓게 온몸이 탄 채로
다 쏘지 못한 탄창을 품고서
그렇게그렇게 봉기의 한가운데서
상원은 장렬하게 죽어 갔다.
광주 무장봉기를 이끌며
민중 권력 탈취의 신들린 화신으로
80년대 남한 혁명운동의 찬란한 새벽 별이 되어
민중의 가슴속에 타오르는 혁명의 불꽃으로
민중 봉기의 한가운데서
서른 살의 장엄한 목숨을 거두다.
1980년 5월 27일 4시 40분 경.
그리고 만9년이 지났다.
만 9년 세월 동안 윤상원은 망각 속에 썩어 묻혀져 왔다.
산 자들의 비겁 때문에,
피의 봉기를 두려워하는 자들 때문에,
우리들의 무능과 불철저함 때문에.
9년 동안 통곡하며 썩어 가던 상원은, 자신의 몸에 쌓인 망각의 흙을 털고 일어서고 있다.
이빨을 앙다물구 한 손으로 터져 나온 창자를 거머쥔 채, 한 손엔 죽는 순간까지 꽉 움켜쥐고 있던 총을 치켜들고서.
상원은 그렇게 우리 앞에 다시 서고 있다 !
어린시절
잔치에 바쳐질 돼지꿈
"요상도 혀라. 무슨 꿈이 이럴까이."
"먼 꿈인디 그랴"
"아 글씨 돼지가 방에 네 마리, 마당에 세 마리나 우글거리는 꿈을 꿨단 말이요
말이요."
건넌방 문이 벌컥 열리면서 중녀의 여인네가 활짝 웃는 얼굴을 내밀었다.
"아가. 그거 태풍꿈 히다 ! 아들 셋이 딸을 넷이나 둘란 갑다. 첫 애긴께 아들이나 쑥 뽑아야 쓸 것인디."
새댁은 빨갛게 얼굴을 붉혔다.
"근디 니가 큰자식 날란 모냥 이다. 돼지야 원래 잘 키워서 잔치 상에 올리는 거 아니냐. 그려 이왕 고생해서 낳는 거 나랏일에 바칠 큰 인물이나 하나 낳그라.
빨간 얼굴을 더 빨갛게 물들이며 새댁은 총총 부엌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로부터 열 달 뒤 아이가 때어 났다. 웬일인지 아이는 울지 않았다. 숨도 쉬지 않는 것 같아 엉덩이를 두드리고 별 짓을 다해도 허사였다. 3시간쯤 지나서야 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그 집 담장을 넘어 골목길을 울렸다. 예쁜 고추를 단 사내 녀석이었다. 호적에는 이름을 윤개원으로 올려놓고 집에서는 상원이라 불렀다.
상원은 광산군 임곡면 신룡리 천동 에서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화순에서 탄광을 경영하는 탓에 여느 시골집처럼 궁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상원이 어러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작은댁들을 분가시키고 나자 손에 쥔 차조처럼 재산이 솔솔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상원은 그러거나 말거나 곱슬머리를 휘날리며 아이들과 어울려 산으로 들로 쏘다녔다. 넘어져서 무릎이 깨져도 상원은 잘 울지 않았다. 툭툭 털고 일어나 씩 웃으면 그뿐이었다. 상원은 부모님과 할머니의 끔찍한 사랑 속에 무럭무럭 자라났다. 언젠가 차려질 허기진 민중의 큰 잔치에 바쳐질 한 마리 돼지가 되고자‥‥‥‥
비례의 법칙이 안 지켜지는 나라
우리 민족의 현대사가 그렇듯 언제나 상원의 앞에는 놀라운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4·19가 그랬고 5·16이 그랬다, 그런 날이면 상원은 일기장의 하루 칸이 넘쳐나도록 흥분해서 일기를 썼다.
"형과 언니들이 독재정치와 싸워서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군인들인 혁명을 일으켰다. 군사들이 차지한 나라는 군사들이 정치를 한다. "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를 더 좋아하는 밝고 쾌활한 소년이었지만,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을 만큼 대단히 성실했기 때문에 공부도 잘했다. 할아버지의 둘째 부인으로 자식이 없었던 '큰방 할머니는 친자식보다 더 상원이를 아껴 주었다. 다른 아이들이 꼴을 벤다, 쇠죽을 쑨다 하며 농사일 거들기에 바쁠 때에도 부모님과 할머니는 상원이가 흙을 묻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어린 상원은 일하지 않는 자신이 부끄럽고 미안했다. 어린 상원은 '나도 일을 해야 하는데, 왜 나는 일을 안 시킬까?''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부모님의 뜻인데 일하는 대신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하고 일기를 적어 미안함을 달랬다.
상원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일기를 써왔다. 그가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보위상 기록을 남기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전까지는 줄곧 일기를 써왔다. 상원은 일기를 쓰며 자기 생활을 뒤돌아보고 반성과 성찰을 통해 전진적인 삶으로 자신을 추동해 나갔다. 어련서 부터 써온 일기 버릇을 통하여 상원은 훗날 혁명 운동과 조직 생활 속에서도 엄격한 자기비판과 사상 투쟁을 게을리 하지 않으며 성실한 자기 발전을 거듭해 나가는 특성을 보이게 된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상원은 장손으로선 가문 부흥의 일대 사명을 안고 도시로 나왔다. 처음엔 하숙을 했다. 아무리 돈이 없어도 자식 하나는 기죽이지 않고 가르치겠다는 아버지의 눈물겨운 배려였다. 그러나 애정도 돈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논을 팔아 배우는 처지라 상원은 자취방으로 옮겼다.
삼류라는 사레지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상원의 고민은 시작되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잘 알기 위해 아무리 바빠도 신문을 촘촘히 읽던 상원은 사춘기 소년답게 모든 일에 궁금중을 느끼고 불의 앞에 흥분했다. 상원은 날마다 일기를 적었다.
삼성 재벌의 사카린 밀수 사건을 보고 분노한 마음, 시장 아주머니나 신문팔이 소년에 대한 끈끈한 정, 농번기에 시골을 가지 않으면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느꼈던 죄책감 등을 썼다. 어느 날 그는 또 이렇게 썼다.
"수학엔 비레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우리 세상엔 왜 비례의 법칙이 지켜지지 않는가. 부자는 손가락 하나 안 놀리고도 떼돈을 벌고 시장 사람들같이 없는 사람들은 하루종일 몸 뚱일를 굴려도 없이 산다. 움직인 만큼 벌면 안 되는가. 이 세상이 환멸 스럽다."
게다가 광주는 도시였다. 다같이 그럭저럭 못살던 시골과는 달랐다. 돈 쓰는 데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는 부잣집 아이들, 화려한 집들, 그는 열등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듯한 도시에 정이 가지 않았다. 가난한 농촌 출신 학생, 그것도 광주 제일 고 같은 일류가 아니고 삼류 학생이라는 열등감이 그에게 그늘을 드리웠다. 상원은 이 풀리지 않는 그늘을 벗어나고자 자꾸 밖으로 나돌았다. 자기와 비슷한 고민에 바진 친구들과 격렬한 입 씨름을 하기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 하고 무전여행을 하기도 했다. 담배를 피우고 잘 먹지도 못하는 술도 마셨다. 부정한 세상에 반항하고 도전하고 싶은 욕망에 상원은 입시 공부에만 처박히긴 싫었다.
상원은 고교 시절의 마지막 무렵에 대통령 선거를 겪었다. 상원은 박정희가 부정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을 분노로 지켜보았다. 대학생들의 격렬한 부정선거 규탄 대회에 끼어들어서 시위를 하고 난 상원은 소주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한 잔에 시뻘겋게 올랐다. 상원은 작은 거울을 불꽃튀는 눈동자로 들여다보며 자신만은 부정하게 살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했다.
대학시절
'끝없는 아리아'
71년에서야 상원은 전남대 정치 외교 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삼수를 거친 제법 늙은 학생이었지만 고향 사람들의 부러움 속에서 상원의 대학 시절은 시작되었다.
상원은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연극만에 가입했다. 수업은 둘째치고 상원은 연극 반에만 매달렸다. '끝없는 아리아'나 '멕베드' 같은 것들을 무대에 올릴 때면 상원은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다. 끝장을 보지 않으면 직성이 안 풀리는 성미였다. 온몸에 팜을 뚝뚝 흘리며 일하는 그를 보면 누구라도 함께 일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연극이 끝나면 흥건한 술판이 벌어졌다. 막을 내린 허탈감과 해냈다는 뿌듯함 속에서 젊은이들은 새벽이 오도록 술잔을 기울였다. 상원은 소주 몇 잔에 얼큰히 취기가 올라서 노래를 불렀다.
"바람 부는 언덕을 넘어서 가자. 비 내리는 벌판을 뛰어서 가자. 구름보다 더 높은 하늘 위에는 마음보다 더 고운 무지개 핀다. "
그가 연극에 미쳐 있는 동안에도 세상은 숨가쁘게 굴러갔다. 10월 전태일 열사의 분신을 계기로 전국이 달아 오르구, 학내에서 는 박정희 군사독재에 항의하는 시위가 잇달았다. 상원도 시위 때면 열심히 참가했다.
상원은 아직 민중들의 고통의 근원이 무엇인지, 이 사회의 모순과 박정희 군사파쇼와의 관계가 무엇인지, 평등과 민주주의가 실현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이 부재하였다. 아직 그는 시위의 주동자로 나설 준비가 안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위자들이 외치는 주장이 정의와 진리라고 생각하였기에 상원은 시위에 열심히 참가하였다. 상원은 시위가 발생하면 '문리 대생 모여라'고 외치며 대열의 맨 앞에서 스크럼을 짜고 주동자의 선창에 따라 구호를 외치고 힘차게 노래를 불렀다.
자신은 아직 시위의 주동자로 나설 만큼 논리적 인식과 확신은 없지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정도의 실천과 아는 만큼의 행동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완벽하게 논리적인 정리와 이론 체계가 갖추어지기 전까지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관적으로나마 느끼는 진리일지라도 지금 할 수 있는 것만큼은 회피하지 않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를 행동으로 옮겼다 상원은 자신보다 먼저 진리와 세계관을 확보하고 선구적으로 시위에 나서는 주동자들을 진심으로 존경했다. 연극 반일에 미친 상원의 학과 성적은 엉망이었고 학내 시위에 참가하기는 했지만 점차 혼란에 빠져 들어갔다. 왜 대학에 온 것인지, 왜 사는지, 왜 이렇게 정치와 세상이 엉망인지 알 수 없었다. 연꽃으로 뒤덮인 교내 호숫가를 거닐면서, 최루가스가 자욱한 학교를 오가면서 상원의 고민은 날로 커졌다. 2학년 여름 상원은 결국 휴학계를 내고, 말았다. 햇볕에 새까맣게 찌들며 농사를 짓고 논까지 팔아 가며 공부를 시켜 준 부모님을, 바빠서 품을 사더라도 자기에게는 공부하라며 일을 말리던 부모님을 그는 잊을 수 가없었다. 군대를 갔다 와서 고시 공부를 하기로 결정하고 그는 육군 하사관으로 입대하고 말았다.
김상윤을 만나다
75년, 상원은 학교로 돌아왔다. 경북 상주에서 하. 사관으로 근무했던 3년은 상원을 조급한 젊은이에서 풍부한 경험을 지닌 사회인으로 단련시켰다. 곱슬 거리는 짧은 머리, 군사 훈련으로 단단해진 체격, 부끄러워하던 하얀 피부가 건강한 갈색으로 변해서 그가 캠퍼스로 돌아왔을 때, 학교는 자기다 훨씬 더 많이 변해 있었다. 학교를 몇 시간인고 걸어도 아는 얼굴을 만나기가 힘들었다. 74년의 민청학련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학교를 떠났거나 유신체제의 폭압을 견디지 못한 젊은이들이 상원처럼 자포자기 속에서 군대로 떠난 까닭이었다. 연극 반 시절의 자유와 낭만조차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상원은 광주에 올러와 직장을 다니며 야간 학교에 다니고 있던 두 동생과 자취를 하며 썰렁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오로지 공부하는 것밖에는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상원은 외교관이 되기 위한 고시 준비로 코리아 헤럴드를 수복이 쌓아 높고 영어를 공부하거나, 외교관이 되려면 테니스 정도는 칠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테니스를 배우기도 하며 학교에 적응해 갔다. 가끔씩 연극반에 들러 후배나 친구들이 연극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연극에 대한 열정을 달래는 정도였다.
어느 날 연극 반 친구 석균이와 철황이가 사람을 데리고 상원의 자취방을 찾아왔다. 상원은 조금 마르고 진지한 얼굴의 그가 누군지 담 박에 알아차렸다. 석균이가 늘 얘기하던 김상윤 이었다. 상원은 눈을 빛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감옥에 갔다 온 사람 같지가 않았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그런 고초를 격으 면서 남을 위한 삶에 뛰어든 건지 궁금했다. 네 사랑은 좁은 자취방에 머리를 맞대고 앉았다. 상원은 상윤에게 무엇 때문에 민청련에 참가했는지 물었다. 소주잔을 앞에 놓고 상원은 귀찮으리 만치 질문을 해댔다. 대졸 자의 기득권과 노동자의 생활, 전태일의 분신과 노동운동, 또 이 땅의 분단에 대해서, 상원의 호기심은 지칠 줄을 몰랐다. 그 많고. 다양한 질문에 대해서 김상윤은 하나하나 성실하게 대답했다.
눈을 빛내며 이것저것 캐물어 오는 상원에게 김상윤은 호감이 갔다. 진지하고 시골 태생답게 순박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솜처럼 유연하게 사람을 빨아들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외무 고시를 위한 책으로 묵직한 가방과 테니스 라켓을 들고 다니던 상원은 김상윤과 만나면서 다시 자기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몇 푼 안 되는 봉급을 받으려고 새벽부터 공장으로 줄달음치는 어린 동생들, 해가 뜨자마자 논에 나가 뼈빠지게 일하고도 아픈 몸에 약 한첩 못쓰는 부모님, 가난하고 무권리한 무수한 이웃들, 상원은 결국 코리아 헤럴드와 테니스 라켓을 집어 던졌다.
상원은 김상윤이 이끌어 가는 소모임에서 집중적인 학습을 받기 시작했다.
김현준(현 전교협 서울 사무국장), 김영종(헌 사계절 대표), 박몽구(시인)등이 모임의 멤버였다. 삼수 까지 한데다 군대를 갔다 와서 뒤늦게 운동에 뛰어든 상원이었지만 어려움을 내색 않고 학습에 열중했다. 6개월간 집중적인 학습이 이루어졌다. 매일매일 책을 읽고 세미나를 가졌다. 6개월 내 내 상원은 방안에 틀어박혀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도 모르고 공부만 해댔다. 기본적인 한국 현대사부터 농업 문제, 노동 운동사, 정치경제학, 제3세계의 이해, 페다고지에 이르기까지 당시 구할 수 있는 책은 모두 읽었다.
학습할 장소가 마땅치 않아서 주로 상원의 집에서 학습이 이루어졌다.
공장 일이 끝나면 야간 학교에 갔다가 파김치가 되어 들어오는 동생들에게 미안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동생들은 날마다 변해 가는 형이 조금은 짜증스러웠다. 형과 친구들이 토론하는 얘기를 들으면서 어렴풋이 형이하는 일이 옳은 것임은 알 수 있었다. 그런나 집에 돌아오면 누을 자리도 없게 자리를 차지 하구 더구나 장남인 형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따른 일만 하는 게 야속하기도 했다. 당장 자신들은 고등학교도 변변히 못 다니고 야간 학교를 다니는 형편 아닌가. 형이 어서 졸업해서 훌륭한 사람되기만 손꼽아 기다리던 동생들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동생들은 저러다 형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하나 가슴을 졸였다. 딴 공부를 해서 그렇지 언제나 자상한 형이었다. 겉으로 말은 안 해도 자기만 대학이 다니는 것을 굉장히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일에 지친 동생들이 웬만한 짜증을 부려도 형은 다 받아 주었고 자전거 배달을 하던 둘째 정원 이가 다리가 퉁퉁 부어 들어오면 밤새 다리를 주물러 주기도 하는 형이었다.
실천하지 않는 학습은 싫소
당시 전남대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운동 조직이 거의 박살난 상태였다. 전남대 운동권의 리더였던 김상윤은 소모임을 통해서 운동 조직을 확산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써클 위주의 조직이었으나 써클 형태는 위험부담이 크고 조직 확산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김상윤은 소모임을 통한 세포 분열식 확산을 택하기로 한 것이다. 김상윤은 학습을 위한 사회 과학서의 보급과 운동권의 연결을 위해 녹두 서점이라는 사회 과학 서점을 열었다.
이 당시 광주 지역은 농민운동과 학생운동, 문화 운동, 재야 운동 등의 쁘띠 부르주아적인 운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노동운동 역시 태동하고 있는 중이었다.
따라서 당시 광주 운동권의 중심적인 과제는 여기저기 분산되어 떠도는 활동가들을 혁명적 노동운동의 방향으로 조직화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하여 우선 우리 사회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파악하고 향후 활동의 방침을 결정하기 위한 과학적 인식의 무장이 시급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광주 지역 최초의 사회 과학 서점인 녹두 서점의 개설은, 사회 과학 서적을 보급하고 학습과 토론을 활성화시키는 근거지가 되었다. 또한 광주 지역 활동가들의 사랑방이자 '조직 자' 역할을 수행하였다.
곧 녹두 서점은 상원과 소모임 1기 출신들이 중심이 되어 운동권의 활동 인자를 배출하는 양성소가 되었다.
6개월간의 학습을 끝낸 후 상원은 이미 전남대 운동권의 핵심 인자로 떠오르고 있었다.
상원은 학습을 계속하면서 연극 반을 이끌었던 경험으로 문화패 '광대'를 만들었다. 멋에 들떠 있었던 예전과 달리 상원은 민중극에 심취했다. 문화패 광대는 광주 지역의 문화 운동을 활성화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상원이 부르는 '소리의 내력'은 일품이었다. 흥만 나면 그는 어디서나 연극 쟁이답게 온몸으로 구수한 노랫가락을 뽑아 올렸다.
시간이 흐르자 상원과 그의 스승인 김상윤 사이에는 점차 이견이 생기고 논쟁이 시작 되 었다.
김상윤이 조직 확대를 위해 우선 학습만을 강조한 반면 상원은 당면한 투쟁 전선에서 고립된 학습이란 오히려 투쟁력을 약화시킬 뿐이라고 생각했다.
상원에게 김상윤은 여전히 존경하는 선배였지만 그렇다고 이견이 있는 것까지 덮어두고 따라갈 수는 없었다. 상원은 독자적으로 유인물을 만들어 뿌리곤 했다. 77년 봄, 상원은 실천하지 않는 학습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시위를 주도할 계획을 세웠다. 오히려 싸움을 통해 조직도 확산시킬 수 있다고 그는 믿었다. 그러나 한께 주도하기로 했던 학생들이 도중에 이탈하는 바람에 시위는 무산되고 말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놓고 훗날 그가 광주 봉기의 샛별로 떠오를 수 있었던 조건이었다고 달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광주 봉기를 혁명적으로 지도할 수 있었던 것은 '얼굴이 안 팔려서' 예비 검속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언제나 투쟁 전선의 정면에 서 있으려고 하는 기본적인 자세 때문이었다.
상원의 운동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이처럼 '이론과 실천'에 대한 변증법적인 관계를 계급적 직관에 의해 체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원은 누구보다도 학습에 열심이었고 혁명 이론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면한 실천을 방기한 채 막연히 해 두어야 할 필수적 무기로서의 이론 학습에 대해서는 분명히 반대한 것이다.
이론 학습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혁명가의 학습은 구체적 목적성에 기초하여 당면 실천과의 정확한 역량 배분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혁명 운동가의 목적은 기존의 지배계급을 타도하고 노동자 계급을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재조직 화함으로써 진정한 인간 해방을 이룩하는 데 있다. 따라서 그의 모든 관심과 노력과 행동은 '투쟁'에 있다. 투쟁을 잘하기 위한 조직화, 투쟁을 잘하기 위한 사상 투쟁으로 그의 구체적 실천 행위는 조직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혁명 운동가는 단 한시도 당면한 '투쟁 전선'에서 눈을 떼어서는 안 된다. 설사 그 시대가 혁명운동의 '선전 단계' 일지라도, 그가 설정한 긴급한 과제가 '이론 준비' 일지라도, 그가 맡은 임무가 '조직 재건' 일지라도 그의 시선은 당면한 투쟁 전선으로 모두 어 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론 학습은 그 이론의 출발점이자 귀결점인, 생생한 현실 계급투쟁으로부터 무게중심을 제공받지 않으면 안 된다. 객관 현실에서 진행 중인 계급투쟁을 막연히 밀쳐둔 채 '단계적으로' 우선 학습부터 하고 보자고 할 때, 그 학습은 무게중심을 상실하고 동력이 끊어진 채 캄캄한 불가지론과 관념의 안개 바다 속을 떠돌다 좌초하는 무력한 배가되고 말 것이다. 혁명 운동가는 현실 투쟁 속에서 부딪치는 난관을 이론적인 문제의식으로 끌어올리고 과학적 이론으로 해명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선 안 된다. 그리하여 그의 시선은 항상 투쟁 전선에 못박혀 있고, 그의 촉각은 계급투쟁의 한 중심부에 뻗쳐 있기에, 그의 이론 학습과 연구 작업은 살아 펄떡이는 현실성과 긴장감을 유지하는 '동일한 전선 위의 또 하나의 투쟁으로 되는 것이다.
마지막 효도입니다
마지막 효도
상원은 농사 짓는 부모님이나 노동을 하는 동생들을 볼 때마다 미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다고 고생하는 가족만을 위해 자신이 돈을 버는 기계로 나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기엔 상원의 걸음이 너무 튼튼하게 내디뎌져 있었다. 상원은 자기를 위해 희생한 가족에게 최소한의 갚음이 뭘 까를 생각했다. 열심히 운동을 하는 것이 가장 큰 효도일 테지만 부모님이 당장 그걸 이해하실 수는 없을 터였다. 그는 자기 일을 몇 달 뒤로 미루고 취직을 결정했다. 대학을 졸업한 아들이 첫 월급 받는 모습만이라도 보여 드리자고 생각했다. 상원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마지막 효도라고 생각하고 취직시험을 보았다. 주택은행 서울 봉천동 지점으로 발령 난 상원은 직장 생활을 보았다. 주택은행 서울 봉천동 지점으로 발령 난 상원은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서울 봉천동 지점으로 발령 난 상원은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봉천동은 그의 부모와 같은 시골 사람들이 피폐해진 농촌을 떠나 이주한 인민 지역이었다. 좌판장사, 껌팔이, 지게꾼들이 태반인 빈민촌에 살면서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다시 한번 다짐할 수 있었다. 은행이란 묘한 곳이었다. 하루에도 어마 어마한 돈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모습을 보면서 상원은 자본주의 체제가 얼마나 불합리한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근무가 끝나면 상원은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당시 서울대 75학번들이 주축으로 활동하던 겨레터 야학 등을 찾아다니며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구체화시켰다. 그는 앞으로 본격적인 노동운동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가난한 민중의 집안에서는 한 명의 선택 자가 전 가족의 집중 후원을 받게 된다.
그는 집안 식구들의 고달픈 노동과 희생 위에서 집안의 희망을 걸머진 기둥으로, 대를 이은 가난과 천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사' 떠오르게 된다. 상원 역시 그러했다.
그러나 집안 식구들의 고달픈 노동과 피눈물 위에서 대학을 다닌 그가 마침내 성공하여 가족을 위하여 일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커다란 배신행위이다.
그는 자신을 뒷받침해 준 서너 명의 가족들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있을지 모르나 수만, 수천만의 민중 형제들을 고통과 몰락으로 몰아넣는 신 식민지 국가 독점 자본주의 체제의 재생산에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원은 자기 가족을 눈물로 배신하고, 격노와 원망으로 가득 찬 가족을 포함한 전 민중의 진정한 희망의 기둥으로 나서기 위한 예비를 해 나갔다.
후배들의 발길에 채여
78년 7월, 서울의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광주 후배들 몇 명이 그를 찾아왔다.
송기숙 교수 등이 국민 교육 현장의 군국주의적이고 비민주적인 점을 비판했다가 연행된 뒤 이에 동조하는 싸움을 주도하여 수배를 당한 후배들이었다. 후배들은 감칠 맛 나는 전라도 사투리로 지금까지의 상황을 침을 튀겨 가며 일일이 얘기해 주었다. 갈 것도 없이 선배 하나만 믿고 서울로 찾아온 후배들에게 상원은 지낼 곳을 마련해 주고 월급을 다 털어 성심성의껏 챙겨 주었다.
그러나 어쩐지 상원은 그들 앞에서 당당해질 수가 없었다. 새까맣게 그을린 후배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도 없었따. 그들이 땡볕 더위 속에서 최루가스를 맞아가며 시위를 주도할 때 나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나, 어떤 핑계라도 비겁하다. 마지막 효도라는 것도 이제 더 이상은 비겁하기 짝이 없는 도피가 되고 만다.
상원은 투쟁하는 후배들이 자신을 걷어차는 발길질을 온 가슴으로 받았다. 그 발길질은 민중의 발길질이었다.
장강의 앞 물결이 뒷 물결에 밀리는 것처럼, 새롭게 진보하는 투쟁의 물결과 후배들의 비판을 정직하게 가슴으로 맞이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이 부정과 비판을 회피하고 자기 합리화하려는 순간부터 그는 반동의 대오로 기울기 시작하는 것이다.
상원은 후배들을 통한 민중의 발길질을 무릎꿇고 받으며 결단하였다.
그에게는 당장의 생계 보장도 없었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뚜렷한 대안도 없었다 그럼에도 상원은 그 따뜻한 자리를 박차고 나서기로 하였다.
자신이 처한 그 자리가 안주와 부끄러움의 자리라면, 나날이 살아 전진하는 발걸음을 무겁게 가라앉히는 침몰의 자리라면, 그의 혁명 성과 투쟁의 의욕을 꺾어 나가는 굴절의 자리라면 지금 당장 과감히 박차고 나서라!
그 자리가 그대의 사고와 혁명 성을 제약하고 있기에, 날이 갈수록 혼란과 번뇌의 안개 바다 속으로 빠져들게 하기에, 그대의 건강성과 모험심을 좀먹어 소심한 생활인으로 주저앉히기에, 그 절망의 뿌리인 생활의 토대를 과감히 깨뜨려라 !
한시라도 빨리 그 자리를 일떠나서라 !
그것이 너의 혁명, 너의 생명의 새순이다 !
상원은 부질없는 고뇌를 끊어 버리고 훌훌 털고 호남선 열차에 몸을 싣고자 했다.
다음날 상원은 사표를 제출했다. 벙긋 웃음까지 흘리고 있어서 직장 동료들은 그가 더 좋은 회사로 옮기는 줄 알고 반은 선망으로, 반은 진정으로 축하해 주었다. 어디로 옮기냐고 물어도 상원은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다시는 전설에서 비켜나지 않으리라 ! 사표를 던지고 나오면서 그는 하도 푸르러서 눈이 시린 하늘을 보며 가슴에 새겨 넣었다. 잠시 부모님의 주름진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부모님께 온 정성을 기울여 편지를 썼다.
" ‥‥‥‥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부모님께서 저를 이토록 길러 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평생을 다 바쳐 노력하여도 부족하겠지만, 유신 독재가 판치는 우리 나라 상황은 저를 평범한 월급쟁이로 살아가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이에 굴하지 않고 민족이 처한 현실에 뛰어들어가 민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조그마한 힘이라도 보태려는 볼초소생의 마음을 용서하셔서 차라리 참된 효도의 길이라 여겨주소서,"
한 혁명가가 거쳐온 생의 역정에 대한 최종적 평가는 그가 그 속에서 혁명 운동에 필요한 자양분과 경험들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흡수하여 활용할 수 있는가 이다. 상원은 7개월의 직장 생활을 통하여 자본주의히의 부르주아지와 소시민들의 생활과 대중적 정서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폭넓은 사회성과 실무적 능력을 부분적으로나마 훈련받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다시 서자 프롤레타리아트로 !
오매 피곤허다
"국수를 먹고 나니 나른하고 조금은 졸립고 하는 일이 더없이 짜증스러웠다. 1시간 1백 20원, 이걸 생각할 때마다 기계를 부숴뜨리고 싶었다. 이건 아마 나의 감정이리라. 더 고된 일을 다른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해내고 있지 않은가."
시골에 살았어도 손에 흙 한번 묻혀 본 적이 없던 상원에게 공장 일은 너무 힘들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때려 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그는 하루 열 시간 노동에 1천2백 원을 받고도 묵묵히 일하는 다른 노동자들을 보며 자신을 '공장 체질'로 개조시켜 나갔다.
상원은 78곁 7월 말 광주에 내려와서 잠깐 녹두 서점에서 일했다. 노동 운동을 하겠 다고는 했지만 어떤 일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방향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상원은 일단 현장 생활을 경험하기로 하고 광천 공단의 한남 프라스틱이라 회사에 일용직 으로 들어갔다. 상원은 노동자들의 감정, 생활, 근로조건들을 온몸으로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일이 끝나면 하도 피곤해서 술 먹을 생각은커녕 쓰러져 자고 싶었으나 동료들과 술자리를 같이 했다. 하루에 2백50만원씩이나 순수익이 남는데도 임금으로는 6만원도 안 쓰는 사장 놈을 함께 욕하기도 하고 스물이 넘은 나이에 공부가 하고 싶어서 검정고시를 하는 노동자의 인생살이에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일이 힘들면 힘들 수록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오기가 솟았다. 상원은 날마다 일기장에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적어 나갔다.
한남 프라스틱뿐만 아니라 다른 사업장에 대해서 노동자가 얼마인지, 노동조건이 어떤지, 임금 수준은 어떤지 조사해 나갔다. 드러눕기가 무섭게 곯아떨어지는 고된 노동 속에서 상원은 프롤레타리아로 다시 서서 힘찬 전진의 걸음을 시작하였다.
광천 시민 아파트
광천 공단에 위치한 광천 시민 아파트는 말이 아파트지 좁은 복도를 사이로 작은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빈민을 위한 집단 수용소와 같은 곳이다.
당시에는 나무를 땠을 정도였고 일용 노동자나 도시 빈민들이 주로 거주했다.
1978년 10월 말 상원은 이 아파트로 이사를 하였다. 무슨 일에든 전부를 쏟아 부처 야만 시원한 그의 기질 탓이었다.
한남에 입사한 얼마 후 상원은 후배인 박기순을 만나게 되었다. 박기순은 여러 사람의 우려를 무릅쓰고 광주에서는 최초로 노동 야학인 들불 야학의 문을 연 사람이었다. 상원은 함께 일을 하기로 하고 들불 야학이 위치한 광천동으로 아예 방을 옮긴 것이다. 상원은 자기의 방을 강학이나 야학생들의 모임 장소로 공개했다.
상원은 방을 옮긴 후 곧장 같은 아파트에 사는 김영철을 찾아갔다. 5급 공무원을 하다 때려치고 아주 헌신적으로 빈민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김상윤의 소개가 있기도 했지만 어떤 사람인지 상원은 몹시 궁금했다. 김상윤의 소개로 찾아온 야학 사람이라고 하지 김영철은 상원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박용준이라는 사람이 방안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서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은 함께 광천 시민 아파트 사람들을 대상으르 하는 광천 삼화 신용 협동 조합에 근무하면서 친형제처럼 지내고 있었다.
박용준은 삼화 신협에 근무하던 중 김영철을 만나게 되었다. 어린 시절에 고아들과 함께 자란 김영철이, 혼자서 외롭게 사무실에서 자취 생활하고 의로운 김영철과 의형제를 맺고 광천동 시민 아파트 김영철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용준은 자신이 외롭고 가난하게 자라났기 때문에 자신과 같은 처지의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가만있지 못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다 털어서 베풀고 도우려 했다. 낮에는 직장 일을 하고 밤이면 집에 와서 광천동 시민들을 위한 시민 헙동 조합 일과 반장 활동과 야학 일에 밤을 지새웠다. 용준은 어찌나 열심이었던지 아침이면 세수 대야에 벌건 코피를 쏟곤 하였다.
용준은 가끔 집에 안 들어 올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그는 평소에 찍어둔 탐욕스런 사장 놈들이나 부자 놈들 집에 칼을 품고 들어가려다 붙들려 광주 경찰서 유치장에서 잡혀 있곤 했던 것이다.
박용준은 광주 무장 봉기 기간 내내 상원과 함께 영웅적으로 투쟁하다 함께 죽어 간다. 박용준은 고아로서 영아원인 영신 원과 고아원인 무등 육아원에서 서럽게 자라났다. 그러나 굳세게 성장하여 숭의 실업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 신용 협동조합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박용준은 부모의 사랑조차 받지 못하고 가난과 어둔 속에서 자라났지만 정의롭고 활달하였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끔찍히도 사랑하였다. 재능도 많아서 못하는 것이 없는 팔방 미인이었고, 글씨도 잘 썼고 나무도장도 잘 팠고 조합 간판이나 썬팅도 전문가 못지 않았다.
노래도 잘 불러 가곡을 부를 때면 테너 가수 뺨치게 불렀다.
광주 봉기에 중대한 역할을 한 「투사 회보」와 「민주 시민 회보」는 그의 힘찬 필경 솜씨로 제작되었다.
김영철과 용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야학의 운영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광천동 사람들에게 우리 반장 소리를 들으며 착실히 빈민 운동을 해 나가던 김영철은 박용준과 함께 열심히 야학 일을 도왔다. 입학식 땐 주인 대표로 격려사를 해주고 레크레이션과 세계사를 가르치는 강학 으로 뛰기도 하며 김영철은 야학이 주민들과 함께 할 수 있도록 많은 애를 썼다.
아파트 앞 조그만 공터는 때로 마당극을 하는 놀이판이 되기도 하고 야학 사람들과 광천동 청년들이 공을 차는 운동장이 되기도 했다. 어쩌다 상원이 관계하는 전남 연극반 친구들이 와서 한바탕 놀이판을 벌이면 온 아파트가 떠들썩했다. 고통받는 노동자의 푸념으로 극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그래, 맞아맞아' 박수를 치면서, 한숨을 쉬면서 하나가 되어 열심히 극을 보았다. 청년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면 소주 몇 잔에 얼큰히 취한 아주머니들도 어깨를 들썩이며 따라 나섰다. 테너 가수 못지 않은 박용준 더러 노래를 부르라는 성화가 빗발쳤고 상원의 소리 내력에 맞춰 검정 고무신의 박관현이 엉성한 춤이라도 추게 되면 아파트가 떠나가라 웃음이 터져 나왔다.
광주 혁명은 광천동 에서 많은 것을 빼앗 아갔다. 80년 5월 이후로 광천동엔 이전과 같은 웃음이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상원의 소리 내력도 , 박용준의 노래도, 반장 김영철의 넉넉한 웃음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하자 상원과 박용준이 계엄군의 총탄에 쓰러졌고 관현도 선배들의 뒤를 따라 단식투쟁으로 죽었으며 모진 고문으로 불구간 된 김영철은 정신이상이 되어 버렸다. 광천동 사람들은 그러나 아직도 그들을 사랑하고 쓰라린 마음으로 그 시절을 기억한다. 아파트 아주머니들은 혀를 차며 김영철을 이렇게 얘기한다.
"얼매나 두들겨 맞고 병신이 됐다 더니만 몇 년만엔가 여기를 찾아왔습디다.
아이고 동명이 아버지 아니요, 그랬더니만 멍청하게 나를 보면서 '아지매, 나 아파. 아파 죽것소, 그래서 본게 눈이 확 풀렸습디다. 시상에 고문을 얼매나 모질게 했으믄 지가 죽을라고 벽에 머리를 박다가 그렇게 됐다고 누가 글대요 차비를 줘서 보내면 여기가 머가 좋다고 또 오고오고 합디다. 아파트 앞에 쭈그리고 앉았는 걸 보면 하도 짠해서 차라리 안 왔으면 싶더니만, 요 몆 년은 통 얼굴을 못 봤소 시상에 법 없이도 살 사람을 먼 빨갱이 다고 …… 또 오고오고 합디다. 아파트 앞에 쭈그리고 앉았는 걸 보면 하도 짠해서 차라리 안 왔으면 싶더니만 요 몇 년은 통 얼굴을 못봤소 시상에 법 없이도 살 사람을 먼 빨갱이다고‥‥‥
우리 같은 사람들을 그 사람이 얼매나 끔찍이 생각했다 고라. 그런 사람 다시없소 죽은 사람들도 그라고"
'나도 상원이, 용준이 따라 가야제' 김영철이 헛소리처럼 늘 그렇게 중얼거렸다고 아주머니는 덧붙인다.
민중과의 약속이야 !
78년 12월 중순 경 새학기 준비 관계로 들불은 강한 전체 회의를 소집했다. 중요한 회의라 미리 철저하게 연락을 했는데도 약속 시간까지 나타난 사람은 몇 명이 안됐다. 약속 시간인 11시가지나 시간이 흐를수록 상원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갔다. 참석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 ! 형 어디 가요?"
상원은 급하게 뛰어 나가면서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라이."
나가자마자 상원은 택시를 집어타고 불참한 강학들의 집으로 달려갔다.
이 집 저 집을 돌아 상원은 집에 있는 강학 들을 데리고 아파트로 돌아왔다.
올 때까지 상원은 한마디도 말이 없었다. 방으로 들어서자 미리 와 있던 강학 들이 늦게 나타난 강학 들을 향해 여지없이 주먹을 날렸다.
"나쁜 놈들 ! 느그 들이 이러고도 민중을 위한다는 놈들이냐?"
한바탕 주먹과 욕설이 난무했다. 한참 이 모습을 지켜보던 상원이 자리를 정리했다. 때린 사함도 맞은 사람도 말없이 고개만 푹 수그리고 있었다.
한참 만에야 상원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놀러 왔는지 아니면 진정으로 역사 발전을 위해 뛰러 왔는지 차제에 분명히 해 두자. 사전 연락이 충분히 되었는데도 이런 식으로 지각하고 불참하는 일이 발생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민중과의 약속을 전제로 한 만남인데 이럴 수가 있는가‥‥‥ 철저하게 자기비판에 들어갔다.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누군가 이럴 게 아니라 오늘의 맹세를 글로 남기자고 제안했다. 상원도 가장 진실한 말을 남기 자며 고개를 끄덕 거렸다. 모두 찬물로 머리를 감은 후 자세와 마음을 정돈하여 각자의 각오를 적었다. 상원의 차례가 오자 상원은 잠시 눈을 갚고 생각한 뒤 또박또박 정성 들여 써나 갔다.
"죽기 위해 살자 ! "
상원은 운동에 관한 것이라면 사소한 것 하나일지라도 대충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혁명 사업과 조직적 규율을 운동가들끼리 하고 싶으면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대충 용납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혁명운동은 개인의 감정 상태나 조건의 변화에 따라 도중에 쉴 수도 있고 포기할 수 있는 '개인 사업'이 아니다. 혁명운동은 계급 사회의 인간이 살아 숨쉬는 한 객관 현실로부터 주어지는 역사의 강제이다. 혁명 운동가라면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노동과 피눈물과 근육의 땀방울로 찍혀진 민중의 명령서다.
혁명운동의 규율이란 상호간에 지키면 좋은 약속어음이 아니다. 그것은 해방의 열망으로 이글거리는 민중의 부릅뜬 눈동자 위에서 맺어진 엄중한 서약이자, 개인을 부숴 가며 준수해야 할 공동의 철칙이다.
상원이 분노한 것은 불철저한 동지들 개인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그의 분노는 민중과의 약속을 배신한 임무 유기 행위에 대한 분노이자 진실한 계급적 감정의 표출이었다.
등지의 오류에 대하여 대충 넘어 가구 예민한 문제는 무비판적인 '긍정 체계'로 말하여, 대립된 견해들을 부분적 장점들만 뽑아 절충하고 동지애와 '대동단결'을 강조하는 '좋은 품성'을 상원은 갖지 못했다. 아니, 철저히 배격했다.
상원은 자신부터 먼저 철저히 수양하여 모범을 보인 다음에야 타인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쁘띠부르주아적 도덕관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혁명 운동가 상호간에 잘못된 오류를 철저하게 비판함으로써 자기 자신도 부지불식간에 범해 왔던 오류를 동시에 비판하고, 서로가 용납하는 데서 열려지는 기회주의적 도피구를 민중의 이름으로 봉쇄시킨 것이다. 이를 통하여 그 조직은 더욱더 철저한 계급적 조직으로 발전하고 이러한 조직의 발전을 통하여 개인들은 점차 수준 높은 혁명 투사로 집단적으로 단련되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상원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일을 잘하기 위한 비판'으로, 동지적 결속을 고양시키는 비판으로 조직해 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상원이 머리를 감고 가슴팍을 모두어 쓴 '죽기 위해서 살자'라는 비장한 서약은, 향후 죽음인 줄 뻔히 알면서도 무장봉기의 한복판으로 서슴없이 나서는 그의 장엄한 출사표가 되었던 것이다.
연탄가스에 죽은 '노동자의 누나'
거리에 징글벨 소리가 울려 퍼지던 크리스마스 다음날, 박기순이 죽었다.
'노동자의 누나'가 죽어 버렸다.
야학 활동이 학생운동을 위축시킬지도 모른다며 우려를 표하는 선배들에게 '야학은 침체에 빠진 학생운동의 활성화와 과학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당차게 주장하며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심지어는 리어카 장사를 하면서 돈을 모아 들불을 탄생시켰던 박기순이, 몸바쳐 싸워 왔던 노동 해방의 그 날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뜬것이다. 후배이자 뛰어난 동지였던 박기순을 언 땅 속에 묻고 돌아오면서 그러나 상원은 울지 않았다. 울며 비탄에 빠지기에는 기순의 삶이 너무도 굵직했고 자신 앞에 남겨진 일이 너무도 엄중했기 때문이다. 같이 일했던 강학 들의 가슴속에, 수업을 받았던 노동자의 가슴속에 기순의 그 넉넉한 모습은 언제까지나 살아 있을 것임을 믿었기 때문이다.
기순이 떠나자 상원은 더욱 바빠졌다. 함께 준비했던 광주 공단 실태 조사 기획을 이제는 영일이와 다 해내야 했다. 광주 공단 실태 조사는 학생 운동권의 선진 학생들이 겨울방학 동안 노동자와 함께 생활하면서 꼭 역사 발전의 주체로서의 노동자계급을 과학적으로 인식하도록 상원이 기획한 것이었다.
이를 통하여 학생운동의 민중 지향성을 강화하고 확대시키려는 계획의 일환이었다.
들불의 아파트에 기거하면서 실태 조사를 했던 조사팀에게 노동자 문제야말로 우리 사회의 근본 모순임을 인식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게다가 상원은 이 작업을 통해 놀랍게 성장한 후배 박관현 과도 만나게 된다. 고무신을 끌고 아니며 말없이, 그러나 가장 열심히 일하는 박관현을 상원은 눈여겨보고 있었다. 삼 수를 하고 군대까지 갔다 온 가난한 늙다리 대학생, 고시 준비를 하는 고가 실태 조사를 거치면서 느끼는 갈등과 고통까지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당신들 빨갱이 아니요 ?
어느날 수업이 끝나고 상원은 학생들에게 자신의 방으로 올 사람이 없냐고 물었다. 학생들은 '뜬금없이 먼 소리다냐' 하는 표정으로 그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돈도 안 받고 자기들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긴 해도 자기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방을 같이 쓰자니 ?
다들 책을 챙겨든 채 엉거주춤 서 있는데 누군가 불쑥 앞으로 나섰다.
상원은 싱긋 웃음이 나왔다. 왜 야학에 나왔 느냐고 물었더니 머리를 긁적이면서 여기 오면 여자 애들과 놀 수 있을 것 같아서 왔다던 2기생 성섭 이였다.
"나가 같이 있어도 괜찮것소?"
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광주에 집이 있던 성섭이는 어머니를 떠나서 다음날 상원의 광천시민 아파트로 옮겨 왔다. 상원의 동생들도 노동자였지만 혈육과 달리 상원은 성섭이를 통해서 노동자들의 하루하루를, 순간 순간 감정을 세밀하게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가끔씩 반발하는 학생들도 생겨났다. 조금만 성급한 말이 튀어 나가면 꼭 그랬다 성당 교리리 실에서 옮겨와 교실로 쓰는 아파트 방에서 욕설이 들려 왔다. 상원은 교실로 갔다. 무엇 때문인지 명관 이가 열이 받쳐서 책상을 집어던지려고 하는 중이었다. 명관이는 1기생으로 가장 착실하게 나오는 놈이었다. 명관 이는 밝고 명랑해서 늘 웃음을 몰고 다녔다. 녀석이 몰고 다니는 건 웃음뿐만 아니었다. 싸움과 소란도 몰고 다녔다. 성질이 급한 탓이었다. 게다가 오기도 대단해서 한번 삐딱선을 탔다 하면 걷잡을 수가 없었다.
시뻘개진 얼굴로 명관 이가, 왜 그러느냐고 묻는 상원에게 대들었다
"당신들, 다 빨갱이 아니야?"
상원은 계속 그를 달랬다. 명관 이의 화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씨팔, 권리 ? 권리 좋아하네. 니네들이 가서 한 번 일해 봐라. 편한 밥 먹고 대학 다니는 놈들이 알긴 뭘 안다고 지랄이야."
상원은 버럭 소리를 질렸다.
"야 이 새끼야, 아가리 닥쳐 ! "
평소 상원의 화내는 모습을 보지 못했던 명관이 찔끔해서 뒤로 물러났다.
"너 이리 따라아왓! "
시끄럽던 교실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둘은 포장마차에 앉았다.
"술 할 줄 알제 ?"
명관 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원은 별 말이 없었다. 명관이는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상원은 지금 명관에게 가장 필요 한게 시간이 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명관 이는 지금 혼돈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지금까지 운명으로 받아들였던 노동자의 비참한 생활과 미래의 희망이 사실은 자본가의 착취 체제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았을 때, 어쩌면 명관이의 반발은 당연한 것일 터였다. 둘은 포장마차에서 한껏 기분을 내며 신나게 노래를 불러댔다. 나명관씨는 그날 밤을 이렇게 얘기한다.
"원래 형은 별로 말이 없는 사람이었어라. 말을 해도 다른 강학허고는 다르게 쉬운 말로 했어요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 멀라고 공장 꺼정 다님서 그 고생을 허는지 요상 시럽 기는 했어도 아무튼 친 형님 같았 제라. 그날도 영 말을 안하고. 내가 멀 잘못 허긴 헌 거 같은디 영 깝깝 헙디다. 허긴 먼 말을 했으면 속만 더 뒤집 혔것지만‥‥‥술을 꽤 먹고 어깨동무하고 노래부르고 그랬 구만이라."
관현 이는 반드시 들불로 온다
79년 새 학기가 되자 야학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지도 교수, 학생과, 상담 지도 관실, 학원 출입 형사, 부모 등을 통해 들어오는 삼증 사중의 압력은 들불을 위기로 몰아 넣었다. 압력에 못 이겨 그만두는 강학들이 생겨났다.
들불의 재정비가 요구되고 있었다.
상원은 관현을 생각했다. 실태 조산 때 말없이 묵묵하게 누구보다 앞서 일하던 모습, 진지하게 고민하던 모습, 그런 관현을 생각하는 것은 상원만이 아니었다. 들불은 관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관현은 쉽게 자신의 껍질을 깨뜨리지 못했다. 관현의 태도에 사람들이 초조해 하자 상원은 말했다.
"관현이는 반드시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그는 지금 자신과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다. 그가 아픔과 고통을 이기고 긴 터널을 지나올 수 있도록 우리는 최선을 다해 도와주던 기 다쳐야 한다. 그가 지금 당장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그를 위해서 삼고 초려가 아니라 십고 초려라도 할 것이다."
상원의 말대로 관현은 아픈 자기 확인을 거쳐 들불에 참여했다.
상원이 박관현이 결국은 들불 강학 으로 참여하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 데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그것은 관현이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더 이상 빼앗길 것 없는 빈농의 자식이자, 동생들이 노동자라는 계급적 토대의 일치에 대한 신뢰였다. 그것은 한편으로 자신만을 유일한 희망으로 쳐다보고 있는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기까지는 처절한 자기 투쟁이 필요하지만, 결국은 혁명적 삶의 길로 결단할 수밖에 없는 민중의 아들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리고 공단 실태 조사 과정과 그간의 실천 과정 속에서 확인한 그의 정직성과 성실성, 엄중한 책임감과 우직함, 관념성이 파고들 여지조차 없이 현실 상황과 밀착된 문제의식과 강한 실천성, 고통받는 민중을 결코 외면 할 수 없는 형제 애 적 동정심을 소지하고 있음을 정확히 파악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관현 이와 똑같은 조건 속에서 치열한 고뇌의 과정을 먼저 거쳐 나온, 풍부한 사회성과 경험을 체득한 선 험자 로서의 날카로운 안목으로 그를 꿰뚫어 보고 있었기 때문 때문이었다
박관현에 대하여 '십고 초려 하겠다'는 결의와 같이, 상원은 탁월한 일꾼이 될 수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확고한 믿음과 끈질긴 집념으로 달라붙어 운동 대열에 서게 하였다.
상원은 계속되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관현과 더불어 들불을 노동 야학으로 키워 내고 김영철이 주도하는 시민 아파트 주민 조직과 연대하여 들불을 노동 운동가 배출 소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강학과 학생들은 수업이 끝나면 자주 술자리를 가졌다. 그즈음 상원의 일기에는 소주 값이며 안주 값 몇백 원이 촘촘히 적혀 있다. 술을 마시면 흥건한 놀이판이 벌어졌다. 강학과 학생과 지역 주민이 하나가 되어 서툰 솜씨로 탈춤을 추기도 하고, 상원의 구성진 판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하고 즉석 마당극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들불은 하나로 단단히 뭉쳐지고 있었다.
내가 독선적인 것은 당연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학생들의 대부분이 정말 자기들이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 갔다. 많은 강학 들이 빠져나가면서 수업이 진행되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학생들은「노동의 역사」나 상원이 직접 만든 일반 사회 책을 교재로 자기들끼리 수업을 진행시켰다.
10·26이 터지자 상원은 유화 정세를 틈타 들불을 확대했다. 노동법을 정규 과목으로 채택하고 소그룹 형태고 야학 졸업생 모임을 묶어 낼 준비를 했다.
들불 야학은 침체된 학생운동에도 활기를 가져왔다.
전남대 운동권의 핵심 그룹은 들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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