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 광주 항쟁 기념 윤상원 열사의 삶과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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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항쟁 기념 윤상원 열사의 삶과 투쟁
임낙평(전남 사회문제 연구소 연구원)
윤상원 열사, 도청 최후의 날
80년 5월 27일 새벽 2시 30분, 학생, 시민들이 7일째 점거하고 있던 도청에 비상 이 떨어졌다.
상황실에서 외곽지역 경비원들과 무전 교신이 몇 차례 계속된 뒤, 급히 모인 도청 시인 학생 투쟁 위원회(이하 투쟁 위)집행부 지도부는 상황실에 집결했다.
그 사이 투쟁 위원장 김종배(당시 조선대 생)는 중앙청으로 연결되어 있던 핫 트라인 으로 ‘계엄군 진압 시, 도청 지하실의 다이나마이트로 자폭하겠다’는 최후 항전 결의를 거듭 전했다. 무장 시민 군의 대표 격인 상황 실장 박남선은 작전계획을 상황실 참모들과 급히 수립하기 시작했다. 외곽지역으로부터 총성이 간헐적으로 울리며 가깝게 다가오고 있었다.
대개 수면 중이거나 가수 상태에서 비상을 맞은 시민 학생들은 도청 앞뜰 무기고 주변에 몰려들었다.
무기고 옆에는 YWCA에서 온 대학생들과 궐기 대회 준비팀·투사 회보팀 등 70여명의 청년 ·학생들이 새로 무기 지급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고교생들도 군데군데 끼어 있었다.
투쟁 위 대변인 윤상원이 그들 앞에 섰다. 윤상원은 그들을 정렬시키면서 차렷, 열중 쉬어, 앉아, 일어서를 반복했다.
"고교생, 너희들은 나가라. 우리가 싸울 테니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그래서 역사의 증인이 되어라."
고교생 몇 명이 한쪽으로 나가자 그는 대열을 보고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저 전두환 살인 집단에게 도청을 내준다면 우리는 죽어 간 영령들과 역사 앞에 죄인이 됩니다. 우리가 비록 저들의 총탄에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최후의 순간까지 굳게 뭉쳐 싸워야 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총과 탄약을 기다리는 시민 군들의 가슴속에, 뼈 속 깊이 스며들어갔다.
그의 연설은 시민 군들의 체념과 절망적인 분위기를 뒤바꿔 놓았다. 투사 회보팀의 일원으로 무기를 지급 받기 위해 그 자리에 갔던 들불 야학 출신 나명관은 ‘너, 총 쏠 수 있냐’며 망설이던 윤상원의 자상한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무기 지급이 끝나고 각기 작전 방향으로 흩어졌다. 그 즈음 이미 계엄 공수 부대가 도청의 지척에 와 있었고 수시로 연발 사격을 퍼부었다.
윤상원은 투쟁 위 기획 실장 김영철, 기획 위원 이양현등 일단의 시민 군들과 도청 좌측 민원실 2층 회의실에 자리잡았다. 계엄군은 대체로 커다란 저항 없이 도청 근방까지 조여 온 것이다.
새벽 4시가 넘어갈 무렵 2∼3m 간격으로 창가를 응시하며 적정을 살피고 있던 윤상원과 이양현은 이렇게 패배하는구나 하는 심정으로 서로 말을 걸었다.
"우리 저승에서 만납시다. "
"저승에서 다시 만나더라도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민중을 위해 일합시다. 학생운동도 하고 노동운동도 합시다. "
"이렇게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던 10여 일간의 광주, 이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겠소"
"우리 영원한 친구가, 동지가 됩시다. "
생사의 갈림길에서 몇 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동년배인 두 사람의 대화, 윤상원과의 마지막 대화는 총성 소리에 묻히고 다시 3∼4분의 정적이 흘렀다.
정원수의 윤곽을 알아 볼만큼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순간, 회의실 뒤편에서 나 어린 시민 군이 뒷편이 무너졌다며 황급히 뛰어왔다. 그때 콩 볶는 듯한 총성이 창문을 통해 안으로 쏟아졌다.
‘아이쿠’ 소리와 함께 윤상원이 쓰러졌다.
도청 시민 학생 수습 위원회 대변인 윤상원의 고귀한 청춘은 민주의 제단에 그렇게 바쳐졌다.
박관현 은신처에 전화, "투쟁조적 재편하라"
5월 18일 아침 라디오뉴스를 통해서 윤상원은 계엄 확대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즉시, 청년 운동가와 재야 인사 등에게 전화해 그들이 예비 검속 되거나 피신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아침을 먹고 난 후, 윤상원의 광천동 자취방에는 뜻밖에 계엄 수사 당국의 검거를 피한 전남대 총 학생회장 박관현과 일행 두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근처 빈 공터에서 그들은 잠시 동안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두고 협의했다. 윤상원은 계엄 수사 당국의 최대의 표적인 박관현이 섣부른 행동을 하지 말 것, 학생 ·시민 대중이 거리로 나오면 지체없이 지도할 것 등을 제안했다.
두 사람은 진행되는 사태의 추이를 주시 해 가며 서로 연락하기로 하고 해어졌다. 박관현이 가장 신뢰하는 선배 윤상원. 이날 두 사람의 만남은 최후의 만남이 되어 버렸다.
윤상원은 광주의 학생 ·시민들의 절대적 호응과 지지를 받는 박관현 등이 연행되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집을 나섰다. 우선 김상집(5 · 18사건으로 후일 구속, 녹두 서점 김상윤의 동생)을 찾아가 형님이 연행되었음을 알리고 녹두 서점을 지키며 제반 연락을 받도록 했다. 그리고 그는 발길을 전남대 방향으로 돌렸다.
오전 10시경, 전남대 정문 앞에서 학생 시위가 약속처럼 이뤄 졌다. 그러나 대학에 진주한 공수부대는 그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리 무자비한 진압을 자행했다. 학생들은 분노했고 급기야 시내로 진출했다. 학생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시민들도 적극적으로 호응해 주었다. 금남로 가 차단되고 기동 경찰대에 의해 거리는 최루가스로 자욱했다
윤상원은 시위 대열을 따라 다니며 그 소식을 녹두 서점에 전했다. 그리고 화염병을 제조하도록 김상집 에게 지시했다.
오후로 접어들어 화염병이 등장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사람들에게 화염병은 극히 생소한 것이었다. 그러나 화염병이 터질 때마다 학생 ·시민들은 환호를 보냈다.
투입된·공수부대는 시위 예방, 시위 진압 지침을 무시한 채 시민 포획, 옷 벗기고 구타 등으로 일관했다. 그들이 투입된 곳에는 유혈이 낭자하고 참혹한 광경이 벌어졌다.
윤상원은 시위 현장을 쫓아다니며 이러한 광경을 수 없이 목도했다. 그는 투쟁 지도부, 시민 홍보, 투쟁 방법론도 없이 싸움이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태풍의 눈이 되어 있는 박관현의 은신처에 전화를 걸었다. 총무 부장 양강섭이 전화를 받았다.
"예비 검속(연행)을 피한 학생회 집행부의 조직을 투쟁 조직으로 확대 개편하고, 시가지 투쟁 에 나서야 한다. 또한 화염병을 만들어 시가지 투쟁 현장에 배급해야 한다. "
양강섭은 윤상원이 화염병의 제조 방법까지 상세히 설명하더라고 기억하고 있다. 양강섭은 윤상원의 제안에 대답만 할 따름이었다. 이미 학생 투쟁 조직은 와해되었고 박관현도 광주를 빠져나갈 즈음에 있었기 때문이다.
18일 오후 늦게 박관현과 몇 사람이 광주를 빠져나갔다. 양강섭은 다음날도 윤상원의 위와 같은 전화를 받았으나 그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어서 단지 대답만을 했을 따름이었다.
여하튼, 윤상원은 항쟁 초기부터 가장 적극적으로 항쟁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농촌 출신 평범한 대학생의 변신
윤상원은 1950년 전남 광산군 임곡면 신룡리 천동 부락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윤석동씨와 김인숙 여사 사이의 3남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윤개원(尹開源, 현재 망월동 5월 묘역의 묘비가 윤개원 으로 되어 있음). 장성한 후 부친께서 자녀들의 이름을 개명해, 그를 윤상원(尹褙源)으로 불렀다.
소년 상원은 일제하 사업을 하셨던 조부닝의 덕택으로 그리 어렵지 않은 환경 속에서 조부님,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부모와 가족 곁을 떠나 광주에서 북 중학교, 사례 지오 고교를 다녔다.
어릴적 부터 활달하고 쾌활하여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였다. 고교 시절 무전여행을 할만큼 진취적이었고 여고생을 사귀고 친구들과 어울려 술 담배도 배우는 등 조숙한 학생이었다. 태권도 유단자의 실력을 보유하였으며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품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학교 성적은 좋은 편은 아니었다. 초등 학교 3학년부터 할머니와 아버지로부터 일기 쓰기를 지도 받은 이래 고교 시절까지 일기를 써 자기 삶을 정리하고 반성하는 것이 체질화 되었다.
1971년 삼 수의 고행을 거쳐 전남대학교 정치 외교 학과에 입학하였다.
입학과 동시에 그는 대학 연극 반에 친구들과 함께 들어갔다. 그는 연극에 심취했다. 극예술을 통해서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였으며 사람을 사귀고 대화를 나눴다.
72년 입대하기 이전까지 연극 반 활동을 열심히 했다. 그의 연극 반 활동은 그의 인생의 밑바탕을 형성해 주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대학 시절 이후 가장 가까운 친구와 선후배들을 연극 반 주변에서 만났다.
그의 삶의 전환점은 75년 그가 군을 제대한 이후 선배 김상윤(민청학련 사건 관련 구속 자, 5 · 18당시 예비 검속) 과 의 만남을 통해서였다. 이미 그는 군 말년에 민청학련사건으로 충격을 받았다. 군 시절 그는 그의 부친께 보낸 편지에서 ‘ 애국적인 동료 학생들이 수난을 당하는 현실에 비하면 자신의 군 생활은 편하다’고 썼고 제대하면 정의롭게 살 것이라고 다짐했다.
복학과 함께 그는 김상윤을 만났다. 김상윤을 만나면서 그는 인간과 세계 역사와 진실, 현실과 자아를 새롭게 깨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가 즐기는 테니스가 ‘부르조아’ 스포츠라는 것을 깨닫고 쉽게 그것을 버렸다.
김상윤 등 민청 관련 석방자들은 학교에서 제적당해 구속 자 협의회를 결성, 학생운동 및 제반 사회 운동의 토대를 갖기 위해 활발한 논의와 토론을 하였다.
김상윤은 윤상원 등 재학생들과 사회 과학 학습 모임을 시작했다. 윤상원은 이 모임에서 정열적으로 활동하면서 노동운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졸업을 앞두고 그는 현실적 고뇌에 휩싸였다. 그의 뜻대로 라면 노동 현장으로 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오랜 고민과 숙고 끝에 솔직 담백하게 말했다.
"취직한다. 그러나 취직하는 것은 시골 부모님에 대한 마지막 효도이다 시골 부모님에게 양복 입고 출퇴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그는 그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 ‘고삿 길 달음박질(골목의 이 집 저 집에서 돈을 꿈)’을 해 온 어머니의 뜻을 저버리는 것은 자식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78년 졸업과 동시에 취직되어 주택은행 봉천동 지점으로 발령 받아 광주를 떠났다.
노동자 윤상원, 돌불 야학 교사 윤상원
직장을 6개월만에 그만두고 다시 하광한 윤상원은 그해 10월 광천 공단 내의 한남 플라스틱(주)에 일용 노동자로 취업했다. 현장을 떠난 운동은 관념이며 현장이 중심이 될 때우리 운동은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운동론에 입각, 그는 노동 현장에 투신했다. 광주 ·전
남 지역에서 그가 세칭 ‘위장취업자’의 1호로 기록될 만큼 당시로서는 현장 투신이 드물었다.
그즈음 또한 그는 7∼8년 연하의 후배 대학생들이 운영하는 ‘들불야학’에 참여해 달라는 제의도 받아들였다.
그리고 간단한 짐을 꾸려 들불 야학과 가까운 광천 시민 아파트(빈민 아파트)에 방1칸을'삭월세로 얻어 입주했다. 그 방은 야학에 다니는 노동자들의 공동 방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삶의 엄청난 반전이, 채 1년도 못되는 사이에 윤상원 에게 진행되었다. 윤상원 스스로 자신의 길을 택했다.
그는 궁극적으로 이 지역 노동운동의 기반을 다져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그가 참여한 들불 야학은 그해 7월 문을 열어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들불 야학은 이 지역 최초의 본격적인 민중 야학, 노동 야학이었다.
들불 야학은 박기순(당시 국사 교육학과3년, 강제 휴학 중 그해 12월 25일 과로로 숨짐), 신영일(당시 국사 교육학과 2년, ‘88년 5월, 민주화 활동 중 숨짐 국사 교육학과 2년, 88년 5월, 민주화 활동 중 숨짐 ) 등과 서울에서 휴학하고 내려온 야학 경험자들에 의해 창설되었다. 들불 야학은 광천 공단 주변에 있는 광천 천주 교회 교리 실을 교실로 사용하였고, 그후 6개월 후 교회와 인접한 광천 시민 아파트의 방을 세내 두 반을 운영하였다. 이 아파트에는 지역 사회 개발 운동(오늘날의 빈민 운동)을 위해 77년 입주한 김영철 부부와 박용준이 활발히 사업을 전개하고 있었다.
윤상원은 이런 객관적 조건을 가진 들불 야학과 아파트 지역 빈민 운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눈부신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들불 야학의 수업 지도 및 총체적 관리, 광천 공단 노동자 실태 조사의 기획(78. 12∼79. 2), 아파트 지역 빈민 운동에의 참여, 김상윤 등 청년 운동가들과의 만남, 노동운동 소그룹 활동 구상 기획, 직장 출근(그해, 1월 양동 시장 신협 직원으로 취직), 학생 운동가들과의 만남 등으로 정신없고 숨가뿐 나날이었다.
이곳 광천동 들불 야학에서 그는 80년 전후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민족 민주 운동 선상에서 활동하는 많은 후배들을 만났다. 박기순, 신영일, 박관현, 박용준 등 열사들과 김영철, 박효선, 전용호(현 문화 운동가, 출판사 경영), 서대석(오월동 지회 활동), 고희숙, 김경옥, 이영주, 배환중(교육 운동) 김상전 정재호 동근식(청년운동) 등 많은 활동가들의 정신적 지주가 윤상원 이었다. 그는 주위의 권유가 있었지만 결혼도 유보한 채, 때로는 야학
공동 방에서 맨 간장 하나에 식사하면서도 힘겨워 하지 않았고 노동자인 야학 학생들의 아픈 곳을 더듬어 주는 가장 친근한 형이었다.
삶의 공동체, 독특한 광천동 들불 야학 문화의 공동체가 있었다. 거의 매일 만나는 사람들이었지만 서로 어루만져 주고 아껴 주는, 나누어 먹고 나누어 쓰는 문화, 윤상원은 그것을 들불 공화국이라고 술좌석 같은 데에서 말하기도 했다. 유신 독재의 말기적 탄압이 계속되고 그 여파가 야학에도 떠밀려 왔지만 들불 야학은 의연하게 그것을 이겼다.
"투사회보를 만들자"
5월 18일 저녁, 녹두 서점을 거쳐 광천 동 집으로 귀가한 윤상원은 들불 야학의 교사들을 만났다. 야학 교사들은 이날 일요일인데도 야학에 나와 야학 주변 청소년들과 운동을 했다. 시내가 심상치 않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윤상원 선배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윤상원은 시내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시민의 입과 귀가되자 면서 유인들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윤상원의 말 즉 단호한 의도와 심사숙고가 곁들어 있어 이견의 제시 없이 통과되었다. 통금 단축 등의 상황 때문에 19일부터 제작하기로 하고, ‘절대보안’을 지킬 것을 서로 약속했다. 그가 문안을 작성하고 박용준이 필경 하며 야학 교사들이 등사 및 배포하기로 했다.
I9일 저녁 핏빛 거리에 비가 내렸고,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공수부대의 잔학한 만행을 전하는 소문들이 전 시가를 휩쓸었다.
이날 밤 들불 야학팀이 제작할 전단에는 이런 내용이 그대로 실렸다. ‘전두환 일파는 민족 반역의 살인극을 중단하고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라.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싸워 나가자.’ 이러한 윤상원의 생생한 목소리가 문자화되어 시가지 투쟁에 그대로 전달되었다.
20일, 시위 상황은 광주 항쟁 전기간 동안 가장 치열한 날이었다. 이날 시위는 종일 시내 각처에서 진행되었고 저녁 운전기사들의 차량 시위로 시민들의 사기는 절정에 달했다. 또한 공수부대의 만행도 가장 극심한 날이 어서 사상자들이 많이 발생했다.
시위가 치열하게 격화될수록 전단 제작팀인 들불 야학 성원들의 일손은 바빴다. 16절 갱지에 수동 등사기로 밀어야 하기 때문에 1만장을 인쇄하기 위해서는 똑같은 원 지를 10여장씩 써서 등사해야 했다. 초기에는 야학 교사들만 참여했으나 20·21일 넘어서면서 야학의 학생 (노동자)들도 참여했다. 방안에 촛불을 켜고 철야로 그들은 작업을 했다.
원고를 써 오고 제작된 전단을 가져가 배포하면서도 윤상원은 시민 홍보의 부족함을 느꼈다. 그래서 시위 현장에 있다가 근처의 인쇄소에 들어가 즉석에서 전단을 제작, 배포하기도 했다.
21일 오전 녹두 서점을 거점으로 운동권 사람들이 광주의 사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숙의 하였다. 투쟁 지도부의 싹이 움트기 시작한 것이다. 윤상원을 필두로 김영철, 정상용(한국회 의원) 이양현(현 한겨레신문 지사장) 박효선 (현 극단 광대 대표) 정해직(현 교사 운동가) 윤강옥(현 오월 동지 회장)김상집 등과 다수의 학생들이 모였다. 항쟁을 외부에 알리는 문제, 투쟁 지도부 구축, 시외 통화 개통 및 방송국 접수 문제 등이 논의되었다.
이날 1시 도청 앞 집단 발포로 이러한 논의의 틀은 깨졌다. 계엄 공수들의 살육으로 광주가 초토화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윤상원은 녹두 서점을 찾아온 전용호와 광천동 전단제작 장소로 발길을 옮겼다.
"시민 홍보 작업을 조직적으로 전개해야 한다. 투쟁의 방항을 설정하고 시민들의 행동 방향, 무장 시위대의 임무 등을 제시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들은 민중 언론 ‘투사 회보’를 간행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문안 작성은 윤상원, 전용호가 맡고, 필경은 필체가 좋은 박용준, 동근식이, 물자 조달 등사 배포는 2인1조가 되어 김경국, 정재호, 서대석, 김성섭, 나명관 등 20여명 내외의 학생들이 담당했다.
투사 회보는 21일부터 26일까지 총9호가 간행되었다. 16절 갱지의 양면에 등사된 투사 회보는 볼품없이 조잡한 것이었지만, 새로운 소식에 목말라 하는 시민들에게 사실을 알려주는 유일한 소식지였다. 피해 실상, 집회 홍보 시민의 행동 방향, 투쟁 방향, 요구와 주장 등의 내용을 담아 매회 1,2만장씩 등사되었다.
투항 파 수습 위에 대한 비판
계엄 공수 부대가 퇴각한‘해방 광주’는 닷새 동안의 피 비린내나는 투쟁의 성과였다. 도청이 점령되고 전 시가지 일원이 시민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날, 오후부터 녹두 서점에 청년 학생 운동 세력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사령탑 격인 윤상원은 이날 진행되는 모든 사항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며 뛰었다.
저녁에 윤강옥, 정해직, 김영철 등과 송백회 여성들 박효선, 김태종 등 극단 광대 패의 성원들, 안길정 등 학생 운동가들, 들불 야학의 성원 일부가 모였다. 그들은 투쟁 지도부가 없고 무장 세력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며 이미 계엄사 정보 당국의 분열 공작이 시작되었다며 일차적으로 시민 궐기 대회를 꾸미는 것과 시민 홍보에 주력하자는 윤상원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튿날인 23일 오전 10시경, 그는 윤강옥 등과 함께 학생 수습 위원장인 김창길을 만나 서로 도우며 일하고자 제의했다. 그리고 궐기대회의 개최와 시민 홍보 부분을 자신이 청년 학생 운동 세력과 맡겠다고 했다. 그러나 김창길은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
시민 수습 위나 학생 수습 위는 무기 반납, 피해의 최소화, 질서 회복, 헙상 등의 입장으로임하고 있었기에 윤상원의 얘기가 반가 울리 없었다. 수습 위 내에도 그것이 부당하다며 항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윤상원은 수습 위 내의 무장 세력과도 만나 이 같은 취지를 말했는데 그들은 호의적이었다.
이날 오후 3시 도청 앞 광장에서 윤상원 등의 준비에 의해 민주 수호 범시민 귈기 대회가 개최되었다. 전날의 집회와는 내용과 형식면에서 달랐다. 전두환 처단 계엄 철폐 김대중 석방 등 프래 카드가 내걸 렸고 계엄 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끝까지 투쟁할 것 등이 시민 대중과 함께 외 쳐졌다.
이렇게 민주의 열정이 충만한 시민들의 호응을 받으면서 26일까지 5차례에 걸쳐 진행된 이 궐기 대회는 무장 시민 군의 사기를 진작시켰으며 계엄군 부의 진압을 지지하는 강력한 힘이 되었다.
23 · 24일 궐기대회가 종료되고 반성 및 평가 모임이 YMCA에서 연이어 개최되었다. 윤상원을 중심으로 정상용, 이양현, 김영철, 정해직, 박효선 등 지도부들은 향후 투쟁의 방향 등을 심도있게 논의하고 불철저한 도청 ‘수습위’를 혁파하고 새로운 투쟁 조직을 결성하기로 했다.
그들은 향후 투쟁 목표로 ①최규하 정부의 퇴진 ②계엄 해제 ③전두환 처단 ④구속 자 석방 ⑤시민 명예 회복 및 사상자 피해 보상 ⑥민주 정부 수립 등을 설정했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 목표를 쟁취하기 위해서 ①시민 궐기 대회의 지속적 개최 ②도청 수습 위에 참여하여 강력한 투쟁 지도부의 결성 ③청년 학생들의 무장 화 및 무장 시민 군과 합세 ④무기 반납 결사 반대, 협상 반대 ⑤투쟁의 타 지역 확산 등의 투쟁 방향에 합의했다.
당시 도청 내 시민 수습 위와 학생 수습 위는 수습 방향을 놓고 연일 격론을 벌이고 있었다. 일방적 수습, 무기 반납 질서 회복 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 결사 항전을 주장하는 사랑들과의 대립이 첨예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도청 상황실 등 무장 세력들은 항전을 주장하는 편이었다.
윤상원은 22일 이후 연일 도청에 들어가 밤낮없이 활동했다. 궐기 대회팀, 홍보팀 등은 필요할 때 짬을 내서 만나고 다시 도청으로 들어갔다. 윤상원 에게는 투항파 수습 위를 축출하고 강력한 투쟁 지도부 결성을 위하여, 사전에 도청 내에서 조정 작업을 하는 중대한 임무가 주어 졌다. 그는 김종배, 허규전 등 학생수습 위 일부와 박남선 등 상황실 무장 세력과는 입장의 일치를 봤다.
이날 저녁 7시경, 학생 수습 위 회의가 무기 반납, 질서 회복 등으로 기운다는 소식을 접한 윤상원은, 공방이 벌어지고 있는 회의실로 뛰어가 끝까지 민주주의를 사수하기 위해 결사 항전할 것을 역설하였다.
이날, 저녁 9시쯤, 윤상원,정상용, 김종배, 허규정 등이 모여 투항파를 배제한 시민 학생투 쟁위원회의 결성에 합의하고 조직과 책임자 인선 등을 마무리했다.
위원회 간부들은 위원장 김종배, 외무부 위원장 정상용, 내무부 위원장 허규정, 기획 실장 김영철, 기획 위원 이양현, 윤강옥, 대변인 윤상원 등이었다.
윤상원은 투쟁 위 결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스스로 투쟁 위의 대변인을 자청하고, 정상용 등 동료들은 순발력이 뛰어나고 가장 정화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 그를 대변인으로 밀었다.
윤상원등 지도부의 미국인식정도
이즈음 윤상원을 비롯한 투쟁 지도부는 미국의 개입, 즉 미 항공모함의 내항, 미국의 동향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논의했다. 그들은 미국이 전두환의 살육 만행을 묵인 방조하는 제국주의적 속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고 인식하였지만 한편으로 전두환 일파가 군을 장악하지 못했다고 보고 미국이 살인 군부에 지지를 보낼 것인가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당시의 시민 대중들은 친 미 반공 의식에 젖어 있어 반미의 문제를 섣불리 제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미 항공 모함의 입항을 전두환 군부의 견제로 해석해 대자보나 궐기대회를 통해 발표하였다. 거기에는 미국이 살인 군부의 만행을 저지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담겨 있었다. 윤상원 등 일부는 광주 주재 미국인들의 소재를 파악하고, 불리한 상황이 전개될 때 그들을 체포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다.
26일, 항쟁 지도부의 대외적 창구 ·광주 시민들의 대변자 윤상원은 두 차례의 내 외신 기자 회견을 가졌다. 그에게는 광주 항쟁의 진실을 세계 만방에 알리고, 항쟁의 확산을 꾀하며, 도청 투쟁 위의 공신력을 획득하게 하는 것이 의무였다.
도청 투쟁 위 집행부는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느라 숨 돌릴 겨를 없이 바쁜 일정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이 날은 계엄군 진압 임박 설이 파다하게 퍼져 시민들의 표정에는 긴장과 불안이 역력한 가운데 저녁이 되었다.
오후7시경, 도청 회의실에서 일부 수습 위원들과 김창길 등 구 학생 수습 위원들이 무기 반납을 결의하고 반납 절차를 논의하고 있었다.
이 소식에 접한 윤상원은 김영철, 정상용, 박남선과 함께 회의실인 부지사 실로 뛰어들어갔다. 박남선은 권총을 발사하며 무기 반납은 이적행위라고 소리치고, 김영철은 싸울 뜻이 없으면 도청을 나가라고 소리쳤다.
윤상원은 흥분 분위기가 가라앉자 자신의 입장을 천명했다. 그는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광주 항쟁, 국내외 정세, 투쟁의 방향, 정당성 등을 논리 정연하게 설파했다. 이어 그는 진압 작전이 두려워 무기를 반납하고 투쟁을 포기하면 역사의 죄인이 된다며 끝까지 힘을 합해 싸우자고 역설했다.
20∼30분간에 걸쳐 윤상원은 비장한 각오로 혼신의 힘을 다해 열변을 토했다. 사람들은 숙연한 자세로 경청했으며 일부 수습 위원들은 자리를 떴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윤강옥은 신들린 사랑처럼 얘기하는 윤상원의 의연한 목소리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며 오월을 위해서 태어난 인물이라고 말한다.
밤이 깊어 가면서 도청 내 에도 정적이 깃 들기 시작했다. 그간 끼니도 거르며 연일 활동 해 온 대부분의 도청 시민 군들은 피곤에 지쳐 가수면 상태로 빠져들었다.
윤상원 등 투쟁 지도부들은 결사 항전의 대응책을 논의하고 내일의 투쟁 방향 등을 준비하는 등 바쁘게 움직였다.
이렇게 해서 윤상원은 광주 항쟁 최후의 날을 맞이한다.
임낙평(전남 사회문제 연구소 연구원)
윤상원 열사, 도청 최후의 날
80년 5월 27일 새벽 2시 30분, 학생, 시민들이 7일째 점거하고 있던 도청에 비상 이 떨어졌다.
상황실에서 외곽지역 경비원들과 무전 교신이 몇 차례 계속된 뒤, 급히 모인 도청 시인 학생 투쟁 위원회(이하 투쟁 위)집행부 지도부는 상황실에 집결했다.
그 사이 투쟁 위원장 김종배(당시 조선대 생)는 중앙청으로 연결되어 있던 핫 트라인 으로 ‘계엄군 진압 시, 도청 지하실의 다이나마이트로 자폭하겠다’는 최후 항전 결의를 거듭 전했다. 무장 시민 군의 대표 격인 상황 실장 박남선은 작전계획을 상황실 참모들과 급히 수립하기 시작했다. 외곽지역으로부터 총성이 간헐적으로 울리며 가깝게 다가오고 있었다.
대개 수면 중이거나 가수 상태에서 비상을 맞은 시민 학생들은 도청 앞뜰 무기고 주변에 몰려들었다.
무기고 옆에는 YWCA에서 온 대학생들과 궐기 대회 준비팀·투사 회보팀 등 70여명의 청년 ·학생들이 새로 무기 지급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고교생들도 군데군데 끼어 있었다.
투쟁 위 대변인 윤상원이 그들 앞에 섰다. 윤상원은 그들을 정렬시키면서 차렷, 열중 쉬어, 앉아, 일어서를 반복했다.
"고교생, 너희들은 나가라. 우리가 싸울 테니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그래서 역사의 증인이 되어라."
고교생 몇 명이 한쪽으로 나가자 그는 대열을 보고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저 전두환 살인 집단에게 도청을 내준다면 우리는 죽어 간 영령들과 역사 앞에 죄인이 됩니다. 우리가 비록 저들의 총탄에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최후의 순간까지 굳게 뭉쳐 싸워야 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총과 탄약을 기다리는 시민 군들의 가슴속에, 뼈 속 깊이 스며들어갔다.
그의 연설은 시민 군들의 체념과 절망적인 분위기를 뒤바꿔 놓았다. 투사 회보팀의 일원으로 무기를 지급 받기 위해 그 자리에 갔던 들불 야학 출신 나명관은 ‘너, 총 쏠 수 있냐’며 망설이던 윤상원의 자상한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무기 지급이 끝나고 각기 작전 방향으로 흩어졌다. 그 즈음 이미 계엄 공수 부대가 도청의 지척에 와 있었고 수시로 연발 사격을 퍼부었다.
윤상원은 투쟁 위 기획 실장 김영철, 기획 위원 이양현등 일단의 시민 군들과 도청 좌측 민원실 2층 회의실에 자리잡았다. 계엄군은 대체로 커다란 저항 없이 도청 근방까지 조여 온 것이다.
새벽 4시가 넘어갈 무렵 2∼3m 간격으로 창가를 응시하며 적정을 살피고 있던 윤상원과 이양현은 이렇게 패배하는구나 하는 심정으로 서로 말을 걸었다.
"우리 저승에서 만납시다. "
"저승에서 다시 만나더라도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민중을 위해 일합시다. 학생운동도 하고 노동운동도 합시다. "
"이렇게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던 10여 일간의 광주, 이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겠소"
"우리 영원한 친구가, 동지가 됩시다. "
생사의 갈림길에서 몇 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동년배인 두 사람의 대화, 윤상원과의 마지막 대화는 총성 소리에 묻히고 다시 3∼4분의 정적이 흘렀다.
정원수의 윤곽을 알아 볼만큼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순간, 회의실 뒤편에서 나 어린 시민 군이 뒷편이 무너졌다며 황급히 뛰어왔다. 그때 콩 볶는 듯한 총성이 창문을 통해 안으로 쏟아졌다.
‘아이쿠’ 소리와 함께 윤상원이 쓰러졌다.
도청 시민 학생 수습 위원회 대변인 윤상원의 고귀한 청춘은 민주의 제단에 그렇게 바쳐졌다.
박관현 은신처에 전화, "투쟁조적 재편하라"
5월 18일 아침 라디오뉴스를 통해서 윤상원은 계엄 확대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즉시, 청년 운동가와 재야 인사 등에게 전화해 그들이 예비 검속 되거나 피신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아침을 먹고 난 후, 윤상원의 광천동 자취방에는 뜻밖에 계엄 수사 당국의 검거를 피한 전남대 총 학생회장 박관현과 일행 두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근처 빈 공터에서 그들은 잠시 동안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두고 협의했다. 윤상원은 계엄 수사 당국의 최대의 표적인 박관현이 섣부른 행동을 하지 말 것, 학생 ·시민 대중이 거리로 나오면 지체없이 지도할 것 등을 제안했다.
두 사람은 진행되는 사태의 추이를 주시 해 가며 서로 연락하기로 하고 해어졌다. 박관현이 가장 신뢰하는 선배 윤상원. 이날 두 사람의 만남은 최후의 만남이 되어 버렸다.
윤상원은 광주의 학생 ·시민들의 절대적 호응과 지지를 받는 박관현 등이 연행되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집을 나섰다. 우선 김상집(5 · 18사건으로 후일 구속, 녹두 서점 김상윤의 동생)을 찾아가 형님이 연행되었음을 알리고 녹두 서점을 지키며 제반 연락을 받도록 했다. 그리고 그는 발길을 전남대 방향으로 돌렸다.
오전 10시경, 전남대 정문 앞에서 학생 시위가 약속처럼 이뤄 졌다. 그러나 대학에 진주한 공수부대는 그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리 무자비한 진압을 자행했다. 학생들은 분노했고 급기야 시내로 진출했다. 학생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시민들도 적극적으로 호응해 주었다. 금남로 가 차단되고 기동 경찰대에 의해 거리는 최루가스로 자욱했다
윤상원은 시위 대열을 따라 다니며 그 소식을 녹두 서점에 전했다. 그리고 화염병을 제조하도록 김상집 에게 지시했다.
오후로 접어들어 화염병이 등장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사람들에게 화염병은 극히 생소한 것이었다. 그러나 화염병이 터질 때마다 학생 ·시민들은 환호를 보냈다.
투입된·공수부대는 시위 예방, 시위 진압 지침을 무시한 채 시민 포획, 옷 벗기고 구타 등으로 일관했다. 그들이 투입된 곳에는 유혈이 낭자하고 참혹한 광경이 벌어졌다.
윤상원은 시위 현장을 쫓아다니며 이러한 광경을 수 없이 목도했다. 그는 투쟁 지도부, 시민 홍보, 투쟁 방법론도 없이 싸움이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태풍의 눈이 되어 있는 박관현의 은신처에 전화를 걸었다. 총무 부장 양강섭이 전화를 받았다.
"예비 검속(연행)을 피한 학생회 집행부의 조직을 투쟁 조직으로 확대 개편하고, 시가지 투쟁 에 나서야 한다. 또한 화염병을 만들어 시가지 투쟁 현장에 배급해야 한다. "
양강섭은 윤상원이 화염병의 제조 방법까지 상세히 설명하더라고 기억하고 있다. 양강섭은 윤상원의 제안에 대답만 할 따름이었다. 이미 학생 투쟁 조직은 와해되었고 박관현도 광주를 빠져나갈 즈음에 있었기 때문이다.
18일 오후 늦게 박관현과 몇 사람이 광주를 빠져나갔다. 양강섭은 다음날도 윤상원의 위와 같은 전화를 받았으나 그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어서 단지 대답만을 했을 따름이었다.
여하튼, 윤상원은 항쟁 초기부터 가장 적극적으로 항쟁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농촌 출신 평범한 대학생의 변신
윤상원은 1950년 전남 광산군 임곡면 신룡리 천동 부락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윤석동씨와 김인숙 여사 사이의 3남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윤개원(尹開源, 현재 망월동 5월 묘역의 묘비가 윤개원 으로 되어 있음). 장성한 후 부친께서 자녀들의 이름을 개명해, 그를 윤상원(尹褙源)으로 불렀다.
소년 상원은 일제하 사업을 하셨던 조부닝의 덕택으로 그리 어렵지 않은 환경 속에서 조부님,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부모와 가족 곁을 떠나 광주에서 북 중학교, 사례 지오 고교를 다녔다.
어릴적 부터 활달하고 쾌활하여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였다. 고교 시절 무전여행을 할만큼 진취적이었고 여고생을 사귀고 친구들과 어울려 술 담배도 배우는 등 조숙한 학생이었다. 태권도 유단자의 실력을 보유하였으며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품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학교 성적은 좋은 편은 아니었다. 초등 학교 3학년부터 할머니와 아버지로부터 일기 쓰기를 지도 받은 이래 고교 시절까지 일기를 써 자기 삶을 정리하고 반성하는 것이 체질화 되었다.
1971년 삼 수의 고행을 거쳐 전남대학교 정치 외교 학과에 입학하였다.
입학과 동시에 그는 대학 연극 반에 친구들과 함께 들어갔다. 그는 연극에 심취했다. 극예술을 통해서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였으며 사람을 사귀고 대화를 나눴다.
72년 입대하기 이전까지 연극 반 활동을 열심히 했다. 그의 연극 반 활동은 그의 인생의 밑바탕을 형성해 주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대학 시절 이후 가장 가까운 친구와 선후배들을 연극 반 주변에서 만났다.
그의 삶의 전환점은 75년 그가 군을 제대한 이후 선배 김상윤(민청학련 사건 관련 구속 자, 5 · 18당시 예비 검속) 과 의 만남을 통해서였다. 이미 그는 군 말년에 민청학련사건으로 충격을 받았다. 군 시절 그는 그의 부친께 보낸 편지에서 ‘ 애국적인 동료 학생들이 수난을 당하는 현실에 비하면 자신의 군 생활은 편하다’고 썼고 제대하면 정의롭게 살 것이라고 다짐했다.
복학과 함께 그는 김상윤을 만났다. 김상윤을 만나면서 그는 인간과 세계 역사와 진실, 현실과 자아를 새롭게 깨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가 즐기는 테니스가 ‘부르조아’ 스포츠라는 것을 깨닫고 쉽게 그것을 버렸다.
김상윤 등 민청 관련 석방자들은 학교에서 제적당해 구속 자 협의회를 결성, 학생운동 및 제반 사회 운동의 토대를 갖기 위해 활발한 논의와 토론을 하였다.
김상윤은 윤상원 등 재학생들과 사회 과학 학습 모임을 시작했다. 윤상원은 이 모임에서 정열적으로 활동하면서 노동운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졸업을 앞두고 그는 현실적 고뇌에 휩싸였다. 그의 뜻대로 라면 노동 현장으로 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오랜 고민과 숙고 끝에 솔직 담백하게 말했다.
"취직한다. 그러나 취직하는 것은 시골 부모님에 대한 마지막 효도이다 시골 부모님에게 양복 입고 출퇴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그는 그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 ‘고삿 길 달음박질(골목의 이 집 저 집에서 돈을 꿈)’을 해 온 어머니의 뜻을 저버리는 것은 자식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78년 졸업과 동시에 취직되어 주택은행 봉천동 지점으로 발령 받아 광주를 떠났다.
노동자 윤상원, 돌불 야학 교사 윤상원
직장을 6개월만에 그만두고 다시 하광한 윤상원은 그해 10월 광천 공단 내의 한남 플라스틱(주)에 일용 노동자로 취업했다. 현장을 떠난 운동은 관념이며 현장이 중심이 될 때우리 운동은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운동론에 입각, 그는 노동 현장에 투신했다. 광주 ·전
남 지역에서 그가 세칭 ‘위장취업자’의 1호로 기록될 만큼 당시로서는 현장 투신이 드물었다.
그즈음 또한 그는 7∼8년 연하의 후배 대학생들이 운영하는 ‘들불야학’에 참여해 달라는 제의도 받아들였다.
그리고 간단한 짐을 꾸려 들불 야학과 가까운 광천 시민 아파트(빈민 아파트)에 방1칸을'삭월세로 얻어 입주했다. 그 방은 야학에 다니는 노동자들의 공동 방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삶의 엄청난 반전이, 채 1년도 못되는 사이에 윤상원 에게 진행되었다. 윤상원 스스로 자신의 길을 택했다.
그는 궁극적으로 이 지역 노동운동의 기반을 다져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그가 참여한 들불 야학은 그해 7월 문을 열어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들불 야학은 이 지역 최초의 본격적인 민중 야학, 노동 야학이었다.
들불 야학은 박기순(당시 국사 교육학과3년, 강제 휴학 중 그해 12월 25일 과로로 숨짐), 신영일(당시 국사 교육학과 2년, ‘88년 5월, 민주화 활동 중 숨짐 국사 교육학과 2년, 88년 5월, 민주화 활동 중 숨짐 ) 등과 서울에서 휴학하고 내려온 야학 경험자들에 의해 창설되었다. 들불 야학은 광천 공단 주변에 있는 광천 천주 교회 교리 실을 교실로 사용하였고, 그후 6개월 후 교회와 인접한 광천 시민 아파트의 방을 세내 두 반을 운영하였다. 이 아파트에는 지역 사회 개발 운동(오늘날의 빈민 운동)을 위해 77년 입주한 김영철 부부와 박용준이 활발히 사업을 전개하고 있었다.
윤상원은 이런 객관적 조건을 가진 들불 야학과 아파트 지역 빈민 운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눈부신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들불 야학의 수업 지도 및 총체적 관리, 광천 공단 노동자 실태 조사의 기획(78. 12∼79. 2), 아파트 지역 빈민 운동에의 참여, 김상윤 등 청년 운동가들과의 만남, 노동운동 소그룹 활동 구상 기획, 직장 출근(그해, 1월 양동 시장 신협 직원으로 취직), 학생 운동가들과의 만남 등으로 정신없고 숨가뿐 나날이었다.
이곳 광천동 들불 야학에서 그는 80년 전후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민족 민주 운동 선상에서 활동하는 많은 후배들을 만났다. 박기순, 신영일, 박관현, 박용준 등 열사들과 김영철, 박효선, 전용호(현 문화 운동가, 출판사 경영), 서대석(오월동 지회 활동), 고희숙, 김경옥, 이영주, 배환중(교육 운동) 김상전 정재호 동근식(청년운동) 등 많은 활동가들의 정신적 지주가 윤상원 이었다. 그는 주위의 권유가 있었지만 결혼도 유보한 채, 때로는 야학
공동 방에서 맨 간장 하나에 식사하면서도 힘겨워 하지 않았고 노동자인 야학 학생들의 아픈 곳을 더듬어 주는 가장 친근한 형이었다.
삶의 공동체, 독특한 광천동 들불 야학 문화의 공동체가 있었다. 거의 매일 만나는 사람들이었지만 서로 어루만져 주고 아껴 주는, 나누어 먹고 나누어 쓰는 문화, 윤상원은 그것을 들불 공화국이라고 술좌석 같은 데에서 말하기도 했다. 유신 독재의 말기적 탄압이 계속되고 그 여파가 야학에도 떠밀려 왔지만 들불 야학은 의연하게 그것을 이겼다.
"투사회보를 만들자"
5월 18일 저녁, 녹두 서점을 거쳐 광천 동 집으로 귀가한 윤상원은 들불 야학의 교사들을 만났다. 야학 교사들은 이날 일요일인데도 야학에 나와 야학 주변 청소년들과 운동을 했다. 시내가 심상치 않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윤상원 선배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윤상원은 시내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시민의 입과 귀가되자 면서 유인들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윤상원의 말 즉 단호한 의도와 심사숙고가 곁들어 있어 이견의 제시 없이 통과되었다. 통금 단축 등의 상황 때문에 19일부터 제작하기로 하고, ‘절대보안’을 지킬 것을 서로 약속했다. 그가 문안을 작성하고 박용준이 필경 하며 야학 교사들이 등사 및 배포하기로 했다.
I9일 저녁 핏빛 거리에 비가 내렸고,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공수부대의 잔학한 만행을 전하는 소문들이 전 시가를 휩쓸었다.
이날 밤 들불 야학팀이 제작할 전단에는 이런 내용이 그대로 실렸다. ‘전두환 일파는 민족 반역의 살인극을 중단하고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라.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싸워 나가자.’ 이러한 윤상원의 생생한 목소리가 문자화되어 시가지 투쟁에 그대로 전달되었다.
20일, 시위 상황은 광주 항쟁 전기간 동안 가장 치열한 날이었다. 이날 시위는 종일 시내 각처에서 진행되었고 저녁 운전기사들의 차량 시위로 시민들의 사기는 절정에 달했다. 또한 공수부대의 만행도 가장 극심한 날이 어서 사상자들이 많이 발생했다.
시위가 치열하게 격화될수록 전단 제작팀인 들불 야학 성원들의 일손은 바빴다. 16절 갱지에 수동 등사기로 밀어야 하기 때문에 1만장을 인쇄하기 위해서는 똑같은 원 지를 10여장씩 써서 등사해야 했다. 초기에는 야학 교사들만 참여했으나 20·21일 넘어서면서 야학의 학생 (노동자)들도 참여했다. 방안에 촛불을 켜고 철야로 그들은 작업을 했다.
원고를 써 오고 제작된 전단을 가져가 배포하면서도 윤상원은 시민 홍보의 부족함을 느꼈다. 그래서 시위 현장에 있다가 근처의 인쇄소에 들어가 즉석에서 전단을 제작, 배포하기도 했다.
21일 오전 녹두 서점을 거점으로 운동권 사람들이 광주의 사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숙의 하였다. 투쟁 지도부의 싹이 움트기 시작한 것이다. 윤상원을 필두로 김영철, 정상용(한국회 의원) 이양현(현 한겨레신문 지사장) 박효선 (현 극단 광대 대표) 정해직(현 교사 운동가) 윤강옥(현 오월 동지 회장)김상집 등과 다수의 학생들이 모였다. 항쟁을 외부에 알리는 문제, 투쟁 지도부 구축, 시외 통화 개통 및 방송국 접수 문제 등이 논의되었다.
이날 1시 도청 앞 집단 발포로 이러한 논의의 틀은 깨졌다. 계엄 공수들의 살육으로 광주가 초토화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윤상원은 녹두 서점을 찾아온 전용호와 광천동 전단제작 장소로 발길을 옮겼다.
"시민 홍보 작업을 조직적으로 전개해야 한다. 투쟁의 방항을 설정하고 시민들의 행동 방향, 무장 시위대의 임무 등을 제시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들은 민중 언론 ‘투사 회보’를 간행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문안 작성은 윤상원, 전용호가 맡고, 필경은 필체가 좋은 박용준, 동근식이, 물자 조달 등사 배포는 2인1조가 되어 김경국, 정재호, 서대석, 김성섭, 나명관 등 20여명 내외의 학생들이 담당했다.
투사 회보는 21일부터 26일까지 총9호가 간행되었다. 16절 갱지의 양면에 등사된 투사 회보는 볼품없이 조잡한 것이었지만, 새로운 소식에 목말라 하는 시민들에게 사실을 알려주는 유일한 소식지였다. 피해 실상, 집회 홍보 시민의 행동 방향, 투쟁 방향, 요구와 주장 등의 내용을 담아 매회 1,2만장씩 등사되었다.
투항 파 수습 위에 대한 비판
계엄 공수 부대가 퇴각한‘해방 광주’는 닷새 동안의 피 비린내나는 투쟁의 성과였다. 도청이 점령되고 전 시가지 일원이 시민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날, 오후부터 녹두 서점에 청년 학생 운동 세력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사령탑 격인 윤상원은 이날 진행되는 모든 사항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며 뛰었다.
저녁에 윤강옥, 정해직, 김영철 등과 송백회 여성들 박효선, 김태종 등 극단 광대 패의 성원들, 안길정 등 학생 운동가들, 들불 야학의 성원 일부가 모였다. 그들은 투쟁 지도부가 없고 무장 세력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며 이미 계엄사 정보 당국의 분열 공작이 시작되었다며 일차적으로 시민 궐기 대회를 꾸미는 것과 시민 홍보에 주력하자는 윤상원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튿날인 23일 오전 10시경, 그는 윤강옥 등과 함께 학생 수습 위원장인 김창길을 만나 서로 도우며 일하고자 제의했다. 그리고 궐기대회의 개최와 시민 홍보 부분을 자신이 청년 학생 운동 세력과 맡겠다고 했다. 그러나 김창길은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
시민 수습 위나 학생 수습 위는 무기 반납, 피해의 최소화, 질서 회복, 헙상 등의 입장으로임하고 있었기에 윤상원의 얘기가 반가 울리 없었다. 수습 위 내에도 그것이 부당하다며 항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윤상원은 수습 위 내의 무장 세력과도 만나 이 같은 취지를 말했는데 그들은 호의적이었다.
이날 오후 3시 도청 앞 광장에서 윤상원 등의 준비에 의해 민주 수호 범시민 귈기 대회가 개최되었다. 전날의 집회와는 내용과 형식면에서 달랐다. 전두환 처단 계엄 철폐 김대중 석방 등 프래 카드가 내걸 렸고 계엄 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끝까지 투쟁할 것 등이 시민 대중과 함께 외 쳐졌다.
이렇게 민주의 열정이 충만한 시민들의 호응을 받으면서 26일까지 5차례에 걸쳐 진행된 이 궐기 대회는 무장 시민 군의 사기를 진작시켰으며 계엄군 부의 진압을 지지하는 강력한 힘이 되었다.
23 · 24일 궐기대회가 종료되고 반성 및 평가 모임이 YMCA에서 연이어 개최되었다. 윤상원을 중심으로 정상용, 이양현, 김영철, 정해직, 박효선 등 지도부들은 향후 투쟁의 방향 등을 심도있게 논의하고 불철저한 도청 ‘수습위’를 혁파하고 새로운 투쟁 조직을 결성하기로 했다.
그들은 향후 투쟁 목표로 ①최규하 정부의 퇴진 ②계엄 해제 ③전두환 처단 ④구속 자 석방 ⑤시민 명예 회복 및 사상자 피해 보상 ⑥민주 정부 수립 등을 설정했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 목표를 쟁취하기 위해서 ①시민 궐기 대회의 지속적 개최 ②도청 수습 위에 참여하여 강력한 투쟁 지도부의 결성 ③청년 학생들의 무장 화 및 무장 시민 군과 합세 ④무기 반납 결사 반대, 협상 반대 ⑤투쟁의 타 지역 확산 등의 투쟁 방향에 합의했다.
당시 도청 내 시민 수습 위와 학생 수습 위는 수습 방향을 놓고 연일 격론을 벌이고 있었다. 일방적 수습, 무기 반납 질서 회복 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 결사 항전을 주장하는 사랑들과의 대립이 첨예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도청 상황실 등 무장 세력들은 항전을 주장하는 편이었다.
윤상원은 22일 이후 연일 도청에 들어가 밤낮없이 활동했다. 궐기 대회팀, 홍보팀 등은 필요할 때 짬을 내서 만나고 다시 도청으로 들어갔다. 윤상원 에게는 투항파 수습 위를 축출하고 강력한 투쟁 지도부 결성을 위하여, 사전에 도청 내에서 조정 작업을 하는 중대한 임무가 주어 졌다. 그는 김종배, 허규전 등 학생수습 위 일부와 박남선 등 상황실 무장 세력과는 입장의 일치를 봤다.
이날 저녁 7시경, 학생 수습 위 회의가 무기 반납, 질서 회복 등으로 기운다는 소식을 접한 윤상원은, 공방이 벌어지고 있는 회의실로 뛰어가 끝까지 민주주의를 사수하기 위해 결사 항전할 것을 역설하였다.
이날, 저녁 9시쯤, 윤상원,정상용, 김종배, 허규정 등이 모여 투항파를 배제한 시민 학생투 쟁위원회의 결성에 합의하고 조직과 책임자 인선 등을 마무리했다.
위원회 간부들은 위원장 김종배, 외무부 위원장 정상용, 내무부 위원장 허규정, 기획 실장 김영철, 기획 위원 이양현, 윤강옥, 대변인 윤상원 등이었다.
윤상원은 투쟁 위 결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스스로 투쟁 위의 대변인을 자청하고, 정상용 등 동료들은 순발력이 뛰어나고 가장 정화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 그를 대변인으로 밀었다.
윤상원등 지도부의 미국인식정도
이즈음 윤상원을 비롯한 투쟁 지도부는 미국의 개입, 즉 미 항공모함의 내항, 미국의 동향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논의했다. 그들은 미국이 전두환의 살육 만행을 묵인 방조하는 제국주의적 속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고 인식하였지만 한편으로 전두환 일파가 군을 장악하지 못했다고 보고 미국이 살인 군부에 지지를 보낼 것인가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당시의 시민 대중들은 친 미 반공 의식에 젖어 있어 반미의 문제를 섣불리 제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미 항공 모함의 입항을 전두환 군부의 견제로 해석해 대자보나 궐기대회를 통해 발표하였다. 거기에는 미국이 살인 군부의 만행을 저지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담겨 있었다. 윤상원 등 일부는 광주 주재 미국인들의 소재를 파악하고, 불리한 상황이 전개될 때 그들을 체포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다.
26일, 항쟁 지도부의 대외적 창구 ·광주 시민들의 대변자 윤상원은 두 차례의 내 외신 기자 회견을 가졌다. 그에게는 광주 항쟁의 진실을 세계 만방에 알리고, 항쟁의 확산을 꾀하며, 도청 투쟁 위의 공신력을 획득하게 하는 것이 의무였다.
도청 투쟁 위 집행부는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느라 숨 돌릴 겨를 없이 바쁜 일정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이 날은 계엄군 진압 임박 설이 파다하게 퍼져 시민들의 표정에는 긴장과 불안이 역력한 가운데 저녁이 되었다.
오후7시경, 도청 회의실에서 일부 수습 위원들과 김창길 등 구 학생 수습 위원들이 무기 반납을 결의하고 반납 절차를 논의하고 있었다.
이 소식에 접한 윤상원은 김영철, 정상용, 박남선과 함께 회의실인 부지사 실로 뛰어들어갔다. 박남선은 권총을 발사하며 무기 반납은 이적행위라고 소리치고, 김영철은 싸울 뜻이 없으면 도청을 나가라고 소리쳤다.
윤상원은 흥분 분위기가 가라앉자 자신의 입장을 천명했다. 그는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광주 항쟁, 국내외 정세, 투쟁의 방향, 정당성 등을 논리 정연하게 설파했다. 이어 그는 진압 작전이 두려워 무기를 반납하고 투쟁을 포기하면 역사의 죄인이 된다며 끝까지 힘을 합해 싸우자고 역설했다.
20∼30분간에 걸쳐 윤상원은 비장한 각오로 혼신의 힘을 다해 열변을 토했다. 사람들은 숙연한 자세로 경청했으며 일부 수습 위원들은 자리를 떴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윤강옥은 신들린 사랑처럼 얘기하는 윤상원의 의연한 목소리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며 오월을 위해서 태어난 인물이라고 말한다.
밤이 깊어 가면서 도청 내 에도 정적이 깃 들기 시작했다. 그간 끼니도 거르며 연일 활동 해 온 대부분의 도청 시민 군들은 피곤에 지쳐 가수면 상태로 빠져들었다.
윤상원 등 투쟁 지도부들은 결사 항전의 대응책을 논의하고 내일의 투쟁 방향 등을 준비하는 등 바쁘게 움직였다.
이렇게 해서 윤상원은 광주 항쟁 최후의 날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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