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대담 「5·18광주 의거 부상자 회」를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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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5·18광주 의거 부상자 회」를 찾아
「광주 의거」진상 규명과 명예회복은 민주화의 그날
어둠을 찢어 두 손을 잡고
금남로를 불태우던 오월아
땅바닥에서 침대에서
피와 피로 응어리진 날들아
차디찬 공포의 새벽
눈물로 끌려가던 도청 앞 광장아
진달래 피나만 무등산 기슭기슭
원혼되어 떠도는 사람아
일어나라일어나라
모두모두 깨어나 버리자
환희의 5월이 식기 전
더 잔인한 그날이 달려들기 전에.
▲5.18광주 항쟁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때, 깨어 있는 양심을 지닌 사람이라면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광주 의거 부상자들은 80년 5월 광주 민중 항쟁의 현장을 온몸으로 증언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선 부상자들이 함께 모여「5.18광주 의거 부상자 회」를 구성하게 되는 과정부터 말씀해 주시지요.
-본회는 모든 유신 잔당을 제거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광주 의거에 동참했다가 부상당한 사람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저희들의 처음 만남은 80년 당시 종합병원 내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엄청난 역사적 사건 속에서 같이 부상을 당한 우리들은 정당한 보상과 명예를 회복하고 부상당한 사유를 정확히 규명해야 했습니다. 그 후 병원에서 강제 퇴원을 당한 우리들은 정당한 보상과 명예를 회복하고 부상당한 사유를 정확히 규명해야 했습니다. 그후 병원에서 강제 퇴원을 당한 우리들은 상당한 치료 기간이 필요했고 또 생활고와 패배감에 빠져들기도 했지만 우리의 정신적, 육체적 상처를 회복하고 인권 회복을 위한 투쟁을 스스로 전개해야 한다는 결의 속에 1982년 8월1일 광주 무진 교회에서 창립 식을 거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5.18광주 의거」로 인해 부상당한 사람의 숫자는 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120여명에 지나지 않는데, 실제 숫자는 어느 정도에 이르고 있습니까?
-저희도 부상자에 대한 정확한 통계 숫자는 마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사 작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조건이지요. 그러나 2,500명 이상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병원 자료를 통해 확인된 사람 만해도 700여명이 넘습니다. 당국은 저희들이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인 80년 6월-7월경 합동 수사 반을 구성하여 협박과 유도 심문으로 조서를 받아 갔습니다. 그 조서를 근거로 120여명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부상자를 '폭도'라고 규정지었습니다. 광주 학살 책임자인 자기네들 입장에서 우리 모두는 부상자가 아니라 '폭도 '라는 것이지요.
도시 빈민 부상자 가장 많아
▲부상자들이 부상을 당하게 된 상황과 부상 정도, 그리고 그들의 신분은 다양하리라고 생각되는데요.
-초기 시위 과정에서는 계엄군의 곤봉과 칼, 그리고 군화 발에 의해 부상을 당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 후는 집안에 있다가 무차별 침입한 계엄군에 의해 부상을 당한 사람, 피난 중에 부상을 당한 사람, 총을 들고 끝까지 계엄군에 대항하다가 부상을 당한 사람등 부상 과정을 다양합니다.
머리가 깨진 사람, 정신이상이 된 사람, 양쪽 혹은 한쪽 눈을 실명한 사람, 복부 관통상을 입은 사람, 반신 불구나 전신 불구가 된 사람 등 많은 사람이 불구자가 되었습니다.
수집된 자료에 한계가 있지만 구속자 및 사망자 외 함께 부상자의 경우도 근로 빈민 행상, 노점상, 무직등 도시 빈민이 가장 많습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사망자 .부상자 중에 방위 병이 다수 있으며 10세 미만의 어린 학생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가족이 모두 부상을 당한 경우도 있습니다. 김용수씨는 80년 5월21일 부인과 어린 딸을 데리고 담양 방면으로 피난을 하고 있었습니다. 중간에서 계엄군의 검문을 받자 주민등록증을 제시하고 고향으로 가고 있음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광주로 차 방향을 돌리라는 살기 등등한 명령에 쩔쩔매면서 차를 돌렸습니다. 그런데 10m쯤 움직였을 때 등뒤에서 M16이 난사되어 어린 딸은 영영 불구로, 김씨 부부도 심한 부상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어린 소녀의 젖가슴을 뚫고 척추에 박힌 탄환을 아직도 제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상당한 후유증 계속돼
▲집안에 있는 사람, 어린애까지 부상을 입힌 행위는 아무리 관용을 해도 납득하기 힘드는군요. 지금 부상당하신 분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궁금합니다. 생활의 어려움을 겪고 있을 것 같은 데요. 치료나 보상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저희들은 완치되지 못한 채, 혹은 수술직 후 농과 고름이 질질 흐르는 상태로 상부(?)의 지시에 의해 강제 퇴원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후유증이 계속 발생하고 있습니다.
부상자들 중 극히 일부만 이재민 대책의 일환으로 제공되는 의료 보험 수첩을 발부 받고 있을 뿐 ,대다수의 부상자들이 '폭도'나 경상자라는 이유로 전혀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광주의 거의 진상을 규명하고 모든 피해자에게 정당한 보상을 하라고 요구할 때마다 저들은 사과와 대책 대신 감시와 연금, 연행으로 답할 뿐입니다.
부상자들 내부에서도 당장의 치료와 보상에 연연하는 사람과, 진상 규명 및 명예회복이 병행되어야 함을 주장하는 사람들 간에 이견이 존재합니다. 생활고와 후유증 치료라는 현실적 어려움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지요.
▲『광주 의거 부상자 회 』에 존재는 가해자인 당국의 입장에서는 '치명적 환부'로서 눈의 가시처럼 생각하고 위험시 할 것으로 생각되는데, 부상자 회에 대한 당국의 태도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저들은 부상자들이 일치 단결하여 대응할 것을 두려워하여 끊임없이 저희 내부를 이간 , 분열시키고 잇습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핵심은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 그리고 정당한 보상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상은커녕 회원에 대한 감시, 사찰 ,연행, 연금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특히 광주에 높으신 나으리(?)가 오거나 주요 행사가 있을 때면 몇 사람은 광주 시외로까지 연행 당하기도 합니다. 지난 2월 대통령이 광주에 올 때, 강원도 삼척, 제주도까지 임의동행(?)당한 사례도 있습니다.
▲본회의 회장이신 이지현 씨가 폭력 혐의로 구속되었다고 하는데 그 사건을 자세히 말씀해 주시지요.
-이지현씨는 광주 의거 당시 왼쪽 눈을 실명한 분으로 작년 8월 정기총회에서 회장으로 피선되었습니다. 평소 광주 의거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분이지요. 금년 2월 대통령이 오게 되자 경찰은 이씨의 소재 확인 및 감시를 시작했습니다. 2월15일 이씨가 부상자 회의 공식 월례회에 참석하기 위해 집 (화순)을 나서자 경찰이 집으로 강제 귀가 시켰습니다. 그런데 지서장과 정보 경찰이 안방에까지 들어 왔어요. 이씨가 인권 침해와 자녀 교육상의 문제를 제기하며 나가 줄 것을 종용했으나 저들은 응하지 않았어요. 이에 분을 참지 못한 나머지 '나가'라고 호통을 치면서 칼로 지서장을 찌르기에 이르렀습니다. 80년 5월 이후 이씨에 대한 불법적 인권침해는 수없이 많았는데 쌓이고 쌓인 의분이 폭발한 것입니다.
다시 살아나 80년 5월
▲자난 3월30일 신민당 개헌 현판 식때 행해진 광주 민중 투쟁은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었는데 유가족이나 부상자들은 매우 감회가 깊었으리라 생각됩니다. 80년 광주 항쟁의 좌절로 인한 정신적, 신체가 패배감을 씻어 내는 계기가 되지는 않았는지요.
-80년 광주 항쟁 이후 6년만에 다시 도청 앞 광장에 앉아 보는 날이었습니다. 사실 광주 항쟁의 좌절 이후 패배감과 허무감은 더 할 나위 없이 컸습니다. 이렇게 끝나면 안 되는데 하고 애태우던 안타까움과 5월27일 새벽 '며칠만 더 광주를 지킵시다'고 방송하며 시인의 잠을 깨우던 한 여성의 외침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6년만에 다시 도청 앞에 몰려든 30-40만의 인파는 80년 5월의 의지가 그대로 살아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동안 아픔과 패배감을 서서히 극복해 왔지만 이 날은 민주 실현의 날이 얼마 멀지 않았음을 확신케 하는 날이었습니다.
▲지금 광주 의거의 사망자와 부상자들은 당국에 의해 '폭도'로 규정 당하고 있습니다. 광주 의거의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은 우리 모두의 역사적 과제라고 생각됩니다. 「부상자회」는 내부의 어려움을 극복해야 함은 물론 광주 의거의 산증인으로서 엄청난 역사적 위상을 지켜 나가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우리는 생계 문제. 치료 문제. 보상 문제 등에 대해 내부 의견차를 비롯,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습니다. 이 어려움은 같은 역사적 사건 속에서 부상을 당한 우리가 '동지적 형제애'를 회복할 때 해결되리라 생각하며 그분들의 뜻을 따라 우리의 행동을 정해 나갈 것입니다. 광주 의거의 진상을 규명하고 진정한 보상과 명예회복이 이루어지는 날은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그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5월을 창조하기 위한 기폭제가 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정말 광주 의거의 진상 규명은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날에만 가능하리라 생각됩니다. 『5.18광주 의거 부상자 회』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민주주의 실현의 선봉에 서 줄 것을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광주 의거」진상 규명과 명예회복은 민주화의 그날
어둠을 찢어 두 손을 잡고
금남로를 불태우던 오월아
땅바닥에서 침대에서
피와 피로 응어리진 날들아
차디찬 공포의 새벽
눈물로 끌려가던 도청 앞 광장아
진달래 피나만 무등산 기슭기슭
원혼되어 떠도는 사람아
일어나라일어나라
모두모두 깨어나 버리자
환희의 5월이 식기 전
더 잔인한 그날이 달려들기 전에.
▲5.18광주 항쟁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때, 깨어 있는 양심을 지닌 사람이라면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광주 의거 부상자들은 80년 5월 광주 민중 항쟁의 현장을 온몸으로 증언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선 부상자들이 함께 모여「5.18광주 의거 부상자 회」를 구성하게 되는 과정부터 말씀해 주시지요.
-본회는 모든 유신 잔당을 제거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광주 의거에 동참했다가 부상당한 사람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저희들의 처음 만남은 80년 당시 종합병원 내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엄청난 역사적 사건 속에서 같이 부상을 당한 우리들은 정당한 보상과 명예를 회복하고 부상당한 사유를 정확히 규명해야 했습니다. 그 후 병원에서 강제 퇴원을 당한 우리들은 정당한 보상과 명예를 회복하고 부상당한 사유를 정확히 규명해야 했습니다. 그후 병원에서 강제 퇴원을 당한 우리들은 상당한 치료 기간이 필요했고 또 생활고와 패배감에 빠져들기도 했지만 우리의 정신적, 육체적 상처를 회복하고 인권 회복을 위한 투쟁을 스스로 전개해야 한다는 결의 속에 1982년 8월1일 광주 무진 교회에서 창립 식을 거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5.18광주 의거」로 인해 부상당한 사람의 숫자는 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120여명에 지나지 않는데, 실제 숫자는 어느 정도에 이르고 있습니까?
-저희도 부상자에 대한 정확한 통계 숫자는 마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사 작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조건이지요. 그러나 2,500명 이상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병원 자료를 통해 확인된 사람 만해도 700여명이 넘습니다. 당국은 저희들이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인 80년 6월-7월경 합동 수사 반을 구성하여 협박과 유도 심문으로 조서를 받아 갔습니다. 그 조서를 근거로 120여명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부상자를 '폭도'라고 규정지었습니다. 광주 학살 책임자인 자기네들 입장에서 우리 모두는 부상자가 아니라 '폭도 '라는 것이지요.
도시 빈민 부상자 가장 많아
▲부상자들이 부상을 당하게 된 상황과 부상 정도, 그리고 그들의 신분은 다양하리라고 생각되는데요.
-초기 시위 과정에서는 계엄군의 곤봉과 칼, 그리고 군화 발에 의해 부상을 당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 후는 집안에 있다가 무차별 침입한 계엄군에 의해 부상을 당한 사람, 피난 중에 부상을 당한 사람, 총을 들고 끝까지 계엄군에 대항하다가 부상을 당한 사람등 부상 과정을 다양합니다.
머리가 깨진 사람, 정신이상이 된 사람, 양쪽 혹은 한쪽 눈을 실명한 사람, 복부 관통상을 입은 사람, 반신 불구나 전신 불구가 된 사람 등 많은 사람이 불구자가 되었습니다.
수집된 자료에 한계가 있지만 구속자 및 사망자 외 함께 부상자의 경우도 근로 빈민 행상, 노점상, 무직등 도시 빈민이 가장 많습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사망자 .부상자 중에 방위 병이 다수 있으며 10세 미만의 어린 학생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가족이 모두 부상을 당한 경우도 있습니다. 김용수씨는 80년 5월21일 부인과 어린 딸을 데리고 담양 방면으로 피난을 하고 있었습니다. 중간에서 계엄군의 검문을 받자 주민등록증을 제시하고 고향으로 가고 있음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광주로 차 방향을 돌리라는 살기 등등한 명령에 쩔쩔매면서 차를 돌렸습니다. 그런데 10m쯤 움직였을 때 등뒤에서 M16이 난사되어 어린 딸은 영영 불구로, 김씨 부부도 심한 부상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어린 소녀의 젖가슴을 뚫고 척추에 박힌 탄환을 아직도 제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상당한 후유증 계속돼
▲집안에 있는 사람, 어린애까지 부상을 입힌 행위는 아무리 관용을 해도 납득하기 힘드는군요. 지금 부상당하신 분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궁금합니다. 생활의 어려움을 겪고 있을 것 같은 데요. 치료나 보상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저희들은 완치되지 못한 채, 혹은 수술직 후 농과 고름이 질질 흐르는 상태로 상부(?)의 지시에 의해 강제 퇴원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후유증이 계속 발생하고 있습니다.
부상자들 중 극히 일부만 이재민 대책의 일환으로 제공되는 의료 보험 수첩을 발부 받고 있을 뿐 ,대다수의 부상자들이 '폭도'나 경상자라는 이유로 전혀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광주의 거의 진상을 규명하고 모든 피해자에게 정당한 보상을 하라고 요구할 때마다 저들은 사과와 대책 대신 감시와 연금, 연행으로 답할 뿐입니다.
부상자들 내부에서도 당장의 치료와 보상에 연연하는 사람과, 진상 규명 및 명예회복이 병행되어야 함을 주장하는 사람들 간에 이견이 존재합니다. 생활고와 후유증 치료라는 현실적 어려움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지요.
▲『광주 의거 부상자 회 』에 존재는 가해자인 당국의 입장에서는 '치명적 환부'로서 눈의 가시처럼 생각하고 위험시 할 것으로 생각되는데, 부상자 회에 대한 당국의 태도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저들은 부상자들이 일치 단결하여 대응할 것을 두려워하여 끊임없이 저희 내부를 이간 , 분열시키고 잇습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핵심은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 그리고 정당한 보상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상은커녕 회원에 대한 감시, 사찰 ,연행, 연금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특히 광주에 높으신 나으리(?)가 오거나 주요 행사가 있을 때면 몇 사람은 광주 시외로까지 연행 당하기도 합니다. 지난 2월 대통령이 광주에 올 때, 강원도 삼척, 제주도까지 임의동행(?)당한 사례도 있습니다.
▲본회의 회장이신 이지현 씨가 폭력 혐의로 구속되었다고 하는데 그 사건을 자세히 말씀해 주시지요.
-이지현씨는 광주 의거 당시 왼쪽 눈을 실명한 분으로 작년 8월 정기총회에서 회장으로 피선되었습니다. 평소 광주 의거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분이지요. 금년 2월 대통령이 오게 되자 경찰은 이씨의 소재 확인 및 감시를 시작했습니다. 2월15일 이씨가 부상자 회의 공식 월례회에 참석하기 위해 집 (화순)을 나서자 경찰이 집으로 강제 귀가 시켰습니다. 그런데 지서장과 정보 경찰이 안방에까지 들어 왔어요. 이씨가 인권 침해와 자녀 교육상의 문제를 제기하며 나가 줄 것을 종용했으나 저들은 응하지 않았어요. 이에 분을 참지 못한 나머지 '나가'라고 호통을 치면서 칼로 지서장을 찌르기에 이르렀습니다. 80년 5월 이후 이씨에 대한 불법적 인권침해는 수없이 많았는데 쌓이고 쌓인 의분이 폭발한 것입니다.
다시 살아나 80년 5월
▲자난 3월30일 신민당 개헌 현판 식때 행해진 광주 민중 투쟁은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었는데 유가족이나 부상자들은 매우 감회가 깊었으리라 생각됩니다. 80년 광주 항쟁의 좌절로 인한 정신적, 신체가 패배감을 씻어 내는 계기가 되지는 않았는지요.
-80년 광주 항쟁 이후 6년만에 다시 도청 앞 광장에 앉아 보는 날이었습니다. 사실 광주 항쟁의 좌절 이후 패배감과 허무감은 더 할 나위 없이 컸습니다. 이렇게 끝나면 안 되는데 하고 애태우던 안타까움과 5월27일 새벽 '며칠만 더 광주를 지킵시다'고 방송하며 시인의 잠을 깨우던 한 여성의 외침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6년만에 다시 도청 앞에 몰려든 30-40만의 인파는 80년 5월의 의지가 그대로 살아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동안 아픔과 패배감을 서서히 극복해 왔지만 이 날은 민주 실현의 날이 얼마 멀지 않았음을 확신케 하는 날이었습니다.
▲지금 광주 의거의 사망자와 부상자들은 당국에 의해 '폭도'로 규정 당하고 있습니다. 광주 의거의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은 우리 모두의 역사적 과제라고 생각됩니다. 「부상자회」는 내부의 어려움을 극복해야 함은 물론 광주 의거의 산증인으로서 엄청난 역사적 위상을 지켜 나가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우리는 생계 문제. 치료 문제. 보상 문제 등에 대해 내부 의견차를 비롯,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습니다. 이 어려움은 같은 역사적 사건 속에서 부상을 당한 우리가 '동지적 형제애'를 회복할 때 해결되리라 생각하며 그분들의 뜻을 따라 우리의 행동을 정해 나갈 것입니다. 광주 의거의 진상을 규명하고 진정한 보상과 명예회복이 이루어지는 날은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그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5월을 창조하기 위한 기폭제가 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정말 광주 의거의 진상 규명은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날에만 가능하리라 생각됩니다. 『5.18광주 의거 부상자 회』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민주주의 실현의 선봉에 서 줄 것을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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